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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백
2018년 03월 07일 23시 45분  조회:3766  추천:0  작성자: 죽림
 
둔덕고개 '시간은 지나는 한 점이 바로 현재이고 그 현재는 바로 과거가 된다' 는 철학을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표현한 작품에 담고 있다.
▲ 둔덕고개 '시간은 지나는 한 점이 바로 현재이고 그 현재는 바로 과거가 된다' 는 철학을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표현한 작품에 담고 있다.
ⓒ 김광철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에서는 '십만 개의 머리카락'이라는 이색적인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강원도 태백의 탄광에서 광부로서 몇 년 간 탄을 캐는 생활을 하면서 탄가루를 개어 그걸로 광부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그리기도 했던 황재형 화백이 이번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표현을 작품들을 전시장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황재형 화백 부부 '십만 개의 머리카락' 열림식을 하던 날 참가자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면서
▲ 황재형 화백 부부 '십만 개의 머리카락' 열림식을 하던 날 참가자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면서
ⓒ 김광철

 


며칠 전 모 일간지에 황재형의 '십만 개의 머리카락' 작품전을 한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날 오후에 오래만에 낯익은 목소리가 핸트폰을 울렸다.

"선생님, 저 장정희에요. 저 아시죠?"
"어, 이게 누구야? 태백의 장정희 선생이란 말이지요?"
"예, 이번에 황선생님이 서울에서 작품전을 여는데, 선생님 꼭 오시라도 전화를 드리라고 했어요."
"그래요. 아주 축하드릴 일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신문에서 소식을 보았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사람들의 근황과 연락처를 묻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목요일 오후 열림식이 열린다는 평창동의 가나아트센트를 찾았다. 황 화백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면서 근황을 서로 물으며 잠깐 인사를 나누고, 밀려드는 손님들을 받느라 바쁜 황 화백을 두고, 작품들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드러난 얼굴 머리카락을 이용하지 않은 작품과 이용한 작품의 작품성을 비교할 수 있게 전시되어 있는 작품
▲ 드러난 얼굴 머리카락을 이용하지 않은 작품과 이용한 작품의 작품성을 비교할 수 있게 전시되어 있는 작품
ⓒ 김광철

 


전시관 1층. 유화물감으로 그린 광부의 얼굴과 그 옆으로 똑같은 그림 위에 머리카락을 붙여 독특한 질감을 표현한 그림이 나란히 걸렸다. 이런 방식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이번 전시회의 주요 콘셉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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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에게 '머리카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발소나 미용실 바닥에 널부려져 있는 지저분한 쓰레기일 것이다. 그걸 그림 위에 붙여서 표현했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불결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사람 나름일 수도 있겠지만.

털실이나 면봉, 쌀 등 다양한 재료들이 미술 작품에 이용이 되었지만 머리카락을 이렇게 그림에 사용된 예는 없었다고 가나아트센터 쪽에서는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 머리카락은 태백의 미용실 등을 돌면서 모아온 것이라고 한다.

원이 엄마 편지 안동에서 묘 속에서 발굴된 요절한 남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와 거기서 발굴된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만든 미투리를 머리카락으로 재연하고 있다.
▲ 원이 엄마 편지 안동에서 묘 속에서 발굴된 요절한 남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와 거기서 발굴된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만든 미투리를 머리카락으로 재연하고 있다.
ⓒ 김광철

 


현대인들도 머리카락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머리가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머리가 빠져 대머리가 되면 머리의 다른 부분에 나 있는 모발을 이식할 정도로 모발과 사람의 외모에 대한 관심과 보호하려는 노력이 지대하다.

머리카락을 우리 조상들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소중한 신체의 일부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모발 한 올이라도 훼손하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할 정도로 모발에 대한 숭앙심을 가져왔다.

갑오개혁 때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유생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점차 인간이 진화를 하면서 탈모를 지향하고, 요즘 대머리도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번 작품들 중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1998년 안동에서 오래된 묘를 이장하면서 발굴된 이응태의 묘에서 발견된 '원이 아버지 전상서'라는 편지에 관한 내용이 이번 작품전에 관련하여 출품되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그 편지의 내용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삼과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삼은 미투리가 그대로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부인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것과 삼을 섞어서 삼은 짚신을 신고 저승길 잘 가시라는 애틋한 사랑의 징표를 보면서 황화백은 그걸 다시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다시 재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민중들, 핍박 받았던 역사, 바닥의 아픈 이야기들이 작품의 주제로

별바라기 광부들이 위험하고 고단한 삶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 별바라기 광부들이 위험하고 고단한 삶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 김광철

 


새벽에 홀로 깨어 '세월호 어머니'의 절규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 새벽에 홀로 깨어 '세월호 어머니'의 절규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 김광철

 


이번 작품전 주요 콘셉트가 머리카락을 그림에 이용하여 표현했다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중미술가답게 탄광촌 광부들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여 있었다.

황 화백은 광부들이 막장에서 언제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는 힘든 삶, 가난한 탄광 마을의 풍경이라든가 가난한 농촌 사람들, 노동자들의 삶의 이야기, 제주 해녀의 '숨비소리' 등 고단한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리얼리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번 작품전에도 그런 분위기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모니카 나고야 징용에 끌려가서 하모니카와 같은 집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현실을 표현한 작품이다.
▲ 하모니카 나고야 징용에 끌려가서 하모니카와 같은 집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현실을 표현한 작품이다.
ⓒ 김광철

 


탄착점 단둥의 압록강변에서 남북 분단 '반공 교육'의 공격성을 지적하는 작품이다.
▲ 탄착점 단둥의 압록강변에서 남북 분단 '반공 교육'의 공격성을 지적하는 작품이다.
ⓒ 김광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탄광마을과 관련된 소재들은 물론이고, 세월호 어머니의 절규하는 이야기라든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고단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삶이 담겨있는 '하모니카 나고야'라든가 '강주룡, 을밀대에 오르다', 중국 단둥에서 바라보는 압록강에서 반공교육의 공격성을 드러내는 '탄착점',  백두산 천지의 가마꾼 그림, 고려 고종과 조선 인조의 '삼배구고두'의 항복 의식 등 역사의 아픈 곳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둔덕고개'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현시대에 회화가 가지는 본질에 대하여 물으면서서, '시간은 지나는 한 점이 현재이고, 그 현재는 바로 과거가 된다'고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알흔섬 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의 알흔섬을 방문하고 받은 영감을 흑연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 알흔섬 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의 알흔섬을 방문하고 받은 영감을 흑연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 김광철

 


그런가 하면 흑연을 이용하여 바이칼 호수의 '알흔섬'을 그린 작품에서는 바탕을 까맣게 하고 흑연을 칠해서 빛이 반사되는 효과 표현하기, '진여'와 '썰물(고향바다)' 등의 작품은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했다고 하며 까망 속에 있는 물의 침묵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시원지와 고향 등 민족과 자신의 근본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이런 자양한 주제와 머리카락 등을 이용하여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민족, 역사 등에 대하여 관심을 일깨우는 작품들을 대할 수 있어, 황재형이란 화백을 처음 만나던 때를 떠올리게 된다. 

머리카락은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옷이다

황재형 화백은 이번 작품전 도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인간의 머리에 자라나는 십만 개의 머리카락이 한날한시에 태어나는 경우가 없고 동시에 죽어가는 법 없이 독립되어 제 기능을 다 합니다.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에서. 내게 머리카락이 귀중한 것은 머리카락은 개개인의 삶이 기록되는 필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의 그림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익명의 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 내 실핏줄이 터지는 까닭입니다. 무심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올이 섬찟한 것은 그것의 생명력 때문이 아니라 나의 배타성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은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옷입니다."

내가 환경과생명을지키는교사모임 활동을 하면서 태백시와 태백산으로 생태와 역사 탐방을 갔다가 황 화백 이야기를 듣고 그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찾으면서부터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전교조 운동을 열심히 하던 나는 광부 화가가 동네 벽화도 그리고 탄광촌 사람들 이야기를 그림에 표현하기도 하면서 지역의 노동 운동과 지역 사회 운동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여 관심을 갖게 되어서 이다.

교사가 되기 위하여 교대 2년을 다니면서 몇 학점 받기 위하여 수강했던 것이 전부인 나는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아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런던 차에 참교육을 한다고 설치던 나로서는 이분의 미술교육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다시 면으로 발전하는 이런 관계를 미술 작품에 가져와 미술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점, 선, 면'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거나 구도를 잡는 등 특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여 배워보아야 하겠다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나와 가깝게 지내서 서울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는 초등교사들 8멍과 함께 10박을 하면서 미술공부를 하는 기회를 만든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미술의 대중화를 위한 운동에도 앞장서는 황재형 화백

1996년이던가? 정확하게 연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연간이다. 태백의 황재형 미술연구소로 찾아가서 아침 8시부터 시작하여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열흘 간 강행군을 하면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간 어느날은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교사들의 성의가 부족하다고 보였는지, 어느날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 몇 잔씩 먹이더니 "다들 짐싸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맞자 대표격인 나는 "죄송합니다. 뭐가 잘못 되었으면 고쳐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정하여 눌러앉아 미술공부를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림의 구도가 어떤 것이며, '점, 선, 면'을 이용하여 작품을 완성하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였는지에 대하여 자신의 작품을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 설명을 하고,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더 보완할 점은 없는가 등 이런 과정을 통하여 미술 작품 표현에 대한 근본을 배우고 익혔던 것이다. 30년 세월이 가까워 오지만 미술 표현의 근본과 기초를 배웠던 것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무건리'라는 곳(고려가 패망하자 이곳으로 숨어들어 살았던 고려충신들이 숨어살았다는 은거지)을 탐방하거나 황지못, 폭설이 내린 태백 시내를 누비던 일, 귀틀집 주막 겸 식당에서 관솔주를 마시고, 친환경 음식을 먹었던 기억 등 독특한 문화체험을 했던 일들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런 미술교육 체험을 하고 나서 당시 전교조 초등위원장이었던 나는 이것을 전교조의 참교육 차원에서 널리 보급하고자 소식지 등을 통하여 전국의 많은 전교조 초등교사들에게 알렸다. 그런 도움을 통하여 시작은 하였지만 나중에는 이곳을 거쳐간 교사들의 널리 알려져 이 미술교육프로그램은 해마다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지속이 되고 있다. 

기초 과정과 심화과정까지 프로그램이 발전을 하면서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교사들 중에는 아예 이곳 태백시로 근무를 지원하고 와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교사들도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이 미술교육프로그램 1기 참가자로서 가끔 초청받아서 당시의 경험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배운 것을 학교로 가지고 와서 초등학교 학생들한테 그 방법으로 가르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어디 미술전이 열린다 하여 가면 비구상 작품일지라도 최소한 내 나름대로 작품의 구도며, 미적 표현에 대하여 감상하려는 작은 힘은 생겼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요즘은 교사들들 뿐만 아니라 현직 판사에서부터 일반인들까지 그 참가 범위가 넓어졌다고 한다. 태백미술연구소의 미술교육 프로그램은 이제는 태백에서만 하지를 않고 광주 등 지방을 찾아가서 열기도 하고, 작년에 황재형 화백이 제1회 박수근 미술상을 받으면서 이번 겨울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미술 캠프를 열기로 하였다고 한다

황 화백은 자신의 작품을 통한 예술의 세계를 열어가는 노력 뿐만 아니라, 미술교육의 대중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면에서 참 존경해 마지 않는다. 당시 태백의 미술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장정희씨 등 황재형 화백의 제자들 5명이 우리 교사들과 달라붙어서 지도를 해 주었는데, 여전히 그들은 지금도 그곳 황 화백의 품을 벗어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정희, 김은아, 하은영, 박신자, 김지희 선생님 등 이번 전시회에서 그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반가웠다. 그렇지만 아직도 결혼도 안 하고 예술활동에 푹 빠져 산다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 있는 자신감이 부럽기도 하였다.

태백미술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십만 개의 머리카락' 작품전 열림식을 끝내고 뒷풀이 행사를 함께 하고 있는 '태백미술연구소' 교사들과 그 과정 이수자들
▲ 태백미술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십만 개의 머리카락' 작품전 열림식을 끝내고 뒷풀이 행사를 함께 하고 있는 '태백미술연구소' 교사들과 그 과정 이수자들
ⓒ 김광철

 


이번 작품전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전국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곳 미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이수자들 중에는 전라도 광주에서까지 올라와서 새벽녘까지 축하 뒷풀이 자리를 이어갔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 끼어 어울려, 막걸리에 노래도 한 순배씩 돌리면서 옛정을 나누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이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역시 흥이 있어야 창의성도 발현되는가 보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그 동안 출간했던 시집 두 권을 들고가 황 화백에게 드렸더니 기어이 그 중에 두어 편을 나를 포함하여 참석자들에게 낭송을 시키기도 하여 늦은 밤까지 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역시 예술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이런 걸쭉한 재미를 더할 수 있어 늘 흥겹다. 그래서 더욱 이런 자리에 오라하면 거절을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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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서 탄광촌의 삶 그려온
1세대 민중미술 작가의 변신
물감 대신 미용실 모발 이용해
인물·집단화·풍경까지 표현


‘광부화가’로 불렸던 민중미술 1세대 작가 황재형(65)이 거듭났다.

전시장에 펼쳐 놓은 그림 속 대상은 평생 화폭에 옮겼던 강원도 태백의 광부들, 조국의 등허리 같은 산하, 허허로운 폐광촌이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숫돌에 벼린 칼처럼 선이 날카로워졌다. 그 날카로움에 베인 듯 풍경과 인물들이 더 아프게 날아와 박힌다.

무엇이 시각적 변화를 만들어내는가 싶어 캔버스 가까이 가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다. 사용한 매체가 흔히 쓰는 유화 물감, 혹은 판화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카락이다. 전시 제목 그대로 ‘십만 개의 머리카락’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동서양 어느 작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창안이다. 머리카락이 선이 되고 면을 만들어내며 특유의 검은 톤을 통해 수묵의 번짐 효과까지 낸다. 

지난 19일 ‘황재형 개인전-십 만개의 머리카락’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황 작가를 만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유화 도구를 만졌으니 50년이 넘게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나랑 맞지 않아요. 먹처럼 스며들지 않고 여운도 없고 표면을 덮기만 하니….”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고민은 꾹꾹 가슴에 담아둔 숙제였다. 눈이 번쩍 뜨이는 계기가 왔다. 

1998년 경북 안동에서 고성 이씨 문묘를 이장하던 중 관 속에서 조선시대 묘주 이응태의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가 나온 것이다. 31세에 요절한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 엮은 일명 ‘원이 엄마 미투리’ 뉴스를 듣는 순간, 그는 무릎을 쳤다. 

칠십에 황혼 이혼한 한 여성을 알게 된 것은 그를 더욱 이 매체로 몰아세웠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됐고, 또 직장을 다닌다는 이유로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는 그 여성은 첫 아이를 낳고 받아든 미역국에서 한움큼 머리카락을 건져내고 기겁을 했다. 며느리가 밉다며 시어머니가 넣은 것이다. 머리카락은 사랑의 징표이지만, 미움의 표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 작가는 “머리카락은 징표일 뿐 아니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현존체로 실재하는 것”이라며 “사적이면서도 그것이 품는 정신성으로 인해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도덕적 메시지까지 전달한다”고 말했다. 

유화로 그린 광부를 작가가 ‘머리카락 버전’으로 새롭게 그린 ‘드러난 얼굴’을 보자. 동물성 머리카락이 그려낸 얼굴의 쭈글쭈글한 주름은 너무나 사실감이 있어 오싹해진다. 머리카락을 뭉쳐 만든 눈은 더욱 퀭하다. 그러면서도 태백의 백두대간 같은 풍경에선 지구의 굴곡 같은 깊은 맛을 내기도 한다. 

처음엔 가족의 머리카락을 사용했지만 작업량이 많아지면서 동네 미용실에서 얻어온다. 작업시간이 유화의 세 배나 걸린다. 눈에 충혈이 생기고 어깨는 굳어졌다. 속도의 시대에 거꾸로 느리게 가는 작업이다. “더디게 하다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여요. 풍경이든 사람이든. 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가면 그렇잖아요. 앞으로도 계속할 거냐고요. 지금은 몰라요. 그때 가면 또 다른 게 나오겠지요.” 

황 작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나왔다. 70년대 후반부터 작품 소재를 얻기 위해 강원도 탄광촌을 드나들다 80년대부터 태백에 눌러앉았다. 광부들과 그 주변 풍경을 소재로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내년 1월 28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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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1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기자들을 만나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아직도 가야할 땅이 남아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2016년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머리카락을 재료로 제작한 그림으로 돌아왔다. 그는 머리카락으로 형체를 만들어 탄광촌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을 화폭에 담았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전시 제목은 사람의 머리에 나는 모발의 평균 숫자이다.

이번 전시는 광부 화가로 잘 알려진 황재형이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그림 30여 점을 비롯해 흑연으로 그린 회화가 소개된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강원도 태백에 살면서 지하 막장에서 헌신해온 탄광촌 광부와 그 가족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해 왔다.

황 작가는 11일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중절모를 벗으면서 "내가 대머리라서 타인의 머리카락에 관심이 많다"며 "처음엔 지인들과 가족이 그림에 쓰라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줬다"고 웃었다. 그는 "나중엔 제가 사는 태백지역 미용실을 돌아다니며 머리카락을 모았다"고도 설명했다.

황 작가는 "머리카락은 개개인이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았는 지가 자세히 담겨 있는 필름"이라며 " 저는 지금까지 탄광 막장의 삶 속에서 순수함과 진정성을 건져내려고 노력했다"고도 했다.

2016년작 '새우깡 들놀이'는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2016년작 '새우깡 들놀이'는 광부 가족이 산업전사위령탑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머리카락으로 표현했다. 그는 캔버스 위에 머리카락을 펼쳐놓고 형상을 만든 다음에 접착제로 고정했다. 

황 작가는 10여 전 광부가 이주한 빈집에서 발견한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거울이 반쯤 깨진 액자에는 1968년에 촬영한 사진이 숨겨 있었다. 그는 "이 집의 주인이 소녀 시절인 1968년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한다"며 "이 액자를 발견한 순간 가슴을 확 치는 무언가를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소설가 황순원의 어록을 빌려 "누이의 누런 치아야말로 예술가가 다뤄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황순원 소설가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를 업고 키우던 누이의 누런 이를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태백에 살면서 진정 찾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순수함이 담겨 있는 우리의 심성"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삶의 순수한 순간을 머리카락을 재료로 완성한 황 작가는 작업 과정이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는 "유화 3점을 완성할 시간에 머리카락 그림 1점을 완성하다 보니 손이 망가지고 눈의 실핏줄도 터졌다"며 "너무 힘들어서 머리카락 연작은 이번에만 선보이고 차기작부터는 다른 재료를 사용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17년작 '드러난 얼굴'은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2017년작 '드러난 얼굴'은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2017년작 '둔덕고개'는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2016년작 '내 땅을 딛고 서서'는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작품이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그린 30여 점을 선보인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1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기자들을 만나 강원 태백 지역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 완성한 '삼배구고두'를 설명하고 있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민중미술 1세대 작가이자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인 황재형(66)이 1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기자들을 만나 작품 제작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황재형 개인전 '10만 개의 머리카락'이 오는 14일부터 2018년 1월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17.12.11/뉴스1 © News1 박정환 기자



 

[시론으로 읽는 미술전/편집실]

 

황재형 십만 개의 머리카락

 

[1] 작가노트(발췌)

 

내게 머리카락이 귀중한 것은 머리카락은 개개인의 삶이 기록되는 필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의 그림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익명의 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

무심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올이 섬찟한 것은 그것의 생명력 때문이 아니라 나의 배타성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은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옷입니다.

 

 

[2] 출품작에 부친 작가의 글

 

강주룡을밀대에 오르다 엉클어진 머리 타래를 풀어보려고 일제의 고무공장에서 나와 을밀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만천하에 알렸다.

 

변매화 꺾이지 않는 조선 여성의 혼이다. --제 작업은 현상을 좇는 감각이 아닌 결연한 의지로서의 정리된 신호이길 바란다.

 

내 땅을 딛고 서서 다른 곳에서는 이방인이지만 이곳에선 형제이고 동료이다새로운 날에 새로운 사람과 다시 살아보는 거다햇돼지 잡는 날신입 광부는 동료의 환대에 한바탕 어우러져 시름을 잊는다. --조형의 칼끝에서 평정을 갖는다전체의 중요성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전체의 필연성을 감지하는 것이다.

 

드러난 얼굴 노동의 푸른 들녘으로 펼쳐진 이마삶의 주름이 드리웠다살결도눈빛도입술도 이제는 자본에 실린 돈 바람에 버겁다자본의 욕망이 남긴 거대한 폐허그 폐허에 세운 카지노가 유토피아의 불꽃을 쏘아 올리고 있다불꽃이 탕진의 삶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까절대로 꺾일 수 없는 땀의 가치와 무게를 한 개인의 초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세 겹 하늘 남편이 막장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파란 하늘이 한 겹이고그가 막장에서 바라본 컴컴한 막장 하늘이 두 겹이고남편이 사고로 죽고 난 후 자신이 바라보는 하늘이 세 겹 하늘이다폐부 깊이 인고의 탄가루가 쌓여갈수록 더는 잃을 것이 없기에 차마 놓을 수 없어 일구어낸 삶시름 깊은 눈빛일망정 그윽하다. --화가는 사물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심오한 표정을 포착해서 전달해주는 손이라던가!

 

검은 눈雪 찬 눈이 사택을 덮었다아이들이 잠을 잔다살아가야 한다옆집 김씨는 출근했는지...? --더불어 함께한 터의 실재감공유하는 함인含忍이다.

 

태백에서 생산 원료와 노동이 만나면 생산물이 기쁨으로즐거움이 크게 퍼진다그것이 화폐로 바뀌면서 모든 것은 소비화되었다자기 분열을 갖는 현장머리카락처럼 휘날리어 엉클어져만 간다.

 

새벽에 홀로 깨어 (세월호 어머니) : 우리는 기억하자새벽에 홀로 깨어 우는 가슴이 있다는 것을어느 곳어느 때 시원스럽게 열 수 없는 어머니의 심경을 표현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면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다.”(에밀 졸라)

 

새우깡 들놀이 산업전사 위령탑 공원에놀러 갈 곳 없는 가족이 소풍을 왔다자기도 죽어 올 줄 모르는 곳에세상이 그를 가둔 줄 모르는 탓에 그도 움츠려 숨었다.

 

볕바라기 모래 속에 사금처럼 기쁨이 드물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순간 속에 캐어낸다. --물질로 이행하는 머리카락의 집적이 색과 함께 근원의 부재와 침묵을 말한다.

 

봄소풍 더위가 차갑고 시려운 것은 왜일까?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의존하는 세계로 변화하는 것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웃의 불행이 나의 불행인 세계다이웃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웃의 행복이 나의 불행인 세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복은 모든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달려있다.”(베르톨트 브레히트)

 

둔덕 고개 울산 화정동 둔덕 고개이렇게 우리가 살아간다. --하나의 대상이 지닌 재현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예술적인 면을 강조하고 뚜렷이 하는 것은 현 시대에 회화가 가지는 본질과 가치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시간은 지나는 한 점이 바로 현재이고 그 현재는 바로 과거가 된다.

 

가마꾼 백두산 천지성스러운 곳에서도 태우는 자와 타는 자가 따로 있어 가마꾼의 가쁜 숨이 저리도록 아파왔다모든 것을 감내하는 노동어찌 그만이 가져가는 무게인가허나 그것이 무시되지 말기를.

 

숨비소리 해녀가 물 밖으로 나와 몰아쉬는 숨소리가 숨비소리이다그 소리는 생명의건강행복을 약속하는 노동의 멜로디이다. --존재가 길을 갈 때 묵묵히 가져가는 삶의 자세이거나 양식이다.

 

진여眞如 Suchness : 분별과 무분별지그리고 후득지後得智를 말하기에 앞서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던 만물의 경이를 인간으로서 진실되게 가져보려 했다. --어떻게 감히 진여의 경지를 섣부르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알혼섬 : 2500만 년의 침묵나는 무력했다선조 김황원이 평양 부벽루에서 붓을 놓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껴졌다나는 모든 것을 놓아야 했다시작이 가져지질 않았다스케치에 들어온 형상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연필의 흑연이 말을 했다내포된 것은 가라앉혀야 잡을 수 있다고.

 

원이 엄마 편지 머리카락이 사랑의 메시지로 드러난 경우이지만 여성은 여성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어서 여인의 심경을 직접적으로 머리카락의 엉켜짐으로 잡아보았다머리카락 짚신은 사랑의 징표이다.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먼저 가시나요?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아내가

 

(이 글은 1998년 4월 경북 안동에서 분묘 이장 중 관에서 나온 한글 편지를 현대어로 옮긴 것임관의 주인은 이응태(1555~1586). 부인(원이엄마)이 31살의 젊은 나이로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적어1586년 7월 16일 관 속에 넣어둔 것임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엮어 만든 미투리도 들어 있었는데신어 보지도 못하고라는 글도 있었음)

 

 

[3] 평론

 

화가는 물감 대신 머리카락을 선택했다세계 미술사에서 이런 선례가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머리카락은 힘의 상징이었다분신 역할을 하고 또 사랑의 징표로 활용되기도 했다황재형은 광부들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으면서 그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저항도 하고 또 그들을 작품에 담았지만양심의 가책은 버릴 수 없었단다이번에 머리카락 작업으로 노동자의 머리카락으로 노동자의 모습을 작품에 담으니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단다즉 노동자의 꿈이 담겨 있는 머리카락으로 그들의 꿈을 작품에 담으니 힘이 더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더 강력해졌다는 것주제 이외 재료 자체가 힘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머리카락은 그 자체가 자율적인 표현과 힘을 주었다.윤범모, ‘황재형의 탐험 <십만 개의 머리카락>’(발췌)

 

 

 


황재형 작가.(사진=가나아트)

 

(CNB저널 = 김금영 기자) 1998년 경북 안동에서 이응태(1556~1586)의 무덤이 발견됐을 때 사람들을 놀라게 한 유품이 있었다. 시신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던 미투리. 이 미투리 자체는 놀랄 것이 아니었지만 다름 아닌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머리카락 미투리와 함께 요절한 남편에게 보낸 부인의 절절한 친필 편지. 결국 머리카락의 주인은 이응태의 부인인 원이 엄마였다. 부인은 왜 사랑의 징표로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사용해 미투리를 만들었을까. 이 머리카락의 이야기에 집중한 전시가 있다.

 

황재형 작가가 2010년 이후 7년 만에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십만 개의 머리카락’을 2018년 1월 28일까지 연다. 멀리서 그림을 봤을 땐 수묵화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서니 그림의 선 하나하나를 이룬 것은 모두 새까만 머리카락. 순간 자신도 모르게 머리에 머리카락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손을 가져간다. 다소 경악스럽지만 그럼에도 그림이 주는 독특함과 힘에 압도되는 현장.

 

 

황재형, '원이 엄마 편지'. 캔버스에 머리카락, 짚신, 162.2 x 97cm. 2016년 6월.(사진=가나아트)

 

본래 작가는 ‘머리카락 화가’가 아닌 ‘광부 화가’로 알려졌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1952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981년 중앙대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1982년 이종구, 송창 등과 함께 조직한 ‘임술년(壬戌年)’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다. 임술년은 197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모노크롬 경향에서 탈피해, 모순된 사회 현실에 저항하는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한 민중 미술 운동이다.

 

작가는 이런 임술년의 정신을 이어받아 겪어보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어림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노동자의 생활 현장을 생생하게 겪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 이후 광산촌에서 살면서 직접 광부의 일을 경험했다. 광산이 없어진 이후에도 광산촌의 자연과 인물을 꾸준히 그렸다. 아직도 탄광에서 일하던 기억이 생생하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가 선택한 재료가 주목 받았다. 흙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것. 이는 혁신적인 시도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작가가 애초에 흙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다.

 

 

황재형, '드러난 얼굴'.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 x 130.3cm. 2017년 1월.(사진=가나아트)

 

“처음 탄광촌에 들어갔을 땐 물감을 살 돈이 없었어요. 지독한 가난에 흙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시간이 점차 흐르고 탄광에 가득한 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모든 색은 자연으로부터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돈이 없어서 사용한 흙이었지만, 이렇게 흙을 직접 만지고 겪으면서 점차 흙의 물성을 이해하게 됐고, 작업에 응용하게 됐죠.”

 

햇볕 하나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지하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을 담은 작가의 그림에서는 어려운 시절 노동자의 삶이 느껴졌다. 작가는 “당시 탄광촌은 자신의 자리를 잃은 도시 빈민들이 떠밀려온 곳이었다. 본래의 자리에서 떠나오고, 또 떠나오는 과정을 반복해 온 가운데 또 떠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힘든 현실을 딛고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이었다”고 회상했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갈등하던 작가
머리카락으로 주체의 삶을 이해하다

 

 

황재형, '볕바라기'. 캔버스에 머리카락, 130.3 x 162.2cm. 2016.(사진=가나아트)

 

하지만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광부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단다. 현장에서 광부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일하고 저항도 했지만, 본인은 완전한 광부는 아니기에 100% 노동자로서의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 그리고 이것은 온전한 주체와 객체 사이 존재하는 갭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때 작가가 주목하게 된 재료가 바로 이번 전시의 주재료인 머리카락이다. 작가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히 머리를 장식하는 용도가 아니라, 개개인의 삶이 기록되는 필름과 같이 느껴졌다고.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보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모낭에 겹겹이 쌓인 세포에 그 사람이 어떤 온도 환경에 있었고, 어떤 심리 상태를 가졌었는지 등이 다 기록되죠. 하나의 지표라고 볼 수 있어요.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는데 머리카락이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인간이 최초이자 최후로 입는 자신만의 옷이죠. 광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스며든 땀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삶을 읽을 수 있었어요. 머리카락이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생명력을 담은 중요한 존재이자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느꼈고, 이번엔 이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황재형, '기다리는 사람들 II'. 캔버스에 머리카락, 97 x 162.2cm. 2016.(사진=가나아트)

 

작가가 머리카락으로 그린 첫 작품은 ‘볕바라기’(2016)다. 갱도 앞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는 광부들의 모습을 담았다. 객체로서의 한계를 느꼈던 작가는 광산촌의 삶을 담은 머리카락을 사용해 주체의 이야기를 담는 시도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머리카락을 제공받아 커다란 캔버스 위에 펼친 뒤 형상을 만들고 접착제로 고정시켰다. 붓을 들고 물감을 칠할 땐 작가가 의도한 대로 선이 그어지지만, 수만 개의 머리카락은 자체에 독자적인 곡선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지닌 힘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담기 위해 집중력을 쏟다가 작가의 눈 실핏줄이 터지기도 했다고. 유화를 그릴 때보다 3배의 시간이 소요됐다. 하지만 그 결과 완성된 화면에서는 큰 울림이 느껴졌다. 재료 자체에 담긴 힘 덕분.

 

 

황재형, '하모니카 나고야(ハ_モニカ なごや)'. 캔버스에 머리카락, 100 x 240cm. 2017년 3월.(사진=가나아트)

 

앞서 언급된 이응태 부인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미투리도 작가에게 영감을 줬다. ‘원이 엄마 편지’(2016)라는 작품으로 전시에 선보인다. 이 사연에서 작가는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미투리에서 원이 엄마의 남편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30살에 요절한 남편을 위해 미망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신발을 만들었고, 이를 편지와 함께 무덤에 넣었죠. 즉 머리카락은 부인의 사랑의 징표였어요. 자신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는 머리카락을 통해 남편과 함께 있기를 바랐던 거죠. 제 작업 또한 주변 사람들의 신뢰와 애정이 있어서 이뤄질 수 있었어요. 제 작업에 대한 관심과 믿음이 있었기에 머리카락을 제공해줄 수 있었죠. 결국 머리카락으로 그린 제 그림은 ‘우리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戀書)’와도 같습니다.”

 

 

황재형, '새벽에 홀로 깨어 II(세월호 어머니)'. 캔버스에 머리카락, 162.2 x 130.3cm. 2017년 9월.(사진=가나아트)


 

이밖에 조선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면서 치른 의식을 담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일제의 자본 수탈로 지은 사택 풍경을 담은 ‘하모니카 나고야’, 일제 치하의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강주룡, 을밀대에 오르다’, 기생 신분임에도 독립운동에 앞장 선 여성을 담은 ‘변매화’, 광부의 초상을 담은 ‘드러난 얼굴’, 세월호에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를 그린 ‘새벽에 홀로 깨어’ 등을 전시에 선보인다. 그림 속 시대적 배경과 이야기는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현실에 집중했다는 것. 그리고 이 풍경은 머리카락으로 그려지며 당시대의 한(恨)부터 사랑, 미래에 대한 의지와 꿈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읽는 시도를 한다.

 

“고대 사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머리카락은 생명의 순환 과정 그 자체로 간주돼 왔죠. 머리카락으로 작업을 하면서 타인의 생명성을 느꼈고,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머리카락으로 그려진 그림을 섬뜩하다고 느끼는 것은 머리카락의 생명력이 아닌 배타성을 지닌 마음 때문입니다. 살았던, 살아간 인간의 몸에서 비롯된 머리카락에서 강렬한 인간의 본성을 느껴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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