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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라는 곳이 참 많아졌습니다. 본래 아카데미는 B.C.385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청년들의 심신을 수양시킬 목적으로 아테네의 근교에 설립한 교육기관입니다. 그러다 중세에는 귀족이나 왕실의 보호를 받는 학자의 집단을, 나중에 대학이라는 명칭이 나오기 전까지는 중등교육기관이나 고등교육기관을 의미했는데요. 정부가 앞장서서 설립하고 육성한 과학, 문화, 예술 분야의 아카데미는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런 유서 깊은 아카데미가 최근에는 학원 개념으로 소모되는 감이 없지 않지요.
산치오 라파엘로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서명의 방’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 〈아테네 학당〉은 가로 길이가 8미터가 넘는 대작입니다. 아테네 ‘학당’이라고 하지만 아카데미였을 테고 고대의 철학자와 천문학자, 수학자들 54명을 한데 모아 그린 일종의 집단 초상화입니다. 그리고 중세 이탈리아와의 합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고대 학자들의 얼굴을 동시대 이탈리아인의 얼굴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우리는 르네상스의 거장 3인의 얼굴을 〈아테네 학당〉에서 함께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데요. 계단 위 정중앙에 서서 검지를 들어 하늘을 향해 가리키는 하얀 수염의 노인 플라톤은 라파엘로가 평생 존경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입니다. 계단 아래 대리석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사색에 잠긴 이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그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그의 철학은 니체 사상의 근본이 됐습니다. 위치나 크기 면에서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인데, 바로 미켈란젤로의 얼굴입니다.
라파엘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아테네 학당〉에 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근원은 불’이라고 주장했던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그 ‘불’이란 조화와 원리를 이루는 데 필요한 대립과 투쟁을 의미했지요. 라파엘로는 〈천지창조〉를 그리느라 그야말로 고군분투 중인 미켈란젤로에게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면모를 읽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자신을 그린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하지요. 라이벌인 라파엘로의 그림에 자신이 등장한다는 자체가 찜찜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다른 인물도 아닌 헤라클레이토스라니, 생전에 조소와 비웃음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니 라파엘로가 자신을 비꼬는 것으로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자신의 얼굴도 수줍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의 맨 오른쪽, 아치형의 기둥 너머에 그리스 복장과는 동떨어진 초록색 베레모를 쓴 젊은 남자, 그가 바로 산치오 라파엘로입니다. 이로써 〈아테네 학당〉에 르네상스의 거장 3인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이 거장들이 누구와 함께 시공간을 초월한 이 상상 속 아테네 학당에 있는지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볼까요.
플라톤 옆에서 손바닥을 따을 향해 펼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둘이 가리키는 손의 방향은 각각 이상주의와 현실세계를 상징하지요. 왼편에 플라톤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사람들에게 열심히 이야기하는 대머리 남자가 보입니다. 소크라테스입니다. 그의 강연을 투구와 갑옷 차림으로 듣는 젊은이는 알키비아데스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사랑하는 미소년이었습니다. 명문가라는 배경에 그리스는 물론 페르시아까지 소문이 자자했을 만큼 준수한 외모, 유창한 웅변술에 우수한 두뇌까지, 모든 조건을 갖춘 이 소년은 자라서 아테네 정계의 중심에 섰고 지도자로 도약하기 위해 펠레폰네소스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스캔들에 휘말려 스파르타로, 스파르타에서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이런 행보는 펠레폰네소스 원정 실패로 이어졌고, 아테네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의 사형 판결에 손을 드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아테네의 영광이자 오욕인 알키비아데스 뒤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은 아이스키네스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실 때 함께 있던 제자입니다. 자, 이제 계단 아래로 가봅니다.
그림 왼편에 큼지막한 책을 펼치고 필기 중인 이는 피타고라스, 그의 필기를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터번 쓴 이는 이슬람 학자 아베로에스입니다. ‘정신은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끝난다’는 주장을 했다고 하지요. 그 옆에 월계관을 쓰고 선 채 필기 중인 이는 에피쿠로스입니다. 그가 주장한 쾌락주의는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이었고, 그의 생애는 무소유와 금욕에 가까웠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간혹 오해하고 있습니다.
시선을 오른편으로 훌쩍 옮겨봅니다. 허리를 굽혀 컴퍼스로 흑판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남자는 에우클리데스입니다. 지금 기하학을 강의하는 중인 모양입니다. 에우클리데스의 뒤로 천구의를 든 사람들이 보입니다. 등을 돌리고 선 이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맞은편에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조로아스터, 자라투스트라로도 불리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이 책에 영감을 얻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등장하는 ‘자라스트로’로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이지요.
그러나 이들 작품 속 인물은 실제 조로아스터와는 관계없고 현자로서의 면모를 차용해 새로운 인물을 창조한 작품들입니다. 조로아스터가 서양인에게 신비롭게 느껴졌다는 것도 관련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조로아스터는 페르시아의 국교를 창시한 인물로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 틀림없는 이교도의 교주일 뿐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 ‘정신은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끝난다’는 주장을 설파한 이슬람 학자와 이교도의 창시자를 등장시킨 것은 가히 파격을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라파엘로가 이 그림에서 보여주는 파격은 또 있습니다.
그림에서 라파엘로와 함께 유일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서 있는 흰색 옷을 입은 금발의 젊은 미인입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긴가민가하지만 여성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히파티아, 그리스 사람이 아니라 이집트 사람이고 서양 역사에서는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으로 불리며 신격화됐습니다. 히파티아는 수학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여성이며 기원전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고대의 뉴욕이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강의를 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빼어난 미모 때문에 가는 데마다 화제였고 많은 남성에게 구혼을 받았지만 “나는 진리와 결혼했노라”라는 말로 모두 물리쳤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라파엘로가 왜 아테네 학당에 히파티아를 그렸는지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녀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입니다. 히파티아가 이 그림에 무사히 남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을 리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처음에 히파티아를 그림 중앙에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본 주교가 당장 지우라고 했다고 하지요.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키릴로스에게 이교도로 몰려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히파티아가 고대의 훌륭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떤 이론을 정립했고, 어떤 강의를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쓴 책이 죽음과 동시에 한 권도 남김없이 모두 불에 태워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교의 눈을 속이기 위해 생각한 방법은 이러했습니다. 먼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를 당대의 유명한 지휘관이었던 로베레를 모델로 그린 다음, 그의 우람한 체격 뒤에 히파티아를 숨기듯이 그려 넣은 것입니다.
그럴 듯한 이 이야기는 그러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교도가 히파티아 한 명은 아니니까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사실상 모두 이교도입니다. 그들 중 그리스도를 섬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의 인물들이니 당연하고, 유대인이 아니니 여호와에 대해 알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알았다 해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은 카톨릭교회 안에, 그것도 교황이 머무는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될 그림입니다. 이 말을 다시 뒤집으면ㄴ 교황이 의도적으로 이교도를 그리게 한 그림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문제작을 그리게 한 교황은 바로 율리우스 2세입니다. 교황치고는 희한할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끊임없는 경쟁구도로 몰어넣어 많은 작품을 생산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바티칸 미술관을 태어나게 한 사람입니다.
바티칸은 성 베드로의 묘지가 있는 세계적인 성지이자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입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건축물과 미술품 대부분이 바티칸에 집중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런 바티칸 미술관의 최초 전시품은 당연히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고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엉뚱하게도 〈라오콘〉입니다. 높이 2.4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각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막바지였던 B.C. 25년경에 제작됐다고 하는데요. 트로이의 제관인 라오콘과 두 아들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거대한 뱀에게 공격을 받는 순간, 그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관도 모자라 포세이돈이라니 숨겨도 마땅찮을 것 같은데 바티칸 최초의 전시품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요.
이 이교도적인 기획과 전시를 주도한 이가 바로 교황 율리우스 2세였습니다. 그는 1506년 1월 14일, 로마의 어느 포도밭에서 라오콘이 우연찮게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사들였고, 한 달 후 라오콘을 보고 싶어 하는 대중을 위해 바티칸의 벨베데레 정원에 조각상을 전시하고 정원을 개방했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은 1506년의 이 전시회를 바티칸 미술관의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티칸 정원에 라오콘을 전시하고, 성당 안에 이교도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테네 학당〉을 그리게 하고, 율리우스 2세는 왜 그랬을까요?
바야흐로 르네상스의 시대였습니다. 14세기부터 불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 본받기 열풍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이 시대의 흐름을 모를 만큼 꽉 막힌 교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카톨릭보다 르네상스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를 통일해서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교황이 아니라 황제가 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율리우스 2세에게는 ‘전사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데 교황이라는 사람이 전쟁의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황들처럼 막후에서 전쟁을 기획하고 부추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갑옷으로 무장하고 칼을 들고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습니다. 라파엘로가 그의 초상화를 그릴 때 손에 성경을 든 모습으로 그리자, 성경을 칼로 바꿔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롤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으니까요.
진두지휘한 전투의 성과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령한 소도시와 요새를 탈환했고, 이탈리아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직접 전투를 치러 몰아냈습니다. 주위에서 교황이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뜯어말려도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506년에는 자신을 호위할 군대를 만들기 위해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바티칸 시국을 지키고 있는 근위대의 기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군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군복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멋진 군복을 오직 스위스 사람만 입을 수 있습니다. 스위스 사람만 바티칸의 근위대에 입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목숨 바쳐 지켜준 이들이 스위스 용병들이었던 데서 생긴 전통으로 5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율리우스 2세가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고 자신의 전담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치를 돈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하면 뇌물과 횡령 등이 떠오르지요.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점을 이끈 동시에 가장 타락한 교황 중 한 명이었습니다. 1510년에서 1511년 사이 로마를 방문한 마르틴 루터는 율리우스 2세를 오토만 술탄보다 더 사악한 인간으로, 로마 교회를 부패의 온상지로 인식했고,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517년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는 〈9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데요.
하지만 이때는 이미 율리우스 2세가 죽은 후였습니다.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전장에 나섰을 만큼 용맹한 ‘전사교황’이었지만 1513년 2월, 병에 걸려 자리에 눕더니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로부터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처절한 고통 속에 〈천지창조〉를 4년 6개월 만에 완성한 지 불과 석 달 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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