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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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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36
2015년 02월 11일 11시 59분  조회:1969  추천:0  작성자: 죽림

 

351□자작나무 눈처럼□이종수, 실천문학의 시집 140, 실천문학사, 2003

  말을 다듬는 능력도 있고 이미지의 조합도 매끈하게 잘 이루어진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할 말 때문에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미지 때문에 시를 만들어서 생기는 일이다. 따라서 주제를 먼저 선명하게 정하고 나서 쓰는 버릇을 길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함정에 빠진다. 즉 이미지로 장난만 하는 시를 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뜬구름 잡는 시가 된다. 좀 더 체험을 시속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고, 그것은 여행 다니는 일로는 안 되며, 차분하게 세상을 살피는 태도가 오래 묵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한자는 왜 못 버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4336. 12. 25.]

 

352□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허수경, 실천문학의 시집 57, 실천문학사, 1988

  시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남의 것은 추체험이기 때문에 자신의 체험과는 간극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다. 또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남의 체험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일이 어려워진다. 이 시집은 이런 위험과 어려움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없고 역사의 희생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것을 시로 옮겼다. 시는 어떤 배경을 전제로 하고 읽기 때문에 시가 다루는 그 시대의 분위기에 익숙치 않는 독자들이 그 시대의 배경까지 감안해서 읽기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상대로 시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숨결을 시로 다루려면 그것이 현실의 어떤 고리와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꺼내야만 현실의 독자들이 그것을 자신의 것처럼 실감나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가 몽롱해지거나 관념성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집에 실리 시들은 모두 잘 다듬어진 인상을 주면서도 끝내 몽롱함이 걷혀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내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시집 한 권을 채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다.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할 때 그 나와 남 사이의 틈을 얼마만큼 메울 수 있느냐 하는 점이 어려운 일이고, 내가 남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끝내 보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언젠가는 청산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기 때문이다.

  스스로 껍질을 벗으면 그 껍질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매미가 빠져나간 허물처럼. 매미가 매미의 허물을 버리고 매미의 울음소리를 낸다면 다행이지만, 꾀꼬리 소리를 낸다면 그보다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패기와 오기 사이에서 깊이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6. 12. 25.]

 

353□나는 궁금하다□전남진, 문학동네 시집 63, 문학동네, 2002

  기형도를 많이 닮았는데, 솔직하지 못하는 것이 다르다. 추억이 풍성한 자는 결코 도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럴 만큼 이 시집 속의 추억이 차지한 공간은 크다. 그 크기 때문에 앞의 도시 정서를 노래한 시들은 거짓으로 보인다. 기교가 이쯤에 이르면 무의식이 저지르는 상반성 내지는 사기성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버리지 못하는 욕심 때문이다. 버리지 못하면 버리지 못한 것만을 잃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잃는다. 이른바 ‘세계’는 그런 것이다. 어정쩡한 곳에 서있는 것은 시인의 자세가 아니다.

  또 한 가지는 묘사가 너무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산문의 특징이다. 비유를 썼는데, 그 비유가 기계처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면 부족할 것은 없지만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비유는 정확한 것이 아니라 늘어진 것이다. 그 늘어짐 사이로 읽는 이의 상상력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시의 기교는 정확한 표현을 찾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한자는 시와는 상관이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겠다.★★☆☆☆[4336. 12. 25.]

 

354□내 기억의 청동숲□김철식, 문학동네 시집 51, 문학동네, 2001

  상상력이 독특하고 시어를 다루는 능력도 있다. 그런데 시들이 주제가 빈약하다. 동원되는 이미지들의 양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작다. 그래서 허우대만 멀쩡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주제가 사랑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많은 시들이 사랑의 체험을 말하고 있는데 원래 사랑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어서 진행될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만 꺼지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주제를 다룬 탓도 있다. 따라서 먼저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를 좀 더 분명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고, 그것은 내가 무엇을 볼 것인가를 정하는 일로 직결된다. 결국 세계관의 문제이다. 세계를 보고 실천하는 시각을 확립하는 데는 세월이 좀 걸린다. 그러기까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한자를 버리는 일이다.★★☆☆☆[4336. 12. 29.]

 

355□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정지원, 문학동네 시집 69, 문학동네, 2003

  시에서 할말이 분명하다는 것은 중요한 장점이다. 그런 시들은 시가 짧아도 힘차다. 이미지의 구조가 좀 허술해도 괜찮다. 의미의 등뼈가 확실하게 서있기 때문이다. 뼈 없는 이미지들이 갖기 쉬운 그 흐믈흐믈함이 없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이다. 이 시집이 그런 장점을 갖추었다. 그리고 할 말이 자신의 것에만 그치지 않고 세상까지 배려할 줄도 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 들어있는 시들은 그런 장점을 갖추었으면서도 그 감정의 출발점이 자신의 과거 체험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 분노와 절망이 이 정도쯤 쏟아져 나오면 이제는 다른 곳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런 분노가 밀어낸 시들은 팽팽하지만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 동안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할 말이 분명하고 용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문제까지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말하는 방법을 좀 더 다양하게 할 필요가 있다.★★☆☆☆[4336. 12. 29.]

 

356□사랑이여□박재삼, 실천문학의 시집 41, 실천문학사, 1987

  시가 아주 느슨하게 긴장을 잃고 풀어졌다. 일부러 긴장을 푼 것 같다. 시의 주요 내용이 사랑이고, 제목도 사랑이기 때문에 평이한 문체로 쓰려고 한 의도가 그렇게 나타난 것 같다. 그런데 그 풀린 긴장을 살아온 삶의 관조와 그 무게로 버티려고 했는데, 너무 풀려서 그 여유부림조차도 늘어졌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표현들이 좀 산만하다. 좀 더 쉽게 표현할 수 있는데 정제가 덜 된 듯한 부분들이 너무 많다. 다만 박재삼 시의 특징이랄 만한 어떤 형상력이 그나마 마지막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시가 되려면 이런 굴절은 거쳐야 한다는 나름대로 만든 기준이 느껴져서 그것이 오래 시를 쓴 시인의 관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바로 그 복잡한 생각의 구도 때문에 사랑시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아주 단순하고 직접 와 닿는 구조와 이미지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곳에 실린 사랑시들은 너무 복잡한 생각을 요구한다. 아마도 이것은 시가 뭔가 그럴듯한 것을 담아야 한다는 시인들의 고집 같은 것인데, 그대나 당신이 신의 그것으로도 읽히도록 배려하다 보니 이런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사랑시는 어떻게 써도 신의 문제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4336. 12. 30.]

 

357□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이향지, 나남출판, 2001

  자연물 중에서도 특정 지명을 가진 대상을 시로 표현할 때는 대상이 주는 이미지의 고정성을 이용하여 얼마만큼 내 이야기를 실어내느냐에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 너무 대상에 집착을 하다 보면 내가 할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상만 묘사하다 끝나며, 너무 내 이야기에 집착을 하면 그 대상이 시에서 사라져버리기가 일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을 끌어들이면서도 내 이야기를 잃지 않는 긴장과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 이 방법을 고안해 내느냐 하는 것이 성패를 좌우한다.

  이 시집의 시들은 아주 성실하게 잘 대상을 묘사했다. 그런데 대체로 대상의 고정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산에 대한 묘사를 하는 과정에서 내 감정을 간간이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선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방법인데, 문제는 선시는 선시가 갖는 특수한 화법 때문에 묘한 상징성을 갖고 전달되는데 반해 이곳의 시들은 대개 시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이 다르다. 그 효과는 비교해볼 것도 없다. 내 이야기가 너무 적어서 대상만 크게 드러났다. 그리고 간간이 끼어있는 한자는 불필요한 사마귀 같다.★★☆☆☆[4336. 12. 30.]

 

358□동두천□김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9, 문학과지성사, 1979

  ‘동두천’ 연작은 다시 읽어도 명작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큰 대상과 싸우다 얻은 감정을 시로 표현할 때는 복잡한 구조를 띠게 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보통은 나에게 그런 압력을 가한 대상에 대해 묘사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 대상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문제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어떤 사건이 내 마음속에 어떤 모습으로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중심에 놓고 거기에 필요한 실제사건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래서 산문이나 보고문으로 전락하지 않고 시의 긴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시인의 놀라운 능력이다. 시가 자신의 내면 감정을 드러내는 양식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외부사건을 다루는데도 시에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초점이 맞춰져있고, 그곳에서 사건이 풀려 나온다. 자신의 내부에서 굴절된 감정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실제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가 힘들고 그것이 시의 곳곳을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겨두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분명치 않은 감정에 집착하면 시가 길고 장황할 뿐 내용이 부실한 흠을 드러내게 된다. ‘영동행각’ 연작이 그런 경우이다. 이것은 동두천의 구조를 변형시키지 않은 채 동두천이 가진 비극의 구도를 그렇지 못한 곳에 적용시켰을 때 나타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다른 발상과 방법으로 다루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시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구도는 단단한데 이상하게도 긴장이 떨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내용의 무게가 그 긴장을 받쳐주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게다가 과도한 한자는 그런 기장을 더욱 무디게 한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표점의 문제이다. 특히 마침표가 그렇다. 정말 많은 시인들이 시에서 마침표를 쓰지 않는다. 그것이 이미지를 다음 행으로 연결시켜주는 효과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외국의 표기법을 원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시의 정신이라는 충정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굳이 마침표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다면 이미 국가에서 정하고 문자 사회의 합의가 이루어진 관행과 법칙을 스스로 지키지 않아야 할 어떤 절박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그건 무책임이거나 오만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아야 할 문법 법칙이 있다면,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하는 것이 시의 본래 임무가 아니라면 굳이 특별한 효과를 노리는 것도 아닌데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무지한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집에서는 그것조차도 일관되지 않는다. ‘갱목’까지는 마침표가 없다가 ‘무전여행’부터는 마침표가 찍혀있다. 그 뒤쪽으로 오면 어떤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것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심각한 문제이다.★★★☆☆[4336. 12. 31]

 

359□자신 없는 것들은 걸려있다□금기웅, 문학동네 시집 68, 문학동네, 2003

  한 시선으로 인식한 세계를 일정한 수준의 작품으로 풀어내는 끈기와 저력이 놀랍다. 세상을 눈을 보는 눈과, 그것을 시의 인식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이 적절하게 결합하여 시마다 놀라운 세계를 빚고 있다. 그것도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런데 뭐랄까? 너무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 때문에 오히려 답답하다.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까지 그렇게 해주니까 이미지의 전개 속도가 오히려 늦어지고 있어서 시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이미 길을 알고 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잔소리하는 식이다.

  또 한 가지는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여 정작 할 말이 분명치 않은 이미지들이 많다는 점이다. 아무리 참신한 이미지라고 하더라도 이미지는 어차피 무언가를 대신 알려주는 기호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의 맥락 안에서 그것이 배치되지 않으면 허망하다. 이미지만을 위한 이미지는 무미건조해진다. 애써 얻은 이미지를 버리지 못하여 그냥 둔 부분이 곳곳에서 눈에 띄고 그것이 시의 군더더기를 만든다.★★★☆☆[4336. 12. 31]

 

360□산촌엽서□나태주, 문학사상 신작시집, 문학사상사, 2002

  화려한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간편한 복장만으로 인생을 돌아보는 소박한 맛이 있는 시들이다. 거의 모든 기교를 다 버리고 생각만을 단련하여 썼는데, 그것이 아주 빛을 낸다. 그것이 나이가 든 자의 측면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오히려 깔끔하다. 나이 들면 기교를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인데, 바로 그 지점에 와있다. 화려한 기교를 부린 것보다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다만 세계가 너무 자신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고, 비슷한 발상이 반복되고 있어서 지루한 감이 있지만, 그것은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니 굳이 단점이랄 것도 없다. 하지만 너무 태만한 태도로 나온 작품도 적지 않은 것이 흠이다. 시가 간편해진다고 해서 작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데, 주변의 소품만을 담은 것도 흠이라면 흠이다. ‘가을 편지 2001’ 같은 작품은 아예 싣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수주의자가 되는 건 말릴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어떤 상황에서든 무리다. 나이를 먹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4337.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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