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인격이 있고 또한 독특한 개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시인의 인격은 시에서 주로 튼튼한 골격을 이루며 남달리 독특한 개성은 또한 피와 살과도 같은 시적인 언어들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일찍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이라는 저서에서 <<인문적 사실주의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 지식에 대해 깨여있는 불안한 의식이다>>고 설파한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우리 이 시대의 시인들은 <<위대한 무당>>들임이 틀림없다 .어찌보면 지극히 단순한 자신의 은밀한 아픔마저도 가끔 시대적인 아픔으로, 영위되여 가고 있는 삶의 지혜와 그러한 끊임없는 모험, 자아해탈과 자아 모순속에서도 악착스레 갈구해가는 영구불멸적인 정신적 해탈, 어쩌면 한낱 허무와 공허의 불안함, 그러한 요소마저도 시인자체의것만이 아닌 시대적인 것으로 가끔 승화시켜놓고 거기에 쟁쟁한 공명을 이끌어내여 치유의 엔돌핀으로 증오와 사랑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노래 부르고 서슴없이 고백하여가는 ㅡ 솔직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들을 십여일전 이메일로 받아놓고 무엇을 쓸가? 어떻게 쓸가? 여러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오늘에야 비로소 필을 든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탈변을 시도로 굵직한 몸부림이 돋보이는 근작시들을 차례대로 하나하나씩 읽어보기로 하자
절충을강요하는무형(无形)속의새로운이중관념
묻지 않으리
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바라만 보리
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상처를 들고 상처를 찾지 않으리>>전문이다
일찍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 승화하여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의 전반 과정으로 보았다.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수선화는 굳이 이름 불러주지않아도 스스로 아름답다>> <<나는 조선토종이외다>> 등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륙속 출품시켜 한때 조선족시단을 나름대로 풍미했고 심플하게 러시 아워까지 이끌어 냈던 한영남시인의 전반 시적 풍격을 꼼꼼히 살펴보면 리드미컬하게, 혹은 한결같이ㅡ 세찬 파도나 거친 풍랑, 외재적인 그러한 바다와는 거리가 멀게 항상 내재적인 미가 더욱 돋보이도록 돌돌돌 맑고 깨끗한 시내물 과도 같이 잔잔하게 흘러오다가도 불쑥 시적 공명을 크게 울리는 그런 특징이 있었다 . 그런 한시인이 요즘 들어 근작시에서 절충에 절충을 강요해가면서 이중관념적인 여러가지 단시들로 지금 필자를 깜짝 놀래우고 있다. 도합 2련으로 나뉘여진 이 시의 제1련 /묻지 않으리/상처를 찢는 또 다른 상처가 될가봐/ 에서 볼수 있다싶이 누구나 쉽게 직시할수 있는 피크(顶峰)된 시인의 상처, 즉 유형(有形)과 무형(无形)의 비좁은 삶의 공간을 비집고 나와 어마어마한 전률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하는 클로즈업된 시인의 아픔과 그러한 상처자국들ㅡ어쩌면 필자나 독자들로써는 감히 그 깊이나 너비마저 예측할수 없는 삶속의 희노애락과 애환이 절절히 느껴지게끔 하며 특히 제 2련은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만 보리/그저 말없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빛으로/ 결속되여 이 시는 곱씹어 읽을수록 꼭 무엇이라 이름할수는 없지만 잔잔한 울림이 변두에서서부터 시작되여 점차 중심으로 모아지는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그럼 아래에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하는 다른 두수의 단시도 조심스레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저녁황혼
놀
타네
늘
붉네
인생
울어라 바다가 넘쳐나도록
웃어라 하늘이 흔들리도록
여기서 <<저녁황혼>>은 도합 여섯글자로 그나마 1, 2련으로 나뉘여졌지만 <<인생>>은 고작 두개 련뿐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저녁황혼>>은 보다싶이 제목자체가 그냥 <<황혼>>이여도 무방하려만 특별히 <<황혼>>앞에 <<저녁>>을 덧붙여 시간적인 개념이나 강조의 뜻을 강하게 크게 나타내려고 하였음이 엿보이고 <<인생>>은 어쩌면 아무렇치도 않게ㅡ 혹은 대수롭지도 않게 쉽게 씌여진듯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울음>>과 <<웃음>>, <<바다>>와 <<하늘>>, 그리고 재치있게 형용사 <<넘쳐나도록>> <<흔들리도록>>이 존속적인 결속어로 붙어있어 곱씹을수록 만만찮은 이미지즘을 이루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어쩌면 한영남시인이 자신의 한계라고 느껴지는 시적탈출구를 이번 근작시들에서 절충과 이률배반적인 모험으로 새롭게 헤쳐나가가려 하는 그런 과감한 행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일찍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것임>>을 보여주고저 철학가이며 정치가였던 폴 미셀 푸코는 전생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결국 <<지식을 팔아먹는 사람>>이라는 온갖 비난과 모욕까지 다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아주 겸손한 하나의 사고방식만을 우리들에게 제시하여 준적이 있다. 그러한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까닭은 오늘도 개혁의 행보는 매 한발자국마저 조심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로도 될수 있을것 같다 . 예술의 소외는 억압이 아닌 승화라고 말한 학자가 있다. 이렇듯 한영남시인의 새로운 행보, 즉 새로운 시도는 지속적일지 아니면 계획적인 잠시적 은페일지는 우리모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지켜보아야 할것만 같다.
지성의씨앗, 그리고균열의사고속에서건져보는자연과삶의찡한감동
<<천재는 모든 사람을 닮아 있지만 아무도 그를 닮을수 없다>>는 말이 있다. 비범한 자질은 시인으로 하여금 몸담그고 있는 사회나 어떤 현상에대하여 가끔 강렬하게 반응하게 하고 또한 기대 이상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상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불쑥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시되는듯한 그러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며 가끔 병적인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여기에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시인들은 작품을 창조하고 산고(产苦)하는 세월을 보내야 하는 그런 운명이기도 하다. 예술분야에서, 특히 언어예술부문에서 시인의 경우 그런 비극적인 음영은 더욱 짙으며, 그러한 비극의 중심에는 항상 광기의 그림자가 손을 드리우고 있다…p 브르노의 말 한마디를 개조하여 인용해본다.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지성의 씨앗을 근본으로 균열이 불러온 한(恨)과 상처문학의 계승이고 전승>>이라고 하여도 아마도 무방할것 같다. 조금 더 진부하게 첨부되였고 나름대로 더욱 깊이 있게 느껴지는것은 삶과 자연속의 새로운 마찰속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그 애절하고도 가슴이 찡한 감동, 즉 뼈에 맺혀 아픔으로 여린 가슴에 되 돌아 울려오는 그런 공명감이 더욱 커진듯한 느낌이 든다. ㅡ 그럼 아래에 잔잔한 서정을 배경으로 하여 인문적 휴머니즘품격을 고차원으로 승화시켜 놓은 한영남시인의 시 몇수를 우리 함께 더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오월
오후
해가 줄 볕 다 주며
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
멀리
저리
하느작이는 풀잎들은
연초록 아니라도 좋으련만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
푸른 하늘 걸려 시름없고
휘이
휘이
바람 부드런 손
내 땀이마 쓸어주는데
이일
저일
고향 옛일들 떠올라
울어버리고 싶네
<<오늘은 울고싶어라>>전문이다
이 시의 제1련에서 텍스트의 모티브로 추정이 되는 /오월/오후/해가 줄 볕 다 주며/느릿느릿 서산가 머물고/는 재치있고 간결하게 설정한 환경묘사가 남달리 돋보이며 <<해와 볕>>이 시적화자로 대두된 이 시의 잔잔한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제2련에서 별로 큰 소망도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소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하느작이는 풀잎은/연초록이 아니여도 좋으련만/에서는 여리고 깨끗한 시인의 고백이 읽는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도 하며 특히 3련에서 /하필/ 하얀/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에서 <<해 볕>>은 잠시 전략적으로 굴절되여 있고 /구름들이 또/푸른 하늘에 걸려 시름없고/로 다시금 이미지를 집중시키였다가 마침내 제 4련에서는 벌써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휘이/휘이/바람 부드러운 손/내 땀이마 쓸어주는데/로 단단히 초점을 모아놓고서 마침내 제5련에서 /이일/저일/고향 옛일들 떠올라/울어버리고 싶네/로 <<울고싶은 심정>>을 극대화시킨다. 모두 알다싶이 제목자체가 <<오늘은 울고싶어라>>이고보니 시적화자가 견인해낸 <<고향의 이런저런 옛일들>>은 시인을 울리기에 너무나도 충족하며 더불어 읽는이들의 가슴까지도 툭툭 건드려 공명감을 생성해가는 그런 효과음이 큰것 같다. 부킹된 휴먼드라마는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더더기 하나없이 간결하면서도 운치가 철철 넘쳐 흐르는 이 시는 아마도 필자로써는 오랜간만에 읽어보는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1967년도생인 한영남시인은 양띠, 필자보다는 한살 이상 , 한영남시인에게는 아마도 남들이 아직 알지못하고 있는ㅡ 어쩌면 시인 혼자 평생을 울어도 결국 다 울어버릴수 없는 그런 가슴 아픈 옛이야기들과 아직도 굴벰이 죽죽하도록 아리고 쓰린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느날 흐르는 눈물이 말라
내 앞에 놓인 접시에
한줌의 소금으로 고스란히 놓인다면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
사랑의 이름뿐이 아닌
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이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
혼자 아프지도 아니하도록
두 손 모아 매일 기도하며
내 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그냥 드리겠습니다
하얀 소금으로 당신곁에 남겠습니다
<<마른 눈물 한접시>>전문이다
눈물이 말라 한접시의 소금을 완성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고 또한 얼마만큼 애간장을 태워야 할지 필자로서는 알수조차 없지만 그렇게 완성이 된 눈물의 소금 한접시를 시인은 결국 /아직은 짠맛 모르는 당신에게 꽁짜로 그냥 드리겠다/고 고백한다. 특히 5행과 11행사이에서 /상처의 이름뿐이 아닌/사랑의 이름뿐이 아닌/긴 세월 그 이름으로 모두 드리겠습니다/로 재강조하여놓고 /살아가면서 더는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환자처럼 /아프지도 아니하도록/두 손 모아 기도하며/내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를 /결속구인 제일 마지막 두련에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를 당신께 다 드리겠습니다/하얀 소금으로 그냥 당신곁에 남겠습니다/고담담히 마무리한다. 여기서 하얀 소금은 말그대로 쓰나미처럼 하얗게 가슴에 다가와 읽는이의 가슴마저 너무 쓰리고 아프게 한다. 한수의 시에 왜 이처럼 많은 독자들이 웃고 또 우는지 한영남시인의 이번 시를 읽으면서 조금 알것도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면
세상 열리나
오면
세상 닫히나
열흘
열사흘
한해
두세해
맨날
그리다
행여
만나도
말도
못하고
손도
못잡고
그냥
그리움밖에
끝내
서글픔밖에
가면
세상 깨지나
오면
세상 터지나
<<미웁다가 그리웁다가>>전문이다
간다고 허망 열릴 세상이 아니고 온다고 쉽게 닫힐 그런 세상이 아님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인의 각도로 살펴보는 허무와 공허의 불안한 요소들, 즉 가상적인 현실속에서 어찌보면 어젯날 이룰수 없었던 열련과의 뜻깊은 상봉, 혹은 그러한 갈구를 특히 3,4,5련에서 /맨날/그리다/행여/만나도/말도/ 못하고/손도/못잡고/그냥 /그리움밖에/끝내/서긑픔밖에/에서 시인의 특수한 애증표달을 표면만이 아닌 내면속의 진지한 감정으로 곧바로 승화시켜놓고서 제목자체에서 이미 독자들의 머리속에 미리 각인시켜놓은 <<미웁다가 그리웁다가>>을 자연스럽게 떠올려가면서 결국 /세상이 깨지나/세상이 터지나/로 이미지 총집합을 시도한듯한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무리하면서
력사는 련속적이면서 동시에 불련속적인 특성을 띤다 . 이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중에는 이외에도 <<너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면 용서가 될가>> <<고향은 내가 울바자에 오줌을 싸도 나무라지 않았네>> <<거기에 추억은 울바자처럼 서있었네>> <<물덩이들의 반란>> << 래일에 눈길 걸어두고>> 등등 여러수의 시가 더 있지만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 필자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상 몇수의 시에서 살펴볼수 있는바 한영남시인의 근작시는 어쩌면 모험을 시도로 점층법과 겹쳐그리기 기법으로 완성 된것이 많으며 대부분 시들이 또한 한폭의 작은 우주를 손바닥우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음미와 감상의 긴 여운으로 길게 남기려하는 시인의 대담한 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더불어 오래도록 지속되여 온 구조주의적 모더니즘 사색에서 새롭게 탈출해보려는 시인의 굵직한 몸부림을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 우리 다 함께 여기서 모더니즘 특성과 그 일곱가지 개념을 조심스럽게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모더니즘은 도시주의를 지향한다. 보들레르의 파리, 조이스의 더블린, 엘리어트의 런던, 도스패소스의 뉴욕 등등은 대체로 모든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이 아닌 도시적 삶의 문제를 형상화로 하였다.
둘째, 모더니즘은 공업기술주의를 지향한다. 기술세계란 도시적 삶의 토대라고도 할수 있다. 특히 립체파, 미래파, 다다이스트들이 무엇보다 강조한것이 기술성이다.
셋째, 모더니즘은 기술세계가 보여주는 그런 특성과 관계가 있는 비인간화를 지향한다. 비인간화는 오르테가 익가세트에 의해 현대예술의 기본개념으로 리론화된적이 있다.
넷째, 모더니즘은 원시주의를 지향한다. 원시주의란 추상화 된 삶, 현대시의 기본원리로 나타나는 은유나 상징 등도 이런 맥락우에 서 있다.
다섯째, 모더니즘은 에로티시즘을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의 과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갈등을 해결함에 있었다
여섯째, 모더니즘에서 읽을수 있는것으로는 반도덕성을 들수 있다. 이른바 도덕률을 페기하는것은 현대미학이 삶의 도덕적 기초의 와해에서 출발하기때문이다.
일곱째, 모더니즘은 실험주의를 지향한다. 시간적 질서에 대한 회의, 따라서 모든 시간성을 공간으로 인식하려는 동시성의 개념이기도 하다.
시는 엄격히 말해서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따라서 시에 대화의 양식을 활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도 하다. 시에서 이중적구조법과 다성적 언어를 사용하면 곧바로 전통적인 시 쟝르의 해체라는 문제와 우리는 맞닥뜨리게 된다.아무튼 한영남시인의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이번 시적 행로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해 본다.
심양에서 2014년4월26일
发表于黑龙江新闻 7月11日第2版
전체 [ 9 ]
9 작성자 : 철리
날자:2014-06-10 09:58:33
창렬선생님의 진정 어린 <답신>에 감사합니다
님이 거론하신 시인들, 특히는 중년시인들, 조선족시단에서는 다 이름 있는 분들이 맞습니다, 저도 그들의 재능을 인정합니다.
사실 저는 근년에 나이 들어 시공부를 다시 좀 하면서도 문학에 정진하지는 못하고 취미로 좀 써보는 시애호자로서, 그저 그런 수준에 누구를 어떻다 말할 자격도 없으며 남들이 다 보는 댓글에다 남을 내리깎는 그런 못난 짓은 안합니다.
아무리 익명으로 쓰는 댓글이지만 누구를 마음 아프게 비하하거나 헐뜯고 인신공격하는 못된 짓을 말입니다...
나중에 허선생님에게 꼭 련계를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8 작성자 : 허창렬
날자:2014-06-09 13:04:07
두분께먼저감사하다는말씀올려야할것같습니다.제가보건대중국조선족제1대로시인들로는(해방전을포함하지않음)아마도김성휘,조룡남,리상각,리삼월등이런시인분들인것같습니다.특정된시대의아주특징적인오묘한시들을써오신분들ㅡ허나개혁개방과더불어제일먼저개혁에앞장섰던분들로는김정호한춘최룡관시인님-이들중에서특히최룡관시인님은<<이미지시창작리론>>을완성시켜적잖은센세이숀을불러일으켰으며개혁파거장으로우뚝자리매김을한것같습니다.제2대시인(여기서는 주로 개혁개방이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인들을 말하려 합니다)들로는 아마도 석화, 김학송, 리임원, 리성비 등등 시인들인것 같습니다 . 석화시인의 <<나의 장례식>> 감학송시인의 <<예감의 새>>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 <<하늘에게>> 그리고 리임원시인의 <<바람에 길을 물어 >> 리성비시인의 <<이슬 꿰는 빛>>이 이 모든것을 충분히 설명하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제3대 시인들로는 김영건 , 김승종, 한영남, 조광명, 등등 이런 시인들이 아닐가 생각됩니다. 김영건시인의 경우 시를 아우르는 령역이 넓고 거창하며 김승종시인의 경우 실험적인 모험정신이 누구보다 돋보이며 한영남시인의 경우 한과 상처문학을 계승 발전시켜 대표작이 제일 많으며 조광명시인의 경우 불교문화를 시속에 접목시켜 시적인 령역을 넓혔다고 할가요 . 허나 이들의 근작시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한계가 느껴집니다. 왜 그럴가요? 그 답안을 저는 김철호시인의 포스트모더니즘 접목에서 찾을수 있을것 같다고 확신합니다. 즉 하이퍼텍스트ㅡ아직 허다한 학자, 시인들이 하이퍼시하면 반대하는 양상이 있는듯 하신데 그럼 여기서 노벨상 수상자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의 <<기상도>>와 조향의 <<바다의 층계>>를 잠간 살펴 봅시다
기상도
시월 바다가 신기루 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바다의 층계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 뽄 다리야>>
<<마주르카>>
<<디젤엔징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우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것이 시가 아니라면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가 어떻게 노벨상까지 받았을가요 ? 이번 평론에서 저는 한영남시인의 모험정신을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평론중에 <<이렇듯 한영남시인의 새로운 행보, 즉 새로운 시도는 지속적일지 아니면 계획적인 잠시적 은페일지는 우리모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심스레 지켜보아야 할것만 같다.>>고 하였고 <<저녁황혼>>은 좋다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합시다. 여기 댓글에서는 여러모로 이야기하기가 불편한듯 합니다.<< 598219950 日光普照>> 저의 qq입니다. 앞으로 우편함에 두 분의 고귀한 의견 엽서로 보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그때 가서 저의 전화번호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선배들로서ㅡ 형다운 형들로서ㅡ 따끔한 귀띔을 자주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럼 내내 행복하시고 오래오래 건필하세요 심양에서 허창렬 올림
7 작성자 : 힘내세요
날자:2014-06-08 13:27:49
6번님의 말이 좋은 같습니다. 우리 의 견해를 동감해주니 기분 또한 좋습니다.허창렬님은 아주 대바르고 정직한 면이 있어보여서 호감이 많습니다.보건대 허창렬님은 시를 아주 사랑하고 시에 아주 집착하고 있는 같습니다. 연변에 이런 분 아주 드물지요. 두루두루 보니 시에 집착하는 분을 헤여보니 거퍼 10명두 되나마나합니다.어떤 분들을 시에 집착한다고 하는가 하면 십몇년 수십년 하루도 빠짐없이 시만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이런 분들을 제가 직접목격해봤으니깐요 ㅎㅎㅎ .허창렬님은 앞으로 위대한 시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저명한 시인정도는 될같습니다(절대 풍자가 아닙니다).왜냐하면 마음 바르고 시에 아주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시에 끈질긴노력에 집착하면 이제 아무때건 하느님의 보살핌을 꼭 받을겁니다.허창렬님! 발전하려면 고집은 금물이란걸 미리 귀띔해주고 싶습니다(물론 님은 고집부릴사람 같지 않구요 ㅎㅎㅎ)힘을 내십시오!
6 작성자 : 철리
날자:2014-06-08 09:40:53
저 역시 조글로 글까페에서 허창렬선생님의 글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시에 대한 연구가 깊고 사람이 대바르고 베짱이 있어보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아래 분과, 두분의 시에 대한 토론분위기가 좋습니다
저는 그 누구와 시에 대한 쟁론에는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의 관점을 말할뿐.
저는 전통시와 현대시 그 중간을 좋아합니다.
그 중간을 일컬어 문학적으로 무어라 명명하는지는 몰라도. (어느 분이 알려주시죠)
그래서 두분의 주장에 다 수긍이 갑니다.
저는 너무 난해한 시는 거부합니다.
시는 그래도 읽고서 그 뜻을 감지할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최룡관선생의 사람신체에 대한 시를 읽고는 탄복하였습니다...)
저는 철학이 깔려있는 시를 좋아합니다.
시속에 철리가 있다는 말 역시 시적발견이라는 말과도 통하겠지요
그래서 저 역시 리삼월의 시를 좋아합니다.
손 쉽게 리삼월의 단시 한수를 올립니다.
<인상파 예술가의 녀조각상>
그녀는 라체조각상/ 말썽 많은 세상/
호수가에 큰 엉덩이 내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머리가 있었지만/ 얼굴은 없었다.
5 작성자 : ㅎㅎㅎ
날자:2014-06-08 06:48:06
리상각선생님의 시 리삼월선생님의 시 등 좋은 시들이 많다봅니다. 그리고 리욱의 시 등 저는 이런 분들의 시를 좋아합니다.
발견이란 한마디로 일반사람들이 미처생각해내지 못한 생각을 해내는것이 발견이 아니겠습니까?
일반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적인 생각을 시로 적는다면 시를 쓰나마나합니다. 그리고 발견없이 시를 쓰는 이들의 대채적인 공통점은 자기시를 암송하지못한다는것입니다.심지어 자기가 어떤 구절을 어떻게 되여 썼던지 도무지 기억도 안되는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상각선생님은 저기의 수많은 시들을 왕왕 암송내여 읊습니다.그래서 탄복하는겁니다.발견도 없이 황당하게 쓰는 이 뚱단지말로 홍두깨를 내미는 이 몽롱하게만 쓰는이 이런분들께 한번 시험해보시라요 , 자기시를 암송할수 있는지 ? 남의 시라면 더더욱 암송하지도 않거니와 기억도 안 될겁니다.그러길래 발견이 중요하거니와 발견이란 신성시해보이기 합니다. 발견은 하늘이 주시는 겁니다.우리 시인들 발견없이 시쓰기에 습관된 이들 불알떼여놓고 장가드는격이 아닐가요?ㅎㅎㅎ
4 작성자 : 허창렬
날자:2014-06-07 14:02:59
선생님이이야기하시려는뜻은알만합니다만무엇이<<발견>>이고무엇이<<태산>이라는건지너무애매모호하시군요. 이상은 29세에 요절하였지만 지금도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좋은 시들을 후세에 남겨놓았습니다. 시란 전통시든 현대시든 <<누구나 읽고나면 쉽게 알것만도 같으면서도 좀체로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것이 좋은 시>>라고 생각됩니다 . 한영남시인의 시가 선생님께 스트레스를 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선생님의 시 두편 여기에 올려 주십시요. 어떤 시가 << 발견>>이 있고 <<태산>>을 넘어서려 하는 시인지 무척 궁금하고 감상하고 싶어집니다. 그럼 부탁 드릴게요. 기다리겠습니다 허창렬 올림
3 작성자 : 태산이 험난해도
날자:2014-06-06 21:17:47
우의 시들을 비롯해서 한해에 조선족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을 죽 보십시오.거이 99%가 발견이 없거나 발견이 미미한 작품들입니다.우리 조선족시인들의 앞에는 발견이란 이런 태산이 앞을 가로 막고있습니다.그 태산이 험난해도 톺아 넘아가야 합니다. 넘어가자면 몇년 혹은 몇십년 혹은 한평생 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허다한 시인들은 그 태산을 넘기 싫으니깐 에돌아 갑니다.에돌아 간다는것이 왕왕 왜지밭으로 가기가 일쑤입니다. 례하면 황당한 비유라든가 몽롱한 표현들이거나 아니면 뚱단지같은 말로 불쑥 홍두깨를 내민다든가 하여튼 벼라별 지랄을 다 쓰고 있습니다.그래서 읽어보면 기억이 안되고 읽고난후엔 마음이 개운하지도 않고 오히려 왁작 스트레스가 오기까지 합니다.시를 써서 독자들을 흥분시키기는 커녕 작자자신마저도 슴슴해하는 시는 아예 쓰지 않는게 좋을 같습니다.
우선 허창렬님의 끈질긴 시 탐구정신에 탐복합니다.우에서 여러 시들을 평했는데 필자가 보건대 잘 된작품이라 말하기엔 좀 그렇습니다. 시란 몇십초사이에 읽어보고 그 짧은 순간에 그 형상이 독자의 머리속에 남아야합니다. 이러길래 시를 성곡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는겁니다.허창렬님한테 묻겠지만 우의 시들을 보자마자 돌아서서 암송은 말고 그 내용이 도무지 앚혀지지않은 형상으로 기억할수 있는지요? 그저 수수한 사유에 머물면 그것이 관습니돼버려서 돌파적사유를 하지 못한다봅니다.짧은시의 단점장점을 보면 단점이란 바로 꼬리대가리없은 시로 되기 십상입니다.시의 성공의 여부는 그 시가 독자더러 기억하지 말래도 자연히 기억되게하는데 그 성곡의 비결이 있습니다. 우의 시들은 그 셩지에 미치는지? 우주 크나큰 의문부호를 달게 됩니다.
꿈틀거리는욕망꿈틀거리는몸짓깨여나는심상
한영남 근작시에서 살펴본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탐구정신 [ 평론 ] 허인 이니셜내가본한영남ㅡ해학의달인통속언어창출의놀라운괴재 6월, 파겁을 시작한 뭇꽃이 앞 다투어 조잔한 열매를 두 손에 받아들고 어느새 초하(初夏)의 문턱- 높은 담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계절, 필자는 며칠전 할빈에서 이메일로 보내온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10여수를 앞에 놓고 흥분으로 읽는다. 범상찮은 조짐 ㅡ 사실주의를 기초로 모더니즘의 싱싱한 점토우에 새롭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켜 탈변을 목적으로 하려는 굵직한 몸부림 ㅡ 어찌보면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생소한 비유(比拟)와 은유(隐喻)를 단순히 형식적인 모험만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변이ㅡ 변형시켜 이미지와 이미지사이를 직결로 링크, 꿀맛나는 이미지확장(扩张)을 하이브리드로 완성해보려 하는 대담한 착상, 그리고 언제봐도 심성이 항상 맑고 깨끗한 ㅡ 오직 한영남시인만이 완성시킬수 있는 독특한 시적인 질서와 그러한 조밀한 언어구조속에서 항상 가슴 따뜻하게 느낄수 있는 풋풋한 휴머니즘과 인문정신을 ㅡ추상적, 계기적, 구체적, 병치적ㅡ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더욱 폭 넓은 세계로 이어가려 하는 과감한 도전ㅡ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맥박, 깨여나는 심상(心象)을 함께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고 총괄하고 싶다. 길림성 안도현 태생인 한영남시인은 일찍 초, 고중시절부터 벌써 신문잡지에 주옥같은 시작품들을 튝속 발표, 현재까지 '갈대는 저렇게 싱거워가지고', '환절기에 건강을 주문받습니다',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무깍지동네', '우리 서로 얘기 좀 합시다', '보리밭은 바람 아니더라도 설레이는것을' 등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무려 300여만자 발표,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중국조선족동시탐구상, 중국조선족수필상, 도라지장락주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다수 수상, 2006년 시집 <하나님 눈을 너무 깊이 감으셨습니다>를 출간ㅡ현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편집으로 사업중인것으로 알고 있다 . 필자가 알건대 한영남시인이 오늘날 개성이 뚜렷하고 유망한 문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적잖은 아픔과 홀로서기의 나날이 있었던줄로 안다. 시를 써야하는 백공한번째 리유에서 한영남시인은 철없었던 문학도시절 량친부모를 잃고 억이 막혀 혼자 쿨쩍일 힘마저 없었을때 가슴 따뜻한 긍정적인 말 한마디 하여준 고마운 선배문인과 인정에 너무나도 시린 손발을 늘쌍 친동기처럼 어루만져주고 다독여주었던 고마운 동우시인들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늦게야 늙은 총각딱지를 마침내 떼고 늦장가 들어 득남까지 한줄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늦게나마 행복의 메신저로 축하의 박수를 열심히 보내드린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는 뜻 ㅡ어쩌면 요즘처럼 독지층이 얇아져 가는 조선족 시단에서 읽어볼만한 시가 없기로는 시인이나 독자나 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기에 한영남시인의 이번 해학, 독백, 역설을 위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킨 근작시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간만에 가슴 설레도록 할것이며 또한 오래도록 긴 여운을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기게 되리라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럼 아래에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에 보내온 주옥같은 근작시 12수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질서와의식ㅡ그리고무의식속에서이끌어낸해학의즐거운잔치한마당
시의 혁신은 곧 사유의 혁신이며 또한 언어의 혁신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쓸때 우선 먼저 미학적인 고려를 하여야 하며 또한 감수성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라 해야겠다 . 일찍 리요다르는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 이 시대에 오면 곧 하나의 환상이거나 지적인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한적이 있다.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란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모순을 하나의 지적인 체계로 종합하려는 그러한 태도를 말하는것이다.그런 갈망이 환상이거나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은 결국 모든 종합주의적 사고가 허구라는 사실이기때문이다. 이렇듯 탈구성적인 리념은 형식주의적인 이데올리기의 억압에 대한 미적인 저항이며 또한 구성이 아니라 충동을 강조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구성의 파괴가 아닌 구성속의 자연 분만된 여러가지 복잡성, 그리고 얽히고 섥힌 여러가지 겹치기 구조, 이런 태도는 시 ,소설ㅡ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하나의 구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론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해체시의 경우 주체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탈구성 혹은 해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리해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 중ㅡ 질서와 해학의 즐거운 잔치마당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간추린소식>>부터 다 함께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발가락 하나 감기 걸렸소
머리카락 한오리 발기불능증이오
귀지 한숟가락 당뇨병이라오
눈썹 한 대 좌골신경통을 앓는다오
이빨 한 대 정신분렬증을 치르오
코털 한 대 페암인 듯 하오
손톱 하나 에이즈와 사귀었다오
배꼽 절반이 알콜중독쯤이라오
자지 가운데가 중풍을 맞았다오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
발가락사이 때 한줌이 배 두드리며 만포식이라오
이상 간추린 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 <<간추린 소식>>전문이다. 시는 구조적 통일성보다 오히려 단편적인 앙상블로 인식되기도 한다. 앞서 평론에서도 이미 여러번 말한적이 있지만 시는 엄격히 따지면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간추린소식>>을 읽고나면 시인의 놀라운 재치에 저도몰래 즐거운 탄성이 터져 나오는것을 어쩔수 없다 . 즉 인체의 각 기관들로 온갖 병적인 현상들을 직결시켜 완성시킨 이 한 수의 시는 읽을수록 쿡쿡 저도몰래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또한 시인의 기이한 발상과 착상이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아 그야말로 가관이라 해야 할것 같다. 꼭마치 라캉식 행동, 칸트식 발언 , 미셜 푸코식 사유인것처럼 ㅡ/발가락과 감기/, 머리카락 한오리와 발기불능증/, 귀지 한숟가락과 당뇨병/, /눈썹 한대와 좌골신경통/, 이빨 한대와 정신분렬증/, 코털 한대와 페암/, 손톱 하나와 에이즈/, 배꼽 절반이 올콜중독/, 자지 가운데와 중풍/, /겨드랑이털 서너이랑과 백전풍/, 발가락 사이 때 한줌과 만포식/은 어찌보면 단순하면서도 시인의 의도적인 변이, 변형을 통하여 우리 이 사회의 여러가지 병페적인 현상들을 아이러니컬하게 해학적으로ㅡ 즉 유머 있게 풍자 비판하고 있으며 더우기 시인은 줄곧 작자가 아닌 편집자의 립장에 서서 어쩌면 앵커다운 앵커가 되여 차분한 목소리로 뉴스를 진행하듯이 패러독스를 펼쳐가고 있지만 그 효과음은 분명 공명이라는 전환 리듬을 타고서 읽는 이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와도 같이 ㅡ둥둥 웅굴진 북소리가 되여 오래도록 메아리치고 있는듯 싶다. 특히 제일 마지막 련ㅡ /이상 간추린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에서 살펴볼수 있듯이 시인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나>>는 그런 병적인 현상에는 쉽사리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를 비추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참된 인간의 성실한 모습을 조심스레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는듯 싶다. 필자는 웬만하면 누구를 함부로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여기서는 꼭 한마디 해야 겠다 . 한영남시인은 우리 이 시대의 해학의 달인임이 틀림없으며 통속언어창출의 괴재(怪才)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귀지, 자지, 그리고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라는 표현은 지방적인 방언색채마저 다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더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담판>>이라는 익숙하고 지성적인 간결한 사유를 통하여 독자들은 이 시의 매력에 저도몰래 푹 빠지게도 된다. 그럼 아래에 해학의 또다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
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
눈은 없어도 좋소
다리가 부러져도 좋소
허리가 부러져도 좋소
몸뚱이가 부러져도 좋소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 <<개구리와 개구리는 오감도를 좆감도처럼 놀고 있소>> -이상의 ‘오감도’에 부쳐ㅡ전문이다. 의인화 수법으로 씌여진 이 시속의 주인공, 즉 ㅡ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하여 <<주저앉은 개구리>>의 형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안일한 삶속의 리유ㅡ 즉 무승자박(无绳自搏) 이라는 단단한 포승에 꽁꽁 묶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상을 마치 두눈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듯 싶다 . 제1련에서부터 력설적인 어투로 시작된 이 시는 거의 아무런 휘핑도 없이 오직 헤드라인과 초감각적으로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로 최저한도의 상황제시를 하여놓고서 다시금 제2련에서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눈은 없어도 좋소…/로 <<눈이 없고>> << 다리>>, <<허리>>, <<몸뚱아리>>마저 부려져도 무작정 뛰여야만 하는 강한 충동을 야유적으로 고조시켜놓은듯 싶으며 특히 제3련에서는 아예/밸은 없는게 낫소/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로 한술 더 푸욱 떠서 <<밸>>이 없고 <<배꼽>>이 없어야 어쩌면 살아가는데 적응할수도 있으며 결국 제 4련에서는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부제에서부터 이미 살펴 볼수 있다싶이 <<리상에게 부치는>> 편지이고보니 아무리 어찌해 보아도 넘을수 없는 장벽같은것을 마주선 인간의 여러가지 형태를 적라라하게 풍자적으로 그려놓은듯 싶다. 그럼 아래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하여 완성시킨 몇수의 시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별이 차마 섬뜩했다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 있었고
언제나 다정한 얼음조각
팔불출이어서 싱거웁다
깊은 재채기는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
끝내 누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
서슬푸른 밤하늘이
조용히 발정한다
/별이 차마 섬뜩했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이 시에서 필자는 마치 파트 타임이 아닌 터닝 포인트, 어쩌면 긴 타월로 철철 흐르고 있는 식은 땀을 홀로 게면쩍게 슬쩍슬쩍 딲고 있는 이상하게 관심이 쏠리는 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별이 시인에게 주는 섬뜩함이란 도대체 무엇이였을가ㅡ시제가 <<무제>>인것만큼 시인이 말하는 별이 도대체 무엇일가 하는 핀트는 독자 나름대로 설정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된다. 특히 제2련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에서 포플러ㅡ 즉 백양나무는 모두 다 잘 알다싶이 포플러나무는 이 세상에 태여난 그 순간부터 오직 한 자리에만 서 있어야 할 운명임이 분명한데도 시인은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하였다/고 재치있게 표현하여 인생의 허다한 막무가내와 그러한 속박에 저항해보려는 역반심리, 즉 어디론가다 툭툭 털어내치고 훨훨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그러한 강한 충동, 즉 <<구속>>된 령혼의 가슴 시린 간절한 바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듯 하며 그 다음 자연스럽게 줄 지어 다가서는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는 또한 <<다정한 얼음쪼각>>과 <<팔불출>>이라는 재밌고도 어깨 단단한 이지미를 멋스럽게 견인해 내여 단 한마디 / 싱거웁다/로 현실에 대한 불안, 혹은 그러한 불만정서를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듯 하며 특히 제6련에서 /깊은 재채기/는 시인의 세심한 배려와 지성적인 사유끝에 변이, 변형을 통하여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이라는 너무나도 궁색하고 허무한 결과ㅡ 즉 자다가도 다시금 벌떡 일어나 초불을 켜들고 찾아 읽고 싶어지도록 간결함의 극치로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결과마저도 시린 가슴에 포옹으로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각근한 태도에 읽는 이마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며 특히 제 8련에서 10련까지 /끝내 누군가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서슬푸른 하늘이/조용히 발정한다/는 그물에 걸지리 않는 바람처럼 리상적인 자유와 지향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는 끊임없는 추구와 변함없는 생명운동을 지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실천해보려는 시인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망을 암시해주는듯 싶다.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정한 얼음쪼각, 갈대의 웃음파편은 폭력적조합을 이루면서도 전혀 이상하거나 낯선 감이 없어 한영남시인이 언어련금술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는지를 아낌없이 잘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질서와 구조속에서 생명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럼 아래에 수학 매트르식이 아닌 속사로 생명구조와 분명한 질서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명운동을 마치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 <<차들의 사업>>을 잠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나간다
마당에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침이면 버스도 빠져나간다
마당에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직도 트럭 차들이 서있다
여보게 시작들 합세
마당에 차들이 없다
마당에 차들이 없다
하루가 도르르 말려 저쪽으로 사라지고
하루일에 지친 차들이 다시 들어온다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잠잔다
<<차들의 사업>> 전문이다
은유에 기대여 직조된 이미지 그 자체를 통해 많은 자유련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한수의 시는 <<나>>없이도 매일 진행되는 생명과정에 대한 한차례의 미적감수를 경유했다는데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삶과 분리된 구성물이 아닌 진행속에 있는 구성물, 즉 제1련에서 볼수 있다싶이 <<곤하게 서 있는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을 바라는 시인의 시선은 정지된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물인 전차, 버스, 차, 트럭을 따라 움직이는것, 또한 혼자서는 절대로 저절로 움직일수조차 없는 피창조물들의 기계적인 움직임속에서 창조자인 인간이 기계에 기계적으로 매달려 살아가는 곤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하는듯 싶다. 꼼꼼히 살펴보면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 나가고 나면 그 자리는 잠시 비게 되며 다음은 버스ㅡ 차들 ㅡ여기서 시인은 분명 원유의 질서를 해체하려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들을 재발견, 즉 차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대인의 바쁜 일상과 희노애락을 엿볼수 있게끔 하고 있는듯 싶다. 시의 언어는 의미전달의 언어구조가 아닌 의미형성의 새로운 이미지구조여야 한다. 특히 문체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있는 세부의 기능이기때문에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태도라고 해야 할것 같다.그럼 아래에 남달리 시각 효과가 뛰여난 <<나비>>와<<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만 있다면>>,<<길은 길에 미안하오>>를 살펴보기로 하자 탐미주의적경향시대적발현의새로운심상 나비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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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풀
나도한수의시로남을수있다면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정조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사랑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아픔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심장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령혼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무덤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의미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이름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용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버린다
나를 위해 나의 모든것을 버린 나는
내가 모든것을 버려서 비여버린 나는
드디여 한수의 시로 남는다 길은길에미안하오
길은 어디로 어떻게 뚫린거라도 괜찮소
길은 걸어주는것이 도리요
길은 자주 걸어줄수록 길이요
길은 혼자만의 길이 있듯이
길은 여러 사람의 길도 있소
길은 혼자만 걷고 싶은 길임에도
길은 여러 사람이 자꾸 기웃거리오
길은 혼자 걸어도 길이요
길은 여럿이 걸어도 길이요
길은 길이기에 길들었다고 생각하면 위험하오
길은 아무렇게나 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더욱 위험하오
길은 저만치 길다운데 길은 길일뿐이오 시인이 굳이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시어로 접근하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인습적인 사고를 단단히 긍정하면서도 또한 끊임없이 전복해보려는 시인의 각근한 노력과도 관계되는상 싶다. 이러한 각근한 노력끝에 한영남시인이 <<나비>>를 바라본 시각현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가? 필자가 보건대 그건 아마도 단순히 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한 수단인것이 아니라 사물의 전체적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즉 한가지 측면만 통하여 깊이 료해하고 결정해보려는 심리를 폭죽효과로 삶의 공간에 터뜨리려 한것 같다.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기서 <<풀 ㅡ>>은 어쩌면 바람앞에 흔들리는 <<풀>>일수도 있고 또한 <<나풀>>의 줄임자일수도 있으며 무려 500여개의 <<훨훨>>은 마치 수천 수만마리의 나비가 동시에 하늘을 날아오르는듯한 환각을 주어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다음 결속어 <<나풀>>은 시인의 생명에 대한 무한한 열애와 환희를 나타내려 한것 같다. 반복구사법, 겹치기기법, 절충법으로 씌여진 << 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 있다면>>,<<길은 길에 미안하오>>역시 같은 실례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로 시작하여 정조, 사랑, 아픔, 행복, 심장 ,령혼 , 무덤, 의미 , 이름 , 용서, 훈민정음 ㅡ 그리고 무려 13차례나 되는 <<버린다>>라는 고도로 집중이 되는 비움속에서 평생을 한수의 시로만 남고싶은 시인의 간절한 욕망, 그리고 동업자가 <<라이벌>>일수도 혹은 <<동지>>일수도 있기에 거기에서 오는 미안함을 길로 간결히 표현한 <<길은 길에 미안하오>>는 첫째,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둘째, 군더더기 하나없이 주체의식이 명확하며 셋째, 시의 또다른 가능성마저 제시해주는듯 싶다. 다만 프로의 경우 탐미주의적 경향, 즉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으로 받아들여 지겠지만 아마추어의 경우 자칫하면 문자유희에 빠질 그런 우려가 있음을 모두 류의해야 할것 같다.
물덩이들의 반란
물들이
물덩이들이
왈칵왈칵 내 목구멍을 헤집는다
내 목의 겨불내를 닦아주기 위해서
얼마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려주어야 하는데
녀석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살겠다는듯이 내 위장속으로 란폭하게 쓸려들어간다
내 목구멍을 한껏 벌려버리고는
잘 줴기진 물덩이들이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아우성치며 빨리듯 들어간다
물은
물들은 이런것이 아니겠는데
부드러운 물들이여야 하는데
물덩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자랑한다
분명 나를 아프게 한 물덩이들이
사랑스럽다 리얼리즘이 세계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이 자율성을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텍스트성을 강조로 한다 . 무릇 이 시대의 모든 문화현상과 사회현상은 지극히 단순한 상호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일시되며 더 나아가서는 가끔 사회현상이 문화현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더불어 문화현상이 사회현상을 시의 심층 구조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말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 <<물덩이들의 반란>>은 제목자체에서부터 이미 엿볼수가 있다싶이 지극히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하였던것들이 <<덩어리>>가 되여 잘 줴기지고 때론 제법 <<골격>>이 단단해져 간혹 <<나를 아프게>> 할수도 있지만 결국 사랑스럽다는 표현으로 상호 의존된 력학관계와 애잔한 관용의 미학을 섬세하게 그림으로 그려낸듯 싶다. 여기서 <<물덩이>, <<왈칵왈칵 목구멍을 헤집는다>>, <<살겠다는듯이>>, <<잘 줴기진>>,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빨리듯이 들어간다>>는 표현은 참으로 생신하고 이색적인 아어효과를 창출하고 있는듯 싶다. 한영남시인은 분명히 우리가ㅡ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 실체를 좀 더 찬찬히 따지고 보면 무릇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잘 알고 있는듯 싶다. 어쩌면 있는것이란 상호 관계 혹은 큰 공간일뿐 ㅡ <<인간>>은 실체가 아닌 관계 혹은 공간으로 인식되여야 한다는 말이라 해야 겠다. 례를 들면 <나>라는 말은 절대적인 선험성을 지닐수가 없다. <나>라는 말이 의미를 띨수 있는것은 <너>라는 말과 관계를 맺을때 뿐이다. 때문에 <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가 <나>를 결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길게 설명하자면 인간이라는 실체가 <나>와 <너>의 관계, 즉 사회적 관계를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회적 관계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물덩이들의 반란>>은 필자로서는 관용을 미학으로 풀이한 좋은 시라고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자연속에서얻은령감, 손발을톡톡털고어깨흔들며깨여나는추억한장
가을이 추적추적 내리고있었다
솨아 세월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들길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가을꽃들이
모처럼 생글거리고있었다
금잔화 한송이는
어느날 떠나간 친구의
뒤잔등을 떠올려주리만치 아린 빛이였고
하늘은 넌지시 높아만 갔다
가을빛이 서두름 없이
짙어가는 가운데
훠이 생각이 깃을 치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명상은 고요로이 침묵을 씹고 =있었다
여보게 가도 잘 가시게
눈물은 흔적없이 말라버리고
가을빛은 모질이도 모질이도 짙어갔다
뒤모습이 서글펐던 떠나간 친구를 떠올려주는 금잔화 한송이가 피여난 끝나가는 가을께에 <<가을소묘 서너점>> 중 <<가을이 끝날무렵 우리는 금잔화 한송이로 떠나간 친구의 뒤모습을 그려보았다>>의 전문이다. 칸트에 의해 처음 미학적 토대를 형성한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창조적 상상력의 절대적 능력을 토대로 하였다. 이번 한영남시인의 대부분 시작중 텍스트로 설정된 <<물>>과 <<자연>>, 그리고 특정된 <<삶>>속 의 어느 한 장면을 주축으로 이룬것이 특징이며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가을이라는 풍만한 감오속에서 또한 조금 낯설면서도 왠지 너무나도 익숙한 <<금잔화>>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나게 되며 시인과 더불어 떠나간 친구의 뒤모습을 머리속에 아련히 떠올리게 된다. <<가을이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솨아 세월 흐르는 소리>> , <<오랜만에 보는 가을꽃들이 모처럼 생글거리고있었다>>, <<뒤잔등을 떠올려주리만치 아린 빛>>은 영원히 다슬지 않을 한장의 투명한 기억속에 멀리로 훌쩍 떠나가버린 친구를 담고서도 여운이 남아 있을만큼 실감나게 어루만져 주고 있는듯 싶다. /가을이라고/가을앓이 한다고/가을너머에서 깊어가네/가을하늘 만지다/퍼렇게 물든 손/알고있니/너를 만져 나마저/ 푸르게 물들고 싶은 이 마음/가을이라고/가을앓이 한다고/가을너머 숨어도 소용이 없네/ <<가을앓이>> 전문이다. /가을을 만지다/퍼렇게 물든 손/알고있니/너를 만져 나마저/ 푸르게 물 들고싶은 이마음/은 읽을수록 가슴에 와닿는 명구절이라고 해야 겠다. 이외에도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중에는 <<가을 막바지>>, <<가을 장독대>>,<<가을 하루길>> 등 여러수가 있지만 여기서는 일일히 짚고 넘어가려 하지 않겠다. 끝으로 우리 함께 시인의 아련한 추억이 손에 뚝뚝 묻어나는 한<<가을 스케치>>를 다 함께 잠간 더 살펴보도록 하자 가을이 오는체 한다
들국화며 코스모스들이 신나서
환하게 웃는다
가을이 가는체 한다
그토록 씩씩하던 해바라기들
그 큰 머리통 푸욱 떨구고 꿀꺽꿀꺽 울음을 삼킨다 <<가을 스케치>>전문이다 착각이 낳은 짧고 훌륭한 좋은 시라고 해야 겠다. <<가을이 오는체>> 할리 만무하고, <<가을이 가는체>> 할리 만무하지만 시인의 느낌속에는 분명히 <<들국화며 코스모스들이 신나서 환하게>> 웃고 <<씩씩하던 해바라기들 그 큰 머리통 푸욱 떨구고 꿀꺽꿀꺽 울음을 삼키고>> 있다. 시인의 지극히 지성적이고 여린 심성과 고운 심상을 엿볼수가 있어 감화력이 높은듯 싶다. 마무리하면서
내가 본 한영남시인은 보수적이 아니라 언제나 능동적이였다. 시인은 시어를 통해 <<자아>>를 확립하는것이 아니라 <<자아>>의 위치를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것이다. 한영남시인은 조선족시단에서 전렬에 서 있는 젊은 시인이시다 . 한영남시인의 이러한 시적인 실험은 어쩌면 모험일수도 있으며 또한 여직껏 쌓아온 자신의 이미지에 약간의 손상을 줄수 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라면 누구나 오늘에 안일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시대가 변하는 만큼 독자들의 심미(审美)수준도 높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영남시인의 많은 실험시들을 필자는 높이 평가한다. 옛날 고대 희랍사람들은 델포이 아폴로신전의 하얀 대리석벽에다 <<너 자신을 알라! ghthi sea-utoh>>는 글을 새겨넣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또한 행동의 지표로 여겼다고 한다. 끝으로 한영남시인이 화려한 기교적인 추구보다는 내실을 더욱 튼튼히 다져 자신만의 독특한 시적 세계에서 독자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한 차원 더욱 높고 좋은 시들을 더 많이 써내길 충심으로 기원하며 응원의 박수를 뜨겁게 다시 한번 보내 드린다. 2014년5월27일 심양에서
영원이라는 말은 아마도 불교에서 비롯된줄로 알고 있다. 기세경[起世经]이나 구사경[具舍经], 십륜금강[十轮金刚]을 살펴보면 한겁(一劫)은 대략 12억79840000여년정도,그러니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하나의 대천세계에는 1000개의 소천세계가 들어 있으니 어찌보면 영원은 끝이 없을듯도 하다. 하지만 짧다면 손가락으로 먼지를 훌쩍 털어내듯이《弹指一挥间》 결국 하나의 찰나(刹那)에 지나지 않는 셈이기도 하다.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신만의 절제되고 함축된 시어들을 세상에 내여놓고 오래도록 남으려 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그것은 어쩌면 시인 그 자신의것만이 아닌 이 세상의 모든 령혼의 스펙터클(壮观)한 울부짖음, 즉 자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리고 천인합일 <<天人合一》, 우주와 인간의 진실한 목소리를 터닝포인트로(转折点)들으려 하기때문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스페인 철학자 미구엘 드우나무노는 디테일하게(详细的) <<슬픔의 습관을 떨쳐버리라. 그리고 너의 령혼을 회복하라>>고 토파한적이 있다.이렇듯 좋은 시는 치유의 힘, 즉 재생의 역활을 하기도 하며 우리 모두의 령혼의 심층부에 가 닿기도 한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 <<늙은 술병의 이야기>>, <<어느 여름의 하오>>,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절대의 고독>>, <<비루먹은 개와 비루먹은 개보다 더 비루한 인간의 동침>> 등은 첫째 읽기에 편안하고 둘째 변죽을 두드려 중심까지 울려주는 극히 세련된 시어들로 담담하게 엮어지고 있으며 셋째 결과적으로는 삶에 대한 통찰이라든가 깨달음, 즉 일종의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전달하려는 그런 측면이 깊은 장점이 있는것 같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의 경우 짧지도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을 드라마틱(戏剧性)하게 손으로 만져가면서 지나가는 바람, 강물, 락엽,머리털ㅡ 등등 지극히 평이로운 시어들로 도킹(对接)해가면서 아주 통속적이고도 어쩌면 너무나도 보편적인 주제를 뛰여넘어 서려하는 시인의 장인적인 그러한 정신적 가치와 예지가 돋보이기도 하며 <<늙은 술병의 이야기>>,<<어느 여름의 하오>>,<<하늘에서 눈이 내리면>>,<<절대의 고독>>에서는 시적 공간의 정밀한 내면성을 절제되고 정갈한 오직 자신만의 싱싱한 기억속으로 재 확인시켜가면서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인간상을 내레이션(解说)으로 다소 긍정적이고 감상적인 새로운 방법으로 자연스레 풀이해나가면서 합리주의 바탕을 근거로 인간의 진실한 한 단면을 말이 아닌 생동한 그림으로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것 같다. 또한 인간 모두ㅡ 태초 이전의 그 순수함보다 더욱 가까운 현실속으로 독자들을 깊숙히 끌어들여 함께 사색하고 고민해려는 각근한 노력이 엿보여 더욱 고무적이기라고 생각한다.시는 이렇듯 령혼과 세상을 련결해주는 하나의 도구이기도 하다.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5수를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가도록 하자 우리 속담에 <<시작이 절반이다>>는 말이 있다. 내노라 하는 허다한 시인들의 근작시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시를 내추컬러(自然色)로 자유분방하게 나름대로 이끌어 나가는것이 아니라 쥐여짜고 시에 끌려다니면서 자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띄여 채 읽기도전에 벌써 눈살부터 찌프리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그런 시인들을 <<노력파>>임은 승인하나 결코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과 초감각적인 재치는 여직 채 갖추질 못한 지극히 평범한 <<천재>>도 아닌 <<둔재>>들일뿐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이 방면에서 한영남시인은 어느 누구 하나 감히 흉내조차 낼수 없는 깁스된 상상이나 갭(差异)이 없이 내추럴하게 적당한 울림, 즉 공명감을 손바닥안을 들여다 보듯이 훤히 잘 알고 있는 몇몇 안되는 재능을 갖춘 그런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되돌아오지도/만져지지도 않는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에서 <<만져지지도 않는다>>는 이 표현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어들로 구성된 제1련을 순식간에 황금정률로 바꿔놓는다.또한 절제된 시어의 매력을 리메이크(再制作)로 증폭시켜 자의였든 타의였든간에 읽는이들로 하여금 모두 함께 공유할수 있다는 그러한 직감, 촉감, 예감을 오직 주제에만 올인할수 있도록 유인하여 마침내 참여의식과 함께 궁금증을 정갈한 샘물로 목을 추겨 갈수 있게끔 캐릭터를 증폭시켜 놓았으며 /바람은 지나가면/그만인것을/바람의 끝을 잡고/쫓아가봐도/바람의 거처는 알수가 없는것을/인생은 /다가오지도 스쳐가지도/않는다/강물을 보아라/강물이 흐른다고/생각지 마라/강물에 버린 락엽이/어디론가 흘러갔다고/생각지 마라/에서 다시 볼수 있듯이 시인은 멈춰서고 정지된 삶의 울타리에서 결코 움직이는 삶을 지켜보는것이 아니라 오직 시인만의 예리한 눈으로 움직이는 사물속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경험적으로 파 헤쳐보려고 하였으며 /인생은/버려지지도 사라지지도/않는다/술을 억수로 마셔도/취할줄 모르는/술병처럼/비속을 걸어도/젖을줄 모르는/머리털처럼/인생은/ 소설도 드라마도/아니다/에서는 생을 다 보낸뒤의 그 비장한 각오나 후회조차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인 삶을 헤이드라이트로 재조명하여가면서 삶의 무늬를 스릴 넘치게 채색으로 현란하게 그려놓은듯 싶다 신비주의를 뜻하는 <<미시티시즘>>은 고대 희랍어에서 온 단어로써 <<입을 닫고 비밀을 지킨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듯 시는 령혼의 제일 자연스런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 신비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우리는 잠시 가던 길이라도 멈춰서고 한참씩 귀를 기울려야만 한다.아랍계 미국 시인 나오미 쉬하브 니예는 <<너무 늦기전에 자신의 삶을 살라>>고 설파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인생의 전부이기도 하며 또한 삶 전체이기도 하다. 이렇듯 시는 인간의 령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도 한다。/가다가 만난/바위 하나/에서도 볼수가 있다싶이 <<절대의 고독>> 역시 리듬은 마찬가지 실례라고 생각한다.어쩌면 지극히 경험적이고 감상적인 시인의 그 독특한 체험으로 삶에 대한 인간들의 너무나도 익숙하고 애틋한 천착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리믹스하게 /억겁을 저렇게 엎드려/있었겠지/라는 다소 심각한 감오는 불쑥 독백의 질문을 던져놓아 읽는이들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일가 다소 초조하게 사색하게 하며 /어깨에 내려앉은/하늘만 해도/켜켜로 삼천자쯤/억겁을 저렇게 말이/없었겠지/에서는 어쩌면 미리 준비되여 있는 인간과 자연의 동일한 맥박소리를 싸늘히 식어버린 가슴이 아니라 따뜻한 심장소리로 다시금 들을수 있게끔 무대를 설정하여 허무한 현실에서 오는 그 무상한 깨달음을 불행하고도 행복하게 영원한 고독속에서 숙명적이면서도 저항적으로 디테일(详细的)하게 되살려 놓았으며 /삼라와 만상의/소리 다/삼키고도 허기/살다가 만난//화난 바위/에서는 너무나도 오래도록 분출구를 찾지못해 억압되여온 여러가지 복잡다단한 심정들을 마침내 <<화난 바위>>라는 돌출구로 재치있게 폭발시켜 간결함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아낌없이 제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다음 <<늙은 술병의 이야기>>의 경우 /젊은 술을 담은 늙은 술병은/비칠거리지도 않고 /내게로 와 향기로/되었다/다독이지 마라/거들먹거리지도 마라/한잔의 술이/ 되어오기까지/늙은 술병은 얼마나/많은 서러움을/속으로만 속으로만/새겨야 했던가/에서는 인간과 사물의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접촉에서 가장 익숙한 시각과 손이 아직 따뜻한 느낌으로 낯선것들을 익숙한 곳으로 지체없이 데리고 가 가장 정신적인 기탁으로부터 풀려나오는 그 아득히 멀고 가까움, 즉 생성적인것과 파생적인것, 기쁨과 고통을 현대시의 세가지 방식인 ㅡ느낌,ㅡ 관찰,ㅡ변형으로 긴장감을 완화시켜가면서 누구나 령혼의 거처로 되돌아갈수 있게끔 단단히 말뚝까지 박아주었으며/초농낀 부러운 눈/ㅡ/갓 생겨난 산호초는/싱싱하게 젊음을/이슬덩이같은 구름은/늙은 하늘을/ 자맥질하며 가르르를/쏟아내고있었다/ㅡ 등등 에서는 내면적인 시간에 대한 새롭고 직감적인 발견을 새삼스레 어깨 흔들어 일깨워주고기도 한다. 시인의 령혼을 투시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속에서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단어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시에서는 여러차례 <<늙었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데 무척 흥미롭고 가장 인상적인것은 그렇게 포장된 늙음속에서도 아직까지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젊음을 빛발처럼 가슴에 받아안는듯한 느낌에 파스터 컬러(清淡柔和颜色)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찍 벤은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이미 완성이 된다.허나 작자는 그의 텍스트를 모를뿐이다>>고 말한적이 있다. <<어느 여름의 하오>>의 경우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한모퉁이를 세심한 스케치로 완성시켜놓고 수없이 되풀이되는 현실속에서 오는 여러가지 콤플렉스와 스트레스, 즉 수많은 폴더때문에 격하고 욱해질대로 욱해진 징크스를 맥주 대신 커피와 콜라를 사들고 돌아온 동료의 그 얄미운 행위에 강력한 불만을 토로해 가면서 <<빵만큼이나 건방져가지고>> 실례인지조차 모르게 맥이 탁 풀리게 하는 <<건방진 콜라와 커피>>의 그 덕분에 오후 내내 자장가를 부르게 된 하오의 아이러니컬한 기억을 수면우에 불쑥 떠오른 얼음덩이와도 같이 차겁게 적어놓은것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과민한 반응으로 실생활 한 모퉁이로 적은것 같다.
다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시작하면/배낭도 없이 길에/나선다/눈이 너무 내려서/길이 보이지 않으면/아무데나 발길/닿는대로 간다/준비 없이 목표 없이/나선 길/어디인들 갈곳이/아니며/누구인들 만날 사람이/아니랴/하늘에서 눈이/펑펑거리면/인사도 없이 길을/나선다/막차를 놓친 길손처럼/약간 허둥거림을/즐기며 간다/길은 눈밑 숨어서 나를/ 따라온다/로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에서 제일 성공적인것은 아무래도 제일 마지막 련의ㅡ /길은 눈밑 숨어서 나를/ 따라온다/인것 같다. 마야 앤젤루는 <<시는 인간의 목소리를 위하여 씌여진 음악>>이라고도 말을 하였다.
이번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에서는 그러한 경쾌한 리듬이 반갑도록ㅡ 기쁘도록ㅡ 슬프도록ㅡ 시내물처럼 졸졸 가슴에서 가슴속으로 흐르고 있는것 같다. 밤이였을게다 비가 내리고 있었을게다 나는 이불을 여미며 어떤 고단함을 달래고 있었을게다 얼마쯤이였을가 제법 비루먹은 개가 내 이불속에 들어왔을게다 나는 비루먹은데다가 비까지 흠뻑 맞아 더없이 더러워 보이는 개를 끌어내기 위해 안깐힘을 썼을게다 개는 따스한 이불속에서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무등 애를 썼을게다 하는수없이 포기하고 터럭이 군데군데 문드러진 개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을게다 그러자 개는 점점 내 샅을 파고들기 시작했을게다 거기는 아니야 그러면 안돼 이렇게 누워야 해 아무리 달래고 얼리고 해도 개는 막무가내 한사코 고집이였는데 아마 비루먹은 개는 저를 어떻게든 쫓아내려는 내 비루한 속내를 아는 모양이였을게다 나는 비루먹은 개보다 더 비루한 내 속내가 발각되자 팬티를 까내리고 불털을 뽑아대기 시작했을게다 그러자 나는 점점 비루먹은 모습을 드러냈고 우리는 비루먹은것들끼리 즐겁고 있었을게다 태양이 죽어버린 어느 까만 밤이였던가 아마 <<비루먹은 개와 비루먹은 개보다 더 비루한 인간의 동침>> 전문이다.
그야말로 해학과 풍자의 결정체,몇번이고 다시 읽고싶은 브아이피같은 존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수 없는 좋은 시임이 틀림없다. 즉 빙의적인 사색으로 인간승화를 이끌어낸 한떨기 럭셔리한 꽃이라고 하여야 겠다. 또한 기승전결의 탄탄한 구조우에 이야기식으로 자연스럽게 시적화자를 편승시켜 인간 본질의 그 깊숙한 내면속의 오래동안 억압되였고 무질서해진 저항의식과 자기성찰,즉 이 세상 똑같은 중생의 어려움에 왜서인지 눈굽이 축축해지게끔 하는 타협과 공존의 리유를 최대로 클로즈업하여 생생히 두눈에 보이는듯이 그림으로 완성시켜 놓은것이 압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슬 푸른 장검은 아닐지라도 뾰족한 송곳에 아프게 허벅지가 찔리운듯 하여 마음이 알짜지근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쩔수가 없다.
<<시를 쓰는 만공여덟번째 리유>>에서 한영남시인은 <<그 만공여덟번째 리유는 시가 시로 되지 않아도 나는 시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고 말을 한다. 한영남 시인의 근래 창작경로를 곰곰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의견은 바로 이렇습니다. 남이 뭐라하든 우선 서정단시이고 거기에 이런저런 현대적수법을 가미시켜 기본은 종래의 전통시로 흐르게 하고 거기에 마치 이밥에 열콩알이 다문다문 씹히듯이 새로운 기법이나 새로운 착상, 새로운 언어조합을 섞어서 읽을맛이 더욱 감칠맛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저는 될수록 시어들을 많이 정련해볼려 하는데 그게 아직도 잘 아니 됩니다.시인이 시어를 아끼려 하는것은 곧 수련의 진미이기도 하지요. 우선 착상이 좋고 시는 시의 흐름이 나름대로 류창해야 한다고 생각도 합니다…>> 셋째.<<시에서 엉뚱한 비유와 은유,직유는 자못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엉뚱한 상상력과 시인의 순발력은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도 하여주며 또한 시의 깊은 곳으로 더욱 빨리 다다르게도 하여 시인이 재치껏 만든 시적장치속에서 스스로의 자신들을 반추하게끔 하여 시원하다못해 통쾌하다는 느낌도 줄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삶에는 결코 두번 일어나는것은 없다. 또한 일어나지도 말아야 한다.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매일 련습없이 태여나고 실습없이 죽어가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적이 있다.이번에 보내온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5수를 살펴보면 창작초기의 그 절절함이 많이 줄어들어 조금 아쉬운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그 대신 또다른 정교함이 돋보여 필자는 <<잘 다듬어진 문체를 통해 감정의 절제와 그 거리감, 그리고 포용과 관용으로 희로애락을 잘 표현해 나가는것이 곧 시이기도 하다>>고 조심스레 생각을 가져본다. 아무튼 바야흐로 밝아오는 2015년 새해벽두를 맞이하면서 한영남시인이 시적 탐구의 길에서 한층 더 업그랩이 되고 한층 더 차원이 높은 시들을 더욱 많이 써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다산작가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송구하고 영신하며), (상처도 비명을 지른다면),, (기쎄 길더라)는 인성을 심플하게 통제 가능하게끔 자기패러디적인 감오를 심상(心相)으로 업그레이드시켰으며 또한 마인드 컨트롤로 전반 시적인 흐름과 그 의식이 맑은 하늘아래 하얀 돌다리아래를 조리졸졸 흘러가는 정갈한 시내물과도 같이 오직 우리 민족만의 그 독특한 가락과 정서들을 억수로 기 막히고 순수하게 한폭의 그림으로 완성해놓고서 질박한 삶의 근원을 예리하게 송두리째 파헤쳐놓고 관용(宽容)으로 조심스레 고스란히 가슴에 껴안은듯 하여 흥분으로 설레이는 우리들의 삶의 바다가 한눈에 훤히 너무나도 잘 보이는듯 싶다. 어쩌면 꿈속에서라도 찾고픈 몽경(梦境)같은 삶의 원천 인 그 바다는 또한 자연순산이라는 우리들의 회심의 미소와 함께 가끔 회색구름도 보이고 또한 흰 갈매기도 불쑥 보이며 조심스레 옷깃을 여미는 바람과 우중충한 산그림자와 자연이 그대로 선명하게 보이는듯 하여 더욱 심오한 각광을 받는듯 하다.
어쩌면 적막강산에서 홀로 똑딱거리던 발걸음소리를 문득 멈추고 발뒤축까지 죽여가며 침묵으로 나눌수 있는 대화, 력설보다는 독백을 위주로 줄곧 일관되게 삶이라는 넓고도 좁은 그 울타리에서 예감과 직감적으로 모드것을 느끼게 할수있는 세월의 그윽한 그 향기는 봉선화나 라이락처럼 담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생활의 고민과 고초에서 오는 그 비릿함에 조미료를 살짝 섞어놓아 인지상정(人之常情)인 희노애락을 쓰고 달고 맵고 신맛이 그대로 혀끝에 감돌아지도록 사골처럼 고스란히 잘 우려낸듯 하다.
/질항아리같이 /잘 다듬어진/앙증맞은 슬픔을/선사해주고/너는 세월의/어디쯤에서/행복을 엿처럼/빨고 있니/에서 질항아리, 앙증맞은 슬픔, 세월의 어디서쯤에서ㅡ행복을 엿가락처럼ㅡ이 표현은 지루하고 구질구질한 삶의 한 단락이 한꺼번에 달콤함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 소식 없어 주소를/몰라버리듯이/내 기억의 빨래줄에서/색바랜 친구야/를 파도가 송사리를 뭍에 떠밀어 올리듯이 친근하고 익숙하게 견인해내여 전반 시적 흐름을 두 눈을 아예 감고서도 절대적인 감각만으로도 피부에까지 절실히 느낄수 있도록이 설정이 된듯 하며 /오이라도/아삭이고 싶구나/단 한줄의 위안/다급해진 요즘을/아닌보살하고/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질투, 터전, 추방, 눈동자 진심이라는 익숙하고도 친근한 낱말들을 /저무는 통증/다가오는 황홀함/으로 송구영신을 깁스하여 또 한해의 번거로움과 싱그러운 감촉을 단 한마디 시원섭섭으로 재치있게 속사를 마무리한듯 하다
<<현대시는 랭보와 말라르메 이후 점점 더 언어 마술이 되여 왔다. 우수한 시인들에게 있어서 형식의 자유란 무정부상태가 아니라 숙고를 거듭한 의미 기호의 다양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영남시인의 근작시에서도 언어 마술 효과에 대한 실험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듯 싶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지
크든 작든 깊든 옅든
많든 적든
(상처가 비명소리를 낸다면)에서 독자들이 눈으로 귀로 피부로 보고 듣고 느낄수 있는것은 아마도 감각적인 경험에 의한 소리의 균형이며 그 조합인듯 싶다. 그렇기때문에/크든 작든 깊든 옅든/많든 적든/이라는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러울만치 예감, 직감, 촉감, 감각에 의한 그 심령의 고요한 목소리는 어쩌면 잠시 삶의 모종 현장에서 산뜻하게 징소리, 꽹과리, 새납소리로 성큼 바람에 란무하는것이 아니라 허심하고 절주있게 리듬이 류창해져가는 익숙한 삶의 장단에 나란히 줄을 맞춰가면서 흥겨운 한 마당의 농악무를 질서정연하게 연출시키는듯 하며 어쩌면 깊고 큰 상처와 비명소리일지도 모를 그 모든것을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하얀 종이로 알락달락 포장하여 누구에게나 귀중한 선물로 될수 있게끔 품위를 한 단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린듯 싶다.
이렇듯 각본이 잘 짜여지고 사유가 잘 다듬어진 아픔이고 상처다보니 /몸밖 또는 몸속에서/일제히 입을 다물고/아픔만 전달해주지/ 또한 혼자 슬그머니 /진저리치도록 아픈/ 감각이/신경줄 타고 흘러/마침내 전달받은/대뇌가 분노하게 /되며 그렇게 아픔보다 치유를 목적으로 한 상처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는/찢고 발기고 짓찧이고/비틀며/내 심장이 찢어지는 소리만큼 클거야/와 비교를 적극적으로 시작해가면서 결국 제일 마지막 련에서는/지금 그대를 보낸 내/심장이 찢어지며/내는 소리만큼/이라는 독백과 력설의 색채뿐만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적극적인 진지한 삶의 태도로 인고와 인내의 번거로운 련습끝에 마침내 상처의 구멍들을 한뜸 두뜸 바늘로 기워 치유의 효과에 발렌스를 맞춰가면서 투철한 인생감오에 경험이라는 성숙되고 한결 더 승화된 령혼의 울부짖음을 편승시켜 세상에서 제일 고요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는 오직 침묵으로 일깨워주는 시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만남임을 차원높은 각오로 독자들을 일깨워주려 한것 같다
(기쎄 길더라)의 경우 함경도, 경상도, 평안도식의 사투리와 지방방언들이 순차적으로 라렬되여 있어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고 거친듯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여 혼자말과도 같은 중얼거림을 랩을 듣듯이 록음기의 재생버튼을 여러차례 눌러 놓은듯 하여 점차 귓가에 쟁쟁해지는듯한 그런 특징이 있는것 같다. (기쎄 ),(내사), (걍), (와늘)은 아직도 시골에서는 어렵잖게 들을수 있는 지방방언들이여서 읽을수록 중독성이 강하여 반갑기도 하며 (띤따라 쿤바빠 와장창이구나)는 오늘날의 현대음조에 각성이 타령을 접목시킨듯하여 류행효과를 띌것도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그외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내뱉었을직한 부실한게와 우습광스레 직역된 (왕바단)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서로 눈맞춤을 하여 그 희곡적인 효과가 한층 더 가미되는듯 싶다.
이상에서 살펴본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3수에서는 고정된 삶의 틀에 랭보의 옷을 입히고 말라르메의 장갑을 끼워 언어 마술의 매력을 나름대로 구사하고 재현해보려고 하는 각근한 노력이 엿보이기도 한다. 미숙한 점이라면 독백과 력설이 주류이다보니 강조의 뜻으로 반복된 구절이 있어 잘된 점과 함께 조금 미흡한 점도 존재하는듯 하다. 현대사상으로 씌여진 시들을 모두 현대시라고 불러도 무탈할것 같다. 한영남시인의 변화는 그 조짐이 날로 한박자 빠르게 진행이 되는듯 하여 더욱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송구영신하며 기쎄 래년에는 상처가 내는 비명소리보다 더욱 우렁찬 웃음소리가 신문, 잡지에 따뜻한 묵향으로 오래 남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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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거론하신 시인들, 특히는 중년시인들, 조선족시단에서는 다 이름 있는 분들이 맞습니다, 저도 그들의 재능을 인정합니다.
사실 저는 근년에 나이 들어 시공부를 다시 좀 하면서도 문학에 정진하지는 못하고 취미로 좀 써보는 시애호자로서, 그저 그런 수준에 누구를 어떻다 말할 자격도 없으며 남들이 다 보는 댓글에다 남을 내리깎는 그런 못난 짓은 안합니다.
아무리 익명으로 쓰는 댓글이지만 누구를 마음 아프게 비하하거나 헐뜯고 인신공격하는 못된 짓을 말입니다...
나중에 허선생님에게 꼭 련계를 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