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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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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6
2015년 02월 09일 13시 38분  조회:2348  추천:0  작성자: 죽림

 

51□반딧불 보호구역□최승호, 세계사시인선 52, 세계사, 1995

  시를 산문으로 쓴다는 것은 행을 가를 때 오는 긴장과 이미지 호흡의 장점을 버리겠다는 뜻이다. 산문은 비유의 긴장마저도 떨어뜨린다. 그래서 쓰기가 꽤 어려운 방법이다. 따라서 산문으로 쓰려면 시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를 포기하면 물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시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방법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새로운 방법의 유일한 탈출구는 상징이다. 이 상징은 물론 앞 뒤 정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산문시에서는 생각의 질서와 작용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어떻게 생각이 전개되고, 또 전개시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 산문과 구별하기 어려운 요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지를 배열하는 생각이나 발상의 방법만 가지고도 어렵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발상에 의존하되 결국은 시 안의 이미지는 상징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문과 같이 문장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는 발언이 되고 만다. 시로서는 치명상이다.

  이 시집의 산문성은 시의 산문성이 아니다. 산문의 산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이른바 ‘깨달음’을 전달하는 도구로 문장이 쓰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이르렀더라도 그 깨달음의 어떤 비경을 이미지에 의존해서 노래해야 그것이 시가 되는 것이지,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결과를 이야기해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집의 내용 대부분은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시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상의 깨달음이 시로 들어올 때의 모습이다. 이 시집의 대부분은 불교식 깨달음의 일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선승 흉내를 내지 않아도 일상생활에서 늘 겪고 느끼는 것들이다. 시는 깨달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깨달음이 문제라면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된다. 수필을 써도 되고 소설을 써도 되고, 아니면 무문관이나 벽암록처럼 어록을 만들어도 된다. 그렇지만 시는 시이다. 시에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문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법을 모르면 시라고 하기 어렵다. 대부분이 시집의 시라는 것들이 이 문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

  깨달음 흉내를 내려면 그것은 인류 최고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깨달음은 현재 내가 깨달은 것이 새로운 것 같지만, 이미 깨달음의 절정에 도달한 사람이 보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도사 흉내를 내면 안 되는 것이고, 도사 흉내를 내려면 인류가 여태까지 도달해보지 못한 그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어야 한다. 말을 안 하고 있으려면 모르되 말을 하려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4336. 10. 27.]

 

52□웃는 산□안정옥, 세계사시인선 93, 세계사, 1999

  현상의 배후에 서린 어떤 원리와 세계를 노래하려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노력은 높이 살 만하다. 더욱이 자연에서 인간의 어떤 구원을 탐구하려는 시각은 웬만해서는 좀처럼 갖기 어려운 발상이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말하는 법을 잊는 법이다. 침소봉대하는 버릇과 문장을 굳이 어렵게 만드는 화법은 자연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묘사를 통하여 접근한 자연은 그렇게 어려운 존재가 아니다. 어떤 관념을 해석한 끝에 문장이 어려워지는 것은 철학이지 문학이 아니다. 시는 어려운 해석을 아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다. 깨달은 내용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시에는 아주 간결하고 쉽게 담겨야 한다.

  문장을 잘라먹고 난해한 화법을 쓰는 것은 능력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한 까닭에 생긴 현상이다. 한 꺼풀 더 벗어서 내가 본 세계가 명징하게 드러나도록 한다면 좋은 시를 못 쓸 것도 없겠다. 여태까지 자연을 노래한 것이 허여멀건하다고 해서 거기다가 고춧가루를 퍼부은들 더 나은 맛이 나오지는 않는다. 맛은 조미료의 배합비율에 딸린 것이지 양에 딸린 것이 아니다. 언어의 절제력과 경제성을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4336. 10. 27.]

 

53□알 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77, 세계사, 1997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거기에 매달려서 고만고만한 시를 꾸준히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당한 능력이다. 게다가 그런 이미지들이 형태를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사고와 생명을 담으려고 한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설명을 너무 많이 하려 한다는 것이 흠이다. 이미지 하나로도 끝낼 수 있는 것을 중언부언 설명하다 보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도 잊어버릴 수 있다. 게다가 한자까지 많이 섞여 있어서 불필요하게 생각의 흐름을 흔들어 놓는다. 관념을 주제로 한 시들에서 한자를 쓰는 것은 치명상에 가깝다. 한자는 사고를 담는 뜻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설명이 되고 만다.★★★☆☆[4336. 10. 27.]

 

54□햇빛 속에 호랑이□최정례, 세계사시인선 85, 세계사, 1998

  사물을 뒤집어 보는 반짝이는 시각과 연결되지 않는 것들 속에서 시간과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는 발상의 전환까지,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시인이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만 가지고는 시가 되기 어렵다. 전환의 그 축을 간파한 그 순간 그 시는 맥이 풀리기 때문이다. 발상이 그렇게 된 어떤 기반까지도 제공해주어야만 발상의 신선함은 끝까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세상을 뒤집어보는 것만 가지고는 한 세계를 이루기 어렵다.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한 비밀과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심도 있는 공부를 덜 해서 생긴 일이다. 내 시각이 땅에 견고하게 뿌리내리려면 안경 하나 바꿔 쓰는 것 가지고는 어렵다. 안경 속의 눈을 바꾸고, 시신경에게 명령을 내리는 뇌의 세계를 얘기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뇌는 말들만의 조합물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과 현실의 복합물이라는 것을 얘기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시각을 바꾸어서 말을 장황하게 할 게 아니라 간단명료한 것은 간단하게 말을 할 줄 하는 여유도 있어야 한다. 어려운 것은 시의 필요조건이지 필수사항이 아니다.★★☆☆☆[4336. 10. 27.]

 

55□살레시오네 집□송재학, 세계사시인선 20, 세계사, 1992

  김춘수의 제자가 나타났다. 스승의 재주를 배워서 그것을 다른 분야에 적용시키는 것만 가지고는 스승보다 뛰어날 수 없다. 시에서 진정한 청출어람이 되려면 스승이 이루어놓은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방법을 만들거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승은 밟고 넘어서는 디딤돌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섬기고 안주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춘수의 시에서는 이미지가 의미를 벗어버리려고 하는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런 긴장을 이용하여 의미를 골라잡으려고 이것저것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긴장이 현저히 떨어진다. 말이 정확한 의미를 담자는 것도 아니고 의미를 버리자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꼴이어서 어수선하다. 이런 어수선함을 일러 난해라고 하는 것이다. 한자는 이러한 경향을 지닌 시인들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라고 착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난해하다는 건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쓴 사람 자신의 의식이 분화되지 않았다는 것과 분화되지 않은 의식이 제 몸에 꼭 맞는 언어를 선택하기는 어렵다는 것. 설령 꼭 맞는 언어를 선택했어도 의식이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 그리는 세계는 뜬구름 잡기가 된다. 이런 것을 해석의 다양성이라고 강변하면 그럴 듯하겠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시인 자신이 더 잘 아는 일이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말장난이다. 스승은 따라다니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다.★★☆☆☆[4336. 11. 5.]

 

56□슬픔의 힘□김진경, 문학동네시집 40, 문학동네, 2000

  시가 말을 많이 하고 있다. 아마도 무언가 인식의 단계가 달라지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리라. 깨달음의 적실성이나 진실성과 상관없이 시에서 말을 많이 한다는 큰 단점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형상성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때로 형식이 갑옷처럼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는 달라진 내용이 새로운 형식을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는 시기이다. 그런데 형식은 옛날 것 그대로이다. 이 시집에서는 이런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형상에 대한 인식은 짧고 할 말은 많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미지를 잡아서 형상화시켜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4336. 11. 5.]

 

57□물 건너는 사람□김명인, 세계사시인선 21, 세계사, 1992

  시집을 읽다 보면 살이 너무 쪄서 뚱뚱하거나, 아니면 너무 말라서 빼빼 마르거나 해서 적당한 몸매를 갖춘 것을 찾기가 아주 어렵다. 대부분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있다. 애써 적당히 살도 있고 키도 있는 잘 빠진 몸매를 찾았다 싶으면 뼈와 근육의 균형이 깨져있다. 그런데 이 시집은 몸매도 아주 잘 빠진 데다가 근육과 뼈의 균형도 잘 잡혀있는 체집을 연상시킨다. 잘 빠진 몸매 속에 근육도 적당히 뭉쳐서 긴장할 곳에서는 긴장하고 풀어질 곳에서는 적당히 풀어지는, 말하자면 잘 다듬고 가꾸어진 몸매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분명할뿐더러 그것이 적절한 이미지와 구조로 솟아올라 아주 깔끔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인식과 형상이 서로 어울려 빚은 것이 수준급이다. ‘여름 빗장’ 같은 경우는 시의 인식이 다른 갈래와 어떻게 다를 수 있으며 그것이 시인의 인식을 어떻게 형상화시킬 때 좋은 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절창이다.

  다만 빼어난 인식과 작품의 구조화가 짜임새를 잘 갖추었지만, 좋은 시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한 것을 뒷받침하는 세계가 이미 있어온 것들이라면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들어가면서 누구나 느끼는 인생무상이라는 단순한 주제만으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같은 인생무상이라도 또 다른 측면에서 자신의 삶을 되새김질해볼 수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드문드문 섞인 한자는 시의 빈 구멍을 더욱 크게 만든다.★★★★☆[4336. 11. 6.]

 

58□검은 지층□최계선, 세계사시인선 8, 세계사, 1990

  초점이 두 갈래로 찢어져있다. 시의 형식에 대한 고민과 문명 비판에 대한 고집. 어느 쪽으로도 분명한 선택을 못한 것이 흠이다. 하지만 낱낱의 발상에서 보이는 시각은 아주 참신하다. 그러나 작은 표현에 큰 것 전체를 다 담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발상이 담을 수 있는 크기를 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욕심을 부렸다는 얘기다. 문명에 대한 막연한 비판은 치열한 듯해도 실감이 잘 안 난다. 능선의 이쪽이 밋밋하다고 해서 능선의 저쪽이 가파르지 말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잘 써도 엄살 떠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게 하려면 어떤 부분을 찔러야만 이 문명이 비명을 지를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찔러 가지고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자는 전혀 무기가 될 수 없는 물건이다.★★☆☆☆[4336. 11. 6.]

 

59□나는 햄릿이다□윤성근, 세계사시인선 18, 세계사, 1992

  인생은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려 들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규정하려는 자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고 절망은 몸부림을 낳으며 시인의 몸부림은 장광설로 이어진다. 시집의 대부분을 채우는 내용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이 안 통하기 때문에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쓰는 것이 결코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본디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보는 어떤 시각이 이 문명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자 사명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질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시인의 감정은 정직하다는 것은 살 만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한 정직만 가지고는 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한자까지 동원하는 현학 취미는 근원에 대해 몸부림치는 태도와는 상반된다.★☆☆☆☆[4336. 11. 6.]

 

60□모서리의 사랑□조윤희, 세계사시인선 94, 세계사, 1999

  시집 안의 시들이 수준 차이가 심하다. 어떤 것은 아주 빼어난 이미지들을 잘 갈무리 한 반면에 어떤 것들은 내용이 잘 풀리지를 않아서 그것을 풀어내려고 너무 많은 말들을 동원한다. 이것은 시를 많이 써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남의 상상력에 기대어 자신의 상상을 풀어 가는 것은 결코 좋은 버릇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치 않다. 분명치 않음도 한 세계가 될 수 있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어서 일상의 자잘한 풍경들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꿈이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저기 번뜩이는 발상들은 많은 가능성을 지닌 시인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미지에다가 내용을 갖다 붙이면 안 되고 내용에 따라서 이미지가 올라오도록 기다리는 훈련이 필요하다.★★☆☆☆[4336.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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