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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生)이미지 시론 연구
1. 서 론
오규원시인은 관념을 배제하고 언어가 존재와 현상의 그 자체인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전의 형상화 된 언어를 '날이미지'라고 하고 '날이미지'로 된 시를 '날이미지시'라고 이름 붙였다. ‘날이미지’시론은 주체중심의 관점보다는 은유적 언어 체계를 주변부로 돌리고 환유적 언어 체계를 중심부에 놓는 시론으로 오규원시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날이미지’시론에 입각한 환유적 언어체계로 한 글쓰기는 시인이 인간중심의 사고로부터 벗어나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으로 나타난 90년대 초 부터이다. 로만 야콥슨은 은유적인 성격인가, 환유적 성격인가에 따라서 문학의 장르가 달라진다고 보았다. 즉 시는 은유적인 성격이 강하고 산문은 환유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시론을 펼친 이승훈시인은 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토대로 은유와 환유를 대립관계로 규정하고 두 관계를 도표로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은유/환유의 관계는 계열체/통합체, 상사성/접촉성, 선택/결합, 대치/삭제․문맥화, 접촉성 혼란/선택성 혼란, 문맥화 결여/선택결여, 극/영화, 몽타주/클로즈업, 상징/응축․치환, 초현실주의/큐비즘, 모방적 마술/접촉적 마술, 시/산문, 서정시/서사시, 낭만주의․상징주의/사실주의(강조 - 인용자)로 구분하고 있다.
은유와 환유의 대립구도 속에서 일반적으로 시의 전반에 차용되는 은유를 버리고 왜 환유인가는 오규원 시인의 시작노트 및 시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오규원 시인은 환유를 축으로 하는 언어체계는 사실적이며 시에서 두드러진다고 보았다. 은유적 언어 체계가 보여주는 관념이라는 존재의 허망함과 개인화의 시각에 의한 세계의 파편화 현상에 대한 나름의 응전으로‘환유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개념적이지 않고 사변적인지 않은 살아있는‘날이미지’의 표상은 명시화하고 현상화하는데 적합한 환유적 수사법을 적극 수용한 시세계를 통하여 실현하였다.
1. 환유적 언어체계의 글쓰기
오규원 시인이 은유적 축을 예시하고 있는 「現像實驗」과 환유의 축을 예시하는 「후박나무 아래1」 이다. 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토대로 구분한 이승훈의 은유와 환유의 대립구조의 도식에 나타나는 것처럼 은유는 유사성에 의한 선택과 대치라는 인간 사고의 한 축이며 환유는 인접성에 의한 결합과 접속이라는 한 축이다.
言語는 추억에/걸려 있는/18세기 型의 모자다/늘 방황하는 기사/아이반호의/꿈많은 말발굽쇠다/닳아빠진 認識의/길가/망명정부의 廳舍처럼/텅 빈/想像,言語는/가끔 울리는/퇴직한 外交官宅의/초인종이다. 「現像實驗」
은유의 대치적 언어체계는 「現像實驗」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言語는 추억에/걸려 있는/18세기型의 모자라고 한다든가 “늘 방황하는 기사/아이반호의/꿈 많은 말발굽쇠라고 한다든가“가끔 울리는/퇴직한 外交官宅의/초인종”이라고 하여 言語라는 원관념을 밝히기 위해 끌어들인 보조관념, 즉 대치관념이다. 이처럼 대치관념은 무수히 생산될 수 있으며, 무한한 해명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은유는 등가성의 원리를 동원하여 시적 표현을 극대화하는데 ‘A는 B다’식의 구조적 은유로 전락될 수 있는데 반하여, 환유적 언어체계라고 할 수 있는 A와B가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잎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새끼를 낳은 어미 개/싸락눈에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턱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 날고 「후박나무 아래 1」
환유적 언어체계는 「후박나무 아래 1」에서처럼 서술적이다. 작품 속에 나타나 있는 ‘후박나무’어미개, 새끼, 싸락눈, 태반, 선혈’은 ‘어미 개’를 중심으로 한 시간과 공간의 인접성 사물들이다. 그 사물들은 어떤 관념(사물)의 해명을 위해 각각 차용된 것이 아니라 한국면의 구조적 산물이다. 이 사물들이 환유적 의미를 갖는 것은 대치관념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연상되는 관념으로서이다. 환유적인 대상에는 공통 특성이 존재하기 보다는 각기 다른 독립적인 양태로 나타난다.
그 방에 들어가려면 벽에 걸려있는 밥그릇부터 보야야한다 無用이 그린 그 밥그릇 하나는 전지 반장의 아래쪽 한구석에서 오른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래도 담긴 밥이 쏟아지지 않는다 안심하고 오른쪽으로 기운 방향의 앞에 CATHAY PACIFIC이 이곳까지 보낸 달력이 있다 오늘을 중심으로 하고 과거의 오늘과 미래의 오늘이 꽉 차 있다 그 오늘이 CATHAY PACIFIC의 말투를 빌어 Arrive in better shape 하고 도착시간을 정확히 요청한다 ‘베터 샵’하게 둥그런 추가 왔다갔다하는 낡은 벽시계를 건너편 벽을 밝힌다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천장은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방의 벽은 회색의 바탕 위에 갈대들이 우우우우우우- 가득 차고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이 위험한 갈대숲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른쪽으로 길을 꺾으면 문이 하나 있다 방이다 그곳에서도 갈대는 끝이 없다 입구에 뻥하고 그림이 하나 달려 있다 최영림 화백이 이 모자의 몸이며 얼굴에다가 모래를 안고 있다 최영림 화백이 이 모자의 몸이며 얼굴에다가 모래를 덕지덕지 발라놓았다 모래가 우수수- 우수수- 떨어진다 방에 들어가려면 이 모래 속으로 모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 모래의 속도 차고 따뜻하다
「밥그릇과 모래」전문
「밥그릇과 모래」는 환유적 언어체계를 표방한 작품이다. 공간적으로 인접한 사물들인 밥그릇, 달력, 벽시계, 천장, 벽, 방, 모자상 과 의미적 인접의 환유들인 밥, 오늘, 갈대, 새, 모래, 속을 서술하는 정황으로 짜여있다. 이러한 언어구조는 ‘방’이라는 같은 공간에 놓여있는 사물들 사이의 인접성에 의해 이어질 뿐이지, 앞뒤의 논리적인 시적 문맥이나 연결고리는 발견할 수 없다. 첫 번째 등장하는 벽에 걸려 있는 ‘밥그릇을 그린 그림’과 그 다음에 등장하는 ‘CATHAY PACIFIC 달력’은 공분모를 유추해 낼 수 있는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환유적 언어체계는 두 대상 사이의 통상적인 관계에 작용하지만, 두 대상은 상대방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언어들로 구성된다. 환유적 언어체계는 비동일성의 언어가 구성되어 있으면서 유기적으로 통용된다. 나무의 예를 들면 나무라는 몸통에 다른 형질의 나뭇가지(언어)를 접목하여 우수한 열매를 얻는 것과 같은 특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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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사이」
위에서 살펴 본 시 「밥그릇과 모래」보다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사이」는 사실적 묘사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환유적 언어체계는 시적 리얼리즘의 방법이라고 말할 때, 시적 자아의 간섭이나 통제가 전혀 없는 현실의 파편들이 그대로 노출되는‘무매개시’가 된다. ‘날이미지시’와 ‘무매개시’가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지만 오규원시인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시적세계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무매개시’는 인간의 중심적인 사고가 개입하지 않고 사물의 언어를 날것으로 전달하는 것이므로 ‘날이미지시’와 상통한다.
사물시의 대가인 프랑시스 퐁주의 시 쓰기의 방법을 들으면 오규원 시인의 ‘날이미지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을 발견하게 된다.“시를 택하기보다는 사물의 편에 서서 시를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보다는 사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그 사물에 어울리는 수사학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글쓰기”라는 점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사물이 스스로 말을 할 때 까지 면밀히 관찰하고 지켜본 결과를 詩化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오규원 시인이 진리는 명사로 명명되고 대치된다.그러나 진리는 동사로 발견되고 서술되기도 한다고 한 것과 일치한다.
3.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시 세계
오규원 시인이 일관되게 정의 한 자신의 시세계는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전의 ‘날이미지’로서의 현상으로 이루어진 시라고 한다. 이는 인간문화의 지배적인 관념이나 허구를 벗기고, 세계의 실체인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말을 날것으로 옮기는 것이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의 현상은 날것의 모습, ‘날이미지’이다. 시인이 그토록 찾았던 시적 궁극이 자리하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의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의지와 관계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속에서 의식적으로 무엇인가 찾지 말라고 일갈한다. 의도적으로 숨겨 놓은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읽기를 권유한다. 존재의 현상을 참으로 보고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 모든 존재는 하나하나가 도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가 진리이다.)의 세계가 자신의 시세계라고 설파했다. 그러면서 존재의 편에 서서 ‘날이미지시’를 읽어야 하며, ‘날이미지’의 시세계는 돈오의 세계가 아니라고 한다. ‘날이미지 시’는 환유의 시가 아니라 환유를 축으로 하는 환유의 언어체계로 쓰고 있다고 강조한다. 환유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의 변두리에는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두두’며 ‘물물’은 관념으로 살거나 종속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도 전체와 부분 또는 상하의 수직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숲에 있는 한그루 나무는 숲의 부분이거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진리이며 실체인 완전한 개체다. 시의 세계도 이와 동일하여 현상적 사실과 상호 연관관계의 언어인 개방적 구조’로써 말을 하기도 한다. ‘날이미지시’가 그러한 개방적 이미지와 구조이기를 바라고 있다.
오규원 시인의 ‘날이미지’시세계는 1991년부터 1995년 2월 사이에 씌어진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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