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
〈몸을 기울인 발레리나〉
Bailarina basculando (Bailarina verde)|
에드가 드가 〈몸을 기울인 발레리나〉
1877-1879, 종이에 파스텔과 과슈, 64x36cm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서양 미술은 아마 인상주의 작품일 것이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같은 인상주의자들의 그림과 그들보다 조금 나중에 등장한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같은 후기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은 달력부터 시작해서 광고나 책 표지 등 각종 매체로 재생산되어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대규모 미술관에서 잊을 만하면 열리는 인상주의 전시 역시 매번 성황리에 치러진다. 왜 이렇게나 인상주의의 인기가 높을까 생각해 보면, 중세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미술처럼 그 시대의 역사나 이야기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된다거나 현대미술처럼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 알기 힘든 것이 아니라, 무엇을 그렸는지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고 그림의 내용을 알기 위해 무엇인가를 (성경, 신화 혹은 유럽의 역사) 특별히 더 알아야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부담 없이 그림을 보다 보면 색채의 아름다움, 빛의 다양함, 과감한 구성까지도 함께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라는 작품을 당시의 평론가가 혹평하면서 나온 것이다. 당시에는 회화란 어떤 불멸의 것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해가 뜨는 순간의 르아브르 항구를 엷은 물감으로 그린 모네의 그림은 마치 그리다 만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점, 하루의 어떤 순간을 보이는 대로 잡아낸 것이 우리가 인상주의 그림을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인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진과 일본 판화의 영향이다. 당시 유럽과 일본의 무역 교류가 증가하면서 일본의 판화가 유럽으로 많이 유입되었는데, 일본 판화의 특징 중 하나는 서양의 회화와는 달리 주제가 되는 형체가 화면에서 잘려 있기도 하고, 대상을 보는 시선의 위치가 과장되게 위에 있다든가 화면의 한쪽을 훤히 비워놓는 것이었다. 이에 자극 받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강가에 떠 있는 배가 화면 밖에서 막 들어온 듯 잘라서 그리기도 하고, 사람을 그릴 때도 팔이나 치마폭 등만 그리기도 했는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드가의 그림이 그렇다.
발레리나들을 그린 이 작품에서 몸과 옷이 모두 그려진 사람은 초록색 의상을 입은 소녀뿐이다. 나머지는 얼굴과 상체만 보인다든가, 치마와 다리만 보이기도 한다. 이는 사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상주의자들이 사물의 한 순간을 포착하려고 했던 의도는 사진의 특징과 잘 맞아 떨어지기도 했고, 이미 사진이 가지고 있던 순간을 잡아내는 재현 능력과 자유로운 시점을 보면서 기존의 고전적인 회화와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도시의 거리, 시골의 길과 풍경, 카페의 한 순간, 극장이나 공연장의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실제로 볼 수 있는 우리 주위의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 이것이 인상주의다. 인상주의자들이 그린 대상은 요즘 우리가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사진의 대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서양 회화의 주인공이었던 전지전능한 신과 위대한 영웅들은 사라졌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우리가 보는 그림에서처럼 공연을 준비하거나 무대 위에 있는 발레리나, 사적인 공간에 있는(목욕 중이거나 머리를 빗는) 여인들, 공연장, 카페의 장면을 주로 그렸다. 왜 그렇게 발레리나들을 자주 그리냐는 질문에 “왜냐하면 발레리나들만이 고대 그리스인의 움직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드가는 인체의 다양한 자세를 그리고 싶어 했다. 야외 장면으로는 말들이 있는 공간을 즐겨 그렸다. 유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파스텔처럼 빨리 그릴 수 있으면서도 풍부한 색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기도 했다. 유화는 주로 캔버스 천 위에 그리고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파스텔은 종이 위에 빠르게 그릴 수 있다. 그래서 드가의 작품 중에는 파스텔화가 많다. 그러나 파스텔이라는 재료는 가루가 날리고 표면에 달라붙지 않는 성질 때문에 보존이 어려운 재료이기도 하다. 미술관에서는 대부분의 유화가 별다른 보호막 없이 액자에 걸려 있지만, 파스텔로 그린 작품들은 유리판을 댄 액자에 걸려 있고 파스텔화가 있는 방은 조명도 더 어두운 이유가 그 때문이다.
스페인의 어떤 미술관보다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티센 미술관이다. 모네, 드가, 시슬리, 르누아르, 모리조 등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을 모두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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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
동역학과 정역학의 공존
목차
클래식과 모던의 조화를 꿈꾼 화가
대립의 긴장감을 통한 조화
미술의 정물성에 대한 도전
드가,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 1878년, 캔버스에 유채, 81×76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정역학은 물체 내부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고, 동역학은 물체의 거시적 이동을 다루는 학문이다. 역학은 외부의 힘을 받은 물체가 내부적 스트레스(stress), 외부적 스트레인(strain)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1834~1917)가 그린 많은 발레 그림은 겉으로는 동적인 운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드가 그림의 특색은 내적이고 정적인 긴장을 함께 표현하는 것이다. 스트레인을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증가한다. 드가 그림의 매력은 바로 이 대립에서 오는 긴장감에 있다.
클래식과 모던의 조화를 꿈꾼 화가
드가는 1834년 프랑스 파리의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복하게 자라나 다른 화가들처럼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미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 위해 명문 루이르그랑 학교에 들어갔으며, 드로잉에서 발군의 실력을 나타내며 졸업했다. 1853년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만두고, 1855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미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술 애호가이면서 열린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드가는 미술학교에서 앵그르를 만났고 그의 조언대로 드로잉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루브르 박물관에서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에 이르는 작품을 700점 이상 모사하는 훈련을 했다.
드가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마네와 친해졌고 마네를 중심으로 모이던 인상파 화가들과도 친해졌다. 과거와는 다른 현대성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여 마네가 주도하는 인상파전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7회 한 번만 빼고는 계속 참가하였다.
그러나 드가의 화풍을 인상파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화풍을 정교한 드로잉과 고전적 구성에 바탕을 두었기에 순간의 빛을 포착하는 데 전념한 인상파에 동화될 수 없었다. 그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며 고전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키려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대립의 긴장감을 통한 조화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을 보면 마치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느낌이 든다. 이 그림에는 등장인물이 모두 일곱 명인데, 연습 중인 세 명의 발레리나와 휴식 중인 두 명의 발레리나, 한 명의 귀부인(아마도 어느 발레리나의 엄마일 것이다), 그리고 화면 속 유일한 청일점인 발레 교사 쥘 페로이다.
드가는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로 그의 인생에 여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어리고 예민한 시기에 곁을 떠난 어머니로 인해 여성으로부터의 박탈감이 여성혐오증으로 발전한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귀부인, 무희, 가수, 배우 등 많은 여인을 그렸다. 그가 그린 어린 발레리나나 배우의 자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인 모티브가 담겨 있다. 하늘거리고 투명한 무용복 때문에 소녀들의 육체가 더욱 인상 깊다.
발레는 고전과 현대를 조화시키려는 그에게 아주 적절한 주제였다. 그리스인들이 인체로부터 추구하였던 조화와 통일의 미학이 현대의 발레리나에게서 잘 나타난다. 당시 발레 그림은 장식적인 효과가 있어서 상당히 잘 팔렸다.
당시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는 인물을 대담하게 클로즈업시키고 중요 오브제(objet)를 과감하게 자르는 화면 구성과, 단순하고 선명한 색상 등으로 프랑스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우키요에의 판화는 고전적 미술 교육을 철저히 받은 드가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에서도 오른쪽 소녀의 몸이 예기치 않은 화면 절단으로 반이나 잘려 나가고, 배경은 동양의 병풍처럼 몇 개의 수직과 수평선으로 구획되었다.
19세기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
19세기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
드가의 예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대립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립되는 두 오브제 사이의 불안한 균형에서 오는 긴장감을 드러낸다. '바쁜 동작을 하고 있는 연습생들 vs 휴식하는 사람들', '발레와 관련 있는 사람들 vs 발레에 관심 없이 신문을 읽고 있는 부인', '여자 vs 남자', '하얀색 vs 검은색' 등 몇 개의 대립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대립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화면의 가장 가운데에 갑자기 텅 빈 공간을 설정한다. 이렇게 그의 그림에서는 주제와 거리를 둔 소외된 존재가 종종 나타난다.
드가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자주 쓰는 기법인 거울도 사용했다. 화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큰 홀의 나머지 부분에 서 있는 참관인 중의 몇은 발레에 관심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드가는 그들이 보고 있는 창밖의 파리 풍경을 뒷부분의 거울에 그려 넣었다.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은 우연히 포착된 한 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성이 면밀하게 계산되었다. 순간적인 발레 동작의 동적 불안정은 검은 색채의 무게까지 더한 귀부인의 정적인 안정과 대립된다.
드가, 〈발레 수업〉, 1871년, 패널에 유채, 19×27cm,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드가의 또 다른 발레 그림 〈발레 수업〉을 보면 왼쪽에는 사람들이 너무 치우쳐 있고 검은색의 무거운 피아노까지 있지만 오른쪽에는 불안한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연습에 열중하는 소녀들이 있고 등을 긁는 소녀가 있다. 이렇게 조화롭지 못한 구도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아주 면밀하고 의도적인 계산 위에 이루어 놓은 긴장된 대립이다.
미술의 정물성에 대한 도전
드가, 〈관중석 앞의 경주마들〉, 1866~68년경, 캔버스에 유채, 46×61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드가는 운동감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는 발레와 함께 당시 붐을 일으킨 경마에도 관심이 많아 경마장, 경주마, 기수 들의 그림도 많이 그렸다. 경주마를 그린 그림인 〈관중석 앞의 경주마들〉을 보면 모두 출발선에 정렬해 있는데 맨 끝의 말은 제어불능 상태로 날뛰고 있다. 관람자의 시선은 가운데 서 있는 심판의 말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날뛰는 말까지 가서 왼쪽에 모여 있는 관중을 살피다가 다시 말들을 따라 순환한다. 이것은 그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운동성이다. 발레리나건 경주마건 모두 그에겐 동작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였다.
당시 영국의 사진가 머이브릿지(Eadweard J. Muybridge, 1830~1904)는 순간의 연속동작을 사진을 통해 가시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열두 대의 사진기를 말의 주행로에 설치하고, 말이 각 사진기 앞을 지나며 끊는 선에 사진기의 셔터를 연결하여 25분의 1초 속도로 열리고 닫히도록 장치했다. 그 결과 말의 순간동작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제리코, 〈엡섬에서의 경마〉, 1821년, 캔버스에 유채, 91×122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머이브릿지, 1878년 12월 14일자 플아스 신문 「라 나튀르」에 게재된 〈달리는 말〉
이 작업 결과가 1878년 12월 14일자 프랑스 신문 「라 나튀르」에 게재되었고, 이전에 그려진 말의 움직임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제리코(Jean Louis Ardré Théodre Géricault, 1791~1824)의 〈엡섬에서의 경마〉에서 두 앞발과 뒷발을 동시에 쭉 펴고 달리는 그림은 멋지게 보이지만 틀린 묘사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는 풍요로웠던 19세기 중반 파리 한량들의 생활 태도를 일컬어 '플라뇌르'(Flaneur)라고 했다. 플라뇌르란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을 말하는데, 드가야말로 플라뇌르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드가는 자신을 파리의 클럽이나 카페를 드나들며 문화적 토론을 즐기는 도시적 플라뇌르라고 생각했다. 스물아홉 살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잘 차려 입고 당당하고 거만한 풍모를 한 그의 플라뇌르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드가, 〈자화상〉, 1863년, 캔버스에 유채, 26×19cm, 포르투갈 리스본 미술관
드가는 카페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기억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화실에 돌아와서 화폭에 그렸다. 이제까지와는 매우 다르게 가까이 눈을 대고 본 장면이나 올려다 본 시선으로 파악한 화면을 창조했다.
드가는 전통적인 미술 교육 위에 인상주의, 일본 우키요에 판화, 사진술에서 받은 신개념을 왕성한 탐구심으로 받아들여 독특한 그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하였다. 유화뿐 아니라 파스텔·수채화·목탄 등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하였고 혼용 기법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말년에는 조각까지 손대어 몇 개의 뛰어난 조각도 남겼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조각에 천으로 진짜 무용복까지 입힌 청동 조각상은 그다운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드가는 자연보다 인공을, 순간보다 본질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로잉을 사랑한 화가였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드가는 드로잉을 진정 사랑했다"라고 새겨 달라고 부탁하고 1917년 9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드가, 〈소녀 무용수〉, 1879~81년경, 청동에 직물 스커트와 비단 댕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노동의 고단함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과 에밀 졸라 ‘목로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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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미술작품 속 여성 노동자
생동감이 주는 감동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미술작품 속 여성 노동자
동양과 서양을 모두 살펴보아도 19세기까지 노동자의 삶을 묘사한 그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술을 비롯하여 음악, 문학 등이 귀족 출신의 상류층이나 시민계급,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사정과 연관이 깊다. 특히 신분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에 미술은 왕족이나 귀족의 모습, 혹은 신화 속의 일화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농노의 삶은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없었다. 그나마 시민혁명 이후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조금씩 하층민의 삶이 캔버스에 담기기 시작했다. 인상파에 의해 미술이 화실 작업에서 야외 작업으로 바뀌면서 밀레의 작품처럼 농부의 모습이 캔버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그린 작품들은 적었다.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묘사한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19세기 대표적인 여성 노동은 세탁 공장에서의 빨래와 다림질이었다. 토지를 잃고 도시로 떠밀려 온 수많은 농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장에서의 육체노동뿐이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 그녀들에게 세탁 공장의 노동은 적은 돈이라도 만질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몇몇 화가들은 종종 세탁부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도 그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드가는 우아한 발레리나의 모습이나 목욕하는 여인을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일상의 노동에 찌들어 사는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의 삶도 외면하지 않고 작품에 담았다. 세탁부의 노동을 그린 작품이 14점이나 되는 것은 드가가 그녀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림질하는 여인
드가, 1884년
〈다림질하는 여인〉은 여성 세탁부를 다룬 14점의 연작 중 하나이다. 오른쪽 여성은 다림질을 하고 있다. 주름을 펴고 있는 중인지 두 손을 모아 다리미를 힘껏 눌러 가며 식탁보나 침대 시트로 보이는 옷감을 다리고 있다. 깊숙하게 숙인 고개에서 고단함이 뚝뚝 묻어난다. 그녀의 어깨와 팔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왼쪽의 여인은 피곤에 지쳤는지 졸린 눈으로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다. 앞에 세탁물과 다리미 대신 작은 물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림질을 할 때 옆에서 물을 뿌려 주는 보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병이 들려 있는데 병 속의 액체는 피곤을 쫓기 위한 포도주로 보인다. 다림질을 하고 있는 오른쪽 여성이 풍기는 긴장감과는 다르게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완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여인의 뒤편으로 난로가 흉물처럼 서 있다. 세탁 일을 위해서는 항상 뜨거운 물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다리미의 열기를 위해서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난로가 필요했다. 겨울이야 그렇다고 해도 가뜩이나 더운 여름에는 그녀들에게 난로가 괴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상상하면 다림질의 열기와 수증기로 후끈거리는 세탁소 안의 분위기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후덥지근한 실내에서 일하느라 옷도 대충 걸치고 화장은 신경조차 쓰지 못한 모습이 역력하다.
생동감이 주는 감동
이 그림에서는 드가의 특색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대체로 순간적인 움직임을 포착해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 준다. 특히 발레리나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작품에서 순간 동작의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마치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현실감이 살아난다. 〈무용 수업〉 〈무대 위의 무희〉 〈리허설〉 등의 작품을 보면 무희들의 역동적인 동작이 너무나 생생해서 춤 동작에 열중하고 있는 소녀들의 거친 숨소리가 전해져 오는 느낌이다. 통 속에 앉아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을 그린 〈목욕하는 여인〉도 순간적인 동작이 주는 생생함 때문에 마치 우리가 옆에서 여인의 몸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다림질하는 여인〉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의 여성처럼 그냥 다림질하는 모습만 있었다면 정지된 화면이 주는 고정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품을 하고 있는 여인의 표정과 몸짓이 극적으로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녀의 길게 늘어진 하품 소리가 가깝게 들릴 듯하다. 실내에 가득한 습기와 열기로 후덥지근한 세탁장 안에 함께 있어서 숨이 턱 막히고 우리 몸에도 땀이 날 것만 같다. 물론 생동감은 현장성을 중시한 대부분의 인상파 미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당대의 화가들 중에서도 드가는 현장성과 생동감이라는 면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 준다. 미술을 통한 연출력이 다분히 의도한 결과임을 드가가 친구에게 들려준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젊은 여인들을 그리는 이유는 피조물로서 한 인간이 그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네. 마치 고양이가 제 몸을 핥아서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누드화는 항상 관객의 시선을 염두에 두었지만 내가 그린 여인들은 정직하고 소박한 자신의 신체적 상황 외에는 전혀 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네. 이는 마치 열쇠 구멍을 통해서 몰래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네.”
같은 소재로 그린 다른 그림과 비교해 보면 드가의 특징이 더욱 잘 살아난다. 피카소의 〈다림질하는 여인〉도 세탁부의 고단함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로 이른바 피카소의 청색시대(The Blue Period, 1901~1904)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이 시기 피카소는 청색을 주로 사용해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을 표현했다. 당시 피카소는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는데, 거처할 곳이 없어 몽마르트르 언덕에 사는 친구의 방에 더부살이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삶에 더 공감을 했고 그들을 캔버스에 자주 등장시켰다.
피카소의 작품은 드가의 것과 같은 소재, 같은 제목이지만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드가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다림질을 하고 있는 여성이 피곤에 절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전체적으로 검게 묘사되어 있어서 피곤함의 정도를 더해 주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은 밤을 새워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두 손으로 다리미를 쥐고 세탁물을 다리고 있는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세탁장의 칙칙한 분위기도 비슷하다. 하지만 드가처럼 그 장소에 우리가 함께 있는 느낌은 아니다. 캔버스 속의 장면이 일정하게 대상화되어 있고 감상자의 눈으로 작품에 접근하도록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석고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을 비롯해서 당시 세탁부의 노동을 묘사한 많은 화가들의 그림은 다분히 에밀졸라(Emile Zola)의 대표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목로주점》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1877년, 이 소설이 발표되자 뜨거운 논란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매년 3~5만 부 정도씩 팔렸다고 하니 얼마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에밀 졸라를 자연주의 소설의 기수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목로주점》에는 찬사와 함께 비난도 쏟아졌다. 비판하는 이들은 “노동자 계급의 참상을 그려 노동자를 비하하고 중상하는 것”이라거나 “사회의 욕된 면과 저열한 면만을 극히 일방적 · 일반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비관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작품”이라며 경멸을 했다. 이 작품에 대해 에밀 졸라는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동자 계급을 그린 내 그림은 특별한 음영이나 바람도 시도하지 않고 그리고 싶은 대로 내가 그린 것입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말로 표현할 뿐입니다. 나는 상류층의 상처를 발가벗겼습니다. 하층민의 상처도 결코 은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로주점》은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세탁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소설에서 세탁 공장의 노동을 묘사한 다음 대목은 다림질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우리에게 보여 준다. 드가의 그림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클레망스는 서른다섯 장 째의 남자 셔츠에 줄을 대고 난 참이었다. 일거리는 넘칠 정도였다. 서둘러 해도 11시까지는 밤일을 해야 할 참이었다. 그야말로 작업장 전체가 한눈 하나 안 팔고 열심히 거세게 다리미질을 해댔다. 다리미 난로엔 또다시 코크스를 퍼 넣었다. 천장에 스커트와 식탁보가 널려 있어 숨이 막힐 지경으로 답답했다. 이 때문에 사팔뜨기 오귀스틴느는 침이 마르는지 혀끝을 입술 끝에 내밀고 있었다. 과열된 스토브와 쉰내 나는 풀, 다리미의 녹내가 목욕탕같이 후덥지근하게 무미한 냄새를 만들어 내는 한편, 열심히 일에 취해 있는 네 여자의 머리와 땀에 밴 목덜미에서 한결 더 강한 냄새가 섞여 나왔다.
당시 유럽은 우리가 흔히 야경국가라고 부르는 상태 그대로였다. 국가는 도둑 잡는 일이나 하고 시장과 공장의 운영에 대해서는 어떤 간섭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기업의 이윤 획득에 어떠한 제한도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처참해져 갔다. 임금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기업가가 가장 손쉽게 이윤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임금을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남성들의 노동으로 살림을 유지하다가 임금이 계속 내려가게 되면 이미 온갖 집안 일로 시달리고 있던 여성들도 공장에서 일을 해야 입을 풀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여성 노동은 남성 노동에 비해 훨씬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기업이 이윤을 손쉽게 확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지금처럼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도 없는 상태여서 무한정 장시간 노동이 이어졌다. 위의 소설 내용에도 언급되었듯이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 11시까지든 12시까지든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림에서 보이는 지칠 대로 지친 여성 노동자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동안은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다가 계속 임금이 내려가면 급기야 철부지 아이들까지 공장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동노동이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7~8세 정도만 되면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당시 영국의 관청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아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을 쇠사슬로 묶어 놓기도 했고, 심지어 채찍질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예술 작품은 종종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힘으로 작용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층은 노동자나 농민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경멸해 왔다. 마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비난을 쏟아냈다. 우리는 어떤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미술이나 문학은 노동자나 농민, 빈민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작가 자신의 내면에만 갇혀서, 혹은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를 구사하는 테크닉에 갇혀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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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 드가 Edgar Degas (1834~1917)
철저하게 집착하는 데상의 명수(名手)
예술가의 초상
19세기의 전형적인 초상화 양식에는 몸체와 두부(頭部)를 비스듬히 돌려 정면을 향하는 다소곳한 모습들이 자주 보이며, 드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초상화 역시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20세 무렵에 그린 19세기 서구의 전형적인 옷차림 새로 책상 위에 한 쪽 팔을 얹은 채 다른 한 손에는 밑그림 제작용 석묵(흑연)을 가볍게 쥔 모습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던 무렵 약관의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미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차례로 모사한 바 있는 까닭에서인지 그리스-로마의 양식을 답습함으로써 극히 정적이며 차가운 느낌을 주는 고전주의 회화의 경향이 이 작품에서 뚜렷이 엿보인다.
벨렐리 가족
이 작품의 특징은 섬세한 묘사의 고전적 화풍을 따르고는 있지만,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구도법에서 벗어난 특이한 점을 보인다. 화면의 오른편에 보이는 드가의 고모부인 벨렐리 씨는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뒷모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얼굴은 측면만을 보이며, 드가의 고모와 두 사촌 누이 동생들은 시선의 방향을 제각기 달리 하고 있다. 이것은 드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서 당시의 보수적인 화풍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파격적이며 대담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경직된 정면향의 자세보다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함은 현실의 실제감을 더욱더 강조하며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원래 드가의 회화적 특질은 강한 명암 대비, 활달한 윤곽 선묘, 특이한 시각에서 포착한 대담한 구도, 현실감 넘치는 소재의 선택 등인데, 이 작품에서 그는그 중 의도적인 대담한 구성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奏樂席의 악사들
전통적인 화법으로는 중점이 되는 소재를 강조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부수적인 요소를 끌어들인데 반해, 드가는 어떤 상황의 극적인 한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실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드가의 그러한 면이 비로소 인상주의 회화와 동질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주악석의 악사들에 초점을 두어 한참 연주의 절정에 달한 악사들의 진지한 모습을 담고 있다. 구도는 예의 '우끼요 에'의 영향 탓인지 전경은 의자의 등걸이 면과 간막이 선을 대각시켜 중앙부에 편중된 인물과 악기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춤추는 무희들을, 그 부분만을 그린 까닭은 그곳이 극장의 내부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함이며 또한 무희들에게 각광(脚光; foot-light)을 비춤은 환상적인 화려한 분위기를 조성키 위함이다. 이 작품의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해 보면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있어서는 드가의 관찰과 상상이 융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여인의 초상
이 여인상은 드가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중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지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 여인의 인상은 자신 속에 깊이 빠져든 채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는 느낌을 주며, 용모에 흐르는 차분한 기품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한다. 그러한 느낌의 요인은 어딘가를 향해 차분한 듯 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보이는 눈매, 오똑 솟은 콧날, 굳게 다문 입술, 모든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는 듯 곧게 세워진 귀, 학처럼 긴 몸 등 여인의 용모를 이루는 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조형화된 데서 비롯한다고 볼 것이다. 그것들과 더불어 가다듬어 틀어 올린 단정한 머리의 차림새가 여인의 청순미를 일층 고조시키고 있다. 르노와르처럼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적이 없는 드가는 유독 이작품에서만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애호가
도미에는 여러 점의 를 그린바 있는데, 드가가 이와 같은 소재를 택하게 된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 속의 벽면, 책상 위, 그리고 화판 속에는 여러 장의 작품들이 보이며, 모자를 쓴채 의자에 걸터앉아 자신의 수집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짙은 수염의 남자가 그려져 있다. 정면을 향해 쳐다보고 있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를 그린 드가는 굵고 활달한 필치로 채색하고 있다. 훗날, 드가는 화면에 자신의 의도에 따라 커다란 공간을 구성하곤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면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재래적인 공간 구성 법을 택하고 있다. 인물 상체의 배경을 밝게 채색한 것과 와이셔츠의 옷깃이 검은 옷에 비해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것은 강한 명도 대비 때문이며, 이로 인해 인물의 강인 한 인상이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국화의 여인
탁자의 곁에 팔을 기대 앉은 여인과 꽃들은 구도상 서로 양분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꽃송이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데 비해, 여인이 모습은 화면의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당연히 인물이 주제가 되고, 꽃은 부제가 될 터인데 드가는 이를 역이용하고 있다. 불균형의 면적비에 비해, 전혀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 보이는 짜임새는 드가만이 지닌 대담한 구도 설정의 재치일 것이다. 현란한 색채 및 갖가지 크기의 꽃이 한데 어울림이 부분적으로는 산만해 보이지만, 그 산만함이 오히려 여인의 모습과 표정에 시선을 끌게 한다. 또한 인물의 뒷배경을 창문 밖 멀리의 풍경이 내다보이게 함으로써 가득한 화면의 공간감을 확대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아노 앞의 디오孃
손에 붓을 쥐지 않고 어떤 대상을 바라봄과 그 대상을 그리면서 그것을 관조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의 것을 붙잡아 그대로 옮겨 놓으려고 들 하였다. 이를테면 그것은 전통적인 화법 즉, 어두운 실내의 조명 아래에서 제작함과 전통적인 관념을 구현하고자 함에서 벗어나, 실제의 대상이 지닌 생동감을 포착키 위해 예민한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적인 감흥을 옮기곤 하였는데, 드가 만은 그의 눈에 투영된 현실을 기억 속에 담아 이를 다시 정리하여 표현하곤 하였다. 이 작품은 여인 디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뒤돌아보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며, 단순화된 면들과 얼굴 쪽에 시선을 이끌기 위해 악보에 높은 명도의 흰색을 채색한 것이 돋보인다.
파강과 오귀스트 드가의 초상
이 작품에서는 참신한 구도를 모색하기 위해 드가가 골몰하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우선 기타를 가슴에 안은 인물은 파강인데 그의 몸체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정면이 아닌 측면향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의 인물은 드가의 아버지 오귀스트이며 그는 파강보다는 작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피아노 위의 악보면이 밝은 흰색으로 채색되어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파강과 동등한 비중을 보인다. 또 자유 분방한 거친 붓자국과 명도 조절의 효과 등은 드가가 인상주의적인 빛의 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예의 날카로운 붓자국의 면이 보인다. 이로 인해 여느 작품과는 또 다른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고빌라르 모리소 부인의 초상
드가는 데상에 대해, '데생과 정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라며 '앵그르의 장점은 조화에만 치중하는 다비드화파에 상반되는 아라베스크식의 형태로 반작용하는데 있었다.'고 한다. 앵그르부터 선묘에 대한 교훈을 얻은 드가는 이 작품에서 숙련된 경쾌한 선묘를 보인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팔을 기대 앉은 여인은 인상파의 여류 화가 베르트 모리소의 언니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도 여인의 피부가 드러나 보이는 부분에만 세밀한 묘사를 보일 뿐, 나머지 부분에는 굵고, 가는 선이나 거친면 등으로 대담하게 화면을 처리하고 있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배경의 면들과 유연한 자태의 인물은 심한 대조를 보인다. 그 강한 대조에 따라 시선이 자극되기 때문이다.
화실에서의 자메 티소
1860년대의 드가는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畵; 풍속화 판화)'의 영향으로 그의 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고전적인 좌우 균형을 이룬 안정감 있는 구도법에 익숙해 있던 드가는, 의도적으로 균형을 깨뜨린 것과 같은 불안정한 느낌의 '우끼요에'의 구도에서 새로운 회화 표현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전통적인 화법에서의 시각위치는 주로 관점자의 눈 높이인데 반해, 드가가 이 작품에서 시도한 구도는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이로 인해 원근감과 공간감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작품의 윗부분 벽면에 가로로 걸린 것은 일본의 풍속화이며, 이러한 풍속화는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이국 정서에 이끌려 자신들의 작품 속에 화제로서 끌어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드가도 예외 없이 그것을 이 작품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불쾌한 얼굴
지극히 도시적이며 인간적인 주제를 즐겨 택한 드가는 그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분위기 속에 처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한 갈망은 곧 그의 관심이며, 그것은 회화라는 형식을 빌어 그의 인간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드가가 택한 작품의 소재들은 드가 자신이 그것들을 향수하고 그것에서 미감을 구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소재도 당시의 여느 사무실에서 빚어진 미묘한 어느 상황에 초점을 둔 듯하며 성장을 한 젊은 여인이 책상에 앉은 남자의 곁에서 실쭉 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배경의 경마하는 장면의 그림은 날쌘 움직임과 밝은 색채로 어둡고 무거워 보이는 화면을 자극하며 두 사람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화면 뒤쪽의 창구와도 같은 것이 보임은 그들이 처한 실내가 은행임을 짐작케하기도 한다.
무용 연습장
대개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에 관한 연구를 거듭함에 비해, 드가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이 작품에서도 드가는 특정한 부분에 관심을 두고 그를 강조함보다는 무희들이 무용 연습에 열중하는 장면과 신발을 신거나 무용복을 입고 있는,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등 극히 일상적인 한 단면을 취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드가는 그것을 화면 속에 작위적인 짜임새로 집약함보다는 그 일부분만을 표현함으로써 실제감을 더욱 돋우는 효과를 거둔다. 역광이 투사된 실내 연습장에 발과 다리를 일직선이 되도록 곧추세워 준비 자세를 취한 무희를 필두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무희, 계단을 내려오는 무희 등과 다른 동세의 무희들이 그려져 있어 넓은 공간, 그리고 분주한 연습장의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로 막대를 잡고 연습하는 무희
'우끼요 에'가 드가에게 미친 영향은, 단순하고 정확한 선묘에 의한 날카로운 형태의 파악과 자유 분방한 구도 등이다. 그것은 통념의 범주에서 벗어난 의도적인 설정의 불안정한 구도를 말한다. 그 불안정한 느낌은 오히려 현실의 생생한 느낌을 강조하는데 주효하며, 그로 인해 드가는 그러한 방법을 자주 활용하는 것이다. 연습장의 벽면에 붙은 횡으로 된 막대를 붙잡고 다리가 90도를 이루도록 앞뒤로 들어올리는 연습을 하는 무희들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도 예의 에서 처럼 바닥면과 벽면의 면적 비의 차가 두드러짐과 사선(斜線)으로 기운 동감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중감(重感)때문에 전혀 불안정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마루 면의 얼룩이나 물뿜이까지도 넓은 공간의 불균형을 바로 잡는 요소가 되고 있다.
꽃다발을 든 무희
무대에서의 발레 연습
드가의 발레에 대한 중요한 관심은 넓은 공간에서 약동하는 무희들의 군상(群像)에 있었다. 즉 드가는 발레의 세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훗일 차츰 무희들의 개별적인 모습 쪽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연습실에서만 이루어지던 것에서 벗어나 실제의 무대에서 총연습에 임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드가는 이처럼 난무하는 무희들의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포착한 다음 그의 기억에 남은 인상을 아틀리에에서 제작하곤 했다. 드가의 그 박진함은 그야말로 기억의 세계를 통해 어느 정도 초현실적인 세계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중심의 무희는 발끝을 모아 제자리에 잘게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처음 펜으로 그렸던 것 위에 유화구로써 채색한 것이어서 펜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
애수
이 작품에서 드가는 무엇인가 형언키 어려운 슬픔에 잠긴 듯한 여인상을 그리고 있다. 거침 없이 뻗쳐진 날카로운 선묘를 보이고, 측면광은 안부(顔部)를 흐르게 하여 시선을 쫓고 있으며, 활달한 붓의 움직임과 회화용 칼의 흔적 등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드가의 작품 속에 반영되는 대개의 여인상들에서는 여성다운 가냘픈 면모를 찾을 수 없는데, 이 작품에서만은 고뇌어린, 그리고 고달픔이 담긴 여인의 자태가 보이고 있다. 어떤 깊은 의미가 내포된 듯한 슬픈 표정의 여인을 통해 드가는 그 자신만이 지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 작품 속에 반영하려 했던 점이 엿보인다. 여인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한 점과 활달하여 간략한 묘법으로 보아 다른 작품을 위한 습작 정도로 보여지기도 한다.
압상트
드가는 현실에서 보여지는 것을 조금도 그자신의 미관 (美觀)에 따라 임의로 변형치 않고 실제의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관조력이 냉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의 평범한 카페, 그 내부에 대리석 탁자가 놓이고 무표정하고 초라해 보이는 여자와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는 남자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우끼요 에'의 영향이 짙은 이 작품은 제작된지 17년이나 지난 1893년에야 발표되었다. 인물의 뒤쪽에 보이는 거울과 탁자의 가장자리 선 등이 사선으로 기움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차지하는 중감(重感)으로 알맞은 균형세를 이루고 있다. 압상트 술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인은 창녀이고, 이 두 인물의 모델은 드가의 친구 데브탱과 당시 미모의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고 전해진다.
장갑을 낀 여가수
18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드가는 카페를 자주 출입하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드가를 평소 존경하던 로트랙 역시 이 집의 단골이 되어 수많은 명작을 남기게 된다. 드가는 카페에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여가수를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다. 드가의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가수 한 사람만을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본 것처럼 크게, 그리고 자세히 몸의 일부만을 그리고 있다. 예의 각광을 받고 열창을 하는 이 여가수는 오른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배경의 화려한 커튼과 극명한 명도 대비를 이룬다. 가수를 근접한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그린 이 작품과 같은 경우는 드가의 작품 중 그리 흔치 않다. 아무튼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가 전혀 상반된 동적이며, 현실감 넘치는 표현을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기만 하다.
무대 위의 무희
꿈의 날개를 펴 보이는 듯한 이 무희의 자태는 높은 시각에서 포착되고 있다. 커튼 뒤로 가리워진 남자와 무희들은 간략하게 생략된 묘사를 보이며, 주가되는 무희 이외에는 자유 분방한 거치른 필치로 처리하고 있다. 배경의 오른쪽 저 멀리 산과 같이 펼쳐진 무대 장치는 전면의 공간감을 일층 확대시키며 무대 면과의 원근감을 강조해 주고 있다. 각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의상의 무희는 실제의 공연에 있어 주역인 듯하다. 이 작품에 관한 것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의 소장자였던 귀스타브 카이유 보트는 그가 임종하기 전 유언으로써 그의 소장 작품들을 나라에 기증키를 원하였지만, 그 당시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그것들의 대부분이 거절 당하였으나, 드가의 이 작품만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무용 수업을 받고 있는 장면
빠 드 트르와(세 사람이 함께 추는 춤)를 연습하는 정경을 그린 이 작품 역시 벽과 바닥의 공간 대비가 큰 차를 보인다. 화면의 왼편 상단부에는 세 사람의 무희가 몸의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거나 준비 자세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지도 선생인 듯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의 옆머리는 괴이하리만치 길쭉하게 보인다. 머리를 길게 늘여 뜰인 오른편의 무희는 곧 이어 배우게 될 무용 자세를 홀로 연습하고 있으며, 화면의 전경(前景)에는 어느 부인이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 무희의 보호자인 듯한 이 여인의 무관심한 모습이 무용에 열중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한다. 가까이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각 위치에서 포착한 구도가 특이하다.
디에고 마르텔리의 초상
드가의 친구 마르텔리를 그린 이 초상화는 널찍한 탁자 위에 화구들이 널리어져 있고, 그 곁의 의자에 걸터앉은 화가 마르텔리가 새로운 착상에 골몰하는지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이 작품에서도 드가는 예의 높은 시점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있다. 인물의 상반신은 평범하지만 하반신은 지나칠 정도로 작게 보이며 바닥 면에 널리어진 신발의 바닥 면이 들여다보이는 것 등이 드가가 높은 시점에서 대상을 포착하고 있음을 감지케 한다. 인물과 탁자는 수직으로 양분되어 있지만 그것들의 중감 때문에 전혀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드가는 일반적으로 현실감이 넘치는 등적인 자세에 매우 집착하지만, 초상화에서만은 극히 차분한 정적인 표현을 보이는 것이다.
뒤랑티의 초상
드가가 그린 대개의 초상화는 여느 주문에 의하여 그려진 것들이 아니다. 항시 그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드가 스스로가 그들을 그리고 있으며, 또 그것을 그들에게 선물하곤 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서의 주인공도 드가와 같은 시대의 비평가로서 드가 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뒤랑티는 '새로운 회화'라는 그의 평론을 통해 드가의 작품을 인용,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가는 그의 미망인의 생계를 돕기 위해 뒤랑티의 유품 경매에 자신의 작품 4점을 내놓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는 매우 절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서재 속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뒤랑티를 그린 이 작품은, 수많은 책들이 굵은 선과 면으로 어우러져 중심된 인물 쪽에 시선을 모으도록 하고 있으며, 얼굴에는 잘게 분할된 붓자국이 보이기도 한다.
분장실 속의 무희
이미 발레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이모저모를 날카롭게 관찰한 바 있는 드가는 무희들의 생태와 그 이면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회화에 관한 독특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치 무대 뒤의 분장실 근처를 지나치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분장실의 무희를 그린 것이다. 현실의 세계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질성을 보이면서도 대상의 범위와 그 파악의 면에서는 전혀 다른 면을 드가는 보이는 것이다. 유난히도 세로가 긴 화면의 3분의 1가량을 출입문으로 하고, 그 나머지 화면만으로 분장실의 정경을 표현함은 명도 대비로써 주제를 강조하려 함이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보여지는 분장실은 마치 출입이 금지된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奏樂席의 악사들
이미 음악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여 여러 음악가들과 교우 관계를 갖고 그들의 모습을 화면 속에 끌어들인 드가는 또 하나의 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1860년대에 그려진 작품보다 시각 거리가 훨씬 더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많은 수의 악사들 중 세 명의 악사들 등 너머로 무대 위의 무희가 객석을 향해 인사를 보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특색으로 보이는 점은 고전적인 균형을 이룬 짜임새 있는 구성이 아닌, 현실의 한 단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도의 설정이다. 이를테면 화면을 가르는 수평의 선분 위, 아래로 각기 무희와 악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세 사람의 악사들 중 중간의 악사 머리 부분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악기가 그려져 있어 마치 사람의 귀와 같은 연상을 갖게 하는 것도 흥미롭다.
세탁물을 운반하는 두 세탁녀
1879년 제 4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된 이 작품을 두고 어느 비평가는 '멀리서 보면 도미에의 것과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 접근해서 보면 도미에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극히 요약된 활달하며 간략한 선묘로써 인물을 묘사한 이외에는 장식적인 어떠한 요소조차도 포함되지 않은 드가의 작품 중 특색있는 작품이다. 두 세탁녀와 바닥면의 짙은 세피아 색을 주조로 한 색과 샛노란 벽면의 색채가 강렬한 명도 및 채도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이렇듯이 대담한 공간을 구성함은 새삼스러울 것은 아니지만, 명도 높은 샛노란 색채로써 색의 대비를 이룸은 여태까지의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닥과 벽면을 가르는 수평의 면과 두 인물의 높낮이도 수평의 높이를 보이지만, 무거운 듯 세탁물 바구니를 든 구부린 동세가 그러한 경직된 느낌을 완화시켜 준다.
잘못된 출발
드가는 경주마에서 자기의 본성이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되는, 찾아 보기 힘든 주제를 택하였다. 드가는 뮈 브릿지 대령의 스냅 사진을 빌어, 움직이는 동물의 참모습을 연구한 최초의 화가로 손꼽힌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예술가들이 사진을 외면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를 엄두도 못 내던 때에,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의 회화 속에 멋진 사진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로맨티즘의 화가 제리코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출발이 잘못 이루어져 먼저 뛰쳐 나가버린 말과 기수의 힘찬 동세가 어김 없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말의 진행을 억제하려는 기수의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현실감 넘치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말을 화면의 좌측편에 그려놓음도 말의 운동 방향을 암시하고 동적인 느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에 서이다.
외교관들이 감상하는 카페의 여인
지금까지 정확한 데생에 의한 형태 파악에 중점을 두었던 드가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계기로 점차 밝은 색채 표현의 경향을 보인다. 인상주의적인 색채 분할법 자체를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1870년대 말경부터는 색채가 급속히 화려한 국면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속도감 있는 선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는 재료인 파스텔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악기와 모자가 가로지르는 양분된 면을 연결시켜 주고 있으며, 예의 각광(foot-light)은 밤 무대의 화려함을 더욱 강하게 한다. 제명(題名)으로 보아 당시 사교계의 귀빈들과 각국의 외교관들이 이 카페에 참석하고 있는 듯하며, 정열적인 몸짓의 가수가 입은 샛 빨간 의상과 객석의 어두운 색조는 극도의 강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분장실의 무희
누구의 도움조차도 없이 스스로 분장을 마친 무희가 두 팔을 올려 머리의 맵시를 가다듬는 순간을 드가는 그리고 있다. 거울 앞에 놓인 가스등의 불빛이 아리따운 무희의 얼굴과 화려한 차림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보이는 점은 율동과는 무관한 분장하는 모습에서마저도 무희의 율동적인 발의 움직임, 즉 두 다리를 서로 엇갈리게 놓는다는 점이다. 이는 무희의 연작에서 익숙해진 율동 표현의 습성이 은연 중 그렇게 표현케 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분장실 내부의 바닥 면에 널리어진 무질서한 것들이 무희의 아리따운 자태와는 상반되어 이질감(異質感)을 준다. 이는 실제의 분장실이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상호 대비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드가의 의도적인 구성이라고 보여진다.
무용 시험
파스텔의 유연한 질감과 화려한 색채를 알맞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물의 특징, 파악의 방법이 자못 날카로움을 보인다. 예의 작품들과는 달리 화면을 가득 메운 무희들이 자신의 발 동작을 살펴보는 모습이거나, 긴 양말을 고쳐 신은 모습이며, 보호자인 듯한 여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동세,그리고 신체의 각 부분의 특징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선묘를 구사하고 있다. 사각(斜角)을 이루는 지면의 불안정한 느낌을 보완키 위해 수직으로 곧 추선 인물을 두어 대각(對角)을 이루게 하며, 그 결과 V자 모양의 구도를 이룬다. 시험의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 중인 무희들의 새하얀 의상은 유연한 여체의 탄력을 뒷바침이나 하듯 유난히도 밝게 빛나 보인다.
휴식을 취하는 무희들
드가는 지금까지 젊은 무희들의 생기 넘치는 발랄한 동세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고된 일과를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지친 모습의 무희도 그리고 있다. 화면의 상단 중간에는 신발을 고쳐 신는 무희를, 그리고 왼편에는 지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무희를 각기 그리고 있다. 마치 초벌 그림을 그리 듯한 거침없는 파스텔의 흔적이 완연히 드러나 보이며, 인체의 윤곽선들을 유연한 선들로써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붉은 색의 긴의자는 화면의 긴장감을 이끌기 위해 사선으로 가로 놓여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상단의 무희가 입은 상의 역시 붉은 색의 복장으로 채색되어 있다. 아마도 드가 만큼 파스텔화에 열중하고 그 재질의 특성을 적절히 구사한 화가는 없으리라 짐작되어지는 것이다.
가로 막대를 잡고 연습하는 무희
드가는 바닥에 중요성을 두는 드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멋진 마루를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주 높은 데서 무희를 포착하며 온갖 형태가 마루 면에 투영된다. 마치 해변가에서 게를 내려다보듯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관점과 참신한 구도를 안겨준다. 1876년에 이은 같은 주제의 이 작품은 예의 작품에 비해 무희의 자세, 벽, 의상, 마룻바닥 등 구도보다는 색채 쪽에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각기의 작품마다에서 보이는 색다른 구도의 효과라든가 섬세한 필체가 보이지 않고, 작은 필세로 전체적인 색조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색채 또한 사실적인 느낌보다는 단순히 화면 조화에 치우치고, 마룻바닥의 질감 표현도 전과 같은 사실성을 잃고 있음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 1834년~1917년)
파리에서 태어난 드가는 주로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주로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색채를 띠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루이르그랑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트의 소개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다. 1856-1857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의 거장, 특히 기를란다요, 만테냐의 작품을 배우고, 또 푸생·홀바인의 그림도 배웠다. 1865년 살롱에 을 출품하고,보불전쟁 후,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였으나 뒤에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872년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로 떠나 미국의 역동성을 목격했다. 1873년 파리로 돌아와 인상주의 화가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고, 말년에는 지병인 눈병이 악화되어 시력을 거의 잃는 바람에 주로 조각에 몰두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고 다른 남자(다름 아닌 아버지의 친형제)를 사랑했기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때의 영향으로 여자를 싫어하게 됐다는 말이 있다.
초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을 그렸으나 후기 그림은 일상 생활을 하는 그림을 그렸다.
초기의 화풍은 고전적으로 등의 초상화에서 출발했으나, 차츰 무용, 극장 등의 근대적 민중 생활의 묘사를 시작했다.움직이는 것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그리는 독자적인 수법을 썼다. 특히, 보는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정확한 데생과 풍부한 색감을 표현하였다. 무희를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아 '무용의 화가'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 등이 있다. 당시 드가의 이런 소재 선택은 꽤 파격적인 편인데, 당시만 해도 무용수들의 처우는 매춘부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라 할 정도의 하층민이었기 때문이었다. 드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모델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용수들의 처우 개선에 대해서도 직접 노력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주의 그림을 무척 싫어했기에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사실주의 그림을 보고 차라리 사진을 찍으라며 엄청 악평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하자 한번은 지팡이를 쳐들고 사실파 색히들에게 쏘는 총이다! 탕!탕! 이렇게 친구들 앞에서 크게 외친 적도 있었다.
노턴 사이먼 뮤지엄의 19세기 전시관에 가면 에드가 드가의 작품세계가 펼쳐져 있다. 유난히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음이 내겐 놀라움이었다.
'무희의 화가'라는 에드가 드가 Edgar De gas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는 고전주의 미술과 근대 미술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화가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려 집안에 작업실을 두게 했고, 그런 부모의 후원으로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조각뿐만 아니라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진술에도 정통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신고전주의 초상화가이자 서사화가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터키의 욕탕'으로 유명하다)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화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드가는 1855년에 앵그르를 만났는데, 그는 드가에게 "선에 충실하라"라는 유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드가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고 그후 이탈리아에서 3 년간 공부했다. 그리고 1865년에는 파리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드가는 무명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는데, 이 협회는 1874년부터 계속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첫번 째 협회전에는 드가,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나중에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이 전시회에 대해 야유섞인 의미로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불충분한 세부묘사와 두드러진 붓질, 색을 혼합하지 않고 사용하는 등의 회화양식 때문이었다.
드가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화랑 주인 폴 뒤랑 뤼엘은 드가가 활동하는 내내 그를 후원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1880년에 색다른 시점의 구도와 자유롭고 빠른 붓질로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밀랍 모형(이후 청동으로 주조됨)에 다른 요소들인 실제 천으로 만든 발레용 치마, 인형 머리카락, 새틴 리본 등을 결합하여 만든 그의 걸작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1880~1881경)]에 대해서는 열광, 분노, 혐오감 등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다.
1886년에 드가의 작품들이 뉴욕에서 전시되었고, 1905년에는 런던에서 드가와 다수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어느 정도 여성혐오증이 있었고, 여자보다는 자신의 미술 세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대다수는 여자 무용수, 여자 세탁부, 재봉사, 목욕하는 여자와 같이 여자와 여성노동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말년에 드가는 시력이 나빠졌으나,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는 능력은 그럭저럭 계속 유지해나갔다.
인상주의 화가들속의 드가
드가는 여덟 차례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을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자신의 양식과 인상주의 미술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그는 "내가 정부라면 야외에서 실물을 직접 보며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감시할 특수 경찰부대를 조직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외광회화'를 비판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도 휘말렸다. 이 사건은 유대인 군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잘못 기소당했고, 드레퓌스의 지지자와 반대파 간의 논쟁으로 프랑스가 양분되었던 사건이다. 드가는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주장하여 그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결국 이 일로 그는 많은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1895년); 스파이라는 누명을 쓴 유대인 대위였던 드레퓌스를 지지한 좌파로는 에밀 졸라가 유명하다. 드가는 반유대인파. 1995년에서야 무죄로 인정되었다는데,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처음 알게 된 역사였다.
드가는 경마장에도 자주 갔다는데, 역동적인 말의 모습보다는 경마장 주위를 관조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The false start
노턴 사이먼 뮤지엄 소장
The Belleli Family
드가가 그림공부를 하러 이탈리아에 갔을 때 그린 그림으로 벨레리 훼밀리는 드가의 고모네 식구라 한다.
이젠 드가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그가 남긴 작품과 그에 대해 세상은 왜 호기심이 많은지 전반적으로 그의 가십이라는 것은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와 그 이유가 여성을 혐오스러워 했다는 것인데 왜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이야기하자면 많은 발레의 무대와 발레리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말이다. 세상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그의 그림들속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전혀 예쁘지 않게 그려진 것과 대다수의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들은 여성의 얼굴이 뚜렷히 그려지지 않은 점, 혹자는 뭉개진 듯 보인다는데....,
드가가 어느 유명 작가 부부를 그리며 그의 부인을 예쁘게 그리지 않아 작가가 화를 내며 부인의 얼굴이 있는 부분의 그림을 찢어버린 것을 예로 들며 드가의 여성 혐오증을 설명한 TV프로도 있었다.(SBS)
드가가 여성 혐오를 가지게 된 이유는 어린시절 뛰어난 미모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동생, 즉 드가의 삼촌과 불륜관계를 가진 것에 있다고 한다.(신비한 TV서프라이즈, MBC) 더구나 드가에 대한 글들 중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부인을 사랑하여 그러한 사실을 묵인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정과 그 사실을 묵인하는 아버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가 여성을 혐오한게 아니라 어머니의 부정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불신과 사랑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가 그린 발레리나와 여성들의 초상화를 보자. 노래하는 여가수나 발레리나의 얼굴이나 표정이 아름답지는 않다.
장갑 낀 여가수
그러나 그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드가의 그림에서 발레가 주제인 경우, 드가는 남자 무용수를 그린 적이 없다. 그는 남녀가 같이 만드는 예술 장르로서의 발레에 관심이 있던게 아니고, 여성 발레리나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들의 몸이 환상과 환멸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로써 여성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보다는 여성의 움직임을 그렸던 그에게 사람들은 여성을 혐오했다는 낭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보여주는 예로 발레 주제 그림에서 무대위의 모습이 담긴것은 그의 수백여점의 발레 주제 그림 중에 20%도 되지 않는다. 드가의 발레리나들은 대게 리허설이나 공연이 끝난 직후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 그에게 '무희의 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가장 큰 수입원이 되어준 발레리나 그림들 중 유명한 그림인 [무희, The Star], 여기에서도 그의 관심은 무희뒤에 있는 검은 옷을 신사의 모습이 드가 특유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당시 파리 오페라하우스에 부설되어 있었던 발레 스쿨에는 10대 초반의 소녀들이 등록해서 춤을 배웠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다고 한다.오페라하우스의 부유한 고객은 이 소녀들을 공연 전후에 따로 만날 수 있었는데,놀라운건 이런 만남이 종종 매춘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드가의 그림[스타]의 소녀는 요정같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환상의 대상이지만, 곧 검은 옷을 입은 신사가 암시하는 난잡한 현실, 환멸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안타까운 대상의 보여짐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드가는 발레 스튜디오를 너무 많이 드나들어 발레의 기본 스텝을 거의 외웠다고도.....,
근대적인 조각, 조각의 사실주의를 시도하다.
드가는 30대 부터 시력이 나빠져서 30대 후반에는 아예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그림말고 관심을 가진 곳이 조각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화가였다가 조각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각가이기 보다는 화가이기를 원했다. 그저 조각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대신하고자 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당시 기존의 살롱 제도의 운영에 불만이 많았던 드가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살롱도 하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가는 카페 게르부아의 친구들과 모임을 조직해 1874년부터 열게 된 이 ‘새로운 살롱’은 1886년까지 8번 개최되었는데 포스팅의 윗 부분에도 언급했지만, 드가는 7번째 전시를 빼고 모두 참여했고, 이 전시에 출품을 하게 된 이후로는 살롱에 작품을 내지 않았다. 이 전시회에는, 1회 때 전시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때문에 인상파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드가는 한 순간의 인상을 그대로 작품화한 적이 없고,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해 화면을 구성했던 '인상파'라는 이름을 싫어했다. 그는 ‘사실주의자’로 불리길 원했고, 작업실에서 완성된 그의 작품은 야외에서 그려지곤 했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인상파전에 선보인 작품 중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그가 평생 단 한번 전시한 한 점의 조각 [14세 소녀 발레리나 Little Dancer Aged Fourteen]였다.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청동ㆍ모슬린 스커트ㆍ실크 리본, 24.5×35.2×98cm, 1880~1881, 노턴 사이먼 미술관.
[14세의 어린 발레리나]의 모델은 1878년에 열네 살이 된 마리아 반 구템이라는 소녀였다. 이 작품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화제작으로 관심을 끄는데, 첫째가 화가의 조각품이라는 것이며, 주목할 점은 혁신적인 제작 방식이었다. 이 작품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청동 조각에 실제 천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허리에는 모슬린 스커트를 두르고 땋아내린 머리는 실크리본으로 묶어 등 뒤로 늘어트렸다.이는 당시 조각계의 불문율을 깨트린 파격으로 지금도 이런 작품은 없다고 한다.
[14세의 어린 발레리나]의 모델이 된 소녀의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1880년대에 드가는 패션의 도시 파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고 있는 모자가게 점원, 세탁부 등의 여성 노동자에 관심을 쏟았다. 세탁부라는 주제는 드가가 존경한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근대 생활의 화가, 판화가)가 처음으로 그림에서 다룬 바 있다. 파리 사회의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이전에는 저널에서만 다뤄졌을뿐, 본격적인 회화의 주제가 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들 Women Ironing]의 주인공은 19세기 말 노동 계급 여성의 상징이라고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The Laundress 노턴 사이먼 뮤지엄 소장.
그러면 독신남 드가는 평생 로맨스가 없었을까? 아니다. 그가 호감을 가진 유일한 여성이 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날카롭고 작은 눈에 강인한 턱을 가진 화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였다. 그녀는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에 정착한 부유한 집안의 미국인으로 드가는 카사트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진 호감으로 그녀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드가가 그린 [카드를 쥐고 앉아 있는 메리 카사트], 세상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여성에 대한 환멸로 그녀조차 예쁘게 그리지 않았다고 했지만,그녀 자신의 초상화와 생김새는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은 그가 여성혐오자라서 여성의 얼굴을 일부러 밉게 그렸다는 설을 부정하는 확실한 면이다. 카사트는 평범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즐겨 그렸는데 뛰어난 데생과 자연스러운 비대칭 구도는 드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에드가 드가 [카드를 쥐고 앉아있는 메리 카사트]
카사트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아래)과 드가의 그림(위)을 비교해보면, 자화상에 등장하는 카사트는 단아하고 얌전한 모습으로, 드가의 그림에 카사트는 느낌이 중성적이다. 이렇게 개인마다 관점은 틀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호사가들의 관심부분으로 드가와 카사트의 관계도 과연 마네와 모리소의 관계처럼 분홍빛이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카사트는 드가에 대해 연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드가도 역시 카사트와 결혼할 생각은 있었지만, 그 당시 드가는 무일푼이었고, 일정한 수입조차 없었다. 게다가 몰락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까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존심 강한 드가가 선뜻 카사트에게 결혼하자고 나섰을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월은 지났고, 아무도 ‘만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렇게 카사트와 드가의 숨겨진 로맨스는 인상파의 역사에서 마네와 모리소 못지않게 깊은 연막을 풍기며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메리 카사트의 자화상
예술의 가치와 과학의 가치는 만인의 이익에 대한 사욕이 없는 봉사이다. - 존 러스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