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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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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柱論
2015년 05월 06일 22시 57분  조회:4376  추천:0  작성자: 죽림

1. 윤동주의 작가론

 

1. 윤동주(尹東柱)론


(1917-1945) 북간도 출생. 1941년 연희전문 졸업 및 1943년 일본 동지사대 영문과 수학. 중학 재학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구 사나」, 「거짓부리」 등을 발표했으나 정식으로 문단활동 한 적은 없음. 초기시에서는 화해로운 유년세계에서 자족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습작기 동시에서 드러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이후 자기자신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자아 응시가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순수 동경의 세계와 현실의 갈등 관계로 분화된다. 내면적 인간의 자아 성찰과 이에 수반된 부끄러움의 미학을 통해 비극적 인식 속에서 자아의 윤리적 완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유고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가 있다. 

2. 작가 연보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 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 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 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 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 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 시집, 1948) 

 

3. 윤동주論 - 화해와 융화의 세계 열어 준 윤동주

 

 


한국 현대시인 중에서 특히 윤동주(1917-1945)의 생애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심성, 시인과 사회적 배경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들어 있는 전편의 시들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맑고 밝아서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색깔, 어디서 우는지 몸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흐르는 산 속의 샘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씻어 내린다.

 

그와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친구인 문익환 씨의 회고에 따르면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가 보여 주고 있는 전기적 요소와 시적 사유의 결합은 자의식의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시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근원적 질서 속에서 그의 본질은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주 속에서 느끼는 세월과 그 흐름이 가져다주는 변화, 그 모든 것은 생명과 죽음, 존재와 소멸의 내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괴로움은 어둡고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보편적 상황과 함께 어두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괴로움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분리되어 있는 자아를 직시하는 자기 성찰의 과정에서 그의 부끄러움의 시어가 탄생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대부분 진실을 추구하는 의식 세계와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대적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 던져 

윤동주는 유별나다고 할만큼 시대적 현실을 포함한 세계를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감지했다. 그의 예민한 촉수는 늘 세계를 향해 곤두서 있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 쉽게 쓰여진 시 전문 

 


 

    그의 최후의 시로 알려진 쉽게 쓰여진 시에는 손을 내미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대립이 있다. 이것은 작품 외적으로는 식민지의 청년 윤동주와 지배국인 일본으로 건너온 유학생인 자신과의 대립이며, 또한 일상적 인간과 시인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밤과 아침의 대립이 이중 삼중으로 중첩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제 대립되는 세계 사이에서 좌초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신을 악수시킨다. 따뜻한 체온의 나눔이 감지되는 이 악수의 이미지는 먼길을 돌아온 시인의 또다른 자기 응시가 되는 것이다. 
    '우물'이나 '거울'의 이미지가 동적으로 변화해 자기 성찰과 수련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길'의 공간이다. 서시의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라는 운명적 목소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윤동주 시의 곳곳에서 여기저기로 뻗어 있는 '길'들과, '길 모퉁이', '뒷골목', '어느 낯선 거리'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의 일부 

 


 

    길의 공간성은 언제나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길은 바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길이며,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정신적 세계로서의 길이다. 시인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부정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참함을 넘어서 끊임없이 가야 하는데, 이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이 여전히 담 저쪽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곳에 남아 있는 자아가 화자가 잃어버린 참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관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 현재 잊고 있는 존재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먼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의 길을 가는 것이며, 고통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길의 선택을 계속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이며, 이러한 결의나 다짐의 태도는 윤동주 시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결국 윤동주의 시와 그의 생애가 모색되어 있는 초점은 따뜻한 화해의 세계로 모아진다. 어둠과 빛, 자기 부정과 긍정, 환자와 건강인, 그리고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극복하게 하는 사랑과 정다움 등 의미의 대응 관계를 이루는 두 세계를 하나로 묶는 융화의 세계인 것이다. 그 균형과 조화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떠나며, 자아의 탐구와 실천 사이의 끊임없는 상충 속에서 요동하는 괴로움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예리한 현실적 상황과 이상적 가능성의 부딪침 사이에서 윤동주의 감수성은 공존을 시도한다. 그 감수성은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포용하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나와 타인을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윤동주의 모든 시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을 긍정적 깨달음에로 이끌어 주는 의미 체계를 구성한다. 그 두 대립되는 세계를 이어 주는 매개항은 어린 날의 추억이나 친구들, 어머니와 순이, 때로는 이웃 사람들로 표상 되고 있다. '노여움, 억 

울함, 아까움 같은 것을 마음속에 조용히 새기고는 늘 변함없는 미소로 사람을 대하던' 그의 성품은 밤비 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열쇠를 사람들 사이의 연대 의식으로 융화하려는 시 정신과 일치된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부정적인 현실의 나를 극복하여 시적 초월로 자기 존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모색의 과정을 보여 준다. 대상을 주관화시키는 이미지의 처리법, 자기가 또 하나의 자기에게 다짐하는 미래 지향적 시제, 흐르듯 이어지는 시어의 연속적 흐름, 산문적 형식 등 그의 시를 특징짓는 모든 경향들은 이러한 그의 내면적 요구와의 연관에서 해명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행위는 괴로워하는 자기가 희망을 가지라고 부추기는 또 다른 자기에게 내미는 악수였고, 나와 타자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연결의 통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들은 이웃과의 연대 의식을 우리 모두에게 깨우치는 따뜻한 화해의 시학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4. 尹東柱의 삶과 문학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全文 

 


 

    윤동주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한편으로 대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생존시에 문인으로 자처하지도 않았고 문단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흔한 동인회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문단 친구도 없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시집이 발간되면서 '사후(死後)의 훈장'처럼 그에게 시인의 타이틀이 붙여졌고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 징역형을 받고 옥사했다고 해서 '저항 시인'이라는 '덤'까지 붙여 주었다. 
    1918년에 태어나서 45년 해방을 6개월 앞둔 2월 16일 27세의 나이로 옥사한 그는 참으로 여한이 많은 일생을 산 인물이다. 우선 그는 장가를 한 번도 못 가 보았다. 공부한다고 일본을 오락가락 하다가 결혼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결혼을 해볼까 하다가 그만 감옥살이 신세가 되었고 감옥에서 사망하니 물론 혈육이 있을 리 없다. 생존시에 '시인' 소리를 못 들은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직장이란 것도 가져 보지 못했다. 그 시절 남자 나이 20세 전후가 되면 결혼하고 취직해서 남자로서 갖출 것은 대충 갖추는 것이 관습인데 그는 문학 공부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모든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았다. 성격이 무섭도록 침착한 그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전혀 오불관언이었다. 
    윤동주는 자기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결벽증이 있었다. 다듬고 또 다듬고 해서 완벽하다고 스스로 판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라도 보여주지 않았다. 또 그는 작품을 무슨 잡지에 발표하기를 몹시 꺼려했다. 남들이 그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설을 붙이는 것을 그는 불쾌하게 여겼다. 하얀 항아리에 흙칠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생시에 이처럼 작품 발표를 하지 않다가 그가 사망한 이듬해 경향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가 발표되었고 2년 후인 48년 1월에 그의 시 30여편을 수록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10주기가 되는 55년에 같은 제목의 시집이 나왔는 

데 이 책에는 88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래서 윤동주는 '죽어서 시인이 된 시인'이다. 
앞에 적은 그의 시 서시의 깨끗함에 비해 그의 죽음은 너무나 처참하다. 맑게 살고 싶은 그의 뜻과는 정반대의 죽음이었다. 그는 2년 선고를 받고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죄목도 대단히 애매 모호하다. 43년 한국 학생 대표들이 중국 장개석(張介石) 총통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가던 도중에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조선 독립을 도와 달라는 탄원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일경(日警)은 한국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멍청한 학생은 빼고 공부 깨나 한다는 학생은 무조건 잡아갔다. 공부밖에 모르는 윤동주가 여기에 휘말린 것이다. 

    윤동주를 비롯해서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된 한국 학생들은 정체 모를 주사를 매일 맞았다고 한다. 면회 간 친척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東柱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몸은 살이 다 빠져 해골 같았고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또 형무소 간수의 말에 의하면 東柱는 운명할 순간에 뜻모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 무렵 그의 고향집에 2통의 전보가 배달되었다. 먼저 온 것이 '2월 16일 東柱 사망 시체 가져가라.'였고 후에 온 전보는 '東柱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사망 시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구주 제대에 해부용으로 제공함.'이었다. 그러니 먼저 붙인 전보가 나중에 도착한 것이다. 시체를 가져가라 한 것은 해부용으로도 사용하지 못할 만큼 몸이 엉망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東柱의 맑디맑은 정신과 독약 주사를 맞으며 실험용 몰모트가 된 그의 육신은 각각 하늘과 땅으로 나뉘어졌다. 그의 영혼은 대시인의 명예를 얻었고 그의 처참한 육신은 고향 북간도 용정땅 東山교회 묘지에 묻혔다. 東柱는 성격적으로 예술의 틀에 갇힌 사람이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문학서라면 보이는 족족 밤을 새워 읽어 젖혔다. 간도(間島) 화룡현에 있는 明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교와 용정 광명중학교를 오락가락하며 다니다가 38년 연희 전문 문과에 들어가는 동안 그는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 방면의 공부에만 전념했다. 


 

    감옥살이하는 동안에도 고흐에 관한 저작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는데 화집, 전기, 서간집 등이 상당수 있었고 판화 잡지 백과 흑을 여러 권 구입하였다. 그의 성적표를 보면 음악 점수가 아주 좋다. 또 그는 스포츠에도 재주가 있어서 농구 선수, 축구 선수로 뛰기도 했으며 대나무를 기다랗게 쪼개어서 스키를 만들어서 타기를 즐겼는데 그 당시 스키 재주로 東柱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멋쟁이인 그는 그의 인생을 미완성인 채 남기고 백골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운명을 예감한 듯한 시편을 남기고 있다.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또 다른 故鄕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全文 

 


 

 

 

    한중 수교로 연변 자치주 용정에 있는 尹東柱의 묘가 자주 매스컴에 오른다. 독립 운동가 묘역에 모셔야 하지 않느냐는 논의도 나온다. 좋은 이야기다. 그의 모교 연세 대학에 그의 서시(序詩)를 새긴 시비(詩碑)가 서 있고 '윤동주 장학금'도 만들어져 있다. 그의 고결한 정신이 오늘에 새롭다. 

 

1. 동주형의 추억 - 文益煥 
2. 人間 尹東柱 - 張德順 
3. 先伯의 生涯 - 윤일주(윤동주 동생) 
4. 청순하고 개결한 젊음의 시인 - 신경림(시인) 

1. 동주형의 추억(文益煥) 

...나는 동주형의 추억을 써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었다. 무엇인가 동주형에 대해서 내가 아는 대로 써야 할 것만 같은 심정이다. 그와 나는 콧물 흘리는 어린 시절의 6년 동안을 함께 소학교에 다니며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으로 뼈가 굵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평양으로, 거기서 또 만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가장 민감한 십대에 세 중학교를 우리는 함께 편력하였다. 동주형에 대해서 무엇인가 쓰고 싶은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나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서로 길이 갈렸다. 그는 문학 공부하러 서울로, 나는 신학을 공부하러 동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으례 서로 만나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속을 털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문학에 관해서는 언제나 내가 듣는 평이었다. 아무튼 나는 인생의 민감한 형성기에 그와 함께 유랑하면서 인생과 시를 배웠다. 


 

    그가 우리의 추억 속에 남겨 놓고 간 그 귀중한 것들은 그렇게 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 와서는, 풍파는 잠을 잤고 다들 양같이 유순하고 호수같이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넔 속에는 남 모르는 깊은 격동이 있었다. 호수같이 잔잔한 해면 밑 깊은 데는 아무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해류의 흐름이 있듯이!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 사이에 말없는 사람으로 통했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를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 말없는 동주와 사귀고 싶어했다. 그의 눈은 언제나 순수를 찾아 하늘을 더듬었건만 그의 체온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과장 없이 고백할 수 있다. 그의 깊은 데서 풍겨 나오던 인간적인 따뜻함을 나는 아직 아무에게서도 느껴본 일이 없다고. 그러기에 그가 차지하고 있던 나의 마음 한구석은 다른 아무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국땅 만주에서도 신경의 거리를 헤매다가 해방의 종소리를 듣던 그 정오에 내 마음을 견딜 수 없이 쓰리게 한 것은 동주형의 환상이었다. 

동주야, 네가 살았더라면......

    동주형은 참으로 멋진 사내였다. 그의 一動一靜은 모두 자연스러웠고 서로 어울려서 동주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지성은 모던이었다. 그러나 그가 베적삼 베고의에 고무신을 끌고 저녁 산책을 하는 것은 수수한 아저씨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촌스러우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동주형은 깨끗한 사람이었다. 양복은 언제나 구김살이 없었고 머리가 헝클어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경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저래도 다 동주다웠다. 그렇다. 동주다운 것 --- 그것이 그리 좋았고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멋이 한국 민족의 자연스러운 풍모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아무튼 동주형은 소위 멋을 낸다는 청년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멋 --- 그의 성품에서 풍겨 나오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나는 그의 멋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한국적인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극히 멋지게 한국적이었기에 그의 마음은 넓고도 넓은 한 울과 같았다. 
    그의 저항 정신은 불멸의 전형이다라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얼른 수긍하지 못한다. 그에게 와서는 모든 대립은 해소되었었다. 그의 미소에서 풍기는 따뜻함에 녹지 않을 얼음이 없었다. 그에게는 다들 골육의 형제였다. 나는 확언할 수 있다. 그는 福岡형무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면서도 일본 사람을 생각하고는 눈물 지웠을 것이라고. 그는 인간성의 깊이를 파헤치고 그 비밀을 알 수 있었기에 아무도 미워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동주형은 그렇게 느낄 수 없었으리라.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가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면 최근작을 보여 달라곤 했다. 그러면 그는 아무 말 없이 공책이나 종이

조박지에 쓴 시들을 보여 주곤 했다. 조금도 뽐내거나 자랑하는 기색이 없이 좋았다. 그렇다고 그는 애써 겸손하지도 않았다. 다만 타고난 동주다움을 가지고 살고 생각하고 쓸 뿐이었다. 나는 그의 시를 퍽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알기 쉬워서 좋았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였다. 방학 때마다 사 가지고 돌아와서 벽장 속에 쌓아 둔 그의 장서를 나는 못내 부러워했었다. 그의 장서 중에서는 문학에 관한 책도 있었지만 많은 철학서적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한 번 나는 그와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해가 신학생인 나보다 훨씬 깊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도 쉬지 않고 공부하고 넓게 읽는 그의 시가 어쩌면 그렇게 쉬웠느냐는 것을 그 때 나는 미처 몰랐었다. 그의 시가 그렇게도 쉬웠기 때문에 나는 그의 시는 그다지 훌륭한 것이 못되거니라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것이 그렇게도 값진 것으로 우리 문학사상 찬연히 빛나는 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에 나타난 신앙적인 깊이가 별로 논의되지 않는 것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곤 했었다. 그의 시는 곧 그의 인생이었고, 그의 인생은 극히 자연스럽게 종교적이기도 했다. 그에게도 신앙의 회의기가 있었다 

 

    나는 동주형이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쓴다고 야단스레 설치는 

. 延專시대가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존재를 깊이 뒤흔드는 신앙의 회의기에도 그의 마음은 겉으로는 여전히 잔잔한 호수 같았다. 시도 억지로 익히지 않았듯이 신앙도 성급히 따서 익히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 곧 난대로 익어 가는 시요 신앙이었던 것 같다. 


 

    동주형은 갔다. 못난 나는 지금 그의 추억을 쓴다. 그의 추억을 쓰는 것으로 나의 인생은 맑아진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깨끗했던 것이다. 

 

2. 人間 尹東柱 (張德順) 

    동주는 깊은 애정과 폭 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자기는 회의와 일종의 혐오로 자신을 부정하는 괴벽한 휴머니스트이다. 남에 대한 애정은 곧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변모하는 그의 인생관이 시작에도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우물 속에 비친 <자화상>을 보고 독백하는 말이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면서도, 자기가 인류의 한 멤버라는 것을 인식할 때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숭고한 인간애가 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自畵像) 
    전자의 <그 사나이>는 외톨로 된 동주 자신이고 후자의 <그 사나이>는 인류의 일원인 동주였었던 것이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殿堂) 


 

    자기 이외의 모든 동포의 행복을 기원하면서도 자기를 준험한 산맥임을 자학하는 그의 희생의 휴머니티가 나타나 있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靜튀?囚?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十字架) 

 

    여기에서 그의 자아부정의 인류애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처럼 전 인류의 구세주를 의식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의 포근한 인간미와 우애가 생리처럼 그를 지배하여 결국은 자학에 가까운 獄死를 감수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人間 東柱>는 인간이기에 인간애를 알았고, 동주는 또 영원히 외로운 <童舟>였기에 외롭게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C전문학교에 입학시험 보러 상경하였을 대의 일이다. 그때 그 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동주는 나를 위해 하숙방을 얻어 놓고 역까지 마중 나왔다. 저녁 늦게까지 내 하숙방에서 이야기하다가 동주는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나갔다. 아마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가는 여독을 풀자고 자리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 밖에서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깼다. 동주가 다시 온 것이다. 
    방에서 냇내가 나니 창을 좀 열고 자라고 이르는 것이다. 내가 들창문을 좀 열어 놓은 것을 보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자정이 넘은 어두운 신촌 굴 길을 타박거리고 더듬어 갔다. 뒤에 들으니 동주는 가깝지 않은 기숙사까지 다 갔다가 걱정이 되어서 다시 왔더라는 것이다. 그 방에서 학생 하나가 냇내에 중독이 되어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주가 너는 아늑한 호수에, 나는 준험한 산맥에 있겠다는 그 시심과도 같은 일화이다. 동주는 항상 시와 생활이 일치된 경지에서 살았다. 外柔內剛이란 말이 있지만 동주는 外美內美의 인간이다. 그의 시가 아름답듯이 그의 인간도 아름답고, 그의 용모가 端正優美하듯이 그의 마음도 지극히 아름답다.

 

    나는 언젠가 동주의 추억기에서 희랍의 대리석조각을 연상할이만큼 훤출 미끈한 미남자라고 쓴 일이 있다. 어렸을 적에 나에게 영상된 동주는 미남 그대로였고, 마음씨는 다정한 누나 그대로였다. 
    동주와 나는 世交 집안의 사이였다. 동주의 조부와 나의 조부가 이역 북간도에서 함께 살았다. 동주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같은 교회의 일꾼이었다. 나의 형 

<요한>과 동주는 은진중학의 동기동창이다. 나는 형을 졸졸 따라서 동주와도 농을 했다. 형은 왕왕이 나를 귀찮아했으나, 동주는 어느 때나 다정히 나를 감싸주었다. 우애 있는 휴머니스트였다. 

    1930 몇 년의 일이었던지 --- 어린이(?) 잡지에 지도라는 동요를 발표하고 나에게 읽어 주었다. 오줌 싼 이야기이다. 나도 웃고 저도 웃었다. 

오줌을 싸고도 부끄럽지 않아서 글까지 쓰고 또 자랑까지 한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의 동주의 웃음은 오줌 싼 어린이답지 않게 의젓했고, 티없는 호수의 잔잔한 무늬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그러나 동주에게는 짓궂은 자기 학대가 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비운의 최후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서울에서 나는 얼마 동안을 동주와 함께 하숙생활을 한 일이 있다. 그는 유별나게 간지럼을 많이 탔었다. 그의 친구들은 심심하면 그의 발을 건드린다. 그러면 동주는 대굴대굴 뒹군다. 얼굴이 빨개져서...... 그러는 것이 재미있어서 친구들은 더 극성이다. 하루는 동주가 친우들에게 자청해서 발을 내놓고 간질이라고 명했다. 친구들은 영문도 모르고 발에 손을 댔다. 동주는 이를 악물고, 다리를 틀면서 참았다
    한참만에 친구들은 장난할 의욕을 잃었다. 동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기에서 자학으로 넘어선 경지이다. 
    동주는 또 영원한 향수를 그리다가 그대로 죽어간 시인이다. 그가 이역에서 태어났고, 또 뼈가 굵을 때까지 이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조국 땅에 대한 향수는 남달리 대단했다. 그러

아니었을지. 

    나 조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조국 아닌 일제의 식민지였었다. 그는 이 조국 아닌 조국 땅에서 또 다른 조국을 향수했던 것이다. <또 다른 故鄕>은 이때 쓴 것이다. C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에는 그 대로 빼앗긴 땅에 대한 향수를 안은 채 일제 감옥 속에서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다고 전해지니, 그것은 향수의 절규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였다. 심심할 때 홀로 하숙방 툇마루에 앉아서 이 노래를 불렀다. 또 그 좋아하는 휘파람으로 이 곡조를 먼 하늘에 날려보내기도 했다. 또 다른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哀訴하던 시인 동주는 정녕 그 원대로 일찍이 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동포애와 인류애로 자신을 짓밟은 동주, 일제에 항거한 반항시인 동주는 이제 가버렸으나, 인간 동주의 시와 시심과 휴머니티는 영원히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이다. 

3. 先伯의 生涯 -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 주고 27년간을 시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舍兄 윤동주를 일제는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 전 일이었습니다. 1910년대의 북간도 明東 - 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것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동주형은 이곳에서 교원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가는 할아버지가 손수 벌목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회령이요 어려서 간도에 건너가시어 손수 황무지를 개척하시고, 기독교가 도래하자 그 신자가 되시어 맏 손주를 볼 즈음에는 장로로 계시었습니다. 동주형의 勤實하고 寬裕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아명은 해환이었고, 그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얌전한 소학생 해환은 아동지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931년에 명동소학을 마치고 大拉子라는 곳에서 중국인관립학교에 1년간 수학하였으니, 시 별 헤는 밤의 佩, 鏡, 玉이란 묘한 이국소녀의 이름은 이 때의 추억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32년 그가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자, 조의 집은 용정에 이주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습니다. 축구선수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 입었습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어 다니고, 초저녁에는 산책, 밤늦게까지 독서하거나 교내잡지를 만드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산책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1935 년 봄 3학년을 마칠 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의 유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기었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 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의 의욕이 고조된 듯합니다. 이즈음 백석 시집 사슴이 출간되었으나, 백 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正字로 베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평양 유학도 끝을 막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용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 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 카톨릭 소년誌에 童舟라는 닉네임으로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비운은 중학교 졸업반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는 진학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때 벌써 많은 동요와 詩稿를 가지고 있던 그게 문학 이외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문학에 뜻을 두어 북경과 동경에 유학하고 교원까지 지내셨건만, 자기의 생활상의 실패를 아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퇴근 전부터 산이고 강가이고 헤매다가 밤중에야 자기 방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뚜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년을 두고 아버지와 대립이 계속되다가 졸업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의 권고로 아버지가 양보하신 것입니다. 소학과 은진중학 동창이며 고종사촌이며 또 동갑인 송몽규형과 동행하여 서울에 온 것은 1938년 봄이었습니다. 
    상경하자 두 분 다 延專에 입학하고, 그 후부터 집에 오기는 1942년까지 매년 2회, 여름과

 

    겨울 방학 때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절의 나의 추억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정답던 모습은 사각창에 교복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 있는 형님입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날로 양복은 벗어 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우셨습니다. 소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맷돌도 갈며 과묵하던 그도 유우머를 섞어 가며 서울 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일로 상함을 입는 끓어오르는 시흥과 독서시간의 아쉬움에서였을 것입니다. 노여움도 아까움도 미소로서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그는 차마 집안 어른들의 일을 돕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寬裕함이 그의 의지를 지탱케 못하였을지나 결코 우유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용정은 인구 십만에 가까운 작지 않은 도시였으나, 대학생인 그는 아무 쑥스러움도 없이 베옷을 입은 채 거리로 소를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릴케나 발레리의 시집, 또는 지이드의 책을 옆에 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으스름 때면 으례이 하는 산책에, 동생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거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로수가에서 北原白秋의 고노미찌를 코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숲속에 앉아 새로 뜨는 별과 먼 강물을 바라보며 손깍지를 낀 채 묵묵히 앉았을 때에는 그의 얼굴에 무슨 동경과 감정이 끓어오름을 연소한 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작로를 걷다가도 부역하는 시골 아낙네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하고,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귀여워서 함께 씨름도 하며, 한 포기의 들꽃도 차마 못 지나치겠다는 듯, 다서 가슴에 꽂거나 책짬에 꽂아 놓곤 하였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하는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의 표백은 그의 天稟의 기록이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짐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십 권의 책으로 한 학기의 독서의 경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小川未明 童話集을 주며 퍽 좋다고 하던 일과 수필과 版畵誌 白과 黑 ? 7,8권을 보이며 판화가 좋아 求得하였으며, 기회가 있으면 자기도 목판화를 배우겠다고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이리하여 집에는 근팔백권의 책이 모여졌고 그 중에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앙드레 지이드 전집 旣刊分 전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적, 발레리 시전집, 불란서 명시집과 키에르케고오르의 것 몇 권, 그밖에 原書 다수입니다. 키에르케고오르의 것은 연전 졸업할 즈음 무척 애찬하던 것입니다. 
    1941년 12월 연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졸업장과 함께 정성스러이 쓴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들고 왔었습니다. 그것은 초판 77부로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소중히 지니고 다녔습니다. 더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942년에 {懺悔錄}이란 시를 써 놓고 도일하여 入敎大學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7월 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병환으로 누어 계시는 어머님의 침상에 걸떠 앉어 이야기 동무로 며칠을 보내다가 뜻밖에 속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東北大學에 있던 한 친우의 권유로 該校 입학수속 치르라 오라는 전보 까닭이었습니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자 눈물이 글썽 하였습니다. 늘 정거장에서 맞고 바래던 그와 그렇게 헤어짐이 최후의 작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떠나면서도 어머님 걱정을 뇌이고 또 뇌이드랍니다.

 

    아마 운명시까지 눈앞에 어머님의 모습만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동북대학에 간줄 안 형에게서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同志社 영문과로 옮겼다는 전보가 오자 아버지는 좀 노여운 기색이었습니다. 東京과 京都에서의 그의 고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戰火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어졌고 --- 하숙방에서 홀로인 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후의 악수. 
({쉽게 씌어진 詩}에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고독만으로 항거하기에는 현실의 물결은 너무 거센 것이었습니다. 1943년 7월 귀향일자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 후에 온 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차표와, 그 차표로 찾은 약간의 수하물 뿐이었습니다. 차표를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출발직전에 경찰에 잡혔던 것입니다. 京都대학에 있던 몽규형도 함께 잡혔습니다. 鴨川署에 미결로 있던 동안 당시 동경에 계시던 당숙 영춘선생이 면담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형사의 담당으로 일기와 원고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매일 산책이 허락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던 형사의 말은 결국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주와 몽규 두 형이 각 2년 언도를 받고 福岡형무소에 투옥된 1944년 6월 이래, 한 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로는 그의 자세한 옥중생활은 알 길이 없었으나, 英和對照 新約聖書를 보내라 하여 보내드린 일고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매달 초순이면 꼭 오던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다 가서야 上記한 전보로 집안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유해나마 찾으러 갔던 아버지와 당숙님은 우선 살아있는 몽규형부터 면담하니 {동주!}하며 눈물을 쏟고, 매일 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노라는 그는 피골이 상접하였더랍니다.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간수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福岡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 장의 인쇄물이 배달되었으니 그 내용인즉 {동주 위 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는 가져가거나 不然이면 九州帝大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하시압.}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 

음이 있었습니다.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에> 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줌의 재가 된 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 땅 간도에 돌아왔습니다. 약 20일 후에 몽규형도 같은 절차로 옥사하였으니 그 유해도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동주형의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 치는 날이었습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메마른 그의 무덤 위에 지금도 흰 눈이 내리는지.--- 
    십년이 슬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上梓함에 있어 舍弟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 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拙文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無名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어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 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4. 舍弟 一柱 謹識 - 청순하고 개결한 젊음의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 
- 「서시」 전문 

 

우리 나라 시를 한두 편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이 유명한 시를 나는 지금은 고인이 된 성래운 교수와 함께 기억을 한다. 70년대 중엽 초대면의 술자리에서 그가 처음 암송한 시가 바로 이 시였고, 그 뒤로도 그는 시를 암송할 때면 꼭 이 시를 앞에 놓았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는, 당시 유신 독재를 반대하다가 강단(연세대)에서 쫓겨난 그의 각오와 심경을 더없이 잘 보여주는 시여서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하고 결연한 목소리로 외우다가 한 박자 쉰 다음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하고 소년처럼 감상적이면서도 티없이 맑은 가락으로 끝막을 때 자리는 늘 숙연해졌다. 이때 대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청중은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겠다고 다같이 속으로 다짐했을 것이다. 그는 윤동주 시인과는 또 다른 인연이 있으니, 출신 학교인 연세대 교정에 시비를 세우는(1968년) 일에 그가 앞장을 섰었다. 그는 교육학자 또는 교육 행정가(잠시 문교부 장학실장을 지낸 일이 있다)로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자괴심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윤동주 시비를 세운 일은 자랑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이 시와 더불어 생각나는 것은 70년대의 동아, 조선의 언론 파동이다. 정보기관의 언론 통제에 항거하여 동아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자 정부는 광고 탄압으로 맞섰는데, 이때 언론자유수호를 지지하는 독자들의 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구가 "하늘을 우러러......"였다. 그 어둡던 시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젊은이들의 시대적 고뇌가 이 시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감한 짧으면서도 치열한 시인의 삶에 의해 더욱 돋우어졌으니, 실제로 그 무렵 이 시를 외거나 들으면 숨막힐 것 같은 어둠이 조금은 걷히 

고 앞이 부옇게나마 밝아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었다. 또한 이 시에 넘치는 깨끗한 젊음과 개결한 의지도 독자들을 사로잡는 요인이 되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귀절을 읽으면 권력과 돈이 판치는 흐린 세상에 한 줄기 맑은 샘물이 솟는 것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윤동주 시를 좋아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다. 특히 새로운 길 ?을 좋아했는데, 이 시가 나로서는 처음 읽은 윤동주 시였다. 그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가 아니고 김용호라는 이의 {시문학입문}이라는 개론서였다. 육이오 다음해 봄, 마을마다 장티푸스가 돌아 뒷산에 매일처럼 새 무덤이 생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고 나니 문득 마을과 마을 앞으로 난 길과 길가에 핀 민들레와 길가의 미루나무에서 우짖는 까치가 밝고 환하게만 느껴졌다. 전쟁과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가 죽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밖으로 나다니게 되었고 활기를 되찾았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새로운 길」 전문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같은 표현은 지금 보면 미숙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의 힘찬 리듬은 쉽사리 나를 바로 잡았다. 더욱이 "민들레가 피고...... / 바람이 일고"의 청순한 이미지는 이 힘찬 리듬에 상승으로 작용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신작로와 논둑길을 가면 절로 힘이 났고, 길가의 작은 들풀이며 돌멩이 하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비로소 이웃 마을로 전쟁통에 죽지 않고 살아 남은 동무를 찾아가기도 하고, 강까지 나가 물위에 떠다니는 청둥오리를 구경하기도 했다. 좋은 시는 사람이 사는 데 힘이 된다는 구체적 예를 나는 지금도 「새로운 일」에서 본다. 윤동주 시인이 어떠한 생애를 살았는가를 알기 전이었으니 이 힘은 시인의 생애로부터 온 것이 아닌, 시 자체가 가진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구해 읽고 가장 좋아하게 된 시는 「자화상」과 「소년」이었으며, 지금도 나는 윤동주 시 중에서 이 두 편을 특히 좋아한다. 이 시가 가진 청순함, 개결함, 젊음이 좋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전문 

 

    이미지니 상징이니 하는 시의 장치들을 이해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 읽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이 시를 특히 좋아했던 것은 어째서 였을까., 우물 속에 밝은 달과 구름, 하늘과 파아란 바람과 가을과 함께 서 있는 깨끗하고 젊은 시인이 떠올라서였지 않았을까. 또 그것이 장차의 내 모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였지 않았을까. 이 시를 읽고 나서 나는 밤에 여러번 우물을 가서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우물 속에서 시에 형상화된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을 보았을 때의 기쁨, 어쩌면 그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일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소년」의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는 곧 그 무렵의 내 감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이 생각되어서 나는 좋았다. 
    연세대 구내(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시절 지냈던 기숙사 앞이라고 함)에 세워져 있는 시비의 비양에는 「서시」가 작시 일자와 함께 새겨져 있고 비음에는 다음과 같이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윤동주는 민족의 수난기였던 1917년 독립운동의 거점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1938년 봄 이 연희동산을 찾아 1941년에 문과를 마쳤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며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45년 2윌 16일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모진 형벌로 목숨을 잃으니 그 나이 29세였다. 그가 이 동산을 거닐며 지은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리니 그 메아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더불어 길이 그치지 않는다. 여기 시 한 수를 새겨 이 시비를 세운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한눈에 보게 해주는 글이지만 조부가 회령에서 살다가 북간도로 망명하여 황무지를 개척했다는 것,

 

     아버지는 명동에서 교원으로 일했다는 것, 일가족이 그 무렵 들어온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는 것 정도의 개인사와 함께, 그 

는 간도의 명동소학교(용정에 있는) 시절 급우들과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어 동시 등을 발표했고 광명학원 중학부 시절에는 연길에서 나오던 잡지에 동시를 발표했으며, 연희전문 시절에도 문과에서 나오던 {문우}지에 이미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졸업하던 해에는 19편으로 된 자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할 계획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등은 알아두는 것이 윤동주 시인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같다. 이 사실은 대개의 항일민족시인이 항일운동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시인이 된 데 반하여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시인으로 살려니까 항일사상가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의 시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해 주는 시집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스스로 지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이로써 그는 일제의 강점 하에서는 항일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굳은 투사이기에 앞서 시에 모든 것을 건 철저한 직업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매 시편에 또박또박 제작 일자를 써 놓은 것도 장인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터로, 가령 그의 시를 읽으면 폴 발레리가 "불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기계에 의해 기술상의 구속을 받음으로써 유용한 것이 되며 비로소 원동력이 된다. 마찬가지로 시에 있어서도 적절한 속박이 있어 불이 소멸되지 않게끔 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큰 자유는 큰 엄격성 밑에서만 얻어진다"고 시 창작의 방법을 제시한 말이 떠오른다. 그의 시 가운데서 비교적 사람들의 입에 덜 오르내리는 「눈감고 간다」를 읽어보자.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 「눈감고 간다」 전문 

 

    말할 것도 없이 이 시는 식민지시대의 삶의 방법을 암시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사는 '아이들' 치고 누가 태양을 사모하지 않으며 별을 사랑하지 않으랴. 그러나 밤이 되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쩌랴. 차라리 눈을 감고 가되 가진 씨앗일랑 땅에 뿌리고, 혹여 씨앗을 뿌리는 일을 막기라도 하거든 번쩍 눈을 뜨고 대어들어라. 이 시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읽는 일 또한 어렵지 않다. 그러면서도 가락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불이 소요되지 않게끔 조정하는 적절한 속박이 있는 탓이다. 그 큰 엄격성 밑에서 이 시는 큰 자유를 얻고 있는 터로, 장인 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눈감고 간다」라는 제목으로 스스로 시의 대상이 되면서 자칫 고압적이 될 수 있는 명령형을 순화시키는 방법도 상당한 시적 훈련을 거치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게는 윤동주 시인의 개인사를 알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먼저 그 아우 윤일주 씨가 있다. 공학도로 시인이기도 한 그와는 문학예술지에 함께 시를 가지고 추천을 받았기 때문에 두세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기억으로는 그가 형에 관한 얘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아마 나이 차가 많은 형과 함께 산 기간이 고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뒤 윤동주 시인의 숙부가 되는 중국문학가 운영춘 교수(작고)와 한동안 꽤 가깝게 지냈다. 내가 관계하는 출판사에서 그의 번역으로 장자와 공자를 냈기 때문이다. 그는 술자리에서마다 글재주가 뛰어나고 그림도 잘 그렸다는 등, 심성이 맑고 깨끗하다는 등, 조카 윤동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대개 책에서 읽었거나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인 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 간도의 용정 출신으로 명동중학을 함께 다닌 문익환 목사를 만났다. 그는 윤동주 시인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그의 깨끗하고 치열했던 삶, 특히 그 영원한 젊음을 더없이 부러워했다. 어쩌면 그의 그 뒤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은 윤동주 시인이 시로 만들어 놓은 세상을 현 

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 문익환 시 「동주야」 부분 

 

    그러나 윤동주 시의 미덕은 그 청순하고 개결한 젊음과 함께, 해와 달과 별과 하늘을 지향하는 밝음에도 있다. 앞에 인용한 「서시], 자화상, 눈감고 간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의 시에는 유난히 해와 달과 별과 하늘이 많이 나온다. 비록 식민지라는 어둠 속에서 살면서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쉽게 씌어진 시?, 또는 "지조 높은 개는 /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 어둠을 짖는 개는 / 나를 쫓는 것일 게다(또다른 고향?라고 분명히 그 어둠을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밝음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다. 그래서 어둠이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도 그 어둠이 어둡지만은 않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을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별 헤는 밤」 부분 

 


 

 

** 윤동주論 - 화해와 융화의 세계 열어 준 윤동주 

 

 

    별을 노래한 이 시는 분명 어둠이 그 배경이다. 그럼에도 시가 어둡지 않은 것은 밝음을 지향하는 푸른 젊음 탓이다. 윤동주 시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푸른 가을 하늘빛이리라. 

한국 현대시인 중에서 특히 윤동주(1917-1945)의 생애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심성, 시인과 사회적 배경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에 들어 있는 전편의 시들은 한 시인의 순결한 젊은 영혼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눈부신 순수의 빛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맑고 밝아서 투명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색깔, 어디서 우는지 몸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흐르는 산 속의 샘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씻어 내린다. 그와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친구인 문익환 씨의 회고에 따르면 "나는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넋이 맑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그는 아주 고요하게 내면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가 보여 주고 있는 전기적 요소와 시적 사유의 결합은 자의식의 흐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시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근원적 질서 속에서 그의 본질은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주 속에서 느끼는 세월과 그 흐름이 가져다주는 변화, 그 모든 것은 생명과 죽음, 존재와 소멸의 내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의 괴로움은 어둡고 부정적인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보편적 상황과 함께 어두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괴로움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분리되어 있는 자아를 직시하는 자기 성찰의 과정에서 그의 부끄러움의 시어가 탄생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대부분 진실을 추구하는 의식 세계와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대적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응시하며 자신에 대한 물음 던져 윤동주는 유별나다고 할만큼 시대적 현실을 포함한 세계를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감지했다. 그의 예민한 촉수는 늘 세계를 향해 곤두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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