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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21) : 피카소 Picasso, Pablo Ruizy (1881-1973)
마르지 않는 조형(造形)의 샘
아비뇽의 아가씨 1907년 캔버스 유채 245X235Cm 뉴욕 근대 미술관 소장
입체파에 들어선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흔히들 이 작품을 두고 20세기 회화 사상 가장 주목할 작품이라고 들 하는 것은 이 그림에는 기하학적 포름으로 환원된 인체와 반추상의 형태가 나타난 까닭이다. 최초의 습작에는 나부들 속에 두 사람의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것은 창부의 집이었을까. 한 남자는 뱃사람이고, 다른 한 남자는 두게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다. 두개골이 죽음의 상징인 까닭에 필경 피카소는 남녀의 영원한 육체의 연옥을 그리려고 했을 것이다. 차츰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자들만이 남았다. 이 작품은 형태상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강한 호소도 보인다.
인생
이 그림의 스케치에는 남자의 얼굴이 피카소 자신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인생>에는 피카소의 얼굴이 없어지고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바르셀로나 시대의 동료 화가이며, 1900 년 가을 피카소와 함께 파리의 땅을 최초로 밟은 사이인데, 실연한 나머지 자살 미수 소동을 벌인 장본인이다. 이 사건 때문에 피카소는 카사헤마스를 데리고 급히 파리를 떠나야만 했고, 피카소는 이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 없어 <인생>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배경 위의 그림은 고갱풍이고, 아래쪽 웅크린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 시대의 중요한 모티브인 부성애와 청춘의 격렬한 사랑의 표시를 표출시켜 '인생 축도'의 한 다면을 보인 또 하나의 걸작이다.
늙은 기타수
피카소의 이 시기가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다.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의 그늘이 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하다.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붙어 있다. 노인은 장님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다림질하는 여인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다림질하는 여인>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 쪽 어깨를 강조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 있게 하고 있다. 여인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씩씩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어부의 이별
노란색과 푸른색이 아름다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청색 시대'의 경향인 이 작품은 짙은 모성애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파리의 술집 광경이나 스페인의 어느 바닷가 같은 곳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테마를 그리던 시기에서 이 작품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생략된 풍경이 쓸쓸하고 허전하여, 오히려 그것이 짙은 모성을 느끼게 한다. 피카소는 예술이란 고통과 슬픔에서 낳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별이란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국풍의 오르가니스트
얼굴을 옆으로 하고 왼쪽 어깨가 강하게 불거져 있으며, 양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있는 이 늙은 손풍금 타는 사람에게서 젊은 피카소가 매혹당했던 카다르니야의 로마네스크 미술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목조각 같은 노인과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년과의 대조를 준 것은 보는 이의 가슴에 무엇인가 여운을 준다. 손풍금을 중심으로 하여 노인과 소년을 삼각형으로 배치한 구도는 화면을 시원하고 안정되게 하고 있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오랜 세월에 퇴색한 것 같은 색조이면서 밝고 소박하다는 것이다.
카날 부인의 초상
얼굴의 부분들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신체는 큼직 큼직하게 처리한 것은 피카소가 제작한 초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표정과 거의 반원형에 가까운 신체의 선과의 대조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검정, 갈색, 황토색 등을 주조로 한 색조에서는 피카소에 흐르는 스페인 사람의 피를 보는 듯하다. 피카소의 뛰어 난 데상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이나,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의 타고난 천분이 번쩍이고 있다.
가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푸른 옷의 여인
1901년 마드리드에 머문 피카소는 일련의 부인상을 연작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모자를 쓴 무용수 같은 여인들로서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콤포지션도 대담 하지만 묘사력도 능란한 작품이다. 피카소의 부친이 피카소에게 인물을 묘사할 때는 특히 손을 정확히 그리라고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도 왼쪽 손의 묘사가 뛰어난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 때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인물이 주제로 되어 있는 데, 그 많은 인물 작품들에서 보여 주는 것은 손의 멋진 묘사력이다. 90도 각도로 뻗은 팔과 양산을 잡은 왼손만 보아도 이 모델의 활달한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아비뇽의 아가씨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직접적으로 힌트를 준 것은 이 벨리아 조각과 흑인 조각이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오른 쪽 여인의 얼굴 습작이며 다분히 흑인 조각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가면을 쓴 여인으로서 가면 뒤 쪽의 목 처리로 보아서 가면에 숨겨진 머리는 가면보다, 훨씬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왜 <아비뇽 의 아가씨>의 오른쪽 두 여인의 코를 그렇게 과장해서 그렸으며, 또 삐뚤게 했을까. 피카소는 이렇게 말을 남기고 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의 삐뚤어진 코를 보고 그들의 코는 삐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 형제
'분홍색 시대'는 1905년에 시작되어 주조색은 오크로 루즈이다. 이 작품은 1906년에 제작되었으며 또다른 <두 형제>라는 작품과 쌍을 이루고 있다. 소년의 몸은 언뜻 보기에 해부학적인 정확성이 결여된 것같이도 보이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의 몸으로 사실성이 있고 따뜻한 색이 더욱 즐겁다. 피카소가 이 시기에 있어서는 처음 모델을 정확하게 묘사한 다음 점차적으로 자기화한 제작 방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초상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특징적인 소년을 표현하고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피카소가 오늘날에 있어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된 그 뿌리는 '피카소화'라는 조형적 역량일 것이다.
앉은 나부
앉은 나부로 되어 있지만 의자의 형태도 분명치 않아, 실제로는 여인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볼륨 표현이 극도로 억제되어 있는 까닭에 남자로도 보여진다. 이 작품은 <아비뇽의 아가씨들> 전후에 제작된 일련의 나부상으로서 단순 명쾌한 화면이 특징이다. "회화는 나 보다 힘이 세다. 회화는 생각하는 대로 나를 질질 끌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경우 회화란 별 수 없이 형태인데, 그 스스로가 만들어 낸 형태가 피카소를 끌고 다니는 것만 같다.
긴 머리의 아가씨
이 작품이 제작된 1906년은 피카소의 필생의 걸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시작된 해이며, 또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벨리아 조각을 처음 만난 해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이때부터 '청색 시대' 때의 섬세한 감각을 떠나, 중량 감 있는 한 덩어리로서의 육체 표현을 했다. 청색 시대가 도회적 세련된 감각이라면, 프리미티브 (primitive)한 태양에 그을린 건강한 '흑인 조각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와 '흑인 조각 시대'는 같은 시기여서 이때 묘사된 여인의 육체는 조형적으로 씩씩하고, 그 힘참 속에 원시의 생명력이 숨어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지극히 조각적이라는 점이다. 평면 구성이라기보다는 입체 구성이며, 여기에서 큐비즘의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배와 과일 그릇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가트루드 스타인은 스페인과 큐비즘의 내적인 관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의 건물은 언제나 풍경의 선을 단절시키고 있다. 인간의 영위 또한 여기에서는 풍경과 조화한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풍경과 적대 관계이다. 바로 이 점에 큐비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지." 큐비즘이 세 잔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나 스타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이 작품에서도 세잔의 정물을 보다 의식적으로 입체화한 것이니까. 큐비즘, 그것은 형태가 화면을 지 배한다. 그것은 자립한 형태, 독자의 묘미이며 허구의 세계이다.
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올가는 러시아 육군 대령의 딸로서 1912년에 디아기레프 발레단에 있었다. 피카소는 1917년 이탈리아 여행 중 올가를 만나서 이듬해인 1918년 7월에 결혼하였는 데 시인 쟝 콕도, 아폴리네르등을 초청하였다. 피카소가 올가를 맞이한 후부터 그 생활은 규칙적이 되었고, 의복도 단정하게 변하여 그의 벗들을 놀라게 했다. 피카소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 어린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분히 앵그르풍의 리얼리즘이 보인다. 이 밖에도 올가를 그린 작품들이 있으나 그표정들은 한결같이 우수에 잠겨있다.
마 졸리
우리들은 어떤 물체를 한눈에 모든 각도에서 볼 수는 없으나, 큐비즘 작품들은 어느 정도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형태들을 상호 침투하면서 공간을 전개하며, 정지하지 않고 조용히 호흡하는 것은 분석적 큐비즘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합적 큐비즘 시대에 들어서면 화면은 또다시 조용해진다. 다시 평면적인 데로 복귀하는 것이다. 색채의 수도 많아지며, 물론 그 색채란 화려하지 않고 친숙하며 소박한 분위기로 감싸여 진다. 시인 폴 엘뤼아르는 큐비즘에 있어서 "색이란 공간에서 낳아진다기보다는 '색' 그 자체가 공간인 것이다."라고 했다. 분석적 큐비즘 다음에 제작된 비교적 차분한 작품이다.
앉아 있는 피에로
1917년 쟝 콕도의 무용극 '파라드'의 무대 장치와의 상을 맡아 피카소는 무대 위의 인물들에 크게 흥미를 지녔다. 이 발레의 무대 막은 비현실적인 강력한 색채로써 만들어졌다. 그와 같이 이 작품도 노랑, 빨강, 주홍과 같은 소리 높은 색채들이 피에로의 하얀 의상에 흩어져, 비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피카소 '청색 시대' 때도 피에로를 즐겨 그렸으나, 대상이 같다고 하더라고 그 결과는 판이한 것을 보여 준다. 청색 시대의 피에로가 현실이 모습이며 그래서 공감을 더했다면, <앉은 피에로>는 실인생과 무대의 상이한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피에로는 인형일 뿐이다.
소의 두개골
피카소는 1946년 12월 이렇게 말했다. '밤의 빛의 효과는 매우 매력적이다. 자연 광선보다는 더 좋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서도 밤에 한 번 찾아와 주기 바란다. 대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광선, 내 그림을 둘러싸고, 뒤 벽에 비치는 깊은 그늘, 이 빛을 당신은 내가 거의 밤에 제작하는 정물화에서 발견할 것이다. "전쟁 중에 피카소는 인간이나 두개골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한 점이다. 또 4월 16일에는 피가 흐르는 두개골, 새하얗게 바랜 염소의 두개골을 흑백의 단순한 구성으로 제작하였다. 흑과 백, 낮에 대한 밤, 폭력에는 결코 굴할 수 없는 피카소의 저변이 있다.
앉은 아를캥
이 그림의 모델은 피카소의 벗인 화가 살바드이다. 피카소는 그를 아를캥으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한결같이 초상화로서의 성향이 짙고, 차분히 가라앉은 인물화였다. 아를캥은 원래 이탈리아 희극의 어릿광대 역이나, 여기에서는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엄숙한 분위기마저 보인다. 피카소의 연구가들은 살바드의 정면상 아를캥과 독일 르네상스의 화가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 <안느 드 크레브>와 비교를 하고 있으나, 오히려 앵그르의 초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튼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꿈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1923년 피카소는 이 해에 졸고 있는 여인을 많이 제작했다. 피카소의 말대로 정면상과 프로필이 일체가 되어 감상 자의 기분에 따라서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꿈>은 그것들 시리즈 중의 걸작이다. 정면상과 프로필의 이중 상은 형체의 묘미와 동시에 현실과 꿈의 이면성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소나무 아래의 나부
1955년의 <알제의 여인들>이나, 57년의 <궁녀들>의 연작에서 어느 것이든 실내가 무대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나부를 풍경 속에 배치하고 있다. 나부의 육체의 선은 배경의 언덕의 선과 하나로 되어 있다. 소나무 가지는 화면 오른쪽 앞에 푸른 그늘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무는 대지 그것인 양 엷은 갈색이며, 피카소의 저의는 '대지=어머니' 라는 것으로만 보인다. 피카소 이때 나이는 78세였다.
앉은 여인
1920년이래 이따금 피카소는 남 프랑스의 앙티브 지방들을 들르고 있었다. "나는 예언자라고 자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실 내가 여기에 와서 놀란 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이 일찍이 내가 파리에서 그리던 그 모든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일찍이 내것이었다고 말해야겠다."라고 피카소는 말 했다. 피카소의 독특한 조각적인 형태를 말하여 지중해적인 인간의 특색이라고도 한다. 피카소가 그린 여인은 지중해의 여신이며, 푸른 배경, 거침없이 당당한 여성상, 피카소에 있어서는 그림이란 우상에 가깝다.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
"나는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카메라처럼 한 가지 주제만을 좇는 화가가 아닌 까닭에,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전쟁이 존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필경 후세 역사가들은 내 그림이 전쟁의 영향 아래서 변화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나, 이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피카소는 이와 같은 피카소다운 말을 남겼다. 피카소는 1930년 말, 브뤼겔이나 고야의 <전쟁의 참화>를 거쳐, 이어지는 유럽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경고라도 하듯이, 전쟁의 암시적 주제를 많이 택한 것이다. 피카소에 있어서 역사는 이러한 무수한 희생에 의하여 성립되는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아침의 곡
오바드(aubade)란 말은 어떠한 사람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집 앞에서 새벽에 연주하는 주악을 말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아침의 곡>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둡고 불길하다. 옆으로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같고, 만돌린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꼬박 밤을 새우고 외롭게 보인다. 1942년 피카소는 61세로서 이 해에 <옆으로 누운 나부> 연작을 발표했다. 그것은 피카소 작품에서의 얼굴의 경우와 같이 이중 상으로서 구성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피카소의 일관된 조형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후일에 제작된 걸작 < 납골당>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화가의 초상
화가와 모델
여인과 개
피아노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은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이라는 관계에서 화가에게 있어서는 영원 주제의 하나에 틀림 없다고 피카소가 말했다. "나는 나부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사람이 단순하게 나부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 "화가에게는 끝이 없다. 오늘은 작업이 끝났으니, 내일은 휴일이라는 것이 화가에게는 없다. 가령 화가가 제작을 중지하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화가는 화면 속에 '끝'이라는 것을 써넣을 수가 없다." 방법은 한 가지, 즐기면서 제작하는 도리밖에 없다.
지중해의 풍경
손수건을 쥐고 우는 여인
'우는 여인'은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시작된다. 피카소를 매료시킨 주제로서 <게르니카>완성 후에도 피카소는 여러 점 제작했다. 피카소는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다.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울부짖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더 많다. 배경의 검은 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기호적 눈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아동화같이 소박하고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납골당
<게르니카> 이후 가장 주목할 작품이다. 1946년 2월 파리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예술과 혁명'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사한 스페인 무명 전사를 추도하는 전시회이다. 납골당의 내부는 회색과 보라, 푸른색의 3색으로 요약하여 이 정적한 톤은 <게르니카>의 경우와 같이 색채의 잔소리를 극도로 억제하고 정신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묶여진 팔, 어린 아기의 목,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 위에 지금 새벽이 찾아오고 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찾아드는 아침은 자유의 커다란 아침이다.
파이프를 문 사나이
피카소는 프랑스와즈 지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방은 시메트리가 아니다. 무엇이나 그러하다. 여성은 누구나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유방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현실적으로는 시메트리로 되어 있을지는 모르나, 회화에서는 똑같이 그려서는 안된다." 피카소에 의하면 두 개의 비슷한 것을 구별하는 하나의 팔, 하나의 유방이 나타내는 제스처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얼굴, 피카소의 인체는 남녀 구별 없이 온갖 제스처의 집적이다. 그러면 피카소가 그린 인간은 산산조각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형태는 연쇄 반응과 같이 밸런스를 허물어뜨리고, 균형을 만드는 것으로, 이 작품의 경우에서는 눈, 코 와 파이프와의 관계이다.
실베트의 초상
실베트는 피카소가 리베라에서 알게 된 젊은 아가씨로서 그는 12점의 연작을 만들었다. 실베트는 금발의 북 유럽계 미인으로서 피카소는 그녀를 회색의 단조로운 색조로 처리하였으며, 이것이 연작의 최대 매력이기도 하다. 연작 속에는 실베트를 입체파 시대와 같은 기하학적인 포름으로 환원하여, 그녀의 얼굴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품격도 있고 사실적인 화면으로서, 피카소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 소녀의 머리형에 매혹 당한 듯하다. 피카소의 인물화로서는 새로운 양식이기도 하다. '포니 델'이라는 유행하던 머리형에 착안하는 등, 과연 피카소 다운 인기의 비밀이 있다.
궁녀들 (벨라스케즈에 의한)
벨라스케즈의 <궁녀들>은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며,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된다. 1952년 계획하여, 실제로 착수한 것은 1957년이었다. 이 해에 피카소는 연작 44점을 제작하였다. 피카소는 "같은 주제에 의한 연작으로 최초의 두 점 중의 한 점, 최후의 두 점 중의 한점을 최고의 작품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57년 8월 17일에 완성한 첫 번째 작품으로 검정, 흰색, 회색만으로 처리하였으며, 벨라스케즈의 원작과는 화면의 규격이나 내용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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