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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400선 ㄷ
2015년 02월 13일 16시 51분  조회:3421  추천:0  작성자: 죽림

3. 순수 서정과 모더니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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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떠나가는 배

                                     

                                     - 박용철(朴龍喆)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 희살짓는다 : 훼방을 놓는다는 뜻으로 '헤살짓는다'의 전라도 사투리. 

({시문학} 창간호, 1930.3)

 

 

101. 싸늘한 이마

 

                                        - 박용철(朴龍喆)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시문학} 창간호, 1930.3)

 

 

102.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金永郞)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시문학} 창간호, 1930.3)

 

 

 

103.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金永郞)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오매 : '어머나'의 전라도 사투리.

* 장광 : 장독대.

* 기둘리니 :'기다리니'의 전라도 사투리.

* 자지어서 :'잦아서, 빠르고 빈번하여'의 전라도 사투리.

({시문학} 창간호, 1930.3)

 

 

104.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金永郞)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시문학} 2호, 1930.6)

 

 

105.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金永郞)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시문학} 3호, 1931.3)

 

 

106.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金永郞)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학} 3호, 1934.4)

 

 

107. 북

                                        - 김영랑(金永郞)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몰이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伴奏)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 만갑 : 조선 시대의 이름난 명창 송만갑을 뜻함.

* 컨덕터 : 지휘자(conductor).

(시집 {영랑 시집}, 1935)

 

 

108. 오월(五月)

 

                                      - 김영랑(金永郞)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문장} 6호, 1939.7)

109. 독(毒)을 차고

 

                                         - 김영랑(金永郞)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문장} 10호, 1939.11)

 

 

110. 춘향(春香)

 

                                         - 김영랑(金永郞)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문장}18호, 1940.7) 

 

 

111.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辛夕汀)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동광} 24호, 1931.8)

 

 

112.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辛夕汀)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시집 {촛불}, 1939)

 

 

113.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辛夕汀)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조선일보}, 1933.11.30)

 

 

114. 들길에 서서

 

                                        - 신석정(辛夕汀)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문장} 5호, 1939.6)

 

 

115. 작은 짐승

                                     

                                        - 신석정(辛夕汀)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서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문장} 7호, 1939.8)

 

 

116. 슬픈 구도(構圖)

 

                                       - 신석정(辛夕汀)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 하늘 별이드뇨.

({조광}, 1939.10)

 

 

117.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 신석정(辛夕汀)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문장} 24호, 1941.3)

 

 

118. 카페 프란스

 

                                        - 정지용(鄭芝溶)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롵[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 루바쉬카 : 러시아 남자들이 입는 블라우스 풍의 상의.

* 보헤미안 : 집시(Gypsy)나 사회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 페이브먼트: 포장도로.

* 패롯 : 앵무새.

* 울금향 :튤립(tulip) 

({학조} 창간호, 1926.6)

 

 

119. 향수(鄕愁)

 

                                        - 정지용(鄭芝溶)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해설피 : 느리고 어설프게.

* 함초롬 :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 성근 : 드문드문한.

({조선지광} 65호, 1927.3)

 

 

120. 말

 

                                      - 정지용(鄭芝溶)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조선지광} 69호, 1927.7)

 

 

121. 유리창(琉璃窓)

 

                                      - 정지용(鄭芝溶)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열없이 : 맥없이.

({조선지광} 89호, 1930.1)

 

 

122. 그의 반

 

                                          - 정지용(鄭芝溶)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 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시문학} 3호, 1931.10)

 

 

123. 고향(故鄕)

 

                                        - 정지용(鄭芝溶)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동방평론} 3호, 1932.7)

 

 

124. 난초(蘭草)

 

                                         - 정지용(鄭芝溶)

 

난초잎은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잎은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 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굽이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춥다.

({신생} 37호, 1932.12)

125. 바다 2

 

                                         - 정지용(鄭芝溶)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시원} 5호, 1935.12)

 

 

126. 구성동(九城同)

 

                                        - 정지용(鄭芝溶)

 

골짝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청색지} 2호, 1938.8)

 

 

127. 장수산(長壽山) 1

 

                                        - 정지용(鄭芝溶)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더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

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

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

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 然)히* 슬

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벌목정정: 나무를 베는 소리가 '정정'함. '정정'은 의성어.

* 올연히 : 홀로 우뚝하게.

({문장} 2호, 1939.3)

 

 

128. 춘설(春雪)

 

                                       - 정지용(鄭芝溶)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 서늘옵고 : 서느렇고.

* 이마받이 : 이마를 부딪치는 짓.

* 옹송그리다 : 궁상스럽게 몸을 옹그리다.

* 아니기던 : 아니하던.

* 핫옷 : 솜을 두어서 지은 옷.

({문장} 3호, 1939.4)

 

 

129. 백록담(白鹿潭)- 한라산 소묘

 

                                          -정지용(鄭芝溶)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

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

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

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

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壻?)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

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尺)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

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

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

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

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솨 - 솔

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덩쿨 기어

간 흰돌배기 꼬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避)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이(石 ) 별과 같은 방울

을 달은 고산식물을 색이며 취(醉)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

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어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

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

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

禱)조차 잊었더니라.

({문장} 3호, 1939.4)

 

 

130. 비

 

                                          -정지용(鄭芝溶)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문장} 22호, 1941.1)

 

 

 

131. 인동차(忍冬茶)

 

                                           - 정지용(鄭芝溶)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잠착(潛着)하다 :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골똘하게 쓰다.

({문장} 22호, 1941.1)

 

 

132. 정주성(定州城)

 

                                            - 백 석(白石)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조선일보}, 1935.8.31)

 

 

 

133. 여우난 곬족(族)*

 

                                             - 백 석(白石)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 곬족 : 여우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 포족족하니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 매감탕 : 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물로 진한 갈색.

* 토방돌 : 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오리치 : 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저녁 숟가락 또는 저녁밥.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아랫방.

* 조아질하고 - 제비손이구손이하고 : 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 화디 : 등장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 홍게닭 : 새벽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 무이징게 국 : 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조광}, 1935.12) 

 

 

 

134. 가즈랑집*

 

                                           - 백 석(白石)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구석에 조그마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시집 {사슴}, 1936)

 

 

135. 모닥불

 

                                            - 백 석(白石)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한 이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 개니빠디 : 개의 이빨.

* 너울쪽 : 널빤지쪽.

* 짗 : 깃.

* 개터럭 : 개의 털.

* 재당 : 재종(再從). 육촌.

*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 몽둥발이 :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시집 {사슴}, 1936)

 

 

136. 여승(女僧)

 

                                            - 백 석(白石)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 금전판 : 금광.

* 섶벌 : 재래종 일벌.

(시집 {사슴}, 1936)

 

 

137.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 오막살이. ({여성}, 1938.3)

138. 고향(故鄕)

 

                                          - 백 석(白石)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 문학} 2호, 1938.4)

 

 

139. 팔원(八院)- 서행 시초(西行詩抄) 3

 

                                            - 백 석(白石)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

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내지인 : 일본 본토인이란 뜻으로 일본인이 스스로를 일컫던 말.

* 내임 : 요금이라는 뜻의 일본말. 

({조선일보}, 1939.11.10)

 

 

140.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 백 석(白石)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풍} 창간호, 1948.10)

 

 

141. 오감도(烏瞰圖) : 시 제1호

 

                                           - 이 상(李 箱)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오.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조선중앙일보}, 1934.7.24)1

 

142. 꽃나무

 

                                           - 이 상(李 箱)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 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가톨릭 청년} 2호, 1933.7)

 

 

143. 이런 시

 

                                            - 이 상(李 箱)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 내어놓고보니 도무

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 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

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

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들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

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

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

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그만찢어버리고

싶더라.

({가톨릭 청년} 2호, 1933.7)

 

 

144. 거울

 

                                         - 이 상(李 箱)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가톨릭 청년} 5호, 1933.10)

 

 

145. 지비(紙碑)*

 

                                          - 이 상(李 箱)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 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부부(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무사(無事)한세상(世上)이병원(病院)이고꼭치료(治療)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끝끝내있다.

 

* 지비 : 이상(李箱)의 조어(造語)로서, 석비(石碑)의 돌을 '종이'로 환치한 것. 이로써 '기념(紀念)'에 대한 반어적 태도를 보여 준다.

({조선중앙일보}, 1935.9.15)

 

 

146. 가정(家庭)

 

                                           - 이 상(李 箱)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 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 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 제웅 : 짚으로 만든 모조 인형.

* 식구 : 여기서는 아내의 호칭.

(『가톨릭 청년』34호, 1936.2)

147. 기상도(氣象圖)

 

                                         - 김기림(金起林)

 

세계의 아침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 [스마트라]의 동쪽. …… 5 [킬로]의 해상(海上) …… 일행 감기(感氣)

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 시. ……

({기상도} 제1부, 1936)

 

 

148.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여성}, 1939.4)

 

 

 

149. 성호 부근(星湖附近)

 

                                        - 김광균(金光均)

 

1.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 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멀 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조선일보}, 1937.6.4)

 

 

150. 설야(雪夜)

 

                                         - 김광균(金光均)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조선일보}, 1938.1.8)

 

 

151. 와사등(瓦斯燈)

 

                                        - 김광균(金光均)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 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조선일보}, 1939.6.3)

 

 

152. 데생

 

                                        - 김광균(金光均)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고가선 : 고압 전류를 송전하는 전선

({조선일보}, 1939.7.9)

 

153. 외인촌(外人村)

 

                                        - 김광균(金光均)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시집 {와사등}, 1939)

 

 

154. 추일 서정(秋日抒情)

 

                                      - 김광균(金光均)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인문평론}, 1940.7)

 

 

155. 달․포도․잎사귀

 

                                       - 장만영(張萬榮)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시건설} 창간호, 1936.12)

 

 

156. 비의 image

 

                                        - 장만영(張萬榮)

 

병든 하늘이 찬 비를 뿌려……

장미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나의 「소년」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를 지닌 채로.

 

이 오늘 밤은

창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검은 관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마음아, 너는 상복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렴.

 

*동해(童骸) : 어린 아이의 뼈.

*마치 : 못을 박거나 무엇을 두드릴 때 쓰는 연장으로 망치보다 작다. 

({조광} 25호, 1940.2)

 

 

157. 고화병(古花甁)

 

                                         - 장서언(張瑞彦)

 

고자기(古磁器) 항아리

눈물처럼 꾸부러진 어깨에

두 팔이 없다.

 

파랗게 얼었다.

늙은 간호부(看護婦)처럼

고적한 항아리

 

우둔(愚鈍)한 입술로

계절에 이그러진 풀을 담뿍 물고

그 속엔 한 오합(五合) 남은 물이

푸른 산골을 꿈꾸고 있다.

 

떨어진 화판(花瓣)*과 함께 깔린

푸른 황혼의 그림자가

거북 타신 모양을 하고

창 넘어 터덜터덜 물러갈 때

다시 한 번 내뿜는

담담(淡淡)한 향기.

 

* 화판(花瓣): 꽃잎.

({가톨릭 청년} 10호, 1934.2)

 

 

158. 나비

 

                                        - 윤곤강(尹崑崗)

 

비바람 험살궂게 거쳐 간 추녀 밑

날개 찢어진 늙은 노랑나비가

맨드라미 대가리를 물고 가슴을 앓는다.

 

찢긴 나래에 맥이 풀려

그리운 꽃밭을 찾아갈 수 없는 슬픔에

물고 있는 맨드라미조차 소태 맛이다.

 

자랑스러울손 화려한 춤 재주도

한 옛날의 꿈조각처럼 흐리어

늙은 무녀(舞女)처럼 나비는 한숨진다.

({시문학} 3호, 1930.5)

 

 

159. 내 소녀(少女)

                                       

                                      - 오일도(吳一島)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박사(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시원} 4호, 19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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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명의 의지와 전통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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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문둥이

 

                                      - 서정주(徐廷柱)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161. 화사(花蛇)

 

                                          - 서정주(徐廷柱)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시인부락} 2호, 1936.12)

 

 

162. 자화상(自畵像)

 

                                        - 서정주(徐廷柱)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

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

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실제로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일가의 머슴살이를 하였다.

* 한 주 : 한 그루.

* 달을 두다 : 여자가 아이를 배다.

({시건설}, 7호, 1939.10)

 

 

163. 귀촉도(歸蜀途)

 

                                       - 서정주(徐廷柱)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銀河)ㅅ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춘추} 32호, 1943.10)

 

 

164. 깃발

 

                                        - 유치환(柳致環)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조선문단}, 1936.1)

 

 

165. 생명의 서(書)

 

                                         - 유치환(柳致環)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동아일보}, 1938.10.19)

 

 

166. 일월(日月)

 

                                        - 유치환(柳致環)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문장} 3호, 1939.4)

 

167. 바위

 

                                        - 유치환(柳致環)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삼천리}, 1941.4)

 

 

168. 광야(曠野)에 와서

              

                                         - 유치환(柳致環)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 흥안령 : 북만주의 지명.

* 암수 : 어두운 수심.

* 호읍 : 목놓아 소리 내어 욺. (시집 {생명의 서}, 1947)

 

 

169. 춘신(春信)

 

                                         - 유치환(柳致環)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시집 {생명의 서}, 1947)

 

 

170. 고독(孤獨)

 

                                       - 김광섭(金珖燮)

 

하나의 생존자(生存者)로 태어나 여기 누워 있나니

 

한 칸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氣流)의 파동(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맑은 성(性) 아름다운 꿈은 멀고

그리운 세계의 단편(斷片)은 아즐타.

 

오랜 세기(世紀)의 지층(知層)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신경(神經)도 없는 밤

시계(時計)야 기이(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시원} 2호, 1935.4)

 

 

171. 동경(憧憬)

 

                                         - 김광섭(金珖燮)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 사화(詞華): 아름답게 수식한 시문(詩文), 또는 뛰어난 시문.

({조광}, 1937.6)

 

 

 

172. 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金珖燮)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시집 {동경(憧憬)}, 1938)

 

 

173. 마음

                                            - 김광섭(金珖燮)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문장} 5호, 1939.6)

 

 

174.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 김상용(金尙鎔)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문학} 2호, 1934.2)

 

 

 

175.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咸亨洙)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176. 파초(芭蕉)

                                   

                                        - 김동명(金東鳴)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조광}, 1936.1)

 

 

177. 내 마음은

 

                                        - 김동명(金東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조광}, 1937.6)

 

 

178. 밤

                       

                                        - 김동명(金東鳴)

 

밤은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

나는

잠의 쪽배를 타고 꿈을 낚는 어부다. (시집 {하늘}, 1948)

 

 

179. 사슴

 

                                         - 노천명(盧天命)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시집 {산호림}, 1938)

 

 

180. 푸른 오월

 

                                        - 노천명(盧天命)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시집 {산호림}, 1938)

 

181. 남사당(男寺黨)

 

                                         - 노천명(盧天命)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조라치 : 원뜻은 절에서 청소 등의 일을 하는 하인이지만, 여기서는 남사당패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삼천리}, 1940.9)

 

 

182.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지훈(芝薰)

                                        - 박목월(朴木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상아탑} 5호, 1946.4)

 

 

183.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朴木月)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상아탑} 6호, 1946.5)

 

 

184. 청노루

 

                   - 박목월(朴木月)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85.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朴木月)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86. 묘지송(墓地頌)

 

                   - 박두진(朴斗鎭)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壻?)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문장} 5호, 1939.6)

 

 

187. 향현(香峴)

                   

                                       - 박두진(朴斗鎭)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너머, 큰 산 그 너멋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래 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직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문장} 5호, 1939.6)

 

 

188.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朴斗鎭)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싯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89. 고풍 의상(古風衣裳)

 

                    - 조지훈(趙芝薰)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 부연 : 처마를 뒤쪽으로 올라가게 하여 멋을 내도록 쓰는 짧은 서까래.

* 운혜 : 울이 깊고 작은 가죽신으로 앞 코에 구름 무늬를 수놓음.

* 당혜 : 앞뒤에 당초 무늬를 놓은 여자의 가죽신.

* 호접 : 나비.

({문장} 3호, 1939.4)

 

 

190. 승무(僧舞)

 

                    - 조지훈(趙芝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나빌레라 : 나비로구나.

({문장} 11호, 1939.12)

 

 

191.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趙芝薰)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 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문장} 13호, 1940.2)

 

 

192. 완화삼(玩花衫)

목월(木月)에게

 

                   - 조지훈(趙芝薰)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상아탑} 5호, 1946.4)

 

 

193. 낙화(落花)

 

                  - 조지훈(趙芝薰)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성긴 : 드문드문한.

* 우련 :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 저허하노니 : 두려워하노니. 마음에 꺼려 하노니.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94. 고사(古寺) 1

 

                     - 조지훈(趙芝薰)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95. 마을

 

                    - 박남수(朴南秀)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문장} 9호, 1939.10)

 

 

196. 초롱불

 

                    - 박남수(朴南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상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 ({문장} 10호, 1939.11)

197. 밤 길

 

                    - 박남수(朴南秀)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 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둑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 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문장} 12호, 1940.1)

 

 

198.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 김종한(金鐘漢)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 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도 흘러 오는데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

({조선일보}, 1937.1.1)

 

 

 

199. 풍장(風葬)

                    - 이한직(李漢稷)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뜯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 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날마다 밤마다

나는 한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워했다.

 

깨어진 오르간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문장} 4호, 19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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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펌] 3. 한국현대시 400선|작성자 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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