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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조룡남
2015년 03월 04일 22시 41분  조회:7091  추천:0  작성자: 죽림
 
원로시인 조룡남 달력에 올라
 

 
“반디불”의 시인 조룡남이 달력에 올랐다.
중국문화예술협회와 세계다원화연구회에서 주최한 2013년력인물(年历人物) 중국저명문예가에 조선족 원로시인 조룡남이 선정되여 달력에 올랐다.
 
조룡남시인은 6월달 페지에 실렸다. 달력에는 시인의 간력과 함께2002년 조룡남시인의 모교인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운 “반디불”시비와 2004년 룡정시 비암산 일송정풍경구에 세운 시인의 “비암산진달래”시비도 도편과 더불어 실렸다.
 
 

 
 
조룡남시인은 1935년 11월 27일, 길림성 훈춘시에서 태여나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왔다. 1951년 중학교 학생시절 “연변문예”지(“연변문학”전신)에 처녀작을 발표했고 1956년 연변작가협회 성립시의 제1기 회원으로 입회했다. 
중국작가협회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분과위원회 주임, 연변시조시회 회장 등 직을 력임했으며 연변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문사전문위원회 부주임등 다양한 직무를 겸직했다.
시집으로는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앞에서”, 동요동시집 “반짝반짝 반디불”등이 있고 그외 “문학묘사사전”, “세계문학명작소개” 등이 있다.
“홍범도장군”, “길림조선족”, “해방전연변경제”, “남조선문학개관”, “고려문학미의식연구”,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수십종의 우수도서를 편집 출판했고 성급, 국가급의 창작상, 편집상을 수차 수상했다.    
조룡남시인의 10여수의 시작품들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번 년력인물에는 중국의 첫 노벨문학상수상자인 막언이 1월달에 올라 이 선정의 막중함을 과시했다.
중국문화예술협회에서는 해마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문화예술분야의 성과가 있는 문학, 서예, 화가 등 문화예술인들을 선정하여 년도최고영예인 중국저명문예가로 명명하고 달력으로 만들어 그 당선자와 작품들을 소개하고있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2 1 21
 
 
 
 

원로시백 조룡남선생을 만나
 

 
조룡남선생의 저택에 들어서자 가장 눈에 띄는것이 도서였다. 서재, 작업실, 침실 할것없이 발을 디뎌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도서가 꽉 차 있었다. 선생의 컴퓨터에도 컴퓨터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지나 않을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많은 서류가 빽빽하게 자리하고있었다. 이렇게 많은 책과 서류 가운데서 어떻게 필요한것들을 찾을지 왼심이 쓰였다. 하지만 그런 근심은 한낱 기우였다. 선생은 컴퓨터에 마주앉자마자 능수능란하게 필요한 자료들을 족집게처럼 대번에 집어냈다.

취미가 다양한 선생은 천여장에 달하는 영화CD와 음악CD를 소장하고있었다. 취미생활은 중병으로 투병중인 선생에게 잠시 아픔을 잊게 하고 치료에 도움을 주는 활력소가 된다고했다. 
 
초년에 두각을 내민 나젊은 시인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치면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한들한들 온다야”(조룡남 작사, 김덕균 작곡, 동요 “반디불”)

동요 “반디불”은 조룡남선생이 사범학교 학생시절, 약관의 나이에 쓴 작품이다. “반디불”은 선생의 동년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미래에 대한 동경과 우리 민족의 민족적정서가 잘 녹아든 명동요이다.

2002년, 선생의 모교 연변대학 사범분원 캠퍼스에 건립된 반디불비 비기(碑記)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있다.  “‘반디불’은 지난 반세기 동안… 여러 세대 어린이들 동심세계에 밝고 따뜻한 꿈이 되여주었다.”

당시 “문학신동”이라 불린 선생은 동시와 성인시를 동시에 잡지에 발표한다. 처녀작 성인시 “불꽃”은 1951년에 《연변문예》에 발표하고 처녀작 동요 “공장”은 1951년 《소년아동》잡지에 발표하였는데 그때 선생의 나이는 15세였다.

우리 시단에 “반디불” 신드롬을 몰고오면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한 조룡남선생은 희망이란 반디불처럼 묘연한것이긴 하나 열심히 사느라면 능히 손에 거머쥘수 있는것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인생의 전반기에 “반디불”처럼 위태위태한 삶을 살게 된다. 1955년 선생은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다가 “우파”모자(22살, 연변에서 가장 나이 어린 우파분자)를 쓰고 추방되여 “로동개조”를 강요당하고 모진 수난을 겪는다. 이어 “10년 동란”이 터지면서 또 한번 막심한 재난을 겪는다. 그렇게 선생은 장장 23년을 고생하다가 1979년에 “우파”모자를 벗고 모교인 훈춘2중에 복귀하여 다시 교편을 잡았다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하여 문예편집으로 근무하게 된다.

가장 혈기왕성했던 23년간의 청춘시절은 아쉽게도 선생에게는 인생의 공백기요, 창작의 공백기로 남아있다. 그때 선생을 투쟁하는 대회에서 현의 한 지도자는 “작가로서의 조룡남의 생명은 끝났다”고 선포하였다. 하지만 그는 험악한 세월에도 몇궤짝씩 되는 책을 끌고 다니면서 계속 독서하였고 일기형식의 작은 글들을 남기기도 했다. 
 
“해빙기의 강변에서” 정감의 보물을 터치우다
 
조룡남선생이 본격적으로 다시 창작을 시작한것은 1980년대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을 맡았던 때부터였다. 시인의 구세주는 고통이라 했던가. 길고 어두웠던 그의 인생에서 불우한 운명은 청춘과 사랑과 미래에 대한 장미꿈을 여지없이 짓밟아놓았지만 유독 선생에게서 빼앗아갈수 없었던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정감과 감성, 시적재능이였다. 선생은 “인생 고래희”를 훌쩍 넘기고서도 정감과 감성의 바다에서 주옥같은 시편들을 끊임없이 건져냈다.

1989년에 조룡남선생은 첫 시집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을 출간했다. 상기 시집에는 “옥을 파간 자리”, “해빙기강변에서”,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등 선생의 수작이 다수 수록되였다. 수록된 시들은 다양한 주제를 포섭하고있지만 주류는 상처입은 기억에 대한 시적재현으로 인간과 인생에 대한 절대적정감을 기조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진실을 진지한 자세로 탐구하고 상실의 아픔속에서 승화의 미를 단조한것들이다.

선생은 지금까지 서정시 700여수, 동시 300여수, 장시 20여편, 논픽션 100여편을 창작하고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에 이어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동구밖에서》, 《반짝반짝 반디불》, 《사람아 사람아》 등 5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중 “어머니”, “옥을 파간 자리”, “고향생각”, “반디불” 등 10여수의 작품이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였다.

조룡남선생은 중국작가협회 회원이고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주정협 상무위원 등 직을 력임하였다. 선생은 주인민정부의 “진달래문예상”과 “공훈상”, 길림성인민정부의 “장백산문예상”(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2차) 등 큼직한 상들을 수십차 수상하였으며 그의 략력과 업적은 《중국작가대사전》(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3년) 을 비롯한 다수의 사전과 명인록에 수록되였다.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선생의 “반디불비”가 세워지고 룡정 비암산 일송정에 선생의 “비암산 질달래” 시비가 세워졌다.

아름다운것은 언제나 진실에서 싹이 트고 그 향기를 풍기듯이 가식이 없는 진실한 시는 독자들에게 령혼의 울림을 준다. 조룡남선생의 시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뿐만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계시가 크다. 그것은 시인이 아픔의 현장을 뛰여넘은 완성도가 높은 시적미감을 창출했기때문이다.          


연변일보 김인덕기자


시인 조룡남의 콤플렉스와 
그의 시의 상징이미지

                                   /림철
 
시인 조룡남선생은1935년, 길림성 훈춘현 춘화향 동흥진에서 태여났다.
1955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한 조룡남선생은 모교인 훈춘2중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러다1957년 정치풍파속에서 그는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쓰고 수업의 권리,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머나먼 심산골로 추방되였다. 그리하여 재능있는 시인의 이름은 너무나 일찍 우리 문단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때로부터 그는 장장23년이나 온갖 고역과 치욕을 겪으면서 《죄수》로 되어 인간 최하층의 생활을 경험하게 되였다. 1979년에야 조룡남선생은 비로소 시정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때 그는 벌써45세인 중년에 들어섰다.
그때로부터 조룡남선생은 다시 붓을 들고 새로운 문학인생을 시작하게 되였다. 1984년부터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편집부에 몸을 담그고 많은 책들을 편찬하고 편집, 출판하는 한편 왕성한 정력으로 창작에 정진하였다. 그는 선후로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고향마을 동구앞에서》,《민들레씨 동동》 등 서정시집들을 련속 출판하였고 그밖에도 기타 문학쟝르의 창작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다.
조룡남선생은 또 우리 문단에서 문학상을 가장 많이 탄 작가중의 한 분이시다. 굵직굵직한 상들만 하여도 연변작가협회문학상2차(1985년,1990년), 연변의 최고상인 자치주인민정부 우수작가상(1992년)과 진달래문예상(1997년), 길림성 최고상인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2차(1990년, 1997년), 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1998년) 등 다양한 수상경력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이 해소되지 못하면 심리 심층에 깔리고 쌓이여 매몰된다. 이렇게 장기간 억눌렸던 심리고통과 갈등, 고달픈 감정체험이 의식속에 잠재된다. 이것이 바로 콤플렉스이다.
16살 초중시절부터 신문, 잡지들에 문학작품을 련속 발표하고 수차 수상경력까지 지닌 문학신동으로 불리우던 조룡남선생이였다. 1952년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의 문학은 큰 발전과 성장을 가져오게 되였다. 이 시기 그는 벌써 장시 《눈내리는 밤》, 서정시 《평화시초》, 수필 《왜 사범학교에 갔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등 비교적 성숙된 작품들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의를 끌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1957년 풍파후 장기간 농촌에 내려가 《죄있는 령혼》을 씻어야 하였다. 20여세 한창 젊은 나이에 청춘을 버려야 했으니 쌓이고 쌓인 심리고통 그 콤플렉스는 또한 얼마였으랴! 23년이란 기나긴 시간을 붓대를 꺾고 지내야 했고45세 중년이 되어서야 다시 붓을 잡게 된 조룡남선생, 바로 그의 그 콤플렉스가 그의 시를 낳은 것이다.
이렇듯 장장23년간 붓을 꺾었던 조룡남선생이45세 때부터 다시 붓을 잡고 일어나서 문학도인생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23년간에 쌓이고 쌓인 콤플렉스가 그의 시집들에 력연히 나타나고 있으며 시행마다에 부착되여 있다.
그럼 아래에 조룡남시집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에서 《두견새》,《옥을 파간 자리》,《홍장미》 등 몇수의 시를 살펴보면서 그의 파란많은 인생의 콤플렉스와 작품에서 표현된 그 상징, 은유적인 이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래는 시 《두견새》의 전문이다.
 
두견새
 
마디마디 울음이 목이 터져서
떨기떨기 꽃잎우에 피물이 드는
두견새의 울음아, 구슬픈 울음
적막강산 외로운 나그네 혼아
천년을 울었건만 못다 울어서
마디도 못 꺾는 저 울음소리
이 몸도 울며 사는 작은 두견새
너와 함께 울며 살다 울며 가리라
 
문학창작은 욕망의 표현이다. 작가들은 예술창작의 형식을 통하여 그러한 욕망을 위장함으로써 만족과 승화를 가져온다. 서정시 《두견새》에서 《두견새》는 작자 본인일수 있다. 조룡남선생은 《두견새》라는 상징이미지를 설정하고 《적막강산 외로운 나그네》의 심리체험을 토로하였다. 《마디마디 울음에 목이 터져서/ 떨기떨기 꽃잎우에 피물이 드는》 실로 작자의 《구슬픈 울음》이 아닐수 없다. 청춘의 권리, 창작의 권리를 빼앗기고 《죄있는 령혼》을 씻어야 했던 조룡남선생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마디도 못꺾는》 울음소리였을가?
그의 시 《옥을 파간 자리》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 시에서 《옥》과 《구뎅이》는 그 어떤 상징, 은유물이다. 《옥》은 《청춘》,《명예》일수도 있고 또 《사랑》일수도 있다. 그러나 조룡남선생의 경력을 놓고 볼 때 이 시에서 《옥》은 《잃어버린 청춘, 빼앗긴 청춘》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 같다. 바로 그런 《청춘》을 잃고 빼앗겼기에 가슴에 《웅뎅이》 하나가 생겨 《허연 소금》이 돋쳐 《마를줄 모르는 빗물이, 눈물이 고이여》 있는 것이다. 억눌렸던 《한(恨)》의 응어리, 그 콤플렉스가 《옥》과 《웅뎅이》란 상징으로 작품속에 토로되고 있다. 작가의 가슴속깊이에 묻혀있던 갈등과 고통, 그 억눌림이 바로 《웅뎅이》였고 잃고 빼앗긴 청춘이 곧바로 《옥》이였다.
조룡남시인의 또 다른 하나의 시 《홍장미》를 보자. 이 시는 피뜩 보건대는 애정시로 리해되지만 작자의 경력과 련결시키고 그 시행을 분석해보면 역시 《령혼》을 씻던 시기 마음속 심처에 입은 《상처》를 반영했다고 볼수 있다. 혹은 청춘도 사랑도 다 잃은 작자의 처지를 나타냈다고도 볼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의 그 어떤 욕망, 념원의 실패, 좌절을 나타냈을수도 있는 것이다. 3련에서 《피흐르는 손이야/ 아무오리만/ 마음에 든 가시야/ 어찌 뽑으랴/ 언제 뽑으랴》에서만 보아도 이것을 단순히 사랑, 애정좌절을 나타냈다기보다도 청춘과 명예나 그리고 그 어떤 욕망, 념원의 좌절이라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 같다.
조룡남선생이20세기80년대에 쓴 기타 시작품 례하면 《해빙기의 강변에서》,《나를 리해해다오》,《나의<공백>》등 시들에서도 그가 경험했던 콤플렉스들이 력연히 안겨온다. 아래는 그의 시 《나의<공백>》의3, 4, 5련이다.
……
나도 묵묵히 생각해본다
정말 젊었을 때가 없었던가?
나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도 어린애에서 갑자기 늙은이로 변해버린 듯
없기야 왜 없었으랴만
그것은 꽃이 없는 봄
의혹, 오뇌, 방황, 우롱
속죄, 추방, 고역, 절망…
이렇게 나는 비싼 값으로
청춘20년을 력사에 지불하고
만년으로 가는 인생의 부두에서
3등석 배표 한 장 끊지 않았던가
 
시인 조룡남선생이 겪었던 콤플렉스는 그 외에도 고향을 노래한 기타 서정시집들에서도 우련히 안겨오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만 줄인다. 총적으로 조룡남시인은 《잃어버리고 빼앗긴20년 청춘》에 쌓이고 쌓인 콤플렉스를 시라는 문학형식을 통하여 또 거기에 그 어떤 상징, 은유적이미지를 부여하여 작자가 겪은 고통, 갈등, 억눌렸던 감정을 토로하였고 력사의 비극을 개탄하면서 《잃었던 청춘》을 다시 찾고 있다. 서정시 《두견새》나 《옥을 파간 자리》나 《홍장미》는 바로20여년간 강간당했던 청춘에 대한 절규이며 깔리고 억눌리웠던 콤플렉스의 해소라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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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명멸하는 반디불의 빛처럼

- 원로시인 조룡남의 문학인생

“…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치면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한들한들 온다야”
여러 세대 불려지면서 조선족 어린이들의 애창가요중에서 굴지로 꼽혀온 명동요 “반디불”의 저자 조룡남(75세)시인이 일전 “민초 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


“민초 해외문학상”은 카나다 한인동포들이 운영하면서 세계 한민족문학인들중에 서 선정하여 높은 문학공적과 성과를 치하하여 내리는 상으로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을  임헌영 등으로 무어진 평심단은 "시인 조룡남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시세계를 펼쳐 우리 문학을 빛나게 해주었다"고 시인의 문학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연길시 하남가두에 위치한 그의 조촐한 가택에서 시인을 마주했다. 
서재를 가득 메우고 응접실까지 밀려나오며 빼곡이 포진해있고 책더미속에서 맛있는  원두커피를 타주며 담담한 어조로 시인은 후학들에게 말머리를 풀었다. 항용 그러하듯이 단연 문학이 단골화제였다.


“시는 한 민족의 문명정도와 기질과 정감과 심미수준을 반영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민족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난 시인이라는 칭호를 지금도 벅차게 생각하고있습니다.”


시인은 1935년 11월 27일 중국 로씨야 국경지대인 길림성 훈춘시 춘화향 동흥진촌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한일합방후 로씨야 연해주로 이주하여 울라지보스토크에 정착해 살다가1930년대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앙아세아로의 강제이주를 피해서 고향으로 가던중 중국에 눌러 앉게 되였다.


구전동요 몇백수를 읊조릴수 있었던 어머니를 모신 집안에서 자란 시인은 은연중 문학소년으로 성장해갔다. 어머니는 그에게 일본어로 된 “좋은 어린이의 벗(良い子の 友)”잡지와 “주간소국민(週刊小国民)”신문을 주문해 주었다. 시인은 이런 간행물에 실린 문학작품들에 푹 빠져들었다. 또 집에는 력사시조를 적은 “가르다”퍼즐이 어러 몫 있었는데 이 가르다놀이를 하면서 시인은 소학교 저급학년 시절에 벌써 수십수의 시조를 외울수있었다.
이러한 가족분위기는 시인의 작가적 기질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51년 중학시절 시인은 학교 대표로 연길에서 열리는 연변제1차 하령영에 참가했다. 그때 지도교사가 바로 연변대학 재학중이였던 권철선생이였다. 하령영에서 시랑송, 영화감상, 공장참관 등 활동에 이어 석현제지공장을 참관하고 애국증산을 주제로 한 작품쓰기를 했다. 그때 시인이 써바친 작품이 권철선생의 추천으로 당시 6기까지 출간되였던”연변문예”에 실렸는데 바로 처녁작”불꽃”이였다.

시인의 함자와 함께 선참 떠오르는 작품”반디불”은 시인이 1953년 연변사범하교 2학년때 펴낸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이 부르시는”둥근 달님 따다가”, “하늘에는 별이 총총”등등 동요들에 심취되였던 시인은 초중시절에 이미 동요들을 잡지에 발표했고 그중1952년에 창작한 “매”는 소년아동 당선작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연변사범학교에 진학한뒤 저명한 동시인인 김례삼은사의 지도밑에서 시인은 대표동요로 인정받는 “제비제 학교”, “딸랑강아지”, “호박꽃초롱” 등 많은 동요들을 써냈다. 1953년 겨울방학 시인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도서관의 많은 책들을 탐독했다. 그 겨울 동창생이였던 김덕균과 배가 고파 기숙사 김치움에서 김치를 훔쳐다가 찢어먹으면서 만든것이 바로 “반디불”이였다.


조선족 어린이들의 너나의 동심에 오롯이 각인된 이 동시는2002년 8월에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시비로 세워졌다. “반디불”창작 50년을 기리여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분과, 연변음악가협회 아동음악분과,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연변대학 사범분원 등 단위가 시인의 모교에 세운것이다. 

 연변대학 사범분원 교정에 세워진 “반디불” 동요비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한뒤 시인은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1957년 불어친 반우파투쟁은 연변작가협회 성립시의 제1기 회원이였고 당시 꽤 문명(文名)을 날리던 젊은 시인을 천길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시인은 22세의 나이에 “연변에서 가장 나이 어린” 우파분자의 한사람으로 락인되여 고향의 치벽지로 추방되여 굴욕적인 로동개조에 신심을 혹사 해야했다. 직장도, 로임혜택도 박탈당한채 국영농장에서, 대약진 땜 건설현장에서 토역에 내몰렸고 지어 똥수레를 몰고 인분을 퍼나르는 일 까지 강요당했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마저 얼굴에 가래침을 뱉고 구석에 세우고 공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함께 우파분자로 현장에 몰렸던 초중시절의 교장은 미쳐나고 생일이 맞띄워도 신분증을 보이며 겨우 죽 한그릇을 얻어먹을수있고 그 죽마저 범인들의 탐욕어린 손아귀에서 사수해야하는 혹독한 시련은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의 동란시절에도 계속되였고 장장 23년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룡정 비암산에 세워진 시인의 "진달래"시비 앞에서 부인과

 


1979년 불혹의 나이가 되여서야 시인은 신심을 짓누르던 무거운 우파모자를 벗을수있었다.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으로 취직했고”아리랑”문학총간 편집을 맡게되였다.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했던 시인은 다시 붓을 들었고 벌창해진 봇물처럼 작품들을 량산해 냈다. 
“해빙기의 강변에서”, “영원한 미소” 등 서정시 500여수, “반디불”, “제비네 학교” “딸랑강아지” 등 동요 동시 300여수와 “아, 청산골”, “꿀벌의 죽음” 등 장시 20여편, “꾀꼬리가 울기까지”, “돌아온 백조” 등 실화 수필이 80여편을 펴냈고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앞에서”, 동요 동시집 “반짝반짝 반디불”, “문학묘사사전”, “세계문학명작소개”, 등 저서들을 펴냈다. 
그외 편집원으로서 “백야” 등 번역작품을 내놓았고”홍범도장군”,”해방전연변경제”, “남조선문학개관”, “고려문학미의식연구”,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수십종의 우수도서를 편집 출판하여 여러 차례 성급, 국가급 우수도서편집상 수상 하기도 했다.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분과위원회 주임, 연변시조시회 회장 등 직을 력임도 했고 연변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과 문사전문위원회 부주임직도 지냈다.


선후로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연변자치주인민정부 우수작가상, 진달래문예상․공훈상, 길림성인민정부 장백산문예상, 전국소수민족문학상-준마상, 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원예사상, 21세기한국문학상, 한국 미래문학해외동포문학상, 세계화인교류협회 “국제우작품상”, 중국과학원 화하문화연구원 “중국신사상신학술성과․1등상” 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다. 시인이 올해 수상한 상만해도 17개나 된다고 한다.


1995년에 정년퇴직한후에도 민족의 문화사업을 위한 시인의 행보는 멈출줄 모른다. 연변인민출판사와 “김학철문학연구회”가 펴내는 연구저서들의 책임편집업무를 맡고 시인이 우상으로, 사표(师表)로 모시고있는 김학철 선생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해마다 한집씩 “김학철문학연구”총서를 정성들여 편집하고있다. 
 


시인의 정신적 사표- 김학철 선생의 문학기념비 앞에서

이순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시인은 정보의 홍수로 넘쳐나는 글로벌 시대에 뒤지지않게 그 나이에는 드물게 인터넷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문서작성, 메일전송은 물론 풍경사진, 인물사진, 회의사진 등 내용으로 수백페지에 달하는 전자사진첩을 만들었으며 음악앨범까지도 만들어”세계명화”, “세계명시”, “명작영화모음”, “즐기는 음악” 등도 편집해두고 수시로 감상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정서적공간을 확보해가고있다. 
출국해 있는 자식들과 화상채팅을 하는것이 즐거움의 하나라고 시인은 밝게 웃는다.

 이순의 나이에도 컴퓨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있는 시인은 스스로 "컴광"이라 자칭하며 인터넷 세계에 심취되여있다. 
 

모교에 동요비가 세워지고 룡정에 “비암산 진달래”시비가 세워지고 시”고향생각”이 조선어문교과서에 실리고 해내외로 부터 저명한 시인으로 칭송되고있지만 시인은 자신을 원로가 아닌 문학소년으로 간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명작들을 다시 탐독하면서 문학거장들의 넓은 작가적시각과 깊은 문화적소양에 다시한번 매료되고 감복하고있다. 하루라도 독서를 게을리한다면 시대의 락오자로 전락되기 쉽다며 체질화된 독서습관을 이어오며 매달 상당한 량의 작품을 독파하고있다.

시인은 요즘 한국작가 최인호 대하 장편소설 『유림』을 정독한다고 한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정리해야하는 시점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것은 자신의 지식과 철학의 빈곤이라며” 엄격한 자아완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있는 시인은 동양의 대 거유(巨儒)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진정 바른 선비의길에 대한 화두를 새김질하고있다고 한다.


앞으로 시집과 동요동시집도 몇권 내고싶고 더우기는 암울했던 동란시절의 희생양으로 20여년간 살아온 인고의 시간들을 형상화한 수필집을 펴내고싶다는 시인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력정을 작품화하는 시인의 괴로움은 크다. 쓰다가는 필을 멈추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고 한다. 혹여 집사람에게 맞띄면 함께 부둥켜안고 통곡하기 일쑤라고한다. 하지만 피가 철철 흐르던 력사의 상처의 딱지를 굳이 들추면서라도 후세들에게 알리는것이 자신의 숙명인줄을 시인은 안다.

“문학이란 그리고 인생이란 고달픈 작업의 련속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작가마다 상황이 좀씩 다를수는 있겠지만 진정 우수한 작가로 거듭나려면 뼈를 깎는 령혼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최고의 인생은 시화된 인생입니다.


시인의 파란많은 인생려정을 경청하며 필자는 저도모르게 인도 철학가 스와미 웨다 바라띠의 잠언시 한구절을 떠올렸다.


“초불은 부드러운 미풍에도 꺼진다. 그것은 바깥에 있는것에 의해 점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디불은 거센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빛이 자기안에 있기 때문이다.”


반디불은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어둠을 사르며 난다. 사랑과 생명의 광휘로 가득한 삶도 그렇다. 밝은 자기 내부의 빛으로 당대의 어둠과 고통의 질곡을 깨뜨리며 문학이라는 이름의 광휘로 세상에 밝은 빛을 더하고자하는 문학대선배와의 대담을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노라니 다시한번 명동요의 한구절이 귀전에 쟁쟁히 남아 감돈다. 


“반짝반짝 반디불/ 손벽치며 온다야/ 파란 전등 켜고서…

 

김혁 기자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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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오롯한 명상
- 원로시인 조룡남 시집 “사람아, 사람아” 출간
 
 
 
원로시인 조룡남의 시집”사람아, 사람아”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다. 
 
시집은 “내 가슴에 묵어간 녀인”, “꽃이여”, 사람아, 사람아”, “내 이름은 개똥”, “불멸의 삼족오”, “주막 그리고 길손” 등 총 6부로 나뉘여 시인이 일껏 선정해낸 시 200여수를 묶었다.
 
시집 제목이 명시하다싶이 시집에는 영원한 화두인 사람에 대한 탐색과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한 시편들이 작가 특유의 아름다운 문체로 오롯하게 실려있다。”작은 책을 어머님의 령전에 바치옵니다”라는 애틋한 제사(题词)로부터 시작된 시집의 행간에서는 “무가(无价)의 보화(宝货)” 어머니가 보이고 “곁을 지켜준”살가운 자식이 보이고 “왕국을 버리기에도 아까와 하지 않을” 녀인이 보이고 “경건한 신앙이자 종교”같은 김학철옹이 보이고 “북방의 량심” 리삼월시인이 보이고 “작은 등불을 켜든” 저자 자신도 보인다. 
조룡남시인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끊임없는 련민과 그리움을 되뇌이며 사랑의 여러가지 무늬를 새기고 있다. 
 
만추에도 지칠줄 모르는 정열로 글밭을 경작하고있는 조룡남시인은 1935년 11월 27일, 길림성 훈춘시에서 태여나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왔다. 1951년 중학교 학생시절 “연변문예”지(“연변문학”전신)에 처녀작을 발표했고1956년 연변작가협회 성립시의 제1기 회원으로 입회했다. 
 
중국작가협회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리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시분과위원회 주임, 연변시조시회 회장 등 직을 력임했으며 연변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제7기, 제8기 상무위원, 문사전문위원회 부주임등 다양한 직무를 겸직했다.
시집으로는 “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 “그리며 사는 마음”, “고향마을 동구앞에서”, 동요동
 
시집 “반짝반짝 반디불”등이 있고 그외 “문학묘사사전”, “세계문학명작소개” 등이 있다.
“홍범도장군”, “길림조선족”, “해방전연변경제”, “남조선문학개관”, “고려문학미의식연구”,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수십종의 우수도서를 편집 출판했고 성급, 국가급의 창작상, 편집상을 수차 수상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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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인 조룡남

 

김학철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의사무사한반 아마 1955년 가을께가 아니였던가 싶다.

훈춘중학교에 가 강연을 할 때 처음 만났던 스무살안팎의 총각선생, 그가 대개 이 <<시인 조룡남>>인거 같다.

   내가 조룡남을 다시 만난것은 <<문화대혁명>>이 끝이 나가지고 우리의 많은 작가들이 22년동안의 피눈물나는 고역살이에서 풀려나 륙속 문단으로 복귀를 할즈음이였다. 그러니까 1982년초겨울께쯤이 됨직하다.

   근 30년이란 세월을 제각각 살면서도 우리가 겪은 고초는 다 어슷비슷해 그야말로 <<마소만도 못한 인생>>의 <<굴욕적이고도 지리감스러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지금도 갈구하는 리상의 실현을 위해 꾸준히 필경에 정진을 하고 있다. 그는 60세 나는 80세 .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에 끌려나왔다가 죽은 남편을 찾아나섰다는 전설의 녀인 맹강녀, 그 맹강녀를 통해서도 조룡남의 시상은 발로가 되고있다.

 

장성보다 긴 왕조를 넘어오면서

장성보다 긴 세대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만천하에 폭군을 공소한다

폭퐁같이 준절히 폭정을 통책한다

 

   제철 만난 잉어모양 싱싱하던, 물정 모르는 애숭이총각선생이, 날벼락같은 <<프로레타리아>>의 철퇴 <<쇠뭉치>.을 맞고 하루 아침에 <<계급의 적>>으로 전락하니 --그놈의 신세야 아주 조진게 아니고 뭐였겠는가.

그 신세를 조진 인간이 20여년동안에 당해야 했던 수모와 고통은 과연 어떠했을가.

그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때를 만나 자연스레 분출을 하고있는게 말하자면 우리 조룡남의 시가 아닐가.

황당지설로 가득찬 년대에

깨어있는것은 치욕, 창을수 없는 치욕

그래서 차라리 나는 돌이 되여

긴 긴 잠을 잔다

 

    하지만 조룡남은 수박겉 핥기로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 개 머루먹듯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천업같은 심태를 갈피갈피 뒤져보며 살았다. 그러다니 자연 선인과 악인, 대인과 소인을 깔끔하게 가려내는 예지도 련마해내게 됐다.

그러게 그의 시는 분별없는 구호가 아니다.번드르르한 겉치례도 아니고 또 새빠진 잠꼬대도 아니다.

지어는 그들의 행복과 나의 불행을

한 천평우에 놓는다면

그들의 모든 행복이 무게를 잃고

진둥 쳐들릴 믿음까지 간다

 

<<소인배의 개코같은 행복쯤은 이 눈안에 없소이다>>

이런 기개가 력력히 어려여있는 구절구절이다.내가 알고있는 한 조룡남은 민족의 토양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있는 --해묵은 느티나무와도 같은 시인이다.

자랑찬 계레의 얼을 지녔다는 긍지심으로 일생을 살아온 우리의 민족시인 조룡남, 바라건대 우리 시단의 전천후신호--어떤한 가상상태에서도 끄떡없는 신호가--가 돼주소서.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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