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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 고 김학철
2015년 03월 02일 00시 32분  조회:4461  추천:0  작성자: 죽림
 
김학철선생님과의 문학대화

김학철선생의 생애와 문학연구에 도움을 주고싶어
<<문학과 예술>> 1990년 3호에 발표되였던 이 글을 사이트에 올린다.
 

 △사회: 조성일

ㅡ질문: 조성일, 최삼룡, 전성호, 김성호, 조일남, 리상범, 리광일, 김순금.

□대답: 김학철

시  간: 1990년 2월 13일.

지  점: 연변로동강습교육중심 2층 회의실.

△오늘 우리 문학예술연구소에서는 김학철선생님을 모시고 문학대화를 하려 합니다. 이에 앞서 이번 문학대화를 마련하게 된 동기를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문학예술연구소에서는 금년에 연구총서를 한책 펴내려고 합니다. 작년에 《조선족문학예술연구》라는 제목으로 제1집을 내고 금년에 제2집으로 우리 연구소의 연구성과와 사회상에서 연구한 성과를 집성하여 《김학철론》을 출판하려고 합니다. 작년 말에 계획을 작성한 후 연구소분들은 집필에 달라붙었습니다. 이런 단계에 연구소분들은 일부 문제에서 난제에 부딪쳐 작가선생님의 해석을 바라는 것이 있고 하여 직접 김선생님을 모시고 문학대화를 진행하게 되면 우리의 연구작업을 진척시키는데 효과적이겠다고 생각되여 이 모임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선생님께서는 여생에 더욱 많은 일들을 하시려고 분초를 쪼아가면서 창작에 몰두하시기에 시간이 금싸락같이 귀중하지만 우리 연구소를 위해 오늘 오후를 희생시키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김선생님께서 우리 연구소에 돌려주시는 따뜻한 배려에 뜨거운 사의를 표합니다. 

김선생님께서는 40여년간 문학창작에 전력해왔습니다. 하여 조선족인민이 낳은 우수한 작가로 세인들의공인을 받고있으며 또한 3~40년대의 반일무장투쟁에 뛰여나신 항일투사로 많은 사람들의 지목을 받고있습니다. 김선생님은 40년간의 문학창작에서 단편소설창작과 더불어 장편소설창작에서 큰 성과를 따냈습니다. 특히 반일무장투쟁을 서사적인 화폭속에 담은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등을 창작하므로써 큰 성과를 따냈습니다. 특히 반일무장투쟁을 서사적인 화폭속에 담은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등을 창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세계에까지 큰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런가 하면 산문창작 특히 잡문창작에서 우리 문단의 공백을 메웠고 이방면에서 개척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외에 번역, 평론활동 등에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김선생님께서는 친척방문차로 남조선에 가셔서 남조선 문단과 력사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김선생님의 작품을 에워싸고 연구가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도 이것을 계기로 중국 조선족문학을 다시 조명하고 여기에 대해 관심을 모으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로하여 중국조선족문학과 조선반도의 문학교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면에서 김학철선생님의 역할이 매우 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김선생님의 모시고 여러분들이 자기 연구작업에서 부딪친 문제, 알고 싶은 문제를 서슴없이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연구작업을 더욱 추진시켜야겠습니다. 그럼 김선생님께서 질문에 앞서 하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여러분께서 우리 민족의 문학을 계통적으로 연구한다니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왔지만 밑천이 없어서 뒤가 켕깁니다. 이번에 서울에 가서도 문학을 제기하면 참으로 부끄럽더라구요. 

서울에서는 남북조선, 일본, 미국, 카나다, 중국 등의 조선족문학을 모두 합쳐 우리 민족문학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우리 말로 쓴 것이여야지 일본에서 일어로 쓴 것이라던가 미국에서 영어로 쓴 것은 승인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일본에 가서 김달수씨를 만났는데 어릴 때 일본에 건너가서 조선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말은 다하고 듣기도 다 알아듣는데 쓰지를 못한다고 하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더군요. 김달수씨도 자기 작품에서 일본에 있는 우리 조선민족의 생활을 많이 그려냈습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들이 문학이 우리 민족문학이 아닌가? 저는 혼자 잘 모르겠습니다. 문학예술 연구소에서 어떻게 잘 연구하여보십시오.

그래 이번에 서울에 가니깐 솔직한 말이지 우리 중국동포들의 문학을 매우 관심하는데 아주 어리게 보더라구요. 우리 문학이 예술적기교면에서는 확실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건전하지요. 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우리의 문학을 《20년대 수준밖에 안된다.》고하니 제가 있다가 《당신들의 정치가 우리의 20년대 수준밖에 안됩니다.》고 하였지요. 

아래에 동무들의 질문에 대해 아는데까지 대답하면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순서없이 구애를 받지 말고 자유롭게 질문들을 하여봅시다. 

ㅡ우선 선생님의 생평에서 재기되는 문제부터 알고 싶은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되여 남조선에서 북조선으로 넘어오고 북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너 오게 되였는지요?

□제가 이번에 서울에 가서 이와 똑 같은 질문을 받아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간 것은 중편소설 하나 엮을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였습니다. 북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장편소설 하나 엮을만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였습니다.》고 대답하였지요. 기실 저는 1945년 10월 9일 일본에서 전국의 정치범이 동시에 몽땅 석방될 때 나가사끼감옥에서 놓여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시모노세끼에서 나무배로 부산에 왔습니다. 11월 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지요. 이틀후에 조선독립동맹과 련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군인으로 있기가 곤난 하였지요. (김학철선생님은 1941년 태항산의 호가장전투에서 일본놈의 총탄에 왼쪽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형무소에서 다리를 잘랐던 것이다.) 저는 일본감옥에 있을 때부터 문학예술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딴 길은 없으니깐요. 이것이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겠지만… 저는 서울에 오는 길로 당조직에 들어가 있으면서 문학활동을 했어요. 그러나 쉽지 않더라구요. 소질이 없는게 막다른 골목에서 할 수 없이 억지로 선택한 것이니깐 잘 안되지요. 쓰기는 소설을 썼지만 소설이라고 하기가 곤난하였습니다. 그저 르포르타즈라고 하는 편이 나았지요. 선생님들도 남조선이 평론을 보셨겠지요. 《이것이 얘기지 소설이 아니다》옳은 평가지요. 하여튼 이러한 글들을 부지런히 썼습니다. 1년 동안에 꼭 10편을 발표하였지요. (앞표지안의 웃사진을 보이면서) 이것이 내가 새로 왔다고 환영하면서 찍은 거지요. 그런데 1년이 지나니 탄압이 시작되였습니다. 저는 목표가 드러났습니다. 도처에 다니면서 열변을 많이 토했거던요. 그러니 어디에 숨을 데오 없고 하여 조직에서 북으로 넘겼습니다. 1946년 12월 저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림진강까지 내려와서 옹진반도를 거쳐 거기서 해주로 해서 북으로 왔습니다. 정치적국세가 긴박하여 좌익을 탄압하니깐 조직적으로 철퇴한 것이지요. 북조선에 와서는 《로동신문》사에서도 있고 하였는데 글은 별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4년후인 1950년 10월 정치적 리유로 중국에 들어 왔지요. 들어와서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 연구원으로 2년간 있으면서 좀 배우다가 연변으로 나왔습니다. 북경에서 콩나물처럼 뿌리가 땅에 대이지 못하겠으니… 나와서 좀 활동을 하다가 투쟁을 맞았습니다. 

△일생동안 정치풍파를 많이 겪었지요. 

ㅡ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십니까? 소학교는 어디에서 다니시고요? 

□저의 고향은 원산입니다. 저는 1916년 조선 원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소학교는 원산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서울보성고등학교를 다니였습니다. 서울에 외갓집이 있었지요. 

ㅡ 형제분은 몇분이십니까? 

□우리는 삼남매간입니다. 누이동생 둘이 있었지요. 큰누이동생은 42살좌우에 죽고 작은누이동생은 지금 행방불명이 되였습니다. 작은누이동생은 제가 일본감옥에 있을 때 편지도 여러 번 오갔고 또 나가사끼 감옥에서 나올 때 어머님과 함께 저를 맞아주었지요. 

ㅡ선생님께서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결혼은 1947년도에 했습니다. 

ㅡ저는 각도를 좀 바꾸어 선생님의 《격정시대》를 보면서 의문 되던 점을 간단히 물으려 합니다. 선생님께서 《격정시대》에 반영한 선장이란 인물은 1932년에 중국에 건너와 상해에서 테로활동을 하고 선생님의 간력은 1936년도에 들어오신 걸로 되는데 여기에 4년이란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격정시대》가 소설이기에 별문제는 없습니다만 선생님께서도 후기에 쓰셨지만 전기문학이란 각도에서는 이 4년을 어떻게 정리하셨는지요? 

□《격정시대》는 소설입니다. 제가 이번에 서울에 가니깐 모두 《서선장이 선생님이시지요?》하고 묻더군요. 저는 《아닙니다. 저는 김학철입니다.》고 대답하였지요. 모두 꼭 저의 력사 같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서선장의 몸에 작자가 많이 체현된것만은 사실입니다. 서선장이 소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라든가는 모두 저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중국에 들어와서부터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데 무어 쓴 것입니다. 작자의 범위를 벗어난 전체의 이야기를 썼지요. 당시 우리 사람들이 생활과 경력이 대동소이하였지요. 좀 먼저 온 사람도 있고 좀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지요. 제가 후기에도 썼지만 사실은 다 있는 것으로 적당히 조직했을 뿐입니다. 《격정시대》는 기실 우리들의 력사입니다. 력사로 쓰면 매개 사람들을 모두 적겠는데 그럴 수 없어서 소설로 쓴것입니다. 

ㅡ네, 잘 알았습니다. 한가지 더 묻고싶은데요. 선생님의 《격정시대》에서도 그렇고 《작가수업》이란 글에서도 또 《천지》30돌 기념활동에서 하신 말씀에서도 저는 선생님께서는 무단적이거나 허무한 랑만주의를 반대하는 분이라는 인상을 받고있습니다. 이래서 《격정시대》도 끝이 아닌 끝을 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무단적이거나 허무한 랑만주의를 반대하는 문학주장이 《격정시대》에서는 어떻게 체현되였는지요? 

□제가 10년감옥살이에서 나와 해방을 받고보니 예순다섯이 였습니다. 1978년 1월에 만기석방 되고 1980년 12월에 무죄로 해명받았지요. 저는 진시황처럼 어리석지 않아요. 천년을 살고 억년을 산다고 생각지 않아요. 하여 하루빨리 인멸 되여가는 우리의 력사를 구해야 겠다고 생각하였지요. 고무풍선 같은 력사를 후대들에게 남겨서는 안되는거지요. 이번에 서울에 가서도 이 문제를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임무는 바른 력사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전별곡》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걸 전기문학으로 썼지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걸리여 여기 출판사에 들어갔다 쫓겨나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의 력사를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로 하는 형식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격정시대》를 쓴것입니다. 목적이 명확해요. 과거 산해관 이남에서 항일 전쟁을 한 사람가운데서의 죄익들이 력사를 남기라는 것입니다. 실패는 실패 성공은 성공이라고. 물론 제가 나이가 젊다면 좀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올해 벌써 일흔다서입니다. 소설이 되고 안되고 관계없습니다. 그 내용이 전달되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ㅡ선생님의 그 력사에 대한 신성한 사명감에 감복됩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작품들이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한페지를 차지한다는 것도 홀시할수 없지요. 지금 사회상에서 선생님의 조선족문학에 대한 기여를 주요하게 세가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로는 선생님께서도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력사사실을 문자화 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사실주의기치를 고수했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중국조선족문학에서 독특한 풍격 즉 생활의 변증법에 기초한 유모아 적이고 해학적인 필치, 독특한 언어구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세가지 가운데서 선생님 자신으로는 어느 방면의기여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이구, 그건 저로서는 말하기 곤난 합니다. 여러 분들이 좋을 대로 생각해주세요.(웃음)

그러나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개척자는 리욱과 김창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시에서는 리욱이고 서설에서는 김창걸입니다. 이 두 분을 내놓고 그 누구도 개척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창작방법에 있어서 저는 사회주의 사실주의외에는 다른 것은 승인이 안됩니다. 그렇게 실천이 잘되는지는 모르지만 시종일관 그렇습니다. 또 글 쓰는데 유모아가 많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영국의 디켄즈와 미국의 마크 트웬입니다. 그들의 풍자를 저는 매우 즐겨요. 그리고 홍명희의 《림꺽정》, 조설근의 《홍루몽》, 로신의 《아Q정정》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도 해학이 많이 들어있지요. 읽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말이여요. 저는 중국에 와있으면서 《홍루몽》과 《호신전집》들을 원문으로 볼수 있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해요. 저는 파금의 작품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격정이나 사회적인 영향은 모두 승인하지요. 그러나 파금의 문학은 진실만 많지 해학이 적습니다. 너무 엄숙하면 피곤해서 못견디지요. 작품에서 해학, 유모아는 불가결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생을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많이 살아왔습니다. 전투환경과 이른바 투쟁을 받은 생활이 있었는데 그런 간고하기 짝이 없는데서 롱담이 오고갔습니다. 이래서 자기로 자기를 완화해야지요. 저는 일관적으로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더불어 유모아와 해학을 즐깁니다. 

ㅡ선생님의 50년대작품과 80년대작품들을 읽어보면서 선생님께서는 문학창작에 있어서 엄숙한 진실성을 추구한다고 생각되는데요. 문학에서의 진실성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우리 문학이 어느 기생계급의 오락물이 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학은 방법을 통해서도 우리 민족의 소질을 제고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엄숙하게 맑스주의만 웨치고 전통만 찾으면서 오락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오락이 없으면 누가 봅니까? 제가 이 에피소드를 여러 번 이야기 하였는데 어느 전투에서 적의 거점을 소탕내고 그 전리품을 거둘 때의 일입니다. 한놈의 자루속에 책이 하나 있더라구요. 전장에서는 책이 매우 귀했어요. 제가  제꺽 그것을 넣어가지고 와서 이튿날 아침에 펼쳐보니 앞뒤 뚜껑이 다 떨어져나간 우리 글로 된 단편소설집이였어요. 그가운데 《발가락이 닮았다》는 글이 있더라구요. 우리는 돌려보고 나서 《이런 망할놈의 자식이 어디 있나, 남은 전쟁마당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이따위 것을 써가지구 민족의 투쟁의지를 마비시키다니…》하고 욕을 퍼부었지요. 그 후 일본감옥에 있다가 해방 후 서울에 와서 문학가동맹의리태준, 김남천, 리원조, 안희남 등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전리품을 주은 얘기도 자연히 나왔지요. 《 <발가락이 닮았다>를 대체 누가 쓴 것입니까?》고 물어보았더니 모두들 박장대소하면서 《그게 김동인이 쓴것입니다.》고 하더군요. 저는 우리 문학은 확실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엄숙하게 해야지 그게 뭡니까? 그래서 저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저의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일관하게 주장하는 것이 우리 문학을 재미있게 잘 써라, 누구나 읽기 좋아하는 것을 쓰면서 궁극의 목적에 가서는 민족의 소질을 제고하는데 이바지하자는 것입니다. 

ㅡ선생님께서 구라파의 현대파사조에 대해 흥취를 느끼지 않지만 사회주의 사실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신적 없으신지요? 

□흥취가 없으니 생각은 더욱 하지 않지요. 그것이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고…지금도 흥취는 없습니다. 

ㅡ선생님께서는 사회주의사실주의 창작방법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류력사나 사회현실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정확한 것이 맑스주의입니다. 맑스주의 사상을 파악한 사람은 력사를 분석하거나 사회현상을 분석하거나 틀림없어요. 맑스주의 대가 지났다는 것은 오유적인 관점입니다. 맑스주의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그것은 교조가 아니라 원칙입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이런 력사관에 근거한 문학형식입니다. 때문에 맑스주의가 없이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운운하는 것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짜 맑스주의와 가짜 맑스주의를 똑똑히 식별하여야 합니다. 

ㅡ선생님의 그런 확고한 신념이 지금 사회의 많은 청년들, 문학도들이 가장 깊이 인상받고 교육받는것이지요. 일본놈의 감옥에서 생명의 한 부분인 다리를 하나 잃고도, 반우파투쟁으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문화혁명의 《세례》로 10년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선생님께서는 신념을 잃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런 역경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청년들에게는 신비하게 전설처럼 들리지요. 특히 30살 이하의 청년들은 믿어지지 않아 하지요. 선생님께서 신념을 잃지 않는데 무슨 비밀이 잇는지 알고 싶습니다. 

□비밀은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저도 원래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였습니다. 제가 혁명에 참가한 것은 일본놈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에서 였지요. 하여 일본놈과 맞서 싸워보겠다고 1936년 3월 상해에 갔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상해에 가서 민주혁명당에 들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몇사람이 모여 앉더니 《미스터 김 만약 우리 나라가 독립한다면 리시왕(그때리감봉, 리검봉이 살아있을 때입니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하고 저를 떠보며 묻더군요. 《그가 우리 임금님이니 갖다 모셔야지요.》저는 인차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아주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웃더군요. 저는 속으로 《이제보니 이것들은 모두 역적이구나.》고 생각하였지요. 이것은 진짜 있은 이야기 입니다. 19, 20살때의 제가 이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때로부터 4년후에 입당하였습니다. 제가 4년 동안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저의 세계관이 수립되지 않았으면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었지요. 저는 4년간의 정치투쟁을 통해 사회주의만이 우리 민족을 구할 수 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서울에 가서도 글을 썼지만 《서울은 천당과 지옥이 동거하는 곳》이지요. 한쪽은 천당이고 한쪽은 지옥이지요. 거기에서 저는 오직 사회주의만이 우리 민족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을 더욱 느꼈습니다. 

저는 그때 한번 세계관이 수립된 후 동요가 없었습니다. 또 많은 투쟁가운데서 시련을 겪으면서 신심이 더욱 생겼습니다. 하여 일본이 독방감옥에서도 고독을 느끼지 않았지요. 반우파투쟁때로부터 24년간의 간거한 생활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구요. 제가 감옥 10년에서도 신념이 죽지 않았기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 이 정치적신념이 견정하였습니다. 저는 공판을 받을 때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자는 어떤 환경,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인민대중을 교육할 의무가 있다. 좀 본때를 봐라.》는데서 더 꿋꿋이 서있었습니다. 신념이 없으면 거꾸러진지 오라지요. 저는 인젠 일흔다섯이니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아직도 기나긴 인생길에서 꼭 순탄하리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념만 잃지 않는다면 견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ㅡ선생님께서 10년의 감옥살이를 하시면서 감방안에 앉아서도 그런 신념이 북받칩디까? 

□그럼 뭐, 드놀지 않지요. (일동 웃음)

ㅡ선생님게서 어느해에 공산당에 가입하셨다지요? 

□1940년 8월 29일입니다. 그전에 회외에 있는 망명단체, 혁명단체에서는 8월 29일을 국치일이라 하여 점심을 굶었습니다. 조선이 망한 날이지요. 하여 굶주린 창자에 망국의 설음을 아로새기자는데서 그날에 입당을 하였습니다. 

ㅡ중국에 오셔서 당에서 정식으로 제명당한 것은 어느 때입니까? 

□당에 제명당한다는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1953년에 평양 로동당조직부에 가서 조직관계를 가져와 직접 북경 중앙조직부에 올라가서 복당수숙을 하고 얼마 안되여 반우파투쟁이 터졌습니다. 그러니 여지가 없지요. 

ㅡ후에 와서 언제 회복되였습니까? 

□1989년 1월 29일입니다. 복당이지요. 

ㅡ《해란강아 말하라》는 실제 사실을 갖고 쓴것입니까? 

□녜, 많은 사람을 만나 자료를 수집한데 근거하여 쓴 것입니다. 소영향의 김신숙한테 가서도 몇 달 있으면서 썼지요. 기교가 없으니 그렇게 되였지요. 그리고 《해란강아 말하라》는 선전부에서 임무를 맡겨서 쓴 것입니다. 정치의무감에서 쓴 것이지요. 

ㅡ그런데 어떻게 되여 《해란강아 말하라》가 비판을 받게 되였습니까? 

□그때 어느것이 반동이 아닌 것이 있었습니까? 선전부에서 모두 검열했지만 시기가 그러니 반동으로되였지요. 

△《아리랑》잡지 1957년도에 비판문장들이 실렸습니다. 

ㅡ최근에 선생님께서는 잡문을 많이 쓰셔서 광범한 독자층에 커다란 반향과 중시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럼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되여 소설창작으로부터 본격적인 잡문창작에로 들어가셨는지요? 

□제가 요새 잡문을 쓰는 것은 어떤 현상을 보면 속에서 불이 올라와 참을 수 없어서지요. 그래서 잡문이 제일 빠르니깐 잡문으로 불질하지요. 어떤 때는 잡문을 한 주일에 3편씩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소설을 쓰려고 해도 겨를이 없지요. 24년 동안 묵었던 것이 몽땅 쏟아져 나오는 모양입니다. (일동 웃음)

ㅡ그리고 선생님의 잡문은 사상면과 예술가치에서 로신의 잡문과 공통점이 있으면서 또 선생님식의 독특한 새성, 다분한 민족풍격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럼 선생님의 잡문과 로신잡문의 관계, 선생님의 잡문과 우리 민족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보셨는지요? 

□저는 로신을 굉장히 숭배합니다. 로신의 잡문에 대해 많이 학습하였습니다. 로신의 작품들을 거의 외우다 싶이 하였거든요. 로신을 따라 배우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우리 민족문학에 있어서는 홍명희의 글을 많이 읽었구요. 저는 로신의 정신에다 홍명희의 표현수단을 배우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ㅡ앞에서 선생님의 《신념》에 대해 들어보아도 그렇고 또 선생님의 겪으신 허다한 경력을 보아도 선생님께서는 종교를 신앙하는 분이 아니라고 긍정은 하면서도 선생님의 잡문이랑 읽어 보면 어쩐지 선생님이 도교에서나 특히 장자, 로자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감이 나는데요? 

□로자의 변증법은 가치가 있습니다. 로자의 변증법에 중국의 묵은 변증법이 들어있지요. 모택동이 로자를 존중했습니다. 저도 중국의공자, 맹자의철리를 많이 학습합니다. 또 로자의 영향도 받았지요. 

□죄장이 너무 많아 어느것이라 말하기 곤난합니다. 그때 대자보가 많이 나붙었지요. 

ㅡ제가 대학 1학년때의 신문부간과 잡지들에서 보니 《괴상한 휴가》를 가지고 많이는 누구를 친것이라고 하고 《해란강아 말하라》는 공산당의 통일전선을 공격하고 혁명투쟁을 실패로 만들고 하여 독초라고 하였지요. 

ㅡ선생님께서 《20세기의 신화》는 어느 때부터 쓰기 시작하셨습니까? 

□《20세기의 신화》는 속에 많이 넣어두었다가 1964년초부터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전에 원래 쓰려고 하였는데 출판사에서 《유림외사》 번역이 와서 97만자를 1년이 걸려 완수하다나니 《20세기의신화》 전반부는 1964년 9월에 탈고되였지요. 1965년 3월에 몽땅 탈고한 뒤 다시 일어로 전반부를 번역하였습니다. 후반부를 번역하려고 할 때 감옥에 들어가게 되였지요. 

ㅡ선생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논 정치서적은 어떤 것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국가와 혁명》에서 큰 감복을 받았지요. 그전에 저는 국가라는 것은 아주 큰 콩크리트로 만든 빌딩 같은 것으로 알았는데 《국가와 혁명》을 읽으면서 그 콩크리트 벽이 막 무너져나갔습니다. 다음 맑스의 《프랑스내전》은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빠리꼼뮨의 사적에 너무도 감동되였지요. 

ㅡ1957년 하반년부터 반우파투쟁이 시작되였는데 그때 조직에서 창작을 못한다는 말은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형편이 그렇게 되였으니깐. 그저 《너는 이달부터 로임이 50원이다. 나와서 개조하라.》고  하니 나가 로동개조를 시작하였지요. 돌까기도 하고 도서실도 정돈하고 감옥에 가서는 돼지도 먹이면서…

ㅡ우파모자를 벗긴다는 것도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씌울 때 씌운다는 것이 없었으니깐…내부로 하였지요. 

ㅡ선생님께서는 오랜 창작생애에 많은 작품들을 쓰셨지요. 그 가운데서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어느것이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어느것입니까? 

□제일 실패작은 《해란강아 말하라》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건 선생님의 생각이지요. 그래도 력사적으로 보아야지요. 장편소설로는 처음이였다고 생각되는데요. 

□제일 사랑하는 작품은 《격정시대》라고 해야 겠지요.

제가 1947년도에 평양 《로동신문》사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한 50푼히 되여보이는점잖은 부인이 저를 찾아와서 《당신이 김학철이요?》하고 묻지를 않겠습니까. 제가 《녜, 그렇습니다.》고 대답을 올리니 그 부인은 저의 손목을 잡으면서 《내가 김정희에미요.》라고 하더라구요. 김정희는 광동 중산대학에서 호북 강릉중앙륙군군관학교에 전학해온 저의 동기동창이였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태항산에서 전사하였지요. 전사한 전우의 어머니가 저의 손목을 쥐는 순간 저는 가슴이 섬뜻하였습니다. 마치 김정희가 저 때문에 죽은 것처럼…그는 죽고 저는 살아왔으니깐요. 그때 그 어머니가 《내자식도 당신처럼 그렇게 되서라도 (김선생님께서는 그때 왼쪽다리를 잃었었다.) 돌아와주었더라면 얼마나 영광수러웠겠소.》 그런데 그들이 죽은지 40년이 지낫는데도 그들의 력사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지요. 하여 저는 해방되면서 인차 《항전별곡》을 썼지요. 그것이 발표되자 또 다시 《격정시대》를 썼던것입니다. 저는 전사한 옛 전우들에 대한 뜨거운 동지애로 만강의열정을 다하여 썼습니다. 이 책이 나옴으로 하여 저는 《병신자식 효도》를 한셈이 되였습니다. 

서울에 가서도 《에피소드의 련성》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어쨌든 있는 사실을 력사적으로 내놓자는 것이 목적이 였지요. 저도 《문학적가치보다 력사적가치가 더 높다.》고 똑똑히 밝혔습니다. 

ㅡ선생님께서는 중편소설 《번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편없지요. 임무를 맡고 춘(태양향)에 내려가 쓴 것입니다. 그때는 《문예는 정치를 위해 복무한다.》고 하니 꼭 그래야 되는줄로 알고 썼습니다. 

ㅡ선생님의 처녀작은 어느것입니까? 

□저의 처녀작은 《지네》입니다. 1945년 12월에 《건설》잡지에 발표되였지요. 

ㅡ선생님이 지금 구상중에 있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웃음)

저에게 지금 미발표작 《미이라》가 있습니다. 작년 가을 서울을 떠나기 전에 《연변일보》에 가져갔는데 종시 발표되지 못하였지요. 



△오늘 우리의 문학대화는 이 단계로 마칩시다. 김선생님께서 고령에 몇 시간동안 앉아계셔서 대단히 피로 하실줄로 압니다. 

오늘의 이 문학대화는 아주 의의깊은 대화라고 생각 됩니다. 김선생님께서 장시간 귀중한 말씀을 많이 나눠주셔서 우리 연구소의 금후의 연구활동과 이번 작가론을 쓰는데 큰 계발과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앞으로 김선생님께서 우리의 연구작업에 더욱 많은 협조를 주실 것을 부탁 드리면서 이로써 오늘의 문학 대화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ㅡ 《문학과 예술》1990년 제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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