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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시인 - 李白의 음주시 연구 /// 술과 시인
2015년 12월 05일 02시 07분  조회:5332  추천:0  작성자: 죽림
 

이백의 음주시 연구

 

려원

             

          

 

 초 록

 

   세인들이 다 알다시피,당시(唐诗)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백의 시작품들은 당시에서 한마디로 평판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걸작들은 현재 약900여수가 유전되고 있다. 이런 시 들은 이백의 평생의 포부와 미학사상을 표현하였으며 성당시기 사회 현실 과 정신 생활을 예술적으로 집중화하고 있다.

   “성당지음”의 걸출한 대표로 되어 있는 그의 시작품들은 독특한 낭만 적 풍격으로 하여 천고절창이 되었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다.그는 초당이래 시가 혁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는데 중국 고전시가의 혁신과 중국고전문학의 발전에 크게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이백의 시창작 풍격을 연구하는 것은 당조시기 시가의 기본면모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 시가들을 한걸음 더 이해할 수 있고 미래 시가의 발전을 위한 방향을 가일층 모색할 수 있다. 이백의 시가들은 이미지가 아주 많은데 본고는 이백의 음주시 중의 낭만주의와 호방표일한 풍격을 재조명하려 한다.

키워드: 이백 시풍격 음주시 호방표일 낭만주의

 

차 례

논문초록…………………………………………………………………………1~2

제1장  서론……………………………………………………………………4~5

제2장  본론……………………………………………………………………6~10

2.1이백의 생애…………………………………………………………………6~8

2.2대표적인 음주시의 분석…………………………………………………8~10

2.2.1 장진주(将进酒)의 분석

2.2.2 월하독조(月下独钓)의 분석

제3장 결론………………………………………………………………… 12~13

감사의 말………………………………………………………………………14

참고문헌………………………………………………………………………15

 

                                     제1장 서 론

 

    본 고는 이백의 생애와 그를 대표하는 음주시를 둘러싸고 이백의 창작 사상과 그의 문학관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백은 중국 시가사에서 대표적 시인이다. 흔히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으로 비유하는데 이백이야말로 당시 가운데 꽃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이다. 또한 이백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으며 현전하는 이백의 시는 약 천 수에 달한다. 이백의 시는 당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백은 천재시인이라 불린다. 그는 시를 지을 때 퇴고 없이 일필 휘지로 써 내려간다. 이백은 호방하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를 썼으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백하면 음주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의 시가들 중에서 많은 것이 정치서경시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비범 한 포부,분방한 격정, 호쾌한 기개를 충분히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 (盛唐)시가 앙양되고 분발한 전형적인 음조를 집중으로 대표하였다. 이백 의 시가 제재는 아주 다양한데 7언절구,5언절구와 고체시등 있다. 이백은 술의 친구이어서 음주시는 대표적이고 유명하다.

    이백은 성당문화 속에서 배출된 천재적 시인이어서 성당시가의 기(气)와 정이 이백의 시가들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가창작은 열정 으로 넘치고 있으며 기특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장쾌한 경치 도 있고 자연스러럽고 명쾌한 경지도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이백의 매력은 바로 성당의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이백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과장된 비유,풍부한 상상 등 낭만주의 표현 기법과 신화전설을 능란하게 운용해서 호방한 기개, 앙양된 정조, 기특한 형상과 비범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어서 강렬한 예술감화력을 발산한다. 게다가 생생하고 명랑하고 우미하고 청신 한 언어를 구사하였기에 아름답고 눈부시여 이목을 끌며 천고에 길이 이름 을 남기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이백의 많은 작품중에서 음주시를 위주로 고찰하고 있다. 이백의 시의 제재는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하지만,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백은 직감적으로 술고래를 떠올리 게 된다. 그것은 이백은 시선인 동시에 주선이라는 두 이미지가 결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부는 이백을 평하여 ‘술 한 말에 시 백 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 하였다. 이렇듯 이백과 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이백시에서 음주시가 차지하는 영역은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 고에서는 이백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백의 음주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본 론

 

2.1 이백의 생애

  술과 달의 시인 이백은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이며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당대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중국 문학사상 굴원 을 잇는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라고 불린다.(이백은 시선, 두보는 시성, 왕유는 시불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조상이 농서 성기(현재 감숙성 천수현 부근)사람, 조상이 수나라 말엽에 서역으로 흘러들어감,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면주(지금의 사천 면양지방)에 거주하여서, 어릴 때부터 촉나라에서 수학,유람함. 25세 때에 혼자 몸으로 촉나라를 나와서 임협방도(의협을 신뢰하고 도리를 찾는것)와 교유간알(신분이 높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통해 벼슬의 고위직에 올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 들을 평안하게 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동정, 금릉, 양주 등지를 유람했으며 수년후, 전 재상이었던 허어사 의 손녀와 결혼을 하여 안륙(지금의 호북 안륙)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양양,낙양,태원 등지를 유람했다. 후에 또한 공소   부등 "죽계육일"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과 함께 동노에서 은거하였다.

   천보 초기에 오균이라는 도사의 추천으로 임금의 부름에 장안으로 들어가, 한림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귀족들로 여러 차례 비방을 받아, 천보 34년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와 개봉을 중심으로 제, 노, 회, 사, 강동사이 북으로는 유연 일대까지 왕래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은 노산에 은거하였으며 계속해서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면밀히 주시하였고 후에 영왕 인의 막부에 참가하게 되었다. 숙종 지덕 2년 영왕 인은 패배하고 이백은 연루되어 욕양에서 옥살이를 하게되고 이듬해 야랑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사면을 받고 무창, 욕양, 의성 각지를 전전했다. 대종 보응 원년에 친척 아저씨인 당도(지금의 안휘성 당도현)현령인 이양빙의 집에서 병사했다.

    그는 불운을 겪었고 복잡한 사상을 가진 천재적인 시인이며 또한 자객, 은사, 도인 등과 같은 기질을 지니기도 했다. 유가, 도가 그리고 협객 등 세 가지 사상을 몸소 실천했는데, ‘공성신퇴 (功成身退:공을 세운 후 물러 나자)’ 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주도적 사상이었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이백은 그의 천거로  43세 때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 [남릉 별아 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 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났다. 현종 의 마음에 들어 호탕하고 방탕한 생활을 3년간 지속하며 당시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도록 하였으며, 현종의 애첩 양귀비 (楊貴妃)에게 벼루를 들고 서있게 했던 기인이다.

     장안에서 보낸 3년의 정치 생활은 이백의 창작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치적 이상과 암울한 현실은 첨예한 갈등을 보였으며, 가슴 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불만이 쌓였다. 분노는 훌륭한 시를 낳았고, 그래서 <행로난>, <고풍> 등의 시에는 옛 선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으 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명작들을 써나갔다.

   이백은 후세 사람들에게 9백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렇게 빛나는 작품 들은 그 일생의 마음 역정을 표현한 것으로, 성당(盛唐)시기 사회의 현실과 정신생활 모습의 예술적인 묘사이다. 이백은 일생동안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한치의 속임도 없이 업적을 쌓으려는 바램을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협객 을 좋아해서 그에 대한 많은 시를 썼는데, <협객행>이 그중 대표작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 (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 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 (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 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 (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2 대표적인 음주시

   이백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그를 주선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충분이 증명된다. 그의 벗 두보가 “이백은 술 한 되에 시를 백 편이나 쓴다”고 읊은 사실과 이백 자신이 “백년은 삼만 육천일, 하루에 삼백 잔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도 음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음주는 삶의 충족을 위해 마신 것만은 아니였다. 영원한 것으로의 지향, 유한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마셨다. 이백은 술을 마시 면 마음이 쾌활하고 호방해졌다. 취중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도취 속에서도 각성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술에 대한 시를 볼 때 잠꼬대 같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표현 속에 엄연한 객관화 정신이 있었으며 동시에 정확한 작시 기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2.2.1 “장진주(将进酒)”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그대 보지 않았는가 황하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奔流到海不復回               기운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그대 보지 않았는가 고당의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의 슬픔을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 뜻을 얻었을 때엔 모름지기 환락을 다해야 하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주었으니 반드시 쓸데 있을 것이다.

千金散盡還復來 천금 다 써버려도 다시 손에 돌아올 날 있으리

烹羔宰牛且爲樂 양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저며서 술 잔치를 즐겨보자

會須一飮三百杯 모름지기 술은 한 번에 3백잔은 마셔야지

岑夫子         잠부자여

丹邱生         당구생이여

進酒君莫停        지금 곧 술을 권하여 하니 잔을 멈추지 말아요

與君歌一曲        그대 위해 한 곡조 시를 읊으리니

請君謂我傾耳聽 청컨대 그대는 나를 위해 귀 기울여주오

鏡鼓饌玉不足貴 아름다운 음악 맛 좋은 음식은 귀한 것이 못된다

但願長醉不用醒 다만 소원은 오래 취하여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 옛 성현들은 죽으면 그뿐 잊혀지지만

惟有飮者留其名 술 잘 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

陳王昔時宴平樂 옛날 진왕은 그의 평락관에서 주연을 베풀고

斗酒十千愁換謔 두주를 만금에 사서 마음껏 즐기고 노닥거렸다.

主人何爲言少錢 집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는가

徑須沽取對君酌 모름지기 술을 사서 그대에게 권하겠노라

五花馬                 다섯가지 꽃 무늬의 말

千金衣                 천금의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아이 불러 끌어내어 맛 좋은 술과 바꾸어

與爾同銷萬古愁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우수를 쫓아 버리자

 

    이 시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개탄하고 술을 마셔야만 우수를 잊을 수 있다는 이백 특유의 술철학이 담겨있다. 황하가 분류하는 것 같은 웅대한 시, 자유분방,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화려한 시구에는 억제하기 어려운 인생의 비애가 넘쳐 흐른다.

    이 시와 비교하여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내용상 이질적인 면이 보이고 있 는데 예하여“조여청실막성설(朝如靑絲暮成雪)”에서‘아침에 푸른 실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對酒》에서는 어제의 홍안 소년 오늘은 백발(昨日 失顔子 今日白髮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용 상에 있어서도 대조를 보이고 있는 곳이 있는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하고 《把酒問月》에서는 바라 는 것은 노래 부르고 술 마실때 달빛이여 깊이 비쳐다오 금술독 속 (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 까지 라고 표현하고 있다.  

    달과 술은 서로 이질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데 묶어서 다루어 보려는 의도는 그만큼 이백의 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는 달과 술을 동시에 소재로 활용하는 경우가 다른 시인에 비하여 많을 뿐만 아니라 이 계열의 시가 유명하다. 이백의 시에는 달과 술이 동시에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시 제목에서도 이러한 현상 이 나타나고 있는데 月下獨酌등이 바로 그런한 예이다.

 

2.2.2                <<월하독조(月下独钓)>>

 

<月下獨酌> 달 아래에서 혼자 마시다

 

 

花問一壺酒 꽃나무 사이에 놓인 한 단지 술은

獨酌無相親 서로 친한 벗도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 술잔을 들고 밝은 달 맞으니

對影成三人 내 그림자까지 모두 셋이 되었다

月旣不解飮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하는 대로 따른다

塹伴月將影 얼마 동안 달과 그림자를 벗으로

行樂須及春 행락은 오로지 봄이 가기 전에 즐기는 것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바장이고

我舞影凌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 어지럽게 흔들린다

醒時同交歡 술이 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氷結無情遊 길이 무정한 놀이를 그들과 맺어서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한다.

 

    밝은 달 아래 꽃나무 사이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며 즐기는 심경을 독특한 기법으로 노 래하고 있다. 전부 4수로 되어있는 이 시들은 각각 착상이 다르다.

   중국문화는 장르중에 시는 역사적으로 주총을 이루었고 특히 당대에 있어서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당대에서도 성당이 당시의 절정기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이백이다. 이백은 진보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낭만주의를 굴원 이래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당조때 두보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기봉을 이루었다면 이백은 진보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이백은 반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는데 전국 수많은 명산과 대천을 다니며 조국의 자연을 찬미하는 많은 분량의 우수한 시들을 썼고, 시를 통해 자유를

    사랑하고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 속에 기묘한 산천은 거스르고 머무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과 완벽 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백은 조국을 매우 사랑하고 백성을 보살폈으며 현실을 인식했던 위대한 시인이였으며,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는 열정을 담아 보내는 노래를, 통치자들의 불쌍한 병사 들에 대한 무정한 채찍질을 담은 시들을 썼다. 이백은 또한 많은 악부시를 지어, 노동자들의 힘든 생활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표현 했다.

이백의 시는 ‘붓이 떨어져 비와 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되어 혼을 울리는’ 예술적 매력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이백 시의 가장 뚜렷한 예술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자아실현의 주관적 정서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위세당당하고 일사천리한 기세를 담고 있다.

    시는 항상 상상, 과장, 비유, 의인 등의 기법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신기하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지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백의 낭만주의 시가 사람들에게 자유분방함과 신선같이 뛰어난 운치를 주는 원인이다.

    이백의 시는 이전 낭만주의 창작의 성과를 이어받아 반역사상과 호방한 풍격으로 성당시대의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창조정신 및 봉건질서에 만족 하지 못한 잠재된 역량을 반영하며, 낭만주의 표현영역을 넓히고 기법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상당한 수준까지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을 실현시켰다. 이런 한 성과로 인해 그의 시는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의 새로운 절정이 되었다. 이백은 당대 시가의 혁신에 대해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 그는 진자앙 시가의 혁신적인 주장을 계승하여 이론과 실천에서 시가혁신의 최후 성공을 거두었다.        

 

                                            3. 결 론

 

    이백의 위대한 시편들은 성당시대의 상승발전하는 기백을 반영하였다.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그는 극대한 용기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에 몰두하였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책과 열려있는 밝은 정치를 하고자 이에 투쟁하였다. 이러한 완강한 투쟁정신과 자유해방의 열정에 대한 추구는 그의 시가에서 적극적인 낭만주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성당 (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짧은 일생에 천만고의 시름을 안고 있는 인생, 무엇으로 그 시름을 잊고 이 인생의 무상을 극복할수 있을가 술이 야말로 바로 그 시름을 녹여 없애는 것이며 선물이라는 대 전제하에 과연 이백다운 종횡무진의 낭만과 과장으로 호기로운 음주예찬을 펼쳐가는 작품이다. 취중인 만큼 과장도 호기도 백배로 부풀어 있는 가운데 또한 은근히 때를 얻지 못한 자신의 불우의 분한을 시종 그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자연과 인생은 하나의 사랑으로 귀의가 되어있다. 산천초목이며 일월신성이다. 그러한 중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달과 꽃과 새와 바람과 구름은 그의 술자리에 동참하여 항상 이백과 함께 하였다. 이백에게 있어서 자연은 적극적 능동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 이백의 음주시는 그저 단순한 작시하는 그러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천인하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파악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시도해 보아야 하며 이백의 음주시를 더욱 더 음미해보아야 한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1. 孫宗燮, 『李杜詩新評』, 정신세계사, 1996

2. 郭沫若, 『李百과 杜甫』, 까치, 1996

3. 張基槿, 『李太白評傳』, 乙西文化社, 1987

4. 金學主, 『中國文學史』, 新雅社, 1993

5. 丁範鎭, 『中國文學史』, 學硏社, 1993

6.《李白诗歌鉴赏集》,巴蜀书社 1998年2月

7. 《李白集》山西古籍出版社,2004年6月

8. 安旗:《李白全集编年注释(上、下)》巴蜀书社,2000年4月第1版

9. 王寅明著:《李白全传》长春出版社,2002年7月第一版

10. 霍松林、尚永亮:《李白诗歌鉴赏》,上海教育出版社,1989年

11.《李白诗》,人民文学出版社,2005年5月

12. 王步高:《唐诗鉴赏》,南京大学出版社,2006年7月

13. <비교문학연구>  박충룩저, 북경민족출판사, 2003년10월제1판

14. 이창룡, 『李百』,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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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망라하여 술은 시의 중요한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변주되어 왔다. 술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풀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비극적인 현실이나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다.

시인과 술

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술이 제의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처 텅(A. Tongue)에 의하면 술은 석기시대부터 제조되었으며, 최초의 술은 꿀로 빛은 하이드로멜(hydromel)이라는 발효주라고 추측되고 있다. 제의의식이 민중의 생활 속으로 확산하기 이전, 술은 종교의식을 관장하던 제사장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제의의식에 받쳐지는 제물이 사람이었다가 동물로 대체되었고 이때 동물의 피는 신성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후 동물의 피 대신 술로 대신하면서, 신에게 바쳐지는 술은 신에게 의탁하여 신의 힘으로 세상을 관장하는 기원을 담은 매개였기에 신성한 기운을 지닌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와 같이 술은 조상과 신의 은덕에 예를 갖추어 보답하는 종교적 의미로 다루어져 왔고, 사회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화해의 수단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일용할 양식으로, 때로 치료약으로 활용되면서 술은 인간의 삶에 다양한 역할과 기능으로 작용해왔다.

중요한 기호식품의 하나인 술은 그 어원도 주목을 요한다. 고유 우리말인 ‘술’은 예전부터 ‘수블’ 혹은 ‘수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술을 빚는 과정에서 누룩의 효모 때문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양새를 물에 불이 붙은 것으로 보아 ‘수불’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술을 ‘수울’ ‘수을’로 기록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수블→수울→수을→술’로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학 특히 시와 술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시에서 술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성으로 지칭되는 이태백과 두보를 떠올릴 때도 시와 함께 연결되는 것이 바로 술이다. 이태백은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석 잔을 마시니 도를 통한 듯하고 한 말을 마시니 자연과 합치된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라고 했으며, 〈장진주(將進酒)〉에서는 “양고기 삶고 소 잡아 즐기려 하나니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라며 술 마시기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문학에서도 술은 단골 소재이다.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술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우리 술 문화를 살펴보면, 삼국시대가 우리 술의 발아기라고 한다면, 고려시대는 성장기, 조선시대는 전성기, 일제강점기는 쇠퇴기, 그리고 현대는 부흥기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면, 한국 술의 변천사는 7단계로 나누어 삼국시대 이전의 형성기, 삼국시대를 맹아기, 통일신라시대를 정착기, 고려시대를 개발기, 조선시대를 전성기, 일제강점기를 침몰기, 그리고 해방 후부터 근대를 표류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술 빚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일본의 《고사기》에 “응신천왕(應神天王), 270~312년) 때 백제의 수수보리라는 사람이 누룩을 사용하여 술을 빚는 신법을 일본에 전래하였다”는 기록에서, 삼국시대의 술 빚기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술에 관련한 기록이 처음 발견되는 문헌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 건국담의 술에 얽힌 고사가 《고삼국사》에 인용되어 있다.

비단 자리를 눈부시도록 깔고
금 술잔에 향기로운 술을 차렸네.
세 처녀 스스로 거기 들어와
마주 앉아 술 마시고 크게 취했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비단 자리가 눈이 부시도록 깔린 곳에, 향기로운 술과 금 술잔이 준비된 곳에 세 처녀가 마주 앉아서 술에 취한 흥겨운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 세 처녀가 바로 하백의 세 딸인 유화, 훤화, 위화이다. 그리고 이들을 초청하여 술을 대접한 이는 해모수이다. 하백의 딸 유화, 훤화, 위화가 더위를 피해 압록강의 웅심연서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신하를 시켜 가까이하려 했으나 그들이 응하지를 않았다. 뒤에 해모수는 신하의 조언을 구하여 웅장한 궁실을 지어 그들을 초청하였는데 초대에 응한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고 만취한다. 해모수는 세 여자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방문을 막고 닫자 놀란 세 여인이 달아났는데, 그 중의 큰딸 유화가 해모수에 잡혀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되고 해모수와 정이 들게 된다. 해모수는 유화와 함께 오룡거를 타고 수궁으로 가서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을 만나러 가게 된다.

결국 하백과 해모수가 서로 동물로 변신하며 재주를 겨룬 끝에 승리한 해모수와 유화는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이 해모수가 자신의 딸을 버릴까 하는 걱정 끝에 술을 잔뜩 먹여 두 사람을 가죽 부대 속에 가두어 오룡거를 태워서 내보냈다. 오룡거가 궁중을 빠져나오기 전에 해모수는 이레 만에 술이 깨어 유화의 금비녀로 가죽 부대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 유화가 수궁으로 되돌아갔지만, 화가 난 하백이 유화에게 입술이 석 자나 되게 늘어지는 벌을 주어 결국 우발수라는 곳으로 쫓겨났다. 혼자가 된 유화는 해모수와 술에 얽힌 하룻밤의 인연으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바로 주몽이다. 이상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나오는 고구려 건국 신화 속이 술 이야기이다.

고구려 주몽의 건국 신화에 기록된 고구려의 술 문화는 이후 통일신라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일반인들이 체를 통해 막 거른 막걸리를 음용한 반면, 상류사회에서는 맑게 거른 술인 청주를 음용하는 일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도경》 《제민요술》 등의 문헌의 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우리 술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술 문화가 이어져 내려옴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이규보의 〈명일우작(明日又作)〉

고려시대에 들어서 송나라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술 문화는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에 송나라 사신(국신사)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살펴보면 고려인의 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묘사한 그림.

《고려도경》은 고려 인종 원년(1123년 5월 8일)에 송나라 사신인 서긍(1091~1153년)이 국신사로 1개월 동안 고려 수도 개성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문물을 기록한 자료이다. “고려 초에 술은 미곡(米穀)으로 빚었는데 찹쌀 술이 없고 모두 멥쌀에 누룩을 넣어 술을 빚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색깔이 짙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하였으며,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良醞)이라고 하는데 술을 질항아리에 넣어 황견으로 봉하여 저장하여 걸러서 맑은 술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발아했던 술 문화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더욱 성행하여 술의 종류가 늘고 주조 기술법 또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소주에 대한 내용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소주가 고려에 유입된 것은, 고종 6년(高宗 6년, 1219년)이다. 이 시기에 원나라와 국교를 맺게 되고, 약 90여 년의 원나라 간섭기에 원의 음식문화 전래로 채식문화가 육식문화로 변모하게 되고 더불어 소주와 같은 증류주 문화가 유입된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우왕(禑王) 원년(1375년)의 기록에서 소주 음용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침내 우리나라는 곡주 위주의 탁주류, 청주류, 증류주의 3대 주종문화(酒種文化)를 고려시대에 완결하는 한편 북방유목민족의 유주문화권(乳酒文化圈), 남방민족의 열대과실주문화권에서 화주(花酒, 과실주의 일종), 서역사회(西域社會)의 포도주문화권에서 포도주 등이 유입됨으로써 범세계적인 주류 문화권과 교류가 고려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 술의 개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술 문화의 배경 속에서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고려의 이규보(1168~1241)는 술을 애용하고 술에 관한 시를 쓴 인물이다. 이규보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삼혹호(三惑好)라 스스로 호를 붙이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이미 15세 때 술의 맛을 통달할 정도로 애주가였다. 그의 술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친상(親喪)을 당한 와중에도 술을 마셨고, 심지어 병석에 누워서도 술을 끊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하루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희롱 삼아 짓다〉라는 시에서 “일만 팔십 일 만에 오늘 다행히 술을 깼다”라는 내용을 통해 그의 음주벽을 알 수 있다.

그는 시 〈명일우작(明日又作)〉과 〈화유(花柳)〉를 통해서도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하늘이 나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않게 하려면/ 꽃과 버들이 피지 말도록 하여라/ 화유가 꽃다울 때 마시지 못하면/ 봄은 나를 버릴지언정/ 나는 못 버리겠네”(이규보 〈화유花柳〉)라고 적고 있으며, “생강이나 계피를 섞어 말린 육포나, 절인 생선 담은 접시와 뜸 잘 들인 밥이 든 솥이나, 식혜 한 단지나 좋은 술 한 병을 스승에게 바쳐 속수의 의식을 행하려고 오는 사람이 있거든 너는 짖지 말라”(이규보 〈명반오문(命斑獒文)〉고 적고 있다.

病時猶味剛辭酒   병중에도 오히려 술을 사양 못하니
死日方知始放觴   죽는 날에 가서야 술잔을 놓으리라
醒在人間何有味   깨어서 살아간들 무슨 재미 있으랴
醉歸天上信爲良   취하여 죽는 것이 진실로 좋을씨고

— 이규보(李奎報) 〈명일우작(明日又作)〉

그의 술 예찬은 수필 〈사륜정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와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라 붙인 자호와 어울리게, 이규보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를 만들려고 하였다. 사륜정이란 정자에 4개의 바퀴를 달아 수시로 장소를 옮겨가며 자연과 친구와 술을 벗 삼아 술과 시의 멋을 즐길 수 있는 이동식 정자인 셈이다. 잠시 〈사륜정기((四輪亭記)〉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며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고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피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게 되므로 그때마다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중략) 바퀴를 넷으로 하고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정자의 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 기둥이 넷, 대나무로 연목을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으니 이는 가벼움을 취한 것이다.

— 이규보 〈사륜정기((四輪亭記)〉 중에서

이 정자의 면적은 모두 36평방척(平方尺)이며, 소위 이동식 정자로 정자 위에 거문고, 술 단지, 술병, 소반, 기명 바둑판 등을 갖추고 여섯 사람(거문고 타는 자, 노래하는 자, 詩僧, 바둑 두는 자 두 사람, 그리고 주인)이 앉게 되어 있다. 바퀴가 있어 하인들이 밀고 끌어서 경치 좋은 곳에 세워두고 즐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쯤 되면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자연을 벗하려는 풍류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조선시대에 들어와 술 문화는 조선 초기와 후기에 다소 변화가 생긴다. 조선 초기에 지배층에 의해 음주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면 후기에는 일반인들에게도 술 문화가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술 문화가 일반 서민층에게도 확대된 것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쌀의 생산량 증대와 연관이 있다. 이러한 기반에 힘입어 원나라에서 유입된 증류주인 소주류 제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탁주, 청주, 소주가 우리나라 술로 자리매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중종(中宗, 1506~1544) 때 원(元)에서 유입된 소주가 널리 전파되었는데 후기에 들어와 농업기술의 발달로 증류주인 소주류가 일반인들도 즐겨 이용하여, 몽골이 일본 점령을 위해 만든 전초기지가 있던 안동, 개성과 제주가 오늘날에도 소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술의 제조법도 한층 활발해졌으며, 일반인들도 술을 즐겨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부녀필지(婦女必知)》의 음식총론(飮食總論)에서도 음식과 술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으며,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막걸리, 맑은술, 소주, 절기주 등 특히 술의 종류와 술 빚는 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시성으로 이규보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송강 정철이 있었다. 당쟁에 의한 좌천과 유배와 은둔 시절에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의 걸작을 남긴 송강 정철 역시 대표작 〈장진주사(將進酒辭)〉란 권주시에서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장진주사(將進酒辭)〉는 자연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와 함께 생의 유한함과 당쟁으로 부귀와 명예의 허명과 생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을 꺽어 셈하며/ 무진 먹세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졸라서 매어가나? ……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들이 휘파람 불며 돌 때 가서야/ 뉘우친들 어찌할 것인가! 

     — 송강 〈장진주사(將進酒辭)〉

송강 정철의 권주시편을 감상하다 보면 옛 선비들의 은은하면서 여유 있는 기개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술에 관련된 구절이 있다.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없을소냐 (중략) 온 가지소리로 주흥(醉興)을 배야거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야 붙었이랴”(송순 〈면앙정가〉)

조선의 술 문화는 시 이외에도 음식에 관련한 고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술의 제조법에 관련한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인 1670년경에 쓰인 한글 전문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꼽을 수 있다. 《음식디미방》의 경우, 총 132조목 중 51조목이 술에 관한 것이다. 더불어 술 제조법을 책의 제일 앞에 기록한 것만 보아도 제사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음식디미방》 이외에도 술에 관한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말엽의 《주방문(酒方文)》(1600년대 말엽)에는 12조목이,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경)에는 61조목의 전통주 제법이 기록되어 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15년경),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50년경) 등에도 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한국 술 문화의 전성기로 200여 종의 다양한 술이 생산되었고, 양조주(釀造酒)와 증류주는 물론 각종 약초를 가미한 약용주(藥用酒), 그리고 수차례 증류방법으로 제조된 홍로(紅露)와 감홍로(甘紅露)와 같은 고급술이 생산되었으며, 한국 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주세법, 주세령과 전통 민속주 쇠퇴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던 일제강점기에 들어 화려했던 우리의 전통 술 문화는 몰락하여 쇠퇴기로 전환된다. 조선시대에는 양조장이 12만 개나 있었으나, 조선 말기인 1883년에는 일본의 후쿠다(福田)가 부산에 일본식 청주공장을 세운다. 조선총독부는 주세법과 더불어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융희(隆熙) 3년(1909) 7월 ‘주세령’을 공포한다. 그리고 그 해 9월 주세령이 강제 집행되었는데, 일본은 보다 효율적으로 주세를 걷어 들이기 위하여 한국 술 제조를 탁주, 약주, 소주의 세 종류로 규격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은 우리 전통주인 각 지역의 특산주(特産酒)와 가양주(家釀酒) 등의 민속주 제조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사라지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한국의 주조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몇 차례의 제도가 공포되었으나 일제강점기는 한국 술의 침몰기이며 이들 법안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 이후 급속하게 우리의 민속 전통주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 시기에 일본식 청주(淸酒), 맥주, 양주 등의 외국 술이 유입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상당기간 일본식 제도가 남아 있어 민간에서는 제사나 혼사나 회갑연 등을 치르기 위해 가정에서 술을 밀조하였으며 이러한 밀조가 곧 토속주의 맥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정부의 금지정책이 풀리면서 안동소주, 문배주 등의 증류식 소주와 각종 가양주가 제조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술 권하는 사회와 조지훈의 주도(酒道) 18단계
 
일제강점기의 조제 금지령과 1965년의 소주 금지령 등을 거치면서 희석식 소주가 유행하여 일반인들도 값싸게 소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소주나 맥주는 주로 일반인들이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었으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동료나 문인들과 술자리를 갖는 시간은 삶의 여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소주나 맥주 등이 일반화하면서, 현대시에도 술과 관련된 작품이 많이 등장하였다. 1920~30년대에 식민지 시기의 김기림, 이상, 정지용 시인의 작품에서도 술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다. 더불어 1950년대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을 비롯한 김수영, 신동엽, 박봉우, 김종삼,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천상병 등의 시인과 김관식, 정호승, 박정만, 김영승 시인 등 2000년대 이르기까지 술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개성적으로 변주되어 오고 있다.

특히 1960~70년대에는 문단과 술, 특히 시인과 술은 무척이나 친밀한 단어였다.

60~70년대는 만취의 시대,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막걸리 양조장이 마을마다 널려 있었고, 희석식 소주는 텔레비전 메인 시간대 광고에 흘러넘쳤다. 농촌에서 되로, 공장에서 공단으로 수많은 근로자가 끼리끼리 어울리며 노동의 고통을 술로 잊었고, 개발독재에 저항하던 인사들 역시 그 좌절과 절망을 술로 달랬다. 80년대는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따른 폭음의 시대, 밤의 문화의 시대였다. 성공한 쿠데타 시대는 수단과 방법을 묻지 않았다. 돈! 돈! 돈! 돈만 벌어라. 막걸리, 소주가 맥주로. 맥주가 어느새 코냑, 위스키로 바뀌었다.

당시에 문인들이 많이 출입했던 술집으로는 ‘은성’ ‘대머리집’ ‘낭만’ ‘흑산도’ 등이 있었다. 이 중 1970년대 종로 청진동에 있었던 ‘흑산도’란 술집 주인은 시인 권일송(1933~1995)이었다. 그의 시는 제목마저도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한빛사, 1966)라고 붙여 당시 시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술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떠오르는 천년의 햇빛/ 지는 노을의 징검다리 위에서/ 독한 어둠을 불사르는/ 밋밋한 깃발이 있다/ 하나같이 열병을 앓는 사람들/ 포탄처럼 터지는 혁명의 석간 위엔/ 노상 술과 여자와 노래가 넘친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 권일송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또한 술에 얽힌 시인들의 주벽과 기행의 일화는 시보다 더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문인과 술에 관한 저서로는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간행된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1960년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발간한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가 있다. 그리고 한국평론가협회 부회장을 지낸 신동한 선생이 1991년 해돋이에서 출간한 《문단주유기》가 있다. 술로써 세상에 싸움을 거는 시인들의 일화는 곧 세계에 대한 시인의 고민과 투쟁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시인들에게 술이란 곧 내면의 고통을 달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종삼 시인의 술과 관련된 작품은 시를 읽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술에 중독된 시인의 글에서 서글픔과 가족의 애환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전집에는 술에 관련한 작품이 약 20여 편이 있다. 손민달은 “김종삼의 시 세계에서 파편화된 현실은 ‘술’을 통해 오히려 비극화되었고 동일시된 타인과 교유하며 환상의 세계에서 원형의 복원을 꿈꾸”었다고 평했다.

김종삼은 시 〈장편〉에서 “쉬르레알리즘의 시를 쓰던/ 나의 형/ 宗文은 내가 여러 번 입원하였던 병원에서/ 심장경색증으로 몇 해 전에 죽었다./ (중략) / 아우는 스물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라며 술을 마시게 된 이유를 형의 죽음과 폐병으로 사망한 동생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산문에서도 “살아가노라면 어디서나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다. 화가 나서 마시고 어째서 마시고 했지만 한 마디로 절제를 못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비극적인 가족사와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현실에 대한 비극적 정황 인식을 술로 달래었다.

‘술병’이 도지면 눈에 술밖에 보이는 게 없다. 아내는 환자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돈은 물론 토큰까지 뺏어가지만 그는 무작정 나선다. 동네 가게에서 외상으로라도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미리 당부를 받은 가게 주인은 가라고 소리친다. 그는 쫓겨나듯 아내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윗동네 가게로 가서 무작정 소주를 딴다. ‘돈은 나중에’라고 말하게 되면 상대 쪽에선 당연히 욕설이 튀어 나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계속 소주를 마시며 폭음을 하여, 결국 술 때문에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그의 비극적 삶의 면면이 몇 편의 시에 그려지고 있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먼 산 너머 솟아오르는
나의 永園을 바라보다가
구멍가게에 기어들어가
소주 한 병을 도둑질했다
마누라한테 덜미를 잡혔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토큰 몇 개와
반쯤 남은 술병도 몰수당했다
비는 왕창 쏟아지고
몇 줄기 光彩와 함께
벼락이 친다
强打
連打

— 김종삼 〈극형〉

또 죽음의 발동이 걸렸다
술 먹으면 죽는다는 지병이 악화되었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폭주를 계속
하다가 중환자실에 幽閉되었다 무시무시한 육신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
다 고통스러워 한시바삐 죽기를 바랄 뿐이다.
희미한 전깃불도 자꾸만 고통스럽게 보이곤
했다
해괴한 팔자이다 또 죽지 않았다
뭔가 끄적거려 보았자 아무 이치도 없는 

—김종삼 〈죽음을 향하여〉

위의 시를 보면 술 때문에 겪는 고초가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의 신상에 관련한 체험적 내용을 과감하게 시적 소재로 차용하는 시인의 솔직함이 더욱 시를 감동적으로 읽히게 한다. 술은 이처럼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이나 기질적 우울을 달래주는 역할도 하지만, 반면에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 일찍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다.

김종삼 시인 이외에도 술에 관련한 일화를 꼽으라면 술성이라 불렸던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을 빼놓을 수 없다. 조지훈의 술에 관한 일화와 사람에 대한 정이 넘치는 일화는 〈술은 인정이라〉는 수필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수필에서 그는 술을 마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吾道)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 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가화(人情佳話)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라고 자신의 주도를 술회하고 있다.

또한 〈주객이 아니라는 성명〉에서 조지훈은 “나는 폭주 20년의 주력은 있지만 그동안 1만여 번의 술좌석에서 일어난 일을 거의 잊은 적이 없고 혼자서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다만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신 흥취를 좋아하는 것이다”라며 애주가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조지훈 시인은 술에 대한 여러 가지 단계를 설명한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의 계단이 있다.”라고 했다. 더불어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段)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조지훈 못지않게 잘 알려진 애주가로는 미당 서정주(徐廷柱)가 있다. 1990년대만 하여도 당시 문단에선 새해가 되면 선배 문인들에게 세배를 가는 풍습이 있었다. ‘소설가들은 동리 선생의 댁으로, 시인들은 미당 선생의 댁으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단의 선후배 사이가 돈독했으며, 그런 자리에는 으레 술이 함께 하기 마련이었다. 미당은 특히 말년에 맥주를 좋아하였는데, 맥주 중에서도 카스라는 상표의 맥주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자들은 세배를 갈 때면 선생이 좋아하는 맥주를 들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미당은 제자나 후배 문인들을 위해 맥주뿐만 아니라 각종 술을 담아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미당은 술을 마시다 술이 떨어지면, 무릎 근처쯤에 놓아둔 목탁을 두드리거나 차임벨을 눌러 술을 내오게 했다고 한다.

1963년에 쓴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선운사 동구〉는 1968년 출간된 제5시집 《동천》에 실린 작품으로, 선운사에 시비로 세워진 작품이기도 하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 서정주 〈선운사 동구〉

이 시를 보면 능란하게 넘어가는 육자배기와 칼칼한 막걸리가 절로 떠오른다. 지금은 특산물인 풍천장어집이 즐비한 선운사 입구이지만, 예전에는 절 입구 삼거리에 막걸릿집이 하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해 초가을, 미당이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선운사 버스정류장에서 우산도 없이 이슬비를 맞고 서 있다가 선운사 동구 주막집에 들어섰다. 비를 맞아 추운 몸에 뜨끈한 구들방과 잘 익은 신김치에 막걸리를 마셨는데, 마침 40대 중반의 주막집 여인이 있어 미당이 육자배기를 청하자 막걸릿집 주인 여자가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그런 일 있었던 이후 여주인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에 의탁하다 끝내 아랫동네 감나무 밑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한다. 미당은 그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전해 듣고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1930~1993).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는 시인을 또 꼽으라면 천상병 시인을 들 수 있다. 천상병 시인은 1967년 동백림사건 연루와 전기고문, 그리고 살아 있는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유고 시집이 출간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1971년도 초 5개월여 동안 천 시인이 보이지 않고, 가깝게 지내던 주변 문단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되자 천상병 시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이 애석해하며 시 원고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술에 만취하여 쓰러진 천상병 시인이 행려병자로 오해받아 응암동의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유고 시집이 출간된 후 천상병 시인이 예의 그 천진스러운 얼굴로 다시 술자리에 나타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죽어서까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장에서 몇백만 원의 조의금이 걷혔는데, 그들 가족에게는 큰돈이라 장모가 애써 숨긴다고 부엌의 아궁이에 숨겨 놓았는데, 이를 알지 못한 시인의 아내가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는 사연 역시 그를 더욱 기인처럼 만들고 있다.

술과 관련된 그의 일화 역시 독특하다. 그는 술 중에서도 특히 막걸리를 좋아했었는데, 전기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달래기 위해 매일 막걸리 두 되로 세 끼 식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인사동이나 종로 일대를 떠돌며 동료 문인들에게 돈을 꾸어 막걸리와 술과 담배를 사서 피웠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는 결혼 후에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의 담장도 대문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내 목순옥 여사에게 하루 이천 원의 용돈을 받으면 맥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는데, 그 일이 그의 삶에 커다란 행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래 두 편의 시는 천진무구한 천 시인의 삶과 순수함을 엿보게 한다.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원 훔쳐/ 아침 해장으로 간다/ 막걸리 한 잔에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나!

— 천상병 〈비오는 날〉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상병 〈주막(酒幕)〉

소주 수백 병을 마시고 수백 편의 시를 토한 박정만 시인

《시인세계》에서 2005년 봄호에 기획한 〈시인과 술〉에 기고한 장석주와 정규홍의 글에 따르면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가 한 달 동안 마신 소주병이 삼천 병에 달한다고 하여, 술병을 모아 마당에 줄지어 세워놓으니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고도 한다. 이렇듯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소주를 마시고 쏟아낸 수백 편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시의 끝머리에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을 적어 넣었는데, 어떤 시들은 불과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쓰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우리 시문학에 나타난 술을 살펴보았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키며 일찍 죽음으로 몰아넣는 양면성을 지닌 음식으로, 술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되어 우리 삶 깊숙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망라하여 술은 시의 중요한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변주되어 왔다. 술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풀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비극적인 현실이나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 나타난 술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곧 술을 통해 세계와 몸으로 부딪치려는 시인의 눈과 펜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서투른 글을 쓰면서 문득 대학가 주점 벽면에 거친 붓글씨로 휘갈긴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날씨야 아무리 네가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사먹지”

가난하고 추웠을 시인은 아마도 배고픔과 추운 시절을 소박한 한 잔 술로 데웠음이 분명하리라. 

 

서안나 / 시인. 1990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와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가 있다. 한양대. 추계예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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