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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피카소와 녀인들
2015년 02월 15일 17시 54분  조회:4775  추천:0  작성자: 죽림

피카소는 여인들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지만, 정식 결혼은 일생에 두 번만 했다.
여러 여인들 중 7명은 피카소의 작품에 영감을 준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림의 암살자'라고 불리는 너무 나도 유명한 피카소, 그에게도 예술가로서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지만, 여성편력 또한 그의 생애에 걸쳐 이어졌다. 그는 80여점의 여인들,친구들,시인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피카소가 여인들의 영혼을 양식삼아 작업한 벰파이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

이해하기 힘든 피카소의 그림을 모델이 되어 주었던 여성들을 따라 성장해가는 피카소의 그림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한 하다.

피카소는 숱한 여자들을 사랑했다.
많은 여인들이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중에서 올가 코클로바, 도라 마알, 마리 테레즈, 프랑스와즈 질로, 쟈클린 등이 피카소와 결혼을 하거나 동거 생활을 했던 여인들이었다.

 

 

그는 열정적인 삶을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 여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그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친구였던 화가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충격을 받아 푸른 계통의 어두운 그림(청색시대)만 그리던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그림 스타일을 바꾼다. 화려한 입체파풍의 작업을 많이 했고, 밝은 복숭아 색으로 어릿광대와 곡예사(장미빛 시대)를 주로 그렸다. 첫사랑 페르낭드 올리비에와는 8년간의 동거 끝에 헤어진다.

피카소는 곧 바로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본명 마르센 움베르)과 만난다. ‘기타’란 작품에 ‘나는 에바를 사랑해’라는 글을 써넣을 만큼 적극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에바 구엘은 그가 만난 여자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여성스러웠지만 만난 지 4년 만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 번째 여인은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 1917년 러시아 발레단 공연 무대장식을 맡은 피카소는 우아하고 고전미 넘치는 코클로바에게 끌렸다. 1년 연애 끝에 이듬해 결혼했고, 그때부터 ‘고전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와 사이에 첫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카소는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17세의 어여쁜 소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팔등신의 이 늘씬한 소녀에게 홀려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델이 돼달라고 부탁하고, 그녀는 이후 10년간 피카소의 연인이자 최고의 모델이 된다. 부인 코클로바가 이혼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피카소는 발터와 오랫동안 몰래 사랑을 나눠야 했다.

발터는 주로 그의 작품에서 ‘잠자는 여인’이나 ‘꿈꾸는 여인’으로 표현됐으며, 주로 화려한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발터는 1935년 딸 마야를 낳았으나 피카소는 발터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같은 시기에 부인 코클로바와도 이혼한다.

이듬해인 1936년 피카소는 친하게 지내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로부터 사진작가 도라 마르(본명 마르코비츠 앙리에뜨)를 소개 받는다. 그는 스페인어가 능통하고 지적인 여자였다. 그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했으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우울한 2차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마르는 피카소 작품에서 주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여섯 번째 연인은 법대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던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는 질로의 첫 전시회에서 그를 만났다.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는 동안 피카소는 가족, 삶의 기쁨, 평화 등을 주제로 작업을 했으며, 주로 ‘꽃여인’으로 그려졌다.

전형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피카소와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를 차버린 유일한 여자. 그는 피카소와 헤어진 후 ‘피카소와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 그와의 10년 동거생활을 낱낱이 폭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다.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마지막 여자 자클린느 로크는 피카소가 80세 되던 해 만난 여인이다. 그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이혼녀로, 피카소와 8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

피카소와 함께 한 7명의 여인들은 어머니이자 아내, 친구, 모델로서 그의 작품 열정을 자극했지만 그가 원할 때는 조용히 떠나야 했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극장 로얄석에 앉아 세기의 거장이 만들어 가는 창작의 무대를 구경했던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 그의 연극에 동참해야 했던 것이다.

피카소에 있어 7인의 연인들 중 65세의 피카소와 만나 10년간 동거생활을 했던 질로는 피카소와의 생활을 회고한 회상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 책에는 피카소의 인격이나, 성격, 대인관계, 복잡한 여자관계들이 꾸밈없이 담겨져 있다. 
피카소는 한 여인과 결혼이나 동거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고, 이러한 그의 고질화된 습벽은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인들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피카소 주변에는 그의 명성에 현혹된 여인들이 언제나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는 그러한 여인들과의 일시적인 사랑을 자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한 피카소의 사랑을 진실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라는 책을 저술한 존 버거의 말대로, 그러한 피카소의 여자관계는 여인에 대한 끝없는 욕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인관계에 있어서 그가 보여준 자세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다. 여인들은 그의 욕정, 고독, 공허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즐거움을 건네주지 못하고 시들한 모습을 보이거나 고뇌를 드러내고 인간적인 위안을 요구하는 여인에게 그는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다. 

 

피카소와 함께한 여인들 집중연구


첫번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 만났다. 그녀는 '야성미'가 돋보이는 여성으로 알려졌다.
암울한 '청색시대' 그림을 '장미빛 시대'로 바꾼 연인이다.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두번째 연인 에바는 '청순 가련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으로 1911년(30세)에 만났다. 이 시기는 '분석적 큐비즘'을 넘어 '종합적 큐비즘'이 자리잡는 시기였다.
그녀를 그린 그림 아래 '나의 졸리(애칭:Ma jolie)'라는 글귀도 보인다. 가냘프게 생긴 이 여인은 피카소가 차갑고 날카로운 분석적 큐비즘을 버리고 격정과 선율에 가득 찬 종합적 큐비즘으로 들어설 때 인도자 역할을 맡았다. 
청순 가련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으로 1911년(30세)에 만났다.
피카소는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는1차 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는다. 
피카소는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피카소를 비난했다. 그 이유는 육체적으로 허약한 마르셀을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그녀가 병을 얻었을 때 피카소는 전염될까 봐 혼자 이사를 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에바가 병석에 있을 때 파리 태생의 가비 레스피나스라는 또 다른 애인을 두기도 했다.

 

 

세번째 연인 올가는 발레리나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1917년(36세)에 그녀를 만난 피카소는 종합적 큐비즘을 벗어나  상류 사회 '사실주의' 화풍으로 바뀌기도 했다.

사티의 음악에 디아길레프가 안무를 맡은 장 콕도의 발레 페레이드에무대미술을 맡은 피카소는 36살에 25살의 발레리나 올가와 처음으로 결혼을 한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버림을 받는다.피카소는 곧 바로 열일곱 살 난 처녀 마리 테레즈 발터에게 눈을 돌렸다.
그시기에 피카소는 그의 동료들로부터 큐비즘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큐비즘/여러 시점이 하나의 평면에 그려져있는걸 말한다.

 

 
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는 '천진난만'한 아름다움(18세 연하)을 지녔다고 한다. 피카소가 1927년(46세)에 만난 그녀는 '초현실주의'영향을 받았던 시기에 만났다.
피카소는 특별하게 마리 테레즈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 많은데 그녀는 연인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녀를 6개월 동안이나 쫓아다닌 끝에 마리를 작업실로 데려와 초현실주의 때의 걸작 <거울 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울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순정에 가득 찬 청순한 여인이었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피카소를 보살펴야 한다며 자살한 여인이 바로 마리 테레즈였다. 
그러나 그녀가 스물두 살 때 딸 마리아를 낳자마자 피카소는 몰래 앙리에트 마르코비치를 만나고 다녔다. 앙리에트는 마리 테레즈와 달리 성격이 급하고 날카로운 여자로 프로급 사진가이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앙리에트와 함께 스페인 내전 시기를 보냈다. 생애 최대의 걸작 <게르니카>는 앙리에트와 살 무렵에 그린 것이다.
 

 
다섯 번째 연인 도라 마르는 '지성미'가 돗보이는 여성으로  1936년(55세)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다.
그녀가 대표작 '게르니카'(1937년 작)를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친구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만난 화가이며 사진작가. 현대 미술에 열중했으며 특히,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여섯 번째 연인인 프랑스와즈 질로를 1943년(62세)에 만났을 때  그녀는 22세 젊은 미술학도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술학도였으며 피카소가 63세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의 작업실에 살림을 차렸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 때에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의 작업실에 살림을 차렸다.
이 무렵 피카소는 공산당에 가입했다. 
스페인 내전의 참혹상을 세계에 고발한 <게르니카>로 명성이 드높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뿐" 이라며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이 극적인 사실을 취재하기 이해 열 일곱 살 난 여기자 주느비에브가 찾아왔고 그녀는 취재가 끝난 뒤에도 자주 찾아왔다. 친구 사이인 프랑수아즈와 주느비에브는 서로 이 사실을 모른 채 지냈다. 결국 피카소의 애정 행각을 알게 된 프랑수아즈는 피카소의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먼저 그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늘 자신이 여자 관계를 결정짓던 피카소로서는 이러한 사실이 몹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와중에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들 딸을 법정투쟁을 통해 피카소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녀의 자식들은 뒷날 어마어마한 피카소의 재산을 물려받게 됐다. 프랑수아즈가 떠난 뒤 피카소는 더욱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을 만났다. 이미 70살이 넘은 피카소였지만 젊은 여인에 대한 열망은 그칠 줄 몰랐다. 

 

 
일곱 번째 연인인 자클린은 1953년(72세) 만났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로 피카소 말년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이 때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 
그녀는 커다랗고 짙은 눈망울을 지닌 지중해 풍의 여인이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시기로 그녀는 피카소가 말년에 오직 작품에만 전념하도록 도와 줬다고 한다. 
이혼 경험이 있는 자클린은 1961년 피카소와 비밀 결혼식을 올린다.  훗날, "서른 살의 젊은 여인이 어떻게 곧 여든이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나였지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언제나 "나의 주인님"이라 부르며 헌신적이고 절대적인사랑을 바쳤다. 
또한, 그녀는 피카소의 사후  유산을 둘러싼 법정투쟁과 
다른 여자들이 낳은 피카소 후손들과의 핏줄 싸움까지도 책임졌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197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그가 만났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자클린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가 남긴 작품은 무려 4만 5000점에 달한다.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  3만 점에 달하는 판화 작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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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가 사랑한 여인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짐 없이 그가 사랑했던 7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는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현대미술의 커다란 기둥인 피카소는 여인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던탓인지 그의 작품수는 무려 4만 5000점으로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과 3만 점에 달하는 판화 작품 등을 남겼다.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인과 작품속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첫번째 연인 - 페르낭드 올리비에 (Fernande Oliv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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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올리비에는 회고록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 Picasso et ses amis>에서 피카소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그를 모른다면 피카소는 그리 특별나게 유혹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수상쩍게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집중이 되긴 했다. 여러분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에게서 감지하는 이러한 열정, 내면의 불꽃은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석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어 하자,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어졌다."

 

 

두번째 연인 - 에바 구엘 (Eva Go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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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무척 하얗던 여인. 피카소는 구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 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이 젊은 여인은 결핵으로 죽는다.

 

 

세번째 연인 - 올가 코클로바 (Olga Kokhl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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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공연 때 만난 러시아 무용수, 피카소가 서른 여섯 살 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여인이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네번째 연인 -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 Therese Wa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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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27년 당시 열일곱 살의 건강하고 관능미 넘쳤던 소녀 마리를 6개월동안 쫒아 다닌 끝에 작업실로 데려와 초현실주의때의 걸작 <거울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울 수 있었다. 페르낭드와 에바, 올가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과 달리 그녀는 금발이였다. 그녀가 스물두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리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피카소를 보살펴야한다며 자살한 여인이 바로 마리테레즈였다.

 

 

다섯번째 연인 - 도라 마르 (Dora Ma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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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피카소는 친하게 지내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로부터 사진작가 도라 마르(본명 마르코비츠 앙리에뜨)를 소개 받는다. 피카소의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로 몇시간 그와 예술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이었다. 936년(55세) 피카소가 '파시즘 광기와 싸우던 시절'에 만났다. 그녀는 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했으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진으로 기록했다. 우울한 2차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마르는 피카소 작품에서 주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도라 마르는 우울증 때문에 심리 치료를 받아야만 했는데, 피카소의 친구이자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오랫동안 받게 되었다

 

 

여섯번째 연인 - 프랑스와즈 질로 (Françoise G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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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중에 만난 그녀는 아주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류화가이다. 피카소가 예순세 살 때인 1945년부터 함께 살게 되는데 이 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완벽주의자이고 독점력이 강했던 프랑스와즈는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피카소는 이대에 자신의 아이들을 소재로 해 매혹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남겼다. 여기서 아이들은 때로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습으로, 때로는 자기들끼리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훗날 프랑스와즈는 당시를 솔직하게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이렇게 올가,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와 관계가 계속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피카소와 나의 삶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나는 그들이 피카소의 '푸른 수염 콤플렉스'의 표현이며, 그것이 또 자신이 수집한 이 모든 여자들을 개인 소유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하고자 하는 피카소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그녀들의 머리를 완전히 베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삶이 계속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한 때 그와 함께 살았던 여자들은 나약하게 기쁨과 고통의 소리를 질러댔고, 부서진 인형들처럼 발작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에게 여전히 생명의 숨결이 이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었다. 그녀들의 생명은 피카소의 손이 잡고 있는 끈에 매달려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희극적인, 또는 비극적인 허영을 보탰고 피카소는 그것을 이용했다."

 

 

일곱번째 연인 - 자클린 로크 (Jacqueline Ro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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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말기 작품들은 외재적으로나 내재적으로 성애가 두드러진다.이 때 피카소가 도자기 예술과 '고전 작가의 재해석'에 심취한 시기였다.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마지막 여자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가 72세 되던 해 만난 여인이다. 그녀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이혼녀로, 피카소와 8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 

자클린은 요리를 잘하고 가사일도 잘 돌보았으며 피카소와 에스파냐어로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또한 피카소를 돌보며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는 매력적인 안주인 역할을 했다. 자클린은 피카소보다 13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동안 사심 없이 피카소의 복잡한 재산 문제들을 처리했다. 1986년 10월 15일 피카소의 105번째 생일을 열흘 앞두고 그녀는 피카소의 무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자 그가 만났던 수많은 여인들과 후손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는 목을 매달았으며 자클린은 1986년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했다. 올가와 피카소 사이에 난 아들 파울로는 약물 중독으로 죽었고, 피카소의 손자 파블리토는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자클린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피카소와 연인들에 관한 내용은 2편의 영화로도 나왔다. 첫번째는 1956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다큐멘트리 The Mystery of Picasso (피카소 출연)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베니스영화제 최우수다큐상을 받았으며, 두번째 영화는 1996년 제임스 아이버리 감독의 Surviving Picasso (안소니홉킨스 출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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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에게 여자들이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며,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첫연인이었던 올리비에 비드마이어 피카소는 훗날 이렇게 회고 했다고 한다. 과연 피카소의 연인들은 피카소의 회화에서 붓과 같은 존재였을까....

 

 

 

< 자료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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