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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랜드 명시인 - 예이츠
2015년 03월 21일 20시 49분  조회:3248  추천:0  작성자: 죽림

     

예이츠

1865~1939

 

 

아일랜드의 시인·극작가

 

더블린 샌디마운트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런던에서 화가가 되려고 공부하였으나 시쓰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시 유행하던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889년 첫 시집《마신의 방황》 이 와일드 등 많은 시인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 공을 세워 원로원 의원이 되었으며, 1923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초기작품은 여성적이고 낭만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상징주의적이며 딱딱하고 건조한 남성적인 것으로  변화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극 작품<캐서린 백작 부인>, 시집 《마이켈 로버츠와 무희》 《탑》 등이 있다.

 

 

 

 

 

 

하늘의 융단

 

 

금빛 은빛 무늬 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의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내 가난하여 오직 꿈만 지녔기에

 

그대 발 밑에 내 꿈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내 꿈 밟고 가시는 이여.

 

 

 

 

 

 

이니스프리 섬으로

 

 

나 일어나 이제 가리라,

 

내 고향 이니스프리로 돌아 가리라.

 

거기 외 얼고 진흙 바른 오막살이 집 지어

 

아홉 이랑 콩밭 갈며 꿀벌도 치며

 

벌소리 잉잉대는 숲 속에 홀로 살리라.

 

그러면 거기 얼마쯤의 평화 있으리라,

 

평화는 천천히 안개 자욱한 아침부터

 

귀또리 노래하는 곳까지 내린다하니,

 

밤은 온통 훤한 빛,

 

낮은 보라빛 저녁이면

 

홍방울새 가득히 날고,

 

나 일어나 이제 가리라,

 

 밤낮을 두고 기슭에 나직이 찰싹이는

 

물소리 들으리라.

 

길가에서나 회색빛 포도 위에서나

 

마음 속 깊이 그 소리를 들으리라.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I

 

저것은 늙은이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나뭇가지 속에서 새들은- 저 죽어 가는 세대들은- 노래를 부르며

 

연어가 튀는 폭포, 고등어가 우글대는 바다,

물고기,짐승,새들이 온 여름을 찬미한다.

 

잉태되고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들을.

 

저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모두들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소홀히 하는구나.

 

II

 

늙은이는 한낱 하찮은 물건,

막대기에 꽂힌 누더기.

 

다만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부르지 않는다면,

썩어질 누더기 조각을 위해 더욱 소리 높이 노래부르지 않는다면.

 

또한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탐구하지 않고서는

노래하는 학교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노라

 

III

 

오 현인들이여, 벽의 금빛 모자이크 속에서처럼

신의 성스런 불꽃 속에 서있는 그대들

 

성화로부터 걸어나와 뱅뱅 맴돌며

내 영혼의 노래 선생이 되어 다오.

 

그리하여 내 심장을 태워 없애 다오.

욕망으로 병들고 죽어 가는 동물에 매달려 그것은 자신을 모르나니

나를 모아 영원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다오.

 

IV

 

한 번 자연에서 벗어나면 나는 결코

자연계의 어떤 사물을 닮은 내 육체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리라.

 

오직 그리스의 금장이가

졸음 오는 황제를 깨워 두기 위해

망치로 두들기고 금박칠을 한,

 

혹은 비잔 티움의 귀족들과 귀부인들에게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는 또 장차 다가올 일들을 노래불러 주는

 

황금 나뭇가지 위에 앉은

그런 형상을 취하리라.

 

 

 

쿨 호수의 백조를 보며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숲 속의 길들은 메말라 있다.

 

10월의 황혼녘 물은고요한 하늘을 비치고

돌 사이로 넘쳐흐르는 물 위에는

쉰 아홉 마리의 백조가 떠 있다.

 

 

내가 처음 백조의 수를 헤아린 이래

열 아홉 번째의 가을이 찾아왔다.

 

그땐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백조들은 갑자기 날아올라

 

요란스런 날개 소리를 내면서

끊어진 커다란 원을 그리며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껏 저 찬란한 새들을 보아 왔건만

지금 나의 가슴은 쓰리다. 맨처음 이 호숫가

 

황혼녘에 저 영롱한 날개 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그때 이래

모든 것은 변해 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피곤을 모른 채

짝을 지으며 차가운 물 속을

 

정답게 헤엄치거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가슴은 늙을 줄 모르고

 

어디를 헤매든 정열과 정복심이

여전히 그들을 따른다.

 

 

지금 백조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고요한 물 위에 떠 있지만

 

어느날 내가 눈을 뜨고

그들이 날아가 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어느 등심초 사이에 집을 짓고

어느 호숫가나 웅덩이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인가?

                                              

 

 

훔쳐 온 아이

 

스루스 숲 바위산이

호수 속에 잠긴 곳에

나뭇잎 우거진 섬 하나 떠 있다.

 

푸드득 나래치는 왜가리들이

잠자는 물쥐들을 깨우는 그 곳

 

우리들 요정의 통 속엔

딸기를 가득

훔쳐 온 빨간 버찌를 가득 숨겨 두었다.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어두운 잿빛 모래밭

달빛 물결이 빛나는

 

먼 로시즈 해변에서

우리는 밤새도록 춤을 춘다.

 

손에 손을 잡고서

서로 마주보며

 

저 달이 사라져 버릴 때까지

옛 춤을 엮어낸다.

 

 

우리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끓어오르는 물거품을 쫓지만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차고

잠 속에서도 근심에 싸여 있다.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그렌 카 언덕 사이로 굽이치는 시냇물 쏟아지는 곳

별 하나 목욕할 수 없는 등심초 우거진 웅덩이 속에

 

우리는 잠자는 송어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불길한 꿈을 안겨 준다.

 

작은 시냇물 위에

눈물방울 떨어뜨리는 고사리들 사이

살짝 몸을 내밀고서,

 

 

"자 아이야, 어서 오너라!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

요정과 함께 오너라.

 

세상은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곳이니."

 

 

이 아이는 우리와 함께 가고 있다.

진지한 눈을 하고서.

 

이제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따뜻한 언덕 위 송아지 우는 소리를,

난롯가 주전자의 평화로운 노래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갈색 새앙쥐가 귀리통을 돌고 도는 것을.

 

 

"사람의 아이 그가 오는구나.

거친 들판 물가로 손에 손을 잡고서

요정과 함께 오는구나.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눈물로 가득 찬 곳이니."

 

 

부활절 1916

 

내가 그들을 만난 것은 해질 무렵

 

18세기풍의 회색 집들 사이

카운터나 책상으로부터 벗어나와

생기 도는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의미없는 말로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혹은 잠시 머뭇거리며

정중하게 의미없는 말을 건네다가

 

인사도 채 끝나기 전에

클럽의 난로가에 앉아 있는

 

한 친구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농담이나 조롱거리를 생각했다.

 

그들도 나도 어릿광대의 옷을 입고

살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것은 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졌다.

무서운 미(美)가 탄생한 것이다.

 

 

저 여자의 나날들은

무지한 자선으로 보내고

 

밤은 논쟁으로 지새워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

사냥개와 더불어 말을 타고 달렸을 때의

그녀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가 있을까?

 

 

이 남자는 학교를 경영했고

날개 달린 천마를 탄 시인이었다.

 

또 한 사람은 그를 도와 준 친구이며

이제 막 그의 시재가 피어난 사람.

 

끝내는 명성을 얻어

그토록 예민한 천성과

대담하고 감미로운 사상을 가질 듯 보였던 아까운 인물,

 

 

이 또 한 사람은 주정뱅이요

허풍선이라 생각했던 사람.

 

그는 내 마음의 친구에게,

아주 몹쓸 가혹한 짓을 저질렀지만

이 노래에 그를 담아 두자.

 

그도 또한 이 예사로운 희극에서

자신의 역을 벗어버렸다.

 

그도 차례가 오자 달라졌다.

완전히 변했다.

무서운 미가 탄생한 것이다.

 

 

일 년 내내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좇는 자들의 심장은

 

살아 있는 시냇물을 어지럽히는

한 개 돌이 된 것만 같다.

 

길에서 오는 말도 기수도

떠도는 구름 사이를 날으는 새들도

시시각각 변한다.

 

시냇물 위의 구름 그림자도

시시각각 변한다.

 

강 언저리에 미끄러지는 말발굽 소리

시냇물 속에 첨벙대는 말

 

다리 긴 붉은 뇌조의 암컷들이 잠수하며 수컷들을 부르는 소리

시시각각 그들은 살아 있다.

 

 

돌은 모든 것들의 한 가운데에 있다.

너무 긴 희생은

심장을 돌로 만들 수 있다.

 

아 언제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늘의 역할

 

우리들이 할 일은 한 사람씩

이름을 속삭이듯 불러 주는 일

 

마구 뛰어놀던 아이의 몸에

잠이 찾아왔을 때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부르듯이.

 

 

이제 밤이 되었는가?

아니 밤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것은 결국 쓸모 없는 죽음이었던가?

영국은 모든 언행을

약속대로 지킬지도 모르는 일.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알고 있다.

그들이 꿈을 꾸고 죽은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지나친 사랑이

그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당황케 했다면 어쩌겠는가?

 

나는 그것을 한 편의 시에 적노라.

맥도나와 맥브라이드,

코널리와 피어스는

 

오늘 그리고 돌아오는 훗날에도

푸르름이 우거진 어느 곳에서도

 

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졌다.

무서운 미가 탄생한 것이다.

 

 
출생일 1865.06.13
사망일 1939.01.28

요약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도 활약했으며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885년 2편의 서정시를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에 처음 발표했다. 1889년 시집 <오이신의 방랑기 외>를 펴내 당시 세기말 시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1898년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지원하기 위한 아일랜드 문예극장을 설립했다. 이 극장은 1904년 애비극장으로 다시 지어져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된 후 상원의원이 되었다. 192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현대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그런 명예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상상력, 역사, 비술의 관계에 쏠려 있었고, 자신의 생각을 예술에 관해 신성시될 만한 책으로 재현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1925년 <비전>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시인, 민족주의 정치가

개요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도 활약했으며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일랜드 문학).

대립되는 전통의 계승

예이츠의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는 변호사였지만 나중에 초상화 화가가 되었다. 처녀시절 이름이 수잔 폴렉스펜인 어머니는 아일랜드 슬라이고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사람들은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압도적인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강력한 소수를 대표하는 영국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런던에서 학교에 다닐 때도 아일랜드의 영상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낄 정도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2가지 역사적 전통에서 분리된 채 있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도들과는 신앙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프로테스탄트들은 '출세만 생각하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이츠는 조너선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올리버 골드 스미스, 조지 버클리 같은 유명한 영국 문인들의 문학과 사상에 나타나 있는 18세기의 찬란한 프로테스탄트 앵글로아일랜드 전통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쇠퇴해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부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시대는 가톨릭 전통에 유리하며 영어보다 게일어로 표현되는 시대였다.

예이츠는 자신의 엄격한 예술적 취향과 조화시킬 수 있는 이 운동을 지지했지만 아일랜드가 영국 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을 주창하는 애국단체에서의 그의 행동은 자주 애매한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두 아일랜드 사회 중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의 입장을 주목할 만큼 애매한 자신의 고국의 입장과 관련지어 명백하게 밝혀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의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희망은 가톨릭 전통이나 프로테스탄트 전통보다 더욱 깊은 전통을 계발하는 것이었는데 그 전통은 그리스도교보다는 더 이교도적인 성격을 띠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관습·신앙·성지 같은 인류학적 증거 속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숨겨진 아일랜드의 전통이다. 1886년부터 발표된 예이츠의 많은 수필과 평론들은 시기가 적당했으므로 진정한 아일랜드를 알려야겠다는 시도였다.

1867년 예이츠가 불과 2세였을 때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더블린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받기를 희망했다. 1880년 가족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휴일에는 슬라이고에 있는 외삼촌 조지 폴렉스펜과 함께 지냈는데 이 슬라이고는 많은 시의 배경이 되었다. 1883년 더블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에 다녔으며 이곳에서 받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시인과 예술가들을 만난 것이었다.

탐미주의자·신비주의자·민족주의자로서의 예이츠

그동안 예이츠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발표한 것은 2편의 짧은 서정시로 1885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 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예이츠는 비술에 관심이 있는 단체, 즉 더블린 연금술협회의 결성을 도왔다. 1887년 가족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자 예이츠는 '신지학협회'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신비주의를 통해 지혜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마술은 일상 세계에서 멀리 떠난 상상의 삶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았다. 반면 과학의 시대는 혐오스러웠으며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이 시적 영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모험은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스베덴보리 신학, 연금술 등의 다른 신비주의 전통과 접촉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예이츠는 이미 자긍심이 강한 젊은이였고 이런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예술 감각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오만함이 잘 드러나곤 했다. 〈오이신의 방랑기 외 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1889)에 수록된 초기 시는 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

1889년 예이츠는 열정적이고 화려한 미모의 아일랜드 여인 모드 을 만났다. 그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예이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드 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열정을 아일랜드에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와 몸으로 몸소 구사하는 반항자이며 웅변가였다.

예이츠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을 때 부분적으로는 신념 때문이었으나 대부분은 모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 시절 아일랜드에 대해 쓴 많은 글들은 모드를 향한 속삭임이었다. 1902년 더블린에서 희곡 〈캐슬린 니 훌리안 Cathleen ni Houlihan〉이 초연되었는데, 모드가 캐서린 역을 맡았다.

1891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과 죽음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다. 정치가 남긴 텅빈 공간을 문학·예술·시·희곡·전설이 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세이집 〈켈트의 여명 The Celtic Twilight〉(1893)은 이런 목적을 향한 예이츠의 첫번째 노력이었지만 1896년 오거스타 그레고리 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진전이 없었다.

그레고리 부인은 귀족으로서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한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서부 아일랜드 지방의 민간전승인 옛날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 전승 지식이 고대 의식 및 자신의 감정과 그리스도교가 완전하게 파괴하지 못한 이교도 신앙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민간전승이 농촌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몰두하여 연구하면 사람들과의 명백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민속을 엄격하고 고매한 문체로 표현하면 순수한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개인적인 용어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상을 정치에 적용하면 농부와 귀족을 연결시키는 것인데, 즉 경험은 농부의 것, 문체는 귀족적인 것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연결은 도시와 부의 산물인 미움받는 중산층을 비난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도덕적 효과는 가져올 것이다. 1897년부터 예이츠는 카운티 골웨이의 쿨파크에 있는 그레고리 부인 집에서 여름을 보냈고 쿨파크를 사라져가는 우아함의 세계와 결부시켰다. 그 공원이 농부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 시각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1899년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4년 후 그녀는 아일랜드의 애국 동지이며 영국의 압제를 함께 증오하던 아일랜드 군인 존 맥브라이드 소령과 결혼했다. 그는 1916년에 일어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죄로 사형당한 항거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했다. 그런 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고 이 극장은 1904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아들과의 반목을 주제로 한 〈베일 해변에서 On Baile's Strand〉는 첫 상연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후 수년 간 예이츠는 애비 극장의 일반적인 운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당시는 논쟁이 빈번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어서 반아일랜드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배우·제작자·신문 등과 논쟁도 잦았다. 1907년 존 밀링턴 싱의 〈서부의 난봉꾼 Playboy of the Western World〉의 초연 때는 극장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언제나 자긍심이 강하고 당당했던 예이츠는 논쟁시 만만찮은 투사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상처를 빨리 잊지 못해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으며, 중산층, 상인 및 대부분의 더블린 사람들처럼 인습적인 성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했다.

현대의 시민들, 가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 등은 모두 예이츠가 영웅적 가치관에 호소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점차 중산층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애비 극장도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애비 극장에서 상연된 많은 연극들이 그의 눈에는 천박하고 통속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이츠는 대중의 변덕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연극으로 마음을 돌렸다.

1913년 서식스 주에 있는 스톤카티지에서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몇 개월을 보냈다. 파운드는 그당시 일본의 고전극인 [能]의 번역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고 예이츠는 그 극으로 인해 큰 자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극들은 대중보다 조신들을 기준으로 한 귀족문화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노극에 해당되는 대응물로 간주될 수 있는 극들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무희를 위한 4개 극 Four Plays for Dancers〉(1921)으로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응접실에서도 상연될 수 있는 일련의 짧고 형식적인 극이었다.

예이츠는 이러한 연극들을 새로운 종류의 연극, 즉 말·가면·춤·음악, 모방이 아니라 상징적인 동작의 조화로 생각했다. 그 연극들은 상류 사람들, 즉 그런 형태의 장점을 즐기는 소수들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16년 초연된 〈매의 우물에서 At the Hawk's Well〉는 그가 믿어왔던 많은 가치관을 구현한 작품이었다. 돈과 대중을 위한 부르주아 극장은 고대 그리스 연극이 일으킨 동정과 공포보다는 '신경질적인 흥분'의 장소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관심을 가졌던 예술은 관객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지금까지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었던 마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도록 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아일랜드 생활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13년 휴 레인 경이 수집한 39점의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 처리문제에 대해 벌어졌던 분쟁은 예이츠의 눈에는 사악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인은 그 그림들을 더블린 시립현대미술관이 한 화랑을 마련해 그것들을 전시한다는 조건 아래 기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자 레인은 화가 나서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빌려주었고, 1915년 그가 죽자 두 미술관이 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913년 예이츠는 이 논쟁에 개입했다. 왜냐하면 레인의 훌륭한 행동이자 귀족적 조치가 한 비천한 더블린인에 의해 능멸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이츠의 〈책임 Responsibilities〉(1914)에 실린 많은 시들은 레인 논쟁에 의해 고취된 작품으로 매우 통렬한 작품들이다. 이것은 예이츠와 아일랜드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1907년 그레고리 부인과 함께 피렌체·밀라노·우르비노·페라라·라벤나 등지를 여행했고 이탈리아 마을과 도시들이 나타내는 귀족적 우아함의 증거를 결코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1913년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즉 예의와 정중함을 존중하던 완전히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갈망이 그의 작품 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숙한 시인이며 상원의원

1917년 예이츠는 모드 곤의 딸 이졸트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몇 주 뒤 조지 하이드 리스에게 청혼해 1917년 결혼했다. 1919년 딸 앤이 태어났고 1921년 아들 윌리엄이 태어났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어 예이츠는 아일랜드 상원의 새 일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수락했고 6년간 봉사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제는 유명한 인물이 되어 현대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상상력, 역사, 비술의 관계에 쏠려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을 한 위대한 책, 즉 예술에 관해 신성시될 만한 책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그결과 1925년 〈비전 A Vision〉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간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1937년 결정판을 냈다.

한편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기량을 더해가고 있었다. 〈탑 The Tower〉(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 노르만 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 중의 하나이며 매우 노련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는 일생의 경험이 완벽한 형태로 구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뒤에 씌어진 〈나선층계 The Winding Stair〉(1929)로 나왔다.

예이츠는 60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계속 작품을 썼다. 그의 감정은 예전처럼 강렬했지만, 이 시기의 시는 대부분 상상력의 병적인 흥분 때문에 손상되었고 현실과 정의 사이의 균형도 불안정했다. 세계는 산산 조각나는 것 같았고, 예이츠는 그것을 혐오했지만 자주 세상의 몰락에 매혹되기도 했다. 귀족적 스타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말년에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자신이 존중해온 가치관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끼며 예이츠는 그 가치들이 위대한 인물, 즉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구출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예이츠는 활력과 독재주의적인 명쾌함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 산문으로 된 소책자 〈보일러에 관하여 On the Boiler〉(1939)에서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부패한 세상에 토로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정치 권력을 갈망하며 그 권력을 갖게 되면 폭력적으로 사용하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예이츠의 분노는 시인의 분노였고 삶에 대해 갖고 있던 시각은 시인의 시각이었다.

그는 단지 도덕의 힘, 즉 어떤 위대한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원했다. 그는 아일랜드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 즉 검열, 레인의 그림들, 건강 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 보호, 아일랜드의 국제연합 가입 문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상원의 화폐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예이츠의 말년은 긴장의 연속이었었다.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습한 겨울을 피해 여행을 다녔으나 은퇴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폭력이 끝내 전쟁을 몰고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한편으로는 그 전망에 두려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매혹되었다. 그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군대의 행진소리가 사랑·예술·미·예의범절의 주제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시절 예이츠의 삶의 감각은 계시적인 것이었다. 가끔 그는 두려워 그 계시로부터 도망치기도 했으나 또 어떤 때는 그 계시에 동조했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 Book of Modern Verse 1892~1935〉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 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 알 The Hern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그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외국에서 죽었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결국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 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 수록된 시 〈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에 명시된 장소로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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