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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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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63
2015년 02월 11일 16시 01분  조회:2014  추천:0  작성자: 죽림

 

621□오래된 엽서□안상학, 시작시인선 33, 천년의시작, 2003

  가던 길이 막히면 물은 고인다. 그냥 고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위를 높이면서 그 맨 밑바닥에는 수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장전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새로운 길이 뚫리면 무서운 힘으로 돌진하며 거침없이 내닫는다. 말하자면 이 시집은 그런 모색의 장이다.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감정들이 발견과 인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해 더듬거리는 더듬이가 곳곳에 내장돼있다. 주변 사람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그런 것이고, 자신이 딛고 있는 자연 환경을 친절하게 묘사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너무 많은 정력을 묘사에 소비하고 있다. 한자도 그런 소비 중의 하나이다. ‘하지정맥류’ 같은, 큰 시야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수압을 추가해야 한다.★★☆☆☆[4337. 6. 10.]

 

622□나비의 침대□김형술, 시작시인선 2, 천년의시작, 2002

  사물을 보는 독특한 시선이 확립돼있고, 그것을 집요하게 풀어내는 노력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장황하달까? 내용에 너무 많은 수사나 이미지들이 동원되고 있어서 시의 경제성을 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듯하다. 시가 풀어져서 안 될 것은 없지만, 그렇기 위해서는 시 이전의 어떤 논리가 필요하다. 시는 긴장과 압축을 생리로 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의 내용이 긴장과 압축으로 해도 좋고 그래야만 빛을 더 발할 수 있는데 그 반대로 풀어진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말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런 군더더기를 한 꺼풀 더 걷어내야만 할 것 같다.★★☆☆☆[4337. 6. 11.]

 

623□나무 비린내□김영준, 시작시인선 28, 천년의시작, 2003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것처럼 말한다는 점에서 시는 일종의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을 하는 시인은 거짓말쟁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에서 쓰는 그런 거짓은 일종의 방법이고, 그 방법은 심중에 품은 어떤 것을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악의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좀 거짓말을 잘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시집의 시인은 너무 정직하다. 자신의 할 말만을 꾸밈없이 전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의 거짓성이 만드는 풍부한 울림이 거의 없다. 이렇게 거짓을 이용할 뜻이 없을 경우에는 그대로 독자의 가슴을 섬뜩하게 베어버릴 수 있는 날카로움과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불교의 이미지들이 그런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좀 더 깊어지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하겠다. 한자는 탈출구를 가로막은 빗장에 지나지 않는다.★☆☆☆☆[4337. 6. 11.]

 

624□지나가나 슬픔□조항록, 시작시인선 5, 천년의시작, 2002

  심리를 묘사로 대체하는 것이라든지, 비유체계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을 보면 시에서 필요한 기법을 다 배운 것 같은데, 정작 자신의 육성이 없다. 이것은 시의 기법 쪽의 문제라기보다는 내용 쪽에서 오는 문제이기 쉽다. 시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의 이미지가 보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따라가면서 시를 쓰지 말고, 먼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분명히 한 다음에 거기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처럼’으로 연결되는 표현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그 표현들이 너무 밋밋하고 새로운 맛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처럼’은 연결사지만 그것이 그냥 표현을 위한 표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직유라고 하더라도 내용을 강하게 환기해서 상징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작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참신해서 눈을 확 잡아끄는 것이던가 해야 한다. 한자는 불필요한 비유이다.★☆☆☆☆[4337. 6. 11.]

 

625□일개의 인간□주종환, 시작시인선 3, 천년의시작, 2002

  물신화한 자본과 그 종속자들을 야유하고 풍자하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나는 시집이다. 너무 솔직하다고 할까? 우직하다고 할까? 다른 시집들이 현란한 기교와 복잡한 상징을 써서 공격하는 데 견주면 이 시집의 방법은 너무나 단순하다. 그냥 논리로써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욕하는 것이다. 일종의 장광설 전법이랄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시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생각의 뼈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의 뼈를 직접 드러내서 쓰는 시들은 그 깊이와 날카로움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의 문제와 이어지지 않으면 공염불로 전락하기 쉬운, 허약한 위치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장판교의 장비도 꾀를 썼기 때문에 조조의 백만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장판교에서 혼자 서있기에는 대군의 기가 너무 세다. 한자는 부실한 무기이다.★★☆☆☆[4337. 6. 11.]

 

626□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정병근, 시작시인선 6, 천년의시작, 2002

  사물의 존재 근거와 방식을 인식하고 그것을 시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보통의 능력과 노력 가지고는 되지 않는 일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그런 행위를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이 시집의 시인은 이런 점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인식의 밝기가 자신의 앞길을 환히 비추고 있어서 시인의 눈 속에서 사물들은 전혀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며 살아난다. 이 점 그 누구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이 시인만의 독특한 점이 있다.

  아쉬운 것은 그 인식을 잘 드러내는 방법에 좀 서툴다는 점이다. 많은 시들에서 생각이 조금만 더 뻗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쉬운 그 자리에서 멈추고 있다. 이것은 인식 훈련의 깊이와도 관련이 있다. 아직 성숙한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큰 시인이 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엿보인다. 한자는 쓸수록 장애가 될 것이다.★★☆☆☆[4337. 6. 11.]

 

627□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한혜영, 시작시인선 4, 천년의시작, 2002

  습작을 착실하게 배운 시인이다. 적당히 살을 입힐 줄도 알고, 에둘러 말할 줄도 안다. 그런데 습작은 건너가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기법을 그대로 간직하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가 대체로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쓰였고 곳곳에서 등단용 시 쓰기의 흔적이 아주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단단한 껍질에 갇혀서 좀 답답하다. 애써 판독해서 읽어내도 그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내용이라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쉬운 내용은 쉽게 써야 하고 어려운 내용이라서 어려운 형식에 담아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꾸 옷을 껴 입힐 필요가 없다. 적당한 두께로 옷을 입히는 것도 아주 중요한 기법인데, 대체로 옷이 너무 두껍다. 한자는 불필요한 장식이다.★★☆☆☆[4337. 6. 11.]

 

628□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이영수, 시작시인선 7, 천년의시작, 2002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암시하는 방법이 일관되게 적용된 시집이다. 묘사이기 때문에 할 말이 그림 뒤로 숨고 읽은 자가 거기서 어떤 결론을 유추하도록 시가 이루어졌다. 그러니 방법상으로는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런 <제시-유추>로 요약되는 이런 시도는, 실험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시가 아니라 수수께끼에 가깝다. 시와 수수께끼는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근본이 다르다. 시는 정서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수수께끼는 일부만을 보여줌으로써 낸 사람과 맞추는 사람 사이에 이미 합의된 어떤 내용을 풀어가는 오락의 일종이다. 이런 오락으로 시의 방법론을 삼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런 시도를 굳이 폄하할 것은 없지만, 쾌락화한 유미주의 취향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4337. 6. 12.]

 

629□미로 여행□김참, 시작시인선 8, 천년의시작, 2002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거울, 그림, 눈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만큼 이것이 시작의 원리를 이루고 있다. 결국 보는 방법과 방향을 바꾸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각각의 묘사는 거의 완벽에 가까워 시인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지 뒤에 숨어있다. 그런데 그것이 기억의 굴절에 의해 묘하게 뒤섞여있다. 일종의 무의식 영상 짜깁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 한쪽은 자신의 과거와 밀접하게 연관돼있고, 한 편은 자유로운 상상에 닿아있어서 정신의 어떤 해방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예감만 느껴질 뿐이다. 무의식의 빛깔은 검정이다. 과거의 빛깔도 그렇다. 검다는 말이 한 줄 건너 한 번씩 나오는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시를 보는데는 특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 같다.★★☆☆☆[4337. 6. 12.]

 

630□두 번 쓸쓸한 전화□한명희, 시작시인선 10, 천년의시작, 2002

  시의 힘은 정직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그것을 노래하는 방법도 정직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굳게 다져진 할 말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온다. 기교로 자신을 가리는 데 익숙한 시집들 사이에서 이런 정직함은 용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좀 더 주제를 단조해서 단단하게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넋두리와 자조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 정직의 힘이 반감된다. 울림의 깊이를 깊게 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4337.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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