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이상 李箱 |
|
---|---|
출생 |
1910년 9월 23일 대한제국 한성부 사직동 |
사망 |
1937년 4월 17일 (26세) 일본 도쿄 제국대학교 부속병원 |
별칭 |
본명(本名)은 김해경(金海卿) 초기 필명은 김비구(金比久) |
직업 |
소설가 시인 수필가 삽화가 건축가 |
국적 |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
학력 |
강원도 강릉 신명보통학교 졸업 경성 동광고등보통학교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 |
활동 기간 | 1929년 ~ 1937년 |
배우자 |
1번째 처 금홍(연심) 2번째 처 변동림 |
부모 |
김연필(양부) 김연창(생부) 박세창(생모) |
친척 | 구본웅(처이질뻘) |
이상(李箱, 1910년 9월 23일 ~ 1937년 4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작가,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로 일제 강점기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이다. 원래의 성은 김(金)씨로,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본관은 강릉 김씨(江陵 金氏)이다.
1910년 서울에서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김해경이었다. 1912년 생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에게 입양되어 강원도 강릉에 살던 김연필의 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 그는 서울에 생부모가 따로 있는데도 강원도 강릉에 살던 백부와 백모를 부모라고 불러야 되는 점에 깊이 회의를 품고 사춘기 때는 한때 방황하기도 했다.
이상의 생부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손가락 세 개를 잃은 장애인이었다. 이상은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의 김해경은 자신을 친부로부터 떼어놓은 큰아버지도, 큰아버지에게 아들을 빼앗긴 친부도 사랑할 수 없었다. 자기분열적인 이상은 실제로 거울을 늘 들고 다녔다. 혼자서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키며 놀았다.[1] 그는 후일 자신의 시 오감도와 작품, 동료 문인들에게 자신의 유년시절을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집안은 부유하였으며, 그는 양아버지이기도 한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를 거쳐 경성의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1929년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 〈BOITEUX·BOITEUSE〉, 〈파편의 경치〉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3년 3월 객혈로 총독부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기생 금홍(본명 연심)을 만나게 되어, 후에 서울로 올라와 금홍과 함께 다방 '제비'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5년에는 다방과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연인 금홍과도 결별하였으며 1936년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낸 뒤 그만두고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으며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되었다. [2]
그는 12, 12 라는 말을 종종 했다. 이는 발음으로는 십이, 십이 가 되지만 억양을 강하게 발음하면 성기의 다른 뜻이 된다. 구본웅의 당조카이자 구본준의 아들 구광모는 후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이상이 조선총독부를 향해 12, 12라 욕한 것을 후일 접하게 된다.[3]
“ |
‘朝鮮(조선)’ 1930년 2월호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격렬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 책의 목차에서 총독, 정무총감, 재무국장 등 일본인 최고위층의 정책논설과 함께 이상(李箱)의 장편소설 ‘十二月 十二日(십이월 십이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월간지에는 이외에도 조선인의 글로 이능화(李能和)의 ‘朝鮮喪祭禮俗史(조선상제례속사)’와 안확(安廓)의 ‘各國(각국)의 綴字論(철자론)과 한글문제’ 등도 수록돼 있었다. ‘十二月 十二日’은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되었다.
소설 제목 ‘십이월 십이일’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파동치는 전율을 느꼈다. 오래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이상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에 대해 해괴한 욕설을 퍼부은 작품을 썼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3] |
” |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 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시켰다. 이상은 후일 자신의 친구들 몇 명에게만 십이 십이의 본의미를 살짝 알려주었다.
소설 속에서 12월 12일은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날인 동시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주인공이 죽을 날이기도 한 동시에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라고 깨닫는 날이기도 했다.[3] 구광모는 '12, 12로 상징되는 욕설과 함께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고 절규하는 그의 소설 속의 외침이 천둥소리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3]'고 평하였다. 한글과 그 발음을 전혀 모르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은 숫자를 이용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료들을 골탕먹였다. 시 ‘烏瞰圖(오감도)’에 나오는 “13人의 兒孩(아해)가…”가 그렇고, 이상이 ‘제비’다방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간판을 붙였다가 그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된 '69 다방' 등도 그렇다. 그 외에도 남녀의 성교를 상징하는 33과 23(二十三, 다리 둘과 다리 셋의 합침) 및 且8(한글로 차팔 또는 조팔이라 읽음. 발기한 남성 성기 또는 18과 대칭을 나타냄) 등의 표현[3]으로 조선총독부를 골탕먹였다.
이상의 필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근무시,현장의 일본인들이 그를 "이씨"란 의미로 "李さん(이상)"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시인 김기림의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림에 재주가 뛰어난 이상이 디자인한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는 자필 서명이 있어, 건축기사 근무 이전에 이미 이상이란 필명을 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필명은 화가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상(李箱)’이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4]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소설가 이석훈(李石薰), 시인 김기림(金起林),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아동문학가 현덕(玄德), 소설가 안회남(安懷南) 등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서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이 이상보다 한 달 먼저 병으로 사망하였다.
만년의 이상은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었다.[5]"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5]"고 하기도 했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옮겨가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 26년 7개월에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6]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친구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그를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7] 역시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를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4]
구광모는 그의 12, 12를 '조선총독부를 향한 기발한 욕설[3]'이라 평하였다. 이상의 생년월일이 1910년 9월23일이므로, ‘십이월 십이일’을 집필한 1930년 2월이면 그의 나이 만 19세 4개월 남짓한 무렵으로 그가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임명된 지 11개월 정도가 지난 때였다. 그런데 구광모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9개월에 걸쳐, 십이(12), 십이(12)라는 육감(肉感) 진한 우리 욕설을 숫자로 위장해 소설 제목으로 인쇄해놓은 그의 담력과 기발함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3]' 한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