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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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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동시 및 그 해설
2015년 05월 20일 23시 18분  조회:6243  추천:0  작성자: 죽림

   
신현득 

문구멍 

빠꼼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키가 

큰다. 



<해설> 

올해로 시력 40년을 맞은 아동문학가 신현득 (1933년생) 시인의 동시입니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가작 입상작이지요. 투고 당시 시인은 국민학교 교사였는데, 투고자 이름을 '상주국민학교 신현득'이라고 써서 심사위원 윤석중 선생이 어쩌면 국민학교 학생이 쓴 시일 수고 있겠다 싶어 차마 당선작으로 뽑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시인은 이듬해 같은 신춘문예에 '산'이라는 동시로 당선하게 됩니다. '아가 키가'자란다는 사실을, 문구멍으로 남을 엿보곤 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그려 보임으로써 생생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군요. 2000년 5월 1일 소설가 박덕규 씀 

윤부현 

달걀 

껄쭉껄쭉한 

새 도화지 



예쁘게 

말아 논 

그 안에는 



푸른 바다가 

하나 가득 

출렁이고 있었다. 



<해설> 

질솔한 표현법과 선명한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여 온 윤부현 (1927-1986)의 동시입니다. 1960년대 한국 동시가 한창 시적 언어 조형을 모색할 즈음에 얻은 산물이지요. 달걀의 껍데기에서 도화지의 '껄쭉껄쭉한' 표면을 유추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달걀 속과 푸른 바다로 이어지는 연상 앞에서는 모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자, 한 번 달걀을 흔들어 보세요, 바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달걀은 어쩌면 우리 식탁 위에서 푸른 바다처럼 살아 움직이는 자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은 이렇듯 형상과 관념의 조화를 통해 무의미하게 보이던 하나의 사물에서 전혀 새로운 생명성을 찾아낸답니다. 

2000년 5월 2일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씀 

이준관 

떨어진 단추 하나 

해질 무렵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가 

떨어진 단추 하나를 보았지. 

그래, 그래, 우리는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단추 하나 떨어뜨리지. 

그래, 그래, 우리는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서쪽 하늘에 깜빡, 

해를 하나 떨어뜨리지. 

<해설> 

일반 시단에서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이준관(1948- )시인의 동시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 없이 노는 일에 빠져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네요. 그렇게 놀다 보면 옷에서 단추 하나가 떨어진 걸 알기 어렵고, 언제 그렇게 해질 시간이 되었는지 뒤늦게 알고 놀라곤 하지요. '놀다가 떨어져 나간 단추 하나'를 매개로 해서 "서쪽 하늘에 깜빡, 해를 떨어뜨렸다는 역설적 진술을 이끌어내면서 동심의 한 부분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2000. 5. 3 소설가 박덕규 씀 

박두순 

새 

새 한 마리가 

마당에 내려와 

노래를 한다. 

지구 한 귀퉁이가 귀기울인다. 



새떼가 

하늘을 날며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 한 귀퉁이가 반짝인다. 

<해설> 

키와 몸집이 작은 시인 박두순(1950- ) 만큼 작고 하찮은 것들을 눈여겨 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신의 모습과 닮은 이름 모를 풀꽃이나 새들을 더없이 좋아하는 시인이지요. 그래서 그는 작은 새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커다란 지구의 한 귀퉁이를 느낄 수 있지요. 하늘을 가르는 새떼의 하찮은 날갯짓 사이로 얼핏 비쳐드는 하늘 한 귀퉁이의 반짝거림도 볼 수 있답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보다 더 보잘 것 없는 많은 것들이 실은 우리 이상으로 훌륭하게 우주의 섭리를 수행하며 조화롭게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00.5.4 (목)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윤동주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이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해설> 

한국의 시인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널리 사랑 받는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스무 살 때 쓴 시입니다. 윤동주를 일컬어 흔히 '별이 시인'이라고 하지요. 맑고 수수한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그 시심의 바탕에 바로 동시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주머니에 무엇 하나 넣어 둘 것 없는 '가난'한 일상을 오히려 운치 있게 '풍족'하다고 생각해 보이는 역설이 빛납니다. '주먹 두 개 갑북갑북'할 때의 앙증스러운 질량감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듯하지요. 윤동주는 서울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1938)부터 더는 동시를 쓰지 않습니다. 별을 꿈꾸고 노래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얘기지요. 자신에게 동시를 빼앗은 현실을 세상 앞에서 그는 점점 고뇌에 가득한 얼굴이 되어 갔지요. 5/5 (금) 소설가 박덕규 

정두리 

어머니의 눈물 

회초리를 들었지만 차마 

못 때리신다. 

아픈 매보다 더 무서운 

무서운 목소리보다 더 무서운 

어머니의 눈물이 손등에 

떨어진다. 

어머니의 굵은 눈물에 내가 

젖는다. 

<해설>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한 아이가 꾸중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매를 맞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차라리 그 매를 맞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때리는 어머니보다 때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더 무섭다는 사실을. "차마 못 '때리고 눈에 내비친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깨달아 버렸거든요. 쉽게 상처 받기 쉬운 아이들의 감정을 감각화하는데 능란한 솜씨를 빛내는 정두리(1947년생) 시인이, 못난 자식 앞에서 겉으로 엄격하되 속으로 울곤 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 뭉클하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5/8 (월) 소설가 박덕규 

손동연 

소와 염소 

소가 

아기염소에게 그랬대요. 

"쬐끄만 게 

건방지게 수염은? 

또 그 뿔은 뭐람?" 

그러자 

아기염소가 뭐랬개요? 

"쳇, 

아저씬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 덩치에 아직도 '엄마 엄마'게……. 

<해설> 

차츰 사라져 가는 토속적 정취를 구수하게 살려내는 데 익숙한 시인 손동연(1955-)의 동시입니다. 기린, 돌고래, 코끼리 등 우리가 좋아하는 동물 이야기 연작 동시 중 한 편입니다. 풀밭에서 나란히 풀을 뜯고 있는 소와 그 곁을 우연히 지나게 된 아기염소가 서로 얼굴을 맞대게 되었군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한가로운 장면에서부터 시인은 재치 있는 드라마 한 편을 만들어 냈습니다. 수염을 어른처럼 기른 아기염소, 덩치 큰 어른이면서도 아직도 '음매'하고 우는 소의 말다툼이 너무 정겹지 않아요? 조용히 흐르는 일상의 한 순간에도 무한한 관계 맺음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도 같군요. 5/10 (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제해만 

봄눈 

파릇파릇 새싹 돋는 날 

봄눈 내렸다. 

몰래몰래 내리려다 

밭고랑에 빠졌다. 

<해설> 

주로 계절을 제재로 삼아 자연을 노래해 온 제해만 (1944-1997) 시인의 동시입니다. 봄이 오면 겨우내 얼어붙고 메말랐던 대지에 생명의 기운이 움틉니다.겨울의 모든 추위를 이겨내고 드디어 새싹을 틔우는 축복의 봄날, 시새움이라도 하듯 하늘은 눈을 뿌립니다. 꽃샘 눈바람은 분명 새싹에겐 호된 시련이 될 테지요. 그것이 가엽고 애처로워 봄눈이 "몰래몰래 내리려다 밭고랑에" 빠진 것으로 노래했습니다. 이른 봄이라는 계절의 감각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어린 새 생면의 약동을 기원해 주는 절묘한 표현이지요. 5/11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문삼석 

우산 속 

우산 속은 

엄마 품속 같아요. 

빗방울들이 

들어오고 싶어 

두두두두 

야단이지요. 

<해설> 

이슬, 아기, 바람 등을 소재로 한 연작과 짧은 동시를 일관되게 추구해 온 문삼석 시인(59)의 동시입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리더니 비가 내리네요. 비오는 날이면 우산의 고마움을 깨닫게 되지요. 비를 맞지 않게 해주는 우산 속은 "엄마 품속"같이 안전한 곳이니까요.그러니 누구든 그 속으로 들어오고 실어할 테지요. 저것 봐요. 빗물도 우산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안달하다가, 그새 "두두두두"하고 야단 난 듯 소리치잖아요. 이 동시는 절제된 언어로 이런 천진한 상상력을 낳게 하는 시적 호과를 주었답니다. 5/12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윤석중 

먼 길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해설> 

멀리 길을 떠나야 하는 젊은 아빠가 마지막으로 아기가 잠드는 걸 한 번 보고 가려 하는군요.그런데 아기는 아빠가 멀리 가신다는 걸 눈치라도 챈 것일까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아빠를 쳐다보는 아기의 얼굴이 생생하지요?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는 아빠의 심정(실제)에서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는 아기의 심정(상상)으로의 전이가 빛을 발했습니다. 동시계의 거목 윤석중(1911년생) 시인이, 이 시가 뜻밖에도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징용을 가게 된 사람 집안 얘기라고 밝히시는군요. 아픈 사연이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광경이 되지 않았을까요? 5/13 (토) 소설가 박덕규 

강소천 

사슴 뿔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싹이 트니? 



사슴아, 사슴아! 

네 뿔은 언제 꽃이 피니? 

<해설> 

동물의 머리에 난 뿔은 위엄을 상징하는 표시이기도, 다급할 때는 싸움을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한가로이 풀을 뜯다 가끔 고개 들어 먼 허공을 바라보는 사슴의 머리에 돋은 뿔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걸요. 그 뿔은 마치 겨울 나무의 앙상한 가지 같아 보이지요. 거기서 곧 싹이 나올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그 가지 끝에 꽃이 피어날지도 모르지요. 삶에서 잃어 버린 것을 꿈의 세계에서 찾아내는 환상적인 이야기들로 명성을 날린 동화작가 강소천 (1915-1963)은 한편으로 주변에서 만나는 작은 사물로 이렇게 재미있는 상상의 세계를 빚어내는 시인이기도 했지요. 5/15 소설가 박덕규 

신형건 

봄날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 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움이 트려나 봐요. 

<해설> 

어린이와 같은 천진한 성정을 지닌 신형건(1965년생) 시인의 동시입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무릎을 다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피가 나면 으레 겁이 나서 울음을 터뜨린 기억도 또렷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처의 '피딱지'를 "잘 여문 꽃씨"로 연상해내고, 상처가 아물 때 느끼는 '근질근질'한 증세를 봄날 "새움이 트는" 징조로 유추해낼 수 있을까요?이 기발한 착상과 예리한 관찰력은 단연 이 동시를 읽는 즐거움이 되지요. 시인은 일상의 경험에서 이렇듯 신선한 이미지를 생성해냈답니다. 5/16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김종상 

산 위에서 보면 

산 위에서 보면 

학교가 나뭇가지에 달렸어요.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속속 

얼굴을 내밀지요. 



장난감 같은 교문으로 

재조갈재조갈 

떠밀며 날아 나오지요. 

<해설> 

학교 생활에서 어떤 시간이 가장 즐거울까요? 점심 시간, 아니 그보다도 종레 시간이 아닐런지요. 학교가 파하자마자 창문으로 얼굴을 쏙 내미는 아이,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만족감과 해방감으로 상기되어 있지요.그런 전경을 산 위에서 보면, 학교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참새네 집 같을 거예요. "재조잘재조잘"거리며 마냥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몰려 나오는 아이들은 방금 새장에서 놓여난 영낙 없는 참새들이지요. 교직에 몸담아온 김종상(1935-)시인은 생활 경험에서 생동감 넘치는 아이들의 참 모습을 발견해냈답니다. 

5/17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김구연 

국어 공부 

염소가 

누나의 국어책을 

몽땅 먹어 버렸다. 

그리고는 매일 

매애애 매애애…… 

국어책 외운다. 

<해설> 

국어책을 외우는 염소를 보았나요? 염소는 왜소한 체구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되새김질을 하는 초식동물이지요. 종이도 잘 먹는답니다. 아, 염소가 그새 '누나의 국어책을 몽땅'먹어 버리고 말았군요.그리고 "매애애 매애애" 울음 소리를 내면서 계속 되새김질을 하고 있네요.아마 국어 공부를 하나 봐요. '국어책에 나오는 동시들을 이렇게 외우는 거야' 하듯이 입을 놀리네요. 동물의 행동 특성을 잘 관찰하면서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 놓은 김구연(1942-)시인의 시적 재치가 돋보이지요. 5/18 (목)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박찬중 

겨울 밤 

누가 왔나? 

다시금 숨 죽여 귀기울이면 

간간이 바스락거리는 

뒷마당 대숲 바람소리 

먼 곳 개 짖는 소리. 

하늘 가득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별 

별 

별 

<해설> 

겨울 밤이 너무 깊고 고요해 오히려 눈이 말똥해지고 귀가 쫑긋해졌군요. 그 밤에 특별히 누가 찾아올 리있을까요? 그런데도 조금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떤 설렘 속에서 결국은 들창을 열곤 하지요. 대숲 바람소리, 먼곳 개 짖는 소리……. 그 익숙한 자연들이 어느 순간에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별"들처럼 신비한 동무로 곁에 다가오는 경험이라니! 별,별,별….하는 동안 진짜 우리 머리 위에서 굵은 별들이 떨어져 내리는 듯하는군요. 
토속적인 자연의 세계를 감성적으로 드러내온 박찬중(1952-) 시인의 동시입니다. 
5/19 (금) 소설가 박덕규 

정지용 

별똥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 보러,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해설> 

자연의 움직임에 대해 궁금증을 품으며 지내던 어린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테지요. 어젯밤 우리의 어린이들도, 맑은 밤하늘에서 빗금을 그으며 떨어진 별똥을 보고는 밤새 잠을 뒤척였을지도 모르지요. '저 떨어진 별똥을 주우러 가자.' 이런 생각들이 우리의 어린 날을 참 가슴 벅차게 했지요. 그리고 그런 유의 상상은 대개 현실에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들이지요. 모두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지만, 바로 그런 상상이 또한 그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던지요. 20세기 전반에 유입된 서양의 '현대의 정신'을 동양의 문학 전통에서 조율하면서 한국 정신주의 시의 절정을 이룬 정지용 (1903-?) 시인의 동시랍니다. 
5/20(토) 소설가 박덕규 

서재환 

초승달 

얄미운 새앙쥐가 

하늘에도 사나 봐요. 



낮에는 숨었다가 

밤만 되면 야금야금 



둥근 달 다 갉아먹고 

손톱만큼 남겼어요. 

<해설> 

시조에 동심을 담고 전통 문학 양식도 계승하고자 한 '쪽배'라는 동시조 동인이 있답니다.동시조 창작에 열정을 기울인 서재환(1961-) 시인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예로부터 달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지요. 농사를 지어 온 우리 민족은 달에 대한 믿음이 각별했답니다. 아직도 달맞이 풍속이 내려오고 있지요. 앗! 오늘은 초승달이 떴군요. 우리가 잠든 사이, 하늘에 사는 얄미운 새앙쥐가 둥근 달을 밤마다 야금야금 갉아 먹어서 정말 저렇게 작아졌을까요? 시조라는 일정한 형식에 시적 상상력과 동심을 이렇듯 자유롭게 담아내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5/22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박목월 

여우비 

땡볕 나는데 

오는 비 

여우비 



시집가는 꽃가마에 

한 바울 오고 



뒤에 가는 당나귀에 

두 방울 오고 



오는 비 

여우비 

쨍쨍 개였다. 

<해설> 

뙤약볕이 내리쬐는데 비가 오다니…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순간 금새 그치고 마는 그 비를 '여우비'라 합니다. 비는 날 궂을 때 오는 것이라는 상식에서 생각하면 '여우비'란 이상한 자연 변화이기도 하고, 그냥 자연의 일이기도 하지요. 이런 '땡볕 속의 여우비'란 모순이, '꽃가마 타고 시집가는 이'에게 품어진 어떤 사연에 대해 유달리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오는 비/여우비'하면서 얻어진 운율감에 배여 있는 알 수 없는 슬픈 정조는, 바로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 박목월(1917-1978)시인이 빚어냈답니다. 
5/23(화) 소설가 발덕규 

권정생 

달팽이 

달팽이 마을에 

전쟁이 났다. 



아기 잃은 어머니가 

보퉁이 등에 지고 허둥지둥 간다. 

아기 찾아간다. 



목이 메어 소리도 안 나오고 

기운이 다해 뛰지도 못하고 

아기 찾아간다. 



달팽이가 지나간 뒤에 

눈물 자국이 

길게 길게 남았다. 

<해설> 

달팽이 나라에도 전쟁이 있겠지요. '허둥지둥' 하지만 실은 얼마나 '느릿느릿'할까요.그러다 아기를 잃고 우는 엄마도 있을 테지요. 아기를 찾다가 기진맥진, '기운이 다해 뛰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네요. 달팽이 나라에도 6·25가 있고, 아기 잃은 이산 가족의 슬픔이 있었을 테지요.이렇게 되니, 이 이야기는 고스란히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 유명한 장편 동화 '몽실언니'에다 분단의 비극을 담아 보인 권정생(1937-) 작가가 여기 조그만 달팽이에다 한국의 역사를 흘려 놓은 거지요. 하지만 달팽이가 남긴 긴 "눈물자국"은 너무 생생해서 도리어 아름다워 보이는군요. 5/24 (수) 소설가 박덕규 

공재동 

식은 밥 

짝찌와 싸우고 

울며불며 돌아와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식은 밥을 먹는다. 



그 눈물 

아귀아귀 

볼우물에 고인다. 

<해설> 

언젠가 언짢은 일로 다시는 안 볼 듯이 짝지와 싸운 적이 있지요.힘에 부처 이길 수 없을 땐 분해서 눈물이 나오지요. 울면서 돌아온 집에 자신을 편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더욱 서럽지요. 분이 삭진 않았지만, 힘쓴 탓에 배가 고프답니다. 훌쩍거리며 혼자 먹는 식은 밥이 웬일인지 입아귀에서 넘어가질 않습니다.자꾸만 목에 걸립니다. 짝지와 싸운 일도 따라 목에 걸립니다. 은근히 마음이 아려옵니다. 씹던 밥이 불현 듯 또다른 슬픔이 되어 볼우물에 고입니다. 공재동(1949-) 시인은 이렇듯 아픔을 깨달으며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동시에 담았습니다. 5/25 (목)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권태응 

감자 꽃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해설> 

신라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해서 이름 붙은 탄금대는 충주에 있지요. 이 탄금대에 노래 비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이 동요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곳 충주에서 태어나 농촌 정서를 단순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시어와 운율에 담아 노래해 많은 어린이들에게 풍성한 상상력을 제공했던 권태응(1918-1951)시인을 기리려는 것이지요. 세상의 일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것 투성이지만, 세상의 때를 벗고 처음의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보면 의외로 그것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요. 금새 확인될 수 있는 사실도 아예 믿지 않게 된 풍조를, 단순한 어휘와 리듬의 규칙적인 대조와 반복을 통해 씻어내면서 환한 웃음을 웃게 하는 한 편의 동시가 아닐 수 없답니다. 5/26 (금) 소설가 박덕규 

유경환 

꽃사슴 

아가의 새 이불은 

꽃사슴 이불. 



포근한 햇솜의 

꽃사슴 이불. 



소록소록 잠든 아가 

꿈속에서 



꽃사슴꽃사슴 

타고 놉니다. 

<해설> 

꽃사슴은 아가 닮아 귀엽고 순한 짐승이지요. 아기는 예쁜 꽃사슴이 수놓인 이불을 덮고 잠이 듭니다. 햇솜을 다져 넣어 포근한 새 이불은 아가를 깊은 잠 속으로 소록소록 빠뜨립니다. 때때로 아가의 고운 얼굴에 해사한 웃음이 감돕니다.오물오물 입을 다시다가 발름발름 숨소리를 냅니다. 고사리 손을 도르르 말며 생긋 웃습니다. 아, 그렇군요. 꽃사슴을 탄 아가가 뿔을 꼭 잡은 것일 테니까요. 아가는 지금 한창 꿈나라에서 이불에 수놓인 꽃사슴과 즐겁게 노는 중이랍니다. 유경환(1936-) 시인은 현실과 꿈을 조화시켜 아가의 해맑고 고운 세계를 그렸답니다. 5/27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하청호 

잡초 뽑기 

풀을 뽑는다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있다. 

흙 또한 

뿌리를 움켜쥐고 있다. 

뽑히지 않으려고 푸들거리는 풀 

호밋날에 칼빛으로 빛난다. 

풀은 작은 씨앗 몇 개를 

몰래 

구덩이에 던져 놓는다. 

<해설> 

풀을 뽑아 본 적이 있나요? 쓸모 없는 잡초지만 쉽게 뽑히질 않지요. 저항할 수 없는 큰 힘에도, 풀은 푸들거리며 흙을 움켜잡고 흙은 숙명처럼 뿌리를 움켜쥐며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한 힘을 다할 테니까요. 뽑히는 자의 처지에서 보면 목숨을 건 사투가 아니겠어요? 세상의 모든 생물은 끝까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답니다. 결국 풀의 처절한 저항은 무의미하지 않았답니다. 자신의 생명을 잇는 '씨앗'을 자신이 뽑혀져 나온 그 구덩이에 몰래 던져 놓았기 때문이지요. 생명 있는 것의 모짊과 존귀함을, 하청호(1943-) 시인은 '잡초 뽑기'를 통해 일러 주었답니다. 5/29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문구 

산너머 저쪽 

산너머 저쪽엔 

별또이 많겠지. 

바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해설> 

토속적인 사투리 어투로 우리 농촌의 삶과 정서를 감칠맛 나게 드러내 온 '관촌수필'의 이문구 (1941-) 작가가 쓴 동시입니다. 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한 장의 상상화가 그려집니다. 밤마다 별똥이 서너 개씩 떨어진 '산너머 저쪽에는' 정말 별똥이 수북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그 모습 떠올리며 설레는 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산너머 저쪽'에 바다가 있다니,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별똥 떨어져 쌓이는 곳이기를 지나 별똥의 무리 은하수가 흘러가 '바다'가 된 그곳, 정말 그곳은 한번의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 잠 못 이룰 수 없게 하는군요. 5/30(화) 소설가 박덕규 

이정석 

어린이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바구니에 담아 놓은 꽃게들. 

<해설> 

바구니에 꽃게들을 담아 놓으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한꺼번에 밖으로 나가려고 바둥거리는 본능, 그 건강한 생명력을 보이겠지요. 거기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순진무구한 꿈이 느껴지지 않나요? 움직이는 꽃게를 손끝으로 톡 건드려 보세요.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눈치 보며 또다시 개구쟁이처럼 살곰살곰 움직이려 들지요. 그런 꽃게들의 천진한 행동을 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지요. 바로, 귀엽고 천진무구한 어린이와 꼭 닮았잖아요. 꽃게의 행동을 어린이에 비겨 표현한 이정석 (1955-)시인의 예리함이 돋보입니다. 
5/31 (수)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한석윤 

조선의 참새 

챠챠 

중국 참새는 

중국말로 울고 



쥬쥬 

일본 참새는 

일본 말로 울고 



짹짹 

조선의 참새는 

조선의 새라서 

남에거나 북에거나 

우리말로 운다. 



짹짹 

하얀 얼 보듬는 

조선의 참새 

<해설> 

분단된 조국을 가슴 아파 하는 데는 국적이 다른 우리 동포라고 예외일 이 없습니다. 중국 옌볜에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 조선족 한석윤 (1943-) 시인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 자신의 다국적(多國的)인 역사 체험에서 새 울음 소리에 대한 언어 표현을 시적 소재로 이끌어냈군요. '남과 북이 한마음이다.'하는 흔한 생각을 "챠챠" "쥬쥬" "짹짹" 등의 의성어의 다름과 같음에 견주어 생동감이 생겼습니다. 참새가 우는 평범한 일도 이제 "하얀 얼 보듬는" 소중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지요. 6/1 (목) 소설가 박덕규 

박신식 

휴전선 

앞뒤로 

서로 다른 

열쇠 구멍이 있는 

기이다란 자물통 



왜 

열리지 않지? 



혹시 

서로 열쇠를 바꾸어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설> 

우리는 반 세기 동안 남북으로 오가는 길에 '휴전선'이란 "기이다란 자물통"을 채워 놓고 살아왔습니다. 이젠 정말 그 길을 활짝 터 주고 싶어요.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우리는 왜 그토록 녹슨 자물통 하나를 열지 못하는 걸까요? 남과 북이 열쇠를 바꿔 가진 탓일까요?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고통과 국가의 안녕을 진심으로 근심하는 마음이 바로 훌륭한 열쇠일 테지요. 박신식 (1969-)시인은 남과 북이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 염려하는 마음으로 '휴전선'이란 자물통을 함께 열어보자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6/2 (금)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상현 

철마는 달리고 싶다 

기차는 

오지 않습니다. 

가지고 않습니다. 



서울에서 함경도 원산으로 가던 

기차 소리는 

바람에 날아가 풀씨가 되었습니다. 



골짜기에 메아리 치다 

보라빛 산나물 꽃이 되었습니다. 



기찻길은 잃어 버린 

병사의 숟가락처럼 

풀밭에 녹슬고. 

<해설> 

서울과 함경도 원산을 오가는 기차가 있었지요. 오십 년 동안 그 기차는 버려지고, 녹슨 기차길 위로는 잡초가 우거졌습니다. 마지막 기적 소리는 그때 돌아올 곳을 읽고 떠돌다 긴 세월 속에서 바람이 되고 꽃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철마는 퇴색되어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이상현(1940-) 시인은 다만 그것을 지금 눈앞에 있는 듯 그려 놓았을 뿐이지만, 그 그림 속 아득한 곳에서인 듯 들려오는 철마의 외침은 우리 가슴을 오십 년 한(恨)의 빛깔로 물들게 하는군요. 6/3(통) 소설가 박덕규 

김원석 

너와 내가 없는 강 

꽃봉오릴 틔울 

한 방울 이슬이 



묵은 꺼풀 씻어 내릴 

한 자락 빗물이 



나, 이슬 아니고 

너, 빗물이 아니어 

서로 섞여 흐르고 



때론 

이슬이 빗물같이 

빗물이 이슬같이 

서로 

함께 흐르는 강. 

<해설> 

참 좋은 일 했구나 하는 뿌듯함이 느껴질 때가 있을 테지요. '꽃봉오리를' 틔우게 하는 일, 남의 몸에서 "묵은 꺼풀을 씻어" 내리는 일…, 이런 일만 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알아둘 일은, 나 아닌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는 좋은 일에 취해 남이 한 소중한 일을 무시한 적 없었나요? 더욱이 동무 사이, 동포 사이라면, 내 자라부터 하기보다 남의 사연에서 먼저 참 가치를 읽어 주어야 '너와 내가 없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게 아닐까요? 6/5(월) 소설가 박덕규 

권영상 

비무장 지대 

슬픈 일일수록 

새들은 빨리 용서할 줄 안다. 



우리들보다 

더 힘들게 살면서도 

언제나 우리들보다 

더 먼저 용서하는 새들 



지난 일을 잊기 위해 

새들은 소총 소리 들리는 

숲을 찾아와 



거기에다 

편안한 집을 짓는다. 



지뢰가 흩어진 숲속을 

우리들보다 더 먼저 찾아와 

탄탄하게 집을 짓고 

따스한 알을 낳는다. 

<해설> 

한반도의 허리엔 비무장 지대라는 금단의 구역이 있답니다.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지요.아직도 "지뢰가 흩어진"그 숲 속 어디에선가 소총 소리 들려 오지만, 새들이 어느새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고 있었습니다. 새들이 "우리들보다 더 먼저" 슬픈 일을 용서했기 때문일까요? 권영상 (1953-) 시인은 그 새들의 '탄탄한 집과 따스한 알'과 같은, 서로의 용서로 엊을 수 있는 남북의 아름다운 화합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헨리 뉴볼트 

끝 

밤이 오고 

올빼미가 나와 있어요 

딱정벌레들은 주위에서 

윙윙거리지요. 



아이들은 안전하게 

잠을 자고 있지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지요. 

(장경렬 옮김) 

<해설> 

하루를 열심히 살고 이제 아이들은 곤히 잠들었습니다. 이 이상으로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꿈꾸는 평화란 실은 이렇게, 일한 후 주변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하게 잠을 자는 것으로 절로 이루어지는 일이지요. 이 평범한 진실을 잊고 끝간 데 없는 욕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올빼미 울고 딱정벌레 나는' 밤을 못 견뎌하지요. 그러나 욕심 버리고 자연이 내는 소리 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끝'에서 새로운 내일을 예비할 힘을 얻는답니다. 6/7 (수) 소설가 박덕규 

박 일 

할아버지 안경 

고향 가는 길 

보이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안경 안에 

또 

안경을 끼신다. 



통일되는 길 

보이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안경 안에 

또 

안경을 끼신다. 

<해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행복일 테지요. 떠나온 고향에 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그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고향 가는 길'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지금쯤 고향 산천은 얼마나 변했을까…, 부모님은 어떻게 사셨을까…, 이런 생각으로 오늘도 '안경 안에 또 안경을 낀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박 일 시인은 
거듭 안경을 끼시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반복해서 표현하면서 통일의 절실함을 부각시켜 놓았습니다. 6/8 (목) 아동문학 평롲가 김용희 

김 현 

초여름 

가슴이 콩콩 뛰고 있대요. 



미술 시간 그림 다 그려 놓고 

칭찬 기다리는 아이처럼, 



푸르게 파아랗게 칠해 놓고 

환하게 눈웃음 지으며 



칭찬깨나 기다리고 있대요. 

눈치깨나 살피고 있대요. 

<해설> 

녹음이 짙어지고 있지만, 불쑥불쑥 닥쳐오는 무더위에 그만 일손을 놓고 싶을 때가 있군요. 올 여름은 과연 무엇을 가져다 줄까요? 난리와 같은 장마? 숨이 가쁜 가뭄? 신나는 휴가? 그러나 그 여름은 무슨 운명이거나 한 듯 제 마음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즐거운 놀이와 흔쾌한 휴식을 제공할 여름은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요. 불행했던 지난 날들의 여름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앞의 시간들을 우리 스스로 '환한 웃음'으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일 때 이 초여름은 김 현(1970-) 시인의 시에서처름 '가슴 콩콩 뛰는' 설렘으로 충만해 있게 되지요. 
6/9 (금) 소설가 박덕규 



유희윤 

비오는 날 

낡은 구두는 

젖은 발이 안쓰럽습니다. 



젖은 발은 

새는 구두가 안쓰럽습니다. 

<해설> 

비가 오는 궂은 날에 '새는 구두'와 '젖은 발'의 만남은 운명이지요. 오래도록 신고 다닌 구두는 이젠 낡아서 제 구실을 못 하고 있습니다. 남이 지닌 약점은 더 잘 보이는 것일까요? 비오는 날, 구두는 발 젖은 것을 보고 있고, 발은 구두 새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까요.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불편을 주는 상대의 약점을 꼬집어 말하지 않고 오히려 '안쓰럽다'며 위로한답니다. 유희윤(1944-) 시인은 딱한 사정일수록 서로 가엽게 여기며 위로할 때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비오는 날 '발과 구두'의 관계로 일러 주고 있습니다. 
6/10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박경용 

귤 한 개 

귤 한 개가 

방을 가득 채운다. 



짜릿하고 향깃한 

냄새로 물들이고, 



양지짝의 화안한 

빛으로 물들이고, 



사르르 군침 도는 

맛으로 물들이고, 



귤 한 개가 

방보다 크다. 

<해설>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자기 생각을 자랑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우리 집, 내 방도 예외라 할 수 있을까요? 방 주인을 닮아 현란한 꽃들과 거창한 표어들로 치장된 그 방은 실은 생기를 잃고 구석구석 곰팡이가 피어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 방에 화기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웬일일까요? 자신을 내면에서부터 차곡차곡 가꾸어 온 사람이야말로 남들까지도 '향깃한 냄새'로 감싸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박경용(1940-) 시인의 '귤 한 개' 이야기에서 배운답니다. 6/12 (월) 소설가 박덕규 

박경종 

노마 

순이와 싸우고 

노마는 

장독 뒤에 혼자 앉아 있다. 



울 밑에서 꼬꼬가 뛰어와서 

"꼬꼬꼬꼬……"노마를 부른다. 



노마는 노마는 

대답을 않고 손가락으로 

글만 쓴다. 



<순이 순이 순이>라고. 

<해설> 

소꼽동무와 다툰 노마는, 우울한 마음으로 장독 뒤에 앉았습니다. '꼬꼬' 와 '바둑이'가 재롱을 피워도 다 싫습니다. 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고집을 피웠을까? 무심히 땅바닥에 낙서를 합니다. '순이 순이 순이'라고 쓰면서 마음속으로는 '미안미안 미안' 하면 되뇌어 봅니다. 이제 순이가 더 보고 싶어집니다. 박경종(1916-) 시인이, 이성의 친구와 싸우고 나서 화해하고 싶은데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의 이중적인 심리를 소박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6/13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서정슬 

소녀의 기도 

제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요? 

귀뚜라미 다리 하나 뗀 일이 있어요. 

그놈은 방안을 운동장인 줄 알았나 봐요. 

펄떡펄떡 뛰다가 앉아 있길래 

가만히 뒷다리를 잡았더니 떨어졌어요. 



그보다 훨씬 더 아주 어릴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왜 이런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해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는 법이지요. 여기 그 숙명을 기도로 견뎌내고 있는 한 소녀가 있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라고는 개미 죽인 일과 귀뚜라미 다리 뗀 일밖엔 없습니다.그것도 죄일 수 있으니까, 소녀의 기도는 더욱 처절하고 그래서 또 아름답습니다. 티끌만한 잘못까지도 일일이 뉘우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 선천성 뇌성마비를 알아 온 서정슬(1946-)시인의 세 연짜리 동시 중 아래 두 연입니다. 6/14 (수) 소설가 박덕규 

윤복진 

씨 하나 묻고 

봉사나무 

씨 하나 

꽃밭에 묻고, 



하루 해도 

다 못가 

파내 보지요. 



아침결에 

묻은 걸 

파내 보지요. 

<해설> 

까만 씨앗 하나 묻어 놓는데, 거기서 파릇한 싹이 돋고 꽃이 핀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요? 그러기에, 꽃밭에 봉사(복숭아)나무 씨앗을 심은 아이는 혹시 싹을 틔우지 못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게 됩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한 일이 어떤 결실을 맺을까 조바심 내다가 때로는 일을 그르치기도 할 것이지만,그런 호기심이나 궁금증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일제 강점기 때 동요 시인으로 활약하다가 분단이후에는 북한에서 살았던 윤복진(1907-?)시인이 지은 동시입니다. 씨 묻은 데를 파 보는 아이처럼, 그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군요. 6/15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엄기원 

동무끼리 

동무끼리 

얼굴을 마주 보아라.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입을 꼭 물고 

웃지 않기 내길 하여도, 



코가 벌름벌름 

귀가 쫑긋종긋 



어느새 동무끼리 

입이 열린다. 

<해설> 

가까이 살면서도 얼굴 마주 보지 않고 사는 동무는 없는지요? 아무리 골 깊은 싸움을 한 사이라도 두 사람이 오래 사귄 동무였다면 딱 한 번만 고개 들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기만 하세요. 절대로 웃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눈을 무섭게 부릅떠도 좋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코가 벌름 귀가 쫑긋' 해지고 어느새 대화를 시작하는 사이가 '동무끼리'이지요. 자, 오랜 세원 외면하다가 비로소 얼굴 마주 본 우리들, 이제 절로 마음 열린 대화를 할 때입니다. 엄기원(1937-) 시인이 동시의 한 부분으로써 그런 대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6/16 (금) 소설가 박덕규 

한인현 

귀머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디 가셔요?" 

"오오냐, 순인 집에 있나 보더라." 

"아아뇨,어디 가시냐구요?" 

"글쎄 가 보아라, 공부하나 보더라." 

<해설> 

나이가 들면 눈도 침침해지고 귀도 멀게 되지요.다른 사람 말이 잘 들리지 않아 갑갑할 테지요. 하지만 할아버지들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다 알아차린답니다. 길에서 "어디 가셔요?"하고 인사하는 아이를 보고 단번에 손녀 친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순인 집에 있나 보더라 하고 자상하게 일러 주잖아요. 한인현 (1920-1969)시인이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귀 어둔 할아버지를 통해,우리 삶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보다 그 속에서 전해지는 마음의 움직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군요. 6/17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정환 

길도 잠잔단다 

어어, 엄마! 

길이 하나도 안 보여요. 



그래, 길도 밤엔 

어둠에 안겨 잠잔단다. 



해님이 

내려올 때까지 

곤한 잠을 잔단다. 

<해설> 

마냥 흔쾌한 일들만 펼쳐질 것같은 나날이 있기도 하지요. 절망하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이들에게 달콤한 음식과 신나는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는 더 바빠도 좋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 속에서 술을 마시며 가슴 벅차 있을 사람도, 더 많은 땀을 흘려 많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할 사람도, 밀려 드는 어둠이 시키는 대로 몸을 맡기는 법을 잘 알아야겠지요. 이정환(1955-) 시인이 어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아이의 사연으로, 곤한 잠으로 이어지지 않는 하루는 아무리 보람찬 것이었더라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군요. 6/19 (월) 소설가 박덕규 

김종길 

촛불 

엄마, 

촛불이 말을 해요. 



돌아가신 

할머니가 하시는 듯한 



그런 

얘기를, 



엄마, 

촛불이 얘기를 해요. 

<해설> 

촛불은 촛물을 떨어뜨리게 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급히 몸을 도사리며 하늘거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옛날에 할머니가 들려주려다 다 못한 그 얘기인지도 몰라요. 바로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런 얘기일 테지요. 김종길(1926-)시인이 아이의 천진한 눈으로 사물에 내재된 정과 꿈의 시간을 읽어내면서,우리 현실이 잊고 있는 소중한 세계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6/20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임금산 

두만강 

강 저쪽에도 

하얗게 



강 이쪽에도 

하얗게 



빨래들이 

춤을 춘다. 



마을마을 

하아얗게 



그리운 

깃발. 

<해설> 

뻔히 눈앞에 보이는 곳, 그곳에서 손 흔드는 사람들 …. 그러면서 만나지 못하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주 말해 왔지요. 중국 옌볜의 조선족 림금산(1960-) 시인은 그것을 국경의 강 양쪽에서 나부끼는 빨래의 모습으로 간단히 보여 주는군요. 그 하얀 빨래는 우리네 엄마들의 땀이 서린, 그러니까 살 비비며 살아온 우리네 가족사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우리 집 빨래이면서, 오래도록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사연이 얹혀 우리 모두에게 '눈에 선연한 하얀 깃발'이 되었습니다. 이제 과연 그 깃발을 내릴 때가 온 것일까요? 6/21 (수) 소설가 박덕규 

노원호 

강물 

강물이 흐른다. 

바람의 손목을 잡고 소곤거린다. 

천날 만날 아래로만 흐를 줄 알았지 

제 속을 들여다 보지 못한 강물 

이제야 알았나 보다. 

제 가슴에 내린 하늘이 

그렇게 파란 것인 줄을. 

여름날 강물은 

눈이 더 파래진다. 

<해설> 

강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늘 자신의 몸을 낮추어 흘러 가지요. 간간이 바람과 소근대느라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어느 날, 그 강물은 더욱 파랗게 보입니다. 자신을 더욱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한 층 어른스러워지는 이치를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지요. "제 가슴에 내린 하늘 "까지 보는 강물의 모습이 참 의젓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성찰하면서 얻는 삶의 건강함을 노원호 (1946-)시인은 깊어지는 강의 푸르름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6/22 (목)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바스코 포파 

당나귀 

때로 당나귀는 물기도 하고 

때로 먼지로 목욕도 하지요. 

그래서 당나귀를 알아볼 수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저 당나귀의 귀를 볼 뿐이지요. 

어느 혹성의 머리 위에 달린, 

당나귀 표시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해설> 

남이 나를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애써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감추는 것이 미덕일까요,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남에게 비친 모습이 아니라, 자기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겠지요. 삶의 중요한 과정이라면 '먼지 자욱한 길을 걷고, 억울해서 마구 우는' 일이 드러나도 좋겠지요. 신기하게 생긴 외양만으로 남을 평가하는 걸 내버려 두었다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오해의 골 속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요? 티가 묻은 속내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드러내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참다운 관계가 가능하다는 말을 이 동시가 하고 있군요. 6/23 (금) 소설가 박덕규 
김일로 

별 

엄마 찾다 눈이 붓고 

아빠 찾다 까무러쳐 



높은 하늘 위에 올라 

별이 되어 사는 아가 



그 얼마나 찾았기에 

눈만 남아 반짝일까 



초롱초롱 눈만 반짝 

오늘 밤도 찾나 보다. 

<해설> 

어느 피란길에서 아이는 그만 부모를 잃고 말았습니다. 엄마, 아빠를 부르며 포탄 떨어지는 거리를 찾아 헤매다 지쳐 죽은 그 아이는 하늘 나라의 별이 되었답니다. 얼마나 애타게 찾았기에 아이의 눈만 밤 하늘에 또렷이 남아 초롱초롱 빛나고 있을까요? 밤 하늘을 쳐다보세요. 아이의 슬픈 눈빛은 먹구름 속에서도 밤 하늘을 아름답게 수 놓고 있을 테니까요. 김일로(1911-1904)시인은 어느 전쟁 고아의 영전에 이 동시를 바쳐 그 별의 영혼을 기리고 있습니다. 6/24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원수 

비누풍선 

무지개를 풀어서 

오색 구름 풀어서 

동그란 풍선을 만들어서요 

달 나라로 가라고 

꿈 나라로 가라고 

고이고이 불어서 날리웁니다. 

<해설> 

누구나 비누풍선을 만들어 날려 보았을 테지요. 대롱 끝에 대롱대로 맺혔다가 둥글게 커져서 허공으로 날아가면,설레는 마음이 어느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요. 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꺼져 사라져서, 안타까움만 안겨 주곤 했습니다. 그래도 비누풍선을 부는 때의 순수한 소망과 고운 꿈의 시간을 잊을 수 있을까요? '고향의 봄'의 이원수(1911-1981) 시인이 비누풍선에 소망을 담아 날리는 아이 모습에서 각박한 현실에서도 더 뚜렷해지는 근원에 대한 향수를 생각나게 해 두었군요. 6/26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최계락 

편지 

썼다간 찢고 

찢었다간 다시 

쓰고, 



무엇부터 적나 

눈을 

감으면, 



사연보다 먼저 뜨는 

아, 

그리운 모습. 

<해설> 

애틋한 그리움이 말문을 막아 버려, 보고 싶다는 말도 시작하지 못할 만큼 그리운 이가 있지요.편지를 썼다가 찢고 또 다시 쓰면서, 이미 물밀 듯 밀려 온 추억 때문에 가슴이 아리게 되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그와 헤어져 살아온 지난 시간은 또 얼마나 안타까웠던가요?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의 애절한 사연을 최계락(1930-1970) 시인이 편지 쓰는 모습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어쩌면 울며 쓴 그 편지가 보낼 수 없는 곳에 사는 그리운 이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6/27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창근 

풀꽃 

하나님의 귀여운 

아들딸들이 

별을 손에 쥐고 있다. 

반짝반짝! 

<해설> 

무심코 발견하는 이름 모를 작은 풀꽃 한 포기에 놀라게 된다는 것은 그래고 우리의 정서가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뜻이지요.아이의 모습을 보고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되는 이치도 이와 같아요. 아이의 맑은 눈, 아이의 앙증스런 손짓에 깃든 별을 본다는 것은 '맑은 영혼의 미래'를 절로 믿고 있는 까닭입니다. 날로 혼탁해지는 이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도 말할 수 있지요. 이창근(1951-) 시인이 노래하듯, 새롭게 태어나 자라나는 그 무수한 작은 것들의 꿈을 '반짝반짝' 노래할 수 있는 세상은 여전히 내일을 향해 열려 있답니다. 6/28 (수) 소설가 박덕규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가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고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시집 '서울의 예수' 중 

곡:류형선 /노래: 유익종 

박지현 

슬픈 어느 날 

울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별님이 

먼저 알고 

눈물이 글썽 



슬픔을 잊으려고 

애를 썼지만 



달님이 

먼저 알고 

수심이 가득 

<해설> 

아무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고 혼자서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때가 있지요. 어떤 오락거리에도 눈길을 둘 수 없는 큰 슬픔이라면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야만 한답니다. 눈에 맺힌 눈물방울 때문에,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과 달도 슬픈 빛으로 채색되지요. 하지만 슬픔과 동화되는 자연의 모습이 아주 순수하게 느껴지는군요. 슬픔도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으로 극복된다는 것을 박지현(1943-) 시인이 상심한 아이으 모습으로 들려 줍니다. 6/30 (금) 아동문학 평론가 김 용희 

김달진 

칠월의 산길 

하얀 양산을 받쳐 든 

두셋 새악시가 

흰나비떼처럼 날개를 치며 

지나간 뒤 

뱀 꼬리가 날카로이 빛났다. 

바람인 듯 풀잎이 흔들렸다. 



산모랑 굽이진 한길 그늘에 

칠월의 한낮은 

白金 바다보다 아름다웁다. 

<해설> 

자연은 우리에게 휴식을 제공하거나 우리를 고요로써 감싸 안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녹음 우거진 숲길을 날카롭게 채색하는 저 뱀 꼬리 빛과 그것에 화답하는 풀잎의 흔들림을 보세요. 우리가 즐겨 찾아가는 바다와는 또 다르게, 여름 산길 또한 사실은 이토록 감각적이며 또한 현란하게 눈부실 수 있지요. 그 사실을, 평생을 근대화의 길로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김달진(1907-1989) 시인에게서 확인하니 더욱 감회롭습니다. 이 여름도 자연은 그 안에 무한한 새로움을 내포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요. 7/1(토) 소설가 박 덕 규 

최춘해 

흙 

돌아간 해 늦가을 

흙은 지쳐서 쓰러졌었다. 



한 송이 꽃, 한 포기 풀, 

곡식 낟알 하나라도 

품 속에서 태어난 건 

다 아끼고 싶었다. 

모양이야 일그러져도 

허물을 묻어 주고 싶었다. 



기름기가 다 마를지라도 

더 넉넉하게 

젖꼭지를 물려 주고 싶었다. 



지친 채 누웠어도 

가물에 못 견뎌 

쭉정이로 돌아온 풀씨가 

가슴 아팠다. 

<해설> 

자연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은 우리 생명의 젖줄이며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흙은 우리의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일러 줍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가 맺을 때까지 흙은 온갖 일을 해야 합니다. 불평을 말하거나 잘난 척 뽑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품 속에 태어난 것은 다 아끼고 다독이고 싶은, 모양이 일그러지거나 못 생겨도 그것을 덮어 주고 싶은 어머니, 쭉정이로 돌아온 풀씨를 보고 가슴이 아픈 어머니, 그래서 흙은 자연의 크신 어머니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슴에 비를 품었다가 목마르지 않게 해주고, 지쳐서 쓰러질지라도 곡식과 과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는 흙의 고마움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었나요? 이 시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젖꼭지입니다. 흙이 젖꼭지를 물려 주고 싶었다는 것, 그래요. 풀, 나무는 물론이고 사람도 흙의 젖꼭지를 물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흙의 힘은 그렇게 위대합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요? 그 말은 이 시를 새겨 보면 어려운 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또한 이 시는 어머니의 큰 사랑을 함께 노래한 시입니다. 흙과 어머니! 그것은 푸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영원히 큰 사랑의 이름입니다. 2000.6.16(금) 소년 조선일보 아동문학관 난에 정두리 씀 

정현종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해설> 

누구나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떠올리는 곳이 섬이지요. 바다 내음과 파도 소리에 잠겨 모든 것을 잊고 머물고 싶은 그곳은, 배를 타고 가 닿을 수 있는 실재 공간이면서, 그러나 가지 못해 마음속에서 상상하곤 하는 상징 공간이기도 합니다. 구둣발에 밟히는 미생물에서조차도 즐겨 신성(神性)을 확인하고 탄복의 노래를 부르는 정현종(1939-)시인은 그곳을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했군요. 스스로 뿜어내고도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인간들의 빛과 향, 그것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유동적이고도 고독한 공간, 그 가까운 섬에 우리는 왜 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7/3(월) 소설가 박덕규 

이시영 

새벽 

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카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 먼동 트는 소리 

<해설> 

고요한 호수에 동이 틀 무렵 먹빛 어둠을 뚫고 붕어가 뛰어 오를 때가 있지요. 동이 트는 것을 먼저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물고기들은 몸을 솟구칩니다. 그때 들리는 경쾌한 소리는 새 세상을 알리는 신호같기도 합니다. 그 소리는 누구라도 들을 수 있지만 붕어의 아가미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지요. 하지만 자연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먼동 트는 소리까지 들리는가 봅니다. 밝은 눈과 귀를 가진 이시영(1949-)시인이 넓고 고요한 호숫가에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의 신비로운 움직임과 미세한 소리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7/4 (화) 문학평론가 이숭원 

조정권 

독락당 (獨樂堂)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 )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 버린 이. 

<해설> 

독락당 대월루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자의 뜻으로는 홀로 즐기며 달을 맞이한다는 의미인데 아마 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지 모르지요. 정신의 맑고 높은 경지를 추구해온 조정권 (1949-) 시인이 벼랑 끝의 한 은거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누각은 벼랑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곳에 올라 집 한 채를 지은 후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자 내려오는 길을 부쉈던 것이지요. 시인은 현실의 울타리에서 멀리 벗어난 어떤 초월의 공간을 꿈꾸고 있습니다. 실제의 삶 속에서 맑은 자리를 찾기 어려울 때 그런 공간을 꿈꾸는 것이겠지요. 7/5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성복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 가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해설> 

어떤 감탄사로도 형용되지 않는 신비한 풍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수직으로 푸른 바다와 직면해 있으면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바다 빛과 어우러져 오묘한 색채를 빛내곤 하는 남해 금산이 그런 곳이지요. 그 앞에서 이성복(1952-) 시인처럼 간절한 사랑의 설화를 유추해 내는 사람도 있겠지요. 연인을 위해 기꺼이 돌 속에 함께 갇힌 한 사내가 어떤 숙명의 힘에 의해 연인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결국 푸른 바닷물 속으로 잠겨 드는 이야기입니다. 자연은 이처럼 자신을 속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슴 안에서 더욱 깊은 정취를 뿜어내게 됩니다. 7/6(목) 소설가 박덕규 

오선홍 

개망초 

깎아지른 벼랑 

돌 틈을 비집고 

저도 위험한 

하나의 풍경이 된다. 



홀로 피었다 

당당하게 사라지는 

개망초. 

<해설> 

개망초는 우리 나라 산야 어디든 자생하는 식물입니다. 여름에 작은 꽃이 피었다가 가을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지요. 깎아지른 벼랑에 돌 틈을 비집고 피어난 개망초가 오선홍(1964-) 시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평한 들판이 아니라 날카로운 벼랑에 피어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군요. 시인은 벼랑에 피어난 개망초가 스스로 하나의 위험한 풍경이 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존재의 접근을 거부하고 저 혼자 피었다 사라지는 당당함이 부러웠던 것이지요. 그런 당당함을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7/7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종삼 

새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가까이 와 지저귀고 있다. 

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천체에 반짝이곤 한다. 

아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산 사람이다. 

<해설> 

일생을 떠돌이의 마음으로 살다 간 김종삼 (1921-1984) 시인의 시입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왠지 마음이 찡하게 아려 오는데 이 시는 신비로운 새 소리를 들려 주고 있어 세상의 슬픔에서 잠시 비켜 나 있는 것 같네요. 하늘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새소리는 시인의 마음에 행복의 물결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행복에고 슬픔의 기운이 스며 있군요. 시인은 또 "언제 올지 모르는"을 두 번 반복했고 "이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들려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새소리가 안겨준 행복은 환상이고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곳이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아려 옵니다. 7/8 (토) 문학평론가 이숭원 

조태일 

소가죽 북 

운동장에서 

학생들, 

북을 치고 있다. 

둥,둥,둥,둥,둥둥둥둥둥 



울타리 너머 

들판 

누렁소들, 

되새김질 멈추고 

맨살로 울고 있다. 

우움머어, 우움머어, 

둥,둥,둥,둥,둥둥둥둥둥 

<해설> 

아무 움직임도 없어 보이는 여름 한낮이군요. 너른 학교 운동장이 있고, 그 울타리 너머로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치는 북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멀리 퍼져 나갑니다. 북소리의 파장을 느낀 들판의 누렁 소들이 아연 되새김을 멈추고 '맨살로'울기 시작합니다. 북소리와 소 울음의 화음이 이토록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국토'에 쌓인 혼을 노래하다가 '국토'의 혼이 된 조태일(1942-1999)시인이 소의 희생을 암시하는 듯한 '소가죽 북'을 매개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울음을 절묘하게 뒤섞은 까닭이겠지요. 7/10 (월) 소설가 박덕규 

박형준 

공간 이동 

보도 블록을 밀고 나오는 뿌리 

뿌리는 하늘로 솟구친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로 흘러가는 세상은 지치지 않는다. 



모래시계의 허리가 가늘어진다. 

<해설> 

흙 먼지를 줄이기 위해, 도시 경관을 세련되게 하기 위해 땅 위에 깔아 놓은 보도 블록, 그 아래에서도 생명체는 자라고 있습니다. 보도 블록을 밀어낼 듯이 뿌리를 그 위로 내밀어 하늘로 솟구치는 풀들이 그 예이지요. 그러나 절망과 폐허의 시간을 오래 견뎌 온 박 형준(1966-) 시인은 놀라운 생명력을 쉽사리 노래하지 않습니다. 한결 둔중한 음색으로, 그런 생명력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지치지 않는 힘은, 모래시계의 가는 허리를 지나가는 모래처럼 무거운 벽을 뚫고 가벼움을 향해 가려는 존재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7/11 (화) 소설가 박덕규 



최문자 

고백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 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해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가 주는 상처를 알고도 그것을 감내하는 사랑의 노래를 즐겨 부르곤 하지요.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랑하는 이를 포근하게 감싸 주는 사랑의 이야기가 실로 가슴을 절절하게 할 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랑이고, 곧 참다운 사랑의 시일 수 있을까요? 최문자(1943-) 시인이 향나무와 그것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의 관계로 그 '막무가내'식 사랑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얹어진 희생, 순응, 포용 등의 가치가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위반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도, 그 사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시적 아이러니가 빛나고 있어 더욱 흥미로운 시가 되었습니다. 
7/129(수) 소설가 박덕규 

김영석 

이슬 속에는 

한 방울 이슬 속에는 

어디론가 끝없이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콩 꽃 같은 흰 옷고름이 

안스럽게 얼비치고 

가슴에 묻은 날카로운 칼날도 

눈물에 삭고 휘어 

이따금 찌르레기 소리에 반짝인다. 

<해설> 

한 방울 이슬에서 자연의 신비를 엿보는 사람도 있는데 김영석(1945-) 시인은 이 땅에서 한스럽게 살아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네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콩은 여름에 나비 모양의 꽃을 피우지요. 한 맺힌 사람들의 흰 옷고름을 콩 꽃에 비유한 것이 절묘합니다. 워낙 어렵게 살던 사람들이라 가슴에는 분노의 칼도 있었을 텐데 그것도 눈물에 무디어져 결국은 찌르레기 소리게 녹아 들고 있네요. 원한의 심정이 맑은 이슬이 되고 반짝이는 새소리로 바뀌는 놀라운 마술을 여기서 봅니다. 
7/13(목)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성선 

황홀 

오늘 아침 산이 

물방울 



음악이다 



세상이 꽃으로 피어난다 



이제 

더 갈 데가 없다 

<해설> 

산이 물방울로 보인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환히 비치는 물방울처럼 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다면 그 아름다움은 기가 막히겠지요.비 온 다음 날 아침 산의 모습이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음률의 조화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신비로운 음악과도 같지요.이렇게 꽃으로 피어나는 세상을 두고 달리 갈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완벽한 신의 솜씨 앞에 그저 숨 죽일 수밖에요.번잡한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의 묘미를, 설악산 기슭에서 살고 있는 이성선(1941-)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7/14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최승호 

물렁물렁한 책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은 물렁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반죽 덩어리. 그 물렁물렁한 책을 

베개 삼아 나는 또 시상(詩想)에 잠긴다. 

<해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전, 어떤 학자에 의해 한 권의 책이 저술되기 전, 그들의 머리 속에서 유동하고 있는 생각들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시에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을 아직 "반죽"중인 "물렁물렁한 책"이라 명명했군요. 존재하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에 "물렁한" 질감이 부여되면서 그것이 우리 삶 속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존재 아닌 것들도 존재하는 것이라는, 무정형의 혼돈이 더욱 완벽한 질서라는 그런 사유를, 최승호(1954-)시인은 한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는 일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7/15 (토) 소설가 박덕규 

이재무 

신발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않아도 되던 날부터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간 친구여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간 꿈이여 

<해설> 

요즘에는 신발 크기를 밀리미터로 표시하지만 옛날에는 문이라는 단위로 표시했지요. 어릴 때는 발도 빨리 커져서 10문짜리 신을 신다가 얼마 안 되어 문수가 큰 새 신을 사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이 되니까 신발 문수를 바꾸지 않아도 되더군요. 그때 이후 많은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어릴 때는 꿈도 많았는데 그 많던 꿈도 내 곁을 떠나갔어요. 다정했던 친구들, 가슴 속의 꿈들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요? 이재무(1958-)시인의 시를 읽으니 잊혀졌던 기억들이 연기처럼 아련히 떠오릅니다. 7/17(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송찬호 

동백이 활짝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 물고 

땅으로 뛰어 내리기 전에 

<해설> 

꽃이 활짝 핀 모습을 사자가 네 발과 붉은 갈기를 펼치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것에 비유했군요. 그 때문에 꽃의 붉은 빛이며, 만개(滿開)하는 모습이 선연하게 느껴집니다. 자연의 변화 중에서도 그 절정의 환희는 참으로 일순간의 일이지요. 예술가들은 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서둘러 상상력을 집중합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는 지금의 시간 모두가 절정의 한 지점이 아닐까요? 쉽게 지나치는 소중한 우리의 시간에 대해 각성하게 하려는 뜻에서 송찬호(1959-)시인이 돌올한 이미지로 동백꽃의 개화 장면을 그려 놓은 것일 테지요. 7/18 (화) 소설가 박덕규 

정일근 

유리창 청소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 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 놓은 

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해설> 

정일근(1958-) 시인이 중학교 교사 시절 쓴 시입니다. '열이'라는 학생은 지적으로는 조금 늦되 보이지만 누구보다 착하고 맑은 심성을 가졌네요. 꼬부리지 않고 정성껏 유리창을 닦아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한 폭 그림처럼 떠오르게 했습니다. '다정한 형제섬'이란 표현이 마음을 순하게 하지요? 유리창에 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선생님과 열이가 다정한 형제처럼 손잡고 웃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착하고 맑은 사람들이 모여 사랑으로 가르침을 주고 받는 교실이 그립습니다. 7/19(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선영 

알락도요새 

연못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을 발바닥 삼아 

연못을 콩콩 튀어 다니며 

제 존재의 그토록 가벼움을 맘껏 즐기는 



내 존재의 무게를 타고 앉아 콩 콩 콩 

발장구 치는 

<해설> 

봄 가을로 한 차례씩 우리 나라의 물가에 머물다 지나가는 나그네새인 알락도요새가 연못의 풀숲에서 놀고 있는 장면입니다."나뭇잎을 발바닥 삼아 연못을 콩콩 튀어" 다니는 모습이 참 경쾌하군요. 지상에 와서 놀면서도 마치 이 지상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는 듯한 그 몸놀림에 비하면, 한 시도 지상을 떠날 수 없는 인간은 얼마나 무거운 존재인가요. 이선영(1964-)시인이 알락도요새의 한가로운 한때를 "콩콩"튀는 탄력적인 감각으로 드러내면서 그 속에다 제 무게를 견디느라 힘겨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7/20(목) 소설가 박덕규 

심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돌아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해설> 

변변한 잠자리채마저 없던 시절 아이들은 싸리빗자루를 들고 잠자리를 잡으러 다녔지요. 정신 없이 놀다 보면 어느새 여를 한낮이 다 가고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사과처럼 익어 돌아왔습니다.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났지만 새참도 모자라던 시골에 먹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가난과 궁핍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심호택(1947-) 시인은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 속에 피어오르던 동심의 천진함과 인간다운 정겨움이 못내 그리운 탓이겠지요. 그 아름다운 시절이 지금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요? 
7/21(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문인수 

비밀 

급행 지나는, 손살같이 내닫는 숨가쁜 도중 

추풍령 아래 

푸른 행간에 

하품하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가니역 

<해설> 

우리는 휴가 철의 급행 열차처럼 자신의 목적지에 빨리 가 닿아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몰두하는 삶이 가장 값지다고 믿지요. 하지만 그 삶의 터전이 되고 배경이 된 자잘한 존재들과 그것들과 맺은 이런 저런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열차 창 밖으로 하품하듯 스치는 간이역 같은 풍경이 속살 깊은 내면에 쌓인 때라야 새로 만나는 세상은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당신에게도 그처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비밀이 진정 있지 않겠느냐고, 문인수(1945-) 시인이 묻고 있습니다. 7/22 (토) 소설가 박덕규 

나태주 

기쁨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 

<해설> 

난초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온도가 적절해도 잎이 마른다고 해요. 그러니까 난초의 잎은 우리들이 모르는 어떤 밀접한 관계를 허공과 맺고 있는 셈이지요. 자연의 은밀한 아름다움을 노래해 온 나태주(1945-)시인의 눈은 평범한 난초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이처럼, 휘어진 이파리가 허공에 몸을 기대고 허공은 그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 장면을 보았어요. 난초 잎에서 잔잔한 기쁨의 강물을 발견한 시인의 안목이 놀랍습니다. 7/24(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춘수 

부두에서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해설> 

바다에서 일하고 귀가하는 부두 사나이들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지요. 김춘수(1922-) 시인은 그것을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바다'로 표현했습니다. 사나이들이 일하던 실제의 바다에서, 사나이들이 가져옴으로써 느낌만으로 존재하게 된 바다로 변화한 기묘한 상태가 펼쳐졌습니다. 바다는 원래 깨지고 부서지고 물개들과 상어떼가 어울리는 곳인데, 그것에서 떠나온 바다가 이제 그런 통념적인 의미를 벗어서 더욱 '온전한' 상태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생생한 자연, '날것' 상태의 존재란 이렇듯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고정 관념을 깰 때라야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7/25(화) 소설가 박덕규 

장석남 

뻐꾸기 소리 

깜빡 

낮잠 깨어나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봉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 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꽃빛만 같이 



사랑도 꼭 그만큼쯤에서 

그 빛깔만 같이 

<해설> 

어느 날 낮잠을 자다 깨어나서 흰 창호지에 붉은 봉숭아 꽃 빛이 비친 것을 보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결에 보이는 연분홍 빛이 얼마나 신비롭겠습니까? 사물의 그늘에 눈길을 돌려 온 장석남(1965-) 시인이 그 은은한 빛깔로 사랑의 색조를 표현했습니다.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사랑, 의도적으로 꾸며내는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하지요. 그런데 시의 제목은 뜻밖에 '뻐꾸기 소리'예요. 멀리서 뻐꾸기 소리 들려 오듯이, 봉숭아 꽃잎 은은히 우러나듯이, 그렇게 아련하게 다가오는 사랑을 기다린다는 뜻이겠지요. 
7/26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백 석 

비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해설> 

농촌이나 산골 서민들의 삶을 북방 지역의 토속적인 어휘에 실어 이야기하듯 노래한 백석(1912-?) 시인의 초기 시입니다. 자연의 정황을 특정한 감정 부여 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실재감을 물씬 느끼게 하는 시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지요. 어느덧 몰려 와 있는 비의 계절을, 아카시아 꽃들이 만발한 숲길에서 곧 쏟아질 것만 같은 '비' 냄새로 예감하는 때의 표현이 볼 만하군요. '두레방석'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수 있는 방석) '물쿤'(냄새가 확 풍기는 모양을 뜻하는 '물큰'의 사투리),'개비린내'(바닷물이 드나드는 때의 비린내) 등 사라진 말들의 쓰임이 이 시에 싱싱한 기운을 돌게 합니다. 7/27 (수) 소설가 박덕규 

김광규 

종 

동록이 슬은 구리의 침묵 깨뜨려 

몇백 년 간직해 온 함성과 신음 되살려 주고 

그윽한 울림 사라지면서 

더욱 큰 고요를 남기는 듯 

<해설> 

새벽의 산사에서 범종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몇 백 년의 세월을 거쳐 파랗게 녹이 슨 종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그 표면을 때리면 놀라운 소리가 울려납니다. 평범한 대상에서 생의 비밀을 탐색해 온 김광규(1941-) 시인은 그 소리에 많은 사람의 함성과 고통의 신음이 담겨 있다고 보았어요. 하지만 함성과 신음의 울림도 잠시뿐 소리가 그치면 더욱 큰 고요가 남습니다. 그렇다면 종의 본질은 함성일까요 고요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침묵과 함성이, 신음과 고요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닐까요? 
7/28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도광의 

샐비어 

더운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 봅니다. 

햇볕도 편애하듯 

가는 숨결로 타고 있습니다. 

하늘 속 빗방울로 

가슴을 씻고 

피 흘리며 타고 있습니다. 

아빌라, 

모든 것을 사죄해 주십시오. 

살아 있는 남자에게 

남은 할 일은 

저무는 한역(寒驛)에서 

눈을 감는 일입니다. 

<해설> 

붉은 빛으로 짙게, 꽃밭 가장 자리를 수 놓은 샐비어를 아시는지요? 그 꽃을 따서 단 맛을 빨아 먹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요. 도광의(1940-) 시인은 뜨거운 햇볕을 받고 더욱 붉어지는 샐비어의 모습에서, 피 흘리듯 정염(情炎)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을 봅니다. 어떤 운명이 마음을 이끄는 대로 생을 맡기고 스스로를 소진하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군요. 그런 사람이 없다면 시가 있을까요? 그렇게 삶을 내던지고 고개 숙인 그에게 신이 어떤 죄값을 치르게 할런지 궁금합니다. 7/29 (토) 소설가 박덕규 

이홍섭 

불타는 섬 

외로움이 힘이 되어 

힘 없는 응시가 어느덧 사랑이 되어 

저렇게 

활활 타오르는 섬 

<해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은 오갈 데 없이 고립되어 있는 인간 모습과 흡사하지요. 섬처럼 외로운 존재가 어느날 누군가를 응시하고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외로움이 클수록 그리움과 사랑은 더욱 강하게 불타오르지요. 그러나 아무리 상대를 바라보며 사랑으로 몸부림쳐도 고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끝내 '불타는 섬'으로 머물 뿐이지요. 이홍섭 (1965-) 시인은 인간 존재를 섬에 비유하여 외로움의 자각이 사랑의 열망으로 바뀌고 그것이 고독의 가혹한 심연으로 깊어지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7/31(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형영 

압록강 
-김주영 형에게 

무너진 국내성을 돌아 

압록강 선착장에서 

밤 늦도록 바라보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가 되던 강물이여 



하늘에 등을 단 

달빛 때문에 

달빛 때문에 

매 갈 길을 막고서 

밤에도 흐르는 강물이여 

<해설> 

고구려의 옛 영광 국내성을 돌아 압록강 선착장에 닿는 관광 코스가 있지요. 압록강변 조상들의 생애를 다룬 소설 '야정(野丁)'(김주영 작)을 읽으며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 김형영(1944-)시인이 이 강 앞에서 처연하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강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그 조상의 후손들은 지금 어떤가요? 역사는 단절되고 민족은 헤어졌습니다. 그걸 생각할수록 우리는 옴쭉 달싹할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맙니다. 민족의 현실을 자기 안에서 인식함으로써 죄값을 치르고 있는 시인의 내면이, 달빛 아래 강물 흐르는 자연의 오랜 운행과 어우러져 장엄한 음악 소리를 내고 있는 듯합니다. 8/1 (화) 소설가 박덕규 

강현국 

고요의 남쪽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 나온 길은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 

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 

길은 또 한 번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온 몸에 고추장을 뒤집어 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 

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해설> 

이 시에는 몇 가지 이채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길이 산비탈로 자지러진다든가, 고추장을 뒤집어쓴 애잔함이라든가, 고요의 남쪽에 방석만큼 비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시인이 보여 주는 것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입니다. 떡갈나무 그늘을 거쳐 황토 산비탈로 사라지는 길이 있고, 길 위에는 고요가 감돌고, 길 저편에 흐르는 섬진강 줄기에는 처연한 애잔함이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강현국 (1949-) 시인은 평범한 풍경에서 고요 속으로 파고 드는 애잔함을, 민족의 내면에 흐르는 정한의 물살을 본 것이지요. 
8/2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강은교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 벽 속의 편지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가네 

땀에 젖은 지붕이 

헐떡이며 

새를 쳐다보네 



그대는 새인가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날아들어가는, 

<해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눈앞에서 흘러 들어가던 때,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다투어 뛰어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과연 어떤 태도가 옳았을까요? 짙은 허무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발견한 강은교 (1945-) 시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망설임 없이 그 큰 흐름으로 뛰어든 사람만이 그 답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을 본 사람만이 그 답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을 본 사람만이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요. '큰 흐름 속에서 '나를 찾아라'하는 교훈도 되새겨 보세요. 자, 우리 앞의 물줄기를 보고 있는지요? 99.8.3(목) 소설가 박덕규 

오규원 

칸나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 올리고 다시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 동안 퍼부었다 

<해설> 

이 시를 읽고 무슨 이런 싱거운 이야기를 했나 의아해 하는 분이 있겠지요. 시는 꼭 의미 심장한 무언가를 담아 내야 하나요? 진실은 오히려 평범한 자리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요.어느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을 했고, 평상심이 곧 진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칸나 꽃이 필 때 무슨 신비로운 이변이 일어날까요? 잠자리가 날고 우연히 소나기가 퍼붓는 등, 지극히 평범한 일들이 반복될 따름입니다.오규원(1941-) 시인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현상의 국면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실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8/4 (금) 문학평론다 이숭원 

박해석 

익사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길래 

몽뚱이 하나로 온 강물을 적시게 하였느냐 

얼마나 깊은 괴로움이 있었길래 

온 강물이 합심하여 몸뚱이 하나 

눈부신 햇살 아래 뉘어 놨느냐 

<해설> 

소중한 꿈을 키워 나가야 할 사람이 뜻하지 않은 운명 앞에 목숨을 내놓고 만 것을 볼 때가 있지요. 박해석(1950-) 시인이, 생을 연장하려는 사람의 몸부림과,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하는 강물의 거친 물살이 맞부딪쳐 빚어낸 그 비극의 현장을 포착했습니다. 비록 끊어져 버린 생명이지만, 그 사람이 온몸으로 '슬픔과 괴로움'을 견뎌낸 세월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요. 살아 남은 사람들의 남아 있는 시간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슬픈 감정을 겉으로 억제해 보이는 시적 방법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8/5 (토) 소설가 박덕규 

이호우 

휴화산 

일찍이 천 길 불길을 

터뜨려도 보았도다 



끓는 가슴을 달래어 

자듯이 이 날을 견딤은 



언젠가 있을 그날을 믿어 

함부로치 못함일레. 

<해설> 

사소한 불만을 무절제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잠자듯 침묵을 지키다가 세상이 놀랄 만한 분노의 육성을 터뜨릴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귀를 기울이지요. 분노의 표출, 열정의 폭발에도 적절한 시점이 필요한 법이지요.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언젠가 있을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의 시련을 참고 견디는 견인(堅忍)의 정신력이 요구됩니다.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이호우(1912-1970) 시인이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정신의 높이를 휴화산에 비유하여 나타냈습니다. 
8/5(월)문학평론가 이숭원 

윤제림 

개미집 

베짱이처럼 그늘에서 

잠만 잔 게 아니냐구요? 

기타 치며 노래나 부른 게 

아니냐구요? 



개미처럼 일했다며, 왜 

집 한 칸 없느냐구요? 

<해설> 

'무얼 하고 살았기에 여태 자기 집도 없이 사느냐?'는 식의 물음에 곤혹스러움을 겪는 사람들이 참 많더군요. 집 장만을 못 한 사람에겐 언제나 그 게으름이나 무능을 공박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화 속의 부지런한 주인공 개미도 어느새 궁지에 몰려 버렸군요. 그런데, "아니냐구요?"하는 개미의 거듭되는 반문이 의외로 당당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많은 돈과 큰 집과 멋진 차가 있는 삶보다 하찮은 '개미집'의 소박한 성취가 더 값지다는 사실을 윤제림 (1959-) 시인이 풍자적인 어법으로 재치있게 깨우치고 있는 중이지요. 8/11(토) 소설가 박덕규 

황동규 

더욱 더 조그만 사랑 노래 

연못 한 모퉁이 

나무에서 막 벗어난 꽃잎 하나 

어마나 빨리 달려 가는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금시 떨어지는지 



꽃잎을 물위에 놓아 주는 

이 손. 

<해설> 

이 시에 제시된 상황을 머리에 그려 봅시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꽃잎이 바람에 나부껴 연못 저 편으로 달아나는 장면을, 천방지축 달려가는 꽃잎을 잡아 물위에 곱게 놓아 주는 손을, 그러면 연못의 물결에 실려 곱게 일렁이는 꽃잎의 흔들림이 연상되기도 하지요. 지적인 방법으로 대상을 재구성해 온 황동규 (1938-) 시인이 '달려가는 꽃잎'과 '놓아 주는 손'의 대비적 관계를 독특하게 설정했습니다. 자유분방한 몸 놀림은 급격한 추락으로 끝날 위험이 있지요. 그것을 염려하여 존재가 머물 수 있는 안정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8/9 (수) 문학 평론가 이숭원 

오세영 

미명 (未明) 

소낙비가 난초 잎을 두드린다. 

심금을 울리며 

닫혀 있는 사물의 문을 연다. 

소낙비가 번개를 몰고 

잠든 흙을 깨우고 있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비에 적시며 

가냘픈 줄기로 미명을 열고 있다. 

<해설> 

신 새벽 동트기 전 소나기 한 줄기가 지나갑니다. 연약한 난초 잎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잠자듯 고요했던 난초 잎도 마음의 문을 열고 신생의 기지개를 켜는 듯합니다. 번개까지 번쩍여 잠든 흙을 깨우고 있군요. 
소나기에 몸을 적신 난초 줄기는 가냘퍼 보이지만 그 연약한 줄기를 끄덕이며 미명의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지만 모든 생명 가진 존재는 미명(未明)을 여명(黎明)으로 바꾸는 노력을 멈추지 않지요. 존재의 비밀을 탐색해 온 오세영 (1942-) 시인이 미명을 여는 생명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8/10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정인섭 

꿈 

꿈이 감은 눈으로 고통을 본다 

내 상처에서 날마다 물을 긷는 당신이 



아침엔 물 한 동이로 달을 씻고 

저녁엔 물 반 동이를 나무에 쏟는다. 

<해설> 

누구에게나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가 있게 마련이지요. 가람들은 간절한 기도로 그것을 씻으려고도 하고, 또 그럴수록 더한 정신적 고토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한 어느 순간 그 고통에서부터 새로운 깨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수도 중인 정인섭 (1955-) 시인의 상처에서 '날마다 물을 긷는 당신'이 곧 그 깨우침의 상징인 셈이지요. 자기 고통의 피에서 끝없이 물을 길어내 이 세상을 위해 뿌려 주는 일이 '당신'만의 몫이 아닐 테지요. 그 일은, 그 일로써 스스로의 고통을 씻어야 할 우리들 각자의 꿈이 되어야 합니다. 8/11(금) 소설가 박덕규 

이경림 

사람 지나간 발자국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해설>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머물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살다간 사람의 흔적을 보았군요. 그때의 기이한 놀라움을 이경림 (1947-) 시인이 희미한 연기 속에서 조금씩 형체를 나타내는 산골 풍경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죽은 자연처럼 있던 집이 부뚜막의 온기나 굴뚝 연기로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하는 미세한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 오는군요. 조금 더 귀기울이면, 모양과 소리로 빚은 "허리 잘록한"절묘한 소리도 들려올 테지요. 사람이 사람 지나가는 발자국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다니, 이것만으로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뜻 아닐까요? 8/12 (토) 소설가 박덕규 

정진규 

물소리Ⅰ 

너의 나라를 네 몸의 나라를 네 영혼의 나라를 

속속들이 핥고 있다 지금 너를 부르는 너의 목 

소리가, 그렇다 너의 생음(生音)이 비로소 깊고 

아름답다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너의 옴 몸은 

언제나 물기에 젖어 있다 이 여름 땡볕 속을 

혼자 걸어도 언제나 물소리를 듣고 있다 너를 

듣고 있다 

<해설>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던 그 그리움만으로 상대방의 모습이 오롯이 떠오르지요. 상대의 몸과 영혼 깊은 곳까지 직접 어루만지는 것 같은 밀착된 감각을 얻을 수가 있어요. 내가 너를 부르는 소리가 물소리가 되고 거기 응답하는 네 몸도 물소리를 낸다면 너와 나 둘 사이에 그리움의 수로를 타고 시원하게 물이 흐르는 장면도 상상할 수 있지요. 찌는 듯한 여름 땡볕 속에 이런 물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훨씬 싱그러워지네요. 정진규 (1939-) 시인이 들려 준 싱싱한 사랑의 물소리를 당신도 한번 울려보지 않으시렵니까. 8/14 (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문정희 

무궁화 

꽃을 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중중모리 삼삼한 가락 흔들고 있다. 



말 못할 몸짓 

흰 꽃으로 피워 놓고 



날 보고도 말도 걸지 못한다 

이국 땅 골목길에 무궁화가 피었다. 

<해설> 

문정희 (1947-)시인이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 어느 골목에서 우연히 무궁화꽃 핀 것을 보았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득한 타향에서 눈에 익은 그 꽃을 보았을 때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헤어졌던 혈육을 만난 듯, 정든 이웃을 만난 듯 가슴이 뭉클했겠지요. 그 무궁화도 가슴이 막힌 듯 나를 보고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합니다. 흰 꽃을 피우고 중중모리 가락으로 흔들릴 뿐 아무 말이 없는 무궁화에서 시인은 가슴속에 피어나는 모닥불을 확인했습니다. 이 모닥불의 온기가 우리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8/15 (화)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수복 

망개 덩굴 옆에서 

망개 덩굴에 그대 귀걸이가 걸렸다 

손에 닿을 때까지 

온몸을 밀어 넣어도 

아득한 햇살만 손등에 찔려 온다 



그대의 마음에 

그대의 사랑에 

그대의 조국에까지 

들어박혀 있는 망개 덩굴 속으로 

손이 닿을 때까지 

온몸을 밀어넣는다 

<해설> 

빤히 눈 앞에 두고도 손이 닿지 않아 잡지 못하는 물건이 있어 애태운 적 있지요. 이 시에는 어떤 산행 중에 망개덩굴에 걸려 버린 귀고리를 건져 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손등을 찌르는 햇살'로 그려져 있습니다.귀고리의 주인이 '그대'이니까, 그것에 손닿게 하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할 테지요. 김수복(1953-)시인은 이러한 안타까움의 체험을 이룰 듯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데 못 만나는 우리 모두의 염원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거친 망개덩굴 속으로 온몸을 밀어넣는 모습이 뜨겁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8/16 (수) 소설가 박 덕 규 

고재종 

출렁거림에 대하여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 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니 물살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 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한 시간들이 마냥 추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해설> 

어떤 뜻깊은 만남은, 오래도록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요.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여 있을 동안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지요. "너를 만나고 온 날"의 그런 기쁨을 노래한 고재종(1957-)시인의 시를 따라 읽으니,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이 가득 출렁거리던 그때의 마음이 되는군요. '네 가슴 한 올에 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내 가슴" 과 같은 감상적인 표현이, 강변의 조약돌이며 총총 핀 패랭이꽃이 만드는 토속적인 분위기에 녹아들면서 더 생생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를 만나 이렇게 "출렁거리는" 것일까요? 8/17 (목) 소설가 박덕규 

이수익 

초당 한 채 

마음에 

초당 한 채 짓자. 

혼자만, 혼자서만 있고 싶은 시간 

은밀히 드나들게 

마음의 변두리 어느 한적한 터에 

불빛도 없고, 기척도 없는. 

<해설> 

지금은 시골에서도 초당을 보기 힘듭니다. 언제나 짚으로 지붕을 얹은 조그마한 별채가 초당이지요. 절제된 언어고 정갈한 공간을 추구해 온 이수익 (1942-) 시인이 마음에 초당을 짓자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주위를 비추는 불빛도 없고 사람 드나드는 기척도 없는 한적한 초당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다면 평소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지도 모르지요. 초당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번잡한 도시에서 저마다 마음에 초당 한 채 마련한다면 우리의 내면은 더욱 그윽해지겠지요. 8/18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복효근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 

그럴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나 

<해설> 

'궁그는'은 '구르는'의 전라 방언입니다. 넓은 토란잎에 빗방울이 떨어져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동그랗게 구르는 모양을 연상해 보세요.복효근 (1962-)시인은 그 장면을 동화적 시각으로 재구성했어요. 어린애처럼 둥글둥글 구르다가 잠든 토란잎 배꼽 위에서 함께 잠자는 물방울을 상상해 보았지요. 그렇게 토란잎과 어울리다가 사라질 때가 되면 토란잎이 털어내기 전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그 산뜻한 처신이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과 흡사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묻고 있습니다. 8/19 (토) 문학평론가 이숭원 

정끝별 

밀물 

가가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하서 

<해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욕되게 느껴지는 때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가가스로' 살아남아, 무수한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지나온 그 세월을 되돌아보는 일이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정끝별 (1964-)시인이 '밀물이 미끄러지듯 항구에 닿은 두 척의 배'의 사연으로, 헌한 길 함께 걸어온 두 사람의 인간사를 들려 줍이다. 그들의 '바다가 잠잠'하기만 했을 리 없지요. 다 드러난 깊은 상처를 서로 쓰다듬으며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었다.'며 다독거리는 두 사람의 표정이, 여느 연인끼리의 눈길보다 은밀하고 그윽하게 느껴지는 까닭을 아기겠지요? 8/21(월) 소설가 박덕규 

송종규 

섬 

세울아 하고 부르면 부시시 일어날 것만 같은 

바위며 이끼들 

세월아 하고 부르면 풀썩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내 살 속의 뼈와 조개의 무덤들 

달빛 혹은 차디찬 바람이 여백을 꼭 채운다. 

기꺼이, 아주 기꺼이, 돌멩이 굴리는 파도 소리 있다 

누군가 돌아선다 

바다는 너무 멀다. 

<해설> 

섬이 인간의 외로움을 표상한다는 것은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이 섬의 정경은 조금 특이하네요. 바위며 이끼 조개 껍질 등은 세월의 풍화를 많이 입은 듯퇴락한 모습이고, 빈 여백은 달빛과 찬 바람이 메우고 있어요. 파도도 가볍게 철써이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 굴리는 소리를 냅니다. 이 활량한 공간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바다조차 멀리 떨어져 있군요. 송종규(1952-) 시인이 그려낸 황량하고 쓸쓸한 내면 풍경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8/22(화) 문학평론가 이숭원 

고두현 

횡단보도 

너 두고 

돌아가는 저녁 

마음이 백짓장 같다. 



신호등 기다리다 

길 위에 

그냥 흰 종이 띠로 

드러눕는다. 

<해설>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헤어져 돌아가고 있는 한 사람이 있군요.피할 수 없는 이별을 온몸으로 겪어 내느라 넋이 빠진 표정을 짓게 되었습니다.님을 잃고 우는 슬픈 사랑의 노래들이 많지만, 고두헌 (1963-)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도시의 일상 속에서 이별을 경험하는 내용을 펼쳐 보이네요. '백짓장 같은마음'에서 '횡단보도'의 흰 띠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전이가 그 이별의 슬픔을 더욱 구체적인 일로 느끼게 해 줍니다. 함께 있어야 할 소중한 사람 곁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겪어야 하는 것인지요? 8/23 (수) 소설가 박덕규 

허형만 

시 

사람의 힘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태우고도 

남는 게 있다면 그것마저 버려야 

비로소 우리 가슴에 뜬 

생명의 별 하나 

따뜻한 숨결을 내뿜느니. 

<해설> 

선사가 오랜 고행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시인들은 결코 길지 않은 한 편의 시를 위해 자신의 정신과 감각을 모질게 채찍질하곤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잡념을 씻으며 자아를 온전히 태울 따 이윽고 가슴에 뜨는 '별'이 곧 시인에게는 참된 '시'라 할 수 있지요. 과연 그런 시를 얻기 위해 얼마나 태웠는가 하고 허형만(1945-) 시인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군요. 그 물음은 우리에게는 이렇게도 들리는군요. '사랑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확신도 없이 어찌 그런 시를 만나려고 하는가?' 시는 언제나 사랑의 증거가 될 테지요. 
8/24 (목) 소설까 박덕규 

김종철 

호박꽃에 대하여 

호박꽃이 피었습니다 

호박꽃 하면 노란색이 보입니다 

빨간색 흰색 어쩌면 하늘 색 호박꽃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호박답지 않아 생각을 멈춥니다 

치장을 해도 잘 보이지 않는 덤덤한 마누라처럼 

우리 뒤에 누워 있습니다 

그래도 꿀벌은 어김 없이 찾아 옵니다 

<해설> 

호박꽃 하면 먼저 못 생긴 꽃을 떠올리지요. 커다랗게 늘어진 모양과 너무 눈에 익은 노란 빛깔 때문일까요? 하지만 호박꽃은 역시 노란색이 어울리지요. 화려한 빛깔만 가득하다면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질 거예요. 덤덤하고 수수한 호박꽃도 있어야 마음 편해지지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핀 호박꽃이지만 꿀벌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꽃이 떨어지면 커다란 호박도 믿음직스럽게 익어 갑니다. 이렇게 평범하면서도 분명한 자연의 이치를 김종철(1947-) 시인이 호박꽃을 통해 나타냈습니다. 8/25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산하 

부화 

알 속에서는 

새끼가 

껍질을 쪼고 

알 밖에서는 

껍질을 쫀다 



생명은 

그렇게 

안팎으로 쪼아야 

죽음도 

외롭지 않다 

<해설> 

안팎의 두 존재의 힘이 함께 알 껍질에 작용될 때라야 '새'는 온전한 생명체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모든 생명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삶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말인 듯하다가, 갑자기 "죽음도 외롭지 않다"로 이은 비약이 놀랍습니다. 안팎의 '쫌'이 이룬 생명의 그늘에서 발견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지요. 이산하 (1960-) 시인은,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존재를 말해서 안팎의 두 힘의 호응처럼 생명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움직임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는 셈입니다. 8/26 (토) 소설가 박덕규 

감태준 

아름다운 나라 

거기가 어디지?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기, 

우리 손 잡고 찾아 갔다 번번이 

길을 잃고 돌아온 거기, 

눈 감으면 불쑥 

한 발자국 앞에 다가서는 거기 

<해설> 

사람들은 언젠가는 행복한 세상을 만나리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희망의 세계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지의 아름다운 나라를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잃고 돌아왔지요. 차라리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선다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할 텐데. 묘하게도 사람들은 희망과 꿈을 버리지 못합니다. 눈을 감으면 그 아름다운 나라가 바로 코 앞에 있는 것 같거든요.감태준 (1947-) 시인이 그런 인간 내면의 움직임을 간명한 시어로 나타냈습니다. 8/28(월) 평론가 이숭원 

황인숙 

원무(圓舞) 

간다. 누군가를 

낯선 것들을 

익숙한 것들을 

만나러 

간다. 

익숙한 것들을 

낯선 것들을 

떠나 

간다. 낯선 것들을 

익숙한 것들을 

<해설>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고들, 체념하듯 자조하듯 말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인생이 그런 것이 사실이라면, 돌고 도는 인생의 바퀴를 스스로 힘차게 돌려나가는 것은 어떨지요? 지독한 슬픔조차도 경쾌한 운율로 노래해서 '비극과 환희'가 어우러지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황인숙(1958-)시인이 기꺼이 인생의 '원무'를 안무합니다. 떠남과 만남,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서로 상반되는 그런 것들이 거듭 맞물리는 인간사를 표현 형식의 단순 반복을 통해 한 판 '시의 춤'으로 꾸몄습니다.자, 우리 인생의 춤은 어떻게 추어야 할까요? 
8/29(화) 소설가 박덕규 

김명인 

등꽃 

내 등꽃 필 때 비로소 그대 만나 

벙그는 꽃봉오리 속에 누워 설핏 풋잠 들었다 

지는 꽃비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면 

어깨에서 가슴께로 

선명하게 무늬진 꽃자국 무심코 본다 

달디 달았던 보랏빛 침잠, 짧았던 사랑 

업을 얻고 업을 배고 업을 낳아서 

내 한 겹 날개마저 분분한 낙화져 내리변 

환하게 아픈 땡볕 여름 알몸으로 건너 가느니 

<해설> 

아무리 짧은 인연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깊은 자취를 남깁니다. 설핏 풋잠 든 사이에 맺어진 살라이라 하더라도 그 잠깐의 인연은 '어깨에서 가슴께로 선명하게 무늬진' 자국을 남기지요. 짧은 사랑 뒤에도 오랜 고통이 이어집니다. 알몸으로 땡볕 여름을 건너는 고통이. 그러나 사랑이 남긴 쓰라림은 황홀한 것일까요? 김명인 (1946-)싱인은 '환하게 아픈' 이라는 묘한 표현을 통해 고통도 기쁨일 수 있음을 암시하였습니다. 어쩌면 인간 모두가 그런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지요. 8/30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허수경 

기차는 간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네 몸 속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해설> 

북적거러던 역에서 기차는 떠나가고, 혼자 돌아오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별은 냉혹한 현실이라 사랑의 흔적을 어서 지워야 합니다. 허수경 (1964-)시인이 일찍이, 부의 축적이 생의 지표가 되던 1970,80년대 , 산업도시의 그늘에서 흔하던 사랑을 '체험화' 했지요. 가난할수록 깊어진, 그래서 만나지 못해도 그 그리움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닮게 된 사랑은 '내 몸'과 '너의 몸'의 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기에 모든 이의 것이었지요. 그 묵묵하던 사랑의 모습을, 오늘 떠나가는 사람을 보며 다시 그려 보세요. 8/31 (목) 소설가 박덕규 

정완영 

난보다 푸른 돌 

옛날엔 칼보다 더 푸른 

난(蘭)을 내가 심었더니 



이제는 깨어도 잠 깊은 

너 돌이나 만져 본다. 



천지간 어여쁜 물소리 

새소리를 만져 본다. 

<해설> 

젊은 날에는 꺾이지 않는 개걸한 정신을 추구하다가도 나이 들면 많은 것을 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지요. '칼보다 더 푸른 난' 이란 말에는 매섭고 단호한 정신의 서슬이 버쩍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돌을 어루만지는 경지는 어떠한가요? 돌은 난처럼 날카롭지 않고 잠자는 듯 고요히 자리를 지킬 뿐이지요. 정완영(1919-) 시인은 돌의 침묵을 통하여 어여쁜 물소리와 새소리를 '만져 본다'고 했습니다. 소리도 유형화시켜 만져 보는 차원이라면 세상의 날카로운 것들도 그 속에 부드럽게 녹아들고 말겠지요. 
9/1(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송수권 

우니야, 우니야 

고추잠자리 날개가 서느러운 날 

누렁 개꼬리 같은 조 이삭이 한 밭 



조 이삭 위로 솟아난 수수 모감 몇 대 

참새떼 소리 한 밭 



저런저런…… 

수수 모감이 다 휘어지네! 



우니는 어디 간 거라니 

조밭에 새는 날리지 않고. 

<해설> 

며칠 전 근교에 나가 정말 '누렁이 개꼬리'같은 조 이삭을 봤습니다. 조보다 훤칠한 수수 이삭도 여물고 있더군요. 꼬리에 꼬리를 물듯, 9월에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들을 불러내는 송수권 (1940-) 시인의 노래에는 이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조 밭의 참새떼를 '소리 한 밭'으로 시각화해 놓은 것도 즐겁지 않습니까? '우니'는 뭘까요? 예닐곱 살의 여자 아이가 연상되는데요. 그 아인 곧잘 울곤 했을 것 같습니다. "저런저런……"하는 혼잣말 같은 말투에 배인 안타까움과 가벼운 투정도 정답지 않습니까? 9/2(토) 시인 정끝별 
김일로 

별 

엄마 찾다 눈이 붓고 

아빠 찾다 까무러쳐 



높은 하늘 위에 올라 

별이 되어 사는 아가 



그 얼마나 찾았기에 

눈만 남아 반짝일까 



초롱초롱 눈만 반짝 

오늘 밤도 찾나 보다. 

<해설> 

어느 피란길에서 아이는 그만 부모를 잃고 말았습니다. 엄마, 아빠를 부르며 포탄 떨어지는 거리를 찾아 헤매다 지쳐 죽은 그 아이는 하늘 나라의 별이 되었답니다. 얼마나 애타게 찾았기에 아이의 눈만 밤 하늘에 또렷이 남아 초롱초롱 빛나고 있을까요? 밤 하늘을 쳐다보세요. 아이의 슬픈 눈빛은 먹구름 속에서도 밤 하늘을 아름답게 수 놓고 있을 테니까요. 김일로(1911-1904)시인은 어느 전쟁 고아의 영전에 이 동시를 바쳐 그 별의 영혼을 기리고 있습니다. 6/24 (토)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원수 

비누풍선 

무지개를 풀어서 

오색 구름 풀어서 

동그란 풍선을 만들어서요 

달 나라로 가라고 

꿈 나라로 가라고 

고이고이 불어서 날리웁니다. 

<해설> 

누구나 비누풍선을 만들어 날려 보았을 테지요. 대롱 끝에 대롱대로 맺혔다가 둥글게 커져서 허공으로 날아가면,설레는 마음이 어느새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요. 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꺼져 사라져서, 안타까움만 안겨 주곤 했습니다. 그래도 비누풍선을 부는 때의 순수한 소망과 고운 꿈의 시간을 잊을 수 있을까요? '고향의 봄'의 이원수(1911-1981) 시인이 비누풍선에 소망을 담아 날리는 아이 모습에서 각박한 현실에서도 더 뚜렷해지는 근원에 대한 향수를 생각나게 해 두었군요. 6/26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최계락 

편지 

썼다간 찢고 

찢었다간 다시 

쓰고, 



무엇부터 적나 

눈을 

감으면, 



사연보다 먼저 뜨는 

아, 

그리운 모습. 

<해설> 

애틋한 그리움이 말문을 막아 버려, 보고 싶다는 말도 시작하지 못할 만큼 그리운 이가 있지요.편지를 썼다가 찢고 또 다시 쓰면서, 이미 물밀 듯 밀려 온 추억 때문에 가슴이 아리게 되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그와 헤어져 살아온 지난 시간은 또 얼마나 안타까웠던가요?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의 애절한 사연을 최계락(1930-1970) 시인이 편지 쓰는 모습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어쩌면 울며 쓴 그 편지가 보낼 수 없는 곳에 사는 그리운 이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6/27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창근 

풀꽃 

하나님의 귀여운 

아들딸들이 

별을 손에 쥐고 있다. 

반짝반짝! 

<해설> 

무심코 발견하는 이름 모를 작은 풀꽃 한 포기에 놀라게 된다는 것은 그래고 우리의 정서가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뜻이지요.아이의 모습을 보고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되는 이치도 이와 같아요. 아이의 맑은 눈, 아이의 앙증스런 손짓에 깃든 별을 본다는 것은 '맑은 영혼의 미래'를 절로 믿고 있는 까닭입니다. 날로 혼탁해지는 이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도 말할 수 있지요. 이창근(1951-) 시인이 노래하듯, 새롭게 태어나 자라나는 그 무수한 작은 것들의 꿈을 '반짝반짝' 노래할 수 있는 세상은 여전히 내일을 향해 열려 있답니다. 6/28 (수) 소설가 박덕규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가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고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시집 '서울의 예수' 중 

곡:류형선 /노래: 유익종 

박지현 

슬픈 어느 날 

울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별님이 

먼저 알고 

눈물이 글썽 



슬픔을 잊으려고 

애를 썼지만 



달님이 

먼저 알고 

수심이 가득 

<해설> 

아무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고 혼자서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때가 있지요. 어떤 오락거리에도 눈길을 둘 수 없는 큰 슬픔이라면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야만 한답니다. 눈에 맺힌 눈물방울 때문에,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과 달도 슬픈 빛으로 채색되지요. 하지만 슬픔과 동화되는 자연의 모습이 아주 순수하게 느껴지는군요. 슬픔도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으로 극복된다는 것을 박지현(1943-) 시인이 상심한 아이으 모습으로 들려 줍니다. 6/30 (금) 아동문학 평론가 김 용희 

김달진 

칠월의 산길 

하얀 양산을 받쳐 든 

두셋 새악시가 

흰나비떼처럼 날개를 치며 

지나간 뒤 

뱀 꼬리가 날카로이 빛났다. 

바람인 듯 풀잎이 흔들렸다. 



산모랑 굽이진 한길 그늘에 

칠월의 한낮은 

白金 바다보다 아름다웁다. 

<해설> 

자연은 우리에게 휴식을 제공하거나 우리를 고요로써 감싸 안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녹음 우거진 숲길을 날카롭게 채색하는 저 뱀 꼬리 빛과 그것에 화답하는 풀잎의 흔들림을 보세요. 우리가 즐겨 찾아가는 바다와는 또 다르게, 여름 산길 또한 사실은 이토록 감각적이며 또한 현란하게 눈부실 수 있지요. 그 사실을, 평생을 근대화의 길로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김달진(1907-1989) 시인에게서 확인하니 더욱 감회롭습니다. 이 여름도 자연은 그 안에 무한한 새로움을 내포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요. 7/1(토) 소설가 박 덕 규 

최춘해 

흙 

돌아간 해 늦가을 

흙은 지쳐서 쓰러졌었다. 



한 송이 꽃, 한 포기 풀, 

곡식 낟알 하나라도 

품 속에서 태어난 건 

다 아끼고 싶었다. 

모양이야 일그러져도 

허물을 묻어 주고 싶었다. 



기름기가 다 마를지라도 

더 넉넉하게 

젖꼭지를 물려 주고 싶었다. 



지친 채 누웠어도 

가물에 못 견뎌 

쭉정이로 돌아온 풀씨가 

가슴 아팠다. 

<해설> 

자연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은 우리 생명의 젖줄이며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흙은 우리의 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일러 줍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가 맺을 때까지 흙은 온갖 일을 해야 합니다. 불평을 말하거나 잘난 척 뽑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품 속에 태어난 것은 다 아끼고 다독이고 싶은, 모양이 일그러지거나 못 생겨도 그것을 덮어 주고 싶은 어머니, 쭉정이로 돌아온 풀씨를 보고 가슴이 아픈 어머니, 그래서 흙은 자연의 크신 어머니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슴에 비를 품었다가 목마르지 않게 해주고, 지쳐서 쓰러질지라도 곡식과 과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는 흙의 고마움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었나요? 이 시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젖꼭지입니다. 흙이 젖꼭지를 물려 주고 싶었다는 것, 그래요. 풀, 나무는 물론이고 사람도 흙의 젖꼭지를 물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흙의 힘은 그렇게 위대합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요? 그 말은 이 시를 새겨 보면 어려운 말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또한 이 시는 어머니의 큰 사랑을 함께 노래한 시입니다. 흙과 어머니! 그것은 푸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영원히 큰 사랑의 이름입니다. 2000.6.16(금) 소년 조선일보 아동문학관 난에 정두리 씀 

정현종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해설> 

누구나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떠올리는 곳이 섬이지요. 바다 내음과 파도 소리에 잠겨 모든 것을 잊고 머물고 싶은 그곳은, 배를 타고 가 닿을 수 있는 실재 공간이면서, 그러나 가지 못해 마음속에서 상상하곤 하는 상징 공간이기도 합니다. 구둣발에 밟히는 미생물에서조차도 즐겨 신성(神性)을 확인하고 탄복의 노래를 부르는 정현종(1939-)시인은 그곳을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했군요. 스스로 뿜어내고도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인간들의 빛과 향, 그것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유동적이고도 고독한 공간, 그 가까운 섬에 우리는 왜 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7/3(월) 소설가 박덕규 

이시영 

새벽 

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카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 먼동 트는 소리 

<해설> 

고요한 호수에 동이 틀 무렵 먹빛 어둠을 뚫고 붕어가 뛰어 오를 때가 있지요. 동이 트는 것을 먼저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물고기들은 몸을 솟구칩니다. 그때 들리는 경쾌한 소리는 새 세상을 알리는 신호같기도 합니다. 그 소리는 누구라도 들을 수 있지만 붕어의 아가미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지요. 하지만 자연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먼동 트는 소리까지 들리는가 봅니다. 밝은 눈과 귀를 가진 이시영(1949-)시인이 넓고 고요한 호숫가에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의 신비로운 움직임과 미세한 소리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7/4 (화) 문학평론가 이숭원 

조정권 

독락당 (獨樂堂)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 )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 버린 이. 

<해설> 

독락당 대월루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자의 뜻으로는 홀로 즐기며 달을 맞이한다는 의미인데 아마 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지 모르지요. 정신의 맑고 높은 경지를 추구해온 조정권 (1949-) 시인이 벼랑 끝의 한 은거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누각은 벼랑 멀리 보이기는 하지만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곳에 올라 집 한 채를 지은 후 속세와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자 내려오는 길을 부쉈던 것이지요. 시인은 현실의 울타리에서 멀리 벗어난 어떤 초월의 공간을 꿈꾸고 있습니다. 실제의 삶 속에서 맑은 자리를 찾기 어려울 때 그런 공간을 꿈꾸는 것이겠지요. 7/5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성복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 가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해설> 

어떤 감탄사로도 형용되지 않는 신비한 풍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수직으로 푸른 바다와 직면해 있으면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바다 빛과 어우러져 오묘한 색채를 빛내곤 하는 남해 금산이 그런 곳이지요. 그 앞에서 이성복(1952-) 시인처럼 간절한 사랑의 설화를 유추해 내는 사람도 있겠지요. 연인을 위해 기꺼이 돌 속에 함께 갇힌 한 사내가 어떤 숙명의 힘에 의해 연인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결국 푸른 바닷물 속으로 잠겨 드는 이야기입니다. 자연은 이처럼 자신을 속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슴 안에서 더욱 깊은 정취를 뿜어내게 됩니다. 7/6(목) 소설가 박덕규 

오선홍 

개망초 

깎아지른 벼랑 

돌 틈을 비집고 

저도 위험한 

하나의 풍경이 된다. 



홀로 피었다 

당당하게 사라지는 

개망초. 

<해설> 

개망초는 우리 나라 산야 어디든 자생하는 식물입니다. 여름에 작은 꽃이 피었다가 가을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지요. 깎아지른 벼랑에 돌 틈을 비집고 피어난 개망초가 오선홍(1964-) 시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평한 들판이 아니라 날카로운 벼랑에 피어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군요. 시인은 벼랑에 피어난 개망초가 스스로 하나의 위험한 풍경이 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존재의 접근을 거부하고 저 혼자 피었다 사라지는 당당함이 부러웠던 것이지요. 그런 당당함을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7/7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종삼 

새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가까이 와 지저귀고 있다. 

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천체에 반짝이곤 한다. 

아는 인왕산 한 기슭 

납작집에 사는 산 사람이다. 

<해설> 

일생을 떠돌이의 마음으로 살다 간 김종삼 (1921-1984) 시인의 시입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 왠지 마음이 찡하게 아려 오는데 이 시는 신비로운 새 소리를 들려 주고 있어 세상의 슬픔에서 잠시 비켜 나 있는 것 같네요. 하늘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새소리는 시인의 마음에 행복의 물결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행복에고 슬픔의 기운이 스며 있군요. 시인은 또 "언제 올지 모르는"을 두 번 반복했고 "이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 고운 소리가 들려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새소리가 안겨준 행복은 환상이고 세상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곳이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아려 옵니다. 7/8 (토) 문학평론가 이숭원 

조태일 

소가죽 북 

운동장에서 

학생들, 

북을 치고 있다. 

둥,둥,둥,둥,둥둥둥둥둥 



울타리 너머 

들판 

누렁소들, 

되새김질 멈추고 

맨살로 울고 있다. 

우움머어, 우움머어, 

둥,둥,둥,둥,둥둥둥둥둥 

<해설> 

아무 움직임도 없어 보이는 여름 한낮이군요. 너른 학교 운동장이 있고, 그 울타리 너머로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치는 북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멀리 퍼져 나갑니다. 북소리의 파장을 느낀 들판의 누렁 소들이 아연 되새김을 멈추고 '맨살로'울기 시작합니다. 북소리와 소 울음의 화음이 이토록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국토'에 쌓인 혼을 노래하다가 '국토'의 혼이 된 조태일(1942-1999)시인이 소의 희생을 암시하는 듯한 '소가죽 북'을 매개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울음을 절묘하게 뒤섞은 까닭이겠지요. 7/10 (월) 소설가 박덕규 

박형준 

공간 이동 

보도 블록을 밀고 나오는 뿌리 

뿌리는 하늘로 솟구친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로 흘러가는 세상은 지치지 않는다. 



모래시계의 허리가 가늘어진다. 

<해설> 

흙 먼지를 줄이기 위해, 도시 경관을 세련되게 하기 위해 땅 위에 깔아 놓은 보도 블록, 그 아래에서도 생명체는 자라고 있습니다. 보도 블록을 밀어낼 듯이 뿌리를 그 위로 내밀어 하늘로 솟구치는 풀들이 그 예이지요. 그러나 절망과 폐허의 시간을 오래 견뎌 온 박 형준(1966-) 시인은 놀라운 생명력을 쉽사리 노래하지 않습니다. 한결 둔중한 음색으로, 그런 생명력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지치지 않는 힘은, 모래시계의 가는 허리를 지나가는 모래처럼 무거운 벽을 뚫고 가벼움을 향해 가려는 존재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7/11 (화) 소설가 박덕규 



최문자 

고백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 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해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가 주는 상처를 알고도 그것을 감내하는 사랑의 노래를 즐겨 부르곤 하지요.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랑하는 이를 포근하게 감싸 주는 사랑의 이야기가 실로 가슴을 절절하게 할 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랑이고, 곧 참다운 사랑의 시일 수 있을까요? 최문자(1943-) 시인이 향나무와 그것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의 관계로 그 '막무가내'식 사랑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얹어진 희생, 순응, 포용 등의 가치가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위반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도, 그 사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시적 아이러니가 빛나고 있어 더욱 흥미로운 시가 되었습니다. 
7/129(수) 소설가 박덕규 

김영석 

이슬 속에는 

한 방울 이슬 속에는 

어디론가 끝없이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콩 꽃 같은 흰 옷고름이 

안스럽게 얼비치고 

가슴에 묻은 날카로운 칼날도 

눈물에 삭고 휘어 

이따금 찌르레기 소리에 반짝인다. 

<해설> 

한 방울 이슬에서 자연의 신비를 엿보는 사람도 있는데 김영석(1945-) 시인은 이 땅에서 한스럽게 살아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네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콩은 여름에 나비 모양의 꽃을 피우지요. 한 맺힌 사람들의 흰 옷고름을 콩 꽃에 비유한 것이 절묘합니다. 워낙 어렵게 살던 사람들이라 가슴에는 분노의 칼도 있었을 텐데 그것도 눈물에 무디어져 결국은 찌르레기 소리게 녹아 들고 있네요. 원한의 심정이 맑은 이슬이 되고 반짝이는 새소리로 바뀌는 놀라운 마술을 여기서 봅니다. 
7/13(목)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성선 

황홀 

오늘 아침 산이 

물방울 



음악이다 



세상이 꽃으로 피어난다 



이제 

더 갈 데가 없다 

<해설> 

산이 물방울로 보인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환히 비치는 물방울처럼 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다면 그 아름다움은 기가 막히겠지요.비 온 다음 날 아침 산의 모습이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음률의 조화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신비로운 음악과도 같지요.이렇게 꽃으로 피어나는 세상을 두고 달리 갈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완벽한 신의 솜씨 앞에 그저 숨 죽일 수밖에요.번잡한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자연의 묘미를, 설악산 기슭에서 살고 있는 이성선(1941-)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7/14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최승호 

물렁물렁한 책 

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은 물렁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반죽 덩어리. 그 물렁물렁한 책을 

베개 삼아 나는 또 시상(詩想)에 잠긴다. 

<해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전, 어떤 학자에 의해 한 권의 책이 저술되기 전, 그들의 머리 속에서 유동하고 있는 생각들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시에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을 아직 "반죽"중인 "물렁물렁한 책"이라 명명했군요. 존재하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에 "물렁한" 질감이 부여되면서 그것이 우리 삶 속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존재 아닌 것들도 존재하는 것이라는, 무정형의 혼돈이 더욱 완벽한 질서라는 그런 사유를, 최승호(1954-)시인은 한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는 일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7/15 (토) 소설가 박덕규 

이재무 

신발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않아도 되던 날부터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간 친구여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간 꿈이여 

<해설> 

요즘에는 신발 크기를 밀리미터로 표시하지만 옛날에는 문이라는 단위로 표시했지요. 어릴 때는 발도 빨리 커져서 10문짜리 신을 신다가 얼마 안 되어 문수가 큰 새 신을 사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이 되니까 신발 문수를 바꾸지 않아도 되더군요. 그때 이후 많은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어릴 때는 꿈도 많았는데 그 많던 꿈도 내 곁을 떠나갔어요. 다정했던 친구들, 가슴 속의 꿈들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요? 이재무(1958-)시인의 시를 읽으니 잊혀졌던 기억들이 연기처럼 아련히 떠오릅니다. 7/17(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송찬호 

동백이 활짝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 물고 

땅으로 뛰어 내리기 전에 

<해설> 

꽃이 활짝 핀 모습을 사자가 네 발과 붉은 갈기를 펼치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것에 비유했군요. 그 때문에 꽃의 붉은 빛이며, 만개(滿開)하는 모습이 선연하게 느껴집니다. 자연의 변화 중에서도 그 절정의 환희는 참으로 일순간의 일이지요. 예술가들은 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서둘러 상상력을 집중합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는 지금의 시간 모두가 절정의 한 지점이 아닐까요? 쉽게 지나치는 소중한 우리의 시간에 대해 각성하게 하려는 뜻에서 송찬호(1959-)시인이 돌올한 이미지로 동백꽃의 개화 장면을 그려 놓은 것일 테지요. 7/18 (화) 소설가 박덕규 

정일근 

유리창 청소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 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 놓은 

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해설> 

정일근(1958-) 시인이 중학교 교사 시절 쓴 시입니다. '열이'라는 학생은 지적으로는 조금 늦되 보이지만 누구보다 착하고 맑은 심성을 가졌네요. 꼬부리지 않고 정성껏 유리창을 닦아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을 한 폭 그림처럼 떠오르게 했습니다. '다정한 형제섬'이란 표현이 마음을 순하게 하지요? 유리창에 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선생님과 열이가 다정한 형제처럼 손잡고 웃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착하고 맑은 사람들이 모여 사랑으로 가르침을 주고 받는 교실이 그립습니다. 7/19(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선영 

알락도요새 

연못 위에 떠다니는 

나뭇잎을 발바닥 삼아 

연못을 콩콩 튀어 다니며 

제 존재의 그토록 가벼움을 맘껏 즐기는 



내 존재의 무게를 타고 앉아 콩 콩 콩 

발장구 치는 

<해설> 

봄 가을로 한 차례씩 우리 나라의 물가에 머물다 지나가는 나그네새인 알락도요새가 연못의 풀숲에서 놀고 있는 장면입니다."나뭇잎을 발바닥 삼아 연못을 콩콩 튀어" 다니는 모습이 참 경쾌하군요. 지상에 와서 놀면서도 마치 이 지상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는 듯한 그 몸놀림에 비하면, 한 시도 지상을 떠날 수 없는 인간은 얼마나 무거운 존재인가요. 이선영(1964-)시인이 알락도요새의 한가로운 한때를 "콩콩"튀는 탄력적인 감각으로 드러내면서 그 속에다 제 무게를 견디느라 힘겨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7/20(목) 소설가 박덕규 

심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돌아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해설> 

변변한 잠자리채마저 없던 시절 아이들은 싸리빗자루를 들고 잠자리를 잡으러 다녔지요. 정신 없이 놀다 보면 어느새 여를 한낮이 다 가고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사과처럼 익어 돌아왔습니다.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났지만 새참도 모자라던 시골에 먹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가난과 궁핍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심호택(1947-) 시인은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 속에 피어오르던 동심의 천진함과 인간다운 정겨움이 못내 그리운 탓이겠지요. 그 아름다운 시절이 지금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요? 
7/21(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문인수 

비밀 

급행 지나는, 손살같이 내닫는 숨가쁜 도중 

추풍령 아래 

푸른 행간에 

하품하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가니역 

<해설> 

우리는 휴가 철의 급행 열차처럼 자신의 목적지에 빨리 가 닿아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돌아보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몰두하는 삶이 가장 값지다고 믿지요. 하지만 그 삶의 터전이 되고 배경이 된 자잘한 존재들과 그것들과 맺은 이런 저런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열차 창 밖으로 하품하듯 스치는 간이역 같은 풍경이 속살 깊은 내면에 쌓인 때라야 새로 만나는 세상은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당신에게도 그처럼 삶을 풍요롭게 하는 비밀이 진정 있지 않겠느냐고, 문인수(1945-) 시인이 묻고 있습니다. 7/22 (토) 소설가 박덕규 

나태주 

기쁨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 

<해설> 

난초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온도가 적절해도 잎이 마른다고 해요. 그러니까 난초의 잎은 우리들이 모르는 어떤 밀접한 관계를 허공과 맺고 있는 셈이지요. 자연의 은밀한 아름다움을 노래해 온 나태주(1945-)시인의 눈은 평범한 난초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이처럼, 휘어진 이파리가 허공에 몸을 기대고 허공은 그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 장면을 보았어요. 난초 잎에서 잔잔한 기쁨의 강물을 발견한 시인의 안목이 놀랍습니다. 7/24(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춘수 

부두에서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해설> 

바다에서 일하고 귀가하는 부두 사나이들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지요. 김춘수(1922-) 시인은 그것을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바다'로 표현했습니다. 사나이들이 일하던 실제의 바다에서, 사나이들이 가져옴으로써 느낌만으로 존재하게 된 바다로 변화한 기묘한 상태가 펼쳐졌습니다. 바다는 원래 깨지고 부서지고 물개들과 상어떼가 어울리는 곳인데, 그것에서 떠나온 바다가 이제 그런 통념적인 의미를 벗어서 더욱 '온전한' 상태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생생한 자연, '날것' 상태의 존재란 이렇듯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고정 관념을 깰 때라야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7/25(화) 소설가 박덕규 

장석남 

뻐꾸기 소리 

깜빡 

낮잠 깨어나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봉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 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꽃빛만 같이 



사랑도 꼭 그만큼쯤에서 

그 빛깔만 같이 

<해설> 

어느 날 낮잠을 자다 깨어나서 흰 창호지에 붉은 봉숭아 꽃 빛이 비친 것을 보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결에 보이는 연분홍 빛이 얼마나 신비롭겠습니까? 사물의 그늘에 눈길을 돌려 온 장석남(1965-) 시인이 그 은은한 빛깔로 사랑의 색조를 표현했습니다.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사랑, 의도적으로 꾸며내는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하지요. 그런데 시의 제목은 뜻밖에 '뻐꾸기 소리'예요. 멀리서 뻐꾸기 소리 들려 오듯이, 봉숭아 꽃잎 은은히 우러나듯이, 그렇게 아련하게 다가오는 사랑을 기다린다는 뜻이겠지요. 
7/26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백 석 

비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해설> 

농촌이나 산골 서민들의 삶을 북방 지역의 토속적인 어휘에 실어 이야기하듯 노래한 백석(1912-?) 시인의 초기 시입니다. 자연의 정황을 특정한 감정 부여 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실재감을 물씬 느끼게 하는 시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지요. 어느덧 몰려 와 있는 비의 계절을, 아카시아 꽃들이 만발한 숲길에서 곧 쏟아질 것만 같은 '비' 냄새로 예감하는 때의 표현이 볼 만하군요. '두레방석'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수 있는 방석) '물쿤'(냄새가 확 풍기는 모양을 뜻하는 '물큰'의 사투리),'개비린내'(바닷물이 드나드는 때의 비린내) 등 사라진 말들의 쓰임이 이 시에 싱싱한 기운을 돌게 합니다. 7/27 (수) 소설가 박덕규 

김광규 

종 

동록이 슬은 구리의 침묵 깨뜨려 

몇백 년 간직해 온 함성과 신음 되살려 주고 

그윽한 울림 사라지면서 

더욱 큰 고요를 남기는 듯 

<해설> 

새벽의 산사에서 범종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몇 백 년의 세월을 거쳐 파랗게 녹이 슨 종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그 표면을 때리면 놀라운 소리가 울려납니다. 평범한 대상에서 생의 비밀을 탐색해 온 김광규(1941-) 시인은 그 소리에 많은 사람의 함성과 고통의 신음이 담겨 있다고 보았어요. 하지만 함성과 신음의 울림도 잠시뿐 소리가 그치면 더욱 큰 고요가 남습니다. 그렇다면 종의 본질은 함성일까요 고요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침묵과 함성이, 신음과 고요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닐까요? 
7/28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도광의 

샐비어 

더운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 봅니다. 

햇볕도 편애하듯 

가는 숨결로 타고 있습니다. 

하늘 속 빗방울로 

가슴을 씻고 

피 흘리며 타고 있습니다. 

아빌라, 

모든 것을 사죄해 주십시오. 

살아 있는 남자에게 

남은 할 일은 

저무는 한역(寒驛)에서 

눈을 감는 일입니다. 

<해설> 

붉은 빛으로 짙게, 꽃밭 가장 자리를 수 놓은 샐비어를 아시는지요? 그 꽃을 따서 단 맛을 빨아 먹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요. 도광의(1940-) 시인은 뜨거운 햇볕을 받고 더욱 붉어지는 샐비어의 모습에서, 피 흘리듯 정염(情炎)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을 봅니다. 어떤 운명이 마음을 이끄는 대로 생을 맡기고 스스로를 소진하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군요. 그런 사람이 없다면 시가 있을까요? 그렇게 삶을 내던지고 고개 숙인 그에게 신이 어떤 죄값을 치르게 할런지 궁금합니다. 7/29 (토) 소설가 박덕규 

이홍섭 

불타는 섬 

외로움이 힘이 되어 

힘 없는 응시가 어느덧 사랑이 되어 

저렇게 

활활 타오르는 섬 

<해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은 오갈 데 없이 고립되어 있는 인간 모습과 흡사하지요. 섬처럼 외로운 존재가 어느날 누군가를 응시하고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외로움이 클수록 그리움과 사랑은 더욱 강하게 불타오르지요. 그러나 아무리 상대를 바라보며 사랑으로 몸부림쳐도 고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끝내 '불타는 섬'으로 머물 뿐이지요. 이홍섭 (1965-) 시인은 인간 존재를 섬에 비유하여 외로움의 자각이 사랑의 열망으로 바뀌고 그것이 고독의 가혹한 심연으로 깊어지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7/31(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형영 

압록강 
-김주영 형에게 

무너진 국내성을 돌아 

압록강 선착장에서 

밤 늦도록 바라보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죄가 되던 강물이여 



하늘에 등을 단 

달빛 때문에 

달빛 때문에 

매 갈 길을 막고서 

밤에도 흐르는 강물이여 

<해설> 

고구려의 옛 영광 국내성을 돌아 압록강 선착장에 닿는 관광 코스가 있지요. 압록강변 조상들의 생애를 다룬 소설 '야정(野丁)'(김주영 작)을 읽으며 그곳으로 여행을 떠난 김형영(1944-)시인이 이 강 앞에서 처연하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강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그 조상의 후손들은 지금 어떤가요? 역사는 단절되고 민족은 헤어졌습니다. 그걸 생각할수록 우리는 옴쭉 달싹할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맙니다. 민족의 현실을 자기 안에서 인식함으로써 죄값을 치르고 있는 시인의 내면이, 달빛 아래 강물 흐르는 자연의 오랜 운행과 어우러져 장엄한 음악 소리를 내고 있는 듯합니다. 8/1 (화) 소설가 박덕규 

강현국 

고요의 남쪽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 나온 길은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 

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 

길은 또 한 번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온 몸에 고추장을 뒤집어 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 

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해설> 

이 시에는 몇 가지 이채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길이 산비탈로 자지러진다든가, 고추장을 뒤집어쓴 애잔함이라든가, 고요의 남쪽에 방석만큼 비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시인이 보여 주는 것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입니다. 떡갈나무 그늘을 거쳐 황토 산비탈로 사라지는 길이 있고, 길 위에는 고요가 감돌고, 길 저편에 흐르는 섬진강 줄기에는 처연한 애잔함이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강현국 (1949-) 시인은 평범한 풍경에서 고요 속으로 파고 드는 애잔함을, 민족의 내면에 흐르는 정한의 물살을 본 것이지요. 
8/2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강은교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 벽 속의 편지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가네 

땀에 젖은 지붕이 

헐떡이며 

새를 쳐다보네 



그대는 새인가 

너무 큰 구름 떼 속으로 

날아들어가는, 

<해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눈앞에서 흘러 들어가던 때,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다투어 뛰어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과연 어떤 태도가 옳았을까요? 짙은 허무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발견한 강은교 (1945-) 시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망설임 없이 그 큰 흐름으로 뛰어든 사람만이 그 답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을 본 사람만이 그 답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을 본 사람만이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요. '큰 흐름 속에서 '나를 찾아라'하는 교훈도 되새겨 보세요. 자, 우리 앞의 물줄기를 보고 있는지요? 99.8.3(목) 소설가 박덕규 

오규원 

칸나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 올리고 다시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 동안 퍼부었다 

<해설> 

이 시를 읽고 무슨 이런 싱거운 이야기를 했나 의아해 하는 분이 있겠지요. 시는 꼭 의미 심장한 무언가를 담아 내야 하나요? 진실은 오히려 평범한 자리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요.어느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말을 했고, 평상심이 곧 진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칸나 꽃이 필 때 무슨 신비로운 이변이 일어날까요? 잠자리가 날고 우연히 소나기가 퍼붓는 등, 지극히 평범한 일들이 반복될 따름입니다.오규원(1941-) 시인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현상의 국면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실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8/4 (금) 문학평론다 이숭원 

박해석 

익사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길래 

몽뚱이 하나로 온 강물을 적시게 하였느냐 

얼마나 깊은 괴로움이 있었길래 

온 강물이 합심하여 몸뚱이 하나 

눈부신 햇살 아래 뉘어 놨느냐 

<해설> 

소중한 꿈을 키워 나가야 할 사람이 뜻하지 않은 운명 앞에 목숨을 내놓고 만 것을 볼 때가 있지요. 박해석(1950-) 시인이, 생을 연장하려는 사람의 몸부림과,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하는 강물의 거친 물살이 맞부딪쳐 빚어낸 그 비극의 현장을 포착했습니다. 비록 끊어져 버린 생명이지만, 그 사람이 온몸으로 '슬픔과 괴로움'을 견뎌낸 세월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지요. 살아 남은 사람들의 남아 있는 시간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슬픈 감정을 겉으로 억제해 보이는 시적 방법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8/5 (토) 소설가 박덕규 

이호우 

휴화산 

일찍이 천 길 불길을 

터뜨려도 보았도다 



끓는 가슴을 달래어 

자듯이 이 날을 견딤은 



언젠가 있을 그날을 믿어 

함부로치 못함일레. 

<해설> 

사소한 불만을 무절제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잠자듯 침묵을 지키다가 세상이 놀랄 만한 분노의 육성을 터뜨릴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귀를 기울이지요. 분노의 표출, 열정의 폭발에도 적절한 시점이 필요한 법이지요.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언젠가 있을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의 시련을 참고 견디는 견인(堅忍)의 정신력이 요구됩니다.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이호우(1912-1970) 시인이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정신의 높이를 휴화산에 비유하여 나타냈습니다. 
8/5(월)문학평론가 이숭원 

윤제림 

개미집 

베짱이처럼 그늘에서 

잠만 잔 게 아니냐구요? 

기타 치며 노래나 부른 게 

아니냐구요? 



개미처럼 일했다며, 왜 

집 한 칸 없느냐구요? 

<해설> 

'무얼 하고 살았기에 여태 자기 집도 없이 사느냐?'는 식의 물음에 곤혹스러움을 겪는 사람들이 참 많더군요. 집 장만을 못 한 사람에겐 언제나 그 게으름이나 무능을 공박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화 속의 부지런한 주인공 개미도 어느새 궁지에 몰려 버렸군요. 그런데, "아니냐구요?"하는 개미의 거듭되는 반문이 의외로 당당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많은 돈과 큰 집과 멋진 차가 있는 삶보다 하찮은 '개미집'의 소박한 성취가 더 값지다는 사실을 윤제림 (1959-) 시인이 풍자적인 어법으로 재치있게 깨우치고 있는 중이지요. 8/11(토) 소설가 박덕규 

황동규 

더욱 더 조그만 사랑 노래 

연못 한 모퉁이 

나무에서 막 벗어난 꽃잎 하나 

어마나 빨리 달려 가는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금시 떨어지는지 



꽃잎을 물위에 놓아 주는 

이 손. 

<해설> 

이 시에 제시된 상황을 머리에 그려 봅시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꽃잎이 바람에 나부껴 연못 저 편으로 달아나는 장면을, 천방지축 달려가는 꽃잎을 잡아 물위에 곱게 놓아 주는 손을, 그러면 연못의 물결에 실려 곱게 일렁이는 꽃잎의 흔들림이 연상되기도 하지요. 지적인 방법으로 대상을 재구성해 온 황동규 (1938-) 시인이 '달려가는 꽃잎'과 '놓아 주는 손'의 대비적 관계를 독특하게 설정했습니다. 자유분방한 몸 놀림은 급격한 추락으로 끝날 위험이 있지요. 그것을 염려하여 존재가 머물 수 있는 안정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8/9 (수) 문학 평론가 이숭원 

오세영 

미명 (未明) 

소낙비가 난초 잎을 두드린다. 

심금을 울리며 

닫혀 있는 사물의 문을 연다. 

소낙비가 번개를 몰고 

잠든 흙을 깨우고 있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비에 적시며 

가냘픈 줄기로 미명을 열고 있다. 

<해설> 

신 새벽 동트기 전 소나기 한 줄기가 지나갑니다. 연약한 난초 잎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잠자듯 고요했던 난초 잎도 마음의 문을 열고 신생의 기지개를 켜는 듯합니다. 번개까지 번쩍여 잠든 흙을 깨우고 있군요. 
소나기에 몸을 적신 난초 줄기는 가냘퍼 보이지만 그 연약한 줄기를 끄덕이며 미명의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지만 모든 생명 가진 존재는 미명(未明)을 여명(黎明)으로 바꾸는 노력을 멈추지 않지요. 존재의 비밀을 탐색해 온 오세영 (1942-) 시인이 미명을 여는 생명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8/10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정인섭 

꿈 

꿈이 감은 눈으로 고통을 본다 

내 상처에서 날마다 물을 긷는 당신이 



아침엔 물 한 동이로 달을 씻고 

저녁엔 물 반 동이를 나무에 쏟는다. 

<해설> 

누구에게나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가 있게 마련이지요. 가람들은 간절한 기도로 그것을 씻으려고도 하고, 또 그럴수록 더한 정신적 고토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한 어느 순간 그 고통에서부터 새로운 깨침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수도 중인 정인섭 (1955-) 시인의 상처에서 '날마다 물을 긷는 당신'이 곧 그 깨우침의 상징인 셈이지요. 자기 고통의 피에서 끝없이 물을 길어내 이 세상을 위해 뿌려 주는 일이 '당신'만의 몫이 아닐 테지요. 그 일은, 그 일로써 스스로의 고통을 씻어야 할 우리들 각자의 꿈이 되어야 합니다. 8/11(금) 소설가 박덕규 

이경림 

사람 지나간 발자국 

아름다워라 나 문득 눈길 머물러 

그것의 고요한 소리 보네 

누군가 슬쩍 밟고 갔을 

저 허리 잘록한 소리 

한참 살다 떠난 부뚜막 같은 

다 저문 저녁 같은 

<해설>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머물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살다간 사람의 흔적을 보았군요. 그때의 기이한 놀라움을 이경림 (1947-) 시인이 희미한 연기 속에서 조금씩 형체를 나타내는 산골 풍경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죽은 자연처럼 있던 집이 부뚜막의 온기나 굴뚝 연기로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하는 미세한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 오는군요. 조금 더 귀기울이면, 모양과 소리로 빚은 "허리 잘록한"절묘한 소리도 들려올 테지요. 사람이 사람 지나가는 발자국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다니, 이것만으로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뜻 아닐까요? 8/12 (토) 소설가 박덕규 

정진규 

물소리Ⅰ 

너의 나라를 네 몸의 나라를 네 영혼의 나라를 

속속들이 핥고 있다 지금 너를 부르는 너의 목 

소리가, 그렇다 너의 생음(生音)이 비로소 깊고 

아름답다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너의 옴 몸은 

언제나 물기에 젖어 있다 이 여름 땡볕 속을 

혼자 걸어도 언제나 물소리를 듣고 있다 너를 

듣고 있다 

<해설>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던 그 그리움만으로 상대방의 모습이 오롯이 떠오르지요. 상대의 몸과 영혼 깊은 곳까지 직접 어루만지는 것 같은 밀착된 감각을 얻을 수가 있어요. 내가 너를 부르는 소리가 물소리가 되고 거기 응답하는 네 몸도 물소리를 낸다면 너와 나 둘 사이에 그리움의 수로를 타고 시원하게 물이 흐르는 장면도 상상할 수 있지요. 찌는 듯한 여름 땡볕 속에 이런 물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훨씬 싱그러워지네요. 정진규 (1939-) 시인이 들려 준 싱싱한 사랑의 물소리를 당신도 한번 울려보지 않으시렵니까. 8/14 (월) 문학평론가 이숭원 

문정희 

무궁화 

꽃을 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중중모리 삼삼한 가락 흔들고 있다. 



말 못할 몸짓 

흰 꽃으로 피워 놓고 



날 보고도 말도 걸지 못한다 

이국 땅 골목길에 무궁화가 피었다. 

<해설> 

문정희 (1947-)시인이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 어느 골목에서 우연히 무궁화꽃 핀 것을 보았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득한 타향에서 눈에 익은 그 꽃을 보았을 때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헤어졌던 혈육을 만난 듯, 정든 이웃을 만난 듯 가슴이 뭉클했겠지요. 그 무궁화도 가슴이 막힌 듯 나를 보고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합니다. 흰 꽃을 피우고 중중모리 가락으로 흔들릴 뿐 아무 말이 없는 무궁화에서 시인은 가슴속에 피어나는 모닥불을 확인했습니다. 이 모닥불의 온기가 우리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8/15 (화)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수복 

망개 덩굴 옆에서 

망개 덩굴에 그대 귀걸이가 걸렸다 

손에 닿을 때까지 

온몸을 밀어 넣어도 

아득한 햇살만 손등에 찔려 온다 



그대의 마음에 

그대의 사랑에 

그대의 조국에까지 

들어박혀 있는 망개 덩굴 속으로 

손이 닿을 때까지 

온몸을 밀어넣는다 

<해설> 

빤히 눈 앞에 두고도 손이 닿지 않아 잡지 못하는 물건이 있어 애태운 적 있지요. 이 시에는 어떤 산행 중에 망개덩굴에 걸려 버린 귀고리를 건져 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손등을 찌르는 햇살'로 그려져 있습니다.귀고리의 주인이 '그대'이니까, 그것에 손닿게 하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할 테지요. 김수복(1953-)시인은 이러한 안타까움의 체험을 이룰 듯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데 못 만나는 우리 모두의 염원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거친 망개덩굴 속으로 온몸을 밀어넣는 모습이 뜨겁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8/16 (수) 소설가 박 덕 규 

고재종 

출렁거림에 대하여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 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니 물살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 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한 시간들이 마냥 추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해설> 

어떤 뜻깊은 만남은, 오래도록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요.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여 있을 동안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지요. "너를 만나고 온 날"의 그런 기쁨을 노래한 고재종(1957-)시인의 시를 따라 읽으니,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이 가득 출렁거리던 그때의 마음이 되는군요. '네 가슴 한 올에 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내 가슴" 과 같은 감상적인 표현이, 강변의 조약돌이며 총총 핀 패랭이꽃이 만드는 토속적인 분위기에 녹아들면서 더 생생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를 만나 이렇게 "출렁거리는" 것일까요? 8/17 (목) 소설가 박덕규 

이수익 

초당 한 채 

마음에 

초당 한 채 짓자. 

혼자만, 혼자서만 있고 싶은 시간 

은밀히 드나들게 

마음의 변두리 어느 한적한 터에 

불빛도 없고, 기척도 없는. 

<해설> 

지금은 시골에서도 초당을 보기 힘듭니다. 언제나 짚으로 지붕을 얹은 조그마한 별채가 초당이지요. 절제된 언어고 정갈한 공간을 추구해 온 이수익 (1942-) 시인이 마음에 초당을 짓자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주위를 비추는 불빛도 없고 사람 드나드는 기척도 없는 한적한 초당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다면 평소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지도 모르지요. 초당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번잡한 도시에서 저마다 마음에 초당 한 채 마련한다면 우리의 내면은 더욱 그윽해지겠지요. 8/18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복효근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 

그럴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나 

<해설> 

'궁그는'은 '구르는'의 전라 방언입니다. 넓은 토란잎에 빗방울이 떨어져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동그랗게 구르는 모양을 연상해 보세요.복효근 (1962-)시인은 그 장면을 동화적 시각으로 재구성했어요. 어린애처럼 둥글둥글 구르다가 잠든 토란잎 배꼽 위에서 함께 잠자는 물방울을 상상해 보았지요. 그렇게 토란잎과 어울리다가 사라질 때가 되면 토란잎이 털어내기 전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그 산뜻한 처신이 바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과 흡사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묻고 있습니다. 8/19 (토) 문학평론가 이숭원 

정끝별 

밀물 

가가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하서 

<해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욕되게 느껴지는 때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가가스로' 살아남아, 무수한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지나온 그 세월을 되돌아보는 일이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정끝별 (1964-)시인이 '밀물이 미끄러지듯 항구에 닿은 두 척의 배'의 사연으로, 헌한 길 함께 걸어온 두 사람의 인간사를 들려 줍이다. 그들의 '바다가 잠잠'하기만 했을 리 없지요. 다 드러난 깊은 상처를 서로 쓰다듬으며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었다.'며 다독거리는 두 사람의 표정이, 여느 연인끼리의 눈길보다 은밀하고 그윽하게 느껴지는 까닭을 아기겠지요? 8/21(월) 소설가 박덕규 

송종규 

섬 

세울아 하고 부르면 부시시 일어날 것만 같은 

바위며 이끼들 

세월아 하고 부르면 풀썩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내 살 속의 뼈와 조개의 무덤들 

달빛 혹은 차디찬 바람이 여백을 꼭 채운다. 

기꺼이, 아주 기꺼이, 돌멩이 굴리는 파도 소리 있다 

누군가 돌아선다 

바다는 너무 멀다. 

<해설> 

섬이 인간의 외로움을 표상한다는 것은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이 섬의 정경은 조금 특이하네요. 바위며 이끼 조개 껍질 등은 세월의 풍화를 많이 입은 듯퇴락한 모습이고, 빈 여백은 달빛과 찬 바람이 메우고 있어요. 파도도 가볍게 철써이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 굴리는 소리를 냅니다. 이 활량한 공간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바다조차 멀리 떨어져 있군요. 송종규(1952-) 시인이 그려낸 황량하고 쓸쓸한 내면 풍경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8/22(화) 문학평론가 이숭원 

고두현 

횡단보도 

너 두고 

돌아가는 저녁 

마음이 백짓장 같다. 



신호등 기다리다 

길 위에 

그냥 흰 종이 띠로 

드러눕는다. 

<해설>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헤어져 돌아가고 있는 한 사람이 있군요.피할 수 없는 이별을 온몸으로 겪어 내느라 넋이 빠진 표정을 짓게 되었습니다.님을 잃고 우는 슬픈 사랑의 노래들이 많지만, 고두헌 (1963-)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도시의 일상 속에서 이별을 경험하는 내용을 펼쳐 보이네요. '백짓장 같은마음'에서 '횡단보도'의 흰 띠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전이가 그 이별의 슬픔을 더욱 구체적인 일로 느끼게 해 줍니다. 함께 있어야 할 소중한 사람 곁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겪어야 하는 것인지요? 8/23 (수) 소설가 박덕규 

허형만 

시 

사람의 힘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태우고도 

남는 게 있다면 그것마저 버려야 

비로소 우리 가슴에 뜬 

생명의 별 하나 

따뜻한 숨결을 내뿜느니. 

<해설> 

선사가 오랜 고행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시인들은 결코 길지 않은 한 편의 시를 위해 자신의 정신과 감각을 모질게 채찍질하곤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잡념을 씻으며 자아를 온전히 태울 따 이윽고 가슴에 뜨는 '별'이 곧 시인에게는 참된 '시'라 할 수 있지요. 과연 그런 시를 얻기 위해 얼마나 태웠는가 하고 허형만(1945-) 시인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군요. 그 물음은 우리에게는 이렇게도 들리는군요. '사랑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확신도 없이 어찌 그런 시를 만나려고 하는가?' 시는 언제나 사랑의 증거가 될 테지요. 
8/24 (목) 소설까 박덕규 

김종철 

호박꽃에 대하여 

호박꽃이 피었습니다 

호박꽃 하면 노란색이 보입니다 

빨간색 흰색 어쩌면 하늘 색 호박꽃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호박답지 않아 생각을 멈춥니다 

치장을 해도 잘 보이지 않는 덤덤한 마누라처럼 

우리 뒤에 누워 있습니다 

그래도 꿀벌은 어김 없이 찾아 옵니다 

<해설> 

호박꽃 하면 먼저 못 생긴 꽃을 떠올리지요. 커다랗게 늘어진 모양과 너무 눈에 익은 노란 빛깔 때문일까요? 하지만 호박꽃은 역시 노란색이 어울리지요. 화려한 빛깔만 가득하다면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질 거예요. 덤덤하고 수수한 호박꽃도 있어야 마음 편해지지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핀 호박꽃이지만 꿀벌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꽃이 떨어지면 커다란 호박도 믿음직스럽게 익어 갑니다. 이렇게 평범하면서도 분명한 자연의 이치를 김종철(1947-) 시인이 호박꽃을 통해 나타냈습니다. 8/25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산하 

부화 

알 속에서는 

새끼가 

껍질을 쪼고 

알 밖에서는 

껍질을 쫀다 



생명은 

그렇게 

안팎으로 쪼아야 

죽음도 

외롭지 않다 

<해설> 

안팎의 두 존재의 힘이 함께 알 껍질에 작용될 때라야 '새'는 온전한 생명체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모든 생명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삶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말인 듯하다가, 갑자기 "죽음도 외롭지 않다"로 이은 비약이 놀랍습니다. 안팎의 '쫌'이 이룬 생명의 그늘에서 발견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지요. 이산하 (1960-) 시인은,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존재를 말해서 안팎의 두 힘의 호응처럼 생명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움직임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는 셈입니다. 8/26 (토) 소설가 박덕규 

감태준 

아름다운 나라 

거기가 어디지?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기, 

우리 손 잡고 찾아 갔다 번번이 

길을 잃고 돌아온 거기, 

눈 감으면 불쑥 

한 발자국 앞에 다가서는 거기 

<해설> 

사람들은 언젠가는 행복한 세상을 만나리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희망의 세계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지의 아름다운 나라를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잃고 돌아왔지요. 차라리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선다면 현재의 상황에 만족할 텐데. 묘하게도 사람들은 희망과 꿈을 버리지 못합니다. 눈을 감으면 그 아름다운 나라가 바로 코 앞에 있는 것 같거든요.감태준 (1947-) 시인이 그런 인간 내면의 움직임을 간명한 시어로 나타냈습니다. 8/28(월) 평론가 이숭원 

황인숙 

원무(圓舞) 

간다. 누군가를 

낯선 것들을 

익숙한 것들을 

만나러 

간다. 

익숙한 것들을 

낯선 것들을 

떠나 

간다. 낯선 것들을 

익숙한 것들을 

<해설> 

돌고 도는 게 인생이라고들, 체념하듯 자조하듯 말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인생이 그런 것이 사실이라면, 돌고 도는 인생의 바퀴를 스스로 힘차게 돌려나가는 것은 어떨지요? 지독한 슬픔조차도 경쾌한 운율로 노래해서 '비극과 환희'가 어우러지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황인숙(1958-)시인이 기꺼이 인생의 '원무'를 안무합니다. 떠남과 만남,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서로 상반되는 그런 것들이 거듭 맞물리는 인간사를 표현 형식의 단순 반복을 통해 한 판 '시의 춤'으로 꾸몄습니다.자, 우리 인생의 춤은 어떻게 추어야 할까요? 
8/29(화) 소설가 박덕규 

김명인 

등꽃 

내 등꽃 필 때 비로소 그대 만나 

벙그는 꽃봉오리 속에 누워 설핏 풋잠 들었다 

지는 꽃비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면 

어깨에서 가슴께로 

선명하게 무늬진 꽃자국 무심코 본다 

달디 달았던 보랏빛 침잠, 짧았던 사랑 

업을 얻고 업을 배고 업을 낳아서 

내 한 겹 날개마저 분분한 낙화져 내리변 

환하게 아픈 땡볕 여름 알몸으로 건너 가느니 

<해설> 

아무리 짧은 인연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깊은 자취를 남깁니다. 설핏 풋잠 든 사이에 맺어진 살라이라 하더라도 그 잠깐의 인연은 '어깨에서 가슴께로 선명하게 무늬진' 자국을 남기지요. 짧은 사랑 뒤에도 오랜 고통이 이어집니다. 알몸으로 땡볕 여름을 건너는 고통이. 그러나 사랑이 남긴 쓰라림은 황홀한 것일까요? 김명인 (1946-)싱인은 '환하게 아픈' 이라는 묘한 표현을 통해 고통도 기쁨일 수 있음을 암시하였습니다. 어쩌면 인간 모두가 그런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지요. 8/30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허수경 

기차는 간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네 몸 속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해설> 

북적거러던 역에서 기차는 떠나가고, 혼자 돌아오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별은 냉혹한 현실이라 사랑의 흔적을 어서 지워야 합니다. 허수경 (1964-)시인이 일찍이, 부의 축적이 생의 지표가 되던 1970,80년대 , 산업도시의 그늘에서 흔하던 사랑을 '체험화' 했지요. 가난할수록 깊어진, 그래서 만나지 못해도 그 그리움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닮게 된 사랑은 '내 몸'과 '너의 몸'의 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기에 모든 이의 것이었지요. 그 묵묵하던 사랑의 모습을, 오늘 떠나가는 사람을 보며 다시 그려 보세요. 8/31 (목) 소설가 박덕규 

정완영 

난보다 푸른 돌 

옛날엔 칼보다 더 푸른 

난(蘭)을 내가 심었더니 



이제는 깨어도 잠 깊은 

너 돌이나 만져 본다. 



천지간 어여쁜 물소리 

새소리를 만져 본다. 

<해설> 

젊은 날에는 꺾이지 않는 개걸한 정신을 추구하다가도 나이 들면 많은 것을 포용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지요. '칼보다 더 푸른 난' 이란 말에는 매섭고 단호한 정신의 서슬이 버쩍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돌을 어루만지는 경지는 어떠한가요? 돌은 난처럼 날카롭지 않고 잠자는 듯 고요히 자리를 지킬 뿐이지요. 정완영(1919-) 시인은 돌의 침묵을 통하여 어여쁜 물소리와 새소리를 '만져 본다'고 했습니다. 소리도 유형화시켜 만져 보는 차원이라면 세상의 날카로운 것들도 그 속에 부드럽게 녹아들고 말겠지요. 
9/1(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송수권 

우니야, 우니야 

고추잠자리 날개가 서느러운 날 

누렁 개꼬리 같은 조 이삭이 한 밭 



조 이삭 위로 솟아난 수수 모감 몇 대 

참새떼 소리 한 밭 



저런저런…… 

수수 모감이 다 휘어지네! 



우니는 어디 간 거라니 

조밭에 새는 날리지 않고. 

<해설> 

며칠 전 근교에 나가 정말 '누렁이 개꼬리'같은 조 이삭을 봤습니다. 조보다 훤칠한 수수 이삭도 여물고 있더군요. 꼬리에 꼬리를 물듯, 9월에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들을 불러내는 송수권 (1940-) 시인의 노래에는 이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조 밭의 참새떼를 '소리 한 밭'으로 시각화해 놓은 것도 즐겁지 않습니까? '우니'는 뭘까요? 예닐곱 살의 여자 아이가 연상되는데요. 그 아인 곧잘 울곤 했을 것 같습니다. "저런저런……"하는 혼잣말 같은 말투에 배인 안타까움과 가벼운 투정도 정답지 않습니까? 9/2(토) 시인 정끝별 
정운모 

나무 

나무는 

청진기 



새들이 

귀에 

꽂고 



기관지가 

나쁜 



지구의 숨결을 듣는다. 

<해설> 

자 우리에게 풍요로움과 아름다움만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요즈음처럼 지구 도처에서 일어나는 홍수나 산불을 볼 때면 우려하던 자연의 대재앙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개발 논리로 훼손된 자연이 결국 인간에게 되갚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운모 (1945-1999) 시인은 이처럼 공해로 병든 지구의 증세를 '나무 청진기'로 진단해 본답니다. 푸른 나무에 앉아 자유롭게 지저귀는 새들의 청량한 노랫소리로 지구의 숨결을 느끼고, 자연의 순수성을 감득할 수 있을 테니까요. 
9/4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김수영 

눈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해설> 

김수영의 달에 부쳐 김수영 (1921-1968) 의 시 '눈'. 1966년작이다. 9/5 (화) 시인 이광호 

노향림 

위로 

내릴 손님이 없어 폐쇄된 

시골 간이역에서 

낭자하게 피흘리는 선홍빛 샐비어꽃 

문득 철길을 따라 걷는 가을이 

맨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며 

선연한 피들을 

닦아주고 차마 돌아서지 못한다. 

<해설> 

계절이 변하는데 미처 다하지 못한 일 때문에 애태우는 사람이 있지요. 뒤늦게 피흘리듯 선홍빛을 마구 내뿜고 있는 샐비어꽃이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군요. 여름 동안 그의 '간이역'에 발길이 끊겨 내팽개쳐진 처지가 된 것에 한을 품은 것일까요? 사실은 그 자체로 계절과 꽃의 조화로움을 보여 주는 일, 그래서 '낭자한 핏빛'이 더욱 선연한 것이지요.어떻든 노향림 (1942-) 시인은 사람의 눈길에서 아주 멀어지게 된 한 존재를 어루만집니다. 눈부신 변화의 그늘에서 버림 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마음, 당신은 지니고 있나요? 9/6 (수) 소설가 박덕규 

문태준 

백로(白露) 

뒤늦게 애가 들어선 사십대 여자처럼 

늙은 네 발톱 같은 껍질을 가르고 

붉은 석류가 터져 나오고 있었는데, 

바람도 으스름달도 모르게, 

먼데서 온 마수걸이 손님처럼 

이슬 하나까지 얹혀, 

그래도 살아남은 꽃시절이 있었다 

<해설> 

뒤늦게 애가 들어선 사십대 여자는 오랜 불임의 시간을 견뎠을 것입니다. 먼데서 온 마수걸이 손님도 동이 트자마자 오래 걸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을 두드렸을지도 모릅니다. 문태준(1970-) 시인은 석류가 터지는 순간을 이 두 정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석류 껍질이 늙은 네 발톱 같고, 석류 알에 맺힌 이슬이 마수걸이 손님에게 주는 덤 같다나요!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백로를 머금고 있는,그 빨간 석류알이야말로 한때 꽃이었던 기억을 간직한 '살아남은 꽃시절' 아니겠습니까. 오늘이 바로 백로라지요. 9/7 (목) 시인 정끝별 

한명순 

약수터 가는 길 

약수터 가는 길, 

푸른 숲속 길, 



매미 소리를 이고 갑니다. 

매미 소리를 안고 갑니다. 

매미 소리를 밟고 갑니다. 

매미 소리를 끌고 갑니다. 



푸른 숲속 길, 

약수터 가는 길. 

<해설> 

매미 소리가 유난히 풍요로웠지요. 말벌, 찌르레기, 박새 같은 매미 천적이 줄어든 생태계의 이변이 도심 한복판에서도 우렁찬 매미 울음 소리를 만끽할 수 있게 한 셈입니다. 한명순 (1952-)시인이 가도가도 잦아들지 않는 매미 울음을 약수터 가는 숲길에서 만납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미 소리를 안고 가는 느낌이지요. 곧 악을 쓰며 쏟아내는 듯한 그 소리를 못 이겨, 내려놓고 밟고 가다가 이제 지쳐 끌고 가야 합니다. 짙은 무더위를 견딘 알곡이 더욱 알차지듯, 지금껏 매미의 시간을 지나는 우리에게 가을은 얼마나 풍요로운 모습으로 다가올는지요. 9/8 (금)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유재영 

적막 

오래 된 그늘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가 툭! 떨어졌다 

참 조용한 하늘의 무게 

<해설>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놀랍지요?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감돌고 조금 있으면 나뭇잎도 하나 둘 떨어지겠지요. 평범한 사물 뒤에서 서정의 기미를 탐색해 온 유재영(1948-) 시인이 이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모습에서 하늘의 무게를 헤아려 냅니다. 시간이 무르익어 나뭇잎이 떨어질 때가 되면 그 밑의 그늘도 스스로 깊어져 나뭇잎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적막을 뚩는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나뭇잎에 하늘의 무게가 실리고 그것을 오래된 그늘이 너그럽게 받아 주지요.이 조용한 하늘의 무게를 우리들도 한 번 느낄 수 있을까요? 9/9 (토)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동환 

면화밭 

나는 좋더라 면화밭은 

꽃이 피어 열매 맺고 

열매 피어 꽃되네. 

늙어도 청청한 소나무, 

끊어도 되돌아붙은 한강물. 

얘, 셋째야. 말 좀 해라. 

<해설> 

결실의 계절은 어쩌면 이렇듯 불안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찾아오는 것일까요. 그러나 정말 들에 출렁이고 있는 곡식들을 보고서야 어찌 시름을 잊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북청 물장수'의 김동환(1901-?) 시인이 어느 해 가을 면화(목화) 밭을 춤을 추듯 걷고 있었군요. 꽃이 피고 진 속에서 열매가 벌어져 더욱 환한 꽃으로 피어난 목화를. "늙어도 청청한 소나무"의 역사성에 연계시켜 뜻깊은 감흥을 자아냈습니다. 그런 감흥을 빌려 우리 곁의 '말없이' 무표정한 혈육을 위로할 수는 없겠는지요? 9/14(목) 소설가 박덕규 

이가림 

순간의 거울 

대지의 눈이 

하늘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눈 가장자리에 

배 한 척이 

가느다란 파문을 내이며 미끄러져 갔다 

몇 마리 놀란 구름 조각들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흔들며 

잽싸게 흩어진다 

<해설> 

대지 위에 하늘이 펼쳐진 장면을 그려 보세요. 대지의 눈이 그 하늘에 달린 커다란 거울을 들여다본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의 삶은 대지의 가장자리를 스쳐 항해하는 배에 비유될 수 있겠지요. 누군가가 띄운 삶의 배 한 척이 가느다란 파문을 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하늘에 떠 있던 조각구름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가림 (1943-) 시인은 배의 움직임에 놀라 흩어지는 물고기를 상상했습니다. 덧없이 사라질 자취이지만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의 항로에 하늘의 구름도 그냥 있지는 않았겠지요. 
9/15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전동균 

어두워지기 전에 

얼마나 많이 뒤틀리고 

뒤틀려서 깊어져야 

사람의 몸 속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오는가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귀환하는 새들처럼, 

그 새들을 받아들이며 

한없이 넓어지는 땅처럼! 

<해설> 

문만 나서면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뒤틀립니다. 그럴 때마다 이 시를 생각합니다. 전동균 (1962-) 시인은 그 뒤틀림 속에서 '깊이'를 일구어냅니다. 세상과 부딪치면서 얻은 단단한 마디와 옹이를 자신의 안 쪽에서 부드럽게, 말갛게 풀어놓곤 합니다. 그때 그의 몸 속에서는 물소리가 납니다. 땅에서 하늘로 비상하는 새들이 아닌, 하늘에서 땅으로 귀환하는 새들이라야 그 뒤틀림과 깊어짐과 맑아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 새들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는 땅이라면야, 어쩌면 '다시'라는 말에 그 비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9/16 (토) 시인 정끝별 

황순원 

나의 꿈 

꿈, 어젯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히 심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언제고 잊지 못할 이 꿈은 

깨져 흩어진 이 내 머릿속에도 

굳게 못 박혔도다 

다른 모든 것은 세파에 스치어 사라져도 

나의 이 동경의 꿈만은 길이 존재하나니. 

<해설> 

소설가 황순원(1915-2000) 선생의 운구 행렬이 떠나갑니다. 한국 현대 소설사 1세기가 비로소 저문 듯도 싶고, 문화의 정신이 세속을 뚫고 우뚝 솟아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의 실체를 이제는 더는 볼 수 없게 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시는 1931년, 선생의 나이 16세 때의 등단 작품이지요. 이 어처구니 없는 세상에 모든 것을 앗기고도 초지일관 "생명의 꽃'을 피워 올리려는 모습이 바로 문학의 본 얼굴일 테지요. 편리와 쾌락을 얻기 위해 일상을 바치는 중에도 우리는 참다운 삶을 향한 '나의 꿈'만은 꼭 보듬고 있어야 합니다. 
9/18 (월) 소설가 박덕규 

김원각 

남해 보리암에서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 



이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 

<해설> 

남해 금산의 보리암에 가 보셨는지요? 앞에는 쪽빛 남해 바다가 비단폭처럼 넘실대고 뒤에는 검푸른 석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곳, 밤이면 청정한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지요. 아름다운 풍광 때문인지 그곳은 유명한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원각(1941-)시인은 그곳에서 소원을 빌지 못하고 부끄러움만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도를 제쳐놓고 별빛에 취해 잔 자연과의 어울림이 오히려 세속의 잡티를 털어낸 비단결 마음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9/19 (화) 문학평론가 이숭원 

최하림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한산 (寒山)같은 시인도 

길 위에서 비 오면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지난 시간들이 축축이 

젖은 채로 길바닥에 깔려 있다. 

<해설> 

위에서 아래로 내리고, 내려서는 고이고 스며드는 게 비의 순리죠. 세상 질서를 거부했던 시인 한산조차도 이런 순리는 거스러지 못했다고 최하림 (1939-)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문득 길바닥에 축축이 들러 붙어 있는 가랑잎들이 떠오릅니다. 길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비든, 가랑잎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땅의 깊이에 좀더 가까워진 것 들일 것입니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절대의 침묵이 읽혀지지 않습니까?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가던 길 멈추고 오던 길의 바닥을 한 번쯤 내려다 봐야 할 때입니다. 
9/20 (수) 시인 정끝별 

장철문 

장(場) 풍경 

이거 철원에다 디레가소 



파장 무렵 비릿한 생선 냄새 속에 

아들의 얼굴이 선해서 



덜컥 가슴이 젖는다 

<해설> 

해는 저물어 어스름이 깔리는 어느 장터에 남은 물건을 떨이로 팔려는 여인이 있습니다. 종일 좌판을 벌였으나 들어온 돈은 얼마 되지 않고, 집에 두고 온 어린 아들을 생각하니 한 시라도 빨리 장을 떠나고 싶었겠지요. 천 원에 다 들여가라고 아무리 손짓해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어머니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겠지요. 장철문 시인은 그런 어머니의 애잔한 마음을 간략한 형식으로 나타냈습니다. 특히 첫 행에 제시된 투박한 사투리는 아들에게로 향하는 모성애의 절박함을 절묘하게 감싸안고 있습니다. 9/20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함민복 

독(毒)은 아름답다 

은행나무 열매에서 구린내가 난다 

주의해 주세요 구린내가 향기롭다 



밤톨이 여물면서 밤송이가 따가와진다 

날카롭게 찌르는 가시가 너그럽다 



복어알을 먹으면 죽는다 

복어의 독이 복어의 사랑이다 



자식을 낳고 술을 끊은 친구가 있다 

친구의 독한 마음이 아름답다 

<해설> 

밤을 따다가 밤송이에 찔린 아이들은 어김없이 투덜댈 테지요. 복어를 먹고 죽은 사람 소식에 어른들은 얼른 몸부터 사리지요. 그것이 이 세상을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복어알의 독은 알을 지키려는 복어의 '지독한' 본성이요, 은행나무도 밤송이도 제 씨앗을 지키려고 인간이 싫어하든 말든 '독'을 뿜는 것이지요. 한민복(1962-)시인이 '그 독이 모두 사랑이다'고 말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자식을 낳자 잘 키워 보겠다고 금주하게 된 친구를 술판으로 끌어들이는 일 또한 얼마나 모자라는 인간의 일인지요. 9/22 (금) 소설까 박덕규 

강현호 

나뭇잎 하나 

- 아이, 곱기도 해라. 

바람이 손을 뻗쳐 

나뭇잎을 또옥 땁니다. 



- 아휴, 어지러워. 

나뭇잎은 눈을 감고 

바람의 팔뚝에 꼬옥 

매달립니다. 

<해설> 

바람이 점점 선선해지고 나뭇잎들은 저마다의 단풍으로 가을을 단장하기 시작합니다. 나뭇잎이 곱게 몸단장을 하는 일은 저를 키워 준 나무와 작별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지요.성급한 바람일수록 그 고운 나뭇잎을 그냥 두고만 보지 않습니다. 강현호 (1943-) 시인이 가을에 낙엽 지는 일을 바람과 나뭇잎의 가슴 설레는 만남의 순간으로 묘사해 색다른 동시 한 편을 빚었습니다. 제 몸에서 나뭇잎을 떨구는 나무의 고통도실은 이렇듯 또다른 시간을 위한 통과의례가 아닐는지요. 눈을 감고 바람의 팔뚝에 몸을 맡기는 나뭇잎의 표정이 재미있군요. 

권대웅 

게 

바다는 언제나 정면인 것이어서 

이름 모를 해안하고도 작은 갯벌 

비껴서 가는 것들의 슬픔을 나는 알고 있지 

언제나 바다는 정면으로 오는 것이어서 

작은 갯벌하고도 

힘 없는 모래 그늘. 

<해설> 

'정공법'이라는 말, 참 좋지요? 삶의 기로에서 뭔가 선택해야 할 때 저는 이 말을 떠올리곤 합니다. 정면으로 독대(獨對)했을 때라야 올곧게 돌파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뒤돌아보면 그 선택이 옆으로 비껴서 있었다는 사실이죠. 권대웅(1942-) 시인은 그와 같은 비애를 '게'를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름도 없고 작고 힘없는 갯벌이나 모래 그늘에서 재재거리는 게를 통해서요. 바다가 덮칠 때까지 옆으로 옆으로 전전긍긍하는 게의 모습이 곧 우리의 거울은 아닐런지요? 
9/25 (월) 시인 정끝별 

이혜영 

못 

아직 나는 

한 번도 받아 든 적 없는 

아버지 작업복을 

때로는 엄마의 젖은 앞치마를 

날마다 

소중하게 받들고 있다. 

벽 한쪽 구석을 

차지한 너는, 

<해설> 

우리에게 부모님은 너무 가까이 있어 그 고마움을 잊고 지내기 일쑤이다가 어쩌다 떠올리고는 스스로 무안해하곤 합나다. 이혜영(1957-)시인은 '벽 한쪽 구석을 차지한' 하찮은 옷걸이 못을 보고는 그런 무안함에 고개 숙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못이 날마다. 일터에서 돌아온 고단한 '아버지의 땀절인 작업복' 과 자질구레한 물일로 때가 묻은 '어머니의 젖은 앞치마'를 받들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지요. 부모님의 노동으로 먹고 살면서도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읽어 드리고 싶은 동시입니다. 9/26 (화)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정해종 

동사무소에서 

출근 지옥철 같은 철제 캐비닛 

그 속 어딘가에 숨막히게 

아버지가 계시고 내가 있다 

이마에 수입인지를 붙이고 

철인에 눌린 나의 일상이 

막 떠밀리고 있는데 

어, 아버지께선 또 어디로 밀려가셨나 

<해설> 

뭔가를 수습하거나 도모할 때 동사무소를 찾습니다. 정해종 (1964-) 시인 역시 삶의 어떤 국면들을 '신고'하거나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곳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한결 같은 철제 캐비닛들이 있습니다. 캐비닛 속에는 나를 비롯해 나와 피와 살과 밥을 섞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빽빽이 담겨 있습니다. 딱딱한 흑표지에 덮여 철끈에 묶이고 소인이나 직인이 찍힌 채로 말이죠. 그 철제 캐비닛을, 똑같은 일상으로 우리를 운반해대는 숨막히는 전철에 비유하고 있는 뼈아픈 시입니다. 그래도 그 안에 있을 때가 삶인 거지요. 9/27 (수) 시인 정끝별 

김명수 

바다의 눈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네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남짓한 포구 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 보네 

<해설> 

이 시에 나타난 시의 풍경을 그려 보세요. 육지 저편에는 산이 있고 하늘엔 흰 구름이 떠가지요. 자그마한 바닷가 마을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거기에도 삶과 죽음의 엇갈림이 있고 애절한 사연들이 있네요.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그물을 깁는 젊은 아낙은 얼마 전 남편과 사별한 듯하고, 마을 언덕의 새 무덤은 그녀 남편의 무덤 같군요. 김명수(1945-) 시인은 바다가 바로 그 무덤을 바라본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의 시련에 부대끼며 막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감싸안으려는 온화한 마음을 바다에서 엿본 것이지요. 9/28 (목)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진경 

눈물 

하루 아침 추위에 

은행나무가 후드득 잎을 떨어뜨린다 

비상에 대한 미련을 

한꺼번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황망히 흘리는 

황금빛 눈물 

<해설> 

사람은 버릴 때 버리지 못하고 떠나야 할 때 제대로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자연 만물의 변화를 보십시오. 꽃이 질 때가 되면 저절로 지고 나뭇잎이 떨어질 때가 되면 또 그렇게 떨어집니다. 파란 하늘에 노란 은행잎이 너울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지요. 하지만 어느날 찬 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가면 은행잎은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져 어디론가 흩어지지요. 김진경(1953-) 시인은 그 장면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려는 몸짓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미련을 버리고 총총히 떠나는 마당에 황금빛 눈물 흘리는것도 어울리는 일이겠지요. 9/28 (금) 문학평론가 이숭원 

김기택 

신생아 2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 종일 그 비린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 

<해설> 

신시인 (1957-) 김기택은 사무원이지요. 여섯 살배기 딸의 아빠이기도 하구요. 시인은 갓태어난 아기 냄새에서 '어미' 못지 않은 '아비'의 부성을 한껏 과시합니다. 불균형, 야들야들함, 허우적거림, 말랑말랑함, 옹알거림, 꾸물거림, 버둥거림…이 '어린 것들'의 홀림 중에서 가장 강력한 건 아마 비린내와 단내가 뒤섞인 아이의 냄새일 겁니다. 바닷물 냄새, 양수 냄새, 비린내, 이 냄새로써 시인은 아이와 이어지고 있고 시인의 삶은 정화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아바라면 머리 속에 아이를, 아니 아이가 헤엄치며 놀 수 있는 자궁을 넣고 다닐 것입니다. 9/30 (토) 시인 정끝별 

허영자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 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해설> 

이것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하고 어금니를 물고 지켜온 것조차 다 순순히 내어놓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요. 너무 투명한 가을 햇살 앞이면 옹고집쟁이라도 흰 수염 같은 백기를 흔들 듯 선선한 웃음을 흘릴 밖에요. 허영자(1938-) 시인도 젊은 날의 '떫고 비리던' 욕망을 접어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일이 늙어가는 사람의 자포자기일 수는 없을 테지요. 그렇듯 자기 자리를 내주고 보면 어느새 스스로가 작은 결실, 탐스러운 열매로 붉어져 있을 테니까요. 
10/2 (월) 소설까 박덕규 

오순택 

참새 

참새 서너 마리 

부리에 음표를 달고 

전깃줄에 앉아 있다. 



다섯 줄 전깃줄이 

오선지인 줄 아는가 봐. 

<해설> 

고개 숙인 벼들이 황금물결을 일구어 냅니다. 추수할 때까지 허수아비는 그 물결을 잘 지켜 내야 하는데 참새들 때문에 걱정이네요. 참새에게는 먹을 양식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셈이지요. 농부들이 풍년가를 부르듯 참새들이 뛰고 날며 조잘대는 소리도 풍년가일 테지요. 이런 가을날, 전깃줄 위를 통통 튀어다니며 노래하는 참새들의 모습 또한 오선지 위에서 춤을 추는 음표처럼 경쾌합니다. 오순택(1942-)시인이 자연의 꾸밈 없는 표정에 어리는 충만한 기쁨을 '부리에 음표를 단 참새'모양으로 그려 놓았군요. 
10/3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유승도 

가을 낮 

맑디 맑아 슬픈 하늘, 타는 들판이다. 

아주 익은 콩들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다 

꿩들은 좋아라 좋아라 

콩 심던 봄날의 할머니는 어디로 갔나 



볕기 가득한 콩밭에 콩 튀는 소리 

산비탈이 부산하다 인적은 없이 



서리도 내릴 날이 오늘 내일이라 

<해설> 

10월에 접어들면서 서울 하늘도 제법 푸르고 높아졌지요? 강원도 산간 지역에 가면 정말 슬프도록 맑은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어요. 양지바른 산비탈엔 콩밭이 흔한데, 햇살이 뜨거운 한낮엔 알차게 여문 콩이 꼬투리를 뚫고 터져 나옵니다. 탁탁 튀는 소리에 놀라 도망쳤던 꿩이 콩알을 주워 먹으려고 짝을 지어 날아들지요.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는 유승도 (1960-) 시인이 인적 없는 가을 낮의 정경을 담백하게 그려냈습니다. 생활과 시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 고요하면서도 충만한 자연의 움직임을 보게 됩니다. 
10/4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이상희 

그리고 삶 

입술을 깨물어도 

참을 수 없이 튀어나오는 

재채기 삼창 



에잇! 

집어쳐! 

kitsch! 

<해설> 

환절기에, 의약 분업에, 감기 바이러스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재채기 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재채기 소리를 "엣취"라고 듣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은 "아츄", 일본인은 "학숑"이라고 듣기도 한답니다. 이상희(1960-) 시인은 "에잇, 집어쳐, 키치(속물성)"라고 듣고 있군요. 재채기 소리에서 이끌어내는 의미가 즐겁지 않습니까. 그 소리와 의미가, 제목과 함께 어우러질 때 속된 삶에 대한 재치 있는 풍자가 되는군요. 재채기는 주로 삼창입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울 적 아버지의 재채기 삼창을 "디스! 이스! 어팬!"이라고 듣곤 했답니다. 10/5 (목) 시인 정끝별 

개리 스나이드(김구슬 옮김) 

시는 어떻게 나에게로 오는가 

한밤 중 시는 풍화된 돌들 너머로 

비틀거리며 다가와 

두려워하는 듯 내 모닥불 주변 

언저리에서 기웃거린다 

나는 시를 만나러 간다 

그 불빛의 가장자리로 

<해설> 

물질의 풍요가 바탕에 있지 않은 정신의 누림과 즐김을 일종의 사치라고 생각하지요.어쩌면 이렇듯 욕망이 들끓는 세상에서 시를 쓰고 읽는 일이란 참 겉멋 든 일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풍화되고 있을 때 우리들 '언저리'에 와서 '기웃거러는' , 희미하지만 확연한 생기, 그 시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딱한 인생인지요. 진정 시는 그렇게 얻어집니다. 만물에 깃든 신성을 시로 쓰고 낭송하는 미국 시인 스나이더 (gary snyder, 1930-) 가 그 신성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동양의 한국에 와서 시를 낭송했습니다. 10/6 (금) 소설가 박덕규 

김영재 

너라는 단풍 

이제 너의 불붙은 눈 피할 수 없다 

감춰야 할 가슴 묻어 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누가 막는다 해도 저문 산이 길을 트고 있다 

<해설> 

사랑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우는 사연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흔히들 좋아하는 시나 노래가 또한 그런 사연 일색이지요. 그런데 여기, 맹렬한 사랑의 불을 켜고 달려드는 '너'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사람이 있군요. 무엇을 감추고 미리 가다듬어야 하는지 따질 겨를도 없이 이제 그사랑에 맞불을 놓아야 할 지경인데요. 알고 보니, 하루가 다르게 완연해지는 가을빛을 노래하고 있는 김영재(1948-) 시인의 시조입니다. 곧 처절할 정도로 붉은 단풍이 온 산야를 태울 테지요. 당신이 유약한 사람이라면, 막을 수 없이 길터오는 저 단풍의 사랑을 어떻게 맞을런지요? 1-/7 (토) 소설가 박덕규 

전병호 

과일 장수 

햇살의 무게를 잽니다. 

대바구니에 소복이 쌓이는 

시골 햇살. 

앉은뱅이 저울의 긴 바늘이 

숫자를 더듬어 가리킵니다. 

대바구니에 사과를 담던 

과일 장수는 

햇살의 무게를 생각하고는 

사과 몇 개를 더 올려 줍니다. 

<해설> 

앉은뱅이 저울로 물건의 무게를 재는 시골 장터 풍경이 한 편의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대바구니에 과일을 담아 저울의 긴 바늘로 무게를 잘 달고는 꼭 덤을 얹어 주는 모습이 아직 낯설지는 않지요? 전병호 (1953-) 시인은 그 덤이 '대바구니에 소복이 쌓여 있던 햇살의 무게'를 계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군요. 백화점 매장이나 홈쇼핑 시스템을 통하면 어쩌면 싼 값으로 훨씬 더 많은 양을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 누가 그런 햇살의 무게를 셈할 수 있겠어요? 새삼 그 옛날 과일 장수의 인정이 그리워지는군요. 10/10 (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생진 

낚시꾼과 시인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봤다고 했다 

낚싯대와 얼음통을 짊어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날보고 재미봤느냐고 묻기에 

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고 했더니 

시는 어디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 

등대 쪽이라고 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해설> 

낚시를 좋아하는 분들이 이 시를 읽으면 좀 서운해 하시겠네요.만재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서 남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입니다. 인적 드문 외딴 섬이라 온갖 물고기들이 몰려 들어 낚시터로 유명하지요. 바다와 섬을 주제로 시를 써 온 이생진(1929-) 시인이 그곳에 들렸군요. 그러나 고기 잡이에 정신이 팔린 낚시꾼들은 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등대 끝에서 생의 예지를 건져올리는 그 외로운 황홀함을 그들도 한 번쯤 느낄 수 있을까요. 10/11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나희덕 

서시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해설> 

'서시'는 말 그대로 여는 시입니다. 영원한 시작(始作, 詩作)으로서의 의미가 새김된 시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시도 다분히 계시적인 느낌을 줍니다. 따뜻하고 단정한 나희덕 (1966-) 시인은 단 한 사람의 가슴이라도 따뜻하게 지펴 줄 수 있는 마음의 군불, 아니 시의 군불을 지피고 있군요. 느슨하지 않게 자신의 영혼을 비워가는 일, 물이 새는 배의 밑바닥에서 물을 퍼내듯이 끊임없이 나를 베푸는 일, 이런 일이 아마 자신과 타인의 가슴을 지피는 일이겠지요. 따뜻한 것들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사람과 가까운 쪽이 가장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10/12 (목) 시인 정끝별 

김소운 

이슬 

밤새 어두워서 울었습니다 

밤새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달빛 너무 맑아 울었습니다 

별빛 너무 고와 울었습니다 

해님이 보고 싶어 울었습니다 

풀벌레와 함께 울었습니다 



풀잎의 마알간 눈물입니다. 

<해설> 

어떤 생명이건 상당한 고통을 겪으며 태어나는 법이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저마다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몰라요. 김소운(1954-) 시인은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면서 그것을 위해 밤새 애태운 고통에 대해 느끼고 있습니다. 밤은 무섭고 길었습니다. 때로는 달과 별이 너무 맑고 고와서 울기도 했습니다. 그 눈물들이 조금씩 모여 이른 아침 영롱한 이슬로 맺혔다는 것이지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순결한 열정을 간직해야만 참된 생명이 빚어지고 그 생명이 더욱 맑은 영혼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동시입니다. 10/13(목)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이세룡 

페드라 

사람은 언제나 절벽 끝에서 완성되지만, 

모든 정열에는 눈이 없어서 

사람 뒤의 바다를 보지 못하고, 

출렁이는 푸른 숨결 속에 

제 육신을 눕힌다. 

<해설> 

이 시는 영화 페드라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페드라(새 어머니)와 알렉시스(전처 아들)의 금지된 사랑은 벼랑으로 치닫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두 연인의 비극은 알렉시스가 스포츠카를 타고 페드라를 부르며 절벽을 질주함으로써 끝이 나죠. 바하의 '토카타와푸가' 선율이 물보라처럼 격정적으로 치솟을 때 페부를 찢는 알렉시스의 절규…. "페드라 …!" 이세룡 시인은 그들의 눈먼 사랑을 보편화시키고 있습니다. 눈이 멀어야 사랑이 시작되지요. 사랑 뒤의 바다를 보지 못해야 사랑하지요. 절벽 끝에서 완성되어야 진짜 사랑인 겁니다. 10/14 (토) 시인 정끝별 

손광세 

가을 하늘 

옹달샘에 가라앉은 

가을 하늘. 



쪽박으로 

퍼마시면, 



쭉 

입속으로 

들어오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 

<해설> 

어쩌면 저토록 맑고 파랄까 싶은 가을 하늘입니다. 바라볼 때마다 가슴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어느새 그 하늘을 잊고 답답한 일상에 갇히고 말지요. 어느 날 손광세 (1945-) 시인은 그 하늘이 옹달샘에 비쳐 샘물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된 것을 보았군요. 쪽박으로 물을 퍼마시면서 마음까지 파랗게 물드는 느낌이 들 테지요. 샘물을 매개로 해서 하늘이 몸 속으로 "쭉" 들어오는 상상의 기쁨을 맛보게하는 동시입니다. 10/16 (월)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유안진 

전율 

누구한테 왜 당했을까 

짓뭉개진 하반신을 끌고 

뜨건 아스팔트길을 건너는 지렁이 한 마리 

죽기보다 힘든 살아내는 고통이여 

너로 하여 

모든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엄숙한가. 

<해설> 

구차하게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럴 듯한 말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어떤 화려한 생존보다도 빛나는 죽음이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죽음을 선택할 의지도 가질 수 없는 극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요? 유안진 (1941-) 시인은 하반신을 잃고 길을 가는 지렁이를 통해 죽기보다 힘든, 사는 자의 고통을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원래 그런 고통과 더불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그 고통에 시달리고 견디고 하는 과정이 인간의 참으로 위대한 삶 아닐까요? 오,저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에게 희망을! 10/17 (화) 소설가 박덕규 

최영철 

인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 집 한켠에서 짬뽕을 먹는 남녀 

해물 거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 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의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 주었다.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해설>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어디를 가시나요? 이 시의 부부는 어린이까지 안고 가까운 자장면 집을 찾았습니다. 특별한 날이라 자장면보다 조금 비싼 짬뽕을 시켰어요. 생각 같아서는 탕수육이라도 시키고 싶었겠지만 형편이 그럴 수 없었겠지요. 국수발 사이에 해물 건더기가 보이면 상대에게 주려고 젓가락을 바삐 움직입니다. 병아리 같은 아이의 입에도 넣어주고요.세계 평화가 따로 있습니까? 이 부부의마음이 바로 평화의 근원이지요. 최영철(1956-) 시인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그저 좋은 인연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군요. 10/18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유 하 

오징어 

눈 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해설> 

눈앞에 보이는 저 찬란한 빛이 죽음이라고 유하 (1963-) 시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밤바다에 집어등을 환하게 켜고 있으면 떼지어 다니는 오징어들이 그 불빛을 향해 몰려든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오징어들에게 집어등 불빛은 곧 '죽음'이겠지요. 시인이 비장한 어조로 경계하는 저 빛은 '압구정동'의 네온사인을 연상케 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 뿜어대는 '찬란한 빛' 말이지요.그 빛을 향해 오징어 떼처럼 몰려드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메시지가 의미 심장하지 않습니까. 10/19 (목) 시인 정끝별 

박태일 

인각사 

인각사 아침 법문은 

뻐꾸기 뻐꾹 제 전생 얘기 

소복 단장 나비는 기왓골만 남실거리고 

비실러 떠나나 

물밥같이 말간 저 구름 

고려 적 일연 스님 

잔기침 소리. 

<해설> 

기린이 놀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 떨어진 곳이라는, 경북 군위 인각(麟角) 마을의 인각사는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한 절입니다. 한때는 그 곳에 댐 건설 계획이 있어 수몰될 뻔도 했지만,그대로 남아 옛 정취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습니다. 유적지에 서린 시간의 결을 즐겨 더듬는 박태일 (1955-) 시인이 이곳을 놓칠 리 없지요. 뻐꾸기 울음과 소복 단장 나비의 날갯짓 사이로 말간 구름이 와서 머물다 가는 고즈넉한 절 마당을 오롯이 떠오르게 합니다. 정말 잔기침으로 아침을 맞는 일연 스님의 모습도 저기 보입니다. 10/20 (금) 소설가 박덕규 

안정옥 

하찮은 꽃 

늦은 밤 횡단보도를 마주하는 좌판에 지친 장미들 

안개꽃에 깔려 있다 취객들만 지나치는 길 

말라가는 꽃을 주인은 자주자주 깨우려고 

찬물을 듬뿍 뿌린다 놀란 장미들 

구겨진 머리 바로 펴려고 화들짝 좌판이 들컹거린다 

<해설> 

꺾인 꽃에도 생명이 있을까요? 밤 거리에 꽃을 파는 행상들이 더러 있지요. 어제도 내 자신 취객이 되어 밤 늦게 집에 돌아오다가 장미꽃 파는 좌판 옆을 지나쳤습니다. 몸통을 잃은 꽃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는데 원색의 현란한 색상이 오히려 처량해 보였습니다. 잠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지만 얼마 안가 시들어 버릴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러나 안정옥 (1949-) 시인은 길거리의 하찮은 꽃이 화들짝 놀라 머리를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꺾인 꽃에서도 좌판이 덜컹거릴 정도의 힘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10/21 (토) 문학평론가 이숭원 

진복희 

외등 

어둠을 밝혀 앉은 

어머니 하얀 이마 



종종걸음치는 나를 

맨 먼저 알아채고 



서둘러 담장 밖으로 

긴 목을 빼고 섰다. 

<해설> 

늘 다니던 길이라도 늦은 밤 홀로 귀가하는 어두운 골목길은 여전히 불안하가만 하지요. 더군다나 선득한 밤바람이 길바닥을 쓸며 지나가기라도 하면 꼭 누군가 뒤따라오는 느낌에 시달리며 절로 종종걸음 치게 되지요. 그럴 때, 집 담장 너머로 긴 목을 빼고 선 외등은 얼마나 반가운가요.날 마중 나온 '어머니의 마음'이 그런 외등의 표정일 테지요. 진복희 (1942-) 시인이 동시조 형식에다, 공포스러운 밤길 체험을 통해 '내 집'의 안락함을 알아차리는 어린 마음을 담았습니다. 10/23 (월)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한광구 

꿈꾸는 물 

비 오시는 소기 들린다. 

꿈이 마르는 나이라서 잠귀도 엷어진다. 

아, 푸욱 잠들고 싶다. 

한 사나흘 푸욱 젖어 살고 싶다. 

<해설> 

꿈꾼다는 것, 그것은 한가롭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고, 자기 안의 내면 의식을 일깨운다는 것이고, 마음의 고향을 떠올린다는 것이고,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기다린다는 것일 것입니다. 꿈이 메말라가는 나이를 불안해 하는 한광구 (1944-) 시인은 촉촉이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아 젖고 싶어합니다. 한 사나흘 푸욱 꿈에 젖어 보고 싶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파스칼의 문장이라죠. 한 사나흘 정말, 푸욱 쉬고 싶지 않습니까? 10/24 (화) 시인 정끝별 

이상범 

섬 

세상 끝이 떠오를 때 먼 데 섬을 생각했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거친 날에도 

초록섬 다박 솔의 꿈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절망의 물결 저쪽 아스라이 뜨는 참별 

돌아보면 거기 섬은 숨가쁘게 다가왔고 

목놓아 울 수 없는 섬은 섬인 줄도 몰랐다. 

<해설> 

이 시의 섬은 인간의 외로움과 꿈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군요. 세상 다 끝난 듯한 절망의 끝판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지요. 온갖 시련에 시달리면서도 언젠가는 아늑하고 보람찬 삶을 이루리라는 꿈을 지니고 삽니다. 그 꿈을 여기서는 '초록섬 다박솔'로 표현했습니다. 어둠 속에 희망의 별을 찾아 숨가쁘게 움직이다 지쳐 쓰러져도 그를 달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스스로 외로운 섬이라는 것도 모르는 체 꿈을 찾아 헤매는 인간 존재의 안타까움을 이상범 (1935-)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10/25 (수) 문학평론가 이숭원 

박이도 

집중 

먼 곳의 어떤 소리에 

길게 귀를 뽑는 나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저쪽 인기척에 

숨을 죽이고 떨리는 내 안의 모습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내 시간을 찾아 허둥대는 

이 순간 나의 집중은 

허망한 메아리의 사라짐인가 

<해설> 

나이가 들면 세상 일에 초연해져야 할 텐데 오히려 집착이 더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 꿈꿀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은 미련,뭔가 남은 행운이 찾아 올 것 같은 기대감, 이런 것들 속에서 나의 시간은 마구 흐르고 그럴수록 초조감은 더해지는군요. 한데, 그 '집중'이 과연 허망한 것이기만 한 것일까요?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를 구도하듯 다양한 어조로 형상화해 온 박이도 (1938-) 시인도 풀기 어려운 주제인가 봅니다. 그렇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실은 그것이야말로 나의 시간을 참으로 의미있는 집중으로 채우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10/27 (금) 소설가 박덕규 

박세현 

가을 저녁 

똑 똑 똑 

밤이 왔다 

현관 앞에서 서성이는 잠의 등 떠밀고 

어둠 엷게 탄 커피를 마신다 

나뭇잎 지는 소리 사이로 

가을 저녁을 마감하는 바람이 분다 

마음 식는 소리 



꿈도 저만큼 물러서거라 

<해설> 

비가 뿌리더니 스산한 바람이 부네요. 부쩍 짧아진 가을 해 때문에 저녁은 유달리 빨리 어두워지는 듯합니다. 박세현 (1953-) 시인은 밤이 우리들을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가을 밤은 불면의 시간 속에 무언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커피까지 마신 시인은 이제 사색의 밤을 보낼 준비를 다 갖추었습니다. '마음 식는 소리'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자기를 돌아볼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하겠지요? 꿈도 저만큼 밀쳐 놓고 밤새 명상의 심연에 젖어들던, 그 외로운 축복의 시간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10/28 (토) 문학평론가 이숭원 

신현배 

고추 말리는 날 

우리 집 앞마당이 

빨간 고추로 덮였다. 



눈이 따끔 코가 간질 

연방 터지는 재채기. 



바람도 견디다 못해 

주춤주춤 물러난다. 

<해설> 

가을 볕 따가운 날, 

앞마당에 고추를 널어 말리는 풍경이 참 낮익지요? 그 곁에서 놀다가 코가 간질거려 재채기를 하던 어린 시절도 있었지요. 익은 곤추가 캅사이신이라는 매운 기운을 내는 소금 성분을 뿜어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눈물이 찔끔 나도 흥겨웠을 텐데요. 그래도 바람 없는 맑은 날에 고추를 말리기 때문에 그 매운 기운이 우리를 더는 괴롭히지 못하지요. 신현배 (1960-) 시인은 빨간 고추의 매운 맛의 위력이 바람도 물러나게 했다고 표현했군요. 고추 널린 시골 집 풍경으로 자연의 이치를 알려 주는 동시조인 셈이지요. 10/30 (월) 아동문학 평론가 김용희 

박주택 

인간 3 

인간, 깊은 문장에서 나오는 동트는 

새벽마다 

광활한 대지. 

황홀함의 



그 숲에 떨 때 

영혼의 곳곳마다에 울리는 

맹렬한 타종(打鐘) 

<해설>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모두 값진 것이겠지만, 인간만큼 그 가능성이 활짝 열린 생명이 또 있을까? 이러한 믿음이 자신만을 중심에 두고 만물을 생각하는 인간의 자만일 수만은 없을 테지요. 불덩어리 같은 몸으로 새벽을 여는 황홀한 태양이며, 그로부터 온몸을 열어 기운을 뿜는 저 광활한 대지는 깊은 의식, '깊은 문장' 으로 시간을 맞는 인간의 내면을 닮았지요. 바로 그렇게 깨어 있는 인간에게서는 '영혼'이 울리는 사색의 종소리, 숲의 다양한 그 떨림 같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박주택 (1959-) 시인이 빛은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세요. 어쩌면, 인간의 가능성을 다시금 믿게 될지도 몰라요. 10/31(화) 소설가 박덕규 

김달진 2 

모래밥 

마음이 더러우면 

모래를 삶아 밥을 만들라. 



모래밥을 먹고 

그마음 씻어 버리라. 

<해설> 

시인 김달진(1907-1989) 

잘못된 세상살이를 향해 촌철살인(寸鐵殺人)처럼 일갈하는 일은 문자깨나 쓴다는 사람의 버릇입니다. 그 중에서 어떤 말들은 유식함만 빛나 보일 뿐인데, 어떤 말은 별로 어렵게 쓴 문자가 아닌데도 묘하게 폐부를 찌르는 울림을 주곤 합니다. 닭들은 튼튼한 소화 기능을 얻기 위해 모래를 먹는다지만, 인간이 모래밥을 먹어야 한다니요! 끝가는 데 모를 우리의 탐욕을 우리 몸 속에 쌓인 더러운 노폐물로 증명할 수 있을 터인즉, 그래서 시인은 마음의 더러움을 몸속을 청결하게 해서 씻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지요. 모래 알갱이가 위벽을 스칠 때의 따가움을 상상하면서, 제 마음을 씻는 뼈저린 각성의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박덕규 소설가 

이성선2 

벌레 

꽃에는 고요한 부분이 있다 

그 곳에 벌레가 앉아 있다 

<해설> 

시인 이성선 (1941-2001) 

일평생 남들에게 조용하게 노래만 들려 주다가 존재도 없이 사라져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인간의 땅에서 한 점 티끌처럼 자기 몸을 작게 하고 자연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가 마침내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흔적 남기지 않고 흩어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여정을 이 한 편의 시로 더듬어 볼 수도 있을 테지요. 한 마리의 작은 벌레가 꽃의 고요한 부분을 알고 그곳에 와 머무르기까지, 얼마나 큰 위험과 유혹을 이겨야 했을 것이며, 그 몸은 얼마나 예민해져야 했을까요. 
실은 꽃이 아주 조금만, 이 갸륵한 벌레를 위해 몸을 비워주지 않았을까요? 예민한 촉수로 우주의 운행을 더듬던 사람, 이성선 시인이 얼마 전 그렇게 인간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그 많은 시편들이 대신 조용히 그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박덕규 소설까 

이성부 

지리산 

가까이 갈수록 자꾸 내빼 버리는 산이어서 

아예 서울 변두리 내 방과 

내 마음속 깊은 고향에 

지리산을 옮겨다 모셔 놓았다 

날마다 오르내리고 밤마다 취해서 

꿈속에서도 눈구덩이에 묻혀 허위적거림이여 

<해설> 시인 이성부 (1042- ) 

이성부 시인이 백두 대간을 으르내린 지가 20년이 넘었을 겁니다. 거의 날마다 산을 올라도 저 멀리 달아나 버리기에 아예 자신의 방과 마음속에까지 산을 옮겨다 놓았군요. 그러나 두 발로 디뎌 오르고 그 안에서 잠자고 뒹굴어도 마음을 열어 주지 않던 산이 엉뚱한 곳에 옮겨 온다고 해서 참 모습을 드러낼 턱이 없지요. 밤이건 낮이건 산만 꿈꾸지만 눈구덩이를 헤매다 허방을 디디는 듯 길을 잃게 마련이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저 의연하고 정정한 산의 몸 가까이 들어가 그 살갗과 체온을 감촉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2001.7/4(수) 
이숭원·문학평론가 

송재학 

소나무 

한 발만 더 디디면 벼랑인데 바로 거기서 뿌리를 

내리는 소나무가 있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는 

늘 바르르 떨고 있는데, 에멜무지 금방 새로 변해 

날아가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아슬함으로 잔뜩 

발돋움한 채 바르르 떨고 있는데, 아직도 훌쩍 

날아가지 않고 서 있는 저 나무가 기다릴 것은 무어냐 

<해설> 시인 송재학 (1955-) 

여기 벼랑 끝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있습니다. 뿌리 내릴 곳이 또 있었을 텐데 하필 이곳에 뿌리를 드리운 데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요. 사물을 깊이 데려다보는 송재학 시인의 눈에는 바르르 떠는 솔가지의 몸짓까지 포착됩니다. 저렇게 바르르 떨다가 새로 변해 훌쩍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이어집니다. '에멜무지'란 말은 그냥 한 번 해 본다는 뜻의 고유어인데, 새처럼 날아가려는 몸짓은 하고 있지만 벼랑에 그냥 머물러 있는 뜻은 무엇일까요? 무언가를 기다리느라고 그렇게 서 있다고 신인은 보았습니다. 그 벼랑에서 기다린 세월이 백년일까요? 천년일까요? 2001. 7/5 문학평론가 이숭원 

조 운 

상치쌈 

쥘 상치 두 손 받쳐 

한 입에 우겨 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너머로 가더라 

<해설> 시조시인 조 운 (1902-?) 

이맘때쯤이면 텃밭에서 솎아 따온 상추 잎에 찬밥 한 숟갈, 참기름과 마늘을 담뿍 넣은 쌈장, 툭 분지른 고추 한 대목을 얹어 쌈싸 먹곤 했더랬습니다. 두 손으로 받쳐 든 쌈을 먹으려면 입을 크게 벌려야 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눈도 크게 벌어지겠죠. 크게 벌어진 눈의 동자들이 울 너머로 몰려 있군요. 그 형상을 '희뜩'이라는 부사가 거느리고 있네요. 쌈은 울이 쳐다보이는 마루나 평상에서 먹어야 제격인데요, 이때 훨훨 나는 나비는 더할 나위 없는 양념일 겁니다. 격식을 갖춰야 할 사람과는 차마 먹지 못할 게 이런 쌈이지요. 그런데 두 손을 부지런히 싸움하듯 싸서 먹으라고 쌈인가요? 2001. 7/6(금) 정끝별·시인 

김승희 

사랑2 

멕시코인들은 말하지 

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 

미국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세상의 여자들은 말하네 

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 

남자는 너무나 가까이 있다. 

<해설> 시인 기승희 (1952-) 

사랑은 항상 때 아니거나 때 늦기 십상이고, 사랑은 대체로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기 마련이죠. 그렇지 않은들 어디 사랑이겠습니까? 게다가 이 사랑은 서구 중심적인, 남성 중심적인 명분들로 똘똘 뭉쳐 있기도 합니다. 김승희 시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국면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와 미국, 여자와 남자, 그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 사랑은 불가(不可)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어' 그림의 떡이고, 사랑의 수탈자들은 '너무 가까이 있어'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뺏고 빼앗기는 사랑도 사랑일까요? 당신의 사랑은 무사한가요? 2001.7.7(토) 정 끝별·시인 

이수익2 

나에겐 병(病)이 있었노라 

강물은 깊을수록 고요하고 

그리움은 짙을수록 말을 않는 것 



다만 눈으로 말하고 

돌아서면 홀로 입술 부르트는 

연모(戀慕)의 질긴 뿌리 속물처럼 쓰디쓴 

사랑의 이 지병(持病)을, 



아는가…… 그대 머언 사람아 

<해설> 시인 이수익(1942-) 

세상 살이가 너무 각박해진 만큼, 침묵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사랑의 아름다움은 언제라도 강조해 두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말들은 자칫 공허한 사탕 발림식 사랑의 잠언이 되기 쉽습니다. 이 시는 우선, 말하지 못하고 가슴 앓은 자의 "입술 부르트는" 아픔이라는 구체적 감각이 생생합니다. "연모의 질긴 뿌리 쑥물처럼 쓰디쓴 사랑"할 때의 절묘한 대구(對句)가 또한, 격정의 시간까지도 끝내 홀로 견뎌내는 고독한 표정을 운율감 있게 살려냅니다. 그리고는, 어느새 강물의 깊어짐과 그리움의 짙어짐을 견주는 노련한 사랑의 시를 완성했군요. 
2001.7.9(월) 박덕규·소설까 

고진하 

구룡사 은행나무 

올망졸망한 흥부네 새끼들처럼 

무수한 잔 가지들을 하늘 가득 거느리고 있었다 



그 잔가지들을 다 품을 수 없어 나는 

한아름도 넘는 나무 밑동을 힘껏 끌어 안았다 



그렇게, 사람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어린 은행 잎에 듣는 빗장울이 속삭여 주었다 



<해설> 시인 고진하(1953-) 

치악산 구룡사의 은행나무는 수령 200년이 넘은 것으로, 천년 기념물인 용문사의 은행나무에 비하면 크기가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균형 잡힌 위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풍만한 밑동에 발을 디디고 하늘로 솟아오른 잔가지들은 그야말로 어느 부잣집 잔치판에 올마졸망 모여든 천진한 아이들 같지요. 그 귀여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고진하 시인은 생명의 기둥인 나무 밑동을 힘껏 끌어 안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은행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이 깊은 사랑을 알아차리고 시인의 등과 얼굴까지 적셨음은 물론이지요. 7/10(화) 이숭원·문학평론가 

유용주 

시멘트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 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해설> 시인 유용주 (1960-)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하다는 말은 더 이상 새롭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먼지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들을 공격하는 데는 당해 낼 자가 없지요. 시인은 시멘트를 통해 그 오래된 진리를 새삼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철저히 부서진 시멘트 가루는 가장 순한 물과 더불어, 인간과 가까운 쪽에서부터 서서히 고요히 단단해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인간을 가장 강하게 만들기도 하죠. 인생이란 스스로 가루가 되도록 부서졌을 때 그때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2001.7.11(수) 정끝별·시인 

이은봉 

해님 

이번 장마로 

이삭거름 준 것, 제초제 뿌린 것 

다 헛걱 되겠다 

제기랄, 모두 허실되겄다 

하지만 일출봉 산마루 위로 

금세 해님 얼굴 내민다 

봐라, 여편네야 해님이다 

늴리리야 춤춰야겄다 

엎드려 절해야겄다. 

<해설> 시인 이은봉(1953-) 

하늘은 무심하게도, 부지런히 땀 흘린 사람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릴 때가 많지요. 이 즈음의 장마 때면, 제초제나 농약도 없이 농사를 지은 농부들까지도 엄청난 피해를 보지요. 그런데도 가을이 오면 우리네 밥상이 제법 풍성했던 까닭은 왜일까요?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도,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타오르는 해님을 바라보며 '닐리리야' 춤을 추던 그 체념, 그 해탈, 하늘과의 조화를 주저했다면, 오늘날 인류는 살아 남을 수나 있었을까요? 죽음과도 같은 재앙의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이미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겄다'는 사투리로 어깨 들썩이는 농부의 단순성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2001.7.12(목) 박덕규·소설까 

정진규2 

다시 쓰는 연서(戀書) 

사랑이여, 그렇지 않았던가 일순 허공을 충만으로 

채우는, 경계를 지우는 임계속도(臨界速度)를 

우리는 만들지 않았던가 허공의 속살 속으로 

우리는 날아오르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 힘이었던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해설> 시인 정진규(1939-) 

임계속도란 물체의 속성을 유지해 주는 제한된 속도를 말합니다. 물체의 움직임이 임계속도를 벗어나면 물체의 상태에 변형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진규 시인은 사랑이 사물의 경계를 지우는 임계속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사랑을 하면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은 왠지 들뜨고 풍성해지지요. 평소에는 건너뛸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경계를 넘어 허공의 극점을 향해 우리를 돌진하게 하는 막강한 위력을 행사하게도 하지요. 그것이 어설픈 만용이 아니라 대단한 정신의 저력임을,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사람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2001.7.13(금) 이숭원·문학평론가 

조오현 

내가 나를 바라보니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을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 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해설> 시인 조오현 (1932-) 

시인은 백담사에 살고 계시는 큰스님이십니다. 몇 해 전 친구로부터 "내 육칠십 평생이 벌레처럼 오그렸다 폈다 한 생이었다"라는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늘한 슬픔을 느꼈더랬는데, 그 말씀이 이시에 담겨 있군요. 일기입공(一技入功)이라는 말이 있지요. 자기나름의 올바른 방편을 찾아 평생을 두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경지에 이른다는속뜻을 담도 있습니다. 스님은 스님의 방편을 가지고 평생을 "오그렸다 폈다"만 반복하셨다니 그 공력이 대단할 것입니다. 우주를 손 바닥 안에 축소해 놓은 듯한 큰 시선이 장쾌하지 않습니까? 2001. 7.14(토) 정끝별·시인 

조정권2 

사자 잡이 

무더위 속을 한 사나흘 몸 몰고 나가 

충무 앞바다에서 사로잡았지 

등줄 시퍼렇게 일어선 사자 네 마리를 

파도 속에서 끌어올린 

퍼어런 천둥 갈퀴 

더위 한 조각 안 묻은 얼음 등 허리 

오! 산 채로 껴안고 뒹굴며 

남해 먼 바다까지 몰고 다니다가 

사자 세 마리를 안고 

몸 저어 왔지 

<해설> 시인 조정권(1949)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무더위를 탈출해 바다로 달려가곤 하겠지요. 푸른 바닷속에서 요동치는 파도와 어울려 몸 시리도록 노는 일이란 상상만으로도 즐겁지요. 하지만 그런 시간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화가는 바다와의 몸부림을 한 폭의 그림으로 찍어 시간을 연장하지요. 시인은 그림에다 더욱 생생한 이름을 부여하곤 한답니다. 넘실대는 파도의 모양을 사자들의 퍼런 갈퀴로 명명한 시인은, 어느새 그 사자을 껴안고 뒹굴어 사로잡아 버렸네요. 시인이 바다에서 몰고 온 이 야생의 싱싱한 사자들을 가슴에 품어 보세요. 7/16(월) 박덕규·소설까 

고두현2 

빗살무늬 추억 

청동 바람이 

종을 때리고 지나간다. 

화들짝 놀란 새가 

가슴을 친다. 

좌로 한 뼘쯤 

기우는 하늘 

별똥별이 

내 몸 속으로 

빗금을 치며 지나간다. 

<해설> 시인 고두현(1963-) 

종이 울리는 것을 청동 바람이 종을 때리고 지나간다고 하고, 종소리에 파문이 이는 것을 놀란 새가 가슴을 친다고 표현했어요. 종소리의 울림이 얼마나 신비로웠던지 하늘이 옆으로 비스듬히 기우는 느낌까지 받았지요. 그 순간 하늘 저편으로 별똥별 하나 스치고 지나가듯 내 몸 속으로 추억의 음파가 빗금을 긋고 지나갑니다. 그렇게 내 몸에 빗금을 남긴 추억은 정말 무엇일까요? 청동 종소리일까요, 아니면 차마 말할 수 없는 사랑일까요? 시인이 깊이 새겨진추억을 소리의 공간적 형상을 빌려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7/17(화) 이숭원·문학평론가 

천양희 

왜가리 

왜? 

왜? 

왜? 

악다구니 쓰며 

왜가리? 왜가리? 

악다구이 써도 

너의 날개를 누가 기억하리 

왜가리! 

<해설> 시인 천양희(1942-) 

왜가리의 목은 가늘고, 길고, 구부러져 있습니다. 마치 '왜?'라는 물음표처럼요. 전 백로와 두루미와 해오라기들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학의 일종이겠거니 합니다. 삼천리 화려 강산과 함께 등장했던, 을숙도에서 장엄하게 날아오르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흰 새떼들이겠거니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왜가리는 날고 싶지, 뜨고 싶지 않나 봅니다. 울음 소리들도 왜가리? 왜가리? 하는 악다구니처럼 들릴 것만 같습니다. 그런 왜가리에게 날개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왜가리? 왜가리? 악다구니 쓰며 땅에 들러 붙어 있는 이 왜가리는 우리들의 분신이겠죠? 언어 유희가 맛갈진 시입니다. 2001.7.18(수) 정끝별·시인 

이갑수 

사과 

놀라워라 

오! 오! 놀라워라 

좁은 문을 통과해내는 

나무의 외출이여 

자연의 배꼽이여 



태양 아래 빨간 단추여 

얼굴 앞의 둥근 열쇠여 



깨물면 수혈하듯 

솟아나는 하얀 피! 

<해설> 시인 이갑수(1959-) 

'사과 한 알을 두고 지나치게 감탄하고 있구나' 하고 볼멘 소리를 할 사람도 있겠군요. 어쨌거나, 한 알의 사과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발갛게 잘 익은 사과가 탐스러워 절로 손을 뻗거나, 결국 한 입 덥석 깨무는 그런 때의 느낌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정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생명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일마저 의심 받게 된 현실을 먼저 자각한 시인은 '생태시'니 '초록 생명의 문학'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기도 전에 '태양 아래 빨간 단추'라는 상큼한 비유를 찾아냈습니다. '수혈하듯 솟아나는 하얀 피'라고 할 때의 도발적인 감각은 용맹스럽기까지 합니다. 2001. 7. 19(목) 박덕규·소설까 

임영조 

아지랑이 

가파른 보릿고개 넘어 

부황든 얼굴로 어질어질 

동구밖 한길까지 따라와 

눈물 그렁그렁 배웅하시던 

어머니! 어머니! 

- 어여 가, 내 걱정 말구 

- 가서 몸 성히 공부 잘 허구 

아직도 가물가물 손 흔드신다. 

<해설> 시인 임영조(1945-)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보릿고개란 말도 없어졌지만, 먹을 것이라고는 시든 푸성귀조차 없어 맹물로 굶주린 배를 채우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험한 시절일수록 어머니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눈물겹게 피어오르지요.영양실조로 누렇게 뜬 어머니가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아들을 동구 밖까지 배웅하고 있습니다. 객지로 떠나는 아들 손에 쥐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겠지요. 가물가물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그저 여윈 손을 흔드실 수밖에.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도 어머니의 그 모습은 지워지지 않지요. 2001.7.20(금) 이숭원·문학평론가 

박상순 

돌이 울고 있었다 

돌이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돌을 먹었다. 



돌을 먹은 나는 

펭귄이 되었다 



배가 너무 무거워 

바닥에 스러졌다 

… 

뱃속에서 돌이 울고 있었다. 

<해설> 시인 박상순(1961-) 

돌이 울고 있었다니요! 그 돌을 먹고 펭귄이 되었다니요! 펭귄 뱃속에서 돌이 울고 있다니요! 아닌 게 아니라 돌을 보면 돌덩이가 뒤뚱거리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무겁게 뒤뚱거리는 펭귄의 걸음걸이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게 위태롭습니다. 돌과 펭귄을 연결시킨 상상력이 즐겁지 않습니까? 한데 곰곰히 생각하니 슬픔이 돌처럼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시입니다. 울고 있는 돌은 일상 속에서 끝없이 좌절하고 상처 받았던 실패의 더미들이겠죠. 뱃속에서 울고 있는 돌들이 우리의 봉분을 이룰 것만 같습니다. 소리없이 누군가가 온 종일 울고 있는데, 내 속에서 뒤뚱뒤뚱 울고 있는데 …. 2001.7.21(토) 정끝별·시인 

조윤희 

만다라 

숲속 오솔길 따라 

개미떼가 지나간다 

까투리를 박차고 나온 

알몸의 도토리가 

덱데구르 구른다 

빙글빙글 지구본이 돈다 

어기영차 

개미가 도토리를 끌고 간다 

<해설> 시인 조윤희 (1958-) 

모든 덕을 원만하게 갖춘 경지나 그것을 나타낸 그림을 일컬어 '만다라'라고 하지요. 누구나 희망하지만, 어느 누가 그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자신할 수 있으리오. 대체로 인간들이란 무엇 하나 만족하지 못해, 허구한 날 탐욕의 눈빛을 밝히고 불야성을 만들고 말지요. 시인은 인간들에게 숲 그늘 속에서 일어나는 조그만 움직임으로 그 화해로운 세계가 아주 가까운 데 있음을 알려 줍니다. 도토리와 개미의 만남 사이에 돌아가는 지구를 놓은 기발한 사유가 '덱데구르' '빙글빙글' '어기영차' 의 말놀음과 어울려 '만다라'의 한 경지가 되었습니다. 
2001.7.23(월) 박덕규·소설까 

이가림2 

시간의 모래 5 

로트렉의 고향 알비를 지나 

담홍(淡紅)의 도시 툴루즈로 가는 길 

편도나무 울타리가 있는 시골 역 벤치에 

긴 팔 넝클 장미인 양 

휘어감은 연인들의 십오분 간의 입맞춤 

<해설> 시인 이가림 (1943-) 

이국 여행은 흥분과 자극을 불러 일으킵니다.알비의 미술관에서 19세기 말 인상파 화가로 트렉의 그림도 보고 이름 자체가 매력적인 담홍빛 도시 툴루즈로 가는 여행 길에 벤치에서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을 보았군요.저도 몇 년 전 프랑스 바닷가를 여행할 때,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에 감흥을 이기지 못하여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연인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두 팔로 포옹한 연인의 모습을 넝쿨 장미에 비유한 것이 이채롭습니다. 그런데 그 입맞춤의 시간이 십오분 간이라니, 우리가 측정할 수 없는 이 시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2001.7.25(수) 이숭원·문학평론가 

안도현 

사랑 

여름이 뜨러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람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곁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해설> 시인 안도현(1961-) 

찌는 듯한 여름 '맴, 맴, 매앰' 목이 터져라 우는 매미 울음은, 마치 태양에 달궈진 철판이 뜨거워 윙윙 우는 소리만 같습니다. 한 놈이 울기 시작하면 신호라도 되듯 일제히 울어 젖히죠.한여름을 그렇게 울다가 단풍이 들 때쯤 그 생애를 마감하죠. 이 짧은 생을 위해 매미는 10년이 넘는 긴 시간을 어둡고 습진 땅 속에서 기다린다죠. 그러니 삶에 겨워 그렇게 우는 거겠죠.그 뜨거운 사랑을 내 보이려고 한사코 옆에 붙어 그렇게 우는 거겠죠.시인은 매미의 그 짧고 뜨거운 사랑 때문에 여름이 뜨겁다고 능청이네요. 매미 소리가 없는 여름은 수박 냄새 없는 여름만큼이나 싱겁겠죠. 2001.7.26(목) 정끝별·시인 

이하석 

소금쟁이 독서 

바람에 소금쟁이가 읽는 수면이 자꾸 접혀서 

스금쟁이들 뭘 읽는지도 모르는 채 허둥대네 



그 난독이 게워낸 파도가 물가에 밀려 와 

끊임없이 소곤대어 

내 맨발만 간지럽네 

<해설> 시인 이하석 (1948-) 

소금쟁이는 몸통 길이 1.5cm 정도되는 곤충으로, 가늘고 긴 다리로 물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신기해 보이지요. 바람이 불고 수면이 흔들려도 물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발 끝에 털이 있기 따문이지요. 파도에 밀리며 이리저리 출렁이는 소금쟁이를, 읽고 있는 책이 접혀 허둥대는 모습으로 묘사했군요. 그리고는 이번에는 소금쟁이의 '허둥대는 독서'가 파도를 게워냈다고 했어요. 그걸 바라보는 시인도 어느새 소금쟁이처럼 물 위에 붙어 서서 맨발로 그 파도를 느낍니다. 어쩌면 제가 시를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누가 소금쟁이의 '난독'이라고 하겠군요. 2001.7.27(금) 박덕규·소설까 

신대철 

無人島 

수평선이 축 늘어지게 몰려 앉은 바닷새가 

떼를 풀어 흐린 하늘로 날아오른다. 발 헛디딘 

새는 발을 잃고, 다시 허공에 떠도는 바닷새, 

영원히 앉을 자리를 만들어 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는 바닷새. 

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로 가고 있다. 

<해설> 시인 신대철(1945-) 

추종을 불허하는 이미지와 비약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수평선이 축 늘어지게 몰려앉은 바닷새라니요! 전깃줄에 찹새들이 앉아 있듯, 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며 바닷새가 앉을 자리를 만들다니요! 떼로 몰려 다니며 발을 헛딛고 허공을 떠도는 바닷새의 모습은 어딘지 인간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끝없이 인간의 흔적을 거부하지만 허공을 떠도는 바닷새, 아니인간에게는 수평선 한 자락을 내 주며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바다, 그리고는 인간의 흔적인 물거품을 버리기 위해 무인도를 찾는 바다, 그런 도저한 바다라면 올 여름 한 번 먼 발치로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2001.7.28(토) 정끝별·시인 

서정춘 

수평선 

하늘 밑 바다 위에 

빨랫줄이 보인다 

빨랫줄 위에는 

다른 하늘이 없고 

빨랫줄에 

빨래는 파도뿐이다 

<해설> 시인 서정춘(1941-) 

수평선을 시로 표현한 사람은 아주 많을 텐데 그것을 빨랫줄에 비유한 사람은 서정춘 시인뿐입니다. 왜 하필 빨랫줄이냐고요? 공중을 가로지른 빨랫줄 위에 푸른 하늘이 펼처져 있고 그 아래엔 크고 작은 빨래가 바람에 너울대는 장면을 예전에는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하늘과 바다를 갈라 놓은 수평선에서 파도가 빨래처럼 펄럭이는 한 줄 빨랫줄을 떠올렸던 것이지요. 2001.7.30(월) 이숭원·문학평론가 

이생진2 

無名島 
-그리운 바다 城山浦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해설> 시인 이생진(1929-) 

제주도에서부터 매물도·청산도·마라도·나로도·석모도 그리고 숱한 무명도에 이르기까지, 흥부가 제 새끼들을 보듬어 안 듯, 삼면으로 올망졸망 섬들을 거느리고 있는 곳, 이맘때쯤이면 그 섬과 바다를 보려고 저리 뭍 끝으로, 뭍 끝으로 떠나가지요. 정말 이름 없는 그 어떤 섬에서 한 달만, 딱 한 달만 살다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가함과 무료함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그리운 것들이 없어졌다 다시 생길 때까지만요. 시인은 다른 시에서 또 이렇게 귀띔해 주네요. "돈을 모았다/ 바다를 보러 간다/ 상인들이 보면/ 흉볼 것 같아서/ 숨어서 간다" 요란스럽지 않되 살뜰한 휴가가 되시기를…. 2001.7.31(화) 이숭원·문학평론가 

김종해 

새는 자기 길을 안다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한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해설> 시인 김종해(1941-) 

하늘에 새 날아가는 것을 본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공해로 찌든 하늘에 무슨 새가 날겠습니까? 바다에는 뱃길이 있고 공중에는 항로가 있는데, 새도 하늘을 나는 길이 있을까요? 
시인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다만 새는 자신이 나는 길을 스스로 지우기 때문에 사람에게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새는 별들이 가는 길까지 미리 알고 별 아래 자신의 길을 마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 사람은 얼마나 한심한 존재입니까? 2001.8.1(수) 이숭원·문학평론가 

이재무2 

밥알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해설> 시인 이재무(1958-) 

한 그릇에 '밥'과 '사랑'을 맛깔스럽게 퍼담아 놓고 있네요. 사랑(밥) 앞에 평등, 사랑(밥) 앞에 영원, 사랑(밥) 앞에 평화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반성하면서 읽으라는 주문일 겁니다. 밥이 아니더라도 갓 지어낸 모든 것들은 말랑말랑한 사랑, 연하디 연한 평등 그 자체였을 겁니다. 갈수록 질겨지고 독해지니, 갈수록 흩어져 제것 챙기고 하다보니, 말랑말랑하고 연한 그 첫 끈기를 잃는 거겠죠? 2001.8.2(목) 정끝별·시인 

지영 

우물 

손 닿지 않는 

깊은 우체통에 

소리내어 읽고 싶은 

사람들 마음이 있다 

한밤의 편지와 

첫새벽의 편지가 있다 

비 오는 날의 편지 

눈 오는 날의 

편지가 있다. 

<해설> 시인 지영(1957-) 

가까이 있고 또 궁금한 것인데도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있지요. 우물 속도 그런 것 중의 하나였지요. 이 시는 그 우물의 이미지를, 속을 감추고 있는 우체통으로, '소리 내어 읽고 싶은 편지'로 변주해 가고 있습니다. 은밀해서 알고 싶고, 그러다 간절해지는 것이 누군가를 향해 열린 사람의 마음 아닐까요? 밤을 하얗게 밝히고도 몇 줄도 쓰지 못한 그 마음 말이지요. 이즈음 휴대전화로, 이메일로 즉각적으로 주고 받는 사연들은 과연 어떤 설렘을 갖게 되던가요? 2001. 8.3 (금) 박덕규·소설까 

장석남2 

길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을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해설> 시인 장석남 (1965-) 

팥배나무는 잎과 열매가 아름다운 낙엽 교목입니다. 점점이 떨어진 하얀 꽃잎도 물론 아름답지요.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하약 꽃잎이 앉아 있는 바위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길입니다. 정말로 몸서리치게 아름다운 것은 나무 줄기에서 바위까지 스쳐 지나온 꽃잎의 길들 (길들이라니, 그 허공에 얼마나 많은 작은 길들이 숨쉬고 있겠습니까?)을 모두 가 걸어보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우리의 눈으로도 꽃잎의 길을 엿볼 수 있을까요? 2001.8.4 (토) 이숭원·문학평론가 

김영무 

채마밭 

총각 냄새 물씬 풍기는 무밭 곁에 

웃음 소리 소란스런 배추밭 

아낙들 머리에 쓴 흰 수건처럼 환한 

달빛 웃음 밤새워 참느라고 

배추고갱이 노랗게 속이 밸 때 

무들은 흙 속에서 

수음하며 몸집을 불린다 

신병 훈련소 같은 무밭 

신참 이등병 일개 소대 출소 준비 끝 

<해설> 시인 김영무 (1944-) 

한여름 밤의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군요. 시인은 무밭에서 총각냄새를 맡고, 배추밭에서 아낙들 웃음 소리를 듣고 있네요. 출소 준비를 끝바쳤으니 이제 툭 불거진 푸른 심줄 같은 무 밑둥을 내로라 하듯 드러내 놓겠지요? 무밭과 배추밭이 왜 이웃해 있는지, 무 몸집이 왜 그렇게 붙어 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추밭 곁에 상추밭이, 오이나 가지밭 곁에 깻잎 밭이 이웃해 있는 거, 그게 다 궁합이었군요! 8.6(월) 정끝별·시인 

박승미 

모과 9 

불켜놓고 잠이 드신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 

제가 왔어요 

젖가슴 속으로 손 

쓱 들어밀면 

부시시 눈뜨시며 

"꿈이 생시 같아,야" 

<해설> 시인 박승미(1944-) 

관상용으로나 방향제 삼아 방안에 둔 모과의 부담 없는 모양새와, 일과를 마치고 빈 방에서 식구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든 어머니의 얼굴을 겹쳐 놓았네요. '생시'를 '꿈'으로 느끼는 어머니의 '비몽사몽' 속에 복잡하고 말썽 많은 일상의 피곤함을 일시에 씻겨 내려가게 하는 해학이 있군요. 투박한 속에 깊은 속정이 있다는 식의 해묵은 이야기지만, 그 해묵음이 때로 얼마나 우리를 편하게 하는지요. 우리에게는, 어쩌면 편안한 집에서 손쉽게 휴식을 취하는 일도 낯선 일이 된 건 아닌가요? 2001.8.7(화) 박덕규·소설까 

김종삼2 

앤니로리 

노랑나비야 

메리야 

한결같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한결같이 마음이 고운 이들이 

산다는 곳을 

노랑나비야 

메리야 

너는 아느냐. 

<해설> 시인 김종삼(1921-1984) 

스코트랜드 민요 '애니로리'를 들어보셨겠죠?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하는 아름다운 곡이지요. 그 곡과 이 시의 관련성을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세상의 속된 언어로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곳의 순수한 아름다움만 떠올리면 됩니다. 음악이 펼쳐내는 아름답고 고운 세계를 이 세상에서도 찾을 수 있을까요? 시인은 엉뚱하게도 노랑나비와 메리에게 그 곳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진흙 구덩이를 뒹구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물을 것이 없었겠지요. 2001.8.8(수) 이숭원·문학평론가 

박 찬 

수몰지구 

이른 아침,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린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금 저 물 속을 

누구, 아직도 떠나지 못하는지 

끌끌 소 몰아 모퉁이 돌아나오는 소리 들린다 

<해설> 시인 박 찬 (1948-) 

사람들이 공들여 구축한 인공호수의 경관도 제법 흥취를 불러일으키지요.수해 대비, 수력 발전 등 여러 목적에 따라 생겨나지만, 주위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지면 휴양지도 되고 유람지도 될 수 있지요. 한데,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인 적이 있는지요? 이른 아침 인공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그 소리를 들은 시인이 있군요.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닭은 울고, 농부는 끌끌 소를 몰아 모퉁이를 돌아나온다는군요. 
8/9(목) 박덕규·소설까 

고재종2 

전각 (篆刻)2 

푸르른 한때 

애인의 이름을 나무 둥치에 새기며 

소리 죽여 운 적이 있다. 



수천 수만 나뭇잎이 일렁거렸다. 

<해설> 시인 고재종(1957-) 

젊은 날의 사랑은 열정도 뜨겁지만 끝나고 난 뒤의 회한도 크고 깊습니다. 여기 애인의 이름을 나무에 새기며 소리 죽여 우는 젊은이가 있군요. 말 못할 사연이 얼마나 참담했기에 애인의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을까요? 나무 둥치에 이름을 새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가슴 속에, 마음 깊은 곳에 한 자 한 자 새겨 넣었겠지요. 그 아픈 사연에 수천 수만 나뭇잎도 덩달아 일렁거렸던 것이겠지요. 2001.8.10(금) 이숭원·문학평론가 

이선영2 

수저와 어머니 

어머니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그것을 주워 드신다 

내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다시 그것을 주워 드신다 

내가 부주의하게 떨어뜨린 수저의 개수만큼 

허리를 굽히신 어머니 

<해설> 시인 이선영 (1964-) 

움푹 파인 수저를 보면, 밥과 밥벌이와, 밥벌이의 공고함이 먼저 떠오르곤 합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담아야 하고 왕복을 되풀이해야 하는…. 어머니가 떨어뜨린 수저는 어머니가, 우리가 떨어뜨린 수저도 어머니가 주우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바닥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이고, 그래서 어머니는 힘이 세고 위대한 존재인 겁니다. 온 식구들의 수저를 주우시느라 등 굽은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2001. 8.11(토) 정끝별·시인 

이사라 

자서전을 읽는다 

마음 스치고 간 칼날들이 그믐달로 뜬다 

일생 땅에 집을 짓지 못하는 칼새의 짧은 다리, 긴 날개 

허공에 알을 낳고 허공을 박차고 허공에서 낫을 갈고 

허공만이 그의 허파였던 

<해설> 시인 이사라 (1954-) 

바위 절벽에 가파르게 집을 짓고 사는 칼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누르스름한 그믐에서 그믐으로, 허공에 집을 짓고, 허공에서 밥을 먹고, 허공에서 짝짓기를 하며 보내는 허공의 노숙자들. 허공 그 자체인 새들. 그러니 칼새의 다리는 짧고 날개는 긴 것이겠죠? 그런데 허공에 달라 붙어 있으려면 그들의 발톱은 얼마나 튼튼해야 할까요? 그 '허공의 낫'만이 허공과 허공을단단하게 묶어 주는 힘일 겁니다. 2001.8.13(월) 정끝별·시인 

장옥관 

염산(鹽山)에서 

왕소금에 썩썩 썰은 돼지고기 몇 점 

소금포 나르다 새참 먹는 일꾼들 틈에 끼여 

공으로 얻어먹는 탁주 한 사발 

오리들이 뒤뚱대며 길을 건너고 있다 

어질머리 붉은 해가 섯등 갇힌 바다에 빠져든다 

길 옆 논에는 불을 뿜는 싯푸른 볏잎들 

바다는 멀어도 고기떼 지나는 소리 잘 들린다 

<해설> 시인 장옥관 (1954-) 

염전에서 소금포대를 쌓던 일꾼들이 잠시 일손을 놓았군요. 탁주 한 사발에 투박하게 썬 돼지고기를 왕소금에 찍어 먹는 그들의 모습에서 땀 흘린 사람의 진정한 휴식을 엿보게 됩니다. 그 배경에서, 바다에 빠지는 해와, 논의 벼들이 각기 자신의 색깔을 뿜어 절묘한 황혼의 풍경을 연출합니다. 시인도 어느 새 그 풍경 속에 녹아 들었군요. 사람과 바다, 빛과 소리가 어우러진 이 염전의 한때를 그림인 양 벽에 걸어 놓고 싶네요. 01.8.14(화) 박덕규·소설까 

정호승2 

그리운 목소리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 

귀대어 보면 

나무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 날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밥 머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해설> 시인 정호승(1950-) 

중년 나이에 접어드니 아무개야 하고 그냥 이름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 이름을 가장 정답게 불렀던 분은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입니다. 철없이 놀던 시절 어스름이 깔리면 밥 차리던 손을 행주치마에 씻으며 골목 어귀에까지 나와 저를 부르셨지요. 그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사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리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호승 시인은 행복합니다. 나무와 사귀지 못한 나는 어디에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8.15(수) 이숭원·문학평론가 

김춘수2 

국밥집에서 

이 더운 날에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을 

부글부글 끓는 맵싸한 국물과 함께 

꿀꺽 삼킨다. 혹은 개 패듯 

두들겨 팬다. 

비명을 한 번 질러 보라고 

질러 보라고 

오늘이 복날이니까. 

<해설> 시인 김춘수(1922-) 

복날을 노린 개 도둑들이 한창이라죠? 복날에는 술과 음식을 마련해 산간 계곡으로 들어가 탁족(濯足)을 하거나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 찜질을 해야 제격이겠지만, 그럴 수 없으시면 멍멍탕이라도 드시면서 (아뿔사!) 가슴속 부글부글 끓는 것들. 냅다 소리라도 질러 보든가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패 보시든가요. 아쉬운 대로 삼계탕이나 드시면서 꿀꺽 삼켜 버리시든가요. 2001, 8.16 (화) 정끝별·시인 

정현종2 

밤 시골 버스 

멀리 보인다 

밤 시골버스 

버스 안이 환하다. 

어렴풋이 승객들 보인다 

멀리 환하게 지나가는 

시골 밤 버스. 

그를 몽땅 하늘에 올려 놓고 싶다 

제일 밝은 태양처럼. 

<해설> 시인 정현종 (1939-) 

시골의 밤, 사방이 모두 깜깜할 때, 그 속을 지나가는 버스를 어쩌다 보게 되면, 그게 버스 같지가 않고 무슨 광명을 전하러 가는 빛의 화물 같아 보이지요. 낮에 보면 필시 곧 폐차될 중고 버스일 테지만, 그게 그렇게 환할 수 있다니요! 굳이 내 보일 것 없는 제 몸속까지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시골 버스의 촌스러운 답답함에 시인은 그만 탄복을 하고 말았네요. 저 시골 버스야말로 우주요 신성이다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2001.8.17(금) 박덕규·소설까 

송수권2 

밀잠자리 

어찌나 이쁘든지요 

이른 아침 논둑길을 걷다가 볏잎 뒤에 붙은 

푸시시 막 잠깨는 밀잠자리 한 마리 

어느 날 내 영혼도 저렇게 가벼울 수만 있다면 

젖은 이슬 털어 말릴 수만 있다면 

어찌나 이쁘든지요 

그 견인의 시간 다 지나고 신생의 아침 

투명한 햇살에 날아오르는 아른아른한 빈 날개 

저 알 수 없는 하늘 뒤로 사라지는……. 

<해설> 시인 송수권 (1940-) 

요즘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밀잠자리는 날개가 투명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른 아침 볏잎 뒤에 붙었다가 이슬을 털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밀잠자리의 모습을, 시인은 세상의 잡다한 티끌을 떨쳐 버린 순결의표상으로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비지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우리 사람들도 견인의 시간을 다 지나면 그렇게 홀가분한 신생의 아침을 맞게 될까요? 투명한 날개가 가뭇없이 사라진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8.18(토) 이숭원·문학평론가 

정화진 

두 장의 유리판 사이에 
물기가 있을 때처럼 

얇은 액체 층을 사이에 두고 

단단히 붙어 있어 

물안개 같은 그 무엇이 

어릿하게 

두 장의 유리판 사이에 물기가 있을 때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그렇게 젖어 

<해설> 시인 정화진(1959-) 

사람들은 서로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연인이나 친구 사이, 원수지간…. 이렇게 분명한 경우도 많지요. 이외로 아무런 사이가 아닌 듯한데도 알 듯 말 듯 서로를 향해 자꾸 눈길을 주는 사이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비중이 더 클지도 모를 그런 사람 사이를 시인은, 물기로 맞붙은 유리판 두 장 사이의 '물안개' 무늬에서 읽어 냈군요. 그 '아릿함' 속에 인간의 비밀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요? 2001. 8.20(월) 박덕규·소설가 

이시영2 

기억 

인사동 처마 끝에 낙숫물 듣는 소리 

방금 비둘기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가 파르르 젖는다. 

<해설> 시인 이시영 (1949-) 

한 바탕의 비가 사물을 적신 직후, 그 지묘(至妙)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네요. 처마 끝 낙숫물소리에 비둘기가 앉았다 날아가 버린 그 자리가 젖습니다. 젖음이란 부재하는 것에 대한 기억이고 추억이고 흔적이겠죠. 그 기억의 미세한 무늬와 결을 '파르르'하는 부사가 감칠맛 나게 전해 주고 있네요. 순간적인 생의 흔적 혹은 그 움직임을 묘파해 내는 미세한 시안(詩眼)입니다. 2001.8.21(화) 정끝별·시인

서림 

여름 아침 

7.5평 아파트 작은 베란다에 

어린 햇살이 내려와 아장아장 논다 

알로에에 올라앉은 참새, 부르르 

덜 빠져 나간 잠기운 털어내고 햇살 받아 챙긴다 

허리뼈에서 올라오는 신음 혼자 삼키며 

어머니, 저승옷 꺼내와 다듬는다 

참새가 허옇게 센 정신으로 들어와 

이따금 둥우리를 친다 

햇살 먹는 어머니, 새우등을 하고 

여름 아침 하늘 톡, 톡, 날아다닌다 

<해설> 시인 서림 (1956-) 

작은 아파트 베란다에 아침 햇살이 천진하게 비치고 거기 또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놉니다. 모두 다 정겹고 싱싱한데 머리가 허옇게 센 어머니는 허리의 통증을 참으며 등을 굽힌 채 수의를 다듬고 있군요. 이 노쇠한 어머니가 참새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여름의 싱싱한 햇살을 듬뿍 받아들이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상상만으로도 어머니의 휘어진 등이 쭉 펴질 것 같네요. 2001.8.22(수) 이숭원·문학평론가 

안찬수 

욕심 

은행나무 밑에 서 있으면 

은행나무가 되고 싶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으면 

소나무가 되고 싶고 



감나무에 기대어 서 있으면 

감나무가 되고 싶고 

<해설> 시인 안찬수 (1964-) 

기대어 서 있고 싶은 것이 어디 은행나무, 소나무, 감나무뿐이겠습니까? 그나마 '되고 싶기'만 해서 다행입니다. 되고 싶은 것들이 죄다 '나무들'이라서 다행입니다. 나무는 말이 없습니다. 나무는 변덕스레 오가지 않습니다. 나무는 아낌 없이 모든 것들을 다 내주고 다 받아들입니다.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하니, 이 시의 제목은 욕심(慾心)이 아니라 '무심(無心)이어야겠습니다. 2001.8.23(목) 정끝별·시인 

박정남 

이 속옷은 

이 속옷은 

손으로 부벼 빨아 

햇볕에, 비바람에 펄럭이는 채로 

성질도 카랑카랑하게 날이 서도록 

잘 말린 옷이다. 

하이타이 한 수푼과 함께 

세탁기에 넣어 탈수해서 

뒷 베란다에 먼지 낀 새시문도 열지 않고 

텁텁한 공기 속에서 

시름시름 말린 

옷과는 다르다. 

<해설> 시인 박정남 (1951-) 

손빨래가 세탁기보다 좋다니 기계화를 거부하고 자연성을 예찬하는 '빤한 시로구나, 하다가 아연하게 되었습니다. '텁텁한 공기나 시름시름 말린 옷에 비해 '성질도 카랑키랑하게 날이 선'이라니 얼마나 선연한지요. 그 '카랑키랑함, 속에 생태계의 질서를 깨는 문명사회의 급진적인 변화에 앙칼지게 대응하는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면 너무 '빤한 이해'가 될까요? 2001.8.24. 2001.8.24(금) 박덕규·소설까 

박용래 

풀꽃 

홀린 듯 홀린 듯 사람들은 

산으로 물구경 가고 

다리 밑은 지금 위험 수위 

탁류에 휘말려 휘말려 뿌리 뽑힐라 

교각(橋脚)의 풀꽃은 이제 필사적이다 

사면(四面)에 물보라치는 아우성 

사람들은 어슬렁어슬렁 물구경 가고 

<해설> 시인 박용래(1925-1980) 

장마로 물이 불어나자, 교각 틈을 비집고 돋아난 풀꽃이 탁류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작은 풀꽃에게까지 생의 의지를 불어넣은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위험에 직면한 연약한 생명과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들을 대비시켜 삶의 비장함까지 드러내려 했어요. 이처럼 짧은 형식 속에 생의 진실을 압축해 놓을 때 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준답니다. 2001년 8월 27일 (월) 이숭원·문학평론가 

장석주 

빵 

누군가 이육체의 삶, 

더 이상 뜯어 먹을 것이 없을 때까지 

아귀아귀 뜯어먹고 있다! 

이스트로 한 없이 부풀어오른 내 몸을 

뜯어먹고 있다! 

<해설> 시인 장석주 (1995-) 

거나해지면, 엄마는 내가 "내가 니들 집이다! 내가 니들 밥이다!"하셨고, 아버지도 "거지도 밥 세 끼는 먹는다! 어떻게 먹느냐다!"하셨습니다. 선배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밥 먹고 합시다!"했습니다. 언제나 밥과 빵이 문제인 겁니다. 먹고 사는 일은 곧 누군가를 혹은 스스로를 뜯어먹는 일인 겁니다. 그러니 밥과 빵이 비애라는 거지요. 8/27(월) 정끝별·시인 

오탁번 

응가 

어린 아기 똥누듯 

냄새 풍기면서도 예쁜 것이 시다 

젖몸살 앓는 엄마의 아픔처럼 

눈물과 미소가 얽힌 것이 시다 

홍등가에서 사랑을 파는 여자들의 

곪았지만 자꾸 파들어가고 싶은 어둠이 

그 냄새나는 절망이 예술이다 

<해설> 시인 오탁번 (1943-) 

시가 무엇이고, 예술이란 어떤 것인가 하고 묻는 이에게 이 시를 읽어 드리고 싶군요. 정녕 아름다운 것에는, 똥도 묻고, 진한 아픔의 체험도 스며들게 되어 있지요. 아니, 시는 그렇게 예쁘고 기쁜 쪽을 향해서만 열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 값진 시는, '곪았지만' 다시 어두운 쪽을 파들어가는 치명적인 절망까지도 품에 안지요. 밝은 데서 빛을 구하는 단순 논리로는 시의 진정한 경지에 닿지 못한 채, 시의 겉모양만 보고 탄복하곤 하지요. 
2001.8.28(화) 박덕규·소설까 

조창환 

사람의 동네 

새벽 창 밖의 어둠 속으로 

가로등 불빛이 포도알처럼 흩어져 있다 

초저녁보다 훨씬 정숙해지고 

무거워진 어둠을 뚫고 

불빛은 두텁고 축축해져 있다 

배경이 짙어질수록 

스스로의 무게로 고개 숙이는 

가로등 불빛을 품고 있는 

사람의 동네가 가을 과수원 같다 

<해설> 

사람의 동네라고 하면 먼저 각박한 삶의 현장이 떠오르곤 하지요. 그러나 시인은 새벽 어둠 속에 빛나는 가로등을 포도알로 보고, 그렇게 불빛이 흩어져 있는 사람의 동네를 열매가 익어가는 가을 과수원으로 상상하였습니다. 하루의 시작인 새벽을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 비유한 것이 이채롭지요? 여기에는 새로 얻은 생명의 자리에서 사람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담겨 있습니다. 2001.8.29(수) 이숭원·문학평론가 

오정국 

별똥별 

하늘에 

먼지의 폭발이 일어난다 유성, 

일생 동안 돌고 돌던 

하늘의 길을 버리고 

비로소 불탄다 피 흘리듯 타오르는 

반역의 불꽃은 아름다워라 눈이 멀도록 

각막이 타 버리도록 

<해설> 시인 오정국(1955-) 

태양계를 임의로 떠돌던 바윗덩어리가 대기권에 들어오다가 대기권에 마찰하면 폭발하듯 무서운 빛이 발생합니다. 밤 하늘에 아연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그 발광체를 일컬어 우리는 별똥별이라 하지요. 그는 무슨 이유로 일생 동안 돌던 '하늘의 길을 버렸을까요? 아니 그가 자신의 궤도에 안주하고 있었던들 우리는 그 신비로운 우주의 장난을 볼 수 있었을까요?생을 내던진 반역에서 '절대의 미학'을 찾는 때 아닌 탐미주의가 새삼 돋보이는 시절입니다. 
2001. 8.31(금) 박덕규·소설까 

정두리2 

바람의 울음 

아기 소나무를 보며 

바람이 매를 듭니다 

쑤 - 욱 

가슴을 펴! 

매를 맞으며 우는 것은 

소나무가 아닙니다 

회초리 내전지고 

긁힌 자국 만져주며 

오래도록 

바람은 울고 있습니다. 

<해설> 

찬 바람이 불어와 어린 나무를 흔듭니다. 아기 소나무가 잘 크려면, 그 바람을 견뎌내야 합니다. 바람이 그걸 알고 더욱 거세집니다. 소나무가 참지 못하고 우는 듯하지만, 울고 있는 건 실은 바람이 아닐까요. 정두리(1947-) 시인은, 겨울날 모질게 나무들을 흔들며 우는 소리를 내는 바람을, 아이가 잘 되라고 혹독한 매질로 꾸짖고는 가슴아파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001.12.1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신형건2 

…… 없는 

창문이 없는 집, 답답하지? 

가로수가 없는 길, 허전하지? 

바람이 불지 않는 언덕, 가고 싶지 않아.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 심심하지? 

열쇠를 잃은 자물쇠, 영영 잠만 잘테지 

불이 나간 저녁. 깜깜하지? 

별이 없는 밤, 말도 안돼! 

그럼, 이건 어떻겠니? 

내가 없는 세상. 

<해설> 

사람들은 집이 답답하면 창문을 만들고, 풍경이 허전하면 가로수 길을 내지요.사라진 양말 한 짝을 찾다가 지각하는 때도 있지요.별 없는 밤 하늘은 우리의 관심 밖이랍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의 느낌이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더군요. 한편으로는 '나 없는 세상'에 대한 속 깊은 생각도 한 번쯤 해 보라고 신형건(1965-)시인이 권하는 듯하군요. 
2001.12.3(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공재동2 

이슬 

잘 가라는 

풀잎의 

인사처럼 

더러는 

글썽이는 

눈물처럼 

밥새 

풀잎에서 

속삭이다 돌아간 

별들의 작별처럼 

<해설>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면 절로 마음이 맑아지지요. 바쁜 사람들은 이슬의 인사를 받으며 길을 떠나지만, 동심을 간직한 사람들은 밤새 이슬에 서린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인사처럼… 하고 반복되는 말놀이로 이슬방울들의 싱싱하고도 아련한 이미지를 공재동(1949-) 시인이 살려 놓았습니다.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신현득2 

첫눈 

첫눈은 첫눈이라 연습 삼아 쬐끔 온다. 

낙엽도 다 지기 전 연습 삼아 쬐끔 온다. 

머잖아 함박눈이다 알리면서 쬐끔 온다. 

벌레알 잠들어라 씨앗도 잠들어라. 

춥기 전 겨울 옷도 김장도 준비해야지. 

그 소식 알리려 첫눈은 서너 송이. 

<해설> 

첫눈은 오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살짝 왔다가 가곤 하지요. 함박눈을 고대한 사람들에게 서너 송이 오는 첫눈은 참 서운하지요. 하지만 겨울 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는 이들에게는 고마운 일이지요. 아쉽게도 쬐끔만 내리는 첫눈이, 벌레알과 씨앗과 사람에게도 미리 추운 겨울을 대비하라고 알려 주는 자연의 전령이라고 신현득(1933-) 시인이 재치있게 일러 주는군요. 2001.12.5(수)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권영세 

겨울 과수원 

겨울, 

과수원에 나가 보아요. 

잎 진 탱자나무 울타리 지나는 

아기 바람 

나무 가시에 가슴 찔려 

울과 있어요. 

<해설> 

겨울 과수원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여름내 그 푸르던 생명과 탐스럽던 가을의 영화를 다 거둬들이고 사람의 발길조차 끊긴 그곳은 어느새 바람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아기 바람이 그만 탱자나무 가시에 찔려 울고 있군요. 그 울음이 그냘 애틋하지만은 않지요. 시인은 겨울 속 자연의 대화를 그 울음을 통해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12.7(금)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손광세2 

담쟁이 덩굴 

눈발이 날리는 

교실 창밖 

바위벽을 

감싸고 있는 

파란 

실핏줄. 

팔딱,팔딱 

맥박이 

뛰고 있었구나! 

바위벽이 

살아 있었구나! 

<해설> 

겨울에도 땅 깊은 곳에서는 생명의 움직임이 있지요. 하지만 어깨를 움츠리고 겨울을 나고 있는 우리는 그 힘을 느낄 수 없어요. 그던 어느 눈발 날리던 날,창밖 바위벽에서 어떤 기운을 보았네요. 차갑고 딱딱한 벽에 몸을 기대고 어떻게 그런 생명이 뻗어나갈 수 있을까요? 손광세(1945-) 시인은 담쟁이 덩굴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읽어 낸 것이지요. 
2001.12.8(토)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이준관2 

별 하나 

별을 보았다. 

깊은 밤 

혼자 

바라보는 별 하나. 

저 별은 

하늘 아이들이 사는 집의 

쬐그만 초인종. 

문득 

가만히 

누르고 싶었다. 

<해설> 

청정한 밤 하늘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보았습니다. 문득 별들의 세상에 살고 있을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그 별이 그 아이들 집의 문을 열게 하는 초인종처럼 느껴지는군요. 그렇잖아도 한 번 눌러 보고 싶었으니까요. 이준관(1948-)시인은 밤 하늘 별 하나에 , 미지의 하늘 아이들과 다정한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동심어린 상상력을 담았습니다. 
2001.12.10(월)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이상교 

망망망 

작은 두 귀가 

망망망 

작은 발 네 개가 

망망망 

작은 엉덩이가 

망망망 

작은 꼬랑지가 

망망망 

우리 강아지가 

맨 처음 짖은 날. 

<해설> 

낯선 이가 찾아오면 맨 처음 짖으며 경계하는 일이 개의 몫이지요. 그런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짖어도 위협적이긴커녕 귀엽게만 들립니다. 태어나 처음 짖는 강아지의 외침이 우리 집 아기의 옹아리 같기도 하고, 이웃집 아이가 부르는 동요 같기도 하지요.이상교(1949-) 시인이 '망망망'하는 소리에다 어린 강아지의 앙증맞은 움직임을 모두 담았으니, 소리와 모양의 절묘한 어울림이라 할 만하다. 2001년 12.11(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손동연2 

기린 

기린은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될 거야 

목 

이 

길 

어 

서 

뱃속까지 가는데도 

하루가 다 걸릴 테니까 

<해설> 

한 아이다 기린의 기다란 목을 보고 막 떠올린 생각일 테지요. 손동연(1955-)시인은 기린 앞에 선 그 아이의 마음을 읽어 낸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아이가 고개를 젖히고 기린을 쳐다보는 눈길과 표정까지 읽고는 '목/이/길/어/서'하고 시행을 나누어 기린 목처럼 길게 늘려 놓았지요. 그런데 기린이 입으로 먹은 밥은 정말 얼마 후에 뱃속에 가 닿는 것이지요? 
2001.12.13(목)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선용 

섬은 

파란 들판에 

홀로 핀 

한 송이 꽃 

꽃 

꽃 

파도 소리 

그리운 

작은 귀 

귀 

귀 

<해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은, 파란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이라 할 만하지요. 하지만 섬은 아름다움을 갖는 대신 스스로 외로운 단독자로 남아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섬은 늘 파도에 실려 오는 물 소식이 그리워 파도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지 모르지요. 섬이 갖는 아름다움과 고독을, 선용(1942-)시인은 꽃과 귀로 의미 있게 표현해 냈지요. 
12.12(수)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전양웅 

새벽 

밤 새워 가난을 깁는 

어머니 손 끝에서 

빛이 풀린다. 



바느질 솔기마다 피어오르는 

기다림의 빛 속에 

해맑은 아가의 얼굴이 뚜렷해진다. 

<해설> 

새록새록 잠이 든 아가 옆에서 어머니가 밤 새워 바느질을 하고 있었군요. 그 어머니의 노동이 잠을 아주 편하게 해 주었지요. 잠이 깊을수록 더욱 해맑아진 아가의 얼굴은 지친 어머니의 손 끝에서 빛이 풀리게 하는 힘이 됩니다. 전양웅 (1940-) 시인은 바느질 솔기에 스민 새벽 빛에 어머니의 사랑과 아가의 희망을 함께 모았습니다. 12.14(금)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김구연2 

성에 

발이 시려운데 

하얀 이를 드러내 

네가 웃고 있구나. 



유리창에 

어룽지는 

마음의 그림자. 

<해설> 

누군가 창밖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보니 그게 아니라 유리창에 성에가 낀 것이었지요. 모른 척 다시 공부를 하다 보면 또 누군가의 표정이 느껴지는 걸 어쩐답니까. 저 추운 밖에서 하얗게 웃고만 서 있는 그사람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성에의 모양새를 연민어린 마음의 만남으로 읽은 김구연(1942-) 시인의 솜씨가 볼 만하군요. 

2001.12.15(토)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송년식 

눈과 눈 

창 밖을 보던 엄마가 

"야, 눈:이다." 하자 

아이는 "눈?"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엄마가 다시 

"응, 눈:!" 하자 아이는 

콕 

손가락으로 

제 눈을 누릅니다. 

<해설> 

똑같은 말에도 길 게 발음하는 말과 그것보다 짧게 발음하는 말이 있지요. 아이가 이 말의 작은 차이를 하나씩 알아 간다는 것은, 실은 세상 만물의 이치에 대해 조금씩 눈떠 간다는 뜻이기도 할 테지요. 송년식(1956-) 시인의 동시 속에서 자기 눈을 누른 이 아이도 얼마 사이에 부쩍 성장할 것 같군요. 2001년 12월 17일(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허동인 

보름달이 나 보고 

환하고 밝게 살려거든 

둥근 마음 가지라 합니다. 

둥근 마음 가지려거든 

환하고 밝게 살아라 합니다. 

<해설> 

보름달은 언제 보아도 아무런 근심 없이 그저 환하게 웃고 있는 듯 평화롭지요. 세상의 어두운 그늘을 찾아 고루 비추는 그윽한 달빛 아래 평등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그 둥근 보름달 모양처럼, 똑같ㅇ은 시어들이 자리를 바꾸어 되풀이되면서 커다란 원의 형태가 된 동시입니다. 우리에겐 보름달의 교훈을 전하는 허동인(1941-) 시인의 마음 또한 둥근 보름달처럼 환하고 밝을 테지요. 2001. 12.18(수)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윤동제 

아파트 아이들 

아파트 아이들에게는 

하이얀 박꽃도 

노래 가사 속에서 

하마다 피었다 지고 

아파트 아이들에게는 

둥근 박도 

흥부전 속에서 

해마다 여물고. 

<해설> 

서투른 아이 말투로 동심의 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데 익숙한 윤동제(1957-)시인의 동시입니다. 책을 통해서 자연을 접하는 도시 아이들의 모습이 그저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건 아니군요. 또박또박 낭랑하게 책을 읽다 보면 그 마음속에 절로 펼쳐지는 그림이 있지요. 시골집 초가 지붕을 뒤덮은 박 덩굴에서 '하이얀' 꽃들이 피다가 어느새 허연 둥근 박이 여무는 풍경 말이지요. 2001.12.19(수)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심혜옥 

시험 시간 

막대그래프의 기둥이 긴 회초리로 

보입니다. 수십 개의 모눈이 부릅뜨고 

노려보고, 알 수 없는 악보는 깔깔깔깔 

비웃기만 합니다. 왜 놀기만 했을까? 

아예 두 눈을 꾹 감으면, 

짝꿍의 연필 소리만 우레처럼 들립니다. 

<해설> 

놀기에 바빠 시험 공부를 못한 아이가 시험을 치르고 있군요. 아무리 봐도 깜깜한 시험지에서 갑자기 막대그래프가 막대로 보이고, 악보의 음표는 비웃는 거처럼 느껴지네요. 짝꿍이 문제 푸는 연필 소리는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요. 심혜옥(1952-) 시인이 공부 안 한 아이가 시험 시간에 겪는 고통스런 심정을 실감나게 표현해 냈지요. 
2001.12.20(금)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유경환2 

은 모래 

바닷가에 

마알간 은모래는 

물새들이 뱉어 논 종알거림들. 

그 속엔 

물새들의 반짝이는 은니도 

섞여 있을까. 

<하설> 

늘 보는 풍경인데도 언제나 놀라움을 안겨 주는 것이 있지요. 이를테면 바닷가로 펼쳐진 눈부시게 하얀 모래사장이 그런 것이지요. 이렇게 마알간 눈빛이 누구의 작품일까, 하고 그 은모래를 주워 만지작거리다 보면, 밤새 와서 놀던 물새들의 종알거림이 들리지요. 그 중에서도 유난히 반짝이는 모래알을 유경환 (1936-)시인이 "물새들의 은니"라 명명합니다. 
2001.12.21(금)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어효선 

까치집 

까치까치 까치집 

지붕 없는 까치집 

비가 오면 어쩌나 

눈이 오면 어쩌나 

<해설> 

까치는 높은 나무 위에 잔 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엮어 둥지를 만들지요. 나뭇잎이 무성할 땐 잘 보이지 않다가 잎진 겨울이면 나뭇가지 사이에 달랑 남아 있는 게 보이지요. 그 지붕 없는 까치집을 보고 있으면 문득 비나 눈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일지요.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 까치라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효선 (1925-) 시인이 무심히 지나치던 까치집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군요. 2001.12.22(토)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정용원 

금관 

찬란한 빛살 

눈이 어리어 바라보기 힘들구나. 

임금님은 저걸 머리에 얹고 

얼마나 무거웠을까? 

내 운동모자보다 

더 편했을까? 

영락과 곡옥이 

바르르 떨고 있구나. 

뭣 때문에 떨고 있을까? 

<해설> 

한 아이가 박물관 견학을 갔다가 화려한 금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군요. 저게 정말 금으로 만든 거라면 참 무거울 텐데 참 임금님들은 어떻게 저걸 쓰고 지내셨을까요. 금관에 매달려 바르르 떠는 영락(금관)과 곡옥(옥)이 무슨 말인가 전해 주는 듯하군요. 정용원(1944-) 시인이 역사와 대화하는 동심의 한 순간을 담았습니다. 12.24(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권오삼 

연과 바람 

하늘을 날던 연 하나 

나뭇가지가 꼬옥 붙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멀리멀리 보내주고 싶은 

바람만 애가 타는지 

쏴아? 

쏴아? 

쉬지 않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댑니다. 

<해설> 

바람 좋은 날 하늘을 날던 연이 그만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네요. 연은 발버둥치지만, 나뭇가지의 심술이 대단합니다. 바람이 더 애가 타서 쉬지 않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봅니다. 권오삼(1943-)시인이 연 날리는 겨울날의 하늘을 시 한 편에 담았습니다. 
2001.12.25(화)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문삼석2 

도토리 모자 

도토리 모자는 

벗기면 

안 돼. 

까까머리 

까까머리 

놀릴 테니까. 

<해설> 

떡갈나무과를 비롯해서 참나무과 나무의 열매를 이름하여 도토리라 하지요. 요즘은 숲이 멀리 있으니 도토리도 구경하기 힘들고 따라서 도토리를 잘 먹는 다람쥐도 자주 볼 수 없게 되었지요. 우둘두툴한 쪽과 매끄러운 쪽, 양쪽을 지닌 도토리 모양새로 문삼석(1942-) 시인이 동시 한 편을 빚었습니다. 까까머리, 까까머리, 하는 아이들의 놀림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2001.12.26(수)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박경용2 

눈 오는 날 

아, 아 아 소리치고 싶다. 

날뛰며 까불고 싶다. 

나에게 꼬리가 있다면 

강아지 꼬리보다 더 바쁠 것이다. 

더 설레일 것이다. 

더 나부낄 것이다. 

꼬리가 있대도 

마침내는 붙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 생일 같은 날. 

<해설> 

눈발 날리면, 그 가벼운 눈발처럼 마음이 들뜨게 되지요. 마구 소리치며 달리고 싶어진답니다. 그저 날뛰며 까불고 싶어지는 눈 오는 날의 마음 설렘을, 박경용 (1940-)시인은 반갑다 꼬리치는 강아지 꼬리로 생동감 있게 표현해 냈지요. 12.27(목)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이옥용 

탑 

산꼭대기 

조그만 탑 

고개가 

갸우뚱 

쓰러질까 

말까 

생 

각 

중 

<해설> 

유명한 산사의 여러 유적들을 둘러보고 나면, 여기저기 이름 모를 조그만 탑들이 눈에 띄지요. 그것들도 모두 누군가의 정성이 빚은 것일 테지만,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치게 되지요. 그래도 이옥용(1957-)시인은 아이들 마음이 되어 그 허술하게 세워진 탑 앞에 멈춰 서서 고개를 갸우뚱해 보는군요. 쓰러질 듯 말 듯한 탑 모양새를 절로 흉내내는 움직임이지요. 2001.12.28(금)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이정석2 

코끼리 등을 타고 

코끼리 등을 타고 

열대 숲속을 걸었다. 

소걸음보다 더 느린 

코끼리 걸음 

서서히 시간이 느려졌다 

나도 느릿느릿해졌다. 

그때서야 

내가 지나온 길을 보았다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알았다. 

<해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정석(1955-) 시인의 코끼리 등을 타고 잠시 사색해 보세요. 나를 돌아볼 겨를 없이, 남을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만 살고 있었던 내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제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2001.12.29(토)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박두순2 

발자국 

바닷가 보래밭에서 

외줄기 발자국을 본다. 

문득 무언가 하나 

남기고 싶어진다. 

바람이 지나고 

물결이 스쳐 

모든 흔적이 사라져도 

자그만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해설> 

자신이 살다 간 모습을 소박하게 그러나 조금은 또렷하게 남기고 싶어하는 마음을 욕심이라 할 수만은 없겠지요. 박두순(1950-) 시인이 바닷가 모래밭에 남은 외줄기 발자국을 보고 그럿을 알아차렸군요. 자, 이제 우리가 남길 발자국은 어떤 것일까요? 가만히, 자신을 닮은 흔적을 그려 보세요. 2001.12.31(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윤동주2 

겨울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라미 

달랑달랑 

얼어요. 

<해설> 

처마 밑에 다래다래 매달아 말린 시래기로 끓인 국을 먹어 보셨나요? 윤동주(1917-1945) 시인이 가난한 시절의 겨울 풍경을 그려 놓았습니다. 말이 지나간 자리에 동그랗게 얼어 붙은 말똥의 모습은 정겹기까지 하군요. 이 겨울을, 동심의 감각을 되찾아 이겨 나갑시다. 
2002.1.4(금)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정채봉 

고드름 

개울가 

바위 틈에 돋은 고드름을 따서 

입을 헹군다 

내 얼굴에 

눈 코 입 귀가 생긴다 

<해설> 

아마도 가장 깨끗한 물의 기운이 모여 고드름이 되었을 테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입이 시릴 줄 알면서도 그것을 따서 입에 넣고 하는 게지요. 고드름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정채봉 (1946-2001) 작가가 '눈 코 입 귀'가 새로 생기는 것으로 표현했군요. 요즘의 우리에게도 답답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깨어나게 할 이런 고드름이 필요합니다. 
2002.1.5(토)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전병호 

모과 

봉지에 담아도 

모과 향기는 새어나온다. 



모과를 꺼내도 

모과 향기는 

봉지 속에 남는다. 

<해설> 

적당히 꾸미거나 다른 사람 흉내를 낼 수도 있을 텐데 전혀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요.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자기 빛깔을 못 감추는 이런 사람을 단순하고 투박하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더구나 남에게 본연의 향기를 어김없이 뿜어 주는 사람 앞에서는 마땅히 그 '독함, 단순함'을 벗삼는 편이 낫겠지요. 전병호(1953-)시인이 모과 향내의 그윽함을 기꺼이 즐기고 있습니다. 2002. 1.7(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김형경 

정화수 

첫 새벽 

소반 위 

샘터에서 길어 온 

작은 하늘 하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초롱 

초롱 

별로 돋는 

어머니 바람. 

<해설> 

우리 곁에는 늘 생각할수록 눈물겨운 사람이 있지요. 이른 새벽 샘터에서 길어 온 작은 하늘에 오로지 가족들의 안위를 비시는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지요. 김형경(1950-)시인은 어머니의 정성이 그 작은 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로 돋는다고 노래했군요. 어머니의 바람의 말씀이 잔잔히 들려옵니다. 2002.1.8(화)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이연승 

해를 파는 가게 

거울 가게에는 거울 수만큼 

하늘이 있습니다. 



날마다 

하늘을 파랗게 닦아 놓고 

해를 팝니다. 



손님들은 하늘 속에 비친 

얼굴을 보고 



해가 담긴 거울을 

사 가지고 갑니다. 

<해설> 

사람들은 거울 보기를 좋아하지요. 실제 자기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비치길 기대하면서요. 이연승(1938-1991) 시인의 '해를 파는 가게'의 거울에는 파란 하늘이 담겨 있군요. 하늘에 얼굴을 비춰 보고 해를 사 가는 손님의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을 테지요. 
2002.1.9(수)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제해만2 

갈대 

바람이 몰래 지나가려 해도 

강대는 알아채고 

휘파람을 휙휙 분다. 



바람이 훌쩍 지나가고 나면 

갈대는 서러움에 

온몸으로 울음 운다. 

<해설> 

겨울 바람이 지날 때면 허리를 휘며 드러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갈대들을 본 적이 있지요? 그럴 때마다 갈대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제해만 (1944-1998) 시인이 만남의 반가움과 이별의 서러움을 차례로 읽어냈습니다. 우리는 진정 누구를 그토록 갈망하고 아쉬워할 수 있을까요? 2002.1.10 (목)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오순택2 

저녁 눈 

사락사락 

누가 

연필을 깎고 있다. 



하얀 종이 위에 

시를 쓰려나 보다. 

<해설> 

고요한 들녘에 저녁 눈이 어둠과 함께 내립니다.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가 꼭 연필 깎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어느새 저녁 들녘은 하얀 종이를 펼쳐 놓은 듯 새하얀 눈으로 덮입니다. 오순택 (1942-) 시인이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보면서 연필을 깎아 시를 쓰려는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눈 위에 시를 쓰고 싶은 마음보다 순수해질 때가 없겠지요. 
2002.1.11(금)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이무일 

참새네 칠판 

우리 집 담벽에 

ㄱ, ㄴ, ㄷ, ㄹ, 

일학년 꼬마들이 

그려 놓은 글자들. 



모이 찾아 담벽으로 

날아온 참새들이 

짹, 짹 짹 짹…… 

읽어봅니다. 

<해설> 

이제 겨우 철자를 익힌 일학년 꼬마들이 담벽에 낙서를 해 놓았군요. 겨울 들녘에 먹이가 궁해지면서 모이 찾아 민가로 날아든 참새들이 마침 우리 집 담벽에 모였습니다. 이무일 (1940-1992) 시인은 참새들이 모이 찾는 소리를 꼬마들이 써 놓은 글자 읽는 소리로 재미나게 표현해내었지요. 참새들의 겨울나기 걱정이 우리 귀에는 한가롭게 들린답니다. 
2002. 1. 14(월)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김영일 

할머니 얘기 

할머니 얘기는 

긴긴 실꾸리. 



풀어도 풀어도 

다 못 푸는 실꾸리. 

<해설> 

할머니의 팔을 베고 누워 옛날 얘기 듣던 때가 그립습니다. 구수하게 이어지는 할머니 얘기를 듣다듣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던 그때가 참 행복했다는 생각도 들지요. 그 긴긴 할머니의 얘기를, 김영일 (1914-1984) 시인은 풀어도 풀어도 다 못 푸는 실꾸리로 넌지시 견주었군요. 아마 긴 겨울 밤도 할머니 얘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거예요. 
2002.1.15(화)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오은영 

흉내 

뒤뚱뒤뚱 걷는 

아기를 보면 

오리가 웃겠다 

제 흉내 낸다고 



뒤뚱뒤뚱 걷는 

오리를 보면 

아가가 토라지겠다 

제 흉내 낸다고 

<해설> 

남들이 제 흉내를 내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우연찮게도 모습이 같아 보일 때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요. 뒤뚱뒤뚱 걷는 아가의 걸음마가 오리의 모습과 닮아 보인다는 것을, 오은영(1959-)시인이 아주 귀엽게 표현해냈군요. 그런데 아기 걸음걸이를 오리가 흉내 냈다니 아가가 토라질 만도 하겠군요. 2002.1.16(수)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이경애 

눈꽃 

소나무에 피어도 눈꽃 

싸리 가지에 피어도 눈꽃 

억새 줄기에 피어도 눈꽃 



색깔도 하나 

이름도 하나. 



백두산에도 

한라산에도 

똑같이 피는 겨울 꽃 



눈꽃. 

<해설> 

세상의 나무들은 제각기 자기 색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 내린 날은 그 모든 나무들이 일제히 색깔도 이름도 같은 꽃을 피우지요. 백두에서 한라까지 똑같이 피는 눈꽃을 보면서 이경애 (1950-) 시인이 갈등 없는 은혜로운 세상을 떠올려냈습니다. 
2002.1.17(목)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최춘해2 

연오랑과 세오녀 

눈이 모자라게 펼쳐진 푸른 바다 

수평선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꿈이 큰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위 타고 꿈을 이뤘다. 



우리 나라 가장 동쪽 제일 먼저 해 돋는 곳 

동해를 향하여 두 손을 모으면 

연오랑과 세오녀가 아니더라도 

소원이 이뤄지겠다. 

<해설>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 앞에 섰습니다. 그 바다 앞에서 마음껏 꿈을 펼쳐봅니다. 가장 먼저 보는 아침 해를 향해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최춘해(1932-) 시인이, 꿈이 커서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 임금님 부부가 된 세오녀 설화에 견주어, 바다에서 아침을 맞는 신선한 느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002.1.19(금)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조명제 

동백꽃 

갯바람에 

날린 

불티 

한 점. 



바닷가 벼랑에 

온통 

버얼겋게 

불을 지펴 놓았다. 

<해설> 

바닷가 바람에 점 하나가 찍힐 때만 하더라도 누가 눈여겨 보았을까요. 그저 갯바람에 붉은 잡티가 날아가 붙은 거라고 여겼을 테지요. 그런데 어느 날 거기서 불이 확 번져 버렸군요. 아무도 끄지 않을 동백꽃이라는 불이지요. 그 앞에서 그저 모두들 조명제 (1954-)시인처럼 탄성만 지르고 있군요. 
2002.1.21(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이상현2 

햇살 

눈밭에서 아이들이 

햇살을 당긴다. 



언 손을 모아 

소리를 모아 



모두 모두 매달려 

발을 구르면 



겨울 해가 풍선처럼 

끌려 온단다. 

<해설> 

아이들이 추위를 잊고 눈밭 속을 씩씩하게 뛰어다닙니다. 언 손을 호호 불며 큰 소리를 외치면서 놀다 보면 어느덧 온몸에 훈기가 돌지요. 이상현 (1940-) 시인은 눈밭에서 피어오르는 아이들의 훈기가 겨울 햇살을 당기는 일이라고 했군요. 건강한 아이들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2002. 1. 22(화)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박남수 

팽이 

팽이는 

누울 수도 없습니다. 



팽이는 

앉을 수도 없습니다. 



팽이는 팽이는 

날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엄마를 닮았을까요. 

팽이는? 

<해설> 

물이 쩡쩡 언 겨울 강가에 나아가 팽이를 돌려 본 적이 있나요?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팽이를 팽이채로 후려쳐 되살려내는 재미가 그만이지요. 누울 수도 앉을 수도 더구나 날 수도 없는 팽이를 보고, 박남수 (1918-1994) 시인은 잠시도 쉴 틈 없이 서서 일하는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엄마는 무얼 하고 계시나요? 2002.1.24(목)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하청호2 

눈길이 머문 자리에 

꽃의 눈길이 머문 자리에 네가 있고 

나비의 눈길이 머문 자리에 네가 있고 

별빛, 달빛 머문 자리에도 네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러나 친구야, 정말 네가 좋은 건 

내 눈길이 머문 자리에 

네 해맑은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눈빛 속에 네 눈빛이 잠겼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해설> 

친한 친구를 멀리 떠나 보내고 나니 가슴이 텅빈 것처럼 허전합니다. 이제는 잊었겠지 싶은데도 어느새 그 친구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곤 한답니다. 하청호 (1943-) 시인이 정든 이와의 이별 뒤에 온 애절한 그리움을 '눈길'과 '눈빛'의 시어 변주로 노래합니다. 그래도 이런 그리움은 퍽 아름답지 않습니까? 
2002.1.25(금)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설용수 

좋아서 하는 말 

이슬 먹은 장미 보며 

?조화 같구나. 

바구니에 꽂힌 조화 보고 

?진짜 꽃 같다. 



안개 퍼지는 산을 보며 

?동양화 같구나. 

화선지에 그려진 풍경을 보고 

?진짜 마을 같다. 

<해설> 

진짜 꽃을 보고 "조화 같구나" 하는데도 기분이 좋고, 조화를 보고 "진짜 꽃 같구나" 하는데도 또한 기분이 좋을 때가 있지요. 겉으로 표현된 말은 거짓인데도, 그것이 '좋아서 하는 말'일 때는 기쁨의 찬사가 되는 것이지요. 설용수(1952-) 시인이 그 말의 묘미를 꾸밈 없는 표현에 담았군요. 마음으로 하는 덕담이 인년 내내 펼쳐졌으면 좋겠네요. 2002.1.28(월)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윤이현 

눈 내린 아침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동구 밖으로 멀어져 간 

발자국 두 줄 



바스락바스락 

소리는 따라갔어도 

두 줄 발자국은 

의 좋게 남아 있네 

<해설> 

밤새 쌓인 눈 위에 새겨진 두 줄 발자국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참 부지런한 그 사람은 이른 새벽 혼자서 바스락바스락 눈 밟는 소리와 친구하며 걸어 갔을 테지요. 윤이현(1941-) 시인이 발자국 모양에서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봤습니다. 하얀 눈 위의 발자국 두 줄이 정겹기만 합니다. 
2002.1.29(화) 박덕규·소설가·협성대 교수 

김소운2 

싸락눈 

하느님께서 

진지를 잡수시다가 

손이 시린지 

덜 

덜 

덜 

덜 

자꾸만 밥알을 흘리십니다. 

<해설> 

빗방울이 내리다가 갑자기 찬 공기에 얼어 눈이 된 것이 싸락눈입니다. 함박눈을 고대한 사람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기도 하지요. 땅에서 통통 뛰듯 떨어지는 걸 밥알인 줄 알고 모여드는 비둘기의 실망도 만만찮겠지요. 김소운 (1954-) 시인이 싸락눈을 보며 추운 날 하느님의 허술한 식사 시간을 그려 보았네요. 
2002. 1.31(목)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권영상2 

들풀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파득파득 

구겨진 잎을 편다. 

<해설> 

길바닥에 돋아난 들풀의 운명은 참 기구하지요. 그 많은 삶의 터전을 놔 두고 어쩌다 이런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는지요. 손수레가 무심히 들풀을 밟고 지나갑니다.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겨진 잎을 펴며 파득파득 몸을 일으키는 들풀의 모습에서 권영상(1955-) 시인은 생명의 모짊을 읽어 냅니다. 

 


2002.2.1(금) 김용희·아동문학평론가

[출처] 우수 동시와 해설|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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