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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미지즘과 보르티시즘 기법을 도입해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시 분야를 이끌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초기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시인 중 한 사람이다. 20세기 영미 시에 끼친 막강한 영향으로, '시인의 시인'으로도 불린다. 이미지즘(Imagism)과 보티시즘(Vorticism, 소용돌이주의)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시에 도입한 혁신적인 시인이자, 20세기 초 미국 문단에서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서 제임스 조이스와 T. S. 엘리엇, 예이츠, 프루스트 등 많은 작가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소개하여 미국과 영국 문학을 잇는 가교 역할도 했다.
에즈라 웨스턴 루미스 파운드는 1885년 10월 30일 미국 아이다호 헤일리에서 호머 루미스 파운드와 이사벨 웨스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파운드와 웨스턴 집안은 17세기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어린 시절 파운드는 외할머니가 읽어 주는 《가계사》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태디우스 파운드는 철도 건설업자이자 상원의원, 위스콘신 주지사까지 역임한 인물로 상공업계와 정치계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 호머는 조폐국에서 일했다. 에즈라 파운드는 이런 집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랐다. 15세 때 어머니, 이모와 함께 석 달간 유럽을 여행했는데, 특히 이탈리아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보고 압도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6세 때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입학했고, 학창 시절부터 공부보다는 문학, 특히 시 쓰기에 몰두하고, 펜싱, 연극, 고전 영문학 등에 열중해 교수들에게 괴팍한 문제아, 자유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다. 21세 때 로망어로 석사 학위를 받고 대학원 연구원에 임명되었는데, 파운드는 연구원에 임명되어 받은 연구비와 월급을 털어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까지 한다. 1907년 귀국한 후 이로 인해 낙제를 하는 바람에 연구비 지급이 중단되자 그해 여름에 인디애나 주의 워버시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전임 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이듬해 1월 떠돌이 여인을 기숙사에서 재웠다가 스캔들에 휘말려 해고되었고, 아버지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다시 한 번 이탈리아로 떠났다.
파운드는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시를 쓰고 여러 잡지사에 투고했으나 거절당하고, 몇몇 직업을 전전하다가 첫 시집 《꺼진 촛불》을 자비로 출판했다. 그해 말 파운드는 런던으로 옮겨가 런던에서 시인 클럽과 개인 문학 클럽을 드나들면서 많은 시인, 소설가, 비평가 등을 만났다. 그중에는 조지 버나드 쇼와 신문학 운동을 이끌었던 T. E. 흄, 당시 사교계를 풍미했던 올리비아 셰익스피어 부인 등이 있었다. 파운드는 후일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딸 도로시 셰익스피어와 결혼한다.
이듬해 런던의 엘킨 메튜스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시집 《페르소나》를 출판했다. 《페르소나》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파운드는 시인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당시 유력 문학 잡지 〈잉글리시 리뷰〉에 시를 싣게 된다.
또한 T. E. 흄을 비롯한 작가들과 함께 신문학 운동에 관한 이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파운드는 상징주의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싫어했으며, 언어를 조각과 같이 구상적(具象的)으로 구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감각할 수 있는 이미지에 의존하여 대상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새로운 시 운동이 이미지즘이다. 파운드는 1911년경부터 〈신세계〉 지에 이런 논지의 논설들을 기고하고, 자신의 이론이 반영된 시들을 발표했다. 1912년에는 미국의 〈포이트리〉 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고, 이 잡지의 편집인, 해외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영국 시인들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1917년 〈포이트리〉 지와 관계를 끊고 나서는 〈리틀 리뷰〉 지, 1920년부터는 〈다이알〉 지와 함께 일했다.
또한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고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파운드는 많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했다. 헤밍웨이는 "(파운드는 친구들을) 잡지에 소개해 주고, 감옥에서 꺼내 주고, 돈을 꾸어 주고, 연주회를 알선해 주었다. 병원비를 지불해 주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친구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T. S. 엘리엇과 예이츠일 것이다. 파운드는 이들의 생활비를 지원했으며, 첫 작품집을 낼 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시인들의 생활을 지원해 주고, 그들의 예술을 문명 세계로부터 인정받게 하는 안내자'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T. S.엘리엇은 그에 대해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그만큼 친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파운드는 당대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현대 문명사회에 비판의식을 가졌고, 이에 대한 생각을 다양한 잡지에 기고하면서 문학적 저널리즘 활동을 활발히 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고대 로마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의 작품을 번안한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에게 바치는 경의》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프로페르티우스와 로마 제국을 통해 1917년의 대영제국을 논평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의도를 알지 못한 많은 비평가들, 특히 고전학자들로부터 오역이라는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그 후 시집 《휴 셀윈 모벌리》를 펴냈는데, 영국 문단 문화를 세밀하게 복원해 놓은 초상이라는 평을 받으며,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들은 파운드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겪은 일들과 심상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파운드의 가장 큰 위업은 1917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평생에 걸쳐 쓴 모더니즘적 심상서사시 《칸토스》이다. 첫 편은 1921년에 발표 되었으며, 죽기 2년 전인 1969년에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이 시편들은 오디세우스, 단테, 공자를 비롯해 미 대통령 존 애덤스, 이탈리아 용병 지기스몬트 말라테스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속한 신화, 역사, 문학, 문화 등을 인유하고 있는 난해한 작품이다. 파운드는 이 작품을 일컬어 '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시'라고 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후 기존의 가치와 공동체가 붕괴되고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 가던 혼돈의 세계에서 분열된 삶을 통합시키고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 시도로 여겨진다. 이상적인 공동체의 확립, 그중에서도 진정한 예술이 가능한 사회를 추구한 파운드의 모습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운드는 1922년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친파시즘 라디오 방송을 했다. 그는 미국 은행가들의 탐욕이야말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이유라고 생각했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공연하게 미국을 비방했다. 이 때문에 전후 1946년 전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정신병 판정을 받아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워싱턴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칸토스》의 집필을 계속하여 수감 중이던 1948년 《피사 칸토스》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볼링겐상을 수상하며, 정치적, 문학적 소동을 야기했다. 정신병원에서 파운드는 《피사 칸토스》 집필뿐만 아니라 《중용》, 《대학》, 《시경》, 《소포클레스: 트라키스의 여인들》을 번역했다.
파운드는 1958년에 방면되었는데, T. 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로버트 프로스트 등 친구들의 탄원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풀려난 뒤에도 파운드는 이탈리아로 가서 "미국은 하나의 정신병원이다."라고 비난했다. 파운드는 이탈리아 알프스 근처에 머무르면서 스위스, 아일랜드, 파리, 뉴욕 등으로 친지들을 방문하며 지냈다. 1969년에는 자신이 선집한 《파운드 칸토스 선집》를 펴냈으며, 〈칸토스 CX-CXVII〉도 발표했다. 1972년 11월 1일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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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섬(The Lake Isle)
오 신이여, 비너스여, 도둑떼의 신 머큐리여, 간청하노니, 내게 주소서. 조그만 담배 가게를, 선반들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작고 반짝이는 상자들과 함께, 묶이지 않은 향기로운 씹는담배와 독한 살담배와 반짝이는 유리 진열장 아래 흩어진 반짝이는 버지니아 담배가 있고, 너무 번들거리지 않은 천칭 저울도 하나쯤 있는, 잠시 머리를 매만지며, 버릇없는 말로 한두 마디 수작을 거는 매춘부들도 있는.
오 신이여, 비너스여, 도둑떼의 신 머큐리여, 조그만 담배 가게를 빌려 주거나 아니면 다른 일자리라도 주소서, 쉴 새 없이 머리를 써야 하는 이 빌어먹을 글 쓰는 일만 아니라면.
에즈라 파운드 하면 ‘장신(長身)의 백발’이 떠오르고, ‘장신의 백발’ 하면 김종삼 시인이 쓴 ‘백발의 에즈라 파운드’라는 시가 떠오른다. “심야의/ 성채(城砦)/ 덩지가 큰 날짐승이 둘레를 서서히/ 떠돌고 있다/ 가까이 날아와 멎더니/ 장신의 백발이 된다/ 에즈라 파운드이다/ 잠시 후 그 사람은 다른 데로 떠나갔다”라는 짧은 시다. 이 시 때문일까. 에즈라 파운드는 내게 ‘심야의 성채’처럼 견고한 지성과 ‘덩지가 큰 날짐승’처럼 강력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남성적이고 도전적인 시인으로 기억된다.
동시대 문인들 또한 파운드를 일컬어 ‘예측할 수 없는 전류 다발’(제임스 조이스), ‘20세기 시의 혁명 주체’(T. S. 엘리엇), ‘문학의 트로츠키’(윈드햄 루이스), ‘고독한 화산’(W. B. 예이츠)이라 했다. 조이스, 엘리엇, 루이스, 예이츠를 비롯해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로버트 프로스트 등이 파운드의 문학적 지지와 배려 속에서 대가로 성장했으며, 특히 엘리엇의 장시[황무지]가 그에 의해 대담하게 수정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지스트’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는 등 이미지즘을 주창했으며,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젖줄이었던‘보티시즘(소용돌이주의, vorticism)’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중국 한시와 일본 하이쿠를 번역 소개함은 물론 그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 형식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렇듯 파운드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20세기 시단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41년 즈음 정치에 개입하면서부터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는 신용자본주의(특히 이자)에 반대했기에 반유대주의로 나아갔으며, 나아가 무솔리니의 파시즘적인 사회정책을 부분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라디오 방송에서 친파시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라디오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전쟁이 끝난 1945년 미국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정신이상 범죄자라는 판정을 받아 사형은 면했으나 워싱턴에 있는 성엘리자베스병원에 수용되어 위탁 치료를 받다가, 1955년부터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파운드 석방 운동이 일어나1958년 봄에 반역죄 기소가 기각되었다. 석방된 파운드는 이탈리아로 망명해 87세의 생일을 이틀 넘기고 베네치아에 있는 성존앤드폴병원에서 고단한 생애를 마쳤다. 평생에 걸쳐 신화와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모더니즘 대서사시 [칸토스]를 집필했으며 수감 중이던 1948년에는 [피사 칸토스]로 볼링겐상 첫 회 수상자가 되었다.
파운드의 ‘호수의 섬’은,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내 고향 이니스프리로 돌아가리,/ 거기 외줄기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을 심고, 꿀벌 통 하나 두고/ 벌떼 잉잉거리는 숲속에 홀로 살리”로 시작하는 예이츠의 시‘이니스프리 호수의 섬’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니스프리’는 아일랜드의 슬라이고라는 마을의 큰 호수의 섬 이름인데 예이츠는 어린 시절 이 호수의 섬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아일랜드 태생인 예이츠에게 ‘이니스프리 호수의 섬’은 고향 혹은 조국의 대명사이고, 자연 그 자체이자 행복한 유년의 상징이었다.
1910년을 전후한 파운드의 초기 시에 예이츠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둘의 관계 또한 돈독했다. 미국 시인 파운드가 스무 살 위인 영국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비서 역할을 했고, 예이츠의 아내가 파운드 아내의 사촌이기도 했다. 그러나 둘의 사이는 문학적·정치적으로 점차 벌어지게 되었다. ‘호수의 섬’에서 파운드는 제목, 시행의 배열 및 리듬 등에서 예이츠를 모방하면서도 주제에서는 그와 대조를 이룬다. 예이츠가 ‘이니스프리 호수의 섬’에서 목가적인 ‘이니스프리’를 동경했던 것과 달리, 파운드는 복잡하고 살벌한 도시 한가운데 떠 있는‘조그만 담배 가게’를 해학적으로 동경한다.
특히 파운드는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와, 신들의 사자이며 웅변·직공·상인·도적의 수호신인 머큐리를 호명함으로써 현대성의 상징이 여성, 물질, 지식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가 애연가였음은 분명하다. 조그만 담배 가게, 그것도 그 안에 씹는담배나 살담배(칼로 썬 담배)나 버지니아 담배(버지니아 주에서 나는 담배)등 온갖 종류의 담배와 담배를 재는 저울, 그리고 담배 피우는 매춘부들을 간청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니코틴에 대한 몽상은 “나의 안개에 싸인 여왕,/ 니코틴, 하이얀 니코틴, 그대는/ 그대 머릿속에 광휘를 띠고 말을 달려/ 우리의 꿈속 옆길을/ 그대의 큰길로 삼네.”(‘니코틴’)와 같은 시에서도 변주된다. “쉴 새 없이 머리를 써야 하는/ 이 빌어먹을 글 쓰는 일”에 매달려 사는 파운드에게 담배와 담배 가게는 가장 도시적이고 현실적인 ‘이니스프리’였던 것이다. 사실은 담배를 통해 글쓰기의 고통과 지식인의 고뇌를 역설하고 있다.
김종삼의 ‘백발의 에즈라 파운드’는, 파운드의 가장 잘 알려진 단 두 행의 시“군중 속에서 환영처럼 나타난 얼굴들,/ 젖은,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지하철역에서’)이라는 시를 닮아 있다. 파리의 콩코르드 지하철역에서 내렸을 때 파운드의 시야에 들어왔던 아름답고 환한 얼굴들에 대한 감정과 의미를 표현한 시라고 한다. 군중 속에 홀연히 나타나는 ‘환영’과, 젖은 가지 위의 ‘꽃잎’은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현대인의 불안한 초상이다. 30행의 시를 하이쿠 형식을 빌려 단 두 줄로 압축해 놓음으로써 파운드는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이미지’와 ‘정확한 표현’을 기치로 내세웠던 이미지즘 시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김종삼 또한 그러한 파운드의 시학에 기초해 성채와 날짐승,그리고 백발의 장신으로 파운드를 이미지화한 것이리라. 지금은 예이츠도 엘리엇도, 파운드도 김종삼도, 군중 속에서 환영처럼 나타나 젖은 가지 위의 꽃잎처럼 사라지고 없지만.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1885. 10. 30. ~ 1972. 11. 1.) 1885년 아이다호 주 헤일리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펜실베니아 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하다 해밀턴 칼리지로 옮겼다. 열아홉 살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년 동안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나 여성 관계로 인한 불상사를 일으켜 학교를 떠났다. 스물두 살에 유럽으로 건너가 베네치아에서 몇 개월 체류한 후 런던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으로 건너간 뒤 T. S. 엘리엇과 제임스 조이스 등을 세상에 소개했다. 서른세 살에는 파리로 이사해 현대 예술 전반에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동시에 비판적인 산문을 쓰거나 번역했고 오페라 전곡과 바이올린 솔로곡도 작곡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반미 활동 혐의를 받아 정신 병원에 연금되었으나 시인들의 운동으로 풀려났다. 대표작으로 [가면], [칸토스] 등이 있다.
글 정끝별 | 시인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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