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월 2025 >>
   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31 

방문자

홈 > 世界 색점선

전체 [ 533 ]

373    [쉼터] - 오랜만에 만나는 조선족 민속그림... 댓글:  조회:1787  추천:0  2017-08-28
[연변] 원로 화가 지승원의 민족화작품 [ 2017년 08월 25일 ]                                         지승원, 아호 백암. 1930년 길림성 연길현출생 연변일보 미술편집 력임 연변박물관 예술부 주임 력임 연변미술가협회 부주석 력임 연변문자예술협회 원로 고문 지승원화백은 원로 화가이며 서예가이다. 그는 연변일보사 미술편집으로 재직중 삽화를 많이 그렸으며 민속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우리글 서체인 아리랑체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88세 고령의 지승원화백은 지금도 명동서예사랑모임(운영자 서영근)에서 지도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372    [쉼터] - 한번이라도 상상의 이상으로 상상해보기... 댓글:  조회:1645  추천:0  2017-08-28
[ 2017년 08월 31일 ]       대통령상(대상)-굽이굽이 단풍길. 충북 단양 보발재.서 촬영. 이하 관광공사 제공 © News1   ...올해로 45회를 맞은 이번 공모전은 ‘상상 이상의 대한민국'을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내외국인의 뜨거운 관심과 참여 속에 1만3500여 점의 작품이 출품... 관광홍보성, 활용성, 독창성, 예술성 등을 평가 기준으로 응모작을 심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금상)-가창오리 날다. 전북 고창 동림호수서 촬영. © News1 한국관광공사 사장상(은상)-하늘길. 대전 장태산휴양림서 촬영. © News1 한국관광공사 사장상(은상)-빙벽의 함성. 충북 영동서 촬영. © News1 한국관광공사 사장상(동상)-소나무와 능선. 충남 금산 대둔산에서 촬영. © News1 한국관광공사 사장상(동상)-제주 새별오름의 제주들불축제 © News1 한국관광공사 사장상(동상)-아침 출근길 . 전남 여수 묘도에서 촬영. © News1 한국관광공사 사장상(외국인 부문 특별상)-Umbrella Mania . 서울 메세나폴리스.© News1  
371    세계 가장 아름다운 폭포들 댓글:  조회:1619  추천:0  2017-07-24
세계 가장 아름다운 폭포들 [ 2017년 07월 20일 ]     아이슬란드 황금폭포   베네수엘라 엔젤 폭포   이구아수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   빅토리아 폭포   후커우(壺口) 폭포   이구아수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   빅토리아 폭포   광시(廣西) 더톈(德天) 폭포   브라질 스모크 폭포   스위스 라인 폭포 ///신화넷              
370    뭇꽃들아, 너희들 세상이다... 댓글:  조회:3801  추천:0  2017-07-2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사진 모음   국화 분재 감상 /http://blog.daum.net/vacancy33/831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http://blog.daum.net/vacancy33/8279     튤립(Tulip)의 향연 /http://blog.daum.net/vacancy33/8260         세상에 이런 풀이...하얀 황새풀 (White Cottongrass) /http://blog.daum.net/vacancy33/5763   tptkddptj rkwkd dkfmaekdns fnvlsltm /http://blog.daum.net/vacancy33/7944     국화꽃 시 모음 /http://blog.daum.net/vacancy33/7849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한 난초들 /http://blog.daum.net/vacancy33/7906     국화 향기를 그대에게 보냅니다. /http://blog.daum.net/vacancy33/7747     플루메리아(Plumeria) / 러브 하와이 /http://blog.daum.net/vacancy33/7682     감자밭에 감자꽃 /http://blog.daum.net/vacancy33/763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샤프란꽃(saffron) /http://blog.daum.net/vacancy33/7635     나는 해바라기 /http://blog.daum.net/vacancy33/5672   사람닮은 꽃 기이한 꽃 /http://blog.daum.net/vacancy33/7501     식물들 보기 민망한 꽃과 식물들 /http://blog.daum.net/vacancy33/736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알스트로메리아 (Alstroemeria) /http://blog.daum.net/vacancy33/7326     불가사리꽃 /http://blog.daum.net/vacancy33/7437     세상에서 가장 큰 꽃 / 라플레시아 (Rafflesia: Rafflesia arnoldi) http://blog.daum.net/vacancy33/7283   세상에 이런 쌍년을 봤나? /http://blog.daum.net/vacancy33/7295   세상에 이런 꽃이 있다니... /http://blog.daum.net/vacancy33/7208     연꽃처럼 아름다운 다육식물들 /http://blog.daum.net/vacancy33/7202     세싱에서 가장 아름다운 군자란 /http://blog.daum.net/vacancy33/7175     연꽃과 연꽃시 모음 /http://blog.daum.net/vacancy33/711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바라기꽃 /http://blog.daum.net/vacancy33/711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양귀비꽃 /http://blog.daum.net/vacancy33/7103     독말풀 /http://blog.daum.net/vacancy33/7072     수정초(死亡之花) /http://blog.daum.net/vacancy33/7022       오동나무꽃(포동화) /http://blog.daum.net/vacancy33/6978   에키네시아( Echinacea)  / 자주루드베키아 /http://blog.daum.net/vacancy33/6880     밀짚꽃 ( straw flower) http://blog.daum.net/vacancy33/6915     능소화 /http://blog.daum.net/vacancy33/690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란꽃 /http://blog.daum.net/vacancy33/689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알리아 /http://blog.daum.net/vacancy33/680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할미꽃 Korean pasque flower /http://blog.daum.net/vacancy33/672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마릴리스 /http://blog.daum.net/vacancy33/6682     희귀한 민들레 꽃 /http://blog.daum.net/vacancy33/668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튤립꽃 /http://blog.daum.net/vacancy33/6622   라일락(Lilac)꽃이 보고 싶다면 /http://blog.daum.net/vacancy33/661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달래꽃 /http://blog.daum.net/vacancy33/6553     특이한 코스모스 꽃 감상 /http://blog.daum.net/vacancy33/527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금색 자귀나무꽃(골드 합환화) /http://blog.daum.net/vacancy33/648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리시안셔스[Lisianthus] /http://blog.daum.net/vacancy33/648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공작선인장(epiphyllum) /http://blog.daum.net/vacancy33/6464     봄 마중/꽃분재 http://blog.daum.net/vacancy33/645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선화 /http://blog.daum.net/vacancy33/642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꽃 /http://blog.daum.net/vacancy33/6393     황금색 목련꽃 /http://blog.daum.net/vacancy33/6374     설중매화(雪中梅花) /http://blog.daum.net/vacancy33/636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Blue Rose /http://blog.daum.net/vacancy33/567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미아 / 산 월계수 꽃 http://blog.daum.net/vacancy33/6319     황금 연꽃 바나나 /地涌金蓮花 /Chinese Yellow Banana /http://blog.daum.net/vacancy33/6299       별을 닮은 꽃 /http://blog.daum.net/vacancy33/6293     꽃이 피고 있습니다 ./http://blog.daum.net/vacancy33/626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춘화(迎春花) /http://blog.daum.net/vacancy33/6255     꽃중에 꽃이요, 꽃 속에 꽃이다 /http://blog.daum.net/vacancy33/6248     꽃 피는 GIF /http://blog.daum.net/vacancy33/623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베고니아 /http://blog.daum.net/vacancy33/6233       기괴한 야생화...모래 음식 /http://blog.daum.net/vacancy33/6207     치명적인 유혹 blue flower /http://blog.daum.net/vacancy33/6195     수정꽃 /http://blog.daum.net/vacancy33/295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팬지꽃 /http://blog.daum.net/vacancy33/6189   눈 속에서 피는 꽃 /http://blog.daum.net/vacancy33/617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낭화 /http://blog.daum.net/vacancy33/616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무릇,피안화 /http://blog.daum.net/vacancy33/614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네이션 꽃 /http://blog.daum.net/vacancy33/6099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장미꽃 /http://blog.daum.net/vacancy33/608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패랭이꽃(石竹花) /http://blog.daum.net/vacancy33/539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후쿠시아(Fuchsia)꽃 /http://blog.daum.net/vacancy33/6027       이처럼 예쁜 꽃이 있다니... /http://blog.daum.net/vacancy33/601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육이 꽃 /http://blog.daum.net/vacancy33/596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색매(五色梅) 칠변화(七變花) /http://blog.daum.net/vacancy33/594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참새를 닮은 꽃,화작화(禾雀花) http://blog.daum.net/vacancy33/5937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완두콩 꽃 /http://blog.daum.net/vacancy33/5929     향기롭고 아름다운 쟈스민꽃 /http://blog.daum.net/vacancy33/5899   불꽃같이 아름나운 꽃,  봉황화, 불꽃나무 /http://blog.daum.net/vacancy33/587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야꽃 /http://blog.daum.net/vacancy33/5846     행운을 전하는 귀하고 귀한 파란 매화꽃 /http://blog.daum.net/vacancy33/583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화꽃의 아름다움 /http://blog.daum.net/vacancy33/5823   꽃으로 만든 만다라 /http://blog.daum.net/vacancy33/581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당화꽃 /http://blog.daum.net/vacancy33/5795   세상에 이런 풀이...하얀 황새풀(White Cottongrass) http://blog.daum.net/vacancy33/5763     무지개색 장미(레인보우 장미) /http://blog.daum.net/vacancy33/5774   부부간의 금슬을 좋게 해 준다는 자귀나무 꽃(합환화) http://blog.daum.net/vacancy33/576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합꽃 모음 /http://blog.daum.net/vacancy33/5716   아름다운 꽃 분재 /http://blog.daum.net/vacancy33/427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차(茶)꽃과 동백(冬柏)꽃 /http://blog.daum.net/vacancy33/5695     계수나무(桂樹)꽃을 보셨나요? /http://blog.daum.net/vacancy33/564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의 제왕  용왕꽃/ (帝王花) /http://blog.daum.net/vacancy33/564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홍학꽃 (안시리움 안드레아넘(Anthurium andraeanum) /http://blog.daum.net/vacancy33/5582   순결과 행복의 상징 치자꽃 /http://blog.daum.net/vacancy33/558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Black Flowers /http://blog.daum.net/vacancy33/5554   보리수화(菩提花),보리수나무 꽃 /http://blog.daum.net/vacancy33/5535   국화분재 /http://blog.daum.net/vacancy33/5508   꽃 구경 오세요 2 /http://blog.daum.net/vacancy33/5493   꽃 구경 오세요 1 /http://blog.daum.net/vacancy33/5492   무지개색 행복국화(七彩幸福菊) /http://blog.daum.net/vacancy33/548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팔꽃 /http://blog.daum.net/vacancy33/547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궁화 꽃 /http://blog.daum.net/vacancy33/488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락조화 /http://blog.daum.net/vacancy33/5458   희귀한 장미꽃 /http://blog.daum.net/vacancy33/544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처음 보는 꽃 /http://blog.daum.net/vacancy33/5416   천산 연꽃 설산 연꽃  천산설련(天山雪莲) 설하화(雪荷花)/http://blog.daum.net/vacancy33/4954   신이 만든 야한 꽃 /http://blog.daum.net/vacancy33/768   보라색 벚꽃  /자카란다 /http://blog.daum.net/vacancy33/3633   특이한 코스모스 꽃 감상 /http://blog.daum.net/vacancy33/5278     분홍색 아카시아 /http://blog.daum.net/vacancy33/3690   노란 아카사아꽃 보셨나요? /http://blog.daum.net/vacancy33/403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화꽃 /http://blog.daum.net/vacancy33/5412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꽃/벌집생강(Beehive Ginger) /http://blog.daum.net/vacancy33/5220   푸른 안개 꽃(Blue mist flower) /http://blog.daum.net/vacancy33/4684   악마의 손 꽃 /http://blog.daum.net/vacancy33/4625   숙녀의 손(Lady,s hand)꽃 /http://blog.daum.net/vacancy33/4621   꽃 피는 선인장의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http://blog.daum.net/vacancy33/3767   꽃피는모습 고속 찰영 /http://blog.daum.net/vacancy33/2030   담배꽃/http://blog.daum.net/vacancy33/2191      
369    [력사는 말한다] - 전쟁은 싫다 싫어... 댓글:  조회:1877  추천:0  2017-06-25
                              피난민들 남녀노소없이 피난 봇짐을 이고 지고...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가재 도구를 이고 있는 여인은 우리네의 어머니다... "같이 갑세" ... "퍼뜩 안오고 머하노...  쌕쌕기가 벼락 친데이...  싸게 싸게 따라 오이라"...   피난민 남자들의 짐들이 유난히 더 무거워 보인다... 할아버지의 등에는 온갖 살림살이가 짊어져 있고... 오른손으로 행여 놓칠새라 손자의 손을 꼭 잡고 있고...   ... "와 못가노. 이왕지사 이래된거 지비 가서 죽을란다."      
368    [그것이 알고싶다] - 서예작품에서 낙관을 어떻게 찍어야?... 댓글:  조회:1893  추천:0  2017-06-25
오픈지식 낙관의 도장은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 낙관의 도장은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  서예작품에서 도장을 찍는 것은 독특한 예술로서 지금까지도 이 방법을 고수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글자와 도장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정취를 발하는데 이는 구성상에 있어서 강렬한 효과를 낼 뿐 아니라 작품상에 있어서도 풍부한 예술미를 풍겨주고 있다. 서예작품에서 도장은 일반 손도장과는 다른 것으로 스스로 일정한 법도를 지니고 있다. 만약 일반 손도장을 작품에 찍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금상첨화의 작용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예술미도 손상시키게 된다.  서예작품에서 사용되는 도장은 먼저 작품의 크기와 글자의 대소, 낙관 후의 공백 등을 고려하여 배치하고 선택하여야 한다. 일반적인 규 율로 볼 때 도장은 서명을 할 아랫부분이나 왼쪽에 찍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장을 행간에 다 찍어서도 안되며, 본문의 끝부분 보다 쳐져서도 안되며, 본문의 긑부분과 나란히 되어서 도 안된다.  도장의 크기는 낙관의 글씨와 비슷한 것이 좋은데 이보다 조금 작은 것은 무방 하나, 낙관의 글씨보다 도장이 커서는 안된다.  도장을 가장 적게 찍을 때는 하나를 찍으며 보통은 두 개를 찍는다.  만약 두 개를 찍을 때 같은 형태는 피하여 하나는 주문(朱文), 또 다른 하나는 백문(白文)으로 하는 것이 좋다. 서예작품의 도장은 위에서 말한 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에는 허한 곳과 실한 곳, 성긴 곳과 빽빽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너무 빽빽한 곳은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하여 도장을 찍어 이것을 보충하고, 반대로 너무 성긴 곳도 도장을 빌려 충실함을 채워주 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작품이 시작되는 곳에 도장을 찍는 것을 일반적으로 두인(頭印) 또는 한장(閑章)이라고 한다. 한장은 백문·주문 이외에 반달모양, 장방형, 원형, 반원형, 타원 형, 호로병형, 자연형, 꽃모늬형 등 매우 다채롭다.  내용도 일정하지 않아서 서재명이나 연 호 또는 성어나 경구 등을 새겨 넣기도 한다.  사용할 때에는 공간의 넓이와 내용 등을 고려 하여 정하는 것이 좋다. 도장은 합당한 장소에 제대로 찍어야 생명감이 발휘된다. 필묵의 작용에서 붓은 일으켰는데 먹은 따라오지 않은 것에다 한 장을 찍게 되면 한가롭지 않게 되니, 이것을 이른바 판에 박은 듯한 것을 파괴하여 안온하고 평형을 이루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서예에서 도장은 결코 함부로 찍어서는 안된다.  먼저 도장과 글씨체가 조화를 이루었는가를 고려하여야 한다. 대개 제백석(齊白石) 풍의 도장은 단도직입적인 급취장(急就章)에 어울 리고 정성을 들여 깨알 같이 쓴 소해(小楷)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자유분방하게 쓴 작품에 가는 철사줄 같이 새긴 도장을 찍는다면 조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작품의 풍격에 따라서 도장도 거기에 어울리는 것으로 선택하여야 한다.  다음으로는 작품의 먹색을 고려하여야 한다. 도장은 작품의 먹색에 따라 백문으로 할 것 인지 아니면 주문으로 해야 할 것인지를 선택하여야 한다.  만약 먹색이 농도가 짙은 작품일 경우에는 백문을 선택하여 찍으면 붉은 빛의 인주 색깔과 검은빛의 먹색이 강렬한 대비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작품의 효과도 그만큼 지대하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먹색이 여리고 우아한 작품이라면 주문을 선택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들은 작품의 성질과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 도장만 많이 찍으면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 은 대단히 경계하여야 할 일이다.  작품에 있어서 도장은 마치 여자가 화장을 다한 뒤에 바 르는 입술 연지와 같아서 산뜻하면서도 격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함부로 하게 되면 오히려 격이 떨어져서 천한 맛을 면치 못하게 되니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367    중국 근대 화단의 거장 서비홍 댓글:  조회:5341  추천:0  2017-06-24
중국 근대 화단의 거장 徐悲鸿     徐悲鸿(1895年7月19日-1953年9月26日),原名徐寿康,江苏宜兴屺亭镇人。中国现代画家、美术教育家。中国现代美术的奠基者,与张书旗、柳子谷三人被称为画坛的“金陵三杰”。1953年9月26日,徐悲鸿因脑溢血病逝,享年58岁。 현대 중국의 화가. 상하이어음(上海語音)으로는 슈 페이온으로 불린다. 초명은 수강(壽康). 장쑤성 의홍현 출신.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초보를 익히고, 중등학교 미술교원이 되었다. 뒤에 상하이 진단대학에 입학. 1919년 유럽에 유학, 파리에서 화가 아뇽 프리안에 사사. 1923년까지 에콜 드 보자르에 수학. 1927년 귀국해서 다음해 북경 국립예술학원장, 또 다음해 남경 국립중앙대학 예술계 교수가 되고 1930년 이후 유럽각지에서 중국 근대화전을 개최. 1934년, 소련에 가서 레핀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진하고, 서양화에 국화(國畫)의 수법을 수용하고, 특히 화마(畫馬)로 알려졌다. 해방후는 중앙미술원 원장이 되었다. 북경에 서비홍기념관이 있다. 서비홍(徐悲鴻)은 미술가면서 미술행정가 겸 교육가로, 24세 때 프랑스로 유학했다. 9년간 근대 서양화를 배웠으며, 귀국 후에 중국화 창작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했다. 최초로 서양에 유학한 중국의 화가로, 서양 그림의 관념과 기법·도구 등을 중국에 소개했으며, 미술 교육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현재 중국 미술교육의 기반을 마련했다. 해부학·색채학·소묘·비례법 등을 강조했으며, 단순히 서양의 유화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의 수묵화와의 접목을 시도해 새로운 수묵화의 세계를 개척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말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덤으로 보기@@ ‘천마의 고향’ 신강 昭蘇에서...       톈산(天山)산 북쪽의 산기슭에 있는 아득히 멀고 광활한 이리(伊犁)대초원은 수초가 울창하고 토지가 비옥해 예로부터 준마가 많기로 유명. 이로 인해, 신장(新疆, 신강) 이리 카자흐(哈薩克)자치주 자오쑤(昭蘇)현은 ‘중국 최후의 천마 고장’이라 불린다. 지금도 여전히 늠름한 외관과 씩씩하고 힘찬 기세,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빠르게 질주하는 이리마(伊犁馬), 이리종마(伊犁種馬)가 대량으로 보존. 멀리 보이는 설산과 광활한 대초원을 내달리는 수많은 말들이 어우러져 웅장하고 위엄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인민망 ============================ /////////////////////////////////////////////////////////////////   출생 1895년 사망 1953년   쉬베이훙 20세기 초 근대 중국 회화의 역사를 새로 쓴 화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서양 유학을 다녀온 화가이자, 중국적인 소재를 유화로 그린 첫 화가이기도 하다. 중국에 근대식 미술 교육을 도입했고, 서양화의 사실주의를 받아들여 전통 중국화를 개혁해야 한다는 ‘중국화 개량론’을 주장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어떻게든 실행하는 성격으로 주류 화단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치바이스, 리커란 등 재야 화가들을 주류 화단으로 끌어들이며 중국 미술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895년 중국 동부 양쯔 강 하류에 있는 장쑤 성의 이싱 시에서 태어났다. 화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여섯 살 때부터 전통 회화와 서예를 배웠다. 1915년 상하이로 이주해 개인 작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1917년 도쿄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고, 이듬해 귀국하여 중국 항일 운동 지도자이자 당시 베이징대학교 총장이었던 차이위안페이의 도움으로 베이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유화와 드로잉을 공부했고, 이탈리아, 독일 등을 여행하며 서양 미술의 여러 기법을 배웠다. 1927년 귀국 후에는 난징 중양대학교와 상하이 난궈 예술대학교의 강사를 역임했고, 1929년에는 베이핑 예술 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베이핑 예술 학원 원장이 되자마자 눈여겨 두었던 재야의 거장 치바이스에게 교수직을 제안했다. 당시 예순다섯 살이던 치바이스는 쉬베이훙보다 서른한 살이나 많았다. 게다가 치바이스는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기에 쉬베이홍의 결정에 보수적인 화단의 반발이 거셌다. 쉬베이훙은 치바이스의 교수직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원장직에서 사퇴했다. 치바이스는 후에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을 역임하고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는 등 중국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일찌감치 주류 미술계에 자리를 잡은 쉬베이훙은 치바이스 외에도 리커란, 중졸 학력의 만화가 출신의 예첸위, 중국 화가 최초로 국제 무대에서 입상한 웬원량 등 주류 미술계가 무시했던 작가들을 직접 발굴하고 지원하며 근대 중국 미술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1933년 쉬베이훙은 근대 중국 회화 전시회를 조직해서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러시아를 순회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싱가포르와 인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37년 다시 충칭 중양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했고, 1938년에는 인도의 문호 타고르의 요청으로 인도 국제대학교에서 강연과 전시회를 진행했다. 이때 타고르와 간디를 만난 경험을 〈우공이산〉이라는 작품으로 옮겼는데, 이 그림은 2006년 3300만 위안(약 40억 원)에 거래되며 당시 중국 내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1946년에는 베이핑 예술 전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쉬베이훙은 소묘, 유화, 중국화에 두루 능했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서양 미술을 익힌 후에는 이를 중국 전통화에 접목하여 새롭고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했다. 풍경화, 인물화를 비롯해 꽃, 동물, 역사, 신화 등 다양한 소재를 섭렵했는데, 특히 말, 사자,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은 애국주의 정서와 맞물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세상이 평화로워 농사가 즐겁다〉도 농부의 평화로운 일생을 묘사했지만, 묵묵히 일하는 농부들도 전쟁에서 활약하는 군인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애국주의 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실력 있는 화가를 발굴하고, 미술 교육 근대화를 주도했으며, 서양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 현대 중국 회화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1949년 중국 건국 이후 중국 문학예술계연합회 상무위원,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으로 뽑혔고, 중앙미술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베이징에 있던 자택은 1954년 쉬베이훙 기념관이 되었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세운 최초의 화가 기념관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88위. 〈세상이 평화로워 농사가 즐겁다〉 =========================   제작시기 1951년 가격 $42,006,000(440억 7000만 원)1) 작가 쉬베이훙(徐悲鴻, 1895~1953)   쉬베이훙, 〈세상이 평화로워 농사가 즐겁다〉, 수묵 채색화 / 150×250cm “중국 화단의 천박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옛것에 집착하며 나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옛것들 중에 좋은 것은 지키고, 다 죽어 가는 것들은 살리고, 신통치 않은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채워서 서양의 회화와 융합할 필요가 있다.” -쉬베이훙 우리나라에서는 ‘서비홍’으로 더 많이 알려진 쉬베이훙은 중국 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유명 화가다. 흔히 말 그림에 뛰어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풍경화도 잘 그렸고, 수묵화뿐 아니라 유화도 그렸다. 프랑스 유학파인 그는 서구의 사실주의 회화를 받아들여 보수적인 중국화를 개혁하려고 애를 썼다. 베이징 대학교에서 발간하는 한 잡지에 보수적인 중국 화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중국화 개량론〉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당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고, 1933년에는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중국 근대 수묵화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문인화가 인생과 사회의 문제를 표현하는 새로운 회화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중국의 정치사회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다. 쉬베이훙은 사실주의 회화를 주창하고 전쟁과 민중의 삶 등 중국 현안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의 그림은 그런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런 특징들이 〈세상이 평화로워 농사가 즐겁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농부 3명이 땅을 경작하는 평범한 농촌 풍경이다. 그림이 완성된 1951년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로 중국도 참전 중이었다. 그림 왼편 위에는 ‘농부들도 용감한 군인들이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는데, 이는 당시 참전한 중국군들뿐 아니라 농부들도 뒤에서 보이지 않게 국가를 뒷받침하는 애국자들이라는 생각을 적어 넣은 것이다. 쉬베이훙은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대학인 중앙 미술 학원의 초대 총장과 중국 미술관 협회의 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송백고립도 전서사언련〉을 그린 치바이스를 주류 미술계로 끌어들인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주류 미술계는 치바이스를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쉬베이훙은 그의 탁월함을 알아보고 삼고초려 끝에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베이핑 예술 학원(베이징 미술 학원의 전신)의 교수로 모셔 왔다. 당시 쉬베이훙이 서른네 살, 치바이스가 예순다섯 살로 쉬베이훙이 서른한 살이나 어렸다. 하지만 보수적인 베이징 미술계는 쉬베이훙의 파격적인 행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온갖 나쁜 소문에 시달리던 쉬베이훙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치바이스의 교수직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홀로 편견과 맞서 싸우며 뭐든지 내 고집대로 하겠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았다. 쉬베이훙은 쉰여덟 살에 심장 마비로 급사해 짧은 생을 마쳤다. 쉰여섯 살에 그린 이 그림은 저명한 시인이자 역사학자인 친구 궈모뤄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궈모뤄가 1951년에 스탈린 평화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그려 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궈모뤄 박물관을 거쳐 중국 베이징에 있는 쉬베이훙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다. 서양 미술이나 동양 미술이나 소장 기록이 좋은 그림은 잘 팔리게 마련이다. 이 그림은 2011년 12월 베이징 바오리 경매에서 2억 6680만 위안(440억 70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에 낙찰되었다. ///////////////////////////// \\\ 서비홍(1895-1953)   강소 의흥 사람. 1917년 일본에 가서 미술을 배움. 1927년 파리고등미술학교를 졸업. 1949년 중앙미술학원의 초대 원장이 됨. 대표작 : 전횡오백사. 우공이산. 군마. 타고르상등이 있음.   우공이산의 구상, 창작과 유전은 모두 전설적인 색채를 담고 있으며, 중국현대미술창작과 수장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39년 12월 서비홍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초청을 받아, 싱가포르, 랭구운, 캘커타를 거쳐 타고르의 거주지인 Shantiniketan으로 갔다. 1940년 2월에는 간디가 샨티니케탄을 방문했고, 타고르는 간디에게 서비홍을 소개시켜 주었다. 후세인들이 적은 글에 의하면 서비홍은 우공이산의 이야기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간디를 위하여 화상을 그리던 중에 이 인도독립의 영혼인물의 몸에서 우공의 영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후에 의 초고와 인물사생을 수십장 그렸다. 5월에 서비홍은 히말라야산맥의 시킴으로 가면서 구절양장의 길을 뚫어놓은 것을 보고는 의 구상을 보다 완성시켰다.   8월 24일 오후 1시, 서비홍은 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전에 초벌그림만 30여폭을 이미 그렸었다. 11월에, 커다란 수묵화 과 유화 의 창작을 완성했다. 인도여행기간중에 창작한 수묵화 , , , , 유화인 , , 등의 스케치와 소묘를 완성했다.   1940년 11월, 서비홍은 타고르와 헤어져,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1941년 4월, 미국의 화교연합회와 임어당, 새진주등이 서비홍에게 미국으로 와서 전시회를 열도록 준비했다. 11월 전시회의 도록과 참고사진을 미국으로 보내는 동시에 수백장의 유화작품을 해운회사에 보내어 미국으로 보냈다. 나머지 대부분은 상자에 넣어 운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같은 날 새벽4시부터 싱가포르에 일본비행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15일에 빈성이 함락되고, 싱가포르로 몰려왔다. 진퇴양난의 서비홍은 수장한 백여상의 회화창작과 고대서화작품, 근대명가의 서화, 골동품, 도자기, 고서적진본등을 각각 한괴준의 홍모단원과 황만사의 백선재에 나누어 보관했다. 1942년 12월 일본기의 공습을 피해, 서비홍은 나농천의 숭문학교로 옮겨갔다. 이 학교는 복건 안계회관에서 만든 것으로 교장인 종청해는 서법에 뛰어났고, 서비홍과 안면이 있었다. 싱가포르가 위험한 것을 보고, 서비홍은 황만사등과 협의하여 밤에 백선재에 보관했던 회화, 서적, 비첩, 골동, 인장 및 을 포함한 10폭의 유화를 노농천으로 옮겨와서 옛날 우물 속에 숨겨두었다. 1942년 1월에 서비홍은 싱가포르함락을 전후하여 인도배를 타고 싱가포르를 떠났다.   1945년 9월,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황만사, 임금승, 종청해등 세 사람은 그동안 3년8개월간 감춰두었던 작품등을 꺼내고 서비홍에 서신을 보냈다. 서비홍은 회신에서 종교장이 일본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켜준 것에 감사하며, 그 중에 아무 것이나 하나를 택해서 가지시도록 하였다. 종청해는 을 선택했다.   1953년 서비홍이 병으로 사망하고 다음해 2월, 싱가포르에서 서비홍의 작품전을 열었는데, 이 때 이 전시된다. 이 작품은 1999년 대만의 모 화랑에서 구매했으며, 2000년 중국가덕에서 인터넷경매를 했고, 대만의 수장가가 250만위안의 가격으로 가져갔었다.   2006년 6월 24일에서 26일까지 북경한해춘계 경매회가 케리센터호텔에서 거행된다. 여러 경매작품중에 해외에서 수십년을 머물렀던 서비홍의 대표적인 유화인 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은 서비홍이 창작완성한 후에 65년만에 북경으로 처음 돌아온 것이다. 낙찰경매가격은 3000만위안으로, 서비홍작품중 최고가격을 기록했다.   서비홍의 유화작품은 두 개가 세상에 남아 있다. 서비홍은 일찌기 두 폭을 그렸다. 이번 한해에서 경매된 것은 첫번째 작품으로 크기가 비교적 적은 것이다(46X107.5센티미터), 현재 서비홍기념관에 수장되어 이는 은 두번째 작품이며 크기가 400X200센티미터이다. 위에 설명한 사항은 모두 첫번째 작품에 관련된 것이다.   두번째 작품은 문혁기간중에 물기가 많은 방안에 두었기 때문에, 색깔이 변했다. 중국과 프랑스의 유화전문가들이 5년의 시간을 들여 원상으로 복구한 후에야 전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재현하는데에는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에 경매된 소폭의 우공이산은 지금까지 서비홍의 항일전쟁기간동안의 창작풍모를 더욱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서비홍의 말        서비홍의 말 그림은 매우 유명합니다. 사람들이 그가 그린 말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신을 감화시키고  미적교화를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의 아름다움은 서비홍만이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대(唐代)의 조패(曹霸), 한간(韩干)이 그린 말 그림은 이미 명화사(名画史)에 남겨져 있습니다.  당삼채(唐三彩)자기에 그려진 말 조각 역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역대 왕릉에도 말의 석조가 없는 것이 없으며 출토문물인 [마답비연(马踏飞燕)]에 동으로 조각된 말 역시 그 구상이 독특한 예술진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비홍의 말은 고금에 입각하여 그 자신만의 특색을 입혔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의 울타리 밖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예술거장의 성취라 하겠습니다.         서비홍의 말은 조형상으로 말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말의 웅장함, 건장함,용맹함을 표현했습니다. 황야를 거침없이 내달리고 창공에 머리를 치켜든 기세는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설사 고개를 숙이며 물을 마시는 모습이라도 말의 용맹스러움을 드러낼 정도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말의 살찌고 통통한 기세에 미혹되지 않고 오히려 말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예술적 매력이 있는 특징인 ‘강건함’을 포착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말 그림은 그 기골을 그리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서비홍은 말의 기골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 그려내었습니다.        서비홍의 말은 중국화입니다.그는 중국화의 전통을 사용하여 선으로써 형태(线造型)를  만들었고 항상 속이 꽉찬 듯한 중묵(重墨)을 사용했으며 자유분방한 필세에 그의 독특한 표현을 더해 중국화의 필묵미를 남김없이 드러냈습니다.       또한 그는 서양의 화법을 흡수하여 국부적으로는 체면조형(体面造型)을 접목하였으며 사물 이미지의 빛과 그림자(명암)에 주의했습니다. 이렇듯 동서양 화법을 결합했던 천의무봉한 표현수법은 그의 말을 붓과 먹의 정취가 물씬 풍기게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렸던 바람 앞의 작은 새들, 가지 위의 까치, 한가로이 쉬고 있는 고양이 그림과는 그 풍격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효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비홍의 말은 자신의 개성과 정치이념을 그 속에 기탁해놓은 것입니다. 그의 말은 [구방고]그림에서의 고삐 있는 말 이외에 다른 말들은 모두가 재갈이나 고삐, 안장도 없이 자유자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자유를 열망하는 대중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조국의 명운이 불안정하게 변화되어감에 따라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그는 각기 다른 모습의 말을 그렸습니다. 해방전에는 혹은 질주하고 혹은 걸음을 멈추어 있는 모습이었으나 해방이 되어 새로운 세상이 왔을 때 그의 말은 몸을 훌쩍 솟구치며 기뻐 날뛰고 있습니다. 화가의 강렬한 애증이 화지에 생생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술미는 예술가의 주관 감정이 객관 형상위에서 드러나고 한데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서비홍의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그렸던 달리는 말 그림의 제발을 본다면 예술거장의 영혼과 정치태도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면 해방전에 그렸던 그림 중 “ 이 밤은 결코 기나긴 밤이 아닐 것이며, 막막하고 황량한 것도 그 다함이 있을 것이니(直须此夜非长夜,漠漠穷荒有尽头)”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암흑 같았던 구사회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명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충만했습니다. 해방 후에 그린 말 그림에는 “세상의 어지러운 온갖 전쟁도 결국 백성이 주인됨으로 돌아가고, 험난한 길 없어져 평탄한 길 열렸네(山河百战归民主,除尽崎岖大道平)”라고 했는데  이는 의심할 것 없이 벅찬 환호를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서비홍의 달리는 그림은 진실을 위반했다고 하면서 생활 속의 말은 앞발이 착지 전에는 곧게 펼 수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사실 예술 진실은 원래 생활 진실의 기계적인 복제일수는 없습니다만 달리는 말의 앞발을 똑바로 뻗게 하였기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질주하는 기개를 보여주고 말의 본질적인 특징을 표현하고 대중의 심경을 기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이 사물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았을 때 진실을 다소 수정하는 과장을 허용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점이 거장의 뛰어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진실을 지나치게 따지는 화가는 예술창조의 오묘함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주제가 필요할 때면 서비홍의 달리는 말 역시 동일하게 말의 앞발을 구부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해방을 경축하는 그 분마도가 그런 경우인데 등장하는 이 말은 기쁨에 차 뛰어오르고 있습니다 하늘 높이 떠 오르는 기세가 대단합니다. 이 때 거두고 있는 발은 의심할 것 없이 곧게 펴 있는 앞발보다 신기(神气)함을 더합니다. 이것은 바로 “형식주의도 자연주의도 모두 진흙탕이다”라는  서비홍의 예술 주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차 한잔의 미학 서비홍의 《파인급수도》 경매가 1억7100만원 서비홍의 《파인급수도》(巴人汲水图) 근현대 서화 경매가격이 하늘을 찌를듯하다. 리가염의 《장정》(长征)이 1억 750만원의 경매가로 중국근현대서화 최고경매기록을 창조한후 일전에 있은 한해(翰海)가을 경매회에서 서비홍의 《파인급수도》(巴人汲水图)가 1억7100만원의 가격으로 락찰돼 중국 근현대서화 경매기록을 갱신했다. 《파인급수도》는 높이가 30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62센치메터인데 서비홍이 1937년 항일전쟁당시 중경에 머물면서 당시 눈으로 보아온 중경사람들의 물을 긷는 간고하면서도 대를 이어 내려갈 항쟁정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1938년도에 완성한 그림이다.    
366    중국 근대 미술의 피카소 제백석 댓글:  조회:2760  추천:0  2017-06-24
중국의 피카소 齐白石   齐白石90岁画的虾,专家鉴定价150万元。 제백석(齊白石, 1864년 1월1일~1957년 9월 16일), 남, 후난(湖南) 창사푸(長沙府) 샹탄(湘潭) 출생(出生). 원명(原名)은 순지(純芝), 자(字)는 위청(渭青), 호(號)는 란정(蘭亭)이다. 후에 백석(白石), 백석산옹(白石山翁),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으로 호(號)를 바꾸었다.  제백석(齊白石)은 근현대(近現代) 중국(中國) 회화(繪畵) 화가(畫家)로 유명(有名)한 세계적(世界的)인 인물(人物)이다. 일찍이 목공(木工)일에 종사(從事)했으며 후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生計)를 유지(維持)하고 50세 이후 베이징에 정착(定着)했다. 꽃과 새, 곤충(昆蟲)과 물고기, 산수(山水), 인물(人物) 그리기에 능했으며 필묵(筆墨)에 힘이 있고 색채(色彩)가 농후(濃厚)하고 그림 전체는 경쾌(輕快)하며 간결(簡潔)하고 생동감(生動感)이 넘치며 예술성(藝術性)이 소박(素朴)하고 인정(人情) 넘친다. 물고기, 새우, 곤충(昆蟲)을 소재(素材)로 삼아 자연(自然)의 정취(情趣)를 끊임없이 그렸다. 제백석(齊白石)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필사(筆寫)하고 진한(秦漢)의 비문(碑文)을 모방(模倣)했으며 소박(素朴)한 행서(行書), 전각(篆刻), 시문(詩文) 쓰기에 능했다. 중앙미술학원(中央美術學院) 명예교수(名譽敎授), 중국미술가협회(中國美術家協會) 주석(主席) 등을 역임(歷任)했다.대표작품(代表作品)으로는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 ‘묵하(墨蝦)’ 등이 있다. 저작(著作)으로는 ‘백석시초(白石詩草)’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다. 1963년 세계 10대 문화(文化) 유명인물(有名人物)로 선정(選定)되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화단(畫壇)의 꽃이라 불릴 정도(程度)로 새우는 제백석(齊白石)의 대표적(代表的)인 예술(藝術) 부호(富豪) 중 하나이다. 제백석(齊白石)은 평생(平生) 관찰(觀察)을 통해 새우의 특징(特徵)을 심도(深度) 있게 묘사(描寫)하려 애썼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이미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간결(簡潔)하면서도 과감(果敢)한 필묵(筆墨)은 물속에서 노니는 새우들을 생동감(生動感) 있게 표현(表現)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활발(活潑)하고 영민(靈敏)하고 민첩(敏捷)함을 표현(表現)했으며 생명력(生命力)이 넘친다. 한 쌍의 짙은 눈, 머리 중간(中間)은 초묵(焦墨)을, 좌우(左右)는 담묵(淡墨)을 사용(使用)해 그린 새우의 머리 부분(部分)을 보면 다양(多樣)한 변화(變化)를 느낄 수 있다. 딱딱한 껍질은 투명(透明)하게 표현(表現)하기 위해 먹 농도(濃度)의 강약(强弱)을 조절(調節)해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표현(表現)했다. 한 번 붓질에 한 마디를 표현(表現)한 새우의 허리부분은 연속(連續)으로 붓을 놀려 점점 가늘어지는 새우 허리의 리드미컬함을 부각(浮刻)시켰다. 齐白石(1864年1月1日─1957年9月16日),生于湖南长沙府湘潭(今湖南湘潭)人。原名纯芝,字渭青,号兰亭。后改名璜,字濒生,号白石、白石山翁、老萍、饿叟、借山吟馆主者、寄萍堂上老人、三百石印富翁。是近现代中国绘画大师,世界文化名人。早年曾为木工,后以卖画为生,五十七岁后定居北京。擅画花鸟、虫鱼、山水、人物,笔墨雄浑滋润,色彩浓艳明快,造型简练生动,意境淳厚朴实。所作鱼虾虫蟹,天趣横生。齐白石书工篆隶,取法于秦汉碑版,行书饶古拙之趣,篆刻自成一家,善写诗文。曾任中央美术学院名誉教授、中国美术家协会主席等职。代表作有《蛙声十里出山泉》《墨虾》等。著有《白石诗草》《白石老人自述》等。2011年5月22日,他的最大尺幅作品《松柏高立图·篆书四言联》被拍出4.255亿元人民币的天价。       제백석(齊白石)은 중국 근대 미술문화사상 유명한 화가이고 서예가이며 전각가입니다. 그는 베이징 국립예술전문학교의 교수, 중앙미술대학 명예교수, 베이징화원 명예원장, 중국미술협회주석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예술창작에 몸담아 온 제백석은 3만여폭의 그림과 3천여편의 시, 유수의 자필원고를 남겼습니다. 특히 산수화, 초상화에 능한 제백석의 대표작으로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 "묵하(墨蝦)" 등이 있으며, 저서로 "백석시초(白石詩草)",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습니다. 제백석의 "자술(自述)"에는 "1927년에 과차골목(跨車胡同)15번지 즉 지금의 13번지에 있는 집을 구매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백석은 바로 베이징시 서성구(西城區) 과차골목 13번지에 위치한 이 옛집에서 생의 최후 30년을 보냈습니다. 베이징 서단(西單)상업구 벽재골목(辟才胡同)에 이르면 고층빌딩의 수림속에 묻힌 자그마한 사합원이 보입니다. 청회색 벽돌담으로 둘러쌓인 이 사합원이 바로 제백석옛집입니다. 동서향의 이 사합원은 번잡한 현대도시의 분위기에 고풍적인 묘미를 가해줍니다. 지금의 제백석옛집은 기존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제백석 후손들이 기억하는 이 옛집은 시적정취가 다분하고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정교한 정원이었습니다. 사합원은 3채 북방(北房)이 주체를 이루었는데 가운데 방은 객실 겸 식사 공간이고 동쪽 방은 거실, 서쪽 방은 화실(画室)이었습니다. 전반 사합원의 구조는 간단하고 내부도 소박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화실의 서쪽켠에 놓인 회화용 책상 남단에는 넓이가 각기 다른 선지(宣紙)들이 쌓여있고 북단에는 문방사우와 염료를 담았던 크고작은 그릇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습니다. 등받이가 있는 원형의자 우에는 방석이 놓여있었는데 이는 제백석이 서예 혹은 회화 창작할 때 앉았던 의자입니다. 회화용 책상 맞은켠에는 높다란 책상이 있고 그 우에는 유리케이스가 달린 시계가 놓여있습니다. 백석화실의 거실에는 원형과 네모의 두가지 형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상이 있고 긴 등받이 의자가 북쪽 벽에 놓여져 있습니다. 추운 날에 제백석은 의자에 이불을 깔고 식후 잠간 여기에 앉아 휴식을 취하군 했습니다. 제백석의 생활은 화려함과 거리가 먼 소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응접실에는 소파도 없이 그저 걸상만 몇 개 놓았을 뿐입니다. 제백석 후손들의 소개에 의하면 제백석은 안전을 고려해 1935년 북쪽 방앞의 복도를 철사슬로 묶어 난간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림에 글씨나 시문을 쓸 때 "철옥(鐵屋)"이라는 글자를 적어 이곳에 대한 깊은 정을 표현했습니다. 1953년 제백석은 이 철옥을 "백석화옥(白石畫屋)"으로 수정하고 전서체로 쓴 편액을 만들어 걸었습니다. 제백석이 살던 이 정원에는 포도와 능소화(淩霄), 버드나무들이 자라나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이 졌습니다. 정원의 북쪽켠에는 지붕을 능가하는 높다란 대추나무가 있었고 북쪽과 남쪽 정원을 이어주는 원형문은 무늬를 새긴 벽돌로 지어 고풍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제백석은 이 사합원에서 담담한 일상을 보내면서 2만여점의 작품 창작했습니다. 그가 간결하고 힘찬 붓을 휘둘러 그린 화초며 벌레, 새우, 산수, 인물은 정교함속에서도 독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제백석은 이런 화풍으로 현대중국화를 위해 소박하면서도 참신한 예술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필묵으로 중국화의 현대적인 예술정신을 표현했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삶의 지혜와 철학을 전했습니다. 제백석의 산수화는 예술창신에 대한 자부심과 통찰을 통한 깨달음을 표현했고 인물화는 표정에 담긴 내면의 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제백서의 서예 또한 간결하면서도 대범하고 지어 웅건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특무 우두머리였던 북평 위경사령(偽警司令) 선철오(宣鐵吾)는 일찍 제백석의 명성을 듣고 생일잔치날 그를 초대했습니다. 연회장에 도착한 제백석은 주변을 살펴보고 잠간 사색에 잠기더니 종이를 펴고 붓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잠간 사이에 종이에는 게가 그려졌습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숨쉬는듯 생동한 이 회화작품에 감탄해마지 않았고 선철오도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습니다. 이때 제백석은 붓끝을 놀려 그림옆에 몇자를 적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옆으로 가는 게의 특성을 비유해 "네가 언제까지 횡행(橫行)할지 두고보자"였습니다. 그러고는 소매를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돌아갔습니다. 이는 매국노에 대한 제백석의 풍자와 분노가 절실히 보여지는 대목이었습니다. 1937년 일본침략군이 북평을 점령한 뒤 제백석은 문을 닫고 일체 내방객을 사절했습니다. 그것은 위만주군의 두목들이 그림을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문에 "종래로 벼슬은 민가에 오지 않는 법이니 일체 접대를 사절한다"고 공지하고 옆에 비취새를 그린 그림도 덧붙였습니다. 그때 이 그림은 참으로 독특했는데요, 보통 비취새를 그리면 돌이나 강가에 서있는 비취새와 수면우로 올라오는 물고기를 함께 그리는데 제백색은 물고기를 그리지 않고 깊은 물속에 있는 새우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옆에 "비취새의 그림에는 물고기가 반드시 등장하지만 특별히 새우를 그렸네, 새우가 뜨지 않으니 비취새인들 어찌하랴?"라는 내용의 문구를 적었습니다. 즉 제백석은 자신을 새우에 비유하고 한간들과 일본 침략자들을 비취새에 비유해 이자들이 호시탐탐 그림을 노린다해도 절대 그려줄 의향이 없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숭고한 민족절개를 지닌 중국 근대 현대 미술사에서의 걸출한 화가, 서예가, 전각가 제백석은 이곳에서 20세기 중국 회화예술의 휘황한 업적을 쌓았고 후손들에게 소중한 예술자원을 남겨주었습니다. 오늘날 제백석옛집은 기존의 우아한 정취를 잃은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1984년 5월 베이징시 정부는 이곳을 베이징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지금은 제백석 후손들의 저택으로 개관하지 않았습니다. 과차골목 13번지에 있는 사합원은 오늘도 제백석의 못다한 이야기를 담은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 중국 새우그림의 대가 제백석(齊白石) 百科全書/古今資料   인민망(人民網) 제공 ◎글자풀이: 가지런할 제(齊) 흰 백(白) 돌 석(石)   가지런할 제(齊)는 갑골문(甲骨文)에는 창끝모양 세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大部分) 이것을 보리이삭과 같은 곡물(穀物)로 해석(解釋)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現在)의 자형(字形)인 제(齊)를 눈여겨보면 그 해석(解釋)이 매끄럽지 못하다. 도(刀)나 씨(氏), 그리고 중앙부(中央部)의 신(辛) 모양(模樣)은 모두가 도검류와 관련(關聯)이 깊으며 자형하부는 그것을 가지런히 꽂을 수 있는 대(臺)라 할 수 있다. 즉 칼이나 창을 일정(一定)하게 짠 틀에 나란히 꽂아둔 모양(模樣)을 본떠 ‘가지런하다’는 뜻을 부여(附與)했다. 제(齊)자는 보리이삭의 알곡들 배열(配列)이 가지런하게 패어있는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가지런하다(齊)'라는 뜻인 글자이다. 제(齊)자는 본디 몇 개의 알곡 꼴이었던 것이 후에는 한 포기 꼴로 바뀌었다. 그런데 현재 '제(齊)' 꼴만큼 심오(深奧)한 연상력(聯想力)을 자극(刺戟)하는 글자도 드물 것이다. 즉 제(齊)자는 다섯 가지 자형(字形)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亠'자는 알곡들 끝 부분에 난 뾰족한 가시들이 한군데 묶인 보리이삭 '모가지'를 나타낸다. 둘째, '아(丫)'자는 낱알들이 모두 가지런하게 두 가닥으로 배열(配列)된 꼴이다. 셋째, 글자 왼쪽의 '도(刀)'자는 보리이삭 알곡의 끝 부분이 마치 칼처럼 뾰족한 꼴이다. 넷째, 글자 오른쪽 '씨(氏)'자는 낱알이 다음 해에 '씨앗'이 되는 것을 상징(象徵)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글자 아래쪽 '사다리(月)' 꼴은 이삭 모가지 하나의 전체적(全體的)인 '가지런함'뿐만 아니라 이삭 각각의 형상(形象)이 가지런하게 배열(配列)한 '반복성(反復性)'에 대한 의미(意味)들이 내포(內包)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의 의미(意米)들이 스며들기라도 하듯 제(齊)자는 '가지런하다(齊)'라는 뜻 외에도 '모두(齊)'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제(齊)'로 발음(發音)한다. 또한 제(齊)자는 제(祭)를 지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飮食)과 언행(言行)을 삼가며 부정(否定)을 멀리하는 일이 마치 보리이삭처럼 가지런한 몸과 마음가짐을 해야 하므로 '재계(齋戒)하다·상복(喪服)'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재(齋)'로 읽힌다. '제(齊)'자의 가지런함이 제단(示)에 스며있어야 한다는 '엄숙할 재(齋)'자는 조상(祖上)에게 제(祭)를 올리는 후손(後孫)들인 '씨(氏)앗'들이 기본적(基本的)으로 가져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제(齊)자는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 옷을 가지런하게 입는다는 의미(意味)에서 '옷자락(齊)'의 뜻으로 쓰여 '자' 음(音)으로 소리 난다. 또한 제(齊)자는 포함(包含)된 '칼 도(刀)'자가 있어서 가지런하게 '자르다(齊)'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전' 음(音)으로 읽힌다. 따라서 제(齊)자는 "칼로 자른 듯이 모두 가지런하다"라는 형상(形象)을 연상(聯想)하면서 스며든 글자들의 의미(意味)를 이해(理解)하면 쉽다.   흰 백(白)은 사람의 엄지손가락을 본뜬 것으로 손톱(爫)의 흰 부위(部位)를 나타낸 데서 ‘희다’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엄지손가락’의 흰 부위(部位)를 본떴다는 설(說)외에도 ‘사람의 머리’를 상형(象形)하였다는 설(說)이 있는데,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백(白)과 백(百)이 혼용(混用)되다가 금문(金文)에 이르러 백(百)이 숫자 100을 뜻하는 것으로 정착(定着)되어 희다는 뜻을 가진 백(白)과 구분(區分)하기 시작(始作)하였다. ‘희다’는 뜻으로 주(主)로 쓰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상형(象形)하였다는 설(說)이 있어서인지 ‘아뢰다’는 뜻도 있다. 백(白)은 갑골문(甲骨文)에서부터 나타나지만 그 당시(當時) 이미 희(白)다는 추상적(抽象的) 의미(意味)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글자의 자원(字源)에 대해서는 의견(意見)이 분분(紛紛)하다. 백(白)이 껍질을 벗긴 쌀을 그렸다거나 태양 일(日)이 뜰 때 비추는 햇빛을 그렸다는 등 여러 설(說)이 있으나, 엄지손가락을 그렸다는 곽말약(郭沫若)의 설(說)이 가장 통용(通用)되고 있다. 그의 해설(解說)에 의하면, 엄지손가락은 손가락 중에서 가장 크고 첫째 손가락이기 때문에 엄지손가락을 그린 백(白)은 ‘첫째’나 ‘맏이’가 원래 뜻이고, ‘희다’는 의미(意味)는 가차(假借)된 것이라고 해석(解釋)한다. 그것은 백(伯)이 사람 인(人)의 항렬(行列)에서 첫째(白)를 말하는 글자인 데서도 그 증거(證據)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돌 석(石)의 구성(構成)은 산기슭 엄(厂)과 돌덩이를 뜻하는 구(口)모양으로 이루어졌다. 즉 언덕(丘)이나 산기슭(厂) 아래에 굴러다니는 돌덩이(口)의 모양(模樣)을 본떠 ‘돌’을 그려냈다. 석(石)자는 언덕(厂) 아래로 굴러 떨어진 덩어리(口)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돌(石)'을 뜻하는 글자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석(石)자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돌의 종류(種類), 재료(材料) 또는 성질(性質), 상태(狀態)"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공학 분야(理工學分野)에서 접(接)하는 원소(元素) 중에 돌에서 채취(採取)한 물질(物質)이거나 상온(上溫)에서 고체 상태(固體狀態)인 "무기물질(無機物質)"의 명칭(名稱)은 대부분 석(石)부에 속하는 글자라는 것도 아울러 알아두면 원소명칭(元素名稱) 및 성질(性質)을 기억(記憶)하는 데 도움(幇助)이 된다.     ◎설명: 제백석(齊白石, 1864년 1월1일~1957년 9월 16일), 남, 후난(湖南) 창사푸(長沙府) 샹탄(湘潭) 출생(出生). 원명(原名)은 순지(純芝), 자(字)는 위청(渭青), 호(號)는 란정(蘭亭)이다. 후에 백석(白石), 백석산옹(白石山翁),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으로 호(號)를 바꾸었다.   제백석(齊白石)은 근현대(近現代) 중국(中國) 회화(繪畵) 화가(畫家)로 유명(有名)한 세계적(世界的)인 인물(人物)이다. 일찍이 목공(木工)일에 종사(從事)했으며 후에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生計)를 유지(維持)하고 50세 이후 베이징에 정착(定着)했다. 꽃과 새, 곤충(昆蟲)과 물고기, 산수(山水), 인물(人物) 그리기에 능했으며 필묵(筆墨)에 힘이 있고 색채(色彩)가 농후(濃厚)하고 그림 전체는 경쾌(輕快)하며 간결(簡潔)하고 생동감(生動感)이 넘치며 예술성(藝術性)이 소박(素朴)하고 인정(人情) 넘친다. 물고기, 새우, 곤충(昆蟲)을 소재(素材)로 삼아 자연(自然)의 정취(情趣)를 끊임없이 그렸다. 제백석(齊白石)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필사(筆寫)하고 진한(秦漢)의 비문(碑文)을 모방(模倣)했으며 소박(素朴)한 행서(行書), 전각(篆刻), 시문(詩文) 쓰기에 능했다. 중앙미술학원(中央美術學院) 명예교수(名譽敎授), 중국미술가협회(中國美術家協會) 주석(主席) 등을 역임(歷任)했다. 대표작품(代表作品)으로는 ‘와성십리출산천(蛙聲十裏出山泉)’ ‘묵하(墨蝦)’ 등이 있다. 저작(著作)으로는 ‘백석시초(白石詩草)’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述)’ 등이 있다. 1963년 세계 10대 문화(文化) 유명인물(有名人物)로 선정(選定)되었다.   ◎해설: 제백석(齊白石)의 그림의 특징(特徵)은 농후(濃厚)한 향토적(鄕土的) 숨결, 순박(淳朴)한 농민(農民) 의식(意識)과 순수(純粹)한 낭만(浪漫)이 살아 있는 동심(童心), 여유(餘裕) 넘치는 시적(詩的) 정취(情趣)는 제백석(齊白石) 예술(藝術)의 생명력(生命力)이라 할 수 있다. 제박석(齊白石)은 예술(藝術)을 ‘오묘(奧妙)함은 그런 것 비슷함과 비슷하지 않음 사이에 있다(妙在似與不似之間).’라고 주장(主張)하며 독특(獨特)한 사의(寫意: 중국화의 전통 화법 중의 하나. 정교함을 추구하지 않고 간단한 선이나 묵색 또는 채색으로 사람의 표정이나 사물의 모양을 묘사하는 것) 국화(國畵) 스타일을 형성(形成)하여 홍화묵엽파(紅花墨葉一派)를 열었다. 그는 특히 과일(果實,) 채소(菜蔬), 꽃, 새, 곤충(昆蟲), 물고기 및 인물(人物), 산수(山水)를 그림의 주제(主題)로 했으며 한 때 오창석(吳昌碩)과 ‘남오북제(南吳北齊)’라는 명예(名譽)를 누리기도 했다. 꽃과 새우 그림에 능했던 그는 먹 농도(濃度)의 강약(强弱)을 조절(調節)해 과감(果敢)하게 터치했으며 그의 그림 속 주제(主題)는 그의 붓 끝에서 생명력(生命力) 넘치는 주인공(主人公)으로 태어났다. 제백석(齊白石)은 순박(淳朴)한 민간예술(民間藝術) 스타일을 전통(傳統) 문인(文人) 화풍(畫風)과 서로 융합(融合)해 중국(中國) 현대(現代) 꽃, 새 그림의 최고봉(最高峰)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화단(畫壇)의 꽃이라 불릴 정도(程度)로 새우는 제백석(齊白石)의 대표적(代表的)인 예술(藝術) 부호(富豪) 중 하나이다. 제백석(齊白石)은 평생(平生) 관찰(觀察)을 통해 새우의 특징(特徵)을 심도(深度) 있게 묘사(描寫)하려 애썼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이미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간결(簡潔)하면서도 과감(果敢)한 필묵(筆墨)은 물속에서 노니는 새우들을 생동감(生動感) 있게 표현(表現)했다.   제백석(齊白石)의 새우 그림은 활발(活潑)하고 영민(靈敏)하고 민첩(敏捷)함을 표현(表現)했으며 생명력(生命力)이 넘친다. 한 쌍의 짙은 눈, 머리 중간(中間)은 초묵(焦墨)을, 좌우(左右)는 담묵(淡墨)을 사용(使用)해 그린 새우의 머리 부분(部分)을 보면 다양(多樣)한 변화(變化)를 느낄 수 있다. 딱딱한 껍질은 투명(透明)하게 표현(表現)하기 위해 먹 농도(濃度)의 강약(强弱)을 조절(調節)해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표현(表現)했다. 한 번 붓질에 한 마디를 표현(表現)한 새우의 허리부분은 연속(連續)으로 붓을 놀려 점점 가늘어지는 새우 허리의 리드미컬함을 부각(浮刻)시켰다.   제백석(齊白石)의 제자(弟子)는 매우 많다. 그 중 유명(有名)한 사람으로는 리쿠찬(李苦禅), 리커란(李可染), 왕쉐타오(王雪濤), 왕수스(王漱石), 왕주주(王鑄九), 쉬린루(許麟廬), 천다위(陳大羽), 리리(李立), 러우스바이(婁師白), 장더원(張德文), 샤오룽스(蕭龍士) 등이 있으며 중국(中國) 희극(戲劇)의 대가(大家)인 메이란팡(梅蘭芳), 평극(지방 전통극) 대가인 신펑샤(新鳳霞)도 있다. 자료 제공 : (중국국제방송)    
365    명나라 자수 "탕카" 중국 예술품의 최고 기록 경매... 댓글:  조회:1710  추천:0  2017-06-24
명나라 탕카 3.48억 홍콩달러에 낙찰, 中예술품 기록                 (흑룡강신문=하얼빈) ...예술품 경매 전문업체인 홍콩 크리스티즈는 앞서 8천만 홍콩달러의 가치로 예측했던 거폭의 명나라 융러(永乐) 어제(御制) 훙옌머디(红阎摩敌) 자수 탕카(唐卡)가  3억4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이는 세계 경매에서 중국 예술품의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출처: 신화넷  
364    [쉼터] - 연변 룡정 만무과수원에서... 댓글:  조회:2290  추천:0  2017-05-19
연변 룡정 만무과수원에서 [ 2017년 05월 19일 ]     연변 룡정 만무과수원의 면적은 1500헥타르, 무공해로 생산된 이곳의 사과배는 뛰어난 품종과 맛으로 국가녹색식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국가원산지보호제품으로 인정받아 국내의 20여개 성,시는 물론 한국, 조선, 러시아, 일본 등 국외로 수출되고 있다.                 
363    [쉼터] - 흑백사진에 새 혼백 불어넣다... 댓글:  조회:2015  추천:0  2017-04-24
[서울신문 나우뉴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페이스북 브라질의 한 여성이 역사적인 순간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의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만들어 공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마리나 아마랄(21) - 트위터 화제의 주인공은 21세 여성 마리나 아마랄. 현재 디지털 컬러리스트로서 활동하고 있는 아마랄은 지금까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 세계적인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체 게바라,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유명인사들의 흑백사진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존 F. 케네디 - 페이스북 그녀가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공개한 일련의 사진을 보면, 빛바랜 흑백사진에 색이 더해지자 마치 이들 인물이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준다. 윈스턴 처칠 - 페이스북 사실, 그녀는 이런 작업을 취미 삼아 시작했지만, 점차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에게 사진 보정 및 수정 전문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 - 페이스북 실제로 그녀의 작업은 사진 한 장에 수백 개의 레이어를 생성해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해야 하는 것이어서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라고 한다. 체 게바라 - 페이스북 제임스 딘 - 페이스북 그렇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 역사적 순간의 사진을 되살려내 보람도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있던 14세 폴란드 소녀 - 페이스북 또한 그녀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의 체포 당시 모습이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있던 14세 폴란드 소녀 등 충격적인 사진에도 색을 입히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사진을 하나로 모아 유튜브에 영상으로 공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마리나 아마랄 //윤태희 기자
362    피카소는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댓글:  조회:2420  추천:0  2017-04-18
[오마이뉴스 김형순 기자]   ▲ 서울시립미술관 입구인 덕수궁 돌담길. 아래는 1958년 샤갈과 피카소가 서로 형제처럼 얼싸안고 찍은 사진.       피카소를 한마디로 규정하긴 어렵다. 그는 분명 세기의 심장을 꿰뚫은 천재였고 통찰력 넘치는 광인이었고 현대판 돈환이었고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였다. 그러나 피카소를 굳이 규정하라면 21세기형 인간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하다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에 피카소처럼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모두가 피카소처럼 문화를 지향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할 것이다. 문화란 선악, 시비, 유무를 떠나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삶의 최고 단계이다. 때론 철학적 진리나 과학적 사실까지도 다 포함하기에 그 범위는 광대(廣大)하다. 그래서 어릿광대와 그렇게 잘 통했나보다. 피카소는 처음부터 부자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잘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돈도 따라 붙은 것이다. 전시회 전체 작품가격만 6천억이고 140여점 평균가격이 43억 원이고 그 보험료만 5억5천만 원이라니 그는 얼마나 부자인가!   ▲ '솔레르씨 가족(1903)' 캔버스에 유화 150×200cm 리에주 근현대미술관, 벨기에. 이번 한국 피카소전 아니면 보기 힘든 청색시대 걸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청색시대 말기 작으로 장밋빛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추정가가 약 500억에 달한단다.    /서울시립미술관   시인 고은의 미국체험기 강연에서 미국 최상류층은 365일 미술 감상을 하면서 시낭송회를 가진다고 들었다. 그건 미(美)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고 행복이기 때문이리라. 앞으로 미국의 미술시장은 더욱 활성화될 것이고 한국도 오래지 않아 명화 사재기 현상이 아파트 투기 이상일지 모른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그의 어록들이 인상적이다. 마치 피카소가 옆에 속삭여주는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미(美)를 발견하며 살았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는 말인데 이런 정신이 바로 현대미술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그는 평생 서서 일하며 그림 그리는 노동자처럼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에서 보는 그의 눈빛은 늘 이글거리고 그의 몸에는 힘과 위엄과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그의 죽기 1년 전에 그린 그림 '모자를 쓰고 앉아있는 사람(1972)'을 보면 정말 경이롭다. 청색·장밋빛 시대에 못지않게 그의 투우사 같은 기질이 말년에도 여전했다.   ▲ 3번째 연인 올가를 떠난 직후의 작품으로 '댄스(1925)' 캔버스에 타피스리(장식융단)에 유화 215×142cm 테이트 갤러리 런던. 춤의 율동과 움직임, 그 입체적 조형성이 현재적 감각으로 철철 넘친다.    ⓒ서울시립미술관   입체파라는 신대륙 발견 그는 잠시도 새로운 실험과 도전과 창조를 위한 변화와 발전을 끊이지 않았다. 평생 실험가처럼 모험가처럼 살았다. 노끈이나 신문지로 만드는 콜라주을 탄생시켰고 기존 통념 깨는 극단의 단순화 정신을 낳았으며 이는 입체파를 낳는 모체가 되었다. 또한 그는 미니멀리즘, 추상파 등 현대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괄목할 만한 과학발전에도 2차례의 끔찍한 세계전쟁과 학살을 경험하면서 피카소는 조국 스페인이 파시즘의 소굴이 되는 것을 보다 못해 결국 도망치듯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런 측면에서 소속감이 없던 그가 나치즘·파시즘이 극에 달했던 1944년에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한 건 당연했다. 그는 당시 공산계열의 레지스탕스 투쟁을 높이 샀다. 전시회 제목처럼 20세기는 분명 그의 '위대한 세기'였다. 20세기를 다원적 사회로 나아가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철재로 건물을 짓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을 세워 세상을 다시 본 에펠처럼 청색·장밋빛 시대 이후 입체파라는 충격적이고 경악할 미술의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상을 다시 봤다.   ▲ '거울 앞의 잠자는 여인(마리 테레즈, 1932 左)', 판자에 유화 130×97cm. 개인소장. '우는 여인(1937 右)', 55.5×45cm 바이엘러 재단, 바젤.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하고 관능미 넘치는 4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를 원구, 원통 등 입체적 방식으로 표현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그런 이면에는 '울고 있는 여인'에서 보듯 아프리카 원시조각과 평면미술에서 '원구, 원통, 원뿔' 방식으로 입체미술의 가능성을 여는데 결정적 영감을 준 세잔의 영향을 받아 세계미술사의 새 장을 열었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보인다 이번 전시회 주제가 인데 피카소는 정말 인간을 좋아했던 작가다. 그는 잠시도 인간이라는 동반자 없이 숨 쉴 수 없는 존재였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 정신적 유대감과 함께 육체적 친밀성을 요구했다. 작가로서 자신의 예술에 대한 강력한 동조자나 지지자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쏟다 분 사랑이나 우정의 강도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소나기성 세례에 매혹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죽마고우인 카사게마스가 1901년 자살했을 때 피카소는 정말 망연자실했다. '청색시대'는 작가에게 미래에 명약이 될 수 있었던 가난과 고통이 극심했다. 그는 특히 시인들을 좋아했다. 막스 자콥, 기욤 아폴리네르,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장 콕토, 루이 아라공, 르네 샤르, 자크 프레베르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밖에도 독일 화상인 스타인 남매, 야수파 대가 앙리 마티스 그와 견해를 같이 했던 조르주 브라크 등과 끊어지지 않는 토론을 나누었다.   ▲ '꿈(마리 테레즈, 1932 左)'. 시립미술관 1층 숍에서 팔리는 마리 테레즈와 자클린의 '꿈꾸는 여자', '우는 여자' 시리즈 복제품. '우는 여자' 시리즈는 전쟁 중 인간의 고통을 대변한다.       평생 여자들에 파묻혀 살다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그의 자서전을 읽는 것 같다. 시대별로 그림이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연인이 바뀌면 그의 그림이 완전히 달라짐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정말 이 세상에 여자를 이렇게 사랑한 남자는 없을 것 같다. 그에게 에로스는 모든 창조의 샘이었다. 성적 쾌감은 미적 감동과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피카소에게 있어 회화는 일종의 성행위나 배설행위였다. 그래서 평론가 존 리처든슨은 "그에게 예술은 섹스의 변형이고 섹스는 예술의 변형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피카소는 평생 7명의 연인과 사랑으로 창작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첫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1904)는 포근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성격의 야성형 여자였고, 둘째 연인 에바(1911)는 몸이 약해 항상 골골하는 청순가련형 여자였고, 셋째 연인 발레리나 올가(1917)는 러시아출신의 무용수로 고전미를 지닌 귀족형 여자였다.   ▲ '창가에 않자있는 여인의 반신상(1941-1942)' 이 그림은 피카소의 5번째 연인 도라 마르를 연상시킨다. 99.5×80cm 헬리네머드 갤러리 런던. 피카소전 도록 사진. 기존 통념 깨는 극단의 단순함이 매력적이다.       또 넷째 연인 마리 테레즈(1927)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형 여자였고, 다섯째 연인 도라 마르(1936)는 교양 있는 지성형 여자였고, 여섯째 연인 프랑스아즈 질로(1943)는 법대를 다닌 인텔리로 자유분방형 여자였고, 일곱째 연인 자클린(1952)은 피카소를 대부(代父)처럼 존경한 절대 헌신형 여자였다. 7명의 여자 중 피카소가 65살에 만난 21살이었던 프랑수아즈만 유일하게 그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죽은 후에 목매 자살했고 나머지 여자들도 피카소의 망령에 시달렸다. 그리고 자클린도 자살했다.   ▲ '프랑수아즈 얼굴(1948, 左)' 캔버스에 크레용 66.5×49.5cm 루이즈레이리스 갤러리. '줄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형상(1949)' 석판화 65×50 부키느리 드 랭스티튜 파리. 피카소전 도록사진. 6번째 연인 프랑스아즈를 피카소는 '태양의 여인'이라고 불렀다       결국 프랑수아즈는 그녀도 잘 아는 친구였던 주느비에브와 피카소가 둘이 서로 모르게 따로 연인 관계를 맺은 것을 알게 되면서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고 그에게 정착하려고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말까지 낳았지만 결국 10년간 연인관계를 청산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그러나 프랑수아즈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이 그렇게 바랐던 화가생활에만 전념했다. 인텔리답게 이라는 책도 썼고 피카소와 추억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피카소는 프랑수아즈가 떠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역대 여자들이 그를 태양처럼 숭배했기 때문이다.   ▲ '곱슬머리 프랑수아즈(1946)' 시리즈 .석판화 65×50cm 부키느리 드 랭스티튜 파리. 피카소는 그 때까지 별 인정을 못 받던 판화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피카소는 그녀를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겠다고 그녀를 위협했지만 그것이야말로 피카소 당신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며 응수하며 피카소의 그늘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는 독립적이었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가난한 피카소의 옛 애인들과는 다르게 자유분방했고 사소한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최후의 승리자 그러나 피카소는 말년에 자클린을 만나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고 온갖 유명세를 다 누리면서 인생의 말년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이혼을 경력이 있던 자클린은 그를 신처럼 모셨고 결국 나중에는 정식 아내가 되었다.   ▲ '꽃무늬 블라우스 입은 여인(자클린, 左 1958)' 석판화 50×66cm 부키느리 드 랭스티튜, 파리. 피카소는 마지막 연인인 자클린을 즐겨 터키 풍 옷을 입혀 그렸는데 여기선 기하학적이고 그리스풍 여인으로 그림이다(피카소전 도록사진). 오른쪽 그림은 '자클린 초상(1954)' 미술관 1층 숍에서 파는 피카소 전기(傳記) 표지사진.       그녀는 헌신적으로 피카소가 그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위의 작품 '꽃무늬 블라우스 입은 여인(자클린, 1958)'나 '자클린 초상(1954)'을 보면 피카소의 그녀의 아름다움, 그 내면과 외면 속속들이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 남편의 아이가 있음에도 그녀는 피카소 사후에 그를 못 잊어 결국 권총 자살하고 만다. 전쟁과 혁명의 20세기에 악명 높았던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는 다 가고 사회혁명가 레닌까지도 제치고 피카소가 완전한 승리자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붓 하나로 세계를 호령한 독재가인 그가 어떻게 세월이 갈수록 더 높이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일까 궁금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진정 삶과 예술을 사랑하고 인간을 아끼고 좋아했으며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덤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도 얻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그처럼 행복한 사람은 아직 못 봤다. 우리도 그에게서 배울 삶의 방식이 많다. 하여튼 그는 위대한 20세기 바로 그 자체였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시대별 구분 및 생애 그리고 어록       1881 스페인 밀라가(Malaga)에서 장남으로 출생. 1900 바르셀로나 선술집 '네 마리 고양이'에서 데생 150점 전시. 1901 개막. 파리에서 첫 개인전. 1904 파리로 영구 이주. 페르낭도 올리비에 만나 청색 시대의 우울함 벗고 로. 1907 '아비뇽의 처녀들'로 시작. 1908 칸바일러 화랑에서 첫 큐비즘 회화전 개최. 1911 첫 뉴욕 전시회. 1918~24 올가 코크로바와 결혼(1918), 1926~36 1927 17세 모델 마리 테레즈 만남. 1936 프라도 미술관장으로 임명. 도라 마르 만남. 1937 대표작 게르니카(1937) 발표, 1939 모친사망.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 40주년 개최. 1943 21살 프랑수아즈 질로 만남. 화실 나치에 의해 수색 당함. 1944 5월 프랑스 공산당 입당. 1946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 개최. 1951 도쿄에서 회고전. 한국전쟁을 테마로 '한국에서의 학살' 작업. 1953 자클린 로크 만남. 1961 자클린 로크와 결혼. 1963 바르셀로나에 피카소 미술관 개관. 1964 전 애인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 출간. 1966 소묘와 에칭에 몰두. 1967 레종 도뇌르 상 거부. 1970 1월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에 다수의 청년기 작품 기증. 1973 4월8일 프랑스 무쟁에서 타계. 각 전시장 입구에 써 붙인 피카소 어록-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나는 어린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씻어준다.-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의해서만 살아있다.- 나에게 미술관을 달라. 나는 그 속을 가득 채울 것이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김형순 기자
361    예술인은 정상성에 익숙해지것을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 댓글:  조회:3032  추천:0  2017-04-11
정신분석 이론의 문제의식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대표적 흐름이 초현실주의 미술이다.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위적 미술운동이다. 의식 중심의 예술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무의식 세계를 미술의 가장 중요한 묘사 대상으로 삼았다. 꿈과 무의식 세계를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아 필연보다는 우연을, 정상적 상태보다는 광적인 증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서양 회화를 지배하던 원근법과 투시법 등 사실적 · 입체적 표현형식을 완전히 부정했다. 프랑스 시인 브르통(Breton, 1896~1966)은 초현실주의 예술을 본격적으로 제안한 인물이다. 프로이트를 만나고 정신분석 이론에 동의한 브르통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를 기점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이 본격화된다. 선언에서 브르통은 이성의 억압을 부정하고 완전한 자유를 갈구한다. “자유라는 어휘만이 나를 격동시키는 전부다. ··· 우리가 물려받은 숱한 불명예 틈에서도 가장 위대한 정신의 자유가 우리에게 상속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성에 의한 제어와 도덕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이성과 감성의 대화, 현실과 꿈의 교감, 철학과 예술의 교감, 통일과 자유의 교감, 순수한 직관과 과학적 기하학의 교감, 대지와 우주의 교감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바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이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에 흥미를 느낀 브르통은 내면에서 억압된 욕망과 꿈, 잠재의식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업을 예술의 주요한 방향으로 제시한다. 초현실주의는 “사고의 실제 과정을 표현하려 의도하는 순수한 심적 자동주의”여야 했다. 손을 통해 흘러나오는 마음의 형상을 그대로 남겨야 한다. 이성을 통해 걸러진 예술이 아니라, 무의식을 포함하는 실제의 마음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사고를 직접 받아 쓴 것이므로 이성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 배려도 철저히 배제한 것”이다. 마음을 원래 그대로 받아쓰는 작업이다. 꿈과 무의식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 권리선언이라 할 수 있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 공감하는 많은 미술가들이 새로운 전위적 미술운동에 동참했다. 키리코(Chirico, 1888~1978), 마그리트(Magritte, 1898~1967), 달리(Dali, 1904~1989), 에른스트(Ernst, 1891~1976), 바로(Varo, 1908~1965), 미로(Miro, 1893~1983), 델보(Delvaux, 1897~1994), 탕기(Tanguy, 1900~1955), 칼로(Kahlo, 1907~1954) 등을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미술가로 꼽을 수 있다. 낯선 장소에 현실의 사물을 조합시켜 환상을 창조 브르통은 “한 마리의 말이 토마토 위를 달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은 백치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이상의 소재를 뒤섞으라고 한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주요 표현 방법인, 데페이즈망(depaysement)을 강조한 내용이다. 전치, 전위법 등으로 번역되는데, 사물을 본래 용도 · 기능 · 의도에서 떼어내어 엉뚱한 장소에 나열함으로써 초현실적 환상을 창조한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Lautreamont)의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해부용 탁자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아름답다!”라는 구절이 제공한 영감을 적극 수용하면서 대표적 표현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에른스트는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용도가 정해진 하나의 현실(재봉틀)이 제자리가 아님을 느낄 장소(해부대)에 있으면, 또 다른 현실(우산)은 소박한 용도나 신분을 모면할 수 있다. 그러면 기존 현실은 거짓 절대성에서 상대를 우회하여 새로운 진실된 시적 절대성으로 자리를 옮긴다.”1) 의식이 만들어낸 합리성과 상식에서 벗어나 우연과 무질서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사랑의 찬가〉 키리코, 1914년 키리코의 〈사랑의 찬가〉는 새로운 표현 방법을 회화적으로 개척한 작품이다. 생뚱맞게도 아폴론 석고 두상과 빨간색 장갑이 함께 걸려 있다. 배경도 서로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앞에는 고대 양식의 건축물이, 뒤로는 현대식 건물이 낯설게 서 있다. 커다란 녹색공도 그 자리에 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어디 한 군데 논리적인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비상식적 · 비논리적 상황이 만들어내는 황당함 자체가 화가의 의도일 것이다. 야페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대 회화에서 의식의 역할 문제는 회화 제작의 한 수단인 ‘우연적 그림 그리기’와 관련된다. ··· 키리코 작품에 등장한 대리석 두상과 빨간 고무장갑의 우연적 조합을 떠올릴 수 있다.”2) 키리코는 근대 합리주의 전통에 반기를 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공감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나에게 인생의 무의미함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녔는지를 가르쳐 주고, 이 무의미함이 예술로 변용될 수 있음을 깨우쳐 준 사람들이다. 그들이 발견한 무서운 공허야말로 물질에 바쳐진 영혼 없는 아름다움, 마음을 혼란케 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체다” 그의 그림은 의식 위에서 합리성의 견고한 성을 쌓고 있던 근대 서양 미술 전통에 내던져진 통쾌한 도전장이다. 키리코가 초현실주의 회화의 새 장을 열었고, 에른스트 · 달리 · 마그리트 등 대표적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무의식 세계에서 끌어낸 모습을 도발적 변형을 통해 표현 사물을 원래 모습에서 벗어나 전혀 다르게 묘사하는 것도 초현실주의 미술이 즐겨 다루는 방법이다. 특히 화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표현할 때 의도적 변형이 자주 나타난다. 사물 고유의 모습을 파격적으로 바꾸는 작업 자체가 합리주의 전통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의 의미를 사실적 표현, 인위적 균형과 조화에 맞춰온 회화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도발적 변형에서 찾았다. 그래서 브르통은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아름답지 않다.”라고 한다. 정신분석 이론이 강조하는 상징의 역할을 회화에 적극 도입하기 위해서도 변형은 유용한 방법이다. 〈작은 사슴〉 칼로, 1946년 칼로의 〈작은 사슴〉은 파격적 변형이 무의식 표현에서 얼마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칼로의 얼굴을 한 사슴이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린다. 목에서 엉덩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의 화살을 맞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바닥에 꺾여 널브러진 나뭇가지는 다가올 운명을 암시한다. 오른편 나무는 굵은 가지가 무자비하게 꺾여 나간 흉한 몰골이어서 그녀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내면의 표현이 외부 세계를 압도한다. 자신의 몸에 화살을 꽂아두고 응시하는 화가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단순한 과장이라면 신기한 느낌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과 내면이 그림 속에 진솔하고 소박하게 표현되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낀다. 유아기와 청소년기에 소아마비와 교통사고 등 계속되는 신체적 고통으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저병 증세로 오른쪽 발가락 절단 수술을 했고, 척추 수술 중의 세균 감염으로 6차례나 재수술을 받았다. 상당기간 의료용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살았다. 병원에서 칼로는 침대 천장에 큰 거울을 붙여 파괴된 자신을 응시하며 자신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나는 항상 혼자였고,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인 자화상을 그린다.”는 그녀의 말은 가장 인간적인 신음이다. 〈작은 사슴〉은 운명적 고통이 일상을 지배하는 그녀에게 일기장과 다름없는 그림이다. 아니 몇 점을 제외하곤 자화상으로 가득한 그녀의 그림 전체가 더 이상 솔직하기 힘든 자서전이고 일기장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동시 배치를 통한 초현실적 환상 현실과 비현실을 그림 안에 뒤섞음으로써 의식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무의식의 입구로 안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여기에 확실성을 부여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의 인간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적 작용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형성된 어떤 마음 상태를 반영하여 사물을 본다. 그 마음에 의식과 함께 무의식이 공존한다면 현실은 이미 비현실과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빛의 제국〉 마그리트, 1954년 마그리트는 이러한 이율배반적 이미지를 통해 현실과 의식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빛의 제국〉은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 언뜻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밤풍경이다. 짙은 밤인 듯 집과 주변의 나무는 세부 형체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시커멓다. 다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과 가로등 빛에 비친 대문이나 담벼락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하지만 하늘은 화창한 한낮의 풍경이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넘실댄다. 태양빛이 작렬하는 낮 시간의 야경인 셈이다. 시간이 그림 안에서 뒤죽박죽 섞여 있다. 우리는 밤 풍경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낮 풍경을 보고 있는가? 이미지와 시각의 배반을 통해 인식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마그리트의 설명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세상이 단지 정신적 표현으로서 내부에서 경험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을 외부의 것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현재 발생하는 일을 과거에 놓는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은 일상의 경험이 고려하는 단 하나의 정제되지 않은 의미를 상실한다.” 마그리트는 확실한 대상과 확실한 주체라는, 서구의 근대적 인식 틀 자체에 근원적 의문을 던졌다. 우리는 흔히 감각과 의식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고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세계를 구분한다. 마그리트는 의식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는 뿌리 깊은 사고방식에 비웃음으로 답한다. 정신분석 이론이 강조하듯이 무의식에서 시간 구분은 의미를 상실한다. 유아기의 경험, 심지어 아득한 옛날 초기 인류의 경험이 최근의 마음을 지배하기도 한다. 마그리트는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합리주의 전통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또한 낮이 상징하는 의식과 밤이 상징하는 무의식이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지닌다. 신화를 통한 초현실 세계의 묘사 프로이트나 융을 비롯해 많은 심리학자들은 신화를 통해 인간이 처한 조건과 마음 상태를 통찰할 수 있다고 여겼다. 프로이트가 부친 살해, 영아 살해, 근친상간 등 인류에게 각인된 억압된 성적 욕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신화에 관심을 가졌다면, 융은 집합적 무의식의 원형을 탐구하기 위해 신화에 주목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 역시 빈번하게 그리스 · 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신화적 소재를 통해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달리의 〈나르시스의 변모〉도 그러한 시도 중 하나다. 나르시스 역시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다.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피우는 것을 도와준 괘씸죄로 에코에게 다른 사람의 말 가운데 마지막 음절만 반복하는 무서운 형벌을 내린다. 이 저주로 인해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여위어 가던 에코는 나르시스도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달라고 복수의 여신에게 빈다. 그리하여 나르시스는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 샘만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탈진하여 죽는다. 그가 죽은 자리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이후 ‘나르시스(수선화)’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르시스의 변모〉 달리, 1937년 그림을 보면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을 하염없이 응시한다. 물에 몸의 일부를 담가서 사랑하는 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하다. 응시를 넘어 물에 비친 자신과 일체화된 느낌이다. 두 가지 모습인데, ‘나르시스의 변모’라는 제목답게 이미지 변형 과정이 나타난다. 왼편의 어렴풋한 실루엣에서 오른편으로 오면서 머리는 달걀로, 머리카락은 수선화로, 몸은 손가락으로 변형이 이루어진다. 뒤편의 벌거벗은 사람들은 인간의 본능적 속성으로서 나르시스 현상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신화를 빌어, 자기 육체나 자아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상태인 자기애(自己愛) 경향을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 부른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인간은 유아기에 자신을 관심이 집중되는 1차 나르시시즘 단계에 있다가 점차 외부 대상인 어머니나 이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애정생활이 위기에 직면하여 상대를 사랑할 수 없게 될 때,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2차 나르시시즘 단계에 들어간다. 달리가 어렴풋한 실루엣에서 더 견고한 사물의 형태로 나르시스의 변모 과정을 묘사한 것이 나르시시즘 단계 변화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2차 나르시시즘 단계는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1차 단계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정상적 과정에서 이탈하여 자아의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장애에 이른 상태, 자아 감각의 인플레이션 상태라는 점에서 병리적 증상이다. 나르시스는 화가 자신일 수도 있다. “나는 일생 동안 정상성에 익숙해지는 게 몹시 어려웠다.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간이 보여주는 정상적인 그 무엇이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달리 스스로 정상적 인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정신적 장애를 인식했다. 하지만 자신의 비정상적 측면과 장애를 사랑했고 심지어 자랑했다. 브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했을 때 “나는 초현실주의 자체니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고 말한 것도 자아 감각의 인플레이션 상태를 보여준다. 기호를 통한 조형적 초현실주의 상징은 프로이트 특히 융의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연히 초현실주의 미술작품 안에는 다양한 방식의 상징이 등장한다. 히스테리 증상을 분석하기 위해 심리학자들이 꿈을 분석해야 하듯이, 초현실주의 미술작품은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을 분석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치가 도형을 비롯한 추상화된 기호다. 〈어릿광대의 사육제〉 미로, 1924년 미로의 〈어릿광대의 사육제〉는 기호가 벌이는 축제와 같다. 수많은 종류의 도형과 직선, 곡선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꼼꼼하게 살피면 몇몇 군데에서 새와 물고기, 곤충, 기괴한 모습의 어릿광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알 수 없는 도형과 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놀이하듯 자유롭게 미끄러지는 검은 선과 강렬한 원색의 추상적 기호가 인상적이다. 이 그림은 미로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시절, 굶주림에 혼미한 의식 상태에서 천장 위에 떠다니는 초현실적 환상을 그림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브르통은 미로를 “가장 초현실주의적 화가”라고 극찬했다. 브르통이 강조한 초현실주의 표현 기법에 가장 근접한 화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브르통은 억압된 욕망과 꿈, 잠재의식의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사고의 실제 과정을 표현하려고 의도하는 순수한 심적 자동주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토마티즘(automatism)으로 알려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 떠오른 대로 받아쓰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자동적 묘사를 말한다. 무정형의 기호로 가득한 미로의 그림은 자동주의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점에서 브르통의 구미에 가장 잘 맞았을 것이다. 미로는 스스로도 브르통과 연관된 자기 그림의 특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림은 지적인 숙고도 아니고, 느낌이나 감정도 아니며, 오직 나의 신체에 물결치는 에너지, 드로잉의 모든 경험, 손의 자성이다.”   [Daum백과] 초현실주의 미술 – 사유와 매혹 2, 박홍순, 서해문집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60    피카소는 녀인을 위해 기꺼이 양산을 들다... 댓글:  조회:3162  추천:0  2017-04-10
  피카소와 그의 여인들...   '그림의 암살자'라고 불리는  너무 나도 유명한 피카소,  그에게도 예술가로서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지만,  여성편력 또한 그의 생애에 걸쳐 이어졌다.  그는 80여점의 여인들,친구들,시인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피카소가 여인들의 영혼을 양식삼아 작업한  벰파이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   피카소는 파리 초기시절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친구  막스자콥의 방에 끼어살면서  막스가 일하러 나가는 낮에는 자고  밤에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했다. 막스의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세기말 분위기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비관적이고 고뇌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 나타나는 청색시대이다   어려운 시기,  피카소는 마들렌느를 만난다.  몽마르트에서 캬바레를 운영하며  가난한 예술가를 후원하던 예술애호가의 딸이다.  이 초상화는  청색시대에서 분홍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  피카소가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음산한 분위기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해  피카소가 고양이를 안고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페르낭드 올리비에 집이었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인상을  "그는 작고 까맣고 후줄근했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정열로 가득차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두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피카소는 페르낭드의 사랑과 함께  우울한 청색시대를 이별하고 분홍의 시대로 넘어간다 .  1905년의 마들렌느를 그렸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과 색채로  스페인 특유의 따뜻함과 포근함이 드러나고 있다.      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올가의 모습 Portrait of Mme Olga Picasso. 1922-23. Pastel    피카소가 세번째 여자 올가를 만난 것은  장콕토 때문이었다.  1917년 장콕토는 에릭 사티가 음악을 하고  디아길레프가 무대화 하려는 발레의상을 부탁하기 위해  피카소를 찾았다. 피카소는 완강히 이를 거부 하다가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를 보고  첫눈에 반해 응하고 만다.  디아길레프는 피카소에게  그녀는 유뷰녀이니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둘은 이듬해에 정식 결혼을 한다.  올가는 피카소에게 자신을 그리려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피카소의 그림이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계기가 된다.  올가의 초상은 피카소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고전주의 미학에 충실하고 있다.       피카소는 1927년 올가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라파예트 백화 점앞에서  희랍풍의 금발의 미녀 마리테레즈를 만난다.  당시 17세도 안된 그녀를  46세의 피카소는 유혹한다.  "나는 피카소라는 사람인데 우리 함께 대단한 일을 해보자"  지금까지 나온 그녀의 초상화는 10작품 이상이 된다. 큐비즘, 초현실주의 등  미적 실험을 통해 그려진  그녀의 초상화는  조각난 반짝이는 유리 영혼처럼  얼굴의 실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의 초상화들을 통해 머리 속에서 그려보면  사진보다 명료하게 영상이 떠오른다     피카소는 마리테레즈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셍 제르멩 거리 카페에서  브르통, 엘류아르 등  초현실주의자들과 잡담을 하다가  도라라는 지적이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를 만난다. 도라를 모델로한 '우는 여자'는  피카소의 걸작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도라는 의문의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마리토레즈, 도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던  62세의 피카소는  1943년 어느날 식당에서  21살의 프랑수와즈 질로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웃 사진은 1952년 지중해에서  바캉스를 즐기고 있는  피카소와 그녀의 모습인데,  너무나도 유명한 사진이다     1954년 도라와 프랑수와즈가 피카소를 떠나고  58년 마리테레즈마저 떠난다.  그러나 피카소는  곧바로 자켈린이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  92세로 1973년 생을 마감한다.        =========================================================================================   피카소 여인, 그리고 예술     ◀「팔꿈치를 기댄 마리 테레즈」, 1939년작, 모델 마리 테레즈 1927년 마리 테레즈와 피카소가  프랑스의 라파이에트 길거리에서 만났다. 마리 테레즈는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었으며 피카소는 이 새 모델의 관능적이고  풍만한 모습을 많은 작품에서 찬양했다.   ▶     「옷을 벗고 앉은 여인」 1959년작, 모델 자클린 로크  1961년 자클린과 피카소가 발로리스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실이 뒤늦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자클린은 프랑수아즈 이후 줄곧 그의 곁에 머물렀다. 이 작품은 큐비즘과 표현주의적 양식이 섞여있다.       ◀「책에 빠진 여인」, 1939년작, 모델 도라 마르 파시즘과의 전쟁속에서  피카소는 사진작가이자 화가인 도라 마르를 만났다. 도라 마르는 지적이고 강렬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     「부채를 든 여인」 1908년작, 모델 페르낭드 올리비에  1905년 파리 바토 바부아르에서 피카소는 페르낭드와 동거에 들어갔다.  페르낭드는 몇시간씩 또는 며칠동안 피카소를 위해 모델 노릇을 해야 했다. 피카소 초기 입체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옷을 벗은 에바」 1912년작, 모델 마르셀 움베르(에바) 피카소는 마르셀을  첫번째 여자라는 의미에서 에바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마치 번개에 맞듯  격정적인 사랑에 빠졌으며  남프랑스에서 밀애를 즐겼다. 이 그림은 입체주의적 작품이나 피카소는 입체파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올가의 초상」 1917년작, 모델 올가 코흘로바  피카소는 고전적이고 구상적인 표현방식을 되찾았다.  피카소는 장콕토, 에릭 사티와 함께 초현실주의적인 연극  「퍼레이드」를 구상했고 이어 디아길레프 발레단에서 올가를 만났다.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자클린 로크'     프랑스와즈 질로와 헤어진 이후 홀로된 피카소는 외로운 생활을 달래며 새로이 도자기에 심취해 가고 있을 때 도자기 공장주의 조카인 자클린 로크를 만난다. 1961년 피카소 79세 때 자클린(35세)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피카소는 그 동안 그렸던 피카소의 여인들을 모델로 한 것보다도 많은 양의 그림을 자클린을 모델로 그린다. 어느 해는 일 년에만 70점 이상의 그녀 초상화를 그렸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사망했을 때 둘은 벌써 20년을 함께 한 사이었다. 자클린은 피카소 사후 13년 되는 해인 1986년에 자클린은 권총 자살한다. 자살을 했을까?     1953년, 72세였던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이 된 자클린 로크는  커다랗고 짙은 눈망울을 지닌 지중해 풍의 여인이었다. 자클린은 1961년 피카소와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서른 살의 젊은 여인이 어떻게 곧 여든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대답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나였지요." 그녀는 피카소에게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바친다. 피카소가 죽고 난 13년 뒤 그녀도 그를 따라 생을 마감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랑엔 그들만의 독특한 사연이 있다. 우리는 다만 사랑하는 이들을 바라볼 뿐이다.   ▲ 1955년 피카소가 자클린과 함께 자클린의 초상화를 보고 있다.                                         ▲ 발라우리스 투우장의 피카소, 자클린, 장 콕토 뒤의 기타를 들고 있는 여인은   딸인 마야이고, 그녀의 오른쪽, 장 콕토 뒤에 클라우드가 있다.    
359    毛澤東 초상화 아시아 경매 최고가 댓글:  조회:2162  추천:0  2017-04-04
마오쩌둥 초상화 141억원에 팔려… 아시아 경매 최고가 (ZOGLO) 2017년4월3일  엔드 워홀작 마오쩌둥 실크스크린 초상화(홍콩 소더비 제공)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그린 중국 전 주석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 초상화가 홍콩 경매에서 1270만 달러(약 141억3130만원)에 팔렸다. 3일 AFP 통신에 따르면 전날 홍콩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앤디 워홀이 1973년 마오 초상을 그린 실크스크린 작품이 위와 같은 천문학적인 가격에 낙찰했다.   다만 경매 전 수집가의 높은 관심을 끌면서 낙찰가가 최고 1500만 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예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마오 초상화는 서방 현대예술 작품의 아시아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소더비 측은 마오 초상화를 사들인 낙찰자가 아시아의 수장가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신원에 관해선 관례에 따라 공개하지 않았다.   이번 마오 초상화 경매에 대해 소더비는 1997년 홍콩의 중국 귀속 이래 홍콩에서 처음으로 열린 구미 현대아트를 거래하는 귀중한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마오 주석'이라는 제목을 붙인 초상화는 앤디 워홀이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1972년 역사적인 중국 방문 동안 마오쩌둥을 만나 미중화해를 실현하는 장면에 앤드 워홀이 영감을 받아 그린 22개의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마오의 모습은 '마오쩌둥 주석 어록'에 나오는 사진을 원용한 것이다. /조선일보
358    윤동주 시비 모음 댓글:  조회:4535  추천:0  2017-03-14
@@   연변 용정고급중학교 내 세워진 윤동주 시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에 적은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 서시입니다.                                                                              용정고급중학교 내 세워진 윤동주 시인 동상 - 별의 시인.       연변 연길공원 내 세워진 윤동주의 동시비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를 읊조렸던”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동시비 "참새"가  연변의 명소의 하나인 연길인민공원에 세워졌다. =========================== 보령시 개화예술공원 내 윤동주 시비   =========================== 서울 "시인의 언덕" 내 세워진 윤동주시비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내 "서시" 시비. 요절한 천재, 윤동주 시인의 언덕   [출처]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올라 열기를 식히다|작성자 여우바우                               ==================   광양 매화마을 내 세워진 윤동주시비     ===========================   광양시 망덕포구 내 세워진 윤동주시비     망덕포구 앞 에는 이렇게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밤이 새겨져있어요       윤동주시인의 필체로 각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출처] 2017.02.17 광양시 9경 망덕포구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작성자 DSC팡룬     ============================= 일본 도시샤대학 내 윤동주시비       ====================== 연세대학 내 세워진 윤동주 시비     ////////////////////////////////////     ▲ 윤동주의 '서시' 시비   윤동주 시비 위치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민족 시비 공원     윤동주 시비 위치 :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에서 좌측 아래 도로변) 청양 칠갑산 내 세워진 윤동주 시비...그리고...    소원바위 가는 길 ...윤동주 詩碑    ============== 대구 동구 ...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비운에 요절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육필 시작품 이다. 따뜻한 봄 햇살이 그대로 가슴 속에 스며드는 듯 아름답고 포근한 작품이다. 흔히 윤동주의 친필은 가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시비에 새겨진 작품은 더욱 정감이 느껴지며, 마치 윤동주의 애잔한 얼굴 표정을 대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 윤동주 시인 육필시비  윤동주 시비 위치 : 경북 김천시 대항면 김천문화공원         윤동주 시비 위치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배일길 90-43(뒤웅박 고을)                     용정 명동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비       윤동주 시인의 시비(詩碑) 유한대학 內   ////////////////////////=               윤동주 시비 위치 : 전북 군산시 금강하구둑 아래 진포시비공원     ==========================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 우지 시 강변에 세워지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시인의 작품 ‘새로운 길’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진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제공 ========================= ~^@@^~... /////////////////////////////////////////////////// 연세대학 캠퍼스 내 윤동주 시비     용정 명동촌 윤동주 생가 입구 연변 용정 윤동주 생가 내 세워진 윤동주 시비 [출처][중국 연길 여행] 1일차: 백산호텔 & 윤동주 생가|작성자 옥이                                                
357    구도상 맞는다 안맞는다 해도 명화는 명화 댓글:  조회:7122  추천:0  2017-03-04
    마네의 , 1882, 유화, 97-130cm.   마네가 살롱에 출품한 마지막 작품입니다. 웨이트레스의 뒤 거울에 술집 내부가 비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임을 알 수 있으며, 모자를 쓴 남자가 거울에 비친 웨이트레스와 마주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거울에 의해 환상적인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작품입니다. 거울에 비친 화려한 파리의 세계, 불빛 아래 서성이는 남자와 여자들의 실재감을 느끼게 하는 술병과 과일의 대비 등 마네의 회화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거울 속 웨이트레스의 뒷모습과 오른편 남자의 앞모습이 원근법으로는 일치하지 않지만, 마네는 이런 모순을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화적 구성을 위해 자유롭게 그렸습니다.               마네의 의 부분               마네의 의 부분               마네의 의 부분               마네의 의 부분      마네가 카페의 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린 대작 은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폴리 베르제르 술집은 카페, 카바레, 서커스 공연장이었으며, 입장하는 데 2프랑만 내면 되었습니다. 1869년에 영업을 시작하여 부르주아들의 매춘 장소 또는 불륜의 커플이 만나서 즐기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은 상점 점원, 가수, 배우, 댄서, 한량에서 예술가, 작가, 사업가, 은행가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출입했으며, 매춘하는 창녀들의 연령도 다양했습니다. 각종 술이 진열되어 있는 내부에는 밝은 등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으며, 담배연기가 가득했습니다. 마네는 그 명소에서 몇 시간씩 앉아 스케치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마네가 웨이트레스 쉬종에게 유니폼을 입은 채 자기 화실로 와서 포즈를 취해줄 것을 청하자 그녀는 선뜻 응했습니다. 그녀는 목에서 가슴까지 사각으로 파진 기다란 드레스에 꼭 끼는 벨벳 조끼를 걸치고 마네의 화실로 왔습니다. 마네는 대리석으로 카운터를 만들고 그녀에게 카운터 뒤에 서서 포즈를 취하게 했습니다. 마네는 술집의 세 카운터 가운데 하나를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꽃과 술병들은 마네에 의해 연출되었습니다. 마네는 그녀로 하여금 웨이트레스에게 어울리는 화장을 하게 했으며, 적당한 헤어스타일, 귀거리, 목걸이를 하게 해서 중산층이나 노동자 출신으로 보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마네는 쉬종의 가슴에 작은 꽃다발을 달게 하고 관람자를 향해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쉬종의 멍한 시선과 꽃다발이 심한 대조를 이룹니다. 쉬종 앞에 두 송이 장미가 유리잔 안에 있는데, 장미는 고대에 비너스에게 헌화한 꽃이라서 술집의 웨이트레스를 현대판 비너스에 비유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흰 장미는 순결을 상징하고, 핑크 장미는 신성한 사랑을 상징하며, 꽃병은 순결을 상징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모파상은 『벨 아미』에서 이 술집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분칠을 덮어쓴 한물간 여인들이 홀 주위의 카운터에 우두커니 서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바로 술과 사랑의 상인이었다.”       올랭피아의 차세대라 할 수 있는 금발의 쉬종 뒤에 거울이 사용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림이 관람자의 인식에 혼돈을 주는 이유는 거울이 아니라 그림 오른쪽에 나타난 쉬종의 뒷모습과 모자를 쓴 남자의 모습입니다. 거울이 쉬종의 등 뒤에 가로로 길게 부착되어 있으므로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통해 관람자는 카페 내부의 장면을 볼 수 있지만, 병렬된 그녀의 뒷모습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뒷모습은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림의 구성상 뒷모습은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모자를 쓴 남자 모델은 실재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거울에 반사된 모습처럼 보이며, 두 사람의 위치를 설명해줄 만한 거울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네는 불가해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우리의 인식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회화에서는 이 같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마네가 살던 당대 파리의 삶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다는 의의를 지닙니다. 그는 이 작품에 모든 기교와 폭넓은 주제 그리고 마지막 열정을 불어넣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모자를 쓴 남자는 앙리 뒤프레이이며, 거울에 반사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마네의 친구들이 있는데, 화면 왼쪽 끝에 모자를 쓴 남자는 화가 가스통 라투세이고, 그 옆에 흰 옷을 입은 여인 메리 로랑과 잔 드 마르시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림 윗 왼쪽 끝머리를 자세히 보면 공중에서 스커스하며 그네를 타는 한 여인의 발목이 보입니다. 이 작품이 1882년 살롱에서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도저히 인식될 수 없는 세계가 실재처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마네의 인생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기념비적 해석은 항상 관람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제공했습니다. 이 그림은 구도상 잘 맞지 않다고 늘 논란이 되지만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가이 이러한 구도현상을 만들어 낼수 있다하니... 이 명화는 고가격 그림으로 정평나 있는데야... ==================================         에두아르 마네의 명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마네가 회저병을 앓고 있던 1882년 그린 작품으로 그는 이듬해 사망했다. - 배경은 비쳐진 술집 모습 - 투시법상 각도 안 맞고  - 신사는 존재하지 않아 - 실상·가상의 분열을 표현  - '보이는 자'인 종업원은 - '보는 자'인 여신으로 승화 - 매혹적 표정에 담긴 고독 - 포즈는 검은색 'A자' 형상 - 랭보의 詩에도 등장해 살롱전 심사에서 낙선함으로써 인상파의 길을 열었던 마네가 1882년 마지막으로 살롱에 출품했던 그림 속으로 이제 우리는 들어가자. 한 여자가 화면 가운데 서 있다. 불빛 속에 어리는 푸른 그늘처럼, 소란 가운데 문득 서늘한 침묵처럼. 그녀는 19세기 화려한 프랑스 파리, 보들레르가 "이곳은 모든 기상천외의 일들이 꽃처럼 피어난다./오, 나의 고뇌의 수호신, 사탄이여"('파리의 우울')라고 외친 그곳의 밤 속에, 저 오만하고도 슬픈 근대의 불빛 아래 서 있는 것이다. 테이블과 2층 선이 만들어내는 가로선을 뚫고 수직으로 솟아오르듯, 그러나 힘겹게 그녀는 서 있다. 그녀의 얼굴을 스쳐 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표정들은 무엇인가? 냉소인가, 비애인가, 아니면 연민인가? 에두아르 마네(1831~1883) 최후의 명작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은 이상한 거울상을 통해 한 여자의 모순된 내면세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수수께끼가 거울 속에         원작과 다른 습작. 마네가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완성하기 전 그린 습작. 각도가 비틀어져 있지 않고 투시법에 정확히 맞춰져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네는 회저병을 앓고 있었다. 그 병은 1년 뒤 '빛과 색채의 화가' 마네를 불빛도 색채도 사라진 영원의 세계로 데려가고 만다. 폴리-베르제르는 카페이자 카바레이며 서커스 공연장이었다. 만년에 마네는 자주 이곳 한 구석에서 스케치하곤 했다. 마네는 의식하지 못했을까, 그가 창조한 이미지가 그의 삶이 다한 다음에도 자신을 위반하면서 기이한 모순 속을 떠돌게 될 것을? 아니, 그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진 것이었을까? 배경에 거울을 배치했을 때 말이다. 화면에서 서 있는 여자의 배경은 모두 거울상이다. 눈앞에 있을 실제 술집 광경과 이를 반영하는 거울상 사이에 여자는 서 있다. 화면에는 수많은 인물(거울상)이 보이지만, 실제 그녀는 화면 속에 혼자다. 군상 속의 적막, 여기는 소란의 중심이면서 밑 없는 고요다. 실상과 가상 사이에 혼자 선 그녀는 그 자신이 또한 실상이면서 가상이다. 거울에는 그녀 뒷모습이 나타나는데 투시법상의 각도와 전혀 맞지 않는 위치에 있다. 더구나 그녀와 함께 거울에 나타난 신사는 실제 그녀 앞에 그녀를 반쯤 가리고 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사는 거울에만 있고 현실에는 부재한다. 화가의 실수가 아니다.  이 그림을 위한 습작(오른쪽 작은 그림 참조)을 보면 투시법에 정확히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이건 화가가 우리에게 던진 수수께끼임에 틀림없다. 비틀린 각도와 실체 없는 신사 때문에 그녀의 정면(실상)과 뒷면(가상)은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한다. 가상과 실상이 분열하면서도 공존하는 공간, 그 기이한 공간의 여자를 마네는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의 풍경은 또한 그녀가 술집의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를 보는 위치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녀가 모두에게 보이는 위치에 있을 때 그녀는 어김없이 화려한 극장식 술집의 여급이다. 그리하여 초점을 잃은 눈가에는 나른한 유혹과 쓸쓸한 그늘이 서린다. 그녀의 검은 리본 목걸이와 가슴의 꽃 장식에도 화려하면서도 우울한 파리의 밤이 스멀거린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라.  그 잠깐 사이에도 왠지 쓸쓸한 매혹과 알 수 없는 비애감이 당신의 등을 서늘하게 스쳐 갈 것이다. 그녀는 19세기 화려한 밤의 상품으로 거기 진열돼 있는 것이다.  진열대에 있는 과일과 술병들이 만들어낼 갖가지 색채의 헛된 열정은 불빛이 꺼진 뒤, 이 도시 골목길을 또한 얼마나 스산하게 할 것인가?  ■랭보 시와 만나는 이 그림 '시선은 지배'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던가. 이미지의 세계에서도 보는 자는 보이는 자를 지배한다. 그녀가 보이는 존재에서 보는 자로 전환될 때, 문득 그녀는 화면을 지배하면서 여신으로 솟아오른다. 거울에 반영된 술집의 풍경은 그녀의 시선이 포획한 우주이다. 그녀 앞에는 장미 두 송이가 유리잔에 꽂혀 있다. 장미는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쳤던 꽃이었으니, 이제 풍성한 테이블은 여신을 위한 성스러운 제단이며, 그녀 얼굴에 어리는 비애는 유럽의 저무는 밤에 대한 여신의 연민이 된다. 여신은 한 시대를 연민하는 것이다. 보이는 자이면서 보는 자인 그녀는 여급이자 성스러운 여신이다. 그녀가 만들어 내는 이 이중성은 여성을 타락한 이브이면서 동시에 성스러운 마리아로 보았던 중세 이중성의 근대적 버전인 셈이다. 모델의 이름은 실제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여급인 쉬종이다. 그녀의 포즈는 화가에 의해 연출된 것이겠지만, 계획된 연출 속에도 알 수 없는 우연은 스며든다. 그녀의 자세는 두 팔과 검정 드레스의 파인 가슴 선에 의해 우연히(?) 알파벳 A 형상을 이룬다. 우연이란 얼마나 공교로운 것인가. 검은 옷의 A, 그것을 우리는 랭보의 '모음들'이라는 괴이한 시에서 당혹스럽게 만난다. 검은 A, 흰 E, 붉은 I, 초록 U, 푸른 O. 모음들,   내 얼마 후 너희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라. 아(A), 지독한 악취 주변을 윙윙거리며 번쩍이는 파리 떼 털들로 뒤덮인 검은 코르셋, 또는 어둠의 만(灣). 여신이 되기 위해 그녀는 우선 타락한 세상 속에서 악취 나는 "검은 A" "검은 코르셋"의 요화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말하지 않던가,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황지우)고. 그리하여 여급과 여신은 아파하는 하나의 몸이 된다. 이브와 마리아는 본래 한 몸인 것이다. 그녀의 배경 전면의 거울상은 그림 전체에 스민 모호한 푸른 얼룩처럼, 그녀를 둘러싼 삶이 모두 허상임을 말하는 것일까? 왼쪽 상단, 초록색 신발을 신은 채 허공에 걸려 있는 두 다리는 지금 서커스가 공연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왠지 허공에 걸린 허상의 삶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생명력, 무궁한 생명력 인도 신화는 이 세상이 모두 비슈누 신의 꿈이라 한다. 비슈누가 눈을 뜨면 세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거울상들도 그녀의 슬프고도 고단한 눈이 감기면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녀는 지금 화려하고 소란한 근대적 삶, 그 그늘의 어두운 허무를 힘겹게 눈 뜨고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브도 아니고 마리아도 아니다. 바로 근대라는 척박한 시대를 견디어 가야했던 '여자'라는 여리고도 모진 생명력이다.           동아시아의 현자 노자(老子)는 이 생명력의 근원을 '골짜기의 신'이라고 했다. 노자는 원초적인 페미니스트이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것을 검은 암컷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골짜기의 신' '검은 암컷'은 여성성이 가진 무궁한 생명력의 은유다. 랭보의 상상계 속에 떠도는 "어둠의 만" 또한 그 검은 암컷이 아닐까. 불멸하는 검은 암컷! 검은 A! 이 '골짜기 신'의 이미지는 남자의 역사를 통해 끊없이 은폐되고 왜곡되면서도, 그러나 끈질기게 되살아난다. /이성희 ===========================   이 그림은 런던의 코틀드 갤러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그림입니다   마네가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데 한번 보자구요. 화가들은 그림 귀퉁이의 조그만것도 많은 신경을 써서 그려넣습니다 여기서도 뒷배경에 어른거리게 비치고 있는 전등을 통해서 여인 바로 뒤에 거울이 있다는 것을 표현했구요 왼쪽 아랫쪽에 자세히 보시면 사람들이 있는것으로 이층 술집이란것을 알게 해주죠 왼쪽 윗 구석에 보시면 사람의 발이 보일거에요 그리고 복장과 뭔가를 밝고 서있는것으로 보아 서커스 그네 같죠? 결국 이그림은 서커스 공연을 하는 2층 술집의 커다란 거울이 걸려있는 바에서  한 여인이 앞을 바라보고 장면입니다   오른쪽 위를 보시면 한 남자가 여인에게 말을 걸고 있네요. 그것으로 보아 여인은 그냥 앞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얘기하는 중이었구요. 그리고 하얀 천이 깔려있는 탁자위에 술과 꽃 그리고 과일이 올려져 있네요 머리를 말아올린듯 보이는 앞을 보는 여인은 뭔가 대답을 하기 직전에 사진에 찍힌듯한 화면입니다. 어쩌면 여인이 무슨 대답을 할지 망설이는 잠시를 스샷한 멍때리는 굴욕샷 일수도 있겠죠 이런 상황을 작가는 관람자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부터는 그림을 보는 관람자로서의 저의 의견입니다 신고전주의 그림과 다르게 뒷 거울에 비춰지는 사람들은 대충 뭉게서 표현했구요. 테이블의 하얀색은 여러색을 섞어표현한것이 인상주의 색채가 분명해 보입니다. 뒷 배경의 여인들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주변은 굉장히 소란스러워 보입니다 그 와중에 멍때리는 듯한 표정의 여인은 고요함을 나타냅니다. 이래서 군중속의 고독을 표현했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도시에서의 고독을 표현한 대표적인 화가는 미국의 에드워드 호퍼가 있죠. 아마도 그 역시 마네에게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죠.   술과 같이 진열된 것처럼 보이는 여인은 실제 폴리 베르제르의 여급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쉬종이라고 하고 마네의 부탁으로 화실에 와서 모델을 섰다고 하죠 당시엔 상당수의 젊은 여인들은 매춘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 또한 상품처럼 진열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유리병속의 장미로 마네는 또 장난을 쳐봅니다 신고전주의 그림에서 여인에게 장미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상징합니다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가슴에 꽃장식을 한 아름다운여인(그러나 몸파는여인)을 아프로디테에 비교합니다 또한 활짝 피어있는 꽃, 싱싱한 과일, 젊은 여인을 보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바니타스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가장 아름다울때를 보여주며 항상 죽음을 기억하고 삶에 겸손하라는 바니타스라는 주제를 다룬 정물화죠. 하얀장미는 순결을 뜻하고 핑크장미는 신성한 사랑을 뜻하는 상징입니다 술집여급에게 이런상징은....^^  이렇게 마네는 묘하게 뒤틀고 있죠.   마네는 또한 검정색을 잘쓰기로 유명합니다 보통 인상파들은 검은색은 잘 안쓰거든요. 빛을 통한 화려한 색을 섞어 어둡게 만들긴 해도 검정색은 좀 꺼려합니다. 하지만 마네는 검정색을 굉장히 세련되게 만들고있습니다 모던한 검정..  마네로부터 제대로 나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린 사람이 마네자나요...   유리에 반사된 그림을 생각해보면 여러 그림이 떠오르지만 그중에 유명한그림이 북유럽 르네상스를 주도한 얀 반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있겠고 스페인의 대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라스메니나스가 있겠군요. 하지만 전 이그림을 본 순간 떠올린 그림이 갈라를 그리고 있는 달리 그림입니다 정확한 제목은 라고 하죠 이렇듯 거울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그림의 소재입니다. 여러가지 의미와 상징으로 쓰이는 거울을 통한 그림인것으로 보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있겠네요 그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울에만 등장합니다 거울 밖은 현실이고 일에 지쳐 우울한 여인이 있습니다 거울속은 화려하고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실제와 이상의 경계라고나 할까요. 그냥 그렇다구요~^^   가장 논란이 되는 거울에 비춰진 뒷모습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누구나 아시겠지만 거울에 비친 여인이 남자와 이야기 하려면 그림에 남자의 뒷모습이 나와야겠죠 아니면 여인이 옆모습으로 보여야 그나마 납득이 될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을 정면으로 잡고 그러면 반사되는 뒷모습은 거의 가리겠죠? 옆에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뒷 모습은 한참 시선을 비틀어 놓았습니다 실수 였을까요?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제가 해석한다면 시선의 분할입니다 정면에서 본 여인과 옆에서 본 여인을 한 화면에 그린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세잔은 영향을 받아 정물화를 그렇게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피카소가 입체파를 탄생시킨것이 아닐까 하는것이 저의 상상입니다. 마네가 몇년만 더 살았어도 피카소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것이 아니라 마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마네는 이야기합니다 " 나는 내가 본것을 그리며 다른사람이 보기에 좋아보이는것을 그리지않는다.  나는 거기에 있는것을 그릴 뿐 있지도 않는 것을 그리지 않는다" - 마네 \\\\\\\\   무대인 폴리베르제르는 19세기 말 유명했던 파리의 카페로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각종 사회계층의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 먹고 마시고 즐겼는데 카페는 타인을 보는 동시에 그들에게 보여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감상자의 눈과 상상력이 잠시도 한 눈 팔수 없는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성기 마네의 회화에서 나타났던 전형적인 화면 배치와 구성이다. 한가운데 있는 여자 바텐더는 쉬잔은 생각에 잠겨 있다. 화면 왼편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쉬잔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 뒷모습만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 그림은 쉬잔의 몽상인듯 보면 볼 수록 더욱 매력적이다 에두아르 마네 1882년, 코톨드 인스티튜트 런던 갤러리 마네는 자신에게 친숙한 공간을 그렸다. 마네는 이곳을 자기집처럼 편안하게 여겼으며, 느긋하고 한가한 시골이나 전원도시보다 대도시에서 느껴지는 혼잡함과 거친 주변인의 삶을 더 좋아했다. 마네가 모델로 선택한 젊은 여자는 쉬잔 발라동이며 그녀는 실제로 폴리 베르제르 바에서 일한바 있다. 마네의 작품들 중 대부분은 여자를 그렸는데  마네는 모델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했다. 생각에 잠긴 여인 쉬잔은 사색에 잠겨있다. 우리는 그녀의 내면속에 있는 사색의 빗장을 풀어 줄 수 있는 단서를 찾앞그녀가 이 순간의 친밀감을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 강한수직성 쉬잔의 얼굴에서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수직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녀의 양옆으로 펼쳐진 광경은 마치 다른쪽에 반사된 모습처럼 보인다. 공중 곡예사 그림의 맨 꼭대기 왼쪽 구석에는 카페에서 여흥을 제공하는 공중 곡예사의 다리와 신발이 보인다. 그는 분홍색 스타킹과 녹색신발을 신고 있는데 아무도 그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으며 쉬잔은 고나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 공중 곡예사는 쉬잔의 애수를 강조하기위해 존재 할뿐이다. 군중속의 벗들 오페라글라스를 들여다 보고 있는 여인은 누구인지 알수 없지만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모두를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 사회상을 상징한다. 맨 왼쪽 흰 옷을 입고 발코니에 앉아 있는 여인은 마네의 친구인 메이 로랑이며 그녀의 뒤쪽으로 베이지색 옷을 입은 여인은 또 다른 친구인 잔 드마리쉬이다. 전등 마네는 눈부시게 밝은 전등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에는 전등을 단 고급 유흥 업소가 점점 늘고 있었다. 쉬잔 뒷편의 거울에 비친 샹들리에에의 붓질은 쉬잔의 소매와 섬세안 레이스를 보완하고 있다. 화면을 분할하는 발코니 거울에 비친 발코니는 화면구성을 분할하는 수평선을 만등다. 다른 강력한 수평성들은 바의 윗부분과 거울에 비친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쉬잔과 술병이 이 수평선들을 하나로 묶었다. 공간적배치 마네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서 마네가 거울과 술명을 사용해 어떻게 공간을 뒤로 밀었는지, 또한 반대편에서는 동일한 거울과 술병을 가지고 어떻게 정반대릐 효과를 이끌었는지? 거울에 비친 술병들은 바위에 놓여 있는 술병들과 배열이 일치하지 않는다. 각계급의 칵테일 미네는 보통 자신의 작품에서 원색적인 상징을 피하고 대신 사실적인 방식으로 근대 생활방식을 묘사하고자했다. 그러나 이 술병들은 중요한 의미의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부유한 상류층의 술이었던 삼페인이 잉글리쉬바스 맥주 바로 옆에 놓여 있다. 빨간 삼각형 라벨로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바스 맥주는 하층 계급들이 주로 마시는 술이였다. 카페의 사회역시 정장 차림의 신사들, 노동자들, 고급창녀들이 뒤섞여 환담을 나누는 장이였다. 즙이 많은 과일 유리잔에 꽂여있는 꽃과 볼에 담겨있는 과일은 정물은 금방이라도 물감이 흘러내릴 것처럼 풍부한 색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네는 직접 사물을 관찰하여 그린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한쌍의 장미는 쉬잔의 옷에 꽃힌 꽃들을 강조.   빈티지 마네 1882년 가스통 라투슈 마네는 가스통 라투슈라는 이름의 동료 화가에게 쉬잔과 이야기를 나누는 역활을 맡아 자세를 취해 달라고 부탁.그러나 쉬잔의 얼굴과 비교하면 남자의 얼굴은 개성이 없다. 거울에 비친 뒷모습 상식적으로 보면 거울에 비친 쉬잔의 뒷모습이 이 위치에 나타나서는 안된다. 뿐만아니라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포즈와도 다르다. 거울에 비친 쉬잔은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논리적으로 보면 이 남자가 지급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의 이미지는 작품을 시적인 차원에서 바라볼때에만 이해가 된다, 어쩌면 남자와 대화를 나눈것이 볓분 전의 일일지도 모른다. 쉬잔은 그 대화를 곱씹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 그녀의 고단한 삶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대화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그림에서 마네가 보여준 세계는 에밀 졸라의 와 같은 작품에도 등장한다. 졸라는 마네의 절친한 친구로 마네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례식 운구 행렬에 참여하기도 했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년) 마네는 유복한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 났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아니였다. 도회적이고 붙임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로 인상파의 핵심적인 인물중의 하나였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마네의 작품들은 보수적인 파리 예술원에 파문을 일으켰고 말년에야 비로서 인정을 맏을 수가 있었다. 마네는 1874년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을 거절하였다. 인상파를 지지 했지만 자신의 작품이 전통적인 회화에 가깝다고 생각했다.1881년 결국 마네는 그토록 바라던 레종 되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마지막 걸작이 된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는 마네 예술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종업원이 마네의 부탁으로 마네의 화실로 와서 모델을 섰다고 한다. 뒤의 거울을 통해 드러났듯이 그녀는 어떤 남자 손님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의 말을 듣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분주하고 복잡한 술집 내부의 난산한 풍경과 함께 관람자에게 술집 종업원으로서의 아무 의미도 없는 고달픈 삶을 무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듯하다. 마네는 그러한 그녀 앞에 장미 두 송이를 헌화하여 그녀를 현대의 비너스로 격상시키고 있다. 흰 장미는 순결을, 붉은 장미는 사랑을 상징한다는 전통적인 도상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주위에 가득 널려 있는 술병들 사이에 비너스에게 헌납된 장미꽃은 묘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쿠르베가 만국박람회에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 〈화가의 화실〉이 낙선하자 자비를 들여 박람회장 근처에 자신만의 개인전을 열고 그 카달로그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더 이상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생동감 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모더니즘은 '예술 자체의 예술'을 표방한 쿠르베의 아방가르드 정신 선언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선언이 성문화되기 이전에 이미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에 의하여 모더니즘 화풍은 시작 되었다. 화가들의 이러한 모더니즘에의 인식은 문학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을 위한 예술론」보다 오히려 빨랐다. 마네도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나는 내가 본 것을 그리며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거기 있는 것을 그릴뿐이며, 있지도 않는 것을 그리지는 않는다." 마네는 본 것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눈으로만 대상을 보지 않았다. 마음의 눈으로 대상의 깊은 내면을 보았다. 내면을 표현하는 거울효과 주제 그림인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 차용된 거울 효과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림 오른쪽 술집 여종업원의 뒷모습과 신사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모습일진데, 그녀의 정면과, 그녀의 뒷모습과, 그녀 앞에 앉은 것으로 예상되는 남자가 다 일직선상에 있게 되어 모두 가려지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필자는 불가능한 공간 설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뒤에 있는 거울이 술집 벽에 부착된 대형 거울이어서 술집 내부가 배경화면처럼 연출되었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신사와 마주보는 광경을 화가는 약간 빗겨 오른쪽에서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대상 요소들의 배치와 화가의 시선' 그림 참조). 단지 여자가 거울 면에 평행으로 서있지 않고 화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만 고려하면 된다. 그래도 여자 앞에 놓인 탁자가 사선이 되어야 하는 문제가 남긴 한다. 미술은 과학이 아니니까, 이 정도에서 화가의 재량이 들어갔다고 생각하자. 대상 요소들의 배치와 화가의 시선   멍하니 바라보는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이 그림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그림같죠? 코톨드 갤러리의 가장 큰 전시실에 걸린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인데요~ 다른 사람도 그 자리에 서서 그림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이 그림을 응시하고 있답니다! ​ ​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그림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금 그림 속의 인물과 대화하고 있는 셈이죠!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 똑바로 서 있는 검은 옷의 여인이 우리의 시선을 묵묵히 마주 바라봐요~ 그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어요! ​   그녀는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하지만 무표정 어딘가에는 매일같이 노동의 오는 고단함이 묻어나오기도 하죠! 이 그림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는 카페,여자,밤 검은색 등 화가 마네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모던한 요소들이 총집결해 있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출처] 멍하니 바라보는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작성자 도루뭉이   과학으로는 볼 수 없는 내면을 표현 마네는 특히 내면을 표현하는데 탁월했다. 마네가 내면을 표현하는 힘을 잘 나타내 주는 또 하나의 걸작을 감상해 보자. 이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그림의 모델 베르테 모리소(Berthe Morisot, 1841~1895)도 화가이다. 언니 에드마(Edma)와 함께 1861년부터 유명한 풍경화가인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에게 6년간이나 사사 받았다. 모리소는 1868년 팡탱 라투르(Fantin-Latour)의 소개로 마네를 만나 이후로 예술혼을 서로 주고받았으며, 그의 모델을 자주 서 주었다. 마네는 그녀를 모델로 〈발코니〉, 〈휴식〉, 〈베르테 모리소〉 등의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1874년 마네 동생 외젠(Eugene Manet)과 결혼하여 마네의 집안사람이 되었다. 1892년 남편이 죽고 난 후 자신도 병들어 1895년 3월 2일 파리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마네, 〈베르테 모리소〉, 1872년, 캔버스에 유채, 55×38cm, 개인 소장 자의식과 자존감이 남달랐던 화가 베르테는 모델을 설 때도 자신 만의 개성을 강하게 표현하였으며 화가의 주문에 따라 수동적인 포즈를 취하지 않았다. 마네도 그녀의 이러한 포즈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매우 만족해했다. 〈베르테 모리소〉를 통해서 우리는 마네가 표현한 베르테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자신감을 볼 수 있다. 배경과 모자와 옷은 최대한 단순하게 붓질만 남겼으며 명암이 확연히 양분되게 그린 얼굴의 윤곽이 그녀의 미모와 어울린 그녀만의 개성을 잘 나타낸다. 확실히 이전의 인물화(초상화)들과는 다르다. 붓질이 거칠고 과감한 생략이 있지만 오히려 모델의 인격은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더욱 정교하고 사실적인 인물들은 그냥 화면 속의 인물이며 관람하고 있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마네의 이 그림을 보면 그녀가 옆집에서 만났던 이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사생활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모델인 베르테의 모습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는 것 같지 않고 그녀의 정신을 만나는 것 같은데, 이것이 모델의 내면을 그리는 마네의 힘이다. 마네, 〈휴식〉, 1870년, 캔버스에 유채, 148×111cm, 미국 로드아일랜드 미술관 배경과 외곽선의 독특한 해석 마네는 스페인의 대가들 중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á Velazquez, 1599~1660)와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1748~1828)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특히 벨라스케스를 화가 중의 화가라고 생각하며 그의 그림을 수없이 모사하며 연구하였다. 그의 초기 인물화 중 가장 걸작에 속하는 〈피리 부는 소년〉은 벨라스케스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 그림이다. 벨라스케스의 〈메니프〉나 〈바야돌리드의 파블리오스〉에서 배경을 약화시키거나 거의 없애면 중심인물이 부각된다는 점을 배웠다. 그 당시 파리 화단의 유행이었던 일본화의 영향도 보이는데 단순한 색채와 강렬한 외곽선으로 인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소년 바지의 외곽선은 동양의 서예와 같은 일획의 선으로 강한 효과를 성공시키고 있다. 앞선 대가들의 화풍을 자기 것으로 습득한 마네의 열린 마음과 충분히 훈련된 기교에 시대를 앞선 정신이 더하여져 탄생한 걸작이다. 마네, 〈피리 부는 소년〉, 1867년, 캔버스에 유채, 160×98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벨라스케스, 〈바야돌리드의 파블리오스〉, 1636~37년경, 캔버스에 유채, 213×125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마네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강하게 나타내며 한 화면 안에 여럿이 등장하더라도 서로간의 관계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관계성은 오히려 마네가 진정 원했던 모델 각자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마네의 모델들은 화면 속에서 무표정하며 정지된 자세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내면의 전달은 더욱 효과적으로 성취된다.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도 네 사람의 인물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각자 자기의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남자만이 다른 인물들에게 말하는 것 같은데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그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다. 그 둘은 관객을 빤히 쳐다보며 무표정 속에서 서로의 내면을 보이고 있다. 그런 점은 〈피리 부는 소년〉도 마찬가지다. 피리를 부는 것 같지 않다. 단지 피리를 입에 대고 관객을 쳐다보는데 오히려 그 소년의 순수한 마음과 성스러움이 돋보이게 표현되었다. 이 소년 모델은 마네의 아들인 레옹이다. [Daum백과]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마네 – 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바웃어북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 바"|작성자아스타        
356    명화속에서 보는 500여년전 음식물?ㅡ... 댓글:  조회:3535  추천:0  2017-03-04
명화로 보는 음식문화… 500년 전에도 음식 자랑? 바다 냄새를 머금은 신선한 굴과 껍질을 반 쯤 벗긴 레몬, 붉은 가재가 식탁에 놓여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은제 식기에 음식의 형채가 어리면서 식욕을 더욱 자극한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르 클라스(Pieter Claesz)의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이다. 당시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에 문화적 황금기가 찾아오면서 미술사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신이나 역사를 주제로 한 경건한 종교화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음식, 자연의 풍경이 처음으로 캔버스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요하네스 베르메르_1658년 作 죽어있는 사물을 그린다고 해서 회화 장르에서 가장 천시받던 정물화는 17세기를 전후해 네덜란드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림의 주문자가 왕족이나 귀족 등 특권층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 대중으로 확대되면서 일상적인 소재를 즉물 화법으로 생생하게 포착한 정물화가 대유행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음식을 그린 정물화는 서민들 사이에서도 소장 욕구를 자극했다. 꽃이나 과일, 값비싼 식기가 등장하는 정물화는 복제품(레플리카)도 수없이 만들어질 정도로 많이 팔려나갔다. 미국 코넬대 연구팀이 1500년부터 2000년 사이에 그려진 음식 정물화를 분석했더니 과일이 76%로 가장 자주 등장했다. 음식을 묘사한 정물화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음식을 주로 먹었구나'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사회·과학적 연구를 하는 '아트 사이언스'라는 분야도 존재한다. 최근 미국 코넬대 연구팀은 1500년부터 2000년까지 500년간 그려진 음식 정물화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과 유럽의 유명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750점 가운데 식탁을 클로즈업해 음식을 주인공으로 그린 작품 140점을 스크리닝했더니 가장 많이 등장한 소재는 과일이었다. 그 뒤를 빵이나 육류·해산물이 차지했다.  당시 주식은 빵이었으니까 당연히 정물화에 자주 등장한 것은 알겠는데, 과일 중에서는 레몬이 31%로 가장 많이 그려졌다. 흔했던 사과와 포도보다 정물화의 소재로 인기가 더 많았다는 얘기다. 히말라야가 원산지인 레몬은 당시 지중해 일부지역에서 재배되는 희귀한 과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정물화에서는 절반이 넘는 빈도로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주식이었던 돼지고기나 햄, 소시지보다 생선이나 조개, 굴, 가재 등해산물의 빈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분석한 그림 3점 가운데 1점은 해산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희귀했던 과일인 레몬과 썩기 쉬운 해산물이 그림 3점당 1번 꼴(31%)로 등장했다. 전동호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해안이 아닌 내륙에서 신선한 생선을 맛보는 일은 냉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17세기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서민들은 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한 해산물을 먹었기 때문이다. 또 해산물의 풍미를 좋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해독 작용을 한다고 알려진 레몬이 늘 함께 등장하는 것도 주목할만 하다. 희귀한 것들이 한 자리에 차려진 그림 속 식탁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SNS에 올리는 음식 게시물도 평범한 음식보다는 먹기 힘든 음식들이 주를 이룬다. 17세기 일상생활의 한 장면을 포착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 정물화는 사실 일상을 포착한 것이 아니다. 전동호 교수는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풍요와 부를 과시하기 위해 희귀하고 값비싼 음식들을 그림으로 그려 식탁 주변에 걸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민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늘 먹던 음식을 그린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린 것이다.  지금도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SNS에 올라오는 음식 사진들, 이른바 '먹빵'이나 '먹짤' '먹스타그램' 사진들을 보면 일상에서 먹는 밥이나 국, 김치를 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대신 어쩌다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이런 음식 게시물을 보는 사람들도 '좋아요'를 누르며 대리 만족을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사진이 없던 17세기에는 '어쩌다 먹는' 특별한 음식을 캔버스에 옮겨두고 싶었고 주변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오래오래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맛있고 희귀한 음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전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방실 기자
355    천재의 화가 피카소도 녀인 옆에서 양산을 들다... 댓글:  조회:2292  추천:0  2017-03-04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아버지가 미술교사인 집안에서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 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연애를 하였고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1907년 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당시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입체주의의 출발을 의미하였다. 피카소는 이 시기부터 기존 회화의 화법을 탈피하고 극단적인 단순함과 기하학적인 표현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이후 입체주의가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할 쯤 피카소는 다시 종이, 헝겊, 톱밥과 같은 *오브제를 사용한 새로운 형태로의 변형과 실험으로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어갔고 판화, 포스터, 조각, 도자기 등에도 손을 대어 새로운 기법을 보였다. * 오브제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작품에 쓴 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또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이르는 말. 상징, 몽환, 괴기적 효과를 얻기 위해 돌, 나뭇조각, 차바퀴, 머리털 따위를 쓴다   그리고 유럽이 정치적 사건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자 전쟁과 나치즘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의 뜻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하고 전쟁과 대량학살을 증오하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 대표적으로 (1937년),  (1951년), < 전쟁과 평화>(1954년) 등이며 과 는 6.25를 다룬 것이다. * 마지막 회에 상술하겠다.  하지만 곧 현실을 멀리하고 작품에만 몰두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림 1,876점, 뎃생 7,089점, 수첩에 그린 뎃생 4,659점, 판화 18,095점, 석판화 6,123점, 리놀륨 판화 3,189점, 조각 1,355점, 도자기 2,880점 등  3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일설에는 5만 점이라고도) 사후 그의 화고에는 1만 여 점이 있었다고 한다.       ♬ 리스트의 항가리 광시곡 Liszt - Hungarian Rhapsody No.2         작품 감상      15세에 그린 작품 '첫 성찬'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 거의 2000억원에 달하는 경매가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회화 작품에 등극했다. 2015년 5월 11일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경매 시작 11분여 만에 1억7930만달러(약1967억원)에 낙찰됐다.     피카소를 사랑한 7명의 여인들   유산의 상속 문제로 오랫 동안 송사에 걸려 있다 1997년에 상속인 6명이 극적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상속자는 물론 생전의 연인들과 그의 혈족들이다. 따라서 피카소를 이해하려면 그가 사랑한 그의 여인들에 대해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3세 때 만난 첫 여인을 시작으로 72세에 만난 자클린 로크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한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작품의 수만큼이나 여인들과의 염문으로도 유명하다. 살아생전에 경제적인 부와 명예를 누린 피카소는 그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7명의 여인들과 동거했고 2번 결혼했다.   1. 첫 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   1904년, 피카소나이 23세에 파리에서 만난 동갑의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모델이며 그가 처음 사랑한 여자로 유부녀다. 가난한 시절 ‘청색 시대’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한다. ‘아비뇽의 처녀들’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으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등을 돌린다. *큐비즘이란 입체파. 1907~08년경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하여 창시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운동의 하나. 유럽회화를 르네상스 이래의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해방시킨 회화혁명으로 지칭되고 있음.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6~07)이 그 최초의 작품이다.     2.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Eva Gouel) 피카소는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를 끝내고 친구 마르쿠스의 연인 에바와 사랑에 빠진다. 피카소가 깊이 사랑했던 에바는 몸이 약했고 그녀는 1차 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는다.   3. 세 번째 연인- 올가 코클로바(Olga Kokhlova) 피카소가 36세, 퍼레이드 공연 때 만난 러시아 장교의 딸인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결혼한다. 올가는 자유분방하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는 달리 세련되고 상류사회 생활을 즐겨 피카소를 피곤케 한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피카소에게 늘 불안하며 그에게 집착하고 피카소는 그것에 염증을 느껴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는 멀어진다.   4. 네 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Marie Therese Walter)   1927년, 피카소가 45세 되던 해에 관능미 넘친 17살 금발의 소녀 마리를 6개월 동안 ?아 다닌 끝에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운다. 그녀는 22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리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나 세련되지 못하고 무식하다고 그녀를 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보살펴야한다며 자살을 택한다.   5.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르(Dora Maar)   1936년, 피카소 나이 54세에 29살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를 만나게 된다. 피카소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예술을 논할 정도로 지적인 여인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하며, 이 작품의 제작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2차 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도라는 피카소 작품에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하고 피카소와의 이별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한 불행한 여인이다.   6. 여섯 번째 연인- 프랑스와즈 질로(Fran?oise Gilot)   2차 세계대전 중에 20살의 젊고 아름다운 여류화가 프랑스와즈를 만나, 1945년 피카소가 63세 때부터 함께 살며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태양이나 꽃으로 표현된다. 완벽주의자였던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의 외도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떠나 재혼을 한 유일한 여성이고, 자신이 낳은 아들과 딸을 피카소의 호적에 올려 어마어마한 상속을 받게 한다.   7. 일곱 번째 연인-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1953년, 피카소가 72세 되던 해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해준 마지막 여인이다. 자클린은 딸이 있는 이혼녀로 8년간 동거한 뒤 1961년 34살의 나이에 80세의 피카소와 결혼하고, 피카소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함께 한다.  피카소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자클린은 요리를 잘하는 헌신적인 여인으로 피카소보다 13년을 더 살았으며, 피카소의 복잡한 재산 문제들을 처리한다.   1973년 92세로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후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앞두고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에게 여인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여성과의 만남이 예술의 근원이었으리라.        6명의 상속자들            피카소에서 프란시스베이컨까지 전시회                        " />          
[전설의 컬렉터 페기 일대기 다룬 다큐영화 '페기 구겐하임…'] 서점서 일하다 현대미술에 눈떠 피카소 등과 교류하며 컬렉터로 20세기 명작 감상하는 즐거움에 화려했던 연애사도 담아내   "당신의 가장 큰 업적은 잭슨 폴록을 발굴한 건가요?" "맞아요." "당신이 수집한 컬렉션은요?" "음… 그건 두 번째 업적이죠."   영화는‘그녀의 연애사가 곧 현대미술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인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피카소부터 잭슨 폴록까지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하게 된다. /콘텐숍 피카소, 몬드리안, 달리 등 20세기 현대미술의 걸작보다 잭슨 폴록이란 무명 화가의 발굴이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말하는 이 여자는, 전설의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다.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가 개봉돼 미술 애호가들 사이 화제다. 개봉관이 손에 꼽을 만큼 적고 관람객도 많지 않지만, 영화를 본 이들은 5점 만점에 4~5점을 누를 만큼 극찬을 쏟아낸다. 관람객 10명 중 7명이 20~30대 여성. "100년 전에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이 있었다니!" "베네치아에 있는 구겐하임 박물관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같은 후기들이 이어진다. 영화는 '당신의 가장 큰 업적'을 묻는 말과 페기의 답변으로 시작된다. 분실된 줄 알았던 페기의 마지막 인터뷰 녹음 테이프를 발견한 감독(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은, 러닝타임 96분 동안 페기의 허스키한 육성을 바탕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풀어간다. 미국의 광산 부호 구겐하임가(家)의 아버지와 금융 부호 셀리그먼가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페기는 행복하지 않았다. 대저택에 살지만 친구가 없었고, 플레이보이였던 아버지는 애인과 함께 타이태닉호에 탔다가 배가 침몰돼 사망한다. 어머니도 기이했다. 시계 3개를 한꺼번에 차고 외투도 3벌씩 껴입는 어머니에 대해 페기는 "그 이유, 프로이트나 알겠죠"라며 웃는다.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그녀가 현대미술에 눈뜬 건 스물한 살, 한 서점에서 일하면서다. 이후 파리로 건너가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막스 에른스트 같은 전위예술가들과 친분을 맺는다. 초현실주의, 큐비즘의 매력에 빠진 그는 피카소, 달리, 마그리트 같은 화가와 교류하며 컬렉터로 변신한다. 2차 세계대전 중 자신의 수집품과 나치에게 쫓기는 화가들을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대목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루브르에 비밀 수장고가 있다기에 작품을 맡기려고 했더니 보존 가치가 없다며 거절하더군요. 침대보와 이불 사이에 작품들을 파묻어 배에 실어 보냈지요. 무섭지 않았느냐고요? 난 원래 겁이 없어요." 영화는 페기의 지독했던 남성 편력도 다룬다. '그녀의 연애사가 곧 현대미술사'라는 말이 있을 만큼, 세계적 작가들이 페기의 컬렉션뿐 아니라 사생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인들은 그녀가 섹스에 중독된 이유가 이혼과 배신, 딸의 자살 등 "이길 수 없는 슬픔을 떨쳐버리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피카소부터 잭슨 폴록까지 20세기 명작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하는 즐거움은 이 영화의 백미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페기의 가장 큰 업적은 20세기 미술사 책에 나오는 중요 작가들의 전람회를 파리, 뉴욕, 런던에서 열어줌으로써 미술사의 폭을 넓힌 것"이라면서 "페기는 컬렉터란 돈이 아니라 문화적 자산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일깨웠다"고 말했다. 나이 듦, 죽음에 관한 질문에 페기는 답한다. "늙는다는 건 끔찍해요.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걸 해냈지요. 예술은 내게 자유이자 해방이었어요." 81세에 눈을 감은 페기는 개 14마리와 함께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 정원에 묻혔다. "삶 자체로 최고의 걸작"이란 찬사를 받는 그녀의 매력을 만끽하고 싶다면 놓쳐선 안 될 영화다. /출처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 결핍이 이어준 20세기 미술…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              ​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 2017.2.2.  20세기 현대미술의 전설적인 아트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관객들과 만난다. 페기 구겐하임의 인생에는 잭슨 폴록,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그녀의 인생 자체가 현대미술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유태인 광산 부호인 구겐하임가의 아버지와 금융 부호인 셀리그먼가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페기 구겐하임은 구겐하임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구겐하임 재단의 창립자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다. 페기 구겐하임의 일생을 담은 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수입·배급 콘텐숍)는 미술 다큐멘터리이지만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감상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다. 영화 속에서 미술작품들은 그녀의 삶을 있게 한 매개물 이상으로 강조되진 않는다.  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 2017.2.2.(사진=콘텐숍 제공)    대신에 현대미술 컬렉터로 족적을 남긴 그녀의 인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주목한다. 유별났던 부모의 성향부터 타이타닉호 침몰로 아버지를 잃은 과거, 자유분방한 성생활 속에 깃든 남성폭력 등 그녀의 삶에 스며있는 결핍이 컬렉터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투영한다. 결국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드러난 그녀의 수집욕을 통해 20세기의 현대미술이 이어졌음을 관객들은 느끼게 된다.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은 그녀를 인터뷰했던 재클린 웰드의 지하실에서 인터뷰 테이프를 찾아내 영화를 완성했다. 팝아티스트 낸시랭은 "미국에 유럽의 모더니즘을 이식시켰을 뿐 아니라 미술의 중심 모델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라며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설적인 여성"이라고 밝혔다.     ​ ​ 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 2017.2.2.(사진=콘텐숍 제공)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는 트라이베카 국제영화제, 아트바젤, AFI 영화제 등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다. 오는 9일 개봉한다. ===============================================       현대 예술의 거장 11 페기 구겐하임 모더니즘의 여왕 메리 V. 디어본 지음┃최일성 옮김                   20세기 현대 미술사의 가장 매혹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은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의 완벽한 지휘자였다. - 존 리처드슨(미술사가)   1. 출간 의도   흔히 예술가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직접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연주 또는 공연을 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화가의 경우 그림을, 음악가의 경우 작곡이나 연주를 그리고 작가의 경우 책을 놓고 그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이러한 예술가를 발굴하고 키워내어 예술사의 흐름을 새로이 만들거나 바꿔놓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예술계에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향력은 작가들과 비교하여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그런 후원자들의 혜안은 그 자체로도 또 하나의 예술사가 된다.   20세기 초 현대 미술계의 대표적인 후원가이자 수집가였던 페기 구겐하임은 뉴욕의‘구겐하임 미술관’의 창시자인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딸로 그녀의 화려했던 삶은 20세기 서양미술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페기 구겐하임은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재능 있는 신예 화가 잭슨 폴록과 로버트 머더웰 등을 발굴하고 그들을 후원하여 미국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미술품 수집에 열정적이었던 그녀는 신인 작가의 작품은 물론이고 자코메티, 파울 클레, 몬드리안, 데 키리코, 달리,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등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심지어 화가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찾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그녀를 찾아가 아침 일찍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페기 구겐하임이 성장 가능성이 있는 작가를 발굴해내는 데 있어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는 것은 그 수집품의 현재 가치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의 수집품은 그녀가 사들일 때 가격에 비해 수 천 배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가격이 작품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페기 구겐하임은 보기 드물게 작품성과 사업성을 조화시킨 수집가로 평가받고 있다.   페기 구겐하임의 전기, 국내 첫 출간 이 책은 20세기 현대 미술계의 전설적인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의 생애를 다룬 전기이다. 이 책의 저자인 메리 V. 디어본은 페기 구겐하임의 가족과 친구와의 인터뷰 그리고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의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며 미술의 중심 무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한 여인의 삶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선천적인 재능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예술계에 몸을 던져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예술을 배우고 그들의 후원자 그리고 수집가로 성장한 그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 세 번의 결혼 실패와 미술 수집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엄마로서는 실패했던 그녀의 삶 그리고 마르셀 뒤샹, 이브 탕기, 사뮈엘 베케트, 막스 에른스트와의 교류와 정열적인 사랑,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그녀의 성적 탐욕은 물론 그녀와 동시대를 살아간 많은 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상을 생생한 시각으로 전하는 이 책은 독자들에게 또 다른 흥미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돈 많은 상속녀의 예술 활동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당시의 예술계의 풍토 속에서 잭슨 폴록이라는 미술계의 거장을 발굴해내었음에도 자신이 키워낸 예술가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사랑했던 남자들에게서 끝내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했던 그녀의 외로웠던 삶을 이 책을 통해 그대로 엿볼 수 있다.   그동안 국내에 수많은 예술가들의 전기와 평전이 소개되었지만, 예술계의 무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후원가와 수집가들의 삶을 조명한 전기가 출간된 적이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2. 페기 구겐하임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   1898년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광산업으로 성공한“구리재벌”가에서 태어난 페기 구겐하임은 아버지 벤자민이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에 승선했다 침몰사고로 사망하자 어린 나이에 스스로 자기 진로를 결정해야만 했다. 파리로 건너간 페기는 작가인 로렌스 베일과 결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두 번째 남편인 존 홈스는 수술 중 사망한다. 이후 그녀는 수많은 염문을 뿌리며 오랜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가 친구의 조언에 따라 화랑을 열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런던에“구겐하임 죄느(Guggenheim Jeune)라는 화랑을 열었다. 오랜 친구였던 마르셀 뒤샹은 미술에 대한 열정이 있던 페기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며 현대 미술에 대한 시야를 열어준다. 뒤샹은 그녀가 열 화랑의 전시 계획을 세워 주고, 당대 최고의 미술 평론가인 허버트 리드와 의논하여 좋은 수집을 위해서는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을 반드시 사들여야 한다는 수집목록을 작성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1939년 전 유럽을 뒤덮는 전쟁의 예감으로 페기는 일단 미술관 개관을 중단시켰으나 그림 수집은 계속된다. 그녀는 단 몇 달의 짧은 기간에 뒤샹이 적어준 목록 중 50여 점을 사들였다. 자코메티, 파울 클레, 몬드리안, 데 키리코,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브랑쿠시 등등 당대를 대표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1941년 봄, 독일군이 프랑스를 완전 점령하기에 이르자 페기는 그림 수집을 중단하고 뉴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이 무렵 독일 국적의 막스 에른스트와의 조건부 결혼은 그녀가 기대했던 행복과 안정을 주지 못했다. 미국 땅에서 적국의 시민인 막스에게 그가 추방당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자기와 결혼하는 것뿐이라고 페기는 그를 협박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막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좌절감으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막스와의 결혼이 실패로 끝난 후 페기는 그녀의 안식처인 미술로 돌아오게 된다. 페기는 이후 뉴욕에서 화랑을 개관한다. 오프닝은 각계 유명인사로 초만원을 이뤘고 페기는 초현실주의와 추상파에 대한 중립적 입장을 보여주는 특유의 위트로 한쪽 귀에는 이브 탕기가 만든 귀걸이를, 다른 한쪽 귀에는 알렉산더 콜더가 디자인한 귀걸이를 달고 나타났다.   그러던 중 남편이었던 막스의 결혼소식을 접한 페기는 초현실주의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젊은 작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을 발굴하고 후원하기 시작한다. 그 중 잭슨 폴록과 로버트 머더웰은 페기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20세기 현대 미술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46년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찾아 베니스로 간 후 뉴욕 화랑의 문을 닫고 그곳에 정착했다. 베니스 정착 후 사교계의 스타의 나날을 보내던 페기는 친구의 권유로 자신의 소장품을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했다. 그 해 페기의 전시회는 현대 미술의 국제적 감각을 대표하는 뛰어난 수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후 페기는 평생 서로 경쟁의식과 불화의 관계를 가졌던 그녀의 숙부가 세운 뉴욕의“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 모든 소장품을 기증했다. 81회 생일을 많은 축하객에 둘러싸여 화려하게 치른 후 페기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1979년 사망했다.     3. 추천사   성실하고 자세한 조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전기로 가문에 저항하며 현대 미술의 뛰어난 컬렉션을 우리에게 남겨준 페기 구겐하임의 진정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 커커스 리뷰   유려한 문장과 자극적인 주제로 이 책은 그림 이상의 것들에 관심 있는 미술 애호가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모더니즘의 역사를 바꾼 한 여인에 대한 예리한 전기. - 도어 애슈턴(의 저자)   이 책은 20세기 미국 미술에 대해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이 책을 읽기 바란다. - 아마존 독자 서평     4. 차례   프롤로그 1장 숙명, 가문 2장 미국을 떠나다 3장 보헤미안의 왕 4장 상속녀와 아나키스트 5장 본조 부부 6장 끝나는 것들과 시작되는 것들 7장 마흔 살, 돌파구 8장 새로운 인생 9장 구겐하임 죄느 10장 전쟁의 기운 11장 소장품의 시작 12장 금세기 예술 갤러리 13장 예술이 장미꽃 옷을 입을 때 14장 폴록 그리고 피긴 15장 금세기를 벗어나며 16장 전설이 되다 17장 베네치아의 영광 18장 예술 중독자의 고백 19장 마지막 날들 갤러리 소장 목록     5. 본문 중에서   만찬이 끝난 후 베케트는 그녀를 집까지 걸어서 바래다주겠다고 했으며, 페기는 그가 자기의 팔을 잡을 때 좀 놀랐다. 그는 페기가 임대하고 있던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 그곳에 당도하자 베케트는 페기에게 자기와 함께 소파 위에 눕자고 했다. 그들은 침대로 가서 이튿날 저녁식사 때까지, 페기가 샴페인을 마시자고 하면 베케트가 그것을 가지러 나오는 것 말고는 줄곧 함께 침대에 있었다...며칠 후 페기는 몽파르나스의 정류장에서 베케트를 만나기로 하여 그에게 달려갔다. 만나자마자 그들은 침대로 가서 일주일 동안 그곳에 들어가 있었다. 페기는 이때를 "감격스럽게" 회상했다. 이때가 그들이 관계를 맺은 열세 달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페기는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사랑했으며 우리 둘은 지적으로 격앙돼 있었다"고 설명한다. - p. 220-221 미스 구겐하임은 상업적 목적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런던 최초의 갤러리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그녀가 목적하는 것은 미술학도들에게, 상업적이며 예술가들이 명성을 얻고 나서야 전시를 해주는 그런 갤러리들과 작업하기가 어려운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미스 구겐하임에게는 실험정신이 있다. 그녀가 실험한 것들 중 처음 한두 가지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음을 시인해야겠지만, 그녀가 보여준 것들은 그 무엇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은 것이 없다. - p. 245   7월까지만 해도 페기는 자신은 “결혼하지 않은 행복한 유부녀”라고 하더니, 겨울이 되서는 막스가 결혼하기를 거절하는 바람에 매우 안달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막스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막스는 딴전을 피웠다...결혼을 하고 페기는 “안정감”을 얻었지만 이것이 두 사람의 언쟁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특히 페기는 막스에게서 느끼는 거리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돌이켜보면 막스는 처음에는 페기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그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했던 그녀의 매력은 유럽을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단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그림을 계속 그리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재정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 p. 305~306   페기는 폴록 개인전을 여는 도박을 감행하였다...금세기 예술 갤러리는 11월에 폴록의 개인전을 열었다. 페기는 폴록이 전시회를 준비하고 또 앞으로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그에게 일 년 동안 매월 150달러씩 주기로 합의했다..그것은 유례없는 계약이었다. 정말로 후원자가 한 화가에 대하여 그와 같은 신의를 보이는 것, 그렇게 자유롭고 관대한 재량을 주는 것은 당시로선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 있지 않았던 폴록의 동료 화가들에게 그 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 p. 354~355   비평가들은 곧 금세기 예술 갤러리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게 된다. 갤러리가 문을 닫은 지 10년이 지나서 루디 블레쉬는 가장 잘 팔린 현대미술서 중 하나인 그의 책에 이렇게 썼다. “온갖 미술관들과 온갖 활동들이 있었지만, 대공황을 견뎌내고 새로운 미국 미술이 태어나기 위한 진통을 겪었던 1942년에서 1947년까지 5년의 짧은 기간 동안 페기의 갤러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각품이 허공에 걸리고, 그림들이 보이지 않는 팔에 담겨 벽에서 나와 우리에게 다가오고, 마르셀 뒤샹이 필생의 역작을 옷가방에 담아 전시한 진열장 속을 들여다보면 축소된 사진들이 돌아가며 보이고, 테이블이 의자가 되고 의자가 전시대가 되던 그 기적적인 장소를 우리는 잊은 적이 없다." p. 412~413   페기는 결코 자기 소장품의 위대성을 다른 것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소장품이 있는 그대로-세심하고 미술을 깊이 이해하는 후원자가, 미술계에서 멀리 떨어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도움을 준 미술세계 속으로 직접 들어가 수집한 작품들로서 보존되기를 바랐다. 페기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그 예술가들과 함께 살았으며, 그녀의 선택은 20세기 미술사의 진로에 영향을 주었다. - p. 500~501     6. 지은이 및 옮긴이 소개   지은이 메리 V. 디어본 메리 V. 디어본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동대학에서 인문학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 가 있다.   옮긴이 최일성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현대, 대우를 비롯한 국내 기업의 해외 법인장으로 20여 년 동안 해외에 거주하며 많은 해외 문화와 예술을 접했다. 옮긴 책으로는 BBC 방송국의 비즈니스 총서 , , , 등이 있다.  ============================   그녀는 후원자·수집가로서 작품 전하는 메신저였다...        [명화로 보는 논술] 예술가의 진정한 패트런, 페기 구겐하임    ■ 20세기 현대 미술계의 대표적 후원자 아름다운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더니즘의 여왕'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 30년간 살던 저택을 미술관으로 꾸민 곳이다.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개막식 파티가 열린 곳도 이 미술관 정원이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현대미술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대표적 후원자이자 전설적인 콜렉터였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자인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사랑과 정열, 그리고 탁월한 안목과 지도력, 사업수단까지 겸비해 뉴욕의 현대미술을 세계적으로 키워 낸 장본인이다.  사실 페기 구겐하임의 훌륭한 현대미술 콜렉션은 그녀의 화려한 연애경력과도 같은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사귀었고 결혼까지 했다. 마르셀 뒤샹, 콘스탄틴 브랑쿠시, 이브 탕기 등과 연인 사이였다. 그녀의 콜렉션 목록을 보면 쟁쟁한 이름들이 올라있다. 앞서 말한 애인들의 작품은 물론, 자코메티, 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들이었다.    ▲ 페기 구겐하임과 화가 잭슨 폴록. ■ 미국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낳게 한 장본인, 모더니즘의 여왕  1942년, 페기 구겐하임은 뉴욕에 '금세기 미술(Art of This Century)' 화랑을 열었다. 이 화랑을 중심으로 '뉴욕파'라고 불리는 추상표현주의가 발달했다. 액션 페인팅의 대가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로버트 마더웰 같은 대가들의 개인전이 열린 곳이 바로 이 '금세기 미술' 화랑이었다. 그녀는 20세기 현대 미술의 신경향을 이끌어갈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면서 유럽의 초현실주의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예술작품을 단순히 구입하고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후원자, 수집가로서 새로운 경향을 선도해 가며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하는 훌륭한 메신저 역할을 한 것이다.  페기 구겐하임이 사망한 뒤 소장품들은 전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됐다가 지금은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전시돼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 4만 달러에 구입한 작품들의 가치는 박물관 기증 시 4000만 달러 정도로 추정됐는데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어느 정도일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소장품들의 경제적 가치가 아니다. 그녀는 돈벌이를 위해 작품을 사 모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순수한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일궈낸 진정한 패트런의 역할을 페기 구겐하임을 통해 배워야 한다.   /최혜원   [출처] 결핍이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  "개화된 미술 애호가", "달러 공주", "여성 카사노바" 등으로 불린, "구겐하임 미술관의 창시자"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딸이기도 한 그녀의 화려했던 삶은 20세기 서양 미술의 현장이기도  하다.  페기 구겐하임은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광산업으로 성공한 "구리재벌" 가에서 태어났다. 맨해튼에서 록펠러와 이웃해 살던 페기는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유럽을 여행했는데 이때부터 유럽은 그녀의 정신적 고향이 됐다.  아버지 벤자민이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다 사망하자 어린 페기는 스스로 자기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파리로 건너간 페기는 작가인 로렌스 베일과 결혼하 지만 곧 이혼하고 두번째 남편 존 홈스는 수술 중 사망한다.  이 후 그녀는 수많은 염문을 뿌리며 오랜 방황의 세월을 보냈으나 친구의 조언에 따라 드디어 화랑을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했다.  소유욕 강한 여자, 버림받은 여인, 끊임없는 방랑자였던 페기는 미술 수집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 바실리 칸딘스키, 잭슨 폴록..... 지금은 현대 미술의 거장이 된 이들 예술가는 그녀의 삶을 둘러싼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페기와 오랜 지기였던 마르셀 뒤샹은 그녀의 화랑 전시 계획을 세워주었고 좋은 수집을 위해서는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을 사들여야 한다는 수집 목록을 당대 최고 권위의 미술 평론가와 의논해 작성해 주었다. 그는 항상 페기 옆에서 많은 조언을 해주며 현대 미술을 보는 시야를 열러주었다.  런던에 마련될 화랑과 전시 준비를 위해 파리로 간 페기는 마르셀 뒤샹의 안내로 여러 화가들과 접촉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39년 전유럽을 뒤덮고 있는 전쟁의 예감으로 페기는 일단 미술관 프로젝트를 중단시켰으나 그림 수집은 계속했다. 그녀는 단 몇 달의 짧은 기간에 뒤샹이 적어준 목록 중 50여 점을 사들였다. 파울 클레,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당대를 대표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전재의 와중에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부유한 미국의 수집가가 그림 쇼핑에 흥청망청 돈을 뿌린다는 소문이 파리에 나돌기 시작했고,  화가들은 그녀의  화실 방문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그녀를 찾아갔는데 페기가 아침 잠을 깨기도 전에 찾아오는 화가도 많았다. 그녀는 쉬지 않고 그림 쇼핑에 바팠고 계속해서 화가들의 작품을 헐값으로 흥정해 사들였다.  1941년 봄, 독일군의 프랑스 완전 점령 징조가 커짐에 따라 그녀는 그림 수집을 중단하고 뉴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사 모은 그림들을 안전하게 보내는 과제였다. 그녀는 친구들과 궁리 끝에, 그림들을 모두 액자에서 떼어 이불 사이사이에 펴 넣고 꽁꽁 싼 후  이삿짐으로 위장해 통과시켰다.  그 후 독일 국적의 "막스 에른스트"와의 조건부 결혼(미국 땅에서 적국의 시민인 막스에게 그가 추방당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자기와 결혼하는 것 뿐이라고 페기는 협박?했던 것이다)은 그녀가 기대했던 행복과 안정을 주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막스의 사랑을 받지 못한 좌절감으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이제 그녀는 막스의 초현실주의의 지배적 방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수집 방향을 재정리하기 시작했다.  페기는 이후 "금세기의 미술" 화랑 개관에 그동안 사 모은 67명의 작품 170점을 전시한다. 오프닝은 각계 유명 인사로 초만원을 이루었고 페기는 초현실주의와 추상파에 대한 중립적 입장을 보여주는 특유의 위트로 두 개의 상반되는(초현실주의 화가 이브 탕기의 분홍색 풍경화와 추상을 대표한 알렉산더 콜더의 모빌을 닮은) 귀고리를달고 나타났다.  그러던 중 막스의 결혼 소식으로 절망에 빠진 페기는 정신분석적 조언을 받을 지경이었으나, 적국의 망명자를 쫒아버리겠다는 협박으로 결혼을 강요한 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오히려 조롱만을 받을 뿐이었다. 남편이었던 막스를 비롯해 초현실주의 친구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낀 페기는 젊은 작가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 중 잭슨 폴록의 추상 화면은 커다란 물의와 함께 비평계의 눈길을 끌었고 폴록의 장래에 결정적 영향을 준 계기가 되었다. 또 하나의 젊은 작가는 로버트 머더웰이었고, 후에 "뉴욕 학파"의 스타가 된 이 둘의 그림이 20세기 미술에 가져다 줄 폭풍 같은 영향은 그 당시 페기는 물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946년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찾아 베니스로 간 후 뉴욕 화랑의 문을 닫고 그 곳에 정착했다. 뉴욕 미술계는 페기의 화랑을 통해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기회를 줌으로써 미국의 미술계에 전례없이 커다란 영향을 준 그녀의 부재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베니스 정착 후 사교계의 스타로 나날을 보내던 페기는 친구의 권유로 그의 소장품을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했다. 그 해 비엔날레의 구겐하임 전시관은 가장 큰 인기를 끌었고 현대 미술의 국제적 감각을 가장 잘 대표하는 뛰어난 수집품이라며 극찬을 받았다. 이에 힘을 얻은 페기는 그 수집품을 영구 소장할 미술관을 만들고 일반에게 공개했다. 2차 대전 당시 4만 달러의 기금으로 마련한 그림들은 30년 후 그 천배인 4천만 달러의 가치로 변해 있었다. 일찍이 뛰어난 사업 두뇌로 빈손으로 거부가 된 그녀의 부모와 숙부마저 부러워할 만한 성취였다. 이제 칠순이 된 페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서로 경쟁 의식과 불화의 관계를 가졌던 그녀의 숙부가 세운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 모든 소장품을 기증했다.        1949년부터 그녀가 사망하던 1979년까지 30년 동안 사교 파티가 끊이지 않았고     각계의 유명 인사들이 방문했던 베니스의 팔라조.    지금은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부속으로 페기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다.  81회 생일을 많은 축하객에 둘러싸여 화려하게 치른 후 페기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시간 많을 때 읽기에 제일 좋은 책이라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들고 입원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어준 20세기 미술…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작성자 이뽄아기엄마    
353    호주 사진작가, "위장술 아트" 녀류화가 - 오를리 파야 댓글:  조회:2367  추천:0  2017-02-28
세계 곳곳의 자연경관을 특별한 방법으로 담아내는 화가의 작품이 화제가 되고 있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23일 (현지 시간) 전했다.   자연을 좋아하는 호주의 화가 오를리 파야는 4년 전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위장술' 아트를 그렸다 / Carters News Agency 자연을 좋아하는 호주의 화가 오를리 파야는 4년 전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산, 바다, 초원 등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캔버스에 담기 위해서다. 여기까지는 여느 화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특별하다. 그녀는 인체를 캔버스 삼아 몸에 그림을 그려 넣고 배경과 ‘몸 그림’을 일치시키는 ‘위장술’ 아트 화가다.   파야는 마음에 드는 자연경관을 찾은 뒤, 부부 모델 몸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 Carters News Agency 파야는 마음에 드는 자연경관을 찾은 뒤, 부부 모델과 함께 각도와 포즈등을 정하고 모델의 몸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꽃잎, 나뭇가지, 파도 등 하나하나 세밀하게 완성하기까지는 꼬박 3일이 걸린다.   자연과 사람이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는 위장술 아트 / Carters News Agency 사진을 보면 자연과 사람이 절묘하게 하나를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파야의 그림 모델이 된 세계 여러 부부들은 모두 완성된 작품에 큰 만족도를 보였다.   인체를 캔버스 삼아 인간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연에 동화되어 있는 모습을 담았다 / Carters News Agency 파야는 “인간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연에 동화되어있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며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했다. ⓒ 조선일보 /박채운 인터   호주의 사진작가이자 예술가인 오를리 파야의 독특한 사진이 지난 23일 영국 데일리메일을 통해 공개됐다./데일리메일 화면 갈무리
352    "전짠돌이" 그림 한화 24억짜리 "백두정기" 댓글:  조회:1986  추천:0  2017-02-28
-고 전청송화백의 유언을 두고  일전 필자는 한국 《연합뉴스》 왕길환기자가 쓴 “24억원 아래로는 팔지 말라…기회가 되면 그림을 팔아 좋은 일에 써달라”는 제목의 고 전청송화백(1946-2013, 연변일보사 미술편집) 유작전시회 관련 기사를 읽었다.   연변일보사 전임사장 오태호(고)가 김영삼대통령에게 전화백의 그림작품 “장백산천지”와 서예작품 “무실력행”을 증정한후 담화를 나누고있다.   고 전청송화백은 필자와 같은 도문사람으로서 연변일보사에서 근무했고 한 아빠트에서 함께 지낸 친구이며 동료이다. 고 전청송은 1989년에 대폭의 참대나무그림에 필자의 이름까지 화폭에 박아서 선물한적이 있고 연변일보사 전임사장 오태호가 한국 김영삼대통령에게 증정할 서예작품 사자성어 “무실력행”(務實力行)을 쓰기도 했다. 전청송은 손그림 재간이 좋기로 곁군들로부터 “그 손을 보험하라”는 권고를 들을 정도였고 또 애주가로 중풍으로 입원치료를 받으면서도 생선료리 술안주를 만나면 큰 수건을 곁에 놓고 줄땀을 흘리며 “당신들은 중풍에 걸려봤냐?” 며 목숨 걸고 술을 마시는 한심한 술군이였다. 그런데 이런 대범한 애주가가 “짠돌이”라면 당신은 믿겠는가? 전청송은 확실한 “짠돌이”이다. 아무튼 필자는 물론 그와 함께 술자리를 한 사람들도 그가 언제 한번 선뜻이 술값을 계산하는것을 거의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 “짠돌이”가 죽기전에 한국에 있는 지인 전원식씨(63)를 자기 집에 초청해 “이제 나는 그림을 못 그리니 남아있는 그림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기회가 되면 그림을 팔아 좋은 일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니 필자로서는 실로 불가사의라 하겠다. 아니면 하나 밖에 없는 딸한테 유산으로 넘겨줄수 있는데 말이다.. 전청송화백이 부탁한 좋은 일은 “한국내 조선족들의 권익 향상과 복리 증진, 미술에 재능을 가진 청소년들을 양성하는것”, 이에 비춰 전원식씨는 “화백의 고향인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미술관을 건립하는 계획도 추진할것”이라고 했다. 전원식씨는 2000년에 중국에 진출하여 광채(光彩)인 코리아대표리사로 중국내에 430여개 계렬사를 갖고있는 사업가이다. 지인의 소개로 2008년 환갑이 지난 전청송화백을 알게 되였을 때는 이미 당뇨병, 뇌졸증, 전립선암 등 병으로 치료중이였다. 전화백이 전원식씨 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전원식씨는 한국에 모셔 사비로 근 6개월간 병치료를 도와 나섰다. 1989년 전청송친구의 그림작품 선물을 받은 필자 올해 2월 22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열린 “전청송화백 유작 전시”에 전화백이 “한국돈 24억원 아래로는 팔지 말라”고 유언한 “백두정기”(242cm ×95cm)를 비롯해 “금강만물상기봉”, “정정적추산”, “아미연운”, “운문산중” 등 63점이 전시되였다. 고 전청송화백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 대구 《매일신문》 등에서 전시되였고 모택동기념관,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등에 걸려있으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증정되기도 했다. 왕길환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중국 쉐프비예술품경매총회사는 전화백의 작품 경매가격을 한호(엽서 한장)당 인민페 5000원으로 정했고 중국국제문화예술련합회는 전화백을 “중국에서 가장 소장가치가 있는 예술가”로 평가했다. 고 전청송화백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장백산에 150여차례 올랐고 그의 작품 “백두정기”는 “중박국제” 경매때 락찰가가 517만 8000원이였다. “아무리 뛰여난 예술작품도 작가는 그 작품에 절반의 혼밖에 불어넣을수 없다”는 말이 있다. 나머지 절반의 혼은 소장자 즉 그 작품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잘 활용하는 사람에 의해서 완성된다 한다. 필자는 고 전청송화백의 “좋은 일에 쓰라”고 남긴 유작들이 그 유작을 사랑하는 소장자들을 통해 유작에 담은 전화백의 수정 같은 혼을 곱절 이상 완성할것이라 기대한다. //오기활 /길림신문 ==============================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중국의 10대 화가 반열에 오른 조선족 화가 전청송(1946∼2013년)의 유작전시회가 22∼28일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회는 2008년부터 전 화가가 작고하기 전까지 5년 넘게 교류해온 대중국 사업가 전원식(63) 광차이(光彩) 인 코리아 대표이사가 마련했다. 광차이는 중국 내에 430개 계열사를 둔 그룹이다. 유작전에는 생전 작가가 "한국 돈 24억 원 밑으로는 팔지 말라"고 유언한 '백두정기'(242X122cm)를 비롯해 '금강만물상기봉'(176X95cm), '정정적추산'(164X95cm), '아미연운'(137X68cm), '운문산중'(127X69cm) 등 63점이 소개된다.   조선족 화가 전청송이 그린 '백두정기'   이들 작품은 전 작가가 "좋은 일에 써달라"고 유언을 남긴 후 전 대표에게 남긴 것이다. 전 대표는 2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작가의 유지를 받들어 판매 수익금은 한국 내 조선족들의 권익향상과 복리증진, 미술에 재능을 가진 청소년들을 양성하는 데 쓰일 것"이라며 "작가의 고향인 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미술관을 건립하는 계획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0년초 중국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시와 선전시에 진출해 사업한 전 대표가 전 작가를 만난 것은 2008년. 지인인 중국 검찰의 조선족 부장 검사가 그를 소개했다. 환갑을 막 넘긴 나이였던 전 작가는 당시 '중국 10대 화가' 반열에 올라 있었다. 전 대표가 그를 만났을 때에는 당뇨병, 뇌졸중, 허리협착증,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살려달라"는 애원을 듣고 전 대표는 한국으로 그를 데려와 사비를 들여 홍익대 병원· 서울대 병원 등을 다니며 치료해 줬고, 6개월 만에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 전 대표 자택에서 살기도 했던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술·담배를 멀리하라는 의사들을 경고를 무시하고 생활하다 전립선암이 재발해 2013년 세상을 떠났다. 전 작가는 죽기 전 전 대표를 중국에 있는 집으로 초청해 "이제 나는 그림을 못 그리니 남아있는 그림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기회가 되면 그림을 팔아 좋은 일에 써달라"고 유언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백두산을 150차례 올랐다는 그의 작품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에게 증정됐고, 현재 대한민국 국회도서관과 중국의 마오쩌둥기념관, 북한 김일성 주석궁 등에 걸려 있다. 생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 대구 매일신문 등에서 초청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중국 쉐프비예술품경매총회사는 그의 작품 경매 가격을 한 호(엽서한장) 당 '5천 위안'으로 정했고, 중국 국제문화예술연합회는 전 작가를 '중국에서 가장 소장 가치가 있는 예술가'로 평가했다. 이번 유작전이 열리기 전 국영기업 '중박국제'는 그의 작품 63점 가운데 48점을 경매에 부쳐 23점이 낙찰되기도 했지만 시간 내 수수료를 내지 않는 바람에 모두 유찰됐다. 경매 당시 '백두정기'의 낙찰가는 517만5천 위안(8억6천458만 원)이었다.      
351    스웨덴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 에릭 요한슨 댓글:  조회:7212  추천:0  2017-02-27
  서로 다른 현실을 조합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 스웨덴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 (Erik Johansson)은 다양한 피사체를 이색적 방식으로 조합해 상상의 세계를 구현한다. 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장면을 스케치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진을 찍는다. 피사체의 높이, 뱡향, 거리감, 빛의 종류와 방향 등을 철저히 계산한 뒤 촬영한다. 이렇게 촬영된 요소들은 프레임 안에서 새로운 조화를 완성한다. 재구성된 현실은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상상의 틀이 다른 그의 작품을 모았다.                                         출처 :미술작가[그림,조각,공예,사진,캘리그라피]  Erik Johansson 오늘 소개해드릴 포토그래퍼는 한번쯤은 본적있는 작품들이 상당수 많은 작가분입니다. 바로 에릭 요한슨으로 사진 작가이면서 리터칭으로 유명한 요한슨은 스스로 모델이 되어서 사진을 찍고 그사진을 가지고 리터칭을 하는데 그의 아이디어는 정말 재미있고 유쾌합니다.   에릭 요한슨은 아마도 전세계 포토그래퍼 중에서 광고계와 다양한 미디어부터 프로모션까지 활동하고있는  포토그래퍼로 사진 리터칭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업 방식은 사진을 찍어와서 자기 책상에서 다 리터칭과 합성을 하지않고 직접 소품도 만들고 스케치도 하고 상당수 아날로그 방식을 많이 섞어서 작업을해요 Landfall - 리터칭 과정 Landfall -Behind the scenes 에릭 요한슨의 리터칭은 단순히 사진만 찍고 다양한 사진 소스를 가지고 조합해 합성을 하는게 아니라 구상을 한후에 메인 사진을 촬영하고 합성될 부분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해 필요한 소스는 별도로 촬영후 합성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 물결 무늬를 만들기 만들기 위해서 액체들을 섞고 골판지로 크로마키처럼 작업을 한후에 그위에 합성할 소스 사진을 입히는데 부분 부분 그림자와 색감을 잘 조합한는게 너무 매력적이죠   Impact 사진을 보면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이 오시나요? 포토샵 강좌를 찬찬히 보셨던 분이라면 살짝 감이 오실꺼에요 ㅎㅎ 넓은 공터에 큰 거울을 잘라서 펼쳐놓고 그위에 카누를 올리고 그위에 올라서서 연기하는 모델을 촬영후 물결이 없는 넓은 호수를 촬영해서 리터칭한 방식입니다. 포스팅 제일 마지막에 작가분 유튜브 링크를 걸어둘께요  포토샵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들어가서 보시면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눈여겨 보시고 작은걸 한번 스케치해서 한번 만들어보시고 하다가 막히거나 잘 안되는건 댓글을 남겨주시면 알려드릴께요 Groundbreaking Let’s go on a field trip. Made in 2012 Expecting Winter Where seasons meet Imminent Don't worry, it'll all be fine. Made in 2016 Swerea Client: Swerea Arms Break, Vases Don't Made in 2008 Wake Up! 볼보 광고 Made in 2016 The Cover Up Made in 2013 The Architect The dicipline of paradoxal geometry, imagine the unimaginable. Made in 2015 Don't Look Back Standing still is going backwards. Made in 2014 Cut & Fold Cut along the dotted line. See behind the scenes video below. Made in 2012 Groundbreaking Let’s go on a field trip. Made in 2012 Go Your Own Road Made in 2008 Soundscapes Endless waves. Made in 2015     바닷물이 넘쳐 흐르는 액자는 어떻게 걸어야 할까요 ?ㅎㅎ       어디가 밖이지? 여자가 들고 있는 검은 우산을 펴면 창문 밖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린왕자의 소행성 B612호(?)가 떠오르네요. 이젠 더이상 외롭지 않겠군요 ^^         테트리스...     밤에 보니 섬뜩하군요... revelation fields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미지입니다. 어떤 계시를 말하는 걸까요???   뒷모습이 보이는 거울이라...근데 이사람은 손도 흐릿하네요     바지를 다리는 걸까요, 다리를 다리는 걸까요?   어디가 아래고 어디가 위인지 모르는 착시의 세계가 이어집니다. 뫼비우스의 띠 같기도 한...경계가 불분명한 세계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의식과 무의식은 맞닿아 있고 현실과 현실이 아닌 세계는 어디가 시작이고 또 어디가 끝인지 모르며 내가 생각했던 사물과 일상은 나의 기대를 배반하는 전혀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 꿈이 아닌 혼돈의 길 위에서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 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머리만 복잡해지는 건 당연한 거죠...     정말 땅 속에 저런 게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출처] 합성 아티스트 에릭 요한슨|작성자 모네  
350    [쉼터] -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곳에 있는 산장 댓글:  조회:1931  추천:0  2017-02-27
349    100 : 2026 댓글:  조회:2637  추천:0  2017-02-24
안토니 가우디  〈사그라다파밀리아〉 Basílica de la Sagrada Família|   안토니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 주소 : Carrer de Mallorca 401, Barcelona 대중교통 : 지하철 마요르카(Mallorca), 사르데냐(Sardenya) 역 개관 시간 : 10월-3월 오전 9시-오후 6시,               4월-9월 오전 9시-오후 8시 휴관일 : 1월 1 · 6일, 12월 25일 오후 · 26일 입장료 : 13.5유로(학생, 18세 미만 11.5유로, 10세 이하 무료)   아마도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가족 성당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 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한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1883년, 한 독실한 가톨릭 단체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신자들의 모금으로 가우디에게 성당 건축을 맡겼다. 한 해 전에 다른 건축가가 처음 설계를 시작했던 것을 이어받았는데, 이 작업은 가우디가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넘겨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의뢰 받은 다른 일과 함께 진행해 오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으며, 심지어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하며 살기까지 했다. 가우디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성당 건축이 마무리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성당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다. 난 늙을 테지만 내 뒤를 다른 사람들이 이어갈 것이다. 작품의 정신은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것이다.” 1926년, 그는 전차에 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후에 사망했다. 그가 눈을 감은 병원은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라는 또 다른 모데르니스모 건축가가 설계한 산타 크레우 이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la Santa Creu i Sant Pau)이었다. 이곳은 가우디가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그의 유해는 성당 안에 묻혔으며 병원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도착하면 누구나 높이 솟은 탑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직육면체도 원통형도 아니고, 꼭짓점이 뾰족하지도 않은, 타원형을 아주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탑이다. 예수의 열두 사도들에게 봉헌되는 열두 개, 복음서 저자들을 위한 네 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씩 해서 모두 열여덟 개의 탑이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의 동쪽, 그러니까 연못이 있는 공원 쪽에 가까운 곳이 가장 먼저 지어 올리기 시작한 ‘예수 탄생’ 파사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예수 탄생 장면, 동방박사와 목동이 경배하러 오는 장면 등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파사드 위의 탑 네 개 중 우리가 보기에 가장 왼쪽에 있는 탑이 성 베르나베(사도행전의 바르나바)에게 봉헌된 탑인데, 가우디가 살아 있을 때 유일하게 완성된 탑이라고 하며 높이는 100미터에 이른다. ‘예수 탄생’ 파사드의 모습 ‘예수 탄생’ 파사드에는 예수가 태어난 장면의 조각도 있다. 성당의 서쪽은 ‘예수 수난’ 파사드다. 예수의 수난 장면을 재현해 낸 사람은 조세프 마리아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라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조각가로, 1987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을 맡았다. 예수의 수난, 고통, 죽음, 희생이라는 주제를 다룬 조각은 서쪽 하늘에서 해가 질 때 점점 어두워지는 풍경과 드라마틱하게 어울린다. ‘예수 수난’ 파사드의 모습 ‘예수 수난’ 파사드에 있는 조각들 가우디는 고딕 양식의 라틴 십자가형 플랜(한쪽이 나머지 셋보다 긴 십자가 모양의 도면)에서 시작하여 기하학적인 형태와 자연의 모티프를 사용해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성당을 설계했다. 가우디가 1926년에 사망한 뒤, 1930년에 ‘예수 탄생’ 파사드와 종탑이 완성되었다. 스페인 내전 중에 가우디의 작업실에 화재가 일어나 설계도와 각종 사진, 자료 등이 불탔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계속 이어졌고, 내전이 끝난 1939년 이후에는 속도는 느리지만 공사가 재개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사에 사용된 기술도 현대의 기술로 바뀌었다. 시멘트도 활용하지만 가우디 특유의 모자이크(트렌카디스(trencadÍs) 기법이라고 한다. 색유리나 도자기 등을 깨뜨린 후 붙이는 방식으로, 곡면에 모자이크를 제작하기가 좋다) 제작 방식은 계속 이어진다. 2010년에는 성당의 내부가 완성되어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집전하는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마치 키가 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사망한 지 백 년 되는 해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이곳을 처음 봤을 때는 과연 그때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십 년 조금 넘게 기다리면 완성된 성당을 볼 수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성당 내부 공사 중인 모습 성당 안 가우디의 무덤   출생일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 사망일 1926. 6. 10, 바르셀로나 국적 스페인 요약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활동한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현대 건축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건축가로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공헌했다. 나무가 서 있는 것 같은 평형구조를 설계했고, 이 방식을 다양한 건축물에 적용했다.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교회는 가우디가 1883년 건설을 위탁 받아 평생을 이 건축에 매달렸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성가족 교회 이외 대표작으로 구엘 공원, 콜로냐 구엘 교회, 카사 바틀로 등이 유명하다. 목차 개요 생애 평가 Antoni Gaudi, 1878 개요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와 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족(聖家族)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생애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평가 가우디의 작품들은 형태, 질감, 다색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며 이 요소들을 자유스럽고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우디 건축의 복잡한 기하학은 그 건축 구조와 훌륭하게 일치되어,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마치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한 감각은 가우디의 생애를 말해준다. 그의 사생활이 바로 직업이었으며 건축예술에 관한 침착한 그의 비평은 삶의 예술에 관한 격언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건축에 바쳤으며 그에게 건축은 모든 예술의 총체였다. [Daum백과] 가우디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멀리 성가정 성당이 보이는 바로셀로나 전경)   [Daum백과] 안토니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 – 스페인 미술관 산책, 최경화, 시공아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48    중국 조선족 인민예술가,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은 룡정사람 댓글:  조회:1879  추천:0  2017-02-22
도서 "한락연을 추억하다" 재출간 (ZOGLO) 2017년2월22일  [ 도서 출판 좌담회 현장] 2월 21일, 중국 조선민족역사학회와 중국미술관, 베이징시민족친목회,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선전부, 민족출판사에서 공동 주최한 도서 출판 좌담회가 베이징 민족문화궁에서 있었습니다. [ 도서 출판 좌담회에 참석한 초대 인사] 중국 조선족 혁명가이고 인민예술가이며 사회활동가인 한락연(韓樂然) 선생은 1898년에 길림성(吉林省) 용정시(龍井市)의 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중국공산당의 걸출한 전사이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첫 중국 조선족이며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웁니다. [한락연 선생의 딸 한건립(韓健立)]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공산당원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한락연 선생은 혁명사업에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 변강소수민족의 풍토인정을 표현했으며 신강 키질 벽화를 연구한 첫번째 중국 화가이고 선후로 20차의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한락연 선생의 사적은 에 수록됐고 길림성 용정시에는 '락연공원'과 '한락연기념관'이 세워졌으며 한락연의 이야기를 다룬 라는 문장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됐습니다. 한락연 선생의 사적은 현재 혁명 전통을 전승하는 중요한 내용과 매개체가 되고 있습니다.   [도서 ] 도서 는 1998년에 민족출판사가 처음으로 출판했고 중앙당교의 고 최룡수(崔龍水) 교수가 편찬했습니다. 한편 이 도서는 소수민족 혁명 열사들의 영웅 사적을 더 널리 알리고 초심을 잃지 않으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기여하기 위해 올해 재출판하게 됐습니다. 도서는 한락연 선생에 대한 31편의 회고록과 편지, 12편의 유작, 28편의 자료를 수록했으며 중요한 역사 문헌적 가치가 있고 혁명전통 고양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 및 글로벌 전략 연구원 당위원회 위원인 박건일 연구원]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 및 글로벌 전략 연구원 당위원회 위원인 박건일(朴鍵一) 연구원은 중국공산당 영도아래 곤난과 위험을 두려워 하지 않는 한락연 선생의 혁명적이고 낙관주의 정신, 그리고 부단히 개척하고 진취적인 그의 생애를 깊이있게 연구하고 널리 홍보하는 것은 광범한 인민군중들의 자각 의식을 불러일으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사업에 창조적으로 돌입하는데 유리하다고 밝혔습니다. 취재/글: 조옥단 
347    사과씨앗은 내 몸속에 살며 래일 돋아날 싹은 내 심장에서... 댓글:  조회:2853  추천:1  2017-02-19
1. 자유 ㅣ 미첼 소차 (Michal Socha)     "진정 자유로워짐은 근심 없는 낮이나 설움 없는 밤이 아닌  이러한 것들이 삶을 옭아매도 얽매이지 않고 그 위에 우뚝 설 때이니" '자유' 섹션을 그린 폴란드의 애니메이터 '미첼 소차'는 단 4분을 표현하기 위해 1년을 쏟았다. 6개월 동안 스토리보드와 애니메틱스(영상 스토리보드)를 디자인하고, 나머지 6개월 동안 프레임 하나하나를 색칠하며 이를 완성했다. 그는 "'지브란'이 말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자유 중 시민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한 후, 나뭇가지 위로 날아가는 새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표현했다."고 한다. 2. 아이들 ㅣ 니나 페일리 (Nina Paley)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아니에요.  당신을 통해 올 뿐 당신에게서 온 건 아니죠.  당신이 아이들처럼 되려 할 순 있으나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려 하진 마세요.  당신은 활이고 아이들은 살아있는 화살처럼 그 활에서 날아가죠." 2008년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 수상작인 [블루스를 부르는 시타](Sita Sing the Blues)의 니나 페일리 감독은 5년 동안 집에 있는 가정용 PC로 혼자 만든 이 영화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 영화는 지난 2008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도 소개되어 감독이 내한한 바 있다. 현재 뉴욕 맨해튼 파슨 디자인 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그녀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아이들' 편에서 부모가 쏜 활에서 날아가는 아이들을 독특한 그림으로 표현했다. 3. 결혼 ㅣ 조안 스파 (Joann Sfar)     "함께하면서도 서로 공간을 지니길. 그리하여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길.  서로 사랑하되 사랑이 족쇄가 되어선 안 되고 함께 서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진 말길.  참나무와 소나무도 서로의 그늘에선 자라지 않기에" 프랑스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유명한 그래픽 노블 제작자인 조안 스파는 2002년 출간한 '랍비의 고양이'(Le Chat du rabbin)로 45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많은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스타 작가이자 감독이다. 그는 이번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서 결혼을 한 편의 탱고 춤으로 표현, 밀고 당기는 남녀의 심리를 열정적으로 묘사했다. 4. 일 ㅣ 조앤 C. 그라츠 (Joan C. Gratz)     "사랑으로 일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마치 사랑하는 이가 입을 것처럼 마음에서 뽑은 실로 옷을 짜고  마치 사랑하는 이가 살 것처럼 정성을 다해 집을 짓고  마치 사랑하는 이가 먹을 것처럼 마음을 다해 씨를 뿌려 기쁨으로 거두는 것.  일은 사랑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모나 리자 데센딩 스테얼케이스](Mona Lisa Descending A Staircase)라는 작품으로 1992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조앤 C. 그라츠 감독은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에게 독특한 애니메이션 테크닉인 'clay-painting'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테크닉은 진흙으로 유성 물감이나 아크릴 물감 느낌이 나게 하는 작업 방법이다. 조앤 C. 그라츠 감독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도 이 방법으로 들판에서 곡식이 익어가는 장면 등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5. 음식 ㅣ 빌 플림튼 (Bill Plympton)     "사과를 베어 물 때 맘속으로 말하라. 너의 씨앗은 내 몸속에 살며 내일 돋아날 싹은 내 심장에서 꽃피우리" '음식' 섹션을 그린 '빌 플림튼'은 칸영화제 심사위원 상(영화 [Push Comes to Shove])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그는 본드지에 연필로 색을 입히는 옛날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18~19세기에 부지런한 농부들을 묘사한 유럽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작업 이후 "논이나 밭을 지날 때마다 이 곡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먹고 마시는 전 과정을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6. 사랑 ㅣ 톰 무어 (Tomm Moore)     "사랑이 손짓하면 그를 따르길,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이 말을 걸면 그 말을 믿기를, 비록 그 목소리가 당신의 꿈을 부술지라도.  사랑은 왕관도 씌우고 십자가도 지울지니 당신을 성장시키듯 가지치기도 하리.  새벽엔 설레는 마음으로 눈뜨고 저녁엔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오길.  그런 다음 마음으로는 연인을 위해 기도하고 입술로는 기쁨의 노래를 담은 채 잠들리" 광고 제작, 만화 일러스트, 도서,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톰 무어 감독은 그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 [켈스의 비밀]이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관객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최근 [켈스의 비밀]의 만화 버전 및 신작인 [바다의 노래]를 완성해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이번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서는 화려한 색감과 아름다운 남녀의 몸짓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7. 선과 악ㅣ 모하메드 사이드 하리브 (Mohammed Saeed Harib)     "자신과 하나 될 때 그대들은 선하리. 허나 자신과 하나 되지 않을 때도 악하진 않나니  키 없는 배는 위험한 섬들 사이를 정처 없이 헤맬지라도 바닷속으로 가라앉진 않기에  목표를 향해 힘차게 걸을 때 그대들은 선하리.  허나 절룩이며 간대도 악하지 않나니 절룩이는 이들도 뒤로 걷진 않기에  위대한 자아를 갈망하는 마음이 곧 선함이며 그 갈망은 모두에게 있나니" 2006년 두바이 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아랍 에미리트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Freej]로 유명해진 모하메드 사이드 하리브 감독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Arabian Business magazine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랍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성공을 거둔 애니메이터이다. 두바이에서 태어나 미국 보스턴에서 일반 미술과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그는 중동 제일의 3D 애니메이터로 손꼽힌다. 그는 '선과 악' 편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8. 죽음 ㅣ 폴 브리찌 & 개턴 브리찌 (Paul Brizzi & Gaetan Brizzi)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 삶과 죽음은 하나란다.  삶의 한가운데서 찾을 때만이 비로소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되지.  죽는다는 건 뭘까? 벌거벗은 채 바람에 실려 태양 속으로 녹아드는 것.  너의 몸이 대지로 돌아가게 될 때 비로소 진정 춤추리" 폴 & 개턴 브리찌는 쌍둥이 형제로, 그들이 차린 'Brizzi Films'는 디즈니가 인수할 정도로 유능함을 보였다. 그들은 디즈니로 스카우트 된 후 클래식 음악과 애니메이션의 만남으로 환상적인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며 관객을 열광시켰던 영화 [환타지아 2000]으로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폴 & 개턴 브리찌가 다시 한 번 그들만의 독특한 감각을 선보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림을 펼쳐낸다.
346    레바논-미국적 화가 - 칼릴 지브란 댓글:  조회:3517  추천:0  2017-02-19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 칼릴 지브란...그림 DANIEL GERHART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 칼릴 지브란   1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다른 이들이 싫어하는 모든 걸 사랑하라고  또한 다른 이들이 헐뜯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라고.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까지도 고귀하게 만든다는 걸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는 사랑이  가까이에 피어난 두 꽃 사이의 거미줄과 같았네. 그러나 이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는 후광(後光)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것을 감싸고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을 에워싼 채  영원히 빛날 후광과도 같다네.       2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형태와 색채 뒤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라고  또한 추해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일 때까지  잘 살펴보라고. 내 영혼이 이렇게 충고하기 전에는  아름다움을  연기기둥 사이에서 흔들리는 횃불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연기는 사라져 없어지고  불타고 있는 모습만을 볼 뿐이라네.         3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혀끝도 목청도 아닌 곳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그 날 이전에는 나의 귀가 둔하여  크고 우렁찬 소리밖에는 듣지 못했네. 그러나 이제 침묵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으니  시간과 우주를 찬송하며  영원의 비밀을 드러내는 침묵의 합창을 듣는다네.         4  내 영혼이 나에게 말했네  잔에 따를 수도 없고  손에 들 수도  입술로 느낄 수도 없는 포도주로  나의 갈증을 풀라고. 그 날까지 나의 갈증은  샘에서 솟아난 한 모금으로도 쉬이 꺼지는  잿불 속의 희미한 불씨였네. 허나 이제 나의 강한 동경(憧憬)은  하나의 잔이 되었고  사랑이 나의 포도주로  그리고 외로움은 나의 즐거움으로 변하였다네.         5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보라고.  우리가 매달려 온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었음을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 나는, 겨울에는 따스함으로  여름에는 서늘한 미풍으로 만족했으나 이제 내 손가락들이 안개처럼 되어  붙잡았던 모든 것들을 떨어뜨려  보이지 않는 나의 갈망들을 뒤섞어버리려 하네.         6  내 영혼이 나를 초대했네  뿌리도 줄기도 꽃도 없는 보이지 않는 나무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예전에 나는 정원에서 향기를 찾았었고  향긋한 풀잎이 담긴 항아리와 향기로운 그릇에서  그걸 찾았었네.  그러나 이제 타버리지 않는 향기만을 느낄 수 있네.  지구의 모든 정원과 우주의 모든 바람보다도 더욱 향기로운 공기를 숨쉬고 있네.         7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미지의 것이 나를 부를 때  "나는 따르겠다." 대답하라고. 지금까지는 시장에서 외치는 목소리에만 대답해왔고  잘 닦여진 길로만 다녔었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깨달음을 한 마리 말로 삼아  미지의 것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또한 길은 그 험한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놓인  사닥다리가 되었다네.         8  내 영혼이 나에게 시간을 헤아리라고 훈계했네  "어제가 있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다." 말하면서 그 때까지 나는  과거란 단지 잃어버린 채 잊혀질 시대라고 생각했었고  미래란 내가 얻을 수 없는 시대라고 여겨왔었네. 이제는 이것을 배웠다네.  덧없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시간이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언젠가는 얻어지는 것이며  마침내는 실현되리라는 것을.         9  내 영혼이 나에게 말하였네  "여기에, 저기에, 또 너머에."라는 단어들에 의해  나의 자리가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 나는 언덕 위에 서 있었고  다른 모든 언덕들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언덕이  실로 모든 언덕이기도 하다는 것과  내려가는 이 골짜기도  모든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네.       10  내 영혼이 충고했네  다른 이들이 자고 있을 때 깨어서 보고  그들이 깨어 있을 때 베개를 찾아 나서라고.  내 생애 동안 나는 그들의 꿈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들 역시 내게 그러했었네   그러나 이제, 낮에는 내 꿈 속을 날아다니고  사람들이 자는 밤에는 그들이 자유로움을 보며  그들의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되었네.     그림: DANIEL GERHART 11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지나친 칭찬에 우쭐해 하지도 말고  비난받았다고 괴로워하지도 말라고.  예전에는 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의심했었지만 이제 이것을 배웠다네.  나무는 칭찬이나 두려움, 부끄러움이 없이도  봄이면 꽃 피고  여름에 열매 맺고  가을에는 잎을 떨구고  겨울에는 홀로 앙상해진다  시인이며 화가, '예언자'인 칼릴 지브란은 1883년 12월 6일  레바논의 비샤리(Bsharri ; 베챠리)에서, 마론파(Maronite) 교회 목사의 딸인 어머니와 부유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지브란의 아버지는 도박을 좋아하여 감옥생활을 하는 등 가정 불화가 심하였고 결국 그의 가족은 아버지를 두고 189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보스톤의 빈민가에 정착을 했다.  그 후 그는 아랍어와 영어를 배우며 많은 창작활동을 했다. 화가로서도 일찍 인정을 받은 그는 그림과 시, 한편의 소설과 완성되지 않은 글등을 남기고 48세의 길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그의 고향 비샤리에 안장되었다.   말년이 평탄치 못했던 칼릴 지브란... 그는 40세에 예언자를 출판했지만 삶이 주는 어떤 문제가 힘겨웠나 보다. 결국 그의 간은 망가지고 휴식을 요구했으나 알콜중독으로 그 고통을 무마하려했던 그의 대응은 '예언자'의 죽음을 초래한다.   그의 삶이 어떤 굴곡이 있었던 간에 그는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고, 자신의 삶에도 제시하려 했으나 힘이 부족했나 보다. 인간의 한계가 가끔 이럴 때 느껴지는 데 그래서 예전부터 어떤 수행자에게는 스승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도반도.. 나 역시 스승과 도반이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의 그림을 감상할까 한다.                                                     칼릴 지브란이 사랑했던 세 여인들         메리 헤스켈(Mary E. Haskell)   그녀는 헤스겔보다 나이가 많은 연상의 여인으로 1904년에 열렸던 지브란의 그림 전시회에 참관한 후 그의 예술성과 천재성을 사랑하여 평생 그를 돌봐 준 여인이다. 그녀는 고등학교의 교장이었으며, 그의 파리 유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1910년 보스톤으로 돌아온 지브란은 메리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청혼을 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써, 지브란은 그녀에 대한 심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그녀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지속할 수 있었다. 지브란은 그녀를 "하늘" "천사"로 책에서 묘사할 만큼, 그녀에 대한 고마운을 잊지 않았으며, 그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외에도 수 많은 책으로 남겼다. 그는 생전에 여러 점의 그림을 그녀에게 헌납하기도 하고, 죽기전에는 그녀를 그의 유산 관리인으로 지목하여, 생전에 진 그녀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였다.   메리 헤스켈과 칼릴 지브란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두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시의 형식으로 배열하여 마치 시를 읽는 듯한 기분으로 서간문을 읽을 수 있다. 또힌 지브란의 일기, 명상록, 작품집등에서 발췌한 보석 처럼 빛나는 글들도 조화롭게 실려있다. 얇고 작은 사이즈라 사랑하는 이들끼리 손 안에 꼬옥 쥐어 주던 책             마이 지아다 (May Ziadah)   지브란과 그녀는 단 한차례도 만나지 않은채 서신으로 만 서로의 예술과 문학을 존경하며 영혼의 사랑을 나누었다. 마이 지이다는 금세기 아랍 문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작가 중의 하나이다. 마이는 팔레스타인의 나사렛에서 태어 났으며 일생의 대부분을 카이로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한 운동에 평생을 관여했다. 이들은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도, 1912년 지브란이 [부러진 날개]를 출간한 이후부터  그들은 영적으로는 완벽하게 하나된 사랑을 하였다. [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타]는 지브란이 그녀에게 보낸 수백통의 연서들로 출간 된 책이며, [내 영혼 가장 가까이에 그대가 있습니다.]는 그들이 나눈 아름다운 영혼의 사랑을 재 조명한 책이다.   1917년 12월 3일 모든 사람중에서 당신이 내 영혼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세상에 태어나던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잃어버린 나의 반쪽입니다. ............................ 1919년 7월 25일 그대는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을 이야기하며, 당신의 비밀을 찾으려 애쓰며, 당신의 신비를 캐기 위해 노력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 1923년 12월 3일 나는 나의 귀여운 이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왜 그녀를 사랑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영혼으로 마움으로 사랑한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합니다. ........................... -[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타]중 발췌       바바라 영(Babara Young) --   영국 출신이며, 영어 교사로 서점을 운영하던 그녀는 지브란의 마지막 생애 7년을 헌신적으로 돕고, 임종을 지키며 유품들을 고향으로 보내는 역활을 하였다. 그녀는 1944년에 [레바논에서 온 사람]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유고를 모아 그의 마지막 작품집[예언자의 정원]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녀도 역시 지브란과 함께 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의 임종을 지킨 그의 마지막 연인일 뿐이었다.         지브란의 여인들은 모두, 지브란의 책을 읽고, 또 그의 그림 전시회를 보고, 그의 천재성과, 그의 감성을 사랑하여,  독신인 그에게 연서들을 보내 오면서 그와의 사랑이 시작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5세때 아랍어로 예언자의 초고를 썼고, 12년 후 영어로 다시 쓴뒤, 수차례의 퇴고를 거쳐서, 40세가 되던해 1923년에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스스로 "나는 예언자를 쓰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할 만큼, 전 생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한다.   [20세기 미국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인 예언자는 사회적인 불안으로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던 60,70년대 젊은이들에게 힘과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75년에 초판이 발행되어 사상 유레없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중학생이었던 나도 교과서 대신 이책에 몰두했던 기억이 있는 만큼, 이책의 위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사랑외엔 아무 것도 줄 수 없으며, 사랑외엔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 사랑은 소유하거나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으로 족할 뿐이므로   -칼릴 지브란       1883년에 레바논에서 태어난 칼릴 지브란은 1895년에 방탕한 남편을 버려둔채 자식들 만을 데리고,미국으로 이민온 어머니를 따라 보스톤에 정착하게 된다. 그림에서 천재성을 발견한 선생님의 권유로 예술학교를 다녔다.   15살때 아랍어로 예언자의 초고를 썼고, 조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홀로 레바논으로 돌아가 고교를 다니고, 다시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형을 폐렴으로 잃게 되는 비운을 안게 된다.   그후 그는 메리 헤스켈의 도움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 그 시대의 철학자, 사상가, 문학가, 화가들을 두루 만나, 그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위대한 예술가,사상가,철학자, 작가이며,시인의 길을 걷게된다.   1931년 48세로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숨을 거두며, 그는 그의 유골이 조국에 묻히기를 소원한다.                                                                            워싱턴 DC의 칼릴 지브란 기념비          
345    신비스러운 "투시" 화가 - 알렉스 그레이 댓글:  조회:1765  추천:0  2017-02-19
                                      자화상 알렉스 그레이의 작품들                  
344    "아테네 학당"에 "모인 유명인들" 그 당시에 "모일수 없었다"... 댓글:  조회:2277  추천:1  2017-02-18
일단 아테네 학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일 수가 없는, 라파엘로 당시에는, 지성의 드림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델들도 다양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모델로 플라톤을 표현하였고, 미켈란젤로는 헤라클레이토스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라파엘로는 상상화를 그린 것이고, 필기구는 당시에도 떠올릴 수 있는 도구들로 생각됩니다. 이 도구들에 대한 설명이 어디에도 없어서(없는 것이 아니라, 못찾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몇가지 추측을 해보려 합니다.  1. 일단 책은 종이가 아니고 양피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종이의 전파와 피타고라스라는 인물의 무게,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판과 들고 있는 펜의 형태등을 고려한 것입니다.  2. 종이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물론 파피루스가 쓰이기는 했지만, 보관용 책이나 소중한 책인 경우 양피지가 쓰였습니다. 그 까닭은?... 3. 종이가 전파되는 시기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750년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에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제지 기술을 가진 포로들이 이슬람제국에 넘겨지게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탈라스 전투는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전투입니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지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4. 종이가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전파되는 시기는 12세기 이후입니다. 10세기 경에야 비로소 이집트에 전해졌고, 12세기에 스페인으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유럽에 널리 퍼져서 지금처럼 활발하게 사용하게 된 것은 17세기 무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라파엘로가 살던 시절에 굳이 양피지 대신 종이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피타고라스 손에 쥐어주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라파엘로가 살던 시대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반이었고, 아테네 학당도 그 무렵의 작품이었습니다.  6. 펜은 거위깃펜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잉크의 역사는 전문가가 따로 계시니까 부연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라파엘로는 당시의 관념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분명합니다.(중세에 그려진 대부분의 작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모 그림을 보시면, 절대로 2000년전 유태인들의 일상생활 모습이 아닙니다.)  7. 앞에 있는 것은 피타고라스의 음향학과 관련된 그림을 밀랍서판에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밀랍서판은 지금의 연습장처럼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밑그림이나, 미리 적기를 하고, 양피지에 옮기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필기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음향학이란 것은 추측한 것입니다.)  ////////////////////////////////////////////////////////////////////// 아테네 학당이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정식적인 수업절차를 받아 미술세계를 완성한 라파엘로의 인본주의 철학과 우주적 세계관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품을 구상하려면 소재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계기나 영감을 얻은 곳이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로가 아무리 광범위한 철학적 지식과 안목을 지녔다고 해도 힌트를 얻은 곳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죠.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일부 미술사학자들과 평론가들은 당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문필가로 알려진 단테의 신곡(神曲, Divine Comedy)에서 소재를 얻었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이것도 다만 추측에 불과할 뿐 라파엘로가 직접 말을 통해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미술작품은 그 작품자체가 말하는 것이지 작가가 말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작가가 설명을 해버리면 작품의 생명력과 신비함은 사라져 버립니다. 또한 작가는 꼭 하나의 소재만을 모방해서 작품을 그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1307년경부터 쓰기 시작하여 1321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지옥, 연옥, 천국편의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품제목을 희곡이라 붙인 것은 비참한 인상을 주는 지옥편을 제외하면 나머지 연옥과 천국편은 쾌적하고 즐거운 내용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사후세계 여행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테가 33살 되던 해 성(聖)금요일 전날 밤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며 번민의 하룻밤을 보냅니다. 다음날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다가가려 했으나 3마리의 야수가 길을 가로 막아서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작품 속의 단테의 친구이자 주인공인 베르길리우스(Virgil)가 나타나 단테를 구해 주고 길을 인도하면서 단테를 지옥으로, 다음에는 연옥의 산으로 안내하고는 그 산 꼭대기에서 단테와 작별하고 베아트리체에게 그의 앞길을 맡깁니다.  단테는 그가 흠모했으며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으면서 천국을 즐겁게 여행하게 되는 게 전체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단테는 이 작품을 완성 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겠지만 신곡에는 연옥, 지옥, 천국을 통해 엄청난 영웅호걸들이 등장합니다. 광대한 장편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 속에는 너무나 많은 수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사실 작품의 규모가 크기도 커서 그렇겠지만 단순히 르네상스 시대뿐만이 아니라 당시까지만 해도 등장인물이 그렇게까지 많은 작품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단테의 신곡 지옥편(Inferno) 4번째 책에 보면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 깊은 곳으로 빠져 헤매다가 우연히 덕과 지혜를 겸비한 비교독교인들(pagans)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합니다.  “단테는 지옥에 가두었지만 라파엘로는 해방시켜”  여기에는 영웅들도 있고 시인, 그리고 철학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계시(Revelation)의 앞선 시대에 살았고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올바르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덕과 인간성을 소유한 대단한 철학자들이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가 출현하기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과 영웅들이 지옥에 빠져 있던 겁니다. 어쨌든 단테는 신곡에서 그들을 지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들을 해방시켜 아테네 학당이라는 위대한 신전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속에서 라파엘로의 인본주의 정신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단테는 르네상스 기운이 막 태동하기 시작하던 때의 인물로 라파엘보다 150년 정도 앞서 살다간 문필가였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세시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였지만 단테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흐름에 단초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단테는 이 작품으로 최고의 문필가라는 소리를 들었고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와 마찬가지로 시성이라는 명칭을 얻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영향력이 대단한 작품에서 소재를 발견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죠.  단테의 영향으로 등장인물이 많은 작품을 선호해 사실 르네상스 시대 초기나 성화만하더라도 몇몇 작품을 빼놓으면 주로 초상화가 많았고 인물들을 많이 등장시킨 그림들은 찾아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는 초상화도 많지만 아테네 학당처럼 등장인물들이 많은 그림도 상당수가 됩니다. 성체논의(디스푸타), 파르나소스, 보르고의 화재 등의 작품에서 많은 수의 인물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래서 아테네 학당이 신곡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자, 아테네 학당으로 돌아가죠. 그림은 몇 개의 토론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 정문을 배경으로 토론을 벌이거나 아니면 뭔가를 설득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리스 석학들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게 보입니다. 또 일부는 그저 듣거나 쳐다보면서 구경만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 정 가운데서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세계 철학과 사상의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수업이 끝나 아테네 학당 문을 나오면서 수업시간에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열심히 나누고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라기보다 친구이자 학문적 동료의 자격으로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도 등장하지만 라파엘로는 역시 그리스 사상의 축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정 중앙에 배치한 이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교도의 수장 조로아스토도 등장시켜 화면 왼쪽 제일 아래에는 그리스의 제1의 수학자이며, 신비주의자, 종교가인 피타고라스가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한 제자가 받쳐주는 어떤 판에 뭔가를 쓰면서 사람들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가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습니다. 콤파스로 두 개의 삼각형을 그려 보이며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태도가 진지하며 놀라워하는 모습이 잘 표현돼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지구의를 들고 있는 프톨로레미 맞은 편에 흰 옷을 입은 고대 페르시아 배화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도 등장합니다. 조로아스터를 철학자로 등장시킨 라파엘로의 아이디어가 상당히 놀랍습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조로아스터는 분명 이교도의 수장이기 때문입니다.  원자론으로 유명한 데모크리토스도 등장합니다.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넘기는 모습이 사뭇 진지합니다. 부질없는 인간사를 초월해 도통한 모습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렉산더와 소크라테스도 보입니다. 시대차이로는 2백 년이 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뭔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듣는 자세고 소크라테스는 가르치고 있는 포즈입니다. 사실 알렉산더뿐만 아닙니다. 여기에는 군복으로 무장한 알키비아데스도 등장합니다. 히파티야를 부각시킨 것도 이색적인 접근 아테네 학당을 내려오는 계단에 누더기 차림의 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아테네의 개로 유명한 디오게네스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모여 토론하고 있는데도 디오게네스는 그저 혼자 덜렁 누워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책은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횐 옷을 입은 여성은 수학자 히파티야로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수학에만 전념했습니다. 숫처녀로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기독교도들의 습격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은 비운의 여성 과학자입니다.  히파티야는 누구와 이야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묻혀 있지만 혼자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을 무참히 살해한 종교의 도그마를 한이 서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사람들은 왜 디오게네스를 개와 그렇게 비교하려는 것일까요? 대표적인 견유학파로 평가하고 있고, 사실 개의 성질이나 생활과 연관시키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그는 개의 덕(德)을 공공연하게 칭찬한 철학자입니다. 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나 생활패턴을 좋아했지요. 개의 德을 칭송한 철학자  이는 디오게네스의 인간이 너무 가식적(artificially)이고 위선적(hypocritically)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의 생활을 공부하고 그 덕을 따른다면 사람이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난 진정한 내면의 세계, 진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개의 찬사’ 철학을 들어볼까요? “개에 대해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이나 먹는다. 그리고 어디에서 잘 것인지 잠자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개는 주어진 상황을 불평하지 않고 걱정 없이 살아간다. 아는척하면서 어렵고 추상적인(abstract) 철학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덕목(德目)들 말고도 다른 것들이 있다. 개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누가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간하는 능력이 있다. 또 자신이 사기를 치고 있는지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는 달리 개는 진리를 향해 정직한 소리로 잦는다.” “개는 가식과 위선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개를 찬미하는 노래라고 할까요? 이런 이유로 개의 철학을 죽을 때까지 고집하면서 살아 간 거겠죠. 그에게는 가식과 위선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겁니다.  자신을 스스로 개라고 자처하면서 돌아다니는 디오게네스를 보고 한 시민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개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는 사람에게는 꼬리치면서 반기고,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시끄럽게 짖어대고, 내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달려 들어 물어버리기 때문이죠” 그는 정말 개의 철학을 고수했습니다. 아무런 방해 받지 않고 한가롭게 거닐고 낮잠을 잘 수 있었고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도둑 당한 염려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해방을 만끽하면서 산 거죠.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이 내킬 때 아침 식사를 하게 되지만, 나 디오게네스는 내가 내킬 때 아침 식사를 한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잘 차려 입은 사람을 만날 때 즐거워지는 것은 내 눈이지 그 사람의 눈이 아니다. 그 사람은 나의 남루한 누더기를 보게 되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걸친 훌륭한 옷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생쥐와 나는 같다. 운명의 덫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그는 또한 어느 날 밤 돌아다니는 생쥐들 보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잠잘 곳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생쥐처럼 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운명의 덫에 걸리기 전까지 생쥐와 나는 이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겠지.”  디오게네스는 그러나 그야말로 거지처럼 구걸하면서 공짜로 빌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분이 나를 거지로 부르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하시오. 그러나 나는 좀 별난 거지라오. 빵 한 조각을 줄 때마다 지혜의 말을 건네 준다오.” 부와 명예보다 한 줄기 햇살을 사랑한 디오게네스는 역사상 최초의 세계주의자로 코스모폴리탄(cosmopoitian)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하루는 이 엉뚱한 철학자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출신이 어디요?”라고 묻습니다.  디오게네스는 “I am a citizen of the world(cosmopolites). 난 세계의 시민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주의의 시조가 바로 아테네의 거렁뱅이 철학자 디오게네스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세계주의를 최초로 부르짖은 철학자 이 부분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수 많은 폴리스(city)로 이루어진 그리스사회에서 세계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다른 폴리스와 내통을 하거나 자신이 속한 폴리스에 반기를 든 사람이나 철학을 지칭하해서 ‘위험한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를 해석해 본다면 “나는 걸핏하면 서로 싸우고, 인종이나 믿는 신이 서로 다른 그러한 폴리스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우주, 자연에서 온 자유인”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한 폴리스에 소속감을 느끼는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가 없다는 이유로, 오늘 같으면 반체제인사로 망명을 하거나 추방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과감하게 그 말을 썼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압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아테네에서 머물던 그가 코린토스(Corinth)로 가게 된 게 그와 같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알렉산더를 만난 거죠.  미친개에 물려 죽은 아테네의 개 재미 있는 일화들로 기억되고 있는 디오게네스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일화들도 남겼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낙지를 먹고는 체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개와 인연은 죽을 때까지도 계속 된 건가요? 개를 너무 좋아하다가 일어난 일인지 광견병에 감염된 미친 개에 물려 걸려 죽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임종이 다가오자 주위 제자들이 어떻게 장사를 지내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가 숨을 거두면 성벽 밖으로 던져버려라. 그러면 들짐승들이 내 몸을 갖고 축제를 한바탕 벌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습니다. “(성밖으로 버려도) 정말 괜찮은 지요?” “괜찮아, 나에게 그 짐승들을 다그쳐 쫓아낼 몽둥이를 주지만 않는다면 말일세”  그러자 또 묻습니다. “(죽으면) 의식이 없는데도 몽둥이를 사용할 수 있겠어요?” “내가 (지금) 의식이 없다면 왜 내가 죽어서 어떻게 될 지를 걱정하겠는가?”  내 죽거들랑 성 밖으로 던져 들짐승들 축제하도록… 약간 아리송한 선문답처럼 들리나요? 그러니까 지금은 의식이 있으니까 걱정을 하는 거고, 의식이 없게 되면 빈 껍데기 송장이니깐 걱정하지 말고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성밖으로 던져버리라는 뜻인 것 같네요. 아마도 죽음을 앞두고 지나치게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농담을 던진 것인지도 모르고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아테네의 거지는 80세의 생애를 마칩니다. 당시로 본다면 천수(天壽) 이상을 누렸다고 할 정도로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죠. 숨을 거두자 코린토스 사람들은 평생 개의 철학을 고수했던 디오게네스가 평안히 쉴 수 있도록 개 모양으로 된 대리석 베개를 만들어 무덤 앞에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소설가 정비석씨의 이야기대로 “고작 70세의 생애로 희로애락을 각축하다가 한 줌의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고작 1평 땅에 묻히는 것이 인간이며, 세월과 함께 한 줌의 재도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땅을 빼앗아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는 알렉산더보다 디오게네스가 더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들이 준 선물은 간단한데, 인간이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어!”  그를 견유학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베게 삼고,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육체까지 헌신짝처럼 버린 디오게네스에게 학파를 굳이 따진다는 것은 위대한 성인인 그에 대한 모욕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저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무소유로 평생을 살아간 그가 남긴 명언 한 가지만을 소개하면서 디오게네스를 끝마치겠습니다. “Humans have complicated every simple gifts of gods. 인간은 신들이 준 모든 간단한 선물들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설명이 없는, 아테네의 거지에 아주 걸맞는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형근 편집위원 
343    한폭의 그림과 고대 그리스 유명인들 댓글:  조회:5198  추천:0  2017-02-18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교과서에도 곧잘 실릴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어디선가 보았을 것이다. 이 그림은 크기가 579.5×823.5cm에 이르는 대형 벽화이다. 고전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살아 있고 부분과 전체의 조화가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26세 때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개인 도서실에 그린 것으로 지금은 바티칸 성당에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벽화〉 〈천지창조〉에 비길 수 있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1509년 그림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고 이들의 왼쪽 옆으로는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보인다. 왼편 기둥 쪽에 풀잎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은 에피쿠로스, 그 앞쪽에서 무언가 책에 기록을 하고 있는 뚱뚱한 아저씨는 우주 만물이 수(數)로 되어 있다고 설파한 피타고라스이다. 계단에 앉아 턱을 괴고 사색에 잠겨 있는 인물은 헤라클레이토스,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은 견유학파로 잘 알려진 디오게네스이다. 그 외에도 파르메니데스, 유클리드, 제논 등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와 수학자가 수십 명이나 등장한다. 하나의 그림 안에 고대 그리스 철학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단연 중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어 나오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옆구리에 〈티마이오스(Timaeus)〉 즉 형이상학이라고 쓰인 책을 낀 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이 플라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을 의미하는 〈에티카(Ethica)〉라는 책을 허벅지에 받치고 손바닥을 펴 지상을 가리키고 있다. 이 두 학문 영역은 논리학과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3대 학문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는 두 사람의 철학적 차이를 재미있게도 손동작 하나로 구분하고 있다. 하늘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통해, 진리만으로 이루어진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의 세계가 하늘 어디엔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함께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대지를 가리키며 자연과 현실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손동작으로 대신하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데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 이곳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이를 지성에 의해 대뜸 알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그러나 어둠과 섞인 것에, 즉,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의견’을 갖게 되고, 이 의견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가짐으로써 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이번에는 지성을 지니지 못한 이처럼 보인다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주는 것은 ‘좋음(善)의 이데아’라고 선언하게. 이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지만, ‘인식되는 것’이라 생각하게나. 반면에 이 둘이, 즉, 인식과 진리가 마찬가지로 훌륭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이 이데아는 이것들과도 다르며 이것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라 믿는다면, 자넨 옳게 믿게 되는 걸세. 그러나 인식과 진리를, 마치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의 빛과 시각을 태양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만, 태양으로 믿는 것은 옳지 않듯,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이들 둘을 ‘좋음’을 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으나, 어느 쪽 것도 ‘좋음’이라 믿는 것은 옳지 않다네. 오히려 ‘좋음’의 처지를 한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네. 플라톤은 이데아를 존재와 변화의 원인으로 제시한다. 어떤 것이 뜨거워지는 것은 그것이 뜨거운 이데아에 관여할 때이다. 즉 그것에 뜨거움을 가져오는 불에 관여할 때이다. 불이 뜨거움을 가져온다면, 불은 뜨거움의 대립자인 차가움을 받아들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삶에 관여할 때, 즉 인간에게 삶을 가져다주는 영혼을 가질 때 살아 있게 된다. 영혼이 삶을 가져오므로, 영혼은 삶의 대립자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은 불멸한다는 것이다. 이데아론은 인간의 감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물리적 사물들 외에 아름다움과 올바름 같은 형상(形相)들 즉 이데아가 존재하며, 최고의 단계로 선(善)의 형상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리적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감각적 지식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지성으로 파악한 이데아의 영역은 영원하고 불변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의 이데아는 사물들의 특성을 결정하며, 사물들은 이 완전한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물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플라톤은 자연을 ‘감각적 사물의 세계’라 불렀다. 그리고 플라톤 스스로 참된 실재로 불렀던 여러 이데아인 정신적 제 본질의 부동적이고 불변인 세계로부터 자연이 파생된 것으로 간주한다. 결국 본질이나 진리는 현실의 사물이나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여 별도의 세계에 존재한다. 플라톤은 이성을 통해 이데아를 탐구하고 이를 인간 사회에 실현하고자 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라 모사물의 세계인 감각적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오직 감각적인 세계를 벗어날 때뿐이다. 이데아의 인식 과정은 육체나 감각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의한 것인데 철학자는 육체나 감각을 죽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순수한 진리를 직관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먼저 플라톤의 이데아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에다 ‘그 자체’라는 말을 붙여 경험적 사물을 영원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책상에다 ‘책상 그 자체’라고 하면 책상의 이데아가 되고, 말에다가 ‘말 그 자체’라 붙이면 말의 이데아가 되고, 마찬가지로 사람에다 ‘그 자체’라는 말을 붙인 ‘사람 그 자체’가 사람의 이데아가 된다. 그런 점에서 감각적인 사물을 머릿속에서 영원한 것으로 개념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가 보기에 플라톤은 이데아를 경험적 사물의 본질이라고 하면서도 이데아를 경험적 사물에서 분리시키고 있는데, 이데아가 경험적 사물들의 본질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들 속에 내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질료와 형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논한다. 그는 질료와 형상은 분리될 수 없고 형상은 질료를 통해 발현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지칭한 형상들이 질료에 해당하는, 보거나 만져서 알 수 있는 사물들과는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과 결합하여 존재한다. 그가 보기에 이데아라는 것은 단지 인간의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일 뿐이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들 자체 속에, 사물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주의적인 일원론을 펼쳤다. 본질이 사물과 함께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는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인식론만이 아니라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정치학, 윤리학, 역사, 문예이론, 수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탐구했다. 그는 120종의 어류와 60종의 곤충을 포함해 500종이 넘는 동물을 분류했는데, 18세기에 린네가 분류학을 체계화할 때까지 2000여 년 동안 그대로 쓰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에 대한 상이한 태도는 이후 중세 신학의 서로 다른 기반을 이루게 된다. 서양의 중세 초기와 중기 신학을 지배한 것은 플라톤적인 철학이었다. 이데아가 실재했다고 여겼던 플라톤의 주장과 당시 저 하늘 어디엔가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주장했던 기독교의 이해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중세 후기로 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신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어딘가에 실재하고 있을 천국만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내부에서 신의 진리를 찾으려는 경향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 아름다움 등 인간 정신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이상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서양 철학의 가장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 냈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가장 유명한 말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너 자신을 알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왜 그토록 유명할까? 언뜻 생각해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철학적 명제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을 구분 짓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명제가 그냥 무지를 질타하는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하다면 좀 우스워진다. 그러면 “공부해서 남 주냐, 공부 좀 해”라고 항상 말씀하시는 부모님들도 소크라테스와 동기동창쯤 되어 버린다. “너 자신을 알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중 하나로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꾼,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너 자신’은 곧 인간을 의미한다. 이전의 서양 철학은 대부분 자연철학이었다. 모든 만물의 근본이 물이라고 했던 탈레스나 불이라고 했던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철학의 대상을 자연의 본질 탐구에 두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연 탐구에 몰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올바름’이나 ‘덕’과 같이 인간 내면의 문제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어떠한 원칙이 올바른 것인가를 탐구했다.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내면)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 철학은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그림 상단 왼편에 녹색 옷을 입고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화가는 들창코와 앞머리가 벗겨진 모습으로 그를 표현하고 있다. 그 옆에 파란 옷을 입은 젊은 사람이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그리고 그 왼편으로 소크라테스와 마주한 채 투구를 쓰고 군인 복장을 한 사람이 알키비아데스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로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을 사귀면 질투가 나서 훼방을 놓아 헤어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나중에 “내가 사랑한 것은 알키비아데스와 철학뿐”이라고 이야기했다. 헤라클레이토스, 디오게네스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헤라클레이토스와 디오게네스였다. 맨 앞에서 계단에 앉아 팔을 탁자에 기댄 채 사색의 즐거움에 깊이 잠겨 있는 인물이 헤라클레이토스이다.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라파엘로는 플라톤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 헤라클레이토스를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통해 그렸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테네 학당〉의 완성 단계에 새로 첨부한 부분으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 벽화〉를 본 후 감탄과 경의를 표하기 위해 새로 그려 넣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말 그대로 세상 만물은 변화를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상을 진리로 믿곤 한다. 강물은 끊임없이 위에서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 오기 때문에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음에도 어제와 같은 물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그리스의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물이나 흙처럼 세계의 근원적인 물질을 찾는 데 주목했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 자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뚜렷하게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대립된 성질을 갖는 요소들 사이의 투쟁을 통해 변화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우주에는 서로 상반된 것들 간의 다툼이 있고 만물은 이러한 상반된 것 사이의 다툼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요 만물의 왕”이라고 했다. 세계는 대립과 모순으로 되어 있고 조화란 이러한 싸움의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진리나 조화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떤 고정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는 아주 상이한 철학적 태도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갈등과 대립은 진리, 조화가 아닌 상태를 상징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 만물의 변화를 불을 통해 해명을 했는데 여기에서 불은 에너지, 기(氣)와 같은 것을 뜻한다. 불은 언제나 타고 있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탄생’을 부정했다. 계단 한복판에 보라색 망토를 깔고 거의 반라의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사람은 명예와 부귀를 천시했던 견유학파 디오게네스이다. 그는 대낮에 의인을 찾으려 등불을 들고 다닌 철학자로 유명하다. 온갖 재물과 명예 같은 것들은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여 쾌락을 멀리하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했다. 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이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항아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정중하게 대화를 청한다. 그리스, 소아시아, 나아가 온 세상의 정복을 바라는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다음에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렇게 하고 나면 아마도 좀 쉬면서 즐겨야 하겠지”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상하군요. 왜 지금 당장 좀 쉬면서 즐기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왕인 자신이 해줄 게 없느냐고 그에게 묻자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라고 했다. 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이는 ‘견유학파’는 ‘개같이 사는 지식인’이라는 뜻으로 종교, 사랑, 철학 등 모든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그는 당시 시체를 담는 항아리인 옹관에 살면서 일체의 문명, 관습, 법률을 거부했다.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명적인 사고, 거대한 국가적인 통일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대항했던 노자, 장자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국가의 사상과 법률을 정비하는 데 학문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던 그 시대에, 문명적 사고를 비판하며 인간 본래의 모습을 추구하고자 했던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알프레드 화이트헤드)고 까지 여겨지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이단아로 볼 수 있다. /////////////////////////////////////////   아테네 학당’은 17세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Giovanni Pietro Bellori, 1615?~1696)가 그림이 고대 철학자들로 가득한 것을 두고 붙인 이름이다. 라파엘로는 약 60여 명에 가까운 철학자들이 모여 있는 이 공간을 평소 자신과 친분이 있던 도나토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설계도를 참고하여 만들어냈다. 브라만테는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모범으로 삼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건축가였다. 와플 모양의 반원형 천장, 그리고 바닥, 계단, 벽체 등은 그림 정중앙의 소실점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모여든다. 이 완벽한 원근법 덕분에 그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어수선한 느낌을 피할 수 있다. 배경이 된 건축물은 좌우로 대칭을 이루고 있고, 산만해 보이는 인물들 또한 큰 무리로 보면 좌우가 적당한 비율을 이루고 있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프레스코 / 700×500㎝ / 1508~1511년 제작 / 서명의 방 인물들의 늠름한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떠오른다. 라파엘로는 피렌체 시절 미켈란젤로가 작업한 조각품들이나 당시 지척에서 작업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참조하여 작품 속 다양한 인물들의 자세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 하단에 턱을 괴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왼편으로 한쪽 다리를 상자에 올린 채 몸을 비틀며 서 있는 파르메니데스만 해도 미켈란젤로의 미완성작 〈마테오 상〉을 단숨에 연상시키니 말이다. 미켈란젤로 〈마테오 상〉 대리석 / 271cm / 1503년 제작 / 아카데미아 미술관, 피렌체 라파엘로는 아폴론과 아테나의 대형 조각상을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배치했다. 아폴론은 음악과 조화의 신이며 아테나는 지혜의 신이다. 그림 중앙에는 소위 ‘그리스 철학’을 언급할 때 단연코 떠오르는 두 거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다. 왼편의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Timaios)》를 끼고 서 있다. 이데아 등 관념세계를 주장하던 플라톤은 손가락을 위로 치켜든 채 저 높은 곳, 세상을 초월한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곁에 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시 자신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을 들고 있는데, 그의 손바닥은 플라톤과 달리 ‘지상’을 향한다. 왼편 아폴론 상 아래 있는 무리 중 초록색 옷을 입고 서 있는 남자는 주먹코에 못생긴 얼굴을 가진 소크라테스로 추정된다. 투구를 쓴 남자가 열심히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데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계단 중앙에 널브러진 채 앉아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남자가 곁에 둔 술잔이 독배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소크라테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의견은 이 남자를 디오게네스로 본다. 세속적인 잣대를 벗어나 유유자적 자유롭게, 스스로 말하길 ‘개처럼’ 살았다 해서 그는 견유학파로 불린다. 네 계단을 내려오면 왼쪽에는 한 무리의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피타고라스가 책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피타고라스 뒤편, 즉 화면 왼쪽 기둥에 기대 선 남자는 머리에 포도 이파리로 장식된 화관을 쓴 채 뭔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에피쿠로스로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가 쓰고 있는 글을 바로 뒤의 남자가 그대로 베끼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깊게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라파엘로 자신의 ‘거장 베끼기’에 대한 변론이라고 읽기도 한다. 한편 화면상 피타고라스의 오른편 뒤에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은 금발의 여자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율리오 2세의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모델로 하였다. 〈아테네 학당〉 중 파르메니데스 〈아테네 학당〉 중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부분 이 무리들과 대칭점을 이루는 오른쪽 인물들 사이에는 대머리 남자 하나가 컴퍼스로 두 개의 삼각형을 그리고 있다. 기하학의 대가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다. 그의 곁에서 지구의를 들고 등을 보인 남자는 2세기경 천동설을 주장한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다. 그 앞에 흰옷을 입은 남자는 천구의를 들고 있는데, 바로 조로아스터다. 〈아테네 학당〉 중 에우클레이데스 부분 라파엘로는 고대 철학자들을 동시대인의 모습으로 담아내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려 했다. 정중앙의 플라톤은 사실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주로 밀라노에서 활동하다 1513년에야 로마로 입성했다. 그가 도착했을 당시 이미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했고, 라파엘로 역시 맡은 대형 프레스코화 작업을 차곡차곡 완성하던 중이었다.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로마에 정착하지 못한 것은 이 대가들의 틈바구니에서 더는 이룰 것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라파엘로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스승이었다. 게다가 그는 겉으론 늘 자신을 애송이 취급하면서도 속으론 질투와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미켈란젤로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아테네 학당〉 중 헤라클레이토스 부분 미켈란젤로 역시 그림 속에 등장한다. 중앙 하단 턱을 손으로 괸 채 사색에 빠져 있는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를 모델로 해서 그린 것이다. 그는 대리석으로 된 탁자 모양의 덩어리에 몸을 기대고 있다. 이는 그가 ‘돌’을 다듬어 형태를 창조해내는 조각가임을 상기시킨다. 그림 속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글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남이 하는 일에 관심이라도 보이고 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야말로 자신 속에 완전히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신경질적이고 꼬장꼬장한 미켈란젤로의 성격과 이 고립된 사색의 자세는 일견 통하는 데가 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따뜻한 성품으로 늘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라파엘로를 “패거리를 몰고 다니는 칼잡이” 같다고 비꼬았고, 라파엘로는 이에 “사형 집행인처럼 늘 혼자 다니시네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아테네 학당〉 중 조로아스터와 라파엘로 부분 사실 미켈란젤로의 모습은 그가 〈아테네 학당〉을 다 완성한 지 1년이 지난 뒤에 덧붙여 그린 것이었다. 1511년 8월, 명목상 성모승천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일종의 중간점검 차원으로 교황과 측근들 앞에서 미완성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대대적으로 공개한 적이 있었다. 그날 라파엘로는 이 고독한 천재의 경이로운 작품에 넋을 잃었고, 찝찝한 개인적 알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늦게라도 그려 넣음으로써 대가에 대한 자신의 벅찬 존경심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작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중앙의 두 철학자처럼 주인공으로 그려 넣지 않고, 바닥에 찌그러져 앉은 모습으로 그린 것을 보고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벽화 작업에서 라파엘로가 그린 자신의 모습, 즉 헤라클레이토스를 참고로 하여 예언자 예레미아의 모습을 그렸다. 장화를 신은 근사한 한 예언자, 예레미아는 결국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이 된 셈이다.(미켈란젤로 〈예언자 즈카르야〉 외 항목 참조) 한편 라파엘로는 자신의 로마 생활에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준 브라만테를 기하학의 대가 에우클레이데스의 모습으로 담았다. 그리고 그의 무리들 뒤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제일 오른쪽 귀퉁이 하얀 옷에 하얀 모자를 쓴 남자 뒤, 그림 밖 관람객에게 시선을 던지는 자가 바로 라파엘로다.   [Daum백과]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 바티칸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김영숙, 휴머니스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아테네 학당의 철학 이야기 – 미술관 옆 인문학, 박홍순, 서해문집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42    그림속에 54명의 유명한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들이 있다... 댓글:  조회:5926  추천:0  2017-02-18
       과거 학창시절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수학자들에 대해 배움니다. 이제 직접 이태리 로마 바티칸 궁을 방문하면서 한 쪽 벽면을 가득채운 한 장의 라파엘로가 그린 상상화 아테네학당을 보면서 54명의 고대 수학자, 철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전에 그림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보면 보다 더 학창시절의 일반사회, 세계사, 수학 시간이 떠오르게 됩니다. 더더욱 3명의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자료들을 이용하여 과거 바티칸 궁을 방문했던 때를 기억해서 정리를 해보았읍니다.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54명의 수학자와 철학자에 대해 모두를 알기는 매우 어렵지만 우리 모두 흔히 잘 알려진 몇몇의 학자들에 대해 복습할 수가 있읍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피다고라스, 유클리드, 제논, 히파티아, 조로아스터, 프톨레마이오스 등.   이태리 로마 바티칸 궁 서명실의 벽화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아테네학당[School of Athens] :  라파엘로 그림. 1509-1510 프레스코화. 로마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앙에 있는 사람의 왼쪽이 관념세계를 대표하는 플라톤이고 오른쪽의 파란 옷이 과학과 자연계의 탐구를 상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프레스코 벽화로, 크기는 579.5×823.5cm이다.  바티칸 미술관 스텐차 델라 세나투라(stanza della Segnatura)에 소장되었다.  이 학당에 54명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으며 대부분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들이다. 그림 속 인물 소개     전체 그림에서 왼쪽 상단의 세 사람이 있다. 목걸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크리티아스(Kritias)이고, 오른편에 상체를 벌거벗은 사람은 디아고라스(Diagoras)이다.   그리고 그 뒤에 머리만 빠금히 보이는 사람이 소피스트 학파의 고르기아스(Gorgias)이다.         [주석]   크리티아스(Kritias) : 기원전 460년 ~ 기원전 403년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철학자이다. 플라톤과 친척 관계에 있었으며, 소크라테스의 제자. 디아고라스(Diagoras) :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 멜로스의 디아고라스는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다.  고르기아스(Gorgias) : 기원전 5세기 말부터 기원전 4세기 초까지 활약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다. 프로타고라스와 함께 당대 대표적인 소피스트로 꼽힌다. 언어로 표현되는 로고스의 힘을 강조했으며, 인간 사유의 상대성과 불완전함을 주장.        크리티아스(Kritias) 옆으로 투구와 군인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이며, 바로 뒤로 누군가를 부르는 듯 팔을 치켜 올린 아이스키네스(Aischines)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역시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이자 역사 저술가인 크세노폰(Xenophon)이 카자스탄 이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흔히 쓰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다.크세노폰 옆으로 대머리이자 들창코를 가진 소크라테스(Socrates)가 제자들에게 두 손의 손가락까지 써가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바로 옆에서 관심이 없는 듯이 팔을 괴고 딴 곳을 보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이 있다.   [주석]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 아테네의 정치가, 군인(?B.C.450~B.C.404). 장군으로 선출되어 정적들과 싸우며 아테네와스파르타 등지에서 떠돌다가 기원전 407년 아테네로 돌아와 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음.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이자 군인이며 정치가. 아이스키네스(Aischines) :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ㆍ정치가(?B.C.389~?B.C.314). 마케도니아파로서 데모스테네스와 논쟁을 벌였으나 패하였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열정적인 제자이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독배를 마실 때도 함께 같이 있었다.  크세노폰(Xenophon) : 고대 그리스의 군인, 작가(B.C.431~?B.C.350). 키루스 반란군의 용병으로 참가하여 수기 를 저술하였다. 아테네 전쟁에서 스파르타 측에 가담하였다가 추방되었으며, 저서로 그리스 역사,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이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뒤로 두 번째 아랫도리에 흰 천을 두르고 팔짱을 낀 플라톤의 애제자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약간 떨구어 존재에 대해 심취해 보인다. 정 가운데에는 플라톤(Platon)[플라톤의 모델은 라파엘로가 평생에 제일 존경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습으로 대신하였다]이 오른손의 손가락은 하늘로 향해있으며 오른 손에는 Timaeus[생물학, 물리학, 천체학 등 자연과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책을 들고 있다. 그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도 같이 걸어 들어오고 있으며 왼손에는 Ethica(윤리학) 책을 허벅지에 받치고 있다.옆으로 이 두 사람 입장을 반기는 듯한 사람들 중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가 서 있으며, 약간 아래로 뒤통수만 보이는 사람은 에피쿠로스(Epicouros)이며, 그 옆이 아리스티포스(Aristippos)이다.   [주석]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396~?B.C.314). 플라톤의 학설과 피타고라스 학설을 조화하고자 하였고 이데아와 수(數)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였으며, 철학을 논리학ㆍ자연학ㆍ윤리학으로 크게 구분하였다. 플라톤(Platon)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428~?B.C.347).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생애를 교육에 바쳤다. 대화편(對話篇)을 다수 쓰고, 초월적인 이데아가 참실재(實在)라고 주장.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384~B.C.322). 소요학파의 창시자이며, 고대에 있어서 최대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고,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비롯하여 후세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는 형이상학, 오르가논,자연학, 시학, 정치학 등이 있다.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372~?B.C.287). 식물학의 시조로 꼽히며,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문제점을 연구하였다. 저서에는 형이상학, 식물지 등이 있다. 에피쿠로스(Epicouro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341~B.C.270). 원자론에 기초를 둔 에피쿠로스학파를 창시하였다.저서에 자연에 대하여가 있다.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435~?B.C.366).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키레네학파를 창시하였으며 궁극의 선을 쾌락으로 보는 철저한 쾌락주의자이다. 유체의 쾌락이 정신적 쾌락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      벽에 어떤 사람이 벽에 등을 대고 다리를 꼬아 엉거주춤한 상태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광경을 벽에 팔을 올려 그 위에 턱을 올리고 다리를 꼬은 자세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피론(Pyrrhon)이다. 그 옆으로 플라톤이 들어오는 모습을 오른쪽으로 고개만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플로티노스(Plotinos)이다.   [주석] 피론(Pyrrhon)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360~?B.C.270). 회의파(懷疑派)의 대표자로 사물의 본래 성질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판단을 멈추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플로티노스(Plotinos) : 이집트 태생의 고대 로마 철학자(?205~270). 신플라톤학파의 대표자로 중세 스콜라 철학과 헤겔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에네아데스(Enneades)이다.      다시 그림의 왼쪽 하단으로 가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엘레아의 제논(Zenon)이 있으며, 무엇인가를 서서 열심히 읽고 있는 그리스 자연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이슬람 출신의 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가 피다고라스(Pythagoras)가 앉아서 커다란 책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을 왼쪽으로 몸을 기우려 건너다보고 있으며,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뒤에서 오른쪽으로 건너다보고 있으며, 피다고라스(Pythagoras)에게 칠판을 내 밀어 보이는 사람은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이다.   [주석] 제논(Zenon) : 그리스의 수학자, 철학자(?B.C.495~?B.C.430). 기원전 5세기경 엘레아학파의 한 사람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로 불리며 역설적 논증으로 유명하다. '사람은 경기장을 건널 수 없다',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빨리 달리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 '반분의 시간은 그 배의 시간과 같다'라는 네 개의 역설을 남긴 제논의 역설 : 철학의 목적은 자신과 자연 사이에 일치를 이루는데 있다고 역설.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460~?B.C.370). 진실로 실재하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아토마(atoma)와 이것이 존재하는 장소로서의 공허뿐이라 하여, 원자설(原子說)에 입각한 유물론을 제창. 아베로에스(Averroes) : 에스파냐 태생의 아라비아 철학자ㆍ의학자(1126~1198).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로 알려졌으며, 종교에 종속되었던 철학을 독립적 지위에 올려놓는 데에 공헌하였다. 저서에 파괴의 파괴, 의학 개설 등이 있다. 피다고라스(Pythagoras) : 그리스의 종교가, 철학자, 수학자 :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으며, 수학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커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 것이며, 그의 증명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B.C.610~?B.C.546). 만물은 불사불멸하며, 무한자에서 생기고 이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B.C.500~?B.C.428). 이원론의 비조(鼻祖)로, 만물은 이질적인 무수한 원소의 혼합으로 생기며 이 혼돈된 상태를 누스가 정돈하여 세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함.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뒤에 흰 베일을 두르고 몸을 왼쪽으로 반쯤 돌려 앞을 바라보는 여인 이 바로 그 유명한 최초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Hypatia)이며, 디딤돌에 발을 올려놓고 오른쪽으로 바닥을 향해 내려다보는 B.C. 5세기경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이며, 그 옆에 커다란 대리석 탁자에 턱을 괴고 기댄 채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라파엘로가 매우 존경한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그려 넣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주위에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에피카르모스(Epicharmos), 아르키타스(Archytas of Tarentum)등이 있다.   [주석] 히파티아(Hypatia) : 고대 이집트의 철학자(?370~414). 아름다운 용모로 널리 알려졌으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키릴로스의 선동으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녀의 저술한 책이 아쉽게도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 이탈리아 태생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B.C.515~?). 엘레아학파의 대표자로, 존재하는 것은 불생불멸, 유일불가분(唯一不可分)의 실체이며 일체의 변화나 구별은 가상(假像)이라고 주장하였다: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을 역설한 존재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철학자(?B.C.390~?B.C.322). 지구가 24시간을 주기로 자전하며, 수성과 금성이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만물의 근원은 불이다. 만물은 유전한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490~?B.C.430). 우주의 만물은 흙, 물, 공기, 불의 네 원소로 이루어지며 이것들이 사랑과 미움의 힘으로 결합하고 분리하여 여러 가지 사물이 태어나고 멸망한다고 주장하였다. 에피카르모스(Epicharmos) : 그리스의 희극 작가(B.C.530~B.C.440). 시칠리아풍의 희극을 썼다. 아르키타스(Archytas of Tarentum) : 그리스의 정치가, 기술자, 피타고라스학파의 수학자. 플라톤과 달리 정육면체의 배적 문제를 풀 때 대담하게 반원기둥을 절단하는 3차원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반음계와 4분음정 등 음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그림의 가운데 계단에 너부러져 보라색의 망토를 깔고 비스듬히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명예와 부귀를 천시했던 견유학파 디오게네스(Diogenes)이다.   [주석] 디오게네스(Diogenes)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412~?B.C.323). 견유학파의 한 사람으로, 자족과 무치(無恥)가 행복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반문화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실천하였다. 키니코스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림 하단 오른편에 유클리드(Euclid)가 컴퍼스로 바닥에 놓인 칠판에다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뒤편에 천구의를 들고 있는 사람이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Zarathushtra), 그 앞으로 뒤통수만 보이는 사람은 천문학자프톨레마이오스(Claudios Ptolemaeos)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지구본이다. 그 옆으로는 흰 베레모를 쓴 화가인 소도마(Il Sodoma)가 있고, 그와 함께 검은 모자를 쓴 라파엘로(Raffaello)가 우리를 빠금히 쳐다보고 있다.   [주석] 유클리드(Euclid) :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B.C.330~B.C.275). 기하학의 원조로, 기하학 원론(幾何學原論)을 저술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의 체계를 세웠다. 조로아스터(Zarathushtra) : 기원전 6세기 무렵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으며, 근검(勤儉) 역행(力行)의 노력에 의하여 악신을 극복하고 선신이 승리한다는 믿음을 근간으로 하며, 선신의 상징인 해, 불, 별 따위를 숭배한다. 프톨레마이오스(Claudios Ptolemaeos) :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ㆍ지리학자(?~?). 2세기 중엽의 사람으로 천동설에 근거를 둔 수리 천문서 ≪알마게스트≫를 저술하였다. 소도마(Il Sodoma) : 이탈리아의 화가(1477~1549). 본명은 조반니 안토니오 바치(Giovanni Antonio Bazzi).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배웠으며, 인체의 관능미를 잘 표현하였다. 라파엘로(Raffaello) : 이탈리아 문예 부흥기의 화가ㆍ건축가(1483~1520). 아름답고 온화한 성모를 그리는 데에 재능이 특출하여, 미술사에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화로운 공간 표현ㆍ인체 표현 따위로 르네상스 고전 양식을 확립하였다. 작품에 시스티나의 성모, 아테네 학당 따위가 있다.   [그림 평]     르네상스시대 3대 예술가로 꼽는 '라파엘로'. 그의 대표작으로 이 있는데, 이 작품은 B. C. 5세기경부터 A. D. 3세기경사이 우리 귀에도 익숙한 유럽 고전의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등 총 54명을 대상으로 그린 상상화이다.     건물 밖으로는 광활한 하늘이 보이며 둥근 천장, 아폴로와 아테네의 상들을 안치한 벽감 등은 웅장한 분위기와 우아함을 지녔다.      바티칸 궁의 장식화뿐 아니라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라파엘로의 치밀한 계산 아래 그려진 상상화이지만 규모나 웅장한 느낌, 조화감 등은 초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무대 같은 투시도의 공간 속에, 인물들은 놀라운 조화를 이루었고 서로 시각적인 연결을 이루었다.      점 소실점에 의한 원근법을 따르고 있어, 등장인물이 많아도 산만하지 않고 집중된 느낌을 준다. 고전 건축의 균형감각과 질서, 선명성, 부분과 전체의 조화가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이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라파엘로는 많은 스케치를 준비하고 시행착오를 거쳤다. 암브로지아나 미술관에 보관된 최종 밑그림을 보면 그가 피렌체파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음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심리 묘사와 미켈란젤로의 육체 표현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방문] 1. 떼르미니[Termini]역에 가서 가이드해 줄 사람 찾아 신청 : 매일 아침 몇 (?)시[기억이 나질 않음]에 로마의 기차역인 떼르미니[Termini]역에 로마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으로 서너 명이 각자 하루 바티칸 궁 및 로마 시내 투어의 가이드를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소정의 사례금(?)을 받고 가이드를 해줍니다. 2. 복장과 소지품에 유의[짧은 치마, 반바지, 맨발에 슬리퍼 착용 등과 맥가이버 칼 등 소지는 입장불가] - 입장할 때 맡기거나 또는 사물함에 보관 할 수 있음. 바티칸 궁 입구와 출구가 다르고 거리상으로도 걸어서 15분정도[왕복 30분(?)]걸리는 거리임.           [전철표] 자동판매기, 타고, 내리고, 우리나라와 비슷함.         지도를 보면서 먼 거리만 전철을 이용하구 웬만한 거리[약 4 Km - 소요시간 1시간]는 걸으면서 유서 깊은 건물과 보도 블록 등을 구경하면서 골목을 이용한 트래킹이 추억에 남습니다. 이상. 출처 :중년 해우소  왜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아테네 학당을 그리게 했을까요? 당시 미켈란젤로도 로마의 교황청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1508년, 교황은 중요한 문서에 서명을 하는 ‘문서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라파엘로에게 이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그림 설명] 1: Zeno of Citium 2: Epicurus 3: Federico II of Mantua 4: 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or Anaximander or Empedocles 5: Averroes 6: Pythagoras 7: Alcibiades orAlexander the Great? 8: Antisthenes or Xenophon 9: Hypatia (Francesco Maria della Rovere) 10: Aeschines or Xenophon 11: Parmenides 12: Socrates 13: Heraclitus(Michelangelo) 14: Plato (Leonardo da Vinci) 15: Aristotle 16: Diogenes 17: Plotinus orMichelangelo 18: Euclid or Archimedes with students (Bramante) 19: Zoroaster 20: Ptolemy R: Apelles (Raphael) 21: Protogenes (Il Sodoma, Perugino, or Timoteo Viti)     학당에 54명의 인물들로 아테네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그리고 시민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습으로 표현된 플라톤은 옆구리에 '티마이오스(Timaeus)'라는 글씨가 쓰여진 책을 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중심 사상인 이데아에 대해 설명하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의 옆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저서인 '윤리학(Eticha)'을 허벅지에 받치고 플라톤의 이상론에 대응하여 지상을 가리키며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에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독배를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Socrates)가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구석에는 만물의 근원이 숫자라고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가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만물의 근본은 흙·공기·물·불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에피카르모, 아르키타스(Archytas of Tarentum) 등의 제자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정면에 보라색 옷을 입고 심각한 표정에 잠겨있는 사람은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입니다. 그는 “우리는 동일한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다.  왜냐하면 처음에 우리가 건너 간 강물은 두 번째 건널 때에는 이미 아래로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체의 근원은 유동과 변화(flux and change)이다.”라며 과정의 순간을 중요시 했던 인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앞에는 아주 편한 자세로 햇볕을 즐기는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Diogenes)가 보입니다.   그림의 오른쪽 구석에는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Euclid)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기하학을 학생들에게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오른편 앞 쪽 황금색 옷을 입고 천체구를 든 채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이며 점성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앞에 지구의를 들고 있는 흰색의 옷을 입은 사람은 기원전 6세기 배화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Zarathushtra)입니다.  이 두 이교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라파엘로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입니다.   라파엘로는 뿐만 아니라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모습을 동시대의 화가들을 모델로 그렸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습을 플라톤으로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헤라클리토스로 대신 했습니다. 또 당시 유명한 건축가였던 브라만테는 유클리드의 모델로 그려져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한 공간에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킨 상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공간에 철학가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면의 구성상 한 곳으로 초점이 모아지는 1점 소실점에 의한 원근법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조화와 통일감을 주고있고, 또 인물에 각각 생생한 성격을 투여하여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의 모습이 등장한 것처럼 안에는 세 대가의 화법과 기법이 모두 종합되어 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사실상 기독교와 반대되는 사상가들로 특히 조로아스터는 확실한 이교도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작품 안에 묘사된 것은 기독교의 일대 전환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배척보다는 화해를, 질시와 경계 보다는 포용을 하겠다는 교황의 혁명적인 전환의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라파엘로의 이 그림이 그려지고 수백 년 뒤에 가톨릭교회는 가장 진보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주제를 그림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전환의 길을 연 교황의 진보적 생각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젊은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 성공을 할 수 있었는가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소통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한 방법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린 이 한 장의 벽화를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 아테네 학당, 1510~11년, 프레스코, 밑면 폭770cm,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개인 거주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라파엘로(1483-1520)는 고대의 지적인 영웅들의 화합을 그렸는데, 이것이〈아테네 학당〉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원래 교회 재판소로 사용되었던 방(서명의 방)을 기독교와 세속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초상화로 채우려고 마음먹었다. 그중 맨 처음 완성되었던〈성체의 논쟁〉은 이 그림의 맞은편 벽에 위치하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현존하는 주요 프레스코 중에서도 가장 추앙받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에서처럼, 브라만테의 초기 성 베드로 성당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은 그림 속 건축 구조물이 시선을 끌며, 관람자가 아래에서 서명의 방 천장을 바라볼 때 여전히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저서『윤리학』을 무릎으로 받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와『티마이오스』를 들고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고 있는 머리가 벗겨진 플라톤이 이 작품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아래쪽에 앉아 있는 피타고라스는 입체도형을 그리고 있고 디오게네스는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   비관주의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활기 없이 대리석 의자 위에 글을 쓰고 있는데, 그의 모습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작업을 했던 미켈란젤로의 초상으로 추정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체 구(球)로 알 수 있으며, 유클리드는 다음 세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그림의 주제는 세속적이고(그리스) 영적인(기독교) 사상을 종합하고 찬양하는 것이며, 이 주제가 이 방 전체에 적용되었다.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점 - 참조       〈아테네 학당〉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의 개인 도서관 벽에 당시의 젊은 화가 라파엘로에게 제작을 명령한 그림이다.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을 모델로 한〈아테네 학당〉은 당대의 모든 화법을 습득하고 융합하여 르네상스식 회화를 완성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정신에 가장 걸맞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웅대한 규모와 빈틈없는 구도, 중앙에 위치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개성과 특징을 잘 잡아낸 표현력, 그리고 섬세한 색채의 사용을 통해 조화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치밀한 계산 아래 그려진 상상화이지만 규모나 웅장한 느낌, 조화감 등은 초인간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무대 같은 투시도의 공간 속에, 인물들은 조화를 이루었고 서로 시각적인 연결을 아우르고 있다.  라파엘로 - 아테네 학당 스케치,1508년,이탈리아 밀라노 암브로지아나 미술관 르네상스 시대부터 활용된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많은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산만하지 않고 집중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라파엘로는 수십 장의 스케치와 도안을 그렸다. 암브로지아나 미술관(Pinacoteca Ambrosiana)에 보관된 최종 밑그림을 보면 그가 피렌체파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심리 묘사와 미켈란젤로의 육체표현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서양 고대에서부터 르네상스 시기인 당대까지, 54명의 대석학들이 학문적 열정 을 표현한 인물들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모습과 특징들을 살펴보자.  우선 정 중앙에 철학의 두 거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들의 무리를 이끌며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1. 플라톤 이상주의자로 만물지식의 근원인 ‘이데아’를 이야기하듯,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고 있으며, 추상적 형이상학에 관한 그의 저작인『티마이오스(Timaeus)』를 세로로 들고 있다. 또한 한쪽 발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아리스토텔레스 현실주의의 시초로 알려져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평평하게 하여 땅으로 향하게 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인『윤리학(Eticha)』역시 수평으로 든 채 '무엇을 하든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한다.' 는 그의 사상을 몸짓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플라톤과 달리 그는 양쪽 발을 모두 바닥에 붙이고 있다.     좌 우, 붉은 색과 파란색의 망토 색깔, 그리고 망토를 입은 방향도 두 인물의 상반되는 철학적 성향을 나타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라파엘로의 의도는 54명의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서도 잘 관철되고 있는 듯하다.   플라톤이 서있는 왼쪽은 플라톤이 '이데아의 언어'로서 중시했던 수학과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이론과 맥락을 같이 하는 부류의 인물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치한 오른쪽에는 그의 현실주의적 시각과 성향에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이 대립하는 두 경향은 철학과 사상, 정치와 역사 속에서 갈등 관계를 유지해오며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그 외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3. 크세노크라테스 플라톤의 충실한 제자로, 철학을 최초로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 3부분으로 나눈 것으로 알려진 크세노크라테스가 하얀 망토를 입고 팔짱을 끼고 있다.     4. 소크라테스 들창코에 뚱뚱하고, 앞머리가 벗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소크라테스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주장들을 헤아리고 있는 모습이다.     5. 20대에 세상을 정복하고 헬레니즘 시대를 연 알렉산더 대왕이 파란 망토를 입고 있다.   6번부터 8번까지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로 스승의 주장에 심취되어 있는 듯하다.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7. 알키비아데스, 그 옆의 작은 사람이 6. 소크라테스의 열성적인 제자였던 크세노폰, 8 아이스키네스가 스승의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는 듯 오른손을 들어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9. 고르기아스 : 대표적인 소피스트로 뒤쪽에 얼굴만 살짝 나온 사람이다.   10. 제논 : 스토아학파의 창시자로 녹색 모자를 쓰고 있다.     11. 에피쿠로스 월계관을 쓰고 있는 에피쿠로스, 인생의 목표를 쾌락의 추구로 알려져 있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인데, 감각적이고 방탕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그는 소박하고 금욕적인 쾌락을 주장하였다.     14. 피타고라스 우주의 만물은 수학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약간 대머리의 모습으로 책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다.     피타고라스의 등 뒤에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베껴 적는 듯 한 사람은 13 아낙시만드로스, 그 뒤쪽에 검은 피부로 고개를 빼들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이슬람의 학자 12 아베로에즈, 15 아낙사고라스, 피타고라스에게 작은 칠판을 보여주고 있다.     16. 히파티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강의를 하였는데, 이단적 학문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기독교인들에게 납치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당하였다는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가 하얀 로브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여성 수학자로 인정받았고, 철학에도 능통하였으며, 뛰어난 미모와 훌륭한 강의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사실 라파엘로는 그녀를 숭배하여 그림의 중간쯤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하려고 했지만, 여자이면서 이단으로 죽었던 그녀를 싫어했던 가톨릭 주교의 반대로 다른 학자들 틈에 미소년의 모습으로 교묘하게 숨겨 넣었다고 한다.     17. 파르메니데스 존재론과 인식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서 히파티아의 오른쪽에서 상체를 비틀고 서 있다.     18. 헤라클레이토스   맨 앞쪽에서 대리석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에 대해 사색하고 있는 듯한 모습인데 그의 모델은 미켈란젤로로 알려져 있다.   “숨어있는 관련은 보이는 관련보다 더 강력하다.”, "같은 강을 두 번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영혼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인간의 성격은 인간의 운명이다.”라는 그의 통찰력 깊은 말은, 2000년이 더 지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응용, 발전시켰다고 한다.     19. 디오게네스 명예와 부를 천시했고, 알렉산더 대왕과의 일화로 유명한 디오게네스가 무소유를 상징하듯 반나체의 모습으로 계단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으며, 그의 위치와 자세가 그림의 구도에 질서와 안정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20.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며, 식물학의 창시자인 테오프라스토스 (노란색 망토)   21. 아리스티포스 : 키레네학파의 창시자 (뒤쪽을 보고 있는 인물)   23. 뒷모습을 보이며 지구의를 들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천구(天球)를 들고 있는 24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     25 유클리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흑판위에 컴파스를 돌리고 있는데 그의 모습은 당시의 건축가 브라만테를 모델로 하고 있다.     22.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동시대 예술가들을 모델로 고대 철학자의 얼굴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염이 덥수룩하게 덮인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이며,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얼굴, 유클리드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 브라만테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선배이자 경쟁자였던 그들에 대한 경의와 존경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얼굴을, 그리고 그림 오른쪽 구석에는 흰 모자를 쓴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페루지노와 검은 모자를 쓰고 순백의 옷을 입고 유일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과 눈을 맞추고 있는 사람은, 라파엘로 그 자신이다.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1483~1520)의 1510~11년작.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작의 하나로 라파엘로 작품.   율리우스 2세의 청으로 바티칸 궁에 있는 4개의 방에 그렸던 그림들 가운데 하나인 이 프레스코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모인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군상으로, 라파엘로는 그 군상 가운데 자신의 모습도 그려넣었으며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대의 예술가들을 모델로 삼아 그렸습니다.   각 철학자들의 특성을 암시해주는 재치있는 인물 표현 및 중심으로 집약되는 구도와 웅장한 배경묘사 등은 조화를 추구한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을 보여줍니다. 바티칸 궁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에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화가 라파엘로의 작품입니다. 여기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축으로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철학자 과학자들이 다 등장합니다.   중심에 두 인물이 있습니다. 손을 위로 한 사람은 플라톤입니다. 이상(idea)을 꿈꾸는 모습이고 옆에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디오게네스입니다.     왼쪽은 플라톤. 모델은 당시 화가들의 스승격인 다빈치 오른쪽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모델은 미켈란젤로라고 하는군요.      [WHO&WHAT] 미켈란젤로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서울신문 박건형기자 2011-05-31   “흉내쟁이에 촌뜨기 라파엘로” - 미켈란젤로   “라파엘로(1483~1520)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다.”(미켈란젤로의 회고문 중에서)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다. 라파엘로가 바티칸 교황 집무실 벽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 날 그려 넣었단다. 그것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같이 더럽게 못생긴 인물로 말이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아테네 학당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가죽장화나 옷이나 전부 지금 시대 복장인데 눈 가리고 아웅도 유분수지. 얼굴까지 똑같이 그려 놨으니 아예 대놓고 욕 먹이는 짓이 아닌가. 내가 얼마나 자기를 싫어하는 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옆에서 내가 시스티나 천장화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이런 일을 벌이다니. 무엇보다 기분 나쁜 건 벽화의 주인공인 플라톤으로 내 필생의 라이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그려 놓았다는 거다.   우르비노(이탈리아의 시골) 출신의 촌뜨기가 처음 볼 때부터 기본이 안 됐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예술가라면 무릇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파엘로 저놈은 어릴 때부터 나랑 다빈치 작품 중에서 좋은 것들을 골라 베끼는 데만 혈안이 돼 있더니 이젠 그걸 조금씩 바꿔서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건 그냥 모방이자 습작 화가지. 후세 사람들이 저놈 그림이랑 내 그림을 같은 높이에 걸어 놓으면 어떡하나 심히 걱정된다. 라파엘로는 분명히 자기 고향 선배이자 후견인인 브라만테(1444~1514·성베드로 성당 설계자)와 짜고 날 파멸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스티나 예배당 프로젝트만 해도 그렇다. 나보고는 20m나 되는 높이의 천장에 그림을 그려 넣으라고 하고, 라파엘로한테는 편하게 집무실 벽화를 맡기다니. 난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닌데도 말이다.   ●해설 괴팍하고 추남이었던 미켈란젤로는 잘생기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진 라파엘로를 평생의 원수로 생각했다. 특히 라파엘로와 브라만테가 서로 짜고 자신을 고난에 빠뜨린다고 믿었다. 자기보다 8세 어렸던 라파엘로가 37세에 요절한 후에도 각종 기록에서 증오심을 나타냈다.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 그는 항상 큰 항아리에서 생활하곤 했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하루는 항아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생님의 위대함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괜찮으시면 좋은 말씀 한마디 부탁합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 왈, “Please, stand out of the light(미안하지만 햇빛을 막지 마시오).” 그 이야기를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뭔가를 깨달으면서 궁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양반이야말로 그리스가 낳은 최대의 지성인”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가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 것은 ‘서양의 대왕’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접목시키려고 노력을 한 것도 큰 이유입니다. 그리고 지식인에 대한 대우도 극진했고 문화에 취미도 있고 관대했다고 할까요?      가장 앞에 네모난 탁자에 기대고 앉은 사람이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만물은 유전한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한 주인공입니다. 에페소스 왕가의 출신이지만 부친이 물려준 집도 아우에게 물려줄 정도로 세속에 관심이 없었고 고매한 지조를 가졌다고 합니다. 잘보면 알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인 미켈란젤로로 비슷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왼쪽에 책 같은 걸 펴 들고 약간 상체를 비틀고 있는 사람이 파르메니데스. “존재하는 것만이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긴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왼쪽에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인에 의해 살해돼 시체가 갈갈이 찢어진 채 버려진 여성입니다. 재능도 뛰어났지만 너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저서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하네요.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여성 수학자 히파티야에 관심이 많아 크게 그리고 싶었는데 돈을 주면서 그려달라고 했던 사람(patron)이 “히파티야를 너무 크게 그리면 돈을 적게 주겠다”고 해서 작게 그렸다고 합니다. 히파티아의 아래 쪽에 앉아 책에다 뭘 쓰고 있는 머리 벗겨진 사람이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에게 조그만 칠판을 보여주며 옆에서 이것도 풀어보라고 칠판을 내밀고 있는 포즈를 취한 사람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입니다. “내가 죽은 달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한 달 동안 어린이들이 부모 간섭 없이 맘대로 놀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고개를 빼들고 피타고라스를 넘겨다보는 얼굴색이 검은 사람이 이슬람의 철학자 아베로에즈. 단일지성론을 주장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피타고라스 등 뒤에서 웅크리고 메모하고 있는 사람이 아낙사만드로스. 태양에 의해 생기는 그림자를 이용해 시각을 표시하는 해시계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위쪽으로 머리에 월계관을 쓴 사람이 원자론으로 유명한 데모크리스토스.   그 왼쪽에 초록 모자를 쓴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 유명한 제논. 변증법의 창시자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로 유명합니다.            한 팔을 들고 누구를 부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열성적인 제자 아이스키네스. 스승의 재판과 임종에도 입회했으며 시신까지 수습할 정도로 소크라테스를 가까이서 모신 충실한 제자입니다.   투구를 쓰고 군인 같은 복장을 한 사람이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절친한 친구.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을 사귀면 질투가 나서 훼방을 놓아 헤어지게 만들었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동성애자라는 의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리스 시대는 학문과 사상이 자유로운 것처럼 동성애도 유행했다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부인이 있었는데도 “내가 사랑한 것은 알키비아데스와 철학뿐”이라고 이야기했답니다.     알키비아데스 오른쪽에 키 작은 검은 모자의 사람이 군인 출신으로 ‘향연’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크세노폰입니다.   크세노폰 오른쪽에 파란 옷을 입은 젊은 사람이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 이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알렉산더는 항상 동안(童顔)의 미소년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옆에서 대왕이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도 뭔가 열심히 설명하는 사람이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이에 있는 사람 가운데 팔짱을 끼고 흰 옷을 아래에 두른 사람이 크세노크라테스. 군인 출신으로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 제자가 됐고 3대 학원장을 지낼 정도로 학문에 열정을 가진 인물입니다.         아스토텔레스 오른쪽으로 우르르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노란 옷을 입은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 식물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뒤통수가 보이는 사람이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 그 오른쪽에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이 아리스티포스. 북아프리카 키레네 출신으로 소크라테스를 흠모해 아테네로 유학을 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키레네 학파’를 엽니다. “인생의 목적은 개개의 쾌락이다. 육체적 쾌락이 정신적 쾌락보다 우위에 있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아래로 내려와서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가운데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 칠판에 뭔가 설명하는 유명한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 그 뒤에 천구의를 든 사람이 조로아스터입니다. 조로아스터는 니체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라투스트라의 영어 이름입니다.   이 사람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창시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조로아스터는 역사상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이 많지만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뒷모습을 보이고 지구의를 든 사람이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입니다.  위 왼쪽 구석에 있는 사람들 중 상체를 벗고 있는 사람이 디아고라스. 그리스의 신들을 조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독교가 가장 좋아하고 인용을 많이 하는 철학자로 남습니다. 그 뒤에 숨어서 잘 안 보이는 사람이 고르기아스. 대표적인 소피스트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있어도 전할 수가 없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디아고라스 옆에 있는 사람은 크리티아스 라고 합니다. 모두 그리스 소피스트 학파 철학자 들이죠.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외당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저서 이름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소크라테스 처형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이 ‘아테네 학당’의 작품 주인공 라파엘로이고 흰 모자를 쓴 사람은 그의 친구인 화가 소도마입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도 그리스 시대의 석학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의 아름다운 집착입니다.   출처 : 그리스 석학들, 한 폭의 그림에 모여, ‘아테네 학당’ 사람들/ 출처 :금석회 /////////////////////////////////////////////////////////////////////////////////// 아테네 학당을 접하면서 가장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총 54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정확한 이름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거죠? 필자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던진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 동안 미술평론가나 미술 사학자들이 상당히 노력했던 분야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항상 논쟁의대상이 되고 있지만 풀리지 않은 채 ‘아마도 그 사람들일 거야’ 정도에 그칠 뿐입니다. 명확한 해답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누가 누구인지는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 그림을 그린 라파엘로만이 알 수 있는 거죠. 그러나 라파엘로 또한 살아 생전 어느 누구에게도 등장 인물들이 정확하게 누가 누구인지를 밝힌 바가 없습니다. 때로 그가 친구나 동료에게 던진 단편적인 파편들을 갖고 미루어 판단할 뿐이다. 인물들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파엘로가 죽은 지 100년 200년이 지나면서 아테네학당의 진가가 계속 오르기 시작합니다. 미술가나 미술비평가들은 아테네 학당의 인물들을 파악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리고는 상당부분 어느 정도 일치를 보았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소설가나 문학가는 자신이 쓴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설명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설명은 작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글이 하는 겁니다.  만약에 작가가 글을 설명하려 한다면 그 문학은 죽은 문학입니다. 문학에 작가의 설명이 따로 없듯이 미술도 그렇습니다. 문학과 예술 속에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비밀이 간직돼야 하는 겁니다. 비밀이 바로 문학과 예술의 생명이기 때문이죠..  그림 속의 인물들, 여전히 논쟁거리  만약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상세하게 이야기한다면 그 예술품 역시 죽은 거나 다름 없습니다. 작가가 글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이야기하듯이 화가 역시 그림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다빈치가 모나리자가 과연 누구이며 정확하게 누구를 모델로 그렸는지에 대해 모든 것을 밝혔다면 그 그림은 위대한 그림으로 남지 않았을 겁니다. 최후의 만찬에 대해 자신의 의도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했다면 최후의 만찬의 예술적 종교적 가치가 이미 묻혔을 겁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품인 석굴암도 그것을 조각한 김대성이가 모든 것을 설명해버렸다면 대단한 걸작품으로 남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또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여운을 남겨 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 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운이라는 공간, 때에 따라서는 우주를 품 속을 끌어 들일 정도로 넓습니다. 예술품 속에는 작가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그 혼을 문자라는 글과 말을 동원해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꽃은 그 고운 자태를 설명하려고 들지 않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예술품은 유한(有限)한 우리들에게 무한한 영원을 선사하고 있는 겁니다. 아테네 학당은 초상화가 아닙니다. 인물화도 아닙니다.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인물화가 결코 아니죠. 당시 예술뿐만 아니라 인문학에도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인 라파엘로가 그림을 통해 철학과 종교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죠. 철학을 그림 속으로 끌어 들여  그렇다면 철학자들을 그림으로 끌어 들이는 예술적 작업을 거쳐야만 합니다. 또 그림을 철학으로 끌어들이는 인문학적 작업 또한 필요합니다. 그 어려운 작업을 실천에 옮겨 불후의 명작을 남긴 사람이 바로 라파엘로입니다. 그림 속에서 표기한 것처럼 22명의 신원을 밝혔습니다. 학자들 간에 거의 일치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항상 변수가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37,8명에 대해 그 이름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의 대단한 여류 시인 사포라고 아실 겁니다.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유일한 여성은 히파티야라는 수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료에서는 중심 인물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뒤에 얼굴 모습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인물이 사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여신(女神) 사포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류시인 사포도 등장시켜  어쨌든 등장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며, 또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려고 합니다.  아마 유명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자료와 틀릴 수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 등장 인물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누가 누구인지에 얽힌 논쟁들도 풀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이야기하는 인물이 플라톤이라는 주장에 토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아테네 학당에서 걸어 나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플라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의 거지로 계단에 누워 있는 디오게네스가 바로 플라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만큼 등장인물들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세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아마 40명 정도는 이름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디오게네스가 플라톤이라고 주장한 학자도  소설은 허구, 픽션이라고 하죠. 미술가 역시 그림이라는 사실적 묘사를 하지만 여기에도 허구는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도 따지자면 허구죠. 그 허구를 통해 라파엘로라는 화가가 자신의 철학, 사상, 그리고 종교적 세계를 말하려고 한 겁니다. 그러한 의도가 픽션과 맞물려 예술적 혼이 나타나는 겁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 속에서 고대 철학자들의 독특한 학문을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표정, 동작 하나하나 섬세하게 그렸고 어떠한 성격의 소유자인지조차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림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거죠. 등장 인물들의 배치에서부터 색감, 그리고 배경 등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예술이 주는 신비. 그것은 확실성이라는 고전물리학에서 혁명적 발전을 이룩한 양자물리학의 불확실성, 불확정성(theory of uncertainty)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일정한 질량에서 일정한 에너지가 나옵니다. 또 일정한 시간에서 일정한 거리가 나옵니다.  인풋(input)에 따라 일정한 아웃풋(output)이 나오는 것이 뉴턴을 중심으로 한 고전물리학 이론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불확정성이론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인 양자물리학이론입니다. 우주시대를 열고, 제3의 물결인 IT과학도 바로 그 속에서 나온 것이죠. 철학과 예술을 융합시키다 요즘 과학의 융합, 통섭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서로 어울려야 과학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과학의 융합과 통섭이 아니라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을 아우르는 학문의 융합과 통섭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21세기의 과학으로 떠오르는 뇌 과학은 학문간에 융합이 없이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학문이죠. “왜 물질로 이루어진 뇌가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는가?”  그래서 어떤 학자는 “뇌는 사실을 규명하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의 대상”이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뇌 과학에서 세계 첨단을 달리는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의 뇌 과학연구소 소장인 아마리 준이치(甘利俊一) 박사가 필자에게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이제 학문간의 융합이 필요한 때입니다. 통합과 융합의 의미를 넘어 ‘원융(圓融)’의 시대가 왔습니다.  학문은 이제 원융(圓融)의 시대로  신라시대 유명한 스님으로 화엄종의 창시자인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 처음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법의 성품은 원융해서 두 모습이 아니다. 모든 법은 본래 변함없이 없고 고요하다”  짧은 지식을 동원해 보겠습니다. 법의 성질, 다시 말해서 자연과 우주의 성질과 이치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둥글고 모두 융합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비밀을 캐는 과학과 인간을 탐구하는 인문학 역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우주는 본래 그대로의 모습과 성질을 유지한 채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짧은 지식으로 그러한 자연과 우주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해 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서야 원융(圓融)을 시도하는 거죠.  법성게란 불교의 스님들이 자연과 우주, 그리고 만물의 이치에 대해 느끼고 깨달은 바를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한자에 관심이 있으면 한번 읽어보고 무슨 뜻인지 그 의미를 파악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속에는 과학에서 중요한 상상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철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이라는 모든 학문의 원융(圓融)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형근 편집위원
341    르네상스시대의 3대 천재 거장 예술가들 댓글:  조회:2738  추천:0  2017-02-18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으로, 근대 유럽문화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정신과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이뤄냈지만, 특히 예술 분야에서 이룬 그들의 성취는 다른 무엇보다도 탁월하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나 역동적인 조각품 등 아름다운 미술 작품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에서는 에서 다룬 르네상스 시대 세 명의 화가 이야기를 모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르네상스의 천재 화가들, '르네상스 3대 거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년~1497년, 벽화(회벽에 유채와 템페라), 460x880cm,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다재다능한 만능형 '르네상스인' 캐스트 원문보기 : 오늘의미술 - 르네상스와 르네상스인 천재는 재능과는 다른 말이다. 천재라는 말은 새로운 영역까지도 개척해야 얻을 수 있는 영광된 명칭이라면 다 빈치는 누구보다도 이 점에서 탁월했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물리학, 광학, 군사학 등 다방면의 자연과학 영역에서 굵직한 발전을 이끌어낸 초인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에 대한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집요한 관찰력으로 새 영역을 열어나갔고, 새로운 지식을 창작활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왕성한 호기심은 책임감을 크게 초과하였다. 그는 시작한 일을 대부분 끝내지 못한 채 다른 일로 넘어가곤 했다. 오늘날 일부 심리학자는 그를 주의력 결핍증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작품 [모나리자]의 경우도 배경과 인물의 세부 등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최후의 만찬' 등 밀라노 곳곳에 살아 있는 다 빈치의 흔적 캐스트 원문보기 : 지구촌산책 - 밀라노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 당시 밀라노에 입성해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을 그려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세나콜로]로 불리는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의 예언을 듣고 놀라는 12제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 [최후의 만찬]이 훼손이 심했던 것은 레오나르 다 빈치가 당시 유행했던 프레스코화 대신 다양한 용매를 이용하는 ‘템페라’ 기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 역시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는 큰 몫을 하게 된다. ... 밀라노에 들어서면 도심 곳곳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명품 도시’ 밀라노가 아끼는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과학기술 박물관에는 회화뿐 아니라 과학, 해부학, 지리학, 천문학 등에도 능했던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과학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그의 글과 그림 캐스트 원문보기 : 세계인물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는 미술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쪽지 종이에 이런 저런 글과 스케치를 남겼다. 낱장의 그 종이들은 큰 것도 있었고 5-7센티미터 정도로 작은 것들도 있었다. 그는 이 쪽지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글을 적어 넣었다. … 레오나르도가 쪽지 종이에 남긴 글과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가 쪽지 종이에 남긴 그림들 중에는 오늘날의 낙하산, 비행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습도계에 해당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한 자리에 서다 캐스트 원문보기 : 오늘의미술 - 다 빈치 VS 미켈란젤로 베네치아인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던 피렌체인들의 예술적 욕심 덕분에 결국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아마도 이 역사적 결투에서 레오나르도 쪽이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이 더 컸을 것이다. 1452년생 레오나르도는 당시 쉰을 넘긴 나이었고, 미켈란젤로는 1475년생으로 아직 20대였다. 이미 명성은 명성대로 얻은 관록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화가와 한 자리에서 기량을 겨뤄야 했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부담감이 아무래도 더 컸을 것이다. ... 그러나 양측 모두에게 부담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쉽게도 스타들의 대격전은 최종 순간을 남겨 놓고 취소되고 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더 보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중 '아담의 창조'] 1511년~1512년, 벽화(프레스코화), 바티칸 미술관 소장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치열한 삶을 산 위대한 천재 예술가 캐스트 원문보기 : 세계인물 - 미켈란젤로 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작업 앞에서 우리는 경탄하기도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과 같은 조작 작품들과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와 과 같은 그림을 보면 비록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 화보일지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화가가 되어 붓을 들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천장에다 그림을 그리고 불멸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올려다보면서, 이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시스티나예배당'을 둘러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이야기 캐스트 원문보기 : 오늘의미술 - 미켈란젤로 VS 라파엘로 “교황 율리오 2세와 나 미켈란젤로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불화는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질투 때문이었다.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들은 교황을 속여 무덤을 세우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시켰다. 라파엘로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왜냐하면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모든 것은 바로 나한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일흔 살을 내다 본 늙은 미켈란젤로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것이다. 라파엘로는 이미 20년 전에 죽었지만 미켈란젤로에게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여전히 고통스럽게 기억되고 있었다. 정말 라파엘로는 그의 고향 선배 브라만테와 함께 미켈란젤로를 파멸시키기 위해 교황 율리오 2세를 속였을까? 도대체 미켈란젤로는 무슨 근거로 라파엘로의 예술적 성과를 자신의 아류라고 주장하는 걸까? '피에타' 조각가로 살기 원했던 그가 남긴 최후의 작품 캐스트 원문보기 : 오늘의미술 - 론다니니의 피에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주도한 불세출의 조각가이자 화가,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에게 역시 ‘피에타’는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되는 일종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거의 일 세기에 달하는 생애를 통해 여러 점의 ‘피에타’를 제작했으며 그에게 최초로 로마에서의 세속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작품이나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삶을 마감하기 며칠 전까지도 정과 끌을 놓지 못하고 매달렸던 최후의 작품 역시 ‘피에타’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미켈란젤로는 어지러운 시대를 살며 감내해야만 했던 한 천재의 인간적인 고독과 회한 그리고 영광의 상념들을 이 주제를 빌어 호소하고자 했 던 것은 아닐까. 미켈란젤로의 작품 더 보기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Raffaello Santi, 1483~1520)    
340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수 없는 법... 댓글:  조회:1887  추천:0  2017-02-18
        이태리/Rome 판테온신전(Pantheon) No.1 판테온은 로마에서 가장 성스러운 공간 중의 하나로 ‘모든’을 뜻하는 ‘판(Pan)’과 ‘신’을 의미하는 ‘테온(Theon)’이 합쳐져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이란 말의 뜻이 있다. B.C. 27년에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B.C. 62년경~B.C. 12)가 마르스나 비너스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전면(全面) 10주(柱)의 에트루스크 식 신전(43.7x19.8m)이 기원. 80년에 낙뢰로 연소하여 120~125년경에 하드리아누스 제가 콘크리트 조의 원당(圓堂)으로 재건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제(재위 138~161)시대에 완성되었다.  16개의 단석(單石) 코린트식 대원주로 이루어진 전면 8주의 현관랑은 아그리파의 신전 부재(部材)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프리즈에는 아그리파의 명(銘)이 남겨져 있다. 원형 본당은 지름 43.3m의 구체(球體)를 싸는 형식의 단일광대(單一廣大)한 공간구성을 취했고, 따라서 마루에서 대원개(Dom)까지의 높이와 마루의 지름이 서로 같다. 당의 주위 벽에는 7개의 벽감(壁龕)과 8개의 아에디쿨라가 엇비슷하게 교차하며, 원개 중앙에는 지름 7.5m의 채광용 둥근창이 뚫려 있다.  7세기에 그리스도교 성당(통칭 산타 ∙ 마리아 ∙ 로톤다)으로 되었기 때문에 보존이 잘 되어 고대 로마 최대의 원개건축인 동시에 그 완전한 기하학적 내부공간, 구조, 재료, 비례의 점에서 그리스 신전의 완전한 안티테제의 입장에 서며, 로마 건축의 정수를 보이는 걸작이다. 내부에 라파엘 등의 묘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원당형식 건물의 대표작으로서 중시되었다. 원래 아그리파가 세운 판테온은 올림푸스의 신들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내부에는 마르스, 베누스를 포함한 수많은 신들의 상(像)이 벽을 감싸듯이 장식돼 있었다고 한다. 이후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며 판테온은 609년 이후 교회로 탈바꿈됐다. 지금 그곳에서 그리스 신상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라파엘로와 이탈리아 통일에 힘쓴 에마누엘레 2세 등의 묘가 자리해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을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판테온은 현재 카톨릭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ad Martyres)이다 ▲ 로톤다광장의 오벨리스크 로톤다 광장(Piazza della Rotonda)의 분수는 그레고리 13세 때 착공하였고, 클레멘스 11세 때 오벨리스크를 추가하여 완성했다. Filippo Barigioni가 1711년 이 곳에 설치했다고 한다.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는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 로톤다 광장(Piazza della Rotonda)의 분수     ▲ 로톤다 광장의 오벨리스크     ▲ 판테온 신전의 엔타블러처(Entablature)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Marcus Vipsanius Agrippa) 판테온 신전 정면의 기둥 위에 일자로 된 엔타블러처(Entablature)에 쓰인 글은 “M.AGRIPPA.L.F.COS.TERTIUM.FECIT”이다 -마르쿠스 아그리파 루시히 필러스 콘솔 테르티움 페시트(Marcus Agrippa Lucii Consul Tertium Fecit)이며 이 글을 영어로 번역하면 "Marcus Agrippa, son of Lucius, in his third consulate, made it."-마르크스 아그리파, 루시우스의 아들 세번 콘솔(집정관)을 역임하였고 이 신전을 건축하였다.   미술시간에 한번쯤 석고상에서 뎃생했던 ‘아그리파’이다. 카이사르 황제가 양자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강인한 체력의 아그리파를 어린 시절 친구로 붙여준 후 아그리파는 권력투쟁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군사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또한 공공건물과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행정관으로 그 임무를 빈틈없이 실행한다. 그의 많은 공적 중 하나가 바로 이 '판테온'이다.   ▲ 자비의 성모마리아 소성당(Chapel of the Madonna of the Clemency)의 중앙제대(High alter) ▲ 애프스(apse) 하나의 건물이나 방에 부속된 반원 또는 반원에 가까운 다각형 모양의 내부 공간. 후진(後陣)이라고도 한다. 로마의 바실리카에서는 신랑의 한쪽 또는 양쪽을 마무리짓는 반원형이나 다각형의 벽감에 해당한다    ▲▼ 오쿨루스(Oculus) 중앙에 구멍이 뻥 뚤린 둥근창은 오쿨루스(Oculus)라고하며 ‘눈’이라는 의미이다. 오쿨루스는 천정에 서 자연의 빛이 그대로 들어오도록 설계된 것이며 해시계의 역할도 한다 이 오쿨루스는 중심으로 28개줄의 리브(Riv)가 다섯칸의 열로 만들어져 있다.      ▲▼ 라파엘로의 묘(Tomba di Raffaello Sanzio) 세 번째 중앙 벽감(Central Niche)에는 안토니오 무노즈(Antonio Munoz)가 설계한 위대한 예술가인 라파엘로(Raphaelo)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데, 그의 대리석 석관에 있는 비문에 따르면 “뼈와 재들이” 남아있다. 그의 약혼녀인 마리아 비비에나는 라파엘로의 대리석 석관의 오른쪽에 묻혔는데,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 전에 죽었다. 석관은 교황 그레고리오 14세가 기증한 것으로, 이 비문에는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살아 있을 때 자신을 능가할까 봐 두려워했던 모든 것들의 어머니(자연)에 의해, 여기 라파엘로가 묻혀 있다. 라파엘로가 죽을지라도 그녀(자연)는 죽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피에트로 벰보가 새긴 것이다. 현재의 배치는 1811년 이후의 것으로, 안토니오 무노스가 설계한 것이다. ▲ 라파엘로의 무덤 위에 있는 그의 흉상(Raphael.bust.arp)-주세페 파브리스(Giusepe Fabris) ▲ ‘바위의 성모’조각상-로렌체토(Lorenzzo) 라파엘로의 무덤 위에는 ‘바위(암반)의 성모’라고 알려진 조각상이 있는데, 성모가 바위 위에 한쪽 발을 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각상은 로렌쪼(Lorenzzo)가 라파엘로가 의뢰를 받아들여 1524년에 만든 것이다.        
339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 화가 - 라파엘로 댓글:  조회:7735  추천:0  2017-02-18
  출생일 1483. 4. 6, 우르비노 공국 우르비노 사망일 1520. 4. 6,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어린 시절에는 페루지노의 작업실에서 광범위한 전문 지식을 익혔으며, 이후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구도와 명암법을 배워 자신만의 새로운 인물 유형을 창조해냈다. 에는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영향, 그리고 라파엘로 자신의 참신한 시각이 드러나 있다. 로마에서 보낸 12년 동안 라파엘로는 과 을 그렸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에는 르네상스 이후의 시대를 예견한 바로크적 표현이 드러나 있다. 목차 개요 우르비노에서 보낸 어린시절 페루자에서 페루지노에게 배운 도제 시절 피렌체 시절 로마에서 보낸 말년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흔히 라파엘로 불린다. 개요 그의 작품은 유연한 형태와 평이한 구도뿐 아니라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1508년부터 로마에서 바티칸 궁을 개조하는 대규모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계획에는 브라만테가 성베드로 대성당을 재건하고(1514년 브라만테가 죽은 뒤 이 작업은 라파엘로에 의해 완성되었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파엘로는 교황이 거처하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장식(1508~11)하는 일을 맡았는데, 여기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화인 〈성체에 관한 논쟁 Disputa〉·〈아테네 학당 School of Athens〉을 그렸다. 우르비노에서 보낸 어린시절 라파엘로는 조반니 산티와 마자 디 바티스타 치아를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1491년에 죽었다. 16세기의 화가이자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뛰어난 데라고는 전혀 없는 화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양있는 사람으로서 우르비노 궁정에 유행하는 진보적 미술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고, 1494년 죽기 전에 11세가 된 아들 라파엘로에게 궁정의 인문주의 철학을 소개했는데, 이를 통하여 라파엘로는 과거의 문화적 유산과 16세기를 내다보는 새로운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우르비노는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7개월 전에 죽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이 다스리는 동안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양있는 군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을 구현한 페데리코 공은 모든 예술을 크게 장려했고, 도나토 브라만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비롯하여 뛰어난 인물들을 아름답게 재건한 자신의 대저택으로 초빙했다. 페루자와 피렌체의 다른 주요미술가들도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우르비노는 라파엘로가 이후에 배우게 될 모든 지식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이 젊은 미술가의 놀라운 조숙함 또한 이 도시의 문화적 생동감 덕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라파엘로는 겨우 17세였던 16세기초에 이미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페루자에서 페루지노에게 배운 도제 시절 조반니 산티가 아들을 데리고 페루자로 가서 움브리아 화파의 위대한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 밑에 도제로 보냈다는 바사리의 말은 수긍할 수 없다.라파엘로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겨우 11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페루자로 간 날짜를 너무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그 연대를 1495년으로 못박고 있는데, 확실한 것은 라파엘로가 1500년 5월 13일에는 이미 우르비노를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증인이 서명 날인한 증서가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1500년 12월 10일에 작성된 또다른 서류에는 당시 '대가'라고 불리는 이 젊은 화가가 아버지의 제자와 함께 1502년 9월 13일까지 제단화를 완성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라파엘로는 이때 이미 페루지노 밑에서 도제살이를 시작했고, 자신의 재능을 당장 입증했기 때문에 1501~03년에는 꽤 중요한 주문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 주문은 페루자의 산프란체스코 교회에 있는 오디 예배당에 〈성모의 대관식 Coronation of the Virgin〉을 그려달라는 것으로, 이 그림은 1797년 나폴레옹 군대가 훔쳐갔다가 1815년에 바티칸에 반환했다. 페루지노는 1498~1500년에 페루자의 콜레조 델 캄비오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덕분에 페루지노 작업실에서 일하던 라파엘로는 광범위한 전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실제적 가르침뿐 아니라 차분하고 정교한 페루지노의 화풍도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1481~82년에 페루지노가 로마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Giving of the Keys to St. Peter〉는 라파엘로의 첫번째 주요 작품인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 The Marriage of the Virgin〉(1504)에 영감을 주었다. 페루지노의 영향은 원근법 강조, 인물과 건축물 사이의 점층적 관계, 서정적으로 감미롭게 묘사된 인물 등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초기 그림에서도 이미 라파엘로의 감성은 스승의 감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건축물과 관련된 인물의 배치는 페루지노보다 덜 엄격하며,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각 인물의 배치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활기에 차 있다. 라파엘로가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을 그린 직후에 완성한 3점의 소품 〈기사의 꿈 Vision of a Knight〉·〈3가지 은총 Three Graces〉·〈성 미카엘 St. Michael〉은 젊은 참신함만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양식을 이루는 요소들을 다루는 능력이 완전히 무르익은 것을 보여주는 서술적 그림의 빼어난 본보기들이다. 페루지노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1504년말이 되자 라파엘로는 모범으로 삼을 다른 모델을 찾아야겠다고 느꼈고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페루자 밖으로 관심을 돌렸다. 피렌체 시절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자 화가인 베르나르디노 핀투리키오를 따라 시에나로 갔다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하고 있는 작업(그들은 시뇨리아 궁을 장식하기 위해 각기 앙기아리 전투와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끌려 그곳으로 갔다고 막연하게 전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1504년 가을까지는 피렌체에 도착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피렌체 방문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작품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피렌체의 예술과 처음으로 실질적인 접촉을 갖게 된 것은 1504년경이다. 피렌체 문화는 그가 이미 갖고 있던 모든 개념을 더욱 강화시켜준 동시에 좀더 넓고 새로운 지평을 그에게 열어주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수동적인 흡수가 아니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문화의 기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보편화된 이상주의를 지지한 피렌체 화가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만이 아니라, 고딕 양식으로부터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신기원을 이룩한 자연주의의 선구자인 '마사초의 옛 작품'도 연구했다고 조르조 바사리는 기록하고 있다. 라파엘로가 남긴 스케치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조각가인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및 판화가인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작품까지 거슬러 올라가 연구한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인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었다. 그래도 역시 피렌체에서 라파엘로의 주요한 스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였다. 라파엘로가 1505~07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 특히 〈오색방울새의 마돈나 The Madonna of the Goldfinch〉·〈프라토의 마돈나 Madonna del Prato〉·〈에스테헤의 마돈나 The Esterházy Madonna〉·〈아름다운 정원사 La Belle Jardinière〉 같은 마돈나 연작에는 1480년부터 회화 분야에 커다란 혁신을 이룩하고 있었던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 그림들은 다 빈치의 구도·인물배치·몸짓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15세기 작품에서는 보기 드물게 편안하고 단순한 배경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라파엘로는 또한 다 빈치의 명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 빈치의 명암대조법(chiaroscuro : 자연광이나 고정된 광원으로 인해 생긴 밝음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을 알맞게 이용했고, 특히 다 빈치의 스푸마토(sfumato : 선 대신 극도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영을 이용하여 형태나 이목구비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스푸마토). 그러나 라파엘로는 다 빈치를 능가하는 새로운 인물 유형을 창조했는데, 그가 창조한 둥글고 온화한 얼굴은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숭고한 완전함과 평온함의 경지로 승화되어 있다. 1504~08년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계속 거주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향인 우르비노에 갔었으며 당연히 페루자에도 들렀다. 1507년 그에게 오늘날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position〉를 그려달라고 주문한 사람은 페루자의 한 귀족 여인이었다. 이 그림에는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만, 이 두 화가의 음울한 강렬함과 열정은 라파엘로 자신의 참신하고 차분한 시각으로 변형되어 있다. 로마에서 보낸 말년 라파엘로는 1508년말경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브라만테가 같은 고향 사람들을 교황청으로 데려오고 싶어서 교황에게 제의한 덕분이었다. 이무렵 라파엘로는 로마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젊은 화가는 로마에 오자마자 변덕스러운 율리우스와 교황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대가로서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는 로마에 동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로마 귀족들의 정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화가 중의 왕자'라고 불릴 만큼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인문주의자 첼리오 칼카니니는 나중에 라틴어로 쓴 경구에서 라파엘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로마를 건설하는 데에는 고대의 수많은 영웅과 오랜 세월이 필요했고, 로마를 파괴하는 데에는 수많은 적과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라파엘로는 로마 안에서 로마를 되찾았고 그것을 발견했다. 찾아내는 데에는 위대한 이가 필요하지만 발견은 신이 주관하신다." 이 경구는 라파엘로의 품행이 로마 전체의 존경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로마 귀족들은 그를 그들 자신과 동등한 인물로 여겼고, 비비에나 추기경은 1514년 자기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율리우스 2세의 후계자이자 위대한 메디치 로렌초의 교양있는 아들인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추기경으로 임명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짧은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이는 열에 들뜬 듯한 정력적인 활동으로 잇따라 걸작을 낳은 시기였다. 그는 어떤 시련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모든 일을 겸손과 신중으로 대했지만 매번 새로운 높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항상 성공을 거두었다. 바티칸 궁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장식하는 일은 1508년말에 시작하여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완성했는데, 율리우스 교황의 이념과 교양을 반영하고 역사 속의 로마 교회를 찬양하는 이 일은 아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는 그에게 이 일을 주문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거처하고 집무하기로 되어 있던 바티칸 교황청의 수많은 방들 가운데 하나였다. 율리우스 2세는 매우 교양있는 사람이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주위에 불러모았다. 그는 4세기에 지은 원래의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일을 브라만테에게 맡겼고,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을 만들 것을 의뢰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원하지 않았으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하게 했다. 또한 라파엘로의 천재성을 꿰뚫어보고, 궁정의 인문주의자들과 토론한 철학적 주제를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일을 라파엘로의 손에 맡겼다. 이 주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통해 로마 교회의 권력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프레스코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성체에 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이다. 과거와 현재의 로마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있고 그 위로 천상에 성부와 성자가 예언자 및 사도들과 함께 있는 거룩한 광경을 그린 〈성체에 관한 논쟁〉은 그 도상을 통하여 교회의 승리와 진리의 승리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와 현재의 철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속세의 지식 또는 철학을 복잡하게 그려낸 알레고리이며, 플라톤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의 거처를 장식하는 작업은 1513년에 율리우스가 죽고 후계자 레오 10세가 즉위한 뒤인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중요하고 큰 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라파엘로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제자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다른 야심작들을 한꺼번에 시작했다. 그가 이무렵에 진행한 일들은 다른 건물들을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그림으로 장식하는 일, 초상화, 제단화(여기에 그린 그의 온화한 성자들과 성모는 새로운 종교적 유형을 낳게 했음),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접시 도안, 무대의 배경그림 등 지극히 다양했다(내러티브). 그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작업을 하는 동안, 산엘리조델리오레피치 교회를 설계했는데 이것이 건축과 관련한 그의 첫번째 작업이었다. 1513년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산타마리아델포폴로교회에 자신의 장례식용 예배당을 설계하고 장식해달라고 라파엘로에게 부탁했다. 라파엘로는 키지의 저택인 빌라 파르네시나를 이미 장식한 적이 있었다. 1514년 레오 10세는 브라만테와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사람으로 라파엘로를 선정했고, 그해 말에 브라만테가 죽자 이 작업을 감독하게 된 라파엘로는 교회 설계를 방사상의 그리스 양식에서 길쭉한 라틴 양식으로 바꾸었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의 로지아(loggia : 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들을 장식하는 일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도 라파엘로가 이어받았다. 이 서정적 장식에 나타난 감미로운 단순성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웅장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에는 철학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문주의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라는 평판이 로마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가 로마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수많은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벰보 추기경, 풍자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 비비에나 등을 비롯한 문필가들도 여럿 있었다. 1519년에는 이탈리아의 서사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쓴 희극 〈바뀌어진 아이들 I suppositi〉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다. 라파엘로는 유능한 학자였고 특히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1515년 8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귀중한 라틴어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상을 보존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명했다. 라파엘로는 2년 뒤에 로마의 유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고고학 지도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의 라파엘로는 오랜 과거의 것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 유물 보존계획을 감독하는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설계도를 창조하고 있었다. 로마의 빌라 마다마는 1516년 이후에 착공되었는데, 이 건물에 대한 그의 설계도는 이후 이탈리아 건축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는 새로운 건축학적 개념의 본보기였다. 건축만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는 미래를 예견했다. 마지막 작품인 〈예수의 변모 Transfiguration〉(1517 의뢰)에서 그는 혼란스럽고 불안한 새로운 세계를 예견한 듯한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그림의 구도는 이미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기울어져 있다. 라파엘로는 37번째 맞는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비로운 후광이 그를 둘러쌌고, 교황청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 미사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거행되었고 마지막 작품인 〈예수의 변모〉가 그의 관 앞에 세워졌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다. [Daum백과] 라파엘로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출생일 1483년 사망일 1520년   흔히 ‘르네상스 3대 거장’ 하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라파엘로를 꼽는다. 어떤 사람들은 다빈치를 빼고 티치아노를 집어넣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각각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티치아노를 지리적으로 배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신비로운 직관의 예술을 창조했고, 티치아노가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현란한 아름다움을 구사했다면, 라파엘로는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차분한 그림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움브리아의 우르비노 지방에서 태어났다. 화가였던 그의 부친이 ‘이탈리아의 등불’로 불렸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치하에서 활동한 이래 라파엘로는 페데리코의 아들 구이도발도의 궁정에서 일했다. 몬테펠트로 가문은 장차 율리우스 2세로 등극할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와 사돈이 되기 때문에,1)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우르비노와 로마에서 당대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라파엘로가 피렌체의 미술 시장에서는 의외로 참패를 당한다.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의 대명사였던 라파엘로는 천재 예술가들이 우글거리는 피렌체에서 대가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피렌체 출신 화가들이 외부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길드를 결성하여 외지인의 작품 제작이나 판매에 제한을 두는 텃세를 부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르비노와 피렌체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원인일 수도 있다. 신플라톤주의가 지배하던 피렌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미학에 기초한 라파엘로에게 이념적 차별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역사를 살펴보는 관점에서는 무슨 이유 때문에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는지, 또 피렌체에 체류하는 동안 제작한 작품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 부부의 초상화〉 금은세공사로 출발했던 라파엘로의 부친 조반니 산티는 페데리코 가문을 위해서 일하던 궁중 예술가였다. 페데리코 공작 부부의 초상화(우피치 미술관 소장)를 그렸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작품을 제작할 당시 조반니 산티의 집에서 기거했다. 1483년에 태어난 라파엘로는 부친의 화실에서 미술에 입문했을 것이다. 티모테오 비티라는 무명의 화가에게서 도제 생활을 잠시 했지만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움브리아 화단을 지배하던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4)였다. 베로키오의 화실 출신으로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어깨를 겨누던 탁월한 화가였다. 라파엘로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우르비노의 은행 길드의 주문을 받고 피렌체에서 이주해온 페루지노를 처음 만나게 된다. 스승을 아예 무시했던 미켈란젤로와 달리 라파엘로는 착하고 충실한 페루지노의 제자였다. 단박에 스승을 능가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언제나 스승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볼로냐 국립 박물관에 스승 페루지노와 제자 라파엘로가 그린 비슷한 주제의 그림이 한 장소에 비교 전시되어 있는데, 페루지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기분 나쁠 정도로 제자의 그림이 스승의 실력을 능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파엘로는 페루자와 아시시에서 몇몇 작품 주문을 받고 활동하다가 우르비노로 돌아왔다. 1504년의 일인데, 이때 갑자기 라파엘로는 피렌체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본인이 스스로 원한 것인지, 아니면 티모테오 비티나 페루지노가 추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시민 폭동이 일어나 피렌체에서 망명한 후 우르비노까지 흘러들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조언 때문일 수도 있다.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떠나기 직전에 완성한 〈성모의 결혼식〉은 제자가 스승 페루지노의 예술 세계를 얼마나 능숙하게 넘어섰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움브리아의 소도시 시타 디 카스텔로에 있는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교회의 알비치 예배당에 그려진 이 작품은 현재 밀라노의 브레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로 유학 길에 오르는 궁중 신하를 추천해주려고 구이도발도 공작의 누이이자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딸인 ‘로마 총독 부인’과 그의 남편이 함께 펜을 들었다. 이 로마 총독 부인의 남편은 장차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될 인물의 친동생 조반니 델라 로베레였다. 이 편지를 지닌 사람은 우르비노의 화가 라파엘로입니다. 그는 자기 직분에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며, 연구를 위해 피렌체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했습니다. 탁월한 분이신 그의 부친은 제 친구였고, 그 아들은 훌륭하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기도 해서, 저는 이 아이를 매우 아끼고, 완벽한 화가가 되기를 바란답니다. 저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각하께 추천합니다. 바라건대 저에 대한 사랑으로, 어떤 상황에서나 도움과 보호를 베푸시길 간청합니다. - 조반니 델라 로베레와 로마 총독 부인, 우르비노에서 1504년 10월 1일 씀 피렌체에서 명성을 날렸던 페루지노의 제자이자, 우르비노와 로마 실력자들의 추천서를 지닌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큰 성공을 기대했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예술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에서 대가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거의 참패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그가 머물렀던 1504년부터 1508년까지의 피렌체는 그야말로 천재들의 각축장이었고, 미켈란젤로의 표현대로 우르비노에서 온 촌사람 라파엘로는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베키오 궁의 대회의실 양쪽 벽을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경쟁으로 장안의 화제가 넘쳐날 때였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전통에 완전히 압도된 듯하다. 무명의 젊은 화가였던 라파엘로로서는 감히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불꽃 튀는 경쟁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 대신 라파엘로가 마사초의 브랑카치 채플에서 르네상스 예술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었다고 조르조 바사리는 전한다. 라파엘로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함께 위대한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이라고 칭송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피렌체에서 마사초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파엘로의 데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등의 작품도 연구하고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에 체류하는 동안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 중에서 아직까지 피렌체에 남아 있는 작품은 우피치 미술관의 〈방울새의 성모〉와 〈도니 부부의 초상화〉, 그리고 피티 궁전 박물관의 〈대공의 성모〉 등이다. 1508년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한 이후 그림 중에서 피렌체의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은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그리고 〈의자의 성모〉 등이 있다. 2008년 10월, 피렌체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피렌체 신문들은 “지난 10년 동안 집을 떠나 있던 피렌체의 딸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라는 언론 보도로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바로 라파엘로의 명작 〈방울새의 성모〉가 10년 동안의 오랜 복원 작업을 거쳐 마침내 1505년 원작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원래 라파엘로가 피렌체의 직물상이던 로렌초 나시(Lorenzo Nasi)의 결혼 기념 선물로 제작한 것이다. 자애로운 모습의 성모가 ‘지혜의 의자’에 앉아 있고 어린 세례요한이 예수에게 검은 방울새를 건네주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아기 예수가 쓰다듬고 있는 것은 검은 방울새이지만, 사실 그 새는 장차 받게 될 수난을 상징한다. ‘검은 방울새(cardellino)’의 발음이 ‘엉겅퀴’를 뜻하는 이탈리아어(cardo)와 유사하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쓰게 될 가시면류관을 상징한다.2) 최근에 완전히 복원되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방울새의 성모〉 라파엘로의 〈방울새의 성모〉는 16세기부터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이다. 1547년, 로렌초 나시의 집이 무너지면서 작품이 17조각으로 부서졌다. 이 부서진 작품을 구입한 메디치 가문은 리돌포 기를란다요(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아들)에게 복원을 지시한다. 작품의 원작자인 라파엘로가 서른일곱 살 젊은 나이로 로마에서 이미 임종한(1520) 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돌포 기를란다요는 17조각으로 부서진 작품을 붙이는 과정에서 무리한 복원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작품의 원래 색채는 16세기 이후부터 몇 번이나 진행되었던 서툰 복원 작업 때문에 더욱 훼손되고 말았다.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우피치 미술관은 10년 동안 과학적인 장비와 라파엘로가 동시대에 그린 다른 작품을 비교하여 거의 완벽에 가깝게 원작을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방울새의 성모〉가 우피치 미술관을 빛내주는 라파엘로의 명작이라면 피티 궁전 박물관에는 〈대공의 성모〉가 있다. 이 작품을 소장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는 워낙 이 성모자상을 좋아해서 어딜 가나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대공의 성모〉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그린 수많은 성모자상 중에서 가장 먼저 그려졌고, 가장 기본적인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또 가장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검은 배경을 뒤에 두고 자애로운 성모는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깔고 있고, 성모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는 관람객을 응시하는 예리함으로 화면을 압도한다. 15세기 피렌체 거장들에게서 르네상스의 영감을 배웠던 라파엘로는 도나텔로의 마돈나 조각과 루카 델라 로비아의 테라코타 조각상의 기본적인 구도를 활용했다. 〈의자의 성모〉, 피티 궁전 박물관 소장 피티 궁전 박물관을 대표하는 라파엘로의 작품은 〈의자의 성모〉다. 1514~1515년 사이에 로마에서 그려진 이 작품은 톤도(원형) 양식에 그려진 것으로, 좁은 공간 안에 배치된 성모, 아기 예수, 그리고 세례요한의 모습이 지극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이루는 명작이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체류할 동안 그린 작품 중에서 피티 궁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걸작이 있다. 바로 〈도니 부부의 초상화〉다. 부부를 따로 그렸으니 두 점이 되는 셈이다. 〈아뇰로 도니의 초상화〉, 피티궁전 박물관 소장 아뇰로 도니(Angelo Doni)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으로 미켈란젤로에게 〈도니 톤도〉를 주문하여 르네상스 미술사에 그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도니는 장사꾼답게 작품을 마친 미켈란젤로에게 가격 흥정을 다시 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격 고약하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는 가격을 깎자고 흥정을 시도하는 도니에게 오히려 원래 계약금의 두 배를 지불하지 않으면 작품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결국 도니는 미켈란젤로가 요구했던 금액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도니 톤도〉는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달레나 스토로치의 초상화〉, 피티궁전 박물관 소장 어쨌든 도니는 르네상스의 거장인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신예 작가인 라파엘로에게도 작품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아예 부부가 모델로 나섰다. 라파엘로는 분명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서 초상화 기법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주인공인 모델이 작품의 전면으로 앞당겨지고 배경으로 멀리 자연 풍경이 묘사된 구도는 이미 다빈치가 〈모나리자〉 등에서 선보인 구도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다빈치 초상화가 항상 강조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사실주의적이며 단도직입적인 인물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도니 부부의 모습에서 냉정한 사업가였던 남편 도니와 다소곳한 자세로 피렌체 사모님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귀부인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티칸의 서명실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성만찬에 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체류하는 동안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메디치 가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소개해야 할 유명한 초상화가 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이 처음 배출한 교황과 그의 친척인 추기경들을 그린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이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활동하던 1517년 크리스마스 전후에 제작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교황 레오 10세는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였다.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추기경은 루이지 데 로시(Luigi de’ Rossi, 왼쪽에서 관람객을 응시하는 인물)와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다. 이 작품이 제작되었던 1517년에 추기경에 임명된 로시는 레오 10세의 형이었던 피에로(1416~1469)의 외손자였으며, 교황의 비서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작품의 오른쪽에 등장하는 줄리오 추기경은 장차 교황으로 등극하여 클레멘스 7세로 활동하게 될 인물이다. 로마에서 그려진 이 작품을 피렌체로 옮긴 것도 클레멘스 7세의 결정이었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르네상스를 후원하는 메디치 가문 교황의 모습뿐만 아니라 교황의 성직을 잘 수행하려는 종교적 열망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Renaissance Quarterly, vol. 56, no. 4 (Winter, 2003), pp. 1005~1052.">3)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교황의 왼손이 위치해 있는 《성경》의 구절에 있다. 《성경》의 이 부분은 〈누가복음〉이 끝나고 〈요한복음〉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4대 복음서는 〈요한복음〉이 마지막에 위치해 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를 종결하는 책으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강조하고 있다. 교황 레오 10세의 본명은 조반니, 즉 요한이었다. 비록 그의 이름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성 요한이 아니라 예수의 운명을 예언했던 성 세례요한이었지만, 그래도 라파엘로는 이 《성경》의 오브제를 사용해서 메디치 교황의 종교적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성경》으로 보이는 책 위에 놓여 있는 돋보기는 작품의 주인공인 레오 10세가 독서에 몰두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라파엘로는 새로 교황으로 취임한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향한다. 율리우스 2세의 동생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딸이었기 때문에 우르비노 공작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정착한 라파엘로는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교황청의 여러 건물의 프레스코화를 맡겼다. 그리고 그는 바티칸 내부의 서명실(署名室)에 그린 〈성만찬에 대한 논쟁〉, 〈아테네 학당〉, 〈보르고의 화재〉 등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로마에 남아 있는 가장 유명한 라파엘로의 작품은 〈변화산상에서의 그리스도〉일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천재로 불리던 라파엘로는 서른일곱 살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임종했고, 그의 시신은 로마 도심의 판테온에 묻혔다.         [Daum백과] 라파엘로 –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김상근, 21세기북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라파엘로 산치오 〈교황 율리오 2세〉 1511-1512, 포플러에 유채, 108.7×81cm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림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는 화가’라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성모자상〉은 너무도 부드럽고 우아해서 완벽한 그림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싶다. 실제로 르네상스 이후부터 인상파가 등장할 때까지 300년 이상 유럽의 미술 아카데미들은 라파엘로를 교본 삼아 그림을 가르쳤다. 오죽하면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라파엘로를 벗어나자’는 취지의 ‘라파엘 전파’가 태동했을까. 그림뿐 아니라 인물도 훤칠하고 잘생긴 데다 예의 바르고 싹싹했던 라파엘로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50명 이상의 도제를 거느린 대형 공방을 운영하며 율리오 2세, 레오 10세 등 교황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 한 장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너무나 많이 걸렸고, 미켈란젤로는 워낙 독선적인 성격인 데다 회화보다 조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교황들이 초상화나 성화, 바티칸의 벽화 등을 청탁하기에 적격인 인물은 늘 라파엘로였다. 라파엘로는 율리오 2세의 뒤를 이은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화도 그렸다. 레오 10세 역시 그를 몹시 아껴서 심지어 추기경 직을 선물하려 했지만, 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의 한창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라파엘로가 불과 스물아홉 살에 그린 이 초상화를 본 당대인들은 초상화가 너무나 실물과 똑같다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라파엘로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이 그림을 가리켜 “‘실제 교황을 나무판에 그대로 박아 놓은 것 같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라고 기록했다. 초상화 속의 율리오 2세는 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 수염의 길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511년 교황은 교황령의 주요 도시인 볼로냐를 빼앗겼고, 그에 대한 통분의 표시로 수염을 길렀다. 그러다가 1512년 3월 긴 수염을 잘랐는데, 이 초상화에는 수염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 이 그림은 적어도 1512년 3월 이전에 완성된 것이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위대한 작품인 이유는 동시대인들이 보고 깜짝 놀랐다는 점, 즉 ‘실물과 똑같다’는 데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만 해도 왕이나 교황 같은 통치자들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훨씬 ‘젊고 위대하고 아름답게’ 그려졌다. 말하자면 고대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처럼 그리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왕이나 왕비를 잘생기고 아름답게 그리는 데 대해서 “이거 실물이랑 좀 다른데요?” 하면서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대담하게도 율리오 2세를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앙다문 입과 늘어져 실룩거리는 볼 등 초상화 속의 그는 분명히 완고해 보이는 고집쟁이 늙은이다. 실제로 율리오 2세는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황답지 않게 난폭한 성격의 독재자였다. 전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를 쫓아낼 계획을 세우다가 10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한 경력도 있었고 뇌물을 써서 교황이 되었다는 뒷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교황이라기보다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율리오 2세가 이 초상화를 보고 화를 내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율리오 2세는 독재자인 동시에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등을 등용한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리고 라파엘로에게 〈아테네 학당〉을 그리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도 율리오 2세다.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와 친했던 이유가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똑같아서’였다니 그의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 베네치아 화파들이 즐겨 사용하던 선명한 원색들에 매료된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몇 가지의 선명한 보색만을 사용했다. 즉, 교황이 입고 있는 붉은색과 흰색의 옷, 진한 녹색의 배경, 그리고 금빛 의자가 그것이다. 원래 라파엘로는 벽에 정교한 금색 무늬를 그려 넣을 생각이었고 실제로 반쯤 무늬를 그렸으나 도중에 생각을 바꾸어 벽을 모두 녹색 커튼으로 칠해 버렸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에 무늬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제된 색채를 사용한 덕분에 초상화는 강렬하면서도 현대적인 인상을 풍긴다. 라파엘로는 이 초상화 속에 율리오 2세의 독특한 성격, 강하고 다혈질인 성격을 은밀하게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림 속의 교황은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의 양손을 보면 갖가지 총천연색의 보석 반지가 여섯 개나 끼워져 있다. 또 그는 교황이 앉은 의자의 기둥을 도토리로 그리는 재치를 발휘하기도 했다. 율리오 2세의 원래 성(姓)인 ‘로베레(Rovere)’는 이탈리아어로 참나무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화가는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를 의자 기둥으로 만들어 “교황님이 원래는 로베레 추기경이었어요” 하고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또 교황이 입은 옷자락의 세밀한 주름, 모자와 의자 등의 묘사는 라파엘로가 동시대의 플랑드르 화파 화가들이 구사한 정교하고 사실적인 테크닉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간소하지만 강렬한 느낌의 이 초상화는 후대 화가들이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등은 라파엘로의 영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   미술사학자 차니, 미술범죄 모아 범죄소설 연상시키는 스토리텔링 명성·복수·자존심 등 배경 파헤쳐  미켈란젤로도 처음엔 천재위조꾼… 진실과 거짓의 미적 관점 제시도   위작의 기술 노아 차니 지음ㅣ오숙은 옮김 학고재 | 352쪽ㅣ2만2000원 미국 작가 도나 타트의 2014년 퓰리처상 수상작 '황금방울새'를 읽다 보면, 이 작가 최고의 재능이 소설에 있는지 아니면 고미술 보존과 복원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국 출신 미술사학자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노아 차니(38) 교수의 '위작의 기술'은 반대 경우다. 예술가인지 사기꾼인지 모를 위조 전문가들의 모험 혹은 추락을 읽다 보면, 이 책이 참고문헌과 각주 넘쳐나는 진지한 미술서인지 아니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범죄스릴러인지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기법을 차용한 미술 범죄 사례집으로 분류해도 좋을 이 책에서 우선 벨기에의 반 데르 베켄(1872~1964)을 호명해 보자. 브뤼헤 미술관이 2004년 그를 주제로 '가짜인가 아닌가' 전시회를 열었을 만큼 인정받은 복원전문가. 특히 얀 반 에이크(1390~1441) 등 15세기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이 '전공'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만든 작품은 '헨트 제단화'. 1432년에 완성된 이 초대형 유화는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말의 눈에 반사된 햇빛부터 학문적 분류가 가능할 만큼 섬세하게 묘사한 식물까지, 현미경의 세밀함을 과시하는 열두 폭 대작이다. 그 명성 덕일까, 탓일까. 600여 년 동안 13번이나 부분적 도난과 회수를 반복했고, 1934년에도 열두 폭 중 하나인 '정의의 재판관' 패널이 사라졌다.   라파엘로의 ‘유니콘을 안은 여인’(1506).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이 그렸던 원작에는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파엘로 사후 누군가 여인 품에 애완견을 그려 넣었고, 더 나중에 누군가 또 뿔을 덧붙였다는 사실을 현대 과학이 밝혀냈다. 유니콘은 처녀에게만 접근을 허락한다는 전설이 있다. 은유와 상징 없는 여인의 초상은 아무리 라파엘로 그림이라도 범작의 하나일 뿐. 그림값 추락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학고재 그 와중에 베켄은 사라진 패널을 복제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무렵 사라진 걸작의 소재를 안다고 고백한 증권 중개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죽은 자와 베켄의 인연에 대한 증언이 스멀스멀 등장한다. 거듭되는 반전. 이번 차례는 베켄이 복원한 '정의의 재판관'에서 수백 년 된 균열과 고색(古色)이 발견되었다는 후배 전문가들의 감정이었다. 자신이 훔치고, 죄책감에 못 이겨 복원을 선언했던 것일까. 주장은 갈렸고, 베켄은 고백 없이 죽었고, 진위는 다시 미궁으로. 대신 복제화일지 진작(眞作)일지 모를 패널 뒤에서 뒤늦게 발견된 시 한 편이 상상의 불길에 기름을 얹는다. '사랑 때문이었네/ 그리고 의무감에서/ 그리고 복수를 위해/ 교활한 붓질은 사라지지 않았네'(반 데르 베켄, 1945년 10월). 현대인은 보통 위조 사건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니 교수는 돈이 첫 번째 목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했다. 베켄의 시에 '복수를 위해'라는 구절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자신을 업신여긴 미술계에 복수하고 명성과 찬사를 쌓는 것이야말로 위조꾼이 위조에 첫발을 담그는 이유라는 것. 그렇다면 천재성과 범죄성을 가르는 기준이야말로 얼마나 모호한가. 이때 차니가 호출한 인물이 미켈란젤로(1475~1564)다. 이 위대한 천재예술가의 첫 이력은 위조꾼이었다는 것. 스물한 살 때인 1496년에 제작한 대리석 조각상을, 3세기 무렵 헬레니즘 청동 조각상 '잠자는 에로스'로 사칭했다는 것. 일찌감치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 세상에 '복수'했던 것일까. 하지만 아이러니는 이제 시작이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컬렉터 리아리오 추기경이 '잠자는 에로스'를 중개상에게 반납한 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피에타'로 당당히 스타가 된다. 추기경은 이 '천재 위조꾼'에게 두 작품을 더 주문함으로써 머리 숙였다고 한다.   폴 고갱의 라일락(1885). 오른쪽은 작자 미상의 ‘라일락’ 모작. /학고재 오해 마시라. '위작의 기술'이 위조에 대한 옹호는 아니다. 미술사 전체를 오염시키는 위작과 위조꾼에 대한 비판이 이 책의 전제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절도나 약탈 혹은 폭력 같은 중범죄와 달리, 미술품 위조는 기껏해야 부유한 개인과 기관 같은 얼굴 없는 개인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것 아닐까. 명성, 돈, 복수, 권력, 천재성, 자존심 등이 불규칙하게 빚어내는 욕망의 아이러니. 수집가의 허영과 빈약한 감식안의 격차가 만들어낸 부조리랄까. 이 책에는 '자존심' 항목이 있다. 그 사례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폴 게티 미술관이 등장한다. 이 부자 미술관이 무려 1200만달러(약 140억원)를 주고 1985년에 사들인 쿠로스(청년 등신상·等身像). 기원전 530년 그리스에서 만든 걸작으로 알고 샀지만, 기껏해야 100년 안쪽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속속 제출되고 있다. 하지만 게티는 확증은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천경자·이우환 화백 작품의 진위 논란을 지켜보며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면, 소심하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도 좋지 않을까. 평생 위조와 날조에 관심을 가졌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1932~2016)는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그 역도 성립한다. 거짓을 모른다면 진실 역시 알 수 없는 법. 수면 위는 범죄소설을 읽듯 흥미진진한 독서 체험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진실과 거짓에 대한 당신의 사유(思惟)를 확장할 수 있는 철학적 체험이기도 하다.   /ⓒ 조선일보 어수웅 기자 ============================     라파엘로의 방은 네 개의 방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방 하나하나가 모두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이로스쿠리의 방이라고 부르는 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과 엘리오도르의 방 사이에 공간인데 원래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라파엘로의 방은 원래 네 개인데 이 방까지 포함해 다섯 개로 착각한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은 그림이 취해 네 개인지 다섯 개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이곳에 있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두 지웠는데 다행히 천장화는 남았다 하네요.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의 방에서 라파엘로는 죽을 때까지 그의 역량을 마음껏 뽐내었던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짧은 딱 37년간만 살았던 라파엘로의 삶은 신이 필요해 천상의 세상에서 긴요하게 사용하려고 빨리 데려갔을까요? 정말 미소년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라파엘로가 아닌가요?     만약, 신이 라파엘로의 능력을 하늘나라에서 요긴하게 사용하려고 일찍 데려갔다면, 그럼 89세까지 살았던 미켈란젤로는 하늘나라에서 전혀 도움도 되지 않고 필요 없는 예술가였을까요? 미켈란젤로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무덤 속에서도 기겁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을 겁니다. 위의 사진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한 미켈란젤로의 초상화입니다. 워낙 지독한 노인네라고 귀신도 무서워 감히 가까이 접급하지 못했나요?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빼어난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더불어 3대 거장이라 하더군요. 그러나 당대에 조각, 건축 등 다방면에 활동했던 두 사람과는 달리 라파엘로는 오직 회화 분야에만 두각을 나타냈다지요. 특히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여러 가지에 비교 대상이었다 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작품활동을 많이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아주 잘 생긴 얼짱에 집안 좋고 사교성도 좋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미켈란젤로는 89살까지 오래 살았고 성격 또한 그늘져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외모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네요.   게다가 교황이 월급을 제 날자에 주지 않는다고 그리던 그림을 팽개치고 피렌체로 돌아가기도 했고 시에나 두오모와 계약하고 만들던 조각이 완성되기도 전에 피렌체에서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자 중도에 슬그머니 사라져 다비드상을 만들기도 했지요.     위의 사진 중 오른쪽은 미켈란젤로가 만들다 만 빈자리로 아직도 그가 돌아와 완성해주기를 바라며 남겨놓았습니다. 바로 다비드상을 만들기로 몰래 계약하며 위의 조각상을 만드는 도중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네요. 돈 없이 초연하게 살아갈 수는 없지만, 너무 이재에 밝아 계약조차도 쉽게 접어버린다면 그리 좋은 인성은 아니지 싶습니다.     서명의 방은 율리우스의 개인 서재이자 사무실이었다는데 나중에 이 방의 용도가 서명의 방이라 불렀다는데 교황은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한 고전과 인문주의를 중요시해 인간지식의 4대 영역인 신학, 철학, 예술, 법학을 주제로 한 벽화를 프레스코화로 그려줄 것을 요청함으로 사면 벽에 각각 네 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지게 되었다네요.     네 군데 프레스코화는 신학(성체논의), 철학(아테네 학당), 법학(기본적 신학적인 덕목 그리고 법) 예술(파르나수스)이라네요. 서명의 방은 교황들이 서류에 결재하며 서명하던 방으로 라파엘로에게 제일 먼저 천장화를 그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곳 프레스코화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합니다.     오늘까지 라파엘로의 네 개의 방을 모두 보았습니다. 사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냥 보는 것은 바라보았지만,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종교적인 그림이 많이 종교가 없는 佳人에는 그 나라 말도 모르고 식당 메뉴판만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방들에는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와 피엘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의 그림도 있답니다. 이 방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교황에 선출된 후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거처를 장식할 새로운 벽화를 그릴 화가를 당시 산 피에트로 성당의 총감독이었던 브라만테에게 부탁했고 그는 같은 고향의 새카만 후배로 당시 25살의 젊은 화가 라파엘로를 소개함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미덥지 못해 반신반의했지만, 제일 먼저 서명의 방에 그린 그림을 보고 나머지 방도 모두 새로 그려달라고 했다네요. 이렇게 차례로 엘리오도르 방을 그렸고 마침 브라만테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산 피에트로 성당의 총감독까지 맡았답니다. 어찌 보면, 라파엘로를 세상의 유명인을 만든 것은 고향 선배 브라만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싶습니다.     바쁜 가운데 보르고 화재의 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트누스의 방을 그리던 중 완성하지 못하고 37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림은 중단되었으나 그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 등이 마무리했다고 하네요. 그러니 제일 먼저 만나는 콘스탄티누스의 방이 바로 마지막 유작이며 미완성의 그림을 제자들이 마무리했다는 방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혹시 바티칸 박물관을 가려고 계획하시는 분이 계시면 미리 공부는 필수라는 느낌이 듭니다. 종교인이야 그림을 보고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무신론자는 의미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예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겠지만, 佳人처럼 무지한 사람은 미리 예습이라도 해야 좋지 싶네요. 그러나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에 우리 같은 사람도 다녀왔습니다.     [Daum백과] 라파엘로 산치오 〈교황 율리오 2세〉 – 런던 미술관 산책, 전원경, 시공아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38    일그러져가는 인간과 또한 망가져가는 세상을 그리다... 댓글:  조회:6189  추천:0  2017-02-15
♧프란시스 베이컨ᆞFrancis Bacon  1909 ~1992 영국 화가  인간의 고독, 잔혹, 공포를 주제 삼아서 주로 인간의 신체나 인물화로 나타낸  표현주의 화가  “나는 푸줏간에 갈 때마다 짐승 대신에 내가 거기에 걸려 있지 않음을 알고는 늘 놀라곤 한다”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  부친ᆞ말 조련사 20대 초반부터 그림을 그렸으나 30대 중반까지는 인테리어 장식 ᆞ가구ᆞ양탄자 등의 디자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본격적인  화가 활동은 을 그리면서다. 대게 단색 배경에 추상적이고 기괴한 인물형상을 그렸으며 이 때 인물들은  고립된 경우가 많으며 격렬한 색채로 묘사되었다. 1940~ 60 년대 초 까지 이런 두상과 형상이 묘사된 작품을 그려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인간의 조건과 암울함을 묘사하는 화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마드리드를 방문하던 중 평생 지병이던 천식이 폐렴으로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사춘기의 화가는 – (역사적 추측에 따르면 )화가의 동성애 적 기질을 문제 삼았던 – 부모와의 갈등과 충돌 끝에 1925 16살 나던 해 고향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떠났다. 이듬해 베이컨은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매료를 느껴 베를린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일 바우하우스 (Bauhaus) 전통의 가구 디자인과 장식 미술을 배워와 런던에서 잠시나 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아티스트ᆞ 러스킨 스피어( 1911 ~90)    1984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가지 연구'ᆞ1969    프랜시스 베이컨   ※미술품 경매  최고액   2013ᆞ11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240만달러 (1528억원)에 낙찰돼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 베이컨과 프로이트와는 친밀한 사이였으나 ,프로이트는 베이컨을 존경한 반면 프란시스 베이컨은 프로이트를 깔보 았다고 한다 ♡Three Studies For Portrait of Lucian Freud      Francis Bacon 1964   *더블린  휴 레인 갤러리 (Hugh Lane Gallery) ㅡ 런던에 있던 그의 리스 뮤스 스튜디오 (Reece Mews Studio)의  작업실을  예전 모습 그대로 재현,  전시하고  있다 ♡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  1934 년경  ᆞ 종이에 파스텔 Marlborough International Fine Arts  Estate of Francis Bacon    이보다 약 15년전 1928년에 피카소가 그렸던 『탈의실 문을 열고 있는 여인 (Bather opening a Beach Hut) (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의 영향을 받아서 베이컨식으로 해석한 초기작이다. ⏫ ⏫ *탈의실 문을 열고 있는 여인ᆞ피카소  (Bather opening a Beach).1928   ♡Painting, 1946       Francis Bacon   ㅡㅡㅡㅡㅡㅡ☆ ♡Study for criuching Nude.1952 ♡풀밭 위의 두 형상ᆞ1954   Two Figures in the Grass ♡고기가 있는 형상 1954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십자가 책형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했으며  십자가의 예수도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와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  "나는 언제나 도살장과 동물의 살덩어리 그림에 매료되곤 했다…아! 죽음의 냄새…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목박힌다 함은 전혀 다른  '종교적'의미 를 띠고 있음을 알지만 무신론자에게 도살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1962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2   육신 살덩어리 그리고 죽음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베이컨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어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위해 운반되었고, 전시가 끝나자 마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구입해 가져 간   화재의 그림이다. ⬆도살된 숫소 (Slaughtered Oxᆞ1925     차임 수틴 ᆞChaim Soutine   파리 작업실에서 그린 그림과 창작 동기를 함께 하고 있지만, 베이컨은 사진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고 수틴은 도살장에 직접 가서 관찰한 것을 그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ᆞ1941   1944 ᆞ런던의 화랑에 전시되자 관람자들은 경악했다   *Crucifixion 1965   “인류 역사의 잔혹한 본성”  예수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해 존엄성을  상실당한 현대인의 존재적 위치 형상화했다 Francis Bacon은  여러 점의 ‘십자가 책형’을 그렸고 그 중 1962년에 발표한 ‘십자가 책형 습작’이란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로 표현하였다. 왼쪽 패널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고, 화면 아래에서 해부당한 뼈 골격 형상이 밀폐된 공간 안으로 서서히 침투되어 들어오고 있다.  ⬆치마부에  ᆞ십자가 책형ᆞCrucifix, 1268-71     도미네코 교회, 아레초 치마부에(Cenni di Cimabue, 1272~130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공개적인  동성애자  뮤즈 ㅡ조지 다이어 ᆞGeorge Dyer  자신의 집에 침입한 도둑ᆞ1964  ㅡ1971ᆞ자살함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     프랜시스 베이컨ᆞ1966   ㅡㅡㅡㅡㅡㅡ☆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을 따른 연구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초대작가로 12 작품  출품   벤 니콜슨 (Ben Nicholson)과 루시안 프로이트 (Lucian Freud)와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화가로서 인정을 받음 *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 1650  ㅡDiego Velázquez(디에고 벨라스케스) ⬇ ⬇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Study after Velàs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 ㅡ 커다란 반향과 스캔들을 불러 일으킴ㅡ  17세기  인물 교황은  복싱 링을 연상시키는 노랑색 우리에 갖힌채 얼굴 가득이 보라색 히스테리에 질려 절규하고 있다.  기독교 교권이 패권을 잃은 후 종교적 방향을 상실하여 세속화된 근대 사회라는 새 철창 안에 갇힌 20세기 근대인의 자화상이다. 마치 뭉크의 『절규 (Scream)』 처럼 20세기의 공포의식, 고독, 인류의 절박감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베이컨을 설명한 바 있다. ㅡㅡㅡㅡㅡ노란색 세로줄의 강박 ⬆티치아노 (Titian)ㅡ필립포 아르킨토 추기경 초상 (Portrait of Cardinal Filippo Archintoᆞ1551-62)   티치아노가 그린 아르킨토 추기경 얼굴을 가리막이로 반쯤 가려놓고 묘사한 데에서 따 온 것임을 미뤄볼 수 있다.  ※아르킨토 추기경은 르네상스 시대에 밀라노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권좌에서 실추된 바 있는 비운의 인물. 교황이라는 막강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의 인물조차 平地風波의 운명 앞에서는 가녀린 한 인간에 불가함을 말해 주려는 듯하다.   ♡Francis Bacon's Study after Pope Innocent X by Velazquez  1951     ♡1953   ㅡㅡㅡㅡ☆ Francis BaconᆞSelf-Portrait                   Portrait                  1956년 생애 최초로 자화상 그리기를 시작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The Street Painter of Tarasconᆞ(반  고흐  1888년 작)를 발견하고 자화상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고, 고흐의 자화상은  제2차 대전중에 독일에서 소실된  작품 이어서 인쇄판 이나마 베이컨에게는 자화상 제작에 촉매제가 되어 준 작품 이 되어 주었다.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1957년 작)은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영감받아 그린 총6편의 자화상 연작들 가운데 마지막 6번째 작품이다.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 ) 1957년  London, Arts Council Collection and Hayward Gallery  Francis Bacon VBK, Wien, 2003   ㅡㅡㅡㅡ초상화 – 불멸을 향한 몸부림 그러던 1971년 봄,  조지 다이어가 베이컨이 머물던 파리의 한 같은 호텔방에서 자살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봄 사진가 존 디킨이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베이컨은 전에 없이 자화상을 주력해서 그렸다. 사진가 역할을 해 주던 존 디킨이 사라진  70년대 이후로 주변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 럼 죽어 사라져 간  이유라고  설명한다. 베이컨은 거리의 즉석 사진자동 판매기에서 여권 사진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 자화상으로 옮겼다.  ♡자화상, 1971      Francis Bacon   ㅡㅡㅡ1973 ᆞ초상화 3부작   ♡Posthumous Portrait of George DyerᆞFrancis Bacon   ♡ Self-Portraitᆞ1973   ♡ Portrait of Lucien Freudᆞ1973     ♡미셸 레리의 초상 (Portrait of Michel Leiris)      1976 프랑스인 지성인 소설가 미셸 레리를 모델로 해 그려진 초상화로서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한  얼굴 모양을 일부러 비대칭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위대함과 무의미함 사이의 간격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1977     Two studys  for Self-Portrait ♡1978 ♡1985~86 ㅡㅡㅡㅡ ♡Two figures in a roomᆞ1975     Francis Bacon   인간을 최하위에  놓고 본질 숙고 ♡ Figura escribiendo reflejada en un espejo.       7Óleo sobre tela. 1976 ♡앵그르의 외디푸스와 스핑크스에 바침ᆞ 1983년      ㅡㅡㅡㅡㅡㅡㅡ삼면화ᆞTriptych ♡마이클 레이티스의 초상1961   ♡조지 다이어를 위한 3 가지 습작ᆞ1969   ♡ May  Juneᆞ1973 [출처] 프란시스 베이컨ᆞFrancis Bacon|작성자 danggan  
337    화가, 그림그리기, 거울, 그리고 고가그림 댓글:  조회:2902  추천:1  2017-02-15
  제작시기 1976년 가격 $44,882,500(470억 9000만 원)1)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프랜시스 베이컨, 〈거울에 비친 글 쓰는 형상〉, 캔버스에 유화 / 198×147cm “사랑과 집착은 같다. 그것은 아마 사람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어쩌면 예전의 어떤 그림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삼부작〉(1976)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연 제일 유명한 갤러리 전시인 1977년 파리 클로드 보나르 갤러리 개인전 도록의 표지에 실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 〈거울에 비친 글 쓰는 형상〉은 그 전시의 포스터에 등장한 그림이었다. 어떤 전시의 도록 표지나 포스터에 홍보용으로 실린 그림은 특히 가치가 있다. 작가나 전시 기획자가 내세우고 싶은 작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더비는 이 그림이 출품됐을 때 경매 도록에 그 포스터 사진은 물론 전시장에서 베이컨이 이 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도 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생존 작가의 작품을 살 때 그 작가와 작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을 때는 유치해 보여도 나중에 작품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좋은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과 〈삼부작〉처럼 이 그림도 베이컨의 애인 조지 다이어를 그의 사후에 그린 것이다. 1971년 파리에서 첫 회고전이 열렸을 때 베이컨은 조지 다이어와 함께 파리에 왔는데 회고전 오프닝 이틀 전 홀로 호텔에 머물고 있던 조지 다이어가 자살을 했다. 그 후 약 6년 동안 베이컨은 괴로움과 죄책감을 담아 무거운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근육질의 남자 나체 뒷모습이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 조지 다이어를 그린 것이다. 〈삼부작〉에서 해변에 있는 남자처럼 이 그림에서 등 돌린 남자 역시 조지 다이어일 수도 있고 베이컨 자신일 수도 있다. 1970년대에 베이컨은 조지 다이어를 모델로 한 작품도 많이 그렸지만, 자화상도 많이 그렸다. 그리고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화가는 누구를 그리든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이 그림이 베이컨이 그렸다는 증거 중 하나는 거울이다. 요술 거울이라고 해야 할까? 이 거울에 비친 인물 형상은 거울 밖에 있는 남자와 대칭이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이나 유령이 거울 속에 있는 것처럼 그렸다. 거울의 테두리는 의자와 뚜렷한 경계선 없이 맞물려 있어서 공간이 정확하게 분할되지도 않았다. 이 거울은 단순히 앞에 있는 남자를 비추는 물건이 아니라, 현실과 다른 또 다른 세계를 암시하는 공간이다. 죽은 뒤 세계일 수도 있고, 산 사람의 내면일 수도 있다. 해변의 남자를 그린 〈삼부작〉에서는 검은 직사각형이 이런 거울 역할을 했다. 베이컨은 문학에 심취한 화가였고, 그를 문학적인 화가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의 그림에는 시처럼 암시적이고 모호한 면들이 있다. 이 그림은 게다가 소재 자체가 글 쓰는 사람이지 않은가. 문학을 좋아하는 베이컨의 특징이 많이 들어간 그림이다. [Daum백과] 거울에 비친 글 쓰는 형상 –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이규현, 알프레드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출생일 1909년 10월 28일 사망일 1992년 04월 28일 국적 영국 대표작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도를 그리기 위한 세 개의 습작〉,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 〈회화 1946〉 등 영국계 아일랜드 화가. 특유의 추상적인 화풍으로 인간의 불안과 속박, 두려움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프랜시스 베이컨은 영국계 아일랜드 화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람자를 ‘가장 당황시키는’ 작가로 여겨진다. 그는 일그러지고 변형된 육체와 단순한 색채로 인간의 불안과 속박, 두려움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내 그림들은 인간 본성이 그림을 통해 관통되듯, 인간의 현존과 지나간 사건들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남기듯, 달팽이 한 마리가 점액을 남기며 지나가는 듯 보였으면 한다.” 베이컨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그림에는 그 어떤 서사나 의미도 담겨 있지 않으며, 그것으로서 관람자들을 교화시키려 들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드러내는 것은 서사도, 전쟁이나 인간 본성이 지닌 악에 대한 비판도, 그로 인한 괴로움도 아닌 다만 ‘실존의 비극’으로 인한 고통일 뿐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1909년 10월 28일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육군성에서 일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에 이사를 자주다녔고, 천식을 앓아 건강하지 못했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까지 겹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6세 때 아버지에게 동성애적 성향을 들켜 집에서 쫓겨난 후 런던으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방탕하게 살았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삼촌이 살고 있는 베를린으로 보냈으나 그곳에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다 파리로 떠났다. 그는 작품만큼이나 강렬한 삶을 산 것으로도 유명한데 화가로서의 엄청난 성공과 함께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등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파리에서 실내 장식가, 가구 디자이너 겸 제작자 등으로 일하던 그는 피카소의 전시회를 보고 충격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20세 때 런던으로 돌아와 가구 제작을 하면서 회화 기법을 배웠으며, 짬짬이 그림을 그렸다. 베이컨은 개인전을 열고 잡지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는 등 화가로서 성공을 꿈꾸었으나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회의를 품고 종종 작품들을 파기하기도 했다. 베이컨이 화단에 공식적으로 진출한 작품은 1944년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도를 그리기 위한 세 개의 습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전 10여 년간 작업한 작품들을 대부분 없애고 10여 점의 작품만 남겨 놓았으니, 이 작품이 화가로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캔버스 3개로 구성된 3부작으로, 알 수 없는 시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폭력을 당하는 인간의 일그러진 육체를 표현하고 있다. 일견 외계인처럼 보일 만큼 끔찍한 형체들과 강렬한 오렌지색은 관람자를 한눈에 사로잡고 큰 충격에 빠뜨린다. 이때부터 베이컨은 공포와 비명, 분노, 타락 등의 악몽 같은 이미지들을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했다. 이 무렵에는 애인인 에릭 홀의 사진을 이용한 〈풍경 속의 인물〉 등도 제작했고, 전쟁과 무솔리니를 주제로 한 〈회화 1946〉을 그렸다. 그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는 화상, 미술 애호가들이 점차 늘어났기 시작했다. 〈회화 1946〉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팔려 나가자 예기치 못한 수익과 화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도취감에 빠진 베이컨은 도박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에 베이컨은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 반 고흐, 피카소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차용하여 작업했다. 또한 사진이나 영화 등에서도 영감을 받곤 했다. 1946년부터 베이컨은 두상 연작을 제작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두상 Ⅳ〉는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서 소재를 얻은 그림으로, 후일 유럽인을 충격에 빠뜨려 명성을 드높일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의 서두가 되는 그림이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는 195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1962년 유럽 미술관 순회 전시에서 공개되며 수많은 분란을 야기한 그림이다. 일그러지고 기이하게 녹아내린 그림 속 교황의 모습은 두려움과 불안, 압박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렇게 변형된 교황의 모습은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고 분노를 일으켰다. 베이컨은 이를 비롯해 195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한 교황의 그림들에서 속박당한 인간의 고통, 권위와 영원, 도덕에 대한 반항을 표현했다. 교황은 종교적 규범에 속박되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끔찍한 절규를 토해 내는데, 그 규범은 옥좌와 자주색 교황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베이컨은 인물 초상도 많이 그렸으며, 자신과 친구들의 얼굴을 비롯해 마약 중독자, 동성애자 등 소외된 이들도 그렸다. 그는 애인이었던 에릭 홀, 피터 레이시, 조지 다이어 등을 비롯해 미술 수집가이자 친구인 세인스버리 부부 등의 초상을 많이 그렸다. 1954년, 베이컨은 〈푸른 옷을 입은 남자〉 연작 7점을 제작했고, 그해 27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에 작품을 출품했다. 이듬해 런던 컨템퍼러리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첫 회고전이 열렸고, 1957년 파리, 1958년 토리노, 밀라노, 로마 등 이탈리아 주요 도시에서 그의 회고전이 잇달아 열렸다. 그해 피츠버그의 카네기 인스티튜트는 베이컨을 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선정했다. 1952년, 피터 레이시를 만난 이후 그는 에릭 홀과 피터 레이시 사이에서 파국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피터 레이시를 따라 모로코 탕헤르에 아파트를 얻고 런던과 그곳을 오가며 방랑했다. 그가 방랑을 멈춘 것은 1959년 에릭 홀이 죽고 이듬해인 1960년 사우스켄싱턴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피터 레이시는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나, 두 사람은 격렬하게 대립하고 폭력을 구사하는 등 악몽 같은 애정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피터 레이시가 1962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면서 끝이 났다. 이듬해 베이컨은 자신의 아파트에 침입한 젊은 청년 조지 다이어를 붙잡았다. 베이컨은 도둑질과 소년원, 감옥 등을 오가던 다이어에게 매료되었고, 다이어는 베이컨의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끌렸다. 베이컨은 다이어를 인생의 동반자로 여겼으며, 위태로운 정신을 지닌 다이어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받았고, 그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야기하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 〈자전거를 탄 조지 다이어〉, 〈조지 다이어 머리에 관한 습작〉 등이 그와의 관계에서 탄생했다. 이 무렵 베이컨의 경력은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작가’라고 불릴 만큼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베이컨의 성공은 다이어를 절망에 빠트렸고, 결국 다이어는 베이컨의 관심을 끌고자 수없이 자살을 기도하고 사고를 치다가 결국 약물을 마시고 자살하기에 이른다. 다이어가 죽은 후 베이컨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조지 다이어를 기리며〉라는 3부작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다. 조지 다이어의 모습은 이후에도 〈3부작, 1972년〉, 〈3부작, 1973년 5월∼6월〉, 〈3부작, 1972년 8월〉 등에 등장한다. 1960년대에 베이컨은 〈피하 주사기를 꽂고 있는 누드〉, 〈방 안의 세 인물〉, 〈침대 위 인물의 습작〉, 〈남자의 등 습작 3편〉 등을 제작했다. 이때 베이컨은 ‘모든 감상적인 맥락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심리적, 신체적 객관성을 강조하는 데 몰두했다. 인물을 화가나 관람자의 시선보다 높거나 낮은 곳에 배치했으며, 공간 표현과 색채가 간결해지는 등 베이컨만의 고유한 구상화 기법은 이 무렵 완성되었다. 또한 1960년대 말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자화상도 꾸준히 그렸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움직이는 인물〉, 〈움직이는 몸〉 등 신체의 이동성에 관심을 두었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프랑스 마르세유의 캉디니 미술관, 파리 클로드 베르나르 갤러리, 멕시코 근대 미술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에서 활발히 개인전이 열렸다. 노년에도 베이컨의 기력은 전혀 쇠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랑을 하고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다. 1974년, 그는 존 에드워즈라는 영국인 청년을 만나 오래도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베이컨은 죽을 때까지 에드워즈를 모델로 삼아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베를린에서 자신의 회고전이 열릴 때 그를 공공연히 대동했고, 죽은 후에는 전 재산을 그에게 남겼다. 1992년 베이컨이 죽을 당시 재산은 약 1,100만 루블(한화로 3억 6천만 원)이었다. 〈존 에드워즈의 초상화에 관한 연구〉가 인쇄된 우표   [Daum백과] 프랜시스 베이컨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36    "어떤 상대도 내가 원하면 하루밤을 자고자고..." 댓글:  조회:2607  추천:0  2017-02-14
'페기 구겐하임' 20세기 미술史가 된 여인  2017-02-08    파블로 피카소, 막스 에른스트, 잭슨 폴락, 마르셀 뒤샹, 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  교과서를 수놓는 현대 미술 거장들과 씨줄 날줄처럼 엮인 이름이 있다. '페기 구겐하임'(1898~1979). 미술에 얕은 관심이 있다면 구겐하임가의 전설적인 콜렉터 정도로 기억하는 여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막대한 부를 물려받은 페기는 자유분방한 유년기와 한번의 결혼 실패를 겪은 뒤 내재된 예술가의 자아를 실현한다. 돈을 통해 실력파를 발굴하고 작품을 사들였고, 그의 방대한 콜렉션은 구겐하임 박물관의 중요한 일부가 돼 전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  9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페기 구겐하임 : 아트 애딕트'(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은 페기의 생전 미공개 인터뷰와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그 삶의 속살을 파헤치면서, 단순히 부호였던 페기가 어떻게 20세기 미술에 기여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페기의 삶을 통해 보는 20세기 미술의 향연이자 눈으로 보는 전시회다. 낡은 흑백 영상에 담긴 거장들과 그들의 작업 모습, 문외한도 한번쯤 봤을 법한 명화들은 페기가 그랬듯 마니아 뿐 아니라 일반 애호가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하다. 마치 전시회같은 영상에 페기의 사생활이 끼어들면서 다큐는 서사성을 띤다. "어떤 상대도 내가 원하면 하룻밤을 자고야 말았다." 지적 호기심과 함께 페기가 예술가를 움직인 동인은 성적 욕구였다. 그는 이미 50년대 발간한 자서전에서 '두 번째 남편인 에른스트 외에 많은 미술가와 동침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는데, 영화 속 인터뷰에서 자서전 리스트에 올리지 않은 이름들을 추가로 말한다. 종합하면 20세기 초 활약했던 근대 미술가들을 망라한다. 말년에 페기는 솔직한 고백 때문에 호사가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숱한 스캔들과 염문이 미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했음 분명하다. 중세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은 2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예술을 일으켰다. 페기는 오롯이 개인으로서 열정과 부를 쏟아부으며 예술가들의 뮤즈가 됐고 20세기 메디치가 됐다. "그가 없었다면 20세기 현대 미술이 오늘날과 같이 풍성할 수 있었을까" '페기 구겐하임 : 아트 애딕트'은 왜 미술사가들이 페기의 존재감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지 알려준다.  =========================== 1백 명의 아티스트를 모으고 1천 명의 남자와 잠을 잔 세기의 컬렉터 본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 본 기사를 트위터에 공유 본 기사를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본 기사를 구글플러스에 공유 본 기사를 이메일로 보내기 본 기사를 인쇄하기 0 0 전설적인 아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이자 후원자였던 그녀의 삶. ‘1942년 10월 20일 화랑 개관일 밤, 나는 행사를 위해 맞춘 하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한쪽 귀에는 탕기가 만들어 준 귀고리를, 다른 쪽 귀에는 콜더가 만들어 준 귀고리를 했다. 초현실주의와 추상 미술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중에서  현실에선 가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의 삶이 그렇다. 2월 개봉하는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는 재벌가 상속녀로 태어나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 잭슨 폴록 등 현대 미술의 대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뮤즈이자 후원자가 되었던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페기 구겐하임의 본명은 마거리트 페기 구겐하임으로, 미국의 내로라하는 부호 가문 출신이다. 19세기 후반 광산업으로 거부가 된 마이어 구겐하임은 슬하에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페기의 아버지는 그중 여섯 째다. 영화 〈타이타닉〉를 본 사람은 배의 운명이 확인되는 순간 “신사답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며 브랜디와 시가를 달라던 노신사를 기억할 텐데, 그가 바로 페기의 아버지 벤저민 구겐하임이다. 당시 프랑스인 애인과 여행 중이던 그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상황에 처하자 애인과 하인들을 구명보트에 태운 뒤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기의 큰아버지는 미국 철강계의 거물 솔로몬 구겐하임으로, 구겐하임 미술관·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거느린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을 설립한 인물이다.  20대 초반 엄청난 부를 상속받은 그녀는 뉴욕에서의 안락한 삶 대신 파리로 건너가 마르셀 뒤샹을 비롯한 예술가,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미술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대가 뒤샹은 그녀에게 현대 미술의 흐름을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여러 작가들을 소개하고, 전시회에 데려가 작품을 보는 안목을 높여주었다. 그녀는 예술만큼이나 예술가들도 사랑해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초현실주의 화가 이브 탕기, 추상주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등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1천 명 이상의 남자들과 잠자리를 했다”고 고백했다. 페기의 첫 남편은 다다이즘 조각가 로렌스 베일, 두 번째 남편은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현대미술의 중심을 옮긴 여성 베니스에 위치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잭슨 폴록, 헨리 무어, 칸딘스키. 콜더 등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보물창고다. 페기 구겐하임이 아트 컬렉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1938년 영국 런던에 구겐하임 죈 미술관(Guggenheim Jeune Gallery)을 열면서부터다. 그녀는 알렉산더 콜더, 바실리 칸딘스키, 헨리 무어 등의 전시를 열고 그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한창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릴 당시 그녀는 지인에게 ‘사랑 없이도, 남자 없이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라고 편지를 쓸 정도로 컬렉팅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컬렉팅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계속돼 전시에 헐값으로 나온 미술품들을 쓸어담듯 사들였다.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수많은 화가들이 그녀에게 작품을 팔기 위해 줄을 섰으나 단 한 명 예외가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였다. 페기가 작품을 구입하러 피카소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피카소가 “속옷 가게는 2층”이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어쨌든 그녀의 수집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나중에 ‘전쟁 중 이득을 본 장사꾼’이라는 오명과 함께 독으로 돌아왔다. 1941년 나치가 유럽의 숨통을 조여오자 그녀는 미술품들을 가재도구로 위장해 미국으로 탈출, 이듬해 금세기 미술관(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오픈했다. 페기 구겐하임이 현대 미술에 끼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유럽 모더니즘 작가들을 미국에 소개한 것, 그리고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데 쿠닝 같은 화가들을 후원해 추상 미술이 꽃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페기 구겐하임은 1947년 뉴욕에서 이탈리아 베니스로 거처를 옮기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어 18세기 건축가 로렌초 보스체티가 설계한 대저택,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를 매입해 갤러리로 개조하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컬렉션과 함께 여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그곳 정원에 잠들어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컬렉션은 모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되었으며, 그녀의 저택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베니스 분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The Peggy Guggenheim Museum)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1백 명이 넘는 현대 작가의 작품을 보유한 모더니즘의 성지이자 베니스를 찾는 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소다.  사진제공 구겐하임 미술관, 콘텐숍  디자인 김영화  참고도서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민음인), ///김명희 기자 페기 구겐하임의 인생에는 잭슨 폴록,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그녀의 인생 자체가 현대미술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유태인 광산 부호인 구겐하임가의 아버지와 금융 부호인 셀리그먼가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페기 구겐하임은 구겐하임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구겐하임 재단의 창립자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다.  페기 구겐하임의 일생을 담은 영화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수입·배급 콘텐숍)는 미술 다큐멘터리이지만 꼭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감상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다. 영화 속에서 미술작품들은 그녀의 삶을 있게 한 매개물 이상으로 강조되진 않는다.    대신에 현대미술 컬렉터로 족적을 남긴 그녀의 인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주목한다. 유별났던 부모의 성향부터 타이타닉호 침몰로 아버지를 잃은 과거, 자유분방한 성생활 속에 깃든 남성폭력 등 그녀의 삶에 스며있는 결핍이 컬렉터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투영한다.  결국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드러난 그녀의 수집욕을 통해 20세기의 현대미술이 이어졌음을 관객들은 느끼게 된다.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은 그녀를 인터뷰했던 재클린 웰드의 지하실에서 인터뷰 테이프를 찾아내 영화를 완성했다.  팝아티스트 낸시랭은 "미국에 유럽의 모더니즘을 이식시켰을 뿐 아니라 미술의 중심 모델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라며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설적인 여성"이라고 밝혔다...
335    [이런저런] 기괴스러운 작품모음(심장 약한 사람은 보지말기) 댓글:  조회:3713  추천:0  2017-02-14
기괴스러운 작품 작가 Mark powell 작품 (otto muehl 작가의 작품도 추천.)                                                                                                    
334    [쉼터] -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모음(4) 댓글:  조회:2691  추천:0  2017-02-14
  2006년 덴버에 있는 로키 마운틴 뉴스 이라크에서 사망한 콜로라도 해병대 장례식에 관한 보도 등으로 특집사진상과 특집상 수상자로 선정. 남편이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고 남편 관앞에서 잠든 참전 병사의 아내 레노공항에 운구가 도착하자 해병대원들이 미국기를 씌우고 있다. 최종 검안을 앞두고 있는 시신 남편의 운구를 보고 슬픔에 잠긴 유족. 시신을 끌어 앉고 우는 유족 시신 운구 행사를 위해 사망 군인의 집으로 가는 해병대원들 유품을 확인하는 유족들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다 운구차를 뒤따르는 해병대원들 장례식. 슬픔에 잠긴 유족들 장례식이 끝나고 다른 병사의 비석을 쓰다듬고 있다 사망한 아들이 받은 메달 해병대원을 추모하는 "용기를 기억하라"라는 추도식에서 슬픔에 젖은 한 유족 "용기를 기억하라"라는 추도식에서 유족들에게 사후 메달을 전달하기위해 나온 해병대 간부들. 임신한 한 유족이 남편의 주검에 배를 지그시 기대며 울고 있다. 고인의 유품을 확인하는 유족 남편이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고 남편 관앞에서 잠든 참전 병사의 아내.  3일동안 장례식에 참석한 부대원들이 피곤해 하고 있다. 장례식 전날, 연습을 하는 전우들. 장례식 내내 눈물을 그치지 않는 한 병사의 아버지가 아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다른 병사를 끌어 안고 있다. 장례식을 마치고 관위에 올려 놓은 흰 장갑과 장미위에 사막에서 가져온 흙도 한 줌 뿌린다.     댈러스 모닝뉴스의 긴급뉴스  사진부문 수상작. 2005년 9월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취재. 허리케인이 육지에 상륙하며 지붕을 날고 있다. 물에 잠긴 고속도로와 가옥들 허리케인을 피해 버스를 타기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공포에 질려 있다 하룻만에 물에 잠긴 크레센트 시 전경 종이상자를 찢어 만든 신발을 신고 있는 어린이 구조되던 수재민들이 배에 올라 타려다 넘어 지고 있다. 부숴진 집안을 수색하고 있는 수재민들 경찰이 맥주를 약탈하던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다. 슈퍼돔 주변의 고속도로에 피신해 있는 수재민들 물을 헤치며 피신하는 수재민들. 구조를 기다리는 수재민들 중무장하고 생존수색에 나선 주방위군. 소개되는 버스를 기다리다 말다툼을 하는 수재민들.  구조된 생존자에게 급히 물을 먹이고 있다. 간호사가 누워 있는 환자에게 부채질을 하고 있다.  카나다 구조대원들이 급히 나이 든 노인을 응급처지 센터로 옮기고 있다. 허리케인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집에 앉아 있는 수재민.  일곱달 된 아들을 잃은 어머니 시신을 헤치는 굶주진 개.  자신의 몇 안 남은 소지품을 옮기다 도로 주변에서 잠시 쉬는 한 수재민.     2007년 세크라멘토비신문사(Sacramento Bee Newspaper)의 사진작가 Renee Byer 촬영 "어머니의 여정" Feature Photography 부문의 수상작 그녀가 촬영한 이 사진들은 2004년 11월 희귀병 중 하나인 소아암 진단을 받은  10살 짜리 소년 데릭 메디슨(Derek Madsen)과 그의 어머니 신디 프렌치( Cyndie French)에 관한 이야기. 2005년 6월 21일. 미국 세크라멘토 데이비스 주립대학 의료센터(UC Davis Medical Center)에서  골수 적출을 성공리에 마친 데릭의 환호하는 모습과 왠지 어두워 보이는 그의 어머니 신디.  그녀는 혈액 줄기세포 이식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2005년 7월 25일. 어머니 신디가 아들에게 복부종양제거수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데릭을 안고 있는 모습.  세크라멘토에서 평범한 네일 & 태닝(nail and tanning) 샵을 운영하고 있는 신디로서는 수술비 걱정에 마음이 무겁다. 신디는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샵에서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아들이 웃을 수 있고,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결국 신디는 큰 재정적 손실을 감수하고 아들의 치료비를 위해 자신의 가게를 처분해야 했다. 복부종양제거수술을 위한 수속을 마친 후, 어머니와 아들은 병원 실내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벽 위 난간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는 아들과 어서 내려오라며 달래고 있는 어머니. 의료진이 향후 있을 방사선 요법에 대비하여 치료 부위에 표시를 하고 있다.  이날은 데릭이 11번째 생일을 맞은 날이며, 어머니 신디의 40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날이다.  어머니(왼쪽)와 데릭의 형(오른쪽)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있다. 2006년 2월 6일.  신디는 아들의 담당 의사로부터  "말기암환자 수용시설 근무 경험이 있는 개인 간호사나 호스피스를 구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 순간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온 그녀..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는 속으로 이렇게 되내이는 것처럼 보인다.  "아들아, 정말이니?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은 거니..?" 2006년 2월 9일. 집에 호스피스가 방문한 첫 날.  신디는 아들과 함께 세크라멘토의 한적한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다. 11살의 데릭은 운전면허가 없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다시 자동차 핸들을 잡을 수 있는 시간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수많은 추억들을 만들고 싶다. 암세포가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데릭은 데이비스 암센터를 찾아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한다.  2006년 2월 14일. 고통스러운 치료를 거부하는 아들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어머니..  눈물로 얼룩진 모자의 대화가 안타깝다. "치료 안 받으면 살 수 없어! 치료 받아야 해...!!" "엄마, 난 아무래도 괜찮아요. 엄마도 알지요? 난, 난 끝났어요!!" 2006년 3월 8일.  방사선치료를 며칠 앞두고 어머니와 아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신디가 데릭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슬퍼하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를 위로하고 있다.  신디는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암과 싸워왔는지를 반복해서 읽어줌으로써 아들을 격려하고,  또 아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2006년 4월 25일.  거의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아들의 머리맡에 신디가 꽃을 놓아 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아들의 병상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다.  그녀의 친구들이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보지만,  어머니의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오랜 기간, 신디는 하루 24시간 아들의 병상을 지켜왔다.  2006년 4월 26일.  어머니와 아들은 암세포와 최후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복부의 암세포는 위장과 뇌로 전이되었다.  위로 전이된 암세포는 데릭의 상복부를 팽창시켰으며,  뇌로 퍼진 암세포는 그의 시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딱 맞았던 바지는 급작스러운 신체적 변화로 인해 손으로 잡고 있지 않으면 자꾸 흘러내린다. 진통제 투약을 거부하며 자신의 불행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고 있는 데릭과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들을 달래는 어머니 신디. 2006년 5월 1일.  그녀 가족의 오랜 친구가 찾아와 아들의 장례비용 돕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재정적인 고통을 다른 가족들이 겪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자선단체 등의 도움을 희망하고 있다. 어느 자선행사장에서 신디가 아들과 키스하는 모습.  휠체어 뒤로 신디의 막내 딸이 서있다.  신디는 아들의 치료비와 장례비 마련을 위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해서 자선모금행사를 하고 있다.  신디는 행사장에서 자신의 아들이 암과 얼마나 용감히 싸워왔는지를 연설했다. 2006년 5월 8일.  아들이 암과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어머니 신디가 아들이 편이잠들 수 있도록 24시간 옆을 지키고 있다.  신디는 알고 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신디가 아들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바깥 나들이를 나가는 모습.  벽에 붙어 있는 그림들은 데릭의 반 친구들이 보내온 격려의 그림들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신선한 공기와 푸른 하늘, 따사로운 5월의 햇살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나 보다.  이 나들이가 소년의 인생에 기록되는 마지막 여행이었다.  2006년 5월 10일. 임종이 다가왔다.  오랜 경력의 호스피스 간호사가 임종 맞을 준비를 하는 가운데  어머니 신디가 감정을 자제하며 아들이 편안히 눈감을 수 있게 도와줄 진정제를 준비하고 있다. 임종의 순간.  어머니와 호스피스 간호사, 가족과 신디의 친구들이 임종의 순간을 지키고 있다. 임종의 순간, 어머니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내 아기, 내 아들...  사랑한다.."  라고 말했고,아들은 어머니의 그 말을 들으며, 어머니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2006년 5월 19일. 데릭의 장례식 날 아들의 관을 운반하는 어머니 신디와 가족과 지인들.  데릭은 이날 11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고  캘리포니아 마운트버논기념공원(Mount Vernon Memorial Park)에 묻혔다.  어머니 신디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너를 기억할게.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해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우리 가족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서 남은 생을 살거야..."     2008년 Concord (N.H.) Monitor 紙 의 Preston Gannaway 촬영 FEATURE PHOTOGRAPHY 부문 수상. 부모의 임종을 견뎌내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취재. Concord 병원에서 남편 Rich는 Carolynne 옆에서 잠시 누워있습니다.    그녀는 1월초 침샘 감염 선고를 받았습니다.  Carolynne은 자식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를 찍는 중에 마음을 추스릅니다.  그녀의 동생 Sara Matters와 사촌 Anna Stoessinger가 그녀를 위로하고 있죠.   의사는 그녀가 몇달, 아니 몇주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Waters 장례물품점에서 남편 Rich은 관을 고르고 있습니다.  아내가 올해 안으로 임종을 맞이할 것이란 의사의 말에    크리스마스 전부터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구역질을 마치고 입을 닦을 때 아들 Brian이 화장실에 기대어 있습니다.  "한 가족의 너무 많은 고통을 보고있어요"     Carolynne의 동생 Sara Matters는 말합니다.  병원에서 EJ는 그녀의 부어오른 발과 Melissa가 칠해준 발톱을 쓰다듬습니다.   다리에 점점 차오르는 물 때문에 그녀는 화학치료법 마저 중지해야합니다.    일주일 후 그녀는 호스피스의 보호 아래 병원에서 집으로 보내집니다.  죽기 2주전 친구의 생일파티 중 그녀의 어머니 Kathryn Siegle가 그녀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Carolynne은 기분이 우울하다고, 그저 상태가 나아졌으면 하고 말합니다.  가족들이 Carolynne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Melissa는 밖에 나가기 위해 머리를 빗고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파질 수록 그녀는 좀처럼 집에 있지 않습니다.  Carolynne이 딸의 얼굴을 못 보고 죽을까봐 남편 Rich는 딸과 말다툼을 했지만,    그냥 딸을 내버려두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임종하는 순간, Rich는 그녀에게 키스합니다.    그녀가 바라던대로 가족들이 함께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합니다.  장의사들이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갈때 Rich는 슬픔을 감추지 못 합니다.  장례식 후 가족들은 그녀의 관에 장미를 올려놓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핑크색으로 차려입었습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색이었지요.  직장과 집안일 사이에서 지친 Rich은 그저 잠자리에 들기만을 바랄뿐입니다. 아들 EJ가 졸라서 Rich는 아들이 볼 수 있게 화장실로 공룡치킨너겟을 가져갑니다. 아내의 무덤에서 말싸움을 벌인 Brian을 RIch가 혼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점점 더 멀어질 수록 Brian은 더 말썽을 일으킵니다.  Rich는 세자식 모두 키우는게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날 Carolynne의 묘지를 방문한 가족들. EJ가 사진을 찍는 동안 Brian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 Glen에 있는 놀이공원에서 Rich와 Melissa는 EJ가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EJ가 다 클때까지는 매년 여름 놀이공원에 데려가주라는 Carolynne의 부탁이 있었죠.  개학식날 가족들은 EJ를 학교로 데려다 주고 있습니다.  죽기 전 Carolynn의 소망은 EJ가 유치원 가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녀는 없지만 가족들은 EJ와 함께 있습니다. Rich와 EJ는 Carolynn을 기리며 마당에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Rich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야생치료프로그램에 참여중인 아들을 찾아왔습니다.  Brian이 집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많아 지자,  Rich는 그를 여름에 내보내기로 결정했었죠.  Brian을 만나고 온 Rich가 말했습니다.  "아들의 눈이 보다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사진은 브라이언의 졸업 행사 중 일부로, Rich와 지도교사가 아들을 받아주기위해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의 새로운 기숙학교 그네에 앉아 Brian은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울고 있습니다.  Brian은 Rich와 헤어지기 싫다고 말합니다.  기숙치료학교에서의 일년의 시간이 아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라 아버지는 말합니다.     2009년 뉴욕 타임즈 사진기자 데이먼 윈터 촬영  "빗속의 오바마" 버락 오바마 대통령 선거 캠프를 취재. 인물사진 부분 수상. 2008년 10월 28일.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에서 유세하는 오바마 상원의원을 보기 위해 몰려든 지지자들의 모습. 2008년 9월 20일.   오바마 상원의원이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선거 유세하는 모습. 2008년 1월 20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의 콜럼비아 컨벤션 센터에서 여섯살 난 섀드릭 존슨이 정장 차림으로 오바마 상원의원의 유세를 보기위해 줄서 있는 모습.     Patrick Farrell 촬영 미국 마이애미 헤럴드 지(紙)의 사진기자 '패트릭 패럴'이 촬영한 아이티의 태풍 한나 피해상황사진. 2008년 8월 열대 폭풍인 페이와 허리케인 구스타프 그리고  9월에는 열대성폭우 한나와 7일에는 아이케가 연달아 아이티에 상륙하였다.   이 폭풍및 허리케인으로  328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고나이베스등의 마을이 큰 피해를 입었다. 14,000가구가 피해를 입었구 그중 3천가구가 완파당했다. 고나이베스는 인구 30만중 70%가 이재민이 되었다. "긴급 속보 부분 수상자" 아이티 소년의 사진. 2008년 11월 21일. 아이티 마르티상 마을에서 심한 영양실조로 죽어가던 네살난 여아가  병원으로 옮겨져 2주 동안 치료를 받아 몸무게가 7kg로 늘어난 모습.    병원 입원 당시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8년 9월 4일    홍수가 난 아이티 고나이브 지방 주민들이 물에 잠긴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 2008년 9월 4일    태풍 한나의 여파로 집을 잃은 아이티 고나이브 마을의 한 소년이 유모차를 건져내는 모습. 2008년 11월 22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국경없는 의사회 산부인과에서 한 임산부가 산통을 참아내며 병실 입실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이 울타리 밖에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2008년 11월 21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한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임산부들이 출산 대기 중인 가운데    아이를 분만한 한 임산부가 부축도 없이 회복실로 걸어가는 모습. 2008년 9월 4일    아이티 고나이브 지방에 홍수가 난 모습. 2008년 9월 4일    태풍 한나의 여파로 집을 잃은 아이티 고나이브 마을의 한 여성이 진흙탕 물에 의류와 식기를 세척하는 모습. 2008년 9월 7일    태풍 한나로 인해 아이티 캬바레 마을에서 목숨을 잃은 열두 아이들 시신이 옮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한 여성의 모습. 2008년 9월 7일    태풍 한나로 인해 아이티 캬바레 마을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시신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주민들의 모습. 2008년 9월 7일    태풍으로 인해 아이티 캬바레 마을에서 목숨을 잃은 다섯살 소녀의 시신을 트럭에 싣는 모습. 2008년 10월 22일    아이티 캬바레 마을 외곽에 마련된 난민촌의 한 텐트에서 비치는 어린이들의 모습. 2008년 10월 23일    아이티 고나이브 마을 길가에 버려진 통학 버스 주변 임시 거처에서 뛰노는 아이의 모습. 2008년 10월 23일. 아이티 고나이브 마을 의 수재민 거처 창고에서 실피카 술메(왼쪽)라는 여성이    자신의 친구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는 모습. 2008년 11월 11일  아이티 프티옹빌에서 붕괴된 프로메스 대학 희생자들의 장례식 모습.     2010년  The Des Moines Register의 Mary Chind 촬영 작업 줄에 매달린 구조자가 댐 아래 물에 빠진 여성을 구조하려는 숨막히는 순간을 담은 사진. 속보 사진 분야 수상     The Denver Post의 Craig F.Walker 촬영 그는 이라크에서의 폭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미국 군대에 입대한 10대 청년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피쳐 사진 분야 수상     2011년  워싱턴 포스트의 캐롤 구지, 니키 칸, 리키 캐리오티 기자들 촬영 '어린 희생자(Tiny Victim)' 2010년 1월. 아이티 지진 발생 후 포르토프랭스의 병원에 입원한 어린이 모습을 담았다.   아이티 대지진을 취재한 사진.   아이티 대지진을 취재한 사진. '시간이 멈춘 순간' 아이티 대지진을 취재. '순결의 종말' 아이티 대지진을 취재. '그 노인' 아이티 대지진을 취재. '구조' 아이티 대지진을 취재. '기도(Prayer)'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아이티 대지진 생존자들의 기도 모습이 담겨 있다. '아이티의 눈물' 포르투프랭스에서 아이티 대지진을 취재. '폐허 속의 삶(Life Amid the Ruins)'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 거리에서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연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총격을 받고 치료 중인 소녀' 범죄조직원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총격을 받고 병원에서 치료 중인 에리카 미란다 양(10)의 모습. '죽음(Death)' 아이티 지진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 "구조(Rescue)" 대지진으로 파괴된 아이티의 모습을 담았다. 레기 클라우드라는 아이가 파괴된 잔해에서 구조된 현장을 포착      2012년 덴버 포스트의 Craig F Walker 촬영  Brian Scott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용사다. 그는 외상성 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고있다. 그는 전쟁에서 무사히 귀환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5년동안이나 PTSD로 인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상태. Scott의 이라크 전쟁 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생활을 찍은 사진들이 올해의 퓰리처 인물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scott. scott은 몇번이나 자살시도를 했다. 전화로 여자친구와 말다툼을 하는 도중 위로하고 있는 친구와 울고있는 scott. 그는 전화로 그녀에게 말한다.   "난 오늘밤에 잠을 잘 수 없을거야. 또다시 공황발작이 올테니까..." scott의 침실 문과 벽.  그는 몇번이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벽과 문을 주먹으로 친다. 2003년 6월, 파리 섬, SC에서 부트 캠프를 졸업 후 자기 동생을 안고 있는 scott.   사진은 냉장고 문에 붙어있다. scott은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가 없었다. 단지 PTSD의 병을 앓고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군복무기록, 명예로운 각종 서류와 그의 좋은 행동의 훈장을 가지고 있지만, scott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이것들은 분명 가치가 있을 거에요. 그래야만 해요..." scott과 그의 여자친구.  scott은 결국 여자친구와 같이살게된다.   전쟁 전에도, 전쟁 후에도 그녀는 그의 곁에있다. 새 아파트로 겨우 이사를 간 scott.   그는 전에살던 집에서 너무나도 많은 안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scott과 그의 강아지 Jibby. 옛 동료와 만나고 웃고있는 scott. 3급 폭행 혐의로 고발당한 scott은 자신의 변호사와 면담중이다. 새직장에 취직한 후 첫 출근준비를 위해 쇼핑하는 scott. 그는  "나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에요. 이 불안이 정상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일할 거에요. 다만 사람들이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scott은  3개월 후 직장을 그만둔다. scott과 다툰 후 결국 그의 곁을 떠나버리는 여자친구. 전쟁터에서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맥주를 마시는 scott. scott은 폭풍우를 보며 지난 날을 회상한다. "난 그저 내가했던 일들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요.  나는 잔인한 살인자 였었고, 전 그 안에서 즐거웠어요.  하지만 이제 다시 보통인간의 느낌을 적응하고 있는 중이에요.   비로소 죄책감을 느껴요.  나는 그들에게 끔찍한 짓들을 했어요." 그의 하루는 공황발작으로 시작한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어떻게해야할지 말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발작이 시작되면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콱 막혀요.  팔 다리가 분리되는 것같은 느낌이에요." 그의 몸은 하루하루 다르게 피폐해지고있다. 덴버 Colo.의 VA 의료 센터에서 약국 밖에서 기다리는 scott. scott의 정신 상태를보고 후에 의사는 그에게 정신병 치료약 약물에 대한 처방했다. "난 무서워요. 내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없어요." 라고 말했다. 두 달 후 scott은 센터에서 PTSD 주택 재활 프로그램에 접수되었다.     2013년  Javier Manzano AFP통신 시리아 반군 2명의 병사의 모습   기획 사진 부분 수상작     Rodrigo Abd, Manu Brabo, Narciso Contreras, Khalil Hamra, Muhammed Muheisen AP통신 속보 보도 사진 부분 수상작 죽은 아들을 안고 울고있는 아버지.    이 남자도 시리아 정부군 소속의 저격수한태 살해당했다. 폭격으로 사망한 남자의 아이를 달래주는 사람들. 어린 아들에게 RPG 11 로켓 발사기를 어린 소년에게 가르치고 있다. 구멍난 틈으로 조준하고 있는 스나이퍼. 시리아 정부군의 휴식하는 모습. 시리아군이 숨어있자 시리아 반군이 도발하는 현장. 시리아 군의 문제점이 이처럼 무장하지 않은 일반인도 쏜다는게 가장 큰 문제. 폭격으로 인해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인의 모습. 공격에서 살아남아 난민캠프로 이주한 10살 소년.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