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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 화가 - 라파엘로
2017년 02월 18일 15시 54분  조회:7536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일 1483. 4. 6, 우르비노 공국 우르비노
사망일 1520. 4. 6,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어린 시절에는 페루지노의 작업실에서 광범위한 전문 지식을 익혔으며, 이후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구도와 명암법을 배워 자신만의 새로운 인물 유형을 창조해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에는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영향, 그리고 라파엘로 자신의 참신한 시각이 드러나 있다. 로마에서 보낸 12년 동안 라파엘로는 <성체에 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을 그렸고 성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예수의 변모>에는 르네상스 이후의 시대를 예견한 바로크적 표현이 드러나 있다.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흔히 라파엘로 불린다.

개요

그의 작품은 유연한 형태와 평이한 구도뿐 아니라 인간의 고결함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1508년부터 로마에서 바티칸 궁을 개조하는 대규모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계획에는 브라만테가 성베드로 대성당을 재건하고(1514년 브라만테가 죽은 뒤 이 작업은 라파엘로에 의해 완성되었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파엘로는 교황이 거처하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장식(1508~11)하는 일을 맡았는데, 여기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화인 〈성체에 관한 논쟁 Disputa〉·〈아테네 학당 School of Athens〉을 그렸다.

우르비노에서 보낸 어린시절

라파엘로는 조반니 산티와 마자 디 바티스타 치아를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1491년에 죽었다. 16세기의 화가이자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뛰어난 데라고는 전혀 없는 화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양있는 사람으로서 우르비노 궁정에 유행하는 진보적 미술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고, 1494년 죽기 전에 11세가 된 아들 라파엘로에게 궁정의 인문주의 철학을 소개했는데, 이를 통하여 라파엘로는 과거의 문화적 유산과 16세기를 내다보는 새로운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우르비노는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7개월 전에 죽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이 다스리는 동안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양있는 군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을 구현한 페데리코 공은 모든 예술을 크게 장려했고, 도나토 브라만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비롯하여 뛰어난 인물들을 아름답게 재건한 자신의 대저택으로 초빙했다.

페루자와 피렌체의 다른 주요미술가들도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우르비노는 라파엘로가 이후에 배우게 될 모든 지식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이 젊은 미술가의 놀라운 조숙함 또한 이 도시의 문화적 생동감 덕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라파엘로는 겨우 17세였던 16세기초에 이미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페루자에서 페루지노에게 배운 도제 시절

조반니 산티가 아들을 데리고 페루자로 가서 움브리아 화파의 위대한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 밑에 도제로 보냈다는 바사리의 말은 수긍할 수 없다.라파엘로는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겨우 11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페루자로 간 날짜를 너무 뒤로 미룰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그 연대를 1495년으로 못박고 있는데, 확실한 것은 라파엘로가 1500년 5월 13일에는 이미 우르비노를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증인이 서명 날인한 증서가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1500년 12월 10일에 작성된 또다른 서류에는 당시 '대가'라고 불리는 이 젊은 화가가 아버지의 제자와 함께 1502년 9월 13일까지 제단화를 완성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라파엘로는 이때 이미 페루지노 밑에서 도제살이를 시작했고, 자신의 재능을 당장 입증했기 때문에 1501~03년에는 꽤 중요한 주문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 주문은 페루자의 산프란체스코 교회에 있는 오디 예배당에 〈성모의 대관식 Coronation of the Virgin〉을 그려달라는 것으로, 이 그림은 1797년 나폴레옹 군대가 훔쳐갔다가 1815년에 바티칸에 반환했다.

페루지노는 1498~1500년에 페루자의 콜레조 델 캄비오에서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덕분에 페루지노 작업실에서 일하던 라파엘로는 광범위한 전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실제적 가르침뿐 아니라 차분하고 정교한 페루지노의 화풍도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1481~82년에 페루지노가 로마 바티칸 궁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Giving of the Keys to St. Peter〉는 라파엘로의 첫번째 주요 작품인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 The Marriage of the Virgin〉(1504)에 영감을 주었다.

페루지노의 영향은 원근법 강조, 인물과 건축물 사이의 점층적 관계, 서정적으로 감미롭게 묘사된 인물 등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초기 그림에서도 이미 라파엘로의 감성은 스승의 감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건축물과 관련된 인물의 배치는 페루지노보다 덜 엄격하며,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각 인물의 배치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활기에 차 있다.

라파엘로가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을 그린 직후에 완성한 3점의 소품 〈기사의 꿈 Vision of a Knight〉·〈3가지 은총 Three Graces〉·〈성 미카엘 St. Michael〉은 젊은 참신함만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양식을 이루는 요소들을 다루는 능력이 완전히 무르익은 것을 보여주는 서술적 그림의 빼어난 본보기들이다.

페루지노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1504년말이 되자 라파엘로는 모범으로 삼을 다른 모델을 찾아야겠다고 느꼈고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페루자 밖으로 관심을 돌렸다.

피렌체 시절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페루자 화가인 베르나르디노 핀투리키오를 따라 시에나로 갔다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하고 있는 작업(그들은 시뇨리아 궁을 장식하기 위해 각기 앙기아리 전투와 카시나 전투를 주제로 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끌려 그곳으로 갔다고 막연하게 전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1504년 가을까지는 피렌체에 도착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피렌체 방문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작품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피렌체의 예술과 처음으로 실질적인 접촉을 갖게 된 것은 1504년경이다.

피렌체 문화는 그가 이미 갖고 있던 모든 개념을 더욱 강화시켜준 동시에 좀더 넓고 새로운 지평을 그에게 열어주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수동적인 흡수가 아니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문화의 기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보편화된 이상주의를 지지한 피렌체 화가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만이 아니라, 고딕 양식으로부터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신기원을 이룩한 자연주의의 선구자인 '마사초의 옛 작품'도 연구했다고 조르조 바사리는 기록하고 있다. 라파엘로가 남긴 스케치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조각가인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및 판화가인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작품까지 거슬러 올라가 연구한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인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었다.

그래도 역시 피렌체에서 라파엘로의 주요한 스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였다. 라파엘로가 1505~07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 특히 〈오색방울새의 마돈나 The Madonna of the Goldfinch〉·〈프라토의 마돈나 Madonna del Prato〉·〈에스테헤의 마돈나 The Esterházy Madonna〉·〈아름다운 정원사 La Belle Jardinière〉 같은 마돈나 연작에는 1480년부터 회화 분야에 커다란 혁신을 이룩하고 있었던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 그림들은 다 빈치의 구도·인물배치·몸짓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15세기 작품에서는 보기 드물게 편안하고 단순한 배경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라파엘로는 또한 다 빈치의 명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 빈치의 명암대조법(chiaroscuro : 자연광이나 고정된 광원으로 인해 생긴 밝음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을 알맞게 이용했고, 특히 다 빈치의 스푸마토(sfumato : 선 대신 극도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영을 이용하여 형태나 이목구비의 윤곽을 나타내는 기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스푸마토). 그러나 라파엘로는 다 빈치를 능가하는 새로운 인물 유형을 창조했는데, 그가 창조한 둥글고 온화한 얼굴은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숭고한 완전함과 평온함의 경지로 승화되어 있다.

1504~08년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계속 거주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향인 우르비노에 갔었으며 당연히 페루자에도 들렀다. 1507년 그에게 오늘날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Deposition〉를 그려달라고 주문한 사람은 페루자의 한 귀족 여인이었다. 이 그림에는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만, 이 두 화가의 음울한 강렬함과 열정은 라파엘로 자신의 참신하고 차분한 시각으로 변형되어 있다.

로마에서 보낸 말년

라파엘로는 1508년말경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브라만테가 같은 고향 사람들을 교황청으로 데려오고 싶어서 교황에게 제의한 덕분이었다. 이무렵 라파엘로는 로마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젊은 화가는 로마에 오자마자 변덕스러운 율리우스와 교황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대가로서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는 로마에 동화하려고 애쓰는 한편 로마 귀족들의 정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화가 중의 왕자'라고 불릴 만큼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인문주의자 첼리오 칼카니니는 나중에 라틴어로 쓴 경구에서 라파엘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로마를 건설하는 데에는 고대의 수많은 영웅과 오랜 세월이 필요했고, 로마를 파괴하는 데에는 수많은 적과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라파엘로는 로마 안에서 로마를 되찾았고 그것을 발견했다. 찾아내는 데에는 위대한 이가 필요하지만 발견은 신이 주관하신다."

이 경구는 라파엘로의 품행이 로마 전체의 존경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로마 귀족들은 그를 그들 자신과 동등한 인물로 여겼고, 비비에나 추기경은 1514년 자기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율리우스 2세의 후계자이자 위대한 메디치 로렌초의 교양있는 아들인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추기경으로 임명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짧은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이는 열에 들뜬 듯한 정력적인 활동으로 잇따라 걸작을 낳은 시기였다. 그는 어떤 시련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모든 일을 겸손과 신중으로 대했지만 매번 새로운 높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항상 성공을 거두었다. 바티칸 궁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를 장식하는 일은 1508년말에 시작하여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완성했는데, 율리우스 교황의 이념과 교양을 반영하고 역사 속의 로마 교회를 찬양하는 이 일은 아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는 그에게 이 일을 주문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거처하고 집무하기로 되어 있던 바티칸 교황청의 수많은 방들 가운데 하나였다. 율리우스 2세는 매우 교양있는 사람이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주위에 불러모았다. 그는 4세기에 지은 원래의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일을 브라만테에게 맡겼고,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을 만들 것을 의뢰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원하지 않았으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하게 했다.

또한 라파엘로의 천재성을 꿰뚫어보고, 궁정의 인문주의자들과 토론한 철학적 주제를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일을 라파엘로의 손에 맡겼다. 이 주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통해 로마 교회의 권력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프레스코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은 〈성체에 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이다. 과거와 현재의 로마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있고 그 위로 천상에 성부와 성자가 예언자 및 사도들과 함께 있는 거룩한 광경을 그린 〈성체에 관한 논쟁〉은 그 도상을 통하여 교회의 승리와 진리의 승리를 같은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와 현재의 철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속세의 지식 또는 철학을 복잡하게 그려낸 알레고리이며, 플라톤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의 거처를 장식하는 작업은 1513년에 율리우스가 죽고 후계자 레오 10세가 즉위한 뒤인 15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중요하고 큰 일을 맡고 있으면서도 라파엘로는 작업의 마지막 부분은 완전히 제자들에게 맡기다시피 하고, 다른 야심작들을 한꺼번에 시작했다. 그가 이무렵에 진행한 일들은 다른 건물들을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그림으로 장식하는 일, 초상화, 제단화(여기에 그린 그의 온화한 성자들과 성모는 새로운 종교적 유형을 낳게 했음),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접시 도안, 무대의 배경그림 등 지극히 다양했다(내러티브). 그는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작업을 하는 동안, 산엘리조델리오레피치 교회를 설계했는데 이것이 건축과 관련한 그의 첫번째 작업이었다.

1513년 은행가 아고스티노 키지는 산타마리아델포폴로교회에 자신의 장례식용 예배당을 설계하고 장식해달라고 라파엘로에게 부탁했다. 라파엘로는 키지의 저택인 빌라 파르네시나를 이미 장식한 적이 있었다. 1514년 레오 10세는 브라만테와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사람으로 라파엘로를 선정했고, 그해 말에 브라만테가 죽자 이 작업을 감독하게 된 라파엘로는 교회 설계를 방사상의 그리스 양식에서 길쭉한 라틴 양식으로 바꾸었다.

브라만테는 바티칸 궁의 로지아(loggia : 한쪽만 벽이 있는 복도)들을 장식하는 일도 맡고 있었는데, 이 일도 라파엘로가 이어받았다. 이 서정적 장식에 나타난 감미로운 단순성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웅장함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제작한 많은 작품들에는 철학적 깊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문주의자이며 신플라톤주의자라는 평판이 로마 전역에 널리 퍼졌다. 그가 로마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는 수많은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벰보 추기경, 풍자 작가인 피에트로 아레티노, 비비에나 등을 비롯한 문필가들도 여럿 있었다.

1519년에는 이탈리아의 서사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쓴 희극 〈바뀌어진 아이들 I suppositi〉의 무대장치를 설계했다. 라파엘로는 유능한 학자였고 특히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1515년 8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귀중한 라틴어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상을 보존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명했다. 라파엘로는 2년 뒤에 로마의 유물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로마의 고고학 지도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의 라파엘로는 오랜 과거의 것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 유물 보존계획을 감독하는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양식을 보여주는 설계도를 창조하고 있었다. 로마의 빌라 마다마는 1516년 이후에 착공되었는데, 이 건물에 대한 그의 설계도는 이후 이탈리아 건축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는 새로운 건축학적 개념의 본보기였다.

건축만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그는 미래를 예견했다. 마지막 작품인 〈예수의 변모 Transfiguration〉(1517 의뢰)에서 그는 혼란스럽고 불안한 새로운 세계를 예견한 듯한 새로운 감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그림의 구도는 이미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기울어져 있다.

라파엘로는 37번째 맞는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신비로운 후광이 그를 둘러쌌고, 교황청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 미사는 바티칸 교황청에서 거행되었고 마지막 작품인 〈예수의 변모〉가 그의 관 앞에 세워졌다. 그의 유해는 로마의 판테온에 묻혔다.



[Daum백과] 라파엘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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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1483년
사망일 1520년
 

흔히 ‘르네상스 3대 거장’ 하면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리고 라파엘로를 꼽는다. 어떤 사람들은 다빈치를 빼고 티치아노를 집어넣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각각 피렌체와 로마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티치아노를 지리적으로 배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신비로운 직관의 예술을 창조했고, 티치아노가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현란한 아름다움을 구사했다면, 라파엘로는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차분한 그림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움브리아의 우르비노 지방에서 태어났다. 화가였던 그의 부친이 ‘이탈리아의 등불’로 불렸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치하에서 활동한 이래 라파엘로는 페데리코의 아들 구이도발도의 궁정에서 일했다. 몬테펠트로 가문은 장차 율리우스 2세로 등극할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와 사돈이 되기 때문에,1)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우르비노와 로마에서 당대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라파엘로가 피렌체의 미술 시장에서는 의외로 참패를 당한다.

고상하고 우아한 그림의 대명사였던 라파엘로는 천재 예술가들이 우글거리는 피렌체에서 대가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피렌체 출신 화가들이 외부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길드를 결성하여 외지인의 작품 제작이나 판매에 제한을 두는 텃세를 부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르비노와 피렌체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원인일 수도 있다. 신플라톤주의가 지배하던 피렌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미학에 기초한 라파엘로에게 이념적 차별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역사를 살펴보는 관점에서는 무슨 이유 때문에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는지, 또 피렌체에 체류하는 동안 제작한 작품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 부부의 초상화〉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 부부의 초상화〉

금은세공사로 출발했던 라파엘로의 부친 조반니 산티는 페데리코 가문을 위해서 일하던 궁중 예술가였다. 페데리코 공작 부부의 초상화(우피치 미술관 소장)를 그렸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작품을 제작할 당시 조반니 산티의 집에서 기거했다. 1483년에 태어난 라파엘로는 부친의 화실에서 미술에 입문했을 것이다. 티모테오 비티라는 무명의 화가에게서 도제 생활을 잠시 했지만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움브리아 화단을 지배하던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4)였다. 베로키오의 화실 출신으로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어깨를 겨누던 탁월한 화가였다. 라파엘로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우르비노의 은행 길드의 주문을 받고 피렌체에서 이주해온 페루지노를 처음 만나게 된다.

스승을 아예 무시했던 미켈란젤로와 달리 라파엘로는 착하고 충실한 페루지노의 제자였다. 단박에 스승을 능가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언제나 스승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볼로냐 국립 박물관에 스승 페루지노와 제자 라파엘로가 그린 비슷한 주제의 그림이 한 장소에 비교 전시되어 있는데, 페루지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기분 나쁠 정도로 제자의 그림이 스승의 실력을 능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라파엘로는 페루자와 아시시에서 몇몇 작품 주문을 받고 활동하다가 우르비노로 돌아왔다. 1504년의 일인데, 이때 갑자기 라파엘로는 피렌체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본인이 스스로 원한 것인지, 아니면 티모테오 비티나 페루지노가 추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시민 폭동이 일어나 피렌체에서 망명한 후 우르비노까지 흘러들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조언 때문일 수도 있다.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떠나기 직전에 완성한 〈성모의 결혼식〉은 제자가 스승 페루지노의 예술 세계를 얼마나 능숙하게 넘어섰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움브리아의 소도시 시타 디 카스텔로에 있는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교회의 알비치 예배당에 그려진 이 작품은 현재 밀라노의 브레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로 유학 길에 오르는 궁중 신하를 추천해주려고 구이도발도 공작의 누이이자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딸인 ‘로마 총독 부인’과 그의 남편이 함께 펜을 들었다. 이 로마 총독 부인의 남편은 장차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될 인물의 친동생 조반니 델라 로베레였다.

이 편지를 지닌 사람은 우르비노의 화가 라파엘로입니다. 그는 자기 직분에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며, 연구를 위해 피렌체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했습니다. 탁월한 분이신 그의 부친은 제 친구였고, 그 아들은 훌륭하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기도 해서, 저는 이 아이를 매우 아끼고, 완벽한 화가가 되기를 바란답니다. 저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각하께 추천합니다. 바라건대 저에 대한 사랑으로, 어떤 상황에서나 도움과 보호를 베푸시길 간청합니다.
- 조반니 델라 로베레와 로마 총독 부인, 우르비노에서 1504년 10월 1일 씀

피렌체에서 명성을 날렸던 페루지노의 제자이자, 우르비노와 로마 실력자들의 추천서를 지닌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큰 성공을 기대했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예술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이탈리아와 유럽 전체에서 대가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거의 참패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다. 그가 머물렀던 1504년부터 1508년까지의 피렌체는 그야말로 천재들의 각축장이었고, 미켈란젤로의 표현대로 우르비노에서 온 촌사람 라파엘로는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베키오 궁의 대회의실 양쪽 벽을 프레스코화로 그리는 경쟁으로 장안의 화제가 넘쳐날 때였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의 르네상스 전통에 완전히 압도된 듯하다. 무명의 젊은 화가였던 라파엘로로서는 감히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불꽃 튀는 경쟁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 대신 라파엘로가 마사초의 브랑카치 채플에서 르네상스 예술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었다고 조르조 바사리는 전한다. 라파엘로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함께 위대한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이라고 칭송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피렌체에서 마사초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파엘로의 데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도나텔로와 베로키오 등의 작품도 연구하고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에 체류하는 동안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 중에서 아직까지 피렌체에 남아 있는 작품은 우피치 미술관의 〈방울새의 성모〉와 〈도니 부부의 초상화〉, 그리고 피티 궁전 박물관의 〈대공의 성모〉 등이다. 1508년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한 이후 그림 중에서 피렌체의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은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그리고 〈의자의 성모〉 등이 있다.

2008년 10월, 피렌체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피렌체 신문들은 “지난 10년 동안 집을 떠나 있던 피렌체의 딸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라는 언론 보도로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바로 라파엘로의 명작 〈방울새의 성모〉가 10년 동안의 오랜 복원 작업을 거쳐 마침내 1505년 원작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원래 라파엘로가 피렌체의 직물상이던 로렌초 나시(Lorenzo Nasi)의 결혼 기념 선물로 제작한 것이다. 자애로운 모습의 성모가 ‘지혜의 의자’에 앉아 있고 어린 세례요한이 예수에게 검은 방울새를 건네주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아기 예수가 쓰다듬고 있는 것은 검은 방울새이지만, 사실 그 새는 장차 받게 될 수난을 상징한다. ‘검은 방울새(cardellino)’의 발음이 ‘엉겅퀴’를 뜻하는 이탈리아어(cardo)와 유사하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쓰게 될 가시면류관을 상징한다.2)

최근에 완전히 복원되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방울새의 성모〉
최근에 완전히 복원되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된 〈방울새의 성모〉

라파엘로의 〈방울새의 성모〉는 16세기부터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이다. 1547년, 로렌초 나시의 집이 무너지면서 작품이 17조각으로 부서졌다. 이 부서진 작품을 구입한 메디치 가문은 리돌포 기를란다요(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아들)에게 복원을 지시한다. 작품의 원작자인 라파엘로가 서른일곱 살 젊은 나이로 로마에서 이미 임종한(1520) 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돌포 기를란다요는 17조각으로 부서진 작품을 붙이는 과정에서 무리한 복원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작품의 원래 색채는 16세기 이후부터 몇 번이나 진행되었던 서툰 복원 작업 때문에 더욱 훼손되고 말았다.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우피치 미술관은 10년 동안 과학적인 장비와 라파엘로가 동시대에 그린 다른 작품을 비교하여 거의 완벽에 가깝게 원작을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방울새의 성모〉가 우피치 미술관을 빛내주는 라파엘로의 명작이라면 피티 궁전 박물관에는 〈대공의 성모〉가 있다. 이 작품을 소장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는 워낙 이 성모자상을 좋아해서 어딜 가나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대공의 성모〉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그린 수많은 성모자상 중에서 가장 먼저 그려졌고, 가장 기본적인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또 가장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검은 배경을 뒤에 두고 자애로운 성모는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깔고 있고, 성모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는 관람객을 응시하는 예리함으로 화면을 압도한다. 15세기 피렌체 거장들에게서 르네상스의 영감을 배웠던 라파엘로는 도나텔로의 마돈나 조각과 루카 델라 로비아의 테라코타 조각상의 기본적인 구도를 활용했다.

〈의자의 성모〉, 피티 궁전 박물관 소장
〈의자의 성모〉, 피티 궁전 박물관 소장

피티 궁전 박물관을 대표하는 라파엘로의 작품은 〈의자의 성모〉다. 1514~1515년 사이에 로마에서 그려진 이 작품은 톤도(원형) 양식에 그려진 것으로, 좁은 공간 안에 배치된 성모, 아기 예수, 그리고 세례요한의 모습이 지극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이루는 명작이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체류할 동안 그린 작품 중에서 피티 궁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걸작이 있다. 바로 〈도니 부부의 초상화〉다. 부부를 따로 그렸으니 두 점이 되는 셈이다.

〈아뇰로 도니의 초상화〉, 피티궁전 박물관 소장
〈아뇰로 도니의 초상화〉, 피티궁전 박물관 소장

아뇰로 도니(Angelo Doni)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으로 미켈란젤로에게 〈도니 톤도〉를 주문하여 르네상스 미술사에 그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도니는 장사꾼답게 작품을 마친 미켈란젤로에게 가격 흥정을 다시 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격 고약하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는 가격을 깎자고 흥정을 시도하는 도니에게 오히려 원래 계약금의 두 배를 지불하지 않으면 작품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결국 도니는 미켈란젤로가 요구했던 금액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도니 톤도〉는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달레나 스토로치의 초상화〉, 피티궁전 박물관 소장
〈마달레나 스토로치의 초상화〉, 피티궁전 박물관 소장

어쨌든 도니는 르네상스의 거장인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신예 작가인 라파엘로에게도 작품을 주문했다. 이번에는 아예 부부가 모델로 나섰다. 라파엘로는 분명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서 초상화 기법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주인공인 모델이 작품의 전면으로 앞당겨지고 배경으로 멀리 자연 풍경이 묘사된 구도는 이미 다빈치가 〈모나리자〉 등에서 선보인 구도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다빈치 초상화가 항상 강조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사실주의적이며 단도직입적인 인물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도니 부부의 모습에서 냉정한 사업가였던 남편 도니와 다소곳한 자세로 피렌체 사모님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귀부인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티칸의 서명실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성만찬에 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
바티칸의 서명실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성만찬에 대한 논쟁〉과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체류하는 동안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메디치 가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소개해야 할 유명한 초상화가 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이 처음 배출한 교황과 그의 친척인 추기경들을 그린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이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활동하던 1517년 크리스마스 전후에 제작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교황 레오 10세는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였다.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추기경은 루이지 데 로시(Luigi de’ Rossi, 왼쪽에서 관람객을 응시하는 인물)와 줄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다. 이 작품이 제작되었던 1517년에 추기경에 임명된 로시는 레오 10세의 형이었던 피에로(1416~1469)의 외손자였으며, 교황의 비서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작품의 오른쪽에 등장하는 줄리오 추기경은 장차 교황으로 등극하여 클레멘스 7세로 활동하게 될 인물이다. 로마에서 그려진 이 작품을 피렌체로 옮긴 것도 클레멘스 7세의 결정이었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르네상스를 후원하는 메디치 가문 교황의 모습뿐만 아니라 교황의 성직을 잘 수행하려는 종교적 열망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Renaissance Quarterly, vol. 56, no. 4 (Winter, 2003), pp. 1005~1052.">3)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교황의 왼손이 위치해 있는 《성경》의 구절에 있다. 《성경》의 이 부분은 〈누가복음〉이 끝나고 〈요한복음〉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4대 복음서는 〈요한복음〉이 마지막에 위치해 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를 종결하는 책으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강조하고 있다. 교황 레오 10세의 본명은 조반니, 즉 요한이었다. 비록 그의 이름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성 요한이 아니라 예수의 운명을 예언했던 성 세례요한이었지만, 그래도 라파엘로는 이 《성경》의 오브제를 사용해서 메디치 교황의 종교적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성경》으로 보이는 책 위에 놓여 있는 돋보기는 작품의 주인공인 레오 10세가 독서에 몰두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504년부터 1508년까지 피렌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라파엘로는 새로 교황으로 취임한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향한다. 율리우스 2세의 동생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의 딸이었기 때문에 우르비노 공작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정착한 라파엘로는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교황청의 여러 건물의 프레스코화를 맡겼다. 그리고 그는 바티칸 내부의 서명실(署名室)에 그린 〈성만찬에 대한 논쟁〉, 〈아테네 학당〉, 〈보르고의 화재〉 등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로마에 남아 있는 가장 유명한 라파엘로의 작품은 〈변화산상에서의 그리스도〉일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천재로 불리던 라파엘로는 서른일곱 살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임종했고, 그의 시신은 로마 도심의 판테온에 묻혔다.

 

 

 

 



[Daum백과] 라파엘로 –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김상근,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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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 〈교황 율리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교황 율리오 2세〉

1511-1512, 포플러에 유채, 108.7×81cm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림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는 화가’라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성모자상〉은 너무도 부드럽고 우아해서 완벽한 그림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싶다. 실제로 르네상스 이후부터 인상파가 등장할 때까지 300년 이상 유럽의 미술 아카데미들은 라파엘로를 교본 삼아 그림을 가르쳤다. 오죽하면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라파엘로를 벗어나자’는 취지의 ‘라파엘 전파’가 태동했을까.

그림뿐 아니라 인물도 훤칠하고 잘생긴 데다 예의 바르고 싹싹했던 라파엘로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50명 이상의 도제를 거느린 대형 공방을 운영하며 율리오 2세, 레오 10세 등 교황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 한 장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너무나 많이 걸렸고, 미켈란젤로는 워낙 독선적인 성격인 데다 회화보다 조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교황들이 초상화나 성화, 바티칸의 벽화 등을 청탁하기에 적격인 인물은 늘 라파엘로였다. 라파엘로는 율리오 2세의 뒤를 이은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화도 그렸다. 레오 10세 역시 그를 몹시 아껴서 심지어 추기경 직을 선물하려 했지만, 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의 한창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라파엘로가 불과 스물아홉 살에 그린 이 초상화를 본 당대인들은 초상화가 너무나 실물과 똑같다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라파엘로와 동시대에 살았던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이 그림을 가리켜 “‘실제 교황을 나무판에 그대로 박아 놓은 것 같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라고 기록했다. 초상화 속의 율리오 2세는 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 수염의 길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511년 교황은 교황령의 주요 도시인 볼로냐를 빼앗겼고, 그에 대한 통분의 표시로 수염을 길렀다. 그러다가 1512년 3월 긴 수염을 잘랐는데, 이 초상화에는 수염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 이 그림은 적어도 1512년 3월 이전에 완성된 것이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위대한 작품인 이유는 동시대인들이 보고 깜짝 놀랐다는 점, 즉 ‘실물과 똑같다’는 데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만 해도 왕이나 교황 같은 통치자들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훨씬 ‘젊고 위대하고 아름답게’ 그려졌다. 말하자면 고대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처럼 그리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왕이나 왕비를 잘생기고 아름답게 그리는 데 대해서 “이거 실물이랑 좀 다른데요?” 하면서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대담하게도 율리오 2세를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앙다문 입과 늘어져 실룩거리는 볼 등 초상화 속의 그는 분명히 완고해 보이는 고집쟁이 늙은이다. 실제로 율리오 2세는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황답지 않게 난폭한 성격의 독재자였다. 전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를 쫓아낼 계획을 세우다가 10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한 경력도 있었고 뇌물을 써서 교황이 되었다는 뒷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교황이라기보다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율리오 2세가 이 초상화를 보고 화를 내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율리오 2세는 독재자인 동시에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등을 등용한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리고 라파엘로에게 〈아테네 학당〉을 그리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도 율리오 2세다.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와 친했던 이유가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똑같아서’였다니 그의 성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 베네치아 화파들이 즐겨 사용하던 선명한 원색들에 매료된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몇 가지의 선명한 보색만을 사용했다. 즉, 교황이 입고 있는 붉은색과 흰색의 옷, 진한 녹색의 배경, 그리고 금빛 의자가 그것이다. 원래 라파엘로는 벽에 정교한 금색 무늬를 그려 넣을 생각이었고 실제로 반쯤 무늬를 그렸으나 도중에 생각을 바꾸어 벽을 모두 녹색 커튼으로 칠해 버렸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에 무늬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제된 색채를 사용한 덕분에 초상화는 강렬하면서도 현대적인 인상을 풍긴다.

라파엘로는 이 초상화 속에 율리오 2세의 독특한 성격, 강하고 다혈질인 성격을 은밀하게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림 속의 교황은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의 양손을 보면 갖가지 총천연색의 보석 반지가 여섯 개나 끼워져 있다. 또 그는 교황이 앉은 의자의 기둥을 도토리로 그리는 재치를 발휘하기도 했다. 율리오 2세의 원래 성(姓)인 ‘로베레(Rovere)’는 이탈리아어로 참나무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화가는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를 의자 기둥으로 만들어 “교황님이 원래는 로베레 추기경이었어요” 하고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또 교황이 입은 옷자락의 세밀한 주름, 모자와 의자 등의 묘사는 라파엘로가 동시대의 플랑드르 화파 화가들이 구사한 정교하고 사실적인 테크닉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간소하지만 강렬한 느낌의 이 초상화는 후대 화가들이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등은 라파엘로의 영향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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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차니, 미술범죄 모아 범죄소설 연상시키는 스토리텔링
명성·복수·자존심 등 배경 파헤쳐 
미켈란젤로도 처음엔 천재위조꾼… 진실과 거짓의 미적 관점 제시도
 

위작의 기술 책 사진
위작의 기술

노아 차니 지음ㅣ오숙은 옮김
학고재 | 352쪽ㅣ2만2000원


미국 작가 도나 타트의 2014년 퓰리처상 수상작 '황금방울새'를 읽다 보면, 이 작가 최고의 재능이 소설에 있는지 아니면 고미술 보존과 복원에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국 출신 미술사학자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노아 차니(38) 교수의 '위작의 기술'은 반대 경우다. 예술가인지 사기꾼인지 모를 위조 전문가들의 모험 혹은 추락을 읽다 보면, 이 책이 참고문헌과 각주 넘쳐나는 진지한 미술서인지 아니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범죄스릴러인지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기법을 차용한 미술 범죄 사례집으로 분류해도 좋을 이 책에서 우선 벨기에의 반 데르 베켄(1872~1964)을 호명해 보자. 브뤼헤 미술관이 2004년 그를 주제로 '가짜인가 아닌가' 전시회를 열었을 만큼 인정받은 복원전문가. 특히 얀 반 에이크(1390~1441) 등 15세기 플랑드르 거장들의 작품이 '전공'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만든 작품은 '헨트 제단화'. 1432년에 완성된 이 초대형 유화는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말의 눈에 반사된 햇빛부터 학문적 분류가 가능할 만큼 섬세하게 묘사한 식물까지, 현미경의 세밀함을 과시하는 열두 폭 대작이다. 그 명성 덕일까, 탓일까. 600여 년 동안 13번이나 부분적 도난과 회수를 반복했고, 1934년에도 열두 폭 중 하나인 '정의의 재판관' 패널이 사라졌다.
 
라파엘로의 ‘유니콘을 안은 여인’(1506).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이 그렸던 원작에는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파엘로 사후 누군가 여인 품에 애완견을 그려 넣었고, 더 나중에 누군가 또 뿔을 덧붙였다는 사실을 현대 과학이 밝혀냈다. 유니콘은 처녀에게만 접근을 허락한다는 전설이 있다. 은유와 상징 없는 여인의 초상은 아무리 라파엘로 그림이라도 범작의 하나일 뿐. 그림값 추락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라파엘로의 ‘유니콘을 안은 여인’(1506).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이 그렸던 원작에는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파엘로 사후 누군가 여인 품에 애완견을 그려 넣었고, 더 나중에 누군가 또 뿔을 덧붙였다는 사실을 현대 과학이 밝혀냈다. 유니콘은 처녀에게만 접근을 허락한다는 전설이 있다. 은유와 상징 없는 여인의 초상은 아무리 라파엘로 그림이라도 범작의 하나일 뿐. 그림값 추락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학고재
그 와중에 베켄은 사라진 패널을 복제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무렵 사라진 걸작의 소재를 안다고 고백한 증권 중개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죽은 자와 베켄의 인연에 대한 증언이 스멀스멀 등장한다. 거듭되는 반전. 이번 차례는 베켄이 복원한 '정의의 재판관'에서 수백 년 된 균열과 고색(古色)이 발견되었다는 후배 전문가들의 감정이었다. 자신이 훔치고, 죄책감에 못 이겨 복원을 선언했던 것일까. 주장은 갈렸고, 베켄은 고백 없이 죽었고, 진위는 다시 미궁으로. 대신 복제화일지 진작(眞作)일지 모를 패널 뒤에서 뒤늦게 발견된 시 한 편이 상상의 불길에 기름을 얹는다. '사랑 때문이었네/ 그리고 의무감에서/ 그리고 복수를 위해/ 교활한 붓질은 사라지지 않았네'(반 데르 베켄, 1945년 10월).

현대인은 보통 위조 사건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니 교수는 돈이 첫 번째 목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했다. 베켄의 시에 '복수를 위해'라는 구절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자신을 업신여긴 미술계에 복수하고 명성과 찬사를 쌓는 것이야말로 위조꾼이 위조에 첫발을 담그는 이유라는 것. 그렇다면 천재성과 범죄성을 가르는 기준이야말로 얼마나 모호한가.

이때 차니가 호출한 인물이 미켈란젤로(1475~1564)다. 이 위대한 천재예술가의 첫 이력은 위조꾼이었다는 것. 스물한 살 때인 1496년에 제작한 대리석 조각상을, 3세기 무렵 헬레니즘 청동 조각상 '잠자는 에로스'로 사칭했다는 것. 일찌감치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 세상에 '복수'했던 것일까. 하지만 아이러니는 이제 시작이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컬렉터 리아리오 추기경이 '잠자는 에로스'를 중개상에게 반납한 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피에타'로 당당히 스타가 된다. 추기경은 이 '천재 위조꾼'에게 두 작품을 더 주문함으로써 머리 숙였다고 한다.
 
폴 고갱의 라일락(1885). 오른쪽은 작자 미상의 ‘라일락’ 모작.
폴 고갱의 라일락(1885). 오른쪽은 작자 미상의 ‘라일락’ 모작. /학고재
오해 마시라. '위작의 기술'이 위조에 대한 옹호는 아니다. 미술사 전체를 오염시키는 위작과 위조꾼에 대한 비판이 이 책의 전제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절도나 약탈 혹은 폭력 같은 중범죄와 달리, 미술품 위조는 기껏해야 부유한 개인과 기관 같은 얼굴 없는 개인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것 아닐까. 명성, 돈, 복수, 권력, 천재성, 자존심 등이 불규칙하게 빚어내는 욕망의 아이러니. 수집가의 허영과 빈약한 감식안의 격차가 만들어낸 부조리랄까.

이 책에는 '자존심' 항목이 있다. 그 사례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폴 게티 미술관이 등장한다. 이 부자 미술관이 무려 1200만달러(약 140억원)를 주고 1985년에 사들인 쿠로스(청년 등신상·等身像). 기원전 530년 그리스에서 만든 걸작으로 알고 샀지만, 기껏해야 100년 안쪽 대리석을 깎아 만들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속속 제출되고 있다. 하지만 게티는 확증은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천경자·이우환 화백 작품의 진위 논란을 지켜보며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면, 소심하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도 좋지 않을까.

평생 위조와 날조에 관심을 가졌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1932~2016)는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그 역도 성립한다. 거짓을 모른다면 진실 역시 알 수 없는 법. 수면 위는 범죄소설을 읽듯 흥미진진한 독서 체험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진실과 거짓에 대한 당신의 사유(思惟)를 확장할 수 있는 철학적 체험이기도 하다.
 
/ⓒ 조선일보 어수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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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방은 네 개의 방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방 하나하나가 모두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이로스쿠리의 방이라고 부르는 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과 엘리오도르의 방 사이에 공간인데 원래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라파엘로의 방은 원래 네 개인데 이 방까지 포함해 다섯 개로 착각한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은 그림이 취해 네 개인지 다섯 개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이곳에 있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두 지웠는데 다행히 천장화는 남았다 하네요.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의 방에서 라파엘로는 죽을 때까지

그의 역량을 마음껏 뽐내었던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짧은 딱 37년간만 살았던 라파엘로의 삶은 신이 필요해 천상의 세상에서

긴요하게 사용하려고 빨리 데려갔을까요?

정말 미소년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라파엘로가 아닌가요?

 

 

만약, 신이 라파엘로의 능력을 하늘나라에서 요긴하게 사용하려고 일찍 데려갔다면,

그럼 89세까지 살았던 미켈란젤로는 하늘나라에서 전혀 도움도 되지 않고 필요 없는 예술가였을까요?

미켈란젤로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무덤 속에서도 기겁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을 겁니다.

위의 사진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한 미켈란젤로의 초상화입니다.

워낙 지독한 노인네라고 귀신도 무서워 감히 가까이 접급하지 못했나요?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빼어난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더불어

3대 거장이라 하더군요.

그러나 당대에 조각, 건축 등 다방면에 활동했던 두 사람과는 달리 라파엘로는

오직 회화 분야에만 두각을 나타냈다지요.

특히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여러 가지에 비교 대상이었다 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작품활동을 많이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아주 잘 생긴 얼짱에 집안 좋고 사교성도 좋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미켈란젤로는 89살까지 오래 살았고 성격 또한 그늘져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외모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네요.

 

게다가 교황이 월급을 제 날자에 주지 않는다고 그리던 그림을 팽개치고 피렌체로 돌아가기도 했고

시에나 두오모와 계약하고 만들던 조각이 완성되기도 전에 피렌체에서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자

중도에 슬그머니 사라져 다비드상을 만들기도 했지요.

 

 

위의 사진 중 오른쪽은 미켈란젤로가 만들다 만 빈자리로 아직도 그가 돌아와

완성해주기를 바라며 남겨놓았습니다.

바로 다비드상을 만들기로 몰래 계약하며 위의 조각상을 만드는 도중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네요.

돈 없이 초연하게 살아갈 수는 없지만, 너무 이재에 밝아 계약조차도 쉽게 접어버린다면

그리 좋은 인성은 아니지 싶습니다.

 

 

서명의 방은 율리우스의 개인 서재이자 사무실이었다는데 나중에 이 방의 용도가 서명의 방이라

불렀다는데 교황은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한 고전과 인문주의를 중요시해 인간지식의 4대 영역인

신학, 철학, 예술, 법학을 주제로 한 벽화를 프레스코화로 그려줄 것을 요청함으로

사면 벽에 각각 네 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지게 되었다네요.

 

 

네 군데 프레스코화는 신학(성체논의), 철학(아테네 학당), 법학(기본적 신학적인 덕목 그리고 법)

예술(파르나수스)이라네요.

서명의 방은 교황들이 서류에 결재하며 서명하던 방으로 라파엘로에게

제일 먼저 천장화를 그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곳 프레스코화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이라고 합니다.

 

 

오늘까지 라파엘로의 네 개의 방을 모두 보았습니다.

사실, 그림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냥 보는 것은 바라보았지만,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종교적인 그림이 많이 종교가 없는 佳人에는 그 나라 말도 모르고

식당 메뉴판만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방들에는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와 피엘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의 그림도 있답니다.

이 방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교황에 선출된 후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거처를 장식할 새로운 벽화를 그릴 화가를 당시 산 피에트로 성당의 총감독이었던

브라만테에게 부탁했고 그는 같은 고향의 새카만 후배로 당시 25살의 젊은 화가 라파엘로를 소개함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미덥지 못해 반신반의했지만, 제일 먼저 서명의 방에 그린 그림을 보고 나머지 방도

모두 새로 그려달라고 했다네요.

이렇게 차례로 엘리오도르 방을 그렸고 마침 브라만테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산 피에트로 성당의 총감독까지 맡았답니다.

어찌 보면, 라파엘로를 세상의 유명인을 만든 것은 고향 선배 브라만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싶습니다.

 

 

바쁜 가운데 보르고 화재의 방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트누스의 방을 그리던 중 완성하지 못하고

37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림은 중단되었으나 그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 등이

마무리했다고 하네요.

그러니 제일 먼저 만나는 콘스탄티누스의 방이 바로 마지막 유작이며 미완성의 그림을

제자들이 마무리했다는 방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혹시 바티칸 박물관을 가려고 계획하시는 분이 계시면 미리 공부는 필수라는 느낌이 듭니다.

종교인이야 그림을 보고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무신론자는 의미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예술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겠지만,

佳人처럼 무지한 사람은 미리 예습이라도 해야 좋지 싶네요.

그러나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에 우리 같은 사람도 다녀왔습니다.

 

 


[Daum백과] 라파엘로 산치오 〈교황 율리오 2세〉 – 런던 미술관 산책, 전원경,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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