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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李陸史(264) - 청포도
2015년 12월 14일 00시 55분  조회:5272  추천:0  작성자: 죽림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나라를 잃고 먼 이역 땅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향수와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에의 기다림을

 

노래한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다.

 

 

 

오늘은 청포도, 절정, 광야 등 어두운 시대상황에서 명징한 언어로

 

불멸의 독립의지를 노래한 민족시인,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몸을 던져 싸운 실천시인

 

이육사(이원록)에 대해 살펴본다.

 

 

 

 

 

 

 

 

1.출생과 어린 시절

 

 

 

1904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난 육사,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 투사의 집안인데, 그의 투철한 항일 정신은

 

이런 가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 아닐지?

 

 

 

한편 어릴 때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17살 때

 

대구로 가 교남학교(대륜고등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후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도쿄 쇼오소쿠 예비학교에서 공부하다

 

 1925년 귀국하는데,

 

 

 

그의 수필이나 평론에 보이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나

 

서구문학이나 사상에 대한 깊은 조예는

 

바로 이같은 교육경험 때문으로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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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독립투쟁

 

 

 

귀국 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그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는데,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라

 

호를 육사(陸史)로 정하게 된다.

 

 

 

참고로 그는 처음에는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로

 

 '戮史'란 필명을 썼는데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는

 

집안 어른의 권고로 다시 바꾼 것이다.

 

 

 

 

 

 

 

 

이육사(李陸史)ㆍ문학로드 안내

 

 

 

 

 

시인ㆍ독립운동가(1904.4.4 ~ 1944.1.16)

 

 : 육사 본명 : 원록(源祿)

 

작명 : 활(活) 출생 : 경북 안동

 

  

 

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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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 회관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을 벌였다.

 

1926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 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호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렸다. 그 때의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젓 시「말」을 발표했고 이후 총 39편의

 

시를 남겼다.

 

이듬해에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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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1월 16일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ㅇ사곤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서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 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지를 노래했다.

 

 

1968년 대통령표장, 1977년 건국포장,1983년 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 수여되었다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옛날
하늘이 처음 열릴떄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지 못하였느리라!

 

끊임없는 세월 동안
부지런한 계절이 피었다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노라

 

지금은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리라

 

그리하여 오랜 세월 뒤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황혼  

 

                     이육사

 

 

내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 의 반짝이는 별들 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속 그윽한 수녀들 에게도,

 

시멘트 장판위 수인들 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은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 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쏘는 토인들 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 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줄 모르나 보다.

 

 

 

 

  

 

 

이육사 - < 절정 >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시비

위치 :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 좌측 숲속)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李陸史 1904∼1944)

 

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활(活).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육사는 호인데 대구형무소 수감번호인 264에서 취음한 것이다. 중국 베이징[北京(북경)] 조선군관학교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1929년 광주(光州)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43년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된 뒤 1944년 베이징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잡지를 발간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30살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岡)·김광균(金光均)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고, 목가풍의 시 《청포도》 《교목(喬木)》 등을 발표, 상징주의적이면서도 호사한 시풍으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였다. 그의 시작세계는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과 비애, 《광야》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저로는 친지들에 의해 발간된 《육사시집(1946)》 《광야(1971)》,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에서 부르리라(1981)》 《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1968년 안동에 육사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육사 청포도시비

 

본문

청포도시비
  •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34-17
  • 문의 : 054-270-6681(호미곶면주민센터)
 

상세설명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에 우뚝 서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조형물 디자인은 영남대 홍성문 교수, 비문은 아동문학가 손춘익씨, 글씨는 서예가 정현식씨가 각각 맡았다.

 

이육사는 이 시를 통해서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했다.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특히 식민지 치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과 대립하면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다.

 

청포도,하늘,푸른바다,청포 등 청색 이미지와 흰 돛단배,은쟁반,하이얀 모시수건 등 흰색 이미지는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가 듬뿍 담긴 '청포도'는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된 매체로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또 '그가 찾아올 그 날'이란 대목은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를 의미하며, '청포입은 손님'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은쟁반'은 화해로운 미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을 암시하고 있다.

 

 

교통안내

  • 대중교통: 시내에서 200번 좌석버스 이용시 구룡포 종점(환승센타) 하차 후 호미곶행 버스 이용 (40분간격)
  • 자가용 이용 : 시내에서 구룡포, 감포 방면 31번 국도 이용하여 구룡포읍내 진입 후 925번 지방도 이용하여 대보방면으로 20분정도 가다보면 우측 해안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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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문학관과 이육사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4.3km에 위치함

 

이육사(李陸史)에 대하여

 

 

1904년∼1944년. 시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원록(源綠) 또는 원삼(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활(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발표시 육사와 二六四 및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황(滉)의 13대손인 가호(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로, 5형제 중 둘째아들이다.

 

 

                                                                               이육사 생가터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옛 백학서원(白鶴書院)인 백학학교(白鶴學校)와 보문의숙(普文義塾)·교남학교(嶠南學校)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북경대학(北京大學)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여부가 확인된 것이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원기(源琪),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북경감옥에서 죽었다.

문단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 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 春愁三題〉·〈황혼 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청포도 샘

 

그뒤 《신조선》·《비판 批判》·《풍림 風林》·《조광 朝光》·《문장 文章》·《인문평론 人文評論》·《청색지 靑色紙》·《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수필·문학평론·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원조(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청포도 靑葡萄〉(문장, 1939.8.)·〈절정 絶頂〉(문장, 1940.1.)·〈광야 曠野〉(자유신문,1945.12.17.)·〈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超人意志)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ㅅ방과 같은 육사의 의식공간은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은 것이다.

1968년 시비가 안동에 건립되었다.

유저로 《육사시집》 외에, 유고(遺稿)재첨가본 《광야》(1971), 그의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曠野)에서 부르리라》(1981)·《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이육사의 출생과 고향

 

 

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육사는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육사가 살던 시절에 이 마을은 백여호가 살아가는 규모였던 모양이다. 

 

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낸다. 

 

 

                                                                                       육우당 유허지비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 손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요.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다. 이렇나 강직한 저항성이 퇴계 학통에서 나왔는데 , 그가 곧 퇴계의 후손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문학관 가는 길목의 퇴계 종택 

 

 

                                                                         퇴계종택전경

 

육사의 집안은 저항성이 강한 성격을 보였다. 이곳 원촌은 하계와 함께 항일 투쟁사에 우뚝 선 마을이다. 하계 출신 예안 의병장 이만도는 일제강점에 단식으로 순국항거한다. "친일적인 행위나 태도를 인정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고와 생활자세가 돌연변이로 어느날 갑작스럽게 만들어지기 힘든 일이다. 정신적 틀, 전통적 규범이 육사를 길렀다"라고 김희곤 교수는 쓰고 있다. 

 

 

맏형인 원기는 대구로 이사 후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난하고 힘든시절이었다. 육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마을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다. 육사는 어린시절 동리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보면서 흰 돗단배에 대한 시상(詩想)을 키웠으리라. 지금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가로 가서 둑길을 걸으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 온다. 

 

 

 

 

                                                                             포항 호미곳에 세워진 청포도 시비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이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생가 李陸史 生家


원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현소재지 : 경북 안동시 태화동 672-9번지.

분      류 :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호. 
지  정 일 : 1973. 8. 31.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이며 애국시인 육사 이활李活(1904~1944)의 생가로,

건축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옮겨지기 전의 육사 생가 모습.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다.

대문 맞은편인 서쪽 끝에도 내당과 외당을 잇는 판벽이 있고 일각문이 있었는데,

이렇게 앞뒤 一자집만으로 평행 배치하고 양쪽에 맞뚫리는 문이 있는 집은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3량가三樑架의 一자 집이며,

안채는 맞배지붕, 사랑채는 팔작지붕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칸수와 칸 사이가 모두 같고, 방과 마루, 부엌 등이 똑같은 공간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대문은 내당과 외당의 동편 끝에 판벽을 늘어세우고 한가운데 문주를 세워 기와를 이었다.

 

원래 안동군 도산면에 있던 것을 1976년 4월 안동댐 수몰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겼는데,

안동 시내로 옮겨진 후에는 한쪽 일각문 자리에 대문이 서고

원래의 대문 자리는 이웃집 돌담이어서 담장도 대문도 없게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후손인 이원종이 관리를 맡고 있다.

옛 집터에는 1993년에 청포도를 새긴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李 陸 史 
출전 :《朝鮮日報》(l936·10·23∼29) 

노신 약전-부저작 목록-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이며 자(字)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점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야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후 동경에 건너가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연에 귀국하야 절강성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회문학운동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문학에 대하야 자연주의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 정부교육부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연 도하문 대학교수로서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주임교수의 직에 있다가 1928년 이것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맹아일간』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련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맹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중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가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제거하였다. 형년 56. 

주요한 작품으로는 {아Q정전(阿Q正傳)} {눌함( 喊)}{방황(彷徨)}{화개집(華蓋集)}{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약(藥)}{공자기(孔子己)} 등이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엿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불란서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의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팔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과 인제는 고인이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을 불명케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여사를 중심으로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열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뒤 3일이 지난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 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 『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阿Q의 正傳을 다읽고 났을때 나는 아직까지 阿Q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견디겠다』고 한『로망·로-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阿Q의 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阿Q들은 벌써 『로망·로-랑』으로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 많은 阿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난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阿Q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정신의 삼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같은 것은 속인의 할 일이라 하여나치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동성파와 사기당과 원수단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지(胡適之)박사는 『문학개량 추의}라는『문학혁명론』을 1917年 신년호에 게재하여 진도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운동을 방해코저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 보았으나 1918년 4월 호에 노신의『광인일기』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 화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것은 그 후 얼마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속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하면 곳 붙들고 말하기를----- 중국의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개 망상광의 일기체의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열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열마나한 해독을 끼처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송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적 사회의 성장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중에 한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둬적거려 보았다. 역사란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씨여져 있었다. 나는 밤잠도 안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자가 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소설의 일편은『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을 맞는다. 실로 이 한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 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데따라 문학화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이(孔乙已)』『藥』『明日』『一個小事件} {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후 1921년 북경신보문학부간에 그유명한 『阿Q正傳』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현화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가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의 심리에 생활의 『디테일스』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가지 조건이 되겠지만는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테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孔乙己』의 공을기나 『阿Q正傳』의 阿Q가 모두 일파이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孔乙己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여지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이금십구적 주책가 어느때까지 쓰여져있는데로 언제인지 행방이 부명된 체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농민인 阿 Q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혁명 떠들어 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얼어난 폭도의 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 (피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야) 피살되는 阿Q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가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阿Q가 공을 이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개의 정신도 없으며 우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개 쥐여질리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레얄 리스틕}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 였으니 당시 『阿Q正傳』이 發表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阿Q 時代』이 였으며 노신의 『阿Q正傳』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지식군들은 『阿Q相』이라거나 『阿Q時代』라는 말을 평상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개의 재료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야 일실하여있는 노신정신을 다시한번 음미해보는데 적지않은 흥미를 갖게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나 하나 문제가 엇지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문제는 그의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後年『눌함』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로으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을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하려니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 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 이였겠지만은 이꿈도 결국은 깨여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해도 또 아무리강상해도 무의미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밖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中略---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하기로 했다 (눌함자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하남』 등에 쓰든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희납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빠이론』과 파란의 복수시인 『아담·미케뷧치』『항가리』의 애국시인『베트피 ·산더--』 『필립핀』의 문인으로 서반아 정부에 사형받은『리샬』등의 작품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서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녀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닭게 한 것은 물론 이래기천년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여졌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였다. 

그럼으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阿Q도 여기서 비로서 영생하였스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항 무한을 쫓겨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부촌이 때마침 프로 문학론이 드셀때인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보았다. 그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阿Q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作品에서 우리는 눈딱고 보아도 푸로레타리아的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것이서 노신이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수 있는 푸로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민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반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해서 그의『四五』전후의 작품을 프로 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러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 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해서 작가 노신의 명의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서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수있을까? 생각컨대 이것은 매우 곤난하다. 現在의 이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테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해도 용이치않다. 어떤 사람이 즉 이런 문제를 제출한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그래도 좋다. 왜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양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프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기피 현실의 핏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 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中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전 모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삼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를 소뿌르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를 뿌르 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는파에 대해서는 무엇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전투자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 보담 만은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료해하야 장래를 추단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랄』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 시준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父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든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生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느면 안될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려나가기 더 바밨다.}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한 안복파의 수령 단사서의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의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오십여명 체포령을 내렷다. 우리 노신은 이 오십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이 결정되어 그 익년 가을 『뽀로듼』等이 고문으로 광동에오고 『전국민적공사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 일계단인 광동시기에는 프로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지 였다』 

그래서 급진교수들은 교육부총장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수백여명의 사상자가 낳다. 그때 노신은 북경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병원이나 공장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이래 최암흑일에 지』하였다는 명문은 단사서로 하여금 기자에 내려안게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중략--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속화개집)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콜키-』이든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양리 ·발뷰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오십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단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폐타는 광동일성만 노동자 농민급진지식분자 삼천여명을----하였으며 한때는 『혁명의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여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악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하는 것은 대권로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더 생기있는 것이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더 아낌이 없시------(而己集) 

이 글은 그가 심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보인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그가 상해에 왔을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불만과 극좌적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찰스키--』들의 문학론과 『싸벳트』의 문예정책을 번역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던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가 마저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난한 수형에 의하여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점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 -了- 
 
 


이륙사는 노신을 만나 보았을까?

   - 이륙사(李陸史) <魯迅追悼文>의 공과(功過)문제

 

             김병활(金秉活)

 

 

 

 

목차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 이륙사의 <노신추도문>의 비교문학적 가치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5) 고쳐 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5. 맺음말

참고문헌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1세기 동아시아 문학의 방향을 탐구함에 있어서 中國, 韓國, 日本 등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상호 이해하고 대화와 담론을 할 수 있으며 공동연구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 접점중의 하나가 바로 3국 문단에 모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魯迅연구이다. 중국과 일본이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한국보다 한발 앞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일부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하였겠지만 공동으로 담론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노신연구를 돌출이 내세운 데 있다고 본다. 근년에 한국에서도 노신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비교문학의 시각으로 중한현대문학을 연구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추세로 발전한다면 중한문화교류는 증일 교류보다 못지않은 수준과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본 논문은 노신에 대한 한국에서의 수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면서 중점적으로 이륙사의 <노신추도문>을 텍스트로 이륙사의 노신관(魯迅觀)을 분석하고 일부 문제점도 제기하려 한다.

 

 2. 이륙사의 <노신추도문>의 비교문학적 가치

 

  20세기 20-30년대에 한국에서 노신(魯迅)을 소개한 중요한 논문 중에는 이륙사(李陸史)의 <노신추도문>이 있다. 이 문장은 노신이 서거된 지 4일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조선일보>>에 5기로 나누어 연재되었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한국의 노신연구 분야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비교문학의 수용이론에 따르면 똑 같은 작품일지라도 독자들의 이해와 반응은 다종다양하다. 한국에서의 노신수용도 마찬가지로 부동한 문인들과 독자들은 부동한 수용입장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륙사의 <노신추도문>이 발표되기 전에 한국에는 이미 양백화(梁白華)가 번역한 일본학자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의 논문 <호적(胡適)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학혁명>에서 처음으로 노신을 거론하였고 1931년 1월에는 정래동(丁來東)이 장편논문 <중국단편소설가 노신과 그의 작품>을 <<조선일보>>에 20기로 나누어 연재하였다. 1934년에는 신언준(申彦俊)의 <중국의 대문호 노신방문기>가 한국 <<신동아>>지 제4기에 발표되었다. 이밖에 노신의 소설작품이 한국에서 널리 번역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 노신은 한국문단에 광범히 알려진 중국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노신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문인들도 있었다. 이경손(李慶孫)은 1931년 2월에 <그 후의 노신- 丁君의 노신론을 보고>라는 문장을 <<조선일보>>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는데 당시 항간에서 떠돌던 노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두로 쓰면서 노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고 노신이 <<左聯>>(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담한 것을 시답지 않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이경손은 후일에 한간(漢奸, 매국적)으로 전락한 장자평(張資平)을 노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고 정래동의 노신론에 대해서도 관점 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륙사의 <노신추도문>은 일반적인 추도문의 수준을 초월하였고 학술적 연구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정음사의 출판으로 된 <<이륙사전집>>에서는 제목을 <노신론(魯迅論)>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이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노신, 호적,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신을 숭배하였다. 그가 30년대 초반에 이미 좌익 켠에 선 노신을 숭앙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조카 이동영(李東英)교수는 지난 세기 70년대에 이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은 ‘한국의 노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1) 이륙사가 노신에 대해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노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때문에 그는 노신을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 ‘문화의 전사’라고 높이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신의 부보를 듣고 더없이 비통해하였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 시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노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2) 노신에 대한 이런 심후한 감정은 그 앞서 노신을 소개하고 평론한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륙사는 <노신추도문>에서 <광인일기>를 분석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노신의 백화소설 <광인일기>가 발표된 후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였다.”“이 주인공들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하였다.”“어린이를 구하자”는 말은 “당시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노신을 가리킴--필자 주)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이였다.” 이런 평가는 그 경향성이 아주 선명하며 노신에 대한 숭배와 노신의 반대편에 섰던 복고(復古)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륙사는 <노신추도문>에서 <아Q정전>을 분석하였는데 그 관점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아Q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유명한 <아Q정전>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일인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는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Q시대였으며 노신의 <아Q정전>이 발표될 때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아Q相>라거나 <아Q시대>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이광수는 작가들에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부정적 예로 노신을 거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신의 <아Q>나 <공을기>는 노신의 소설가적 재분의 표현으로는 영광일지는 모르나 그 꽃을 피게한 흙인 중국을 위하여서는 수치요 모욕이다. ... 관우, 장비는 아Q와 공을기로 퇴화해버린 것이다.”3) 여기에서 이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노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독(誤讀)’하고 있는바 노신의 창작동기와 작품의 사회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륙사는 9개월 후에 쓴 <노신추도문>에서 <아Q정전>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광수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로 수많은 아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 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시고탑로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4)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이 노신의 잡문을 거의 거론하지 않은데 반해 이륙사는 노신잡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신잡문에 대한 해독을 통해 노신의 사상발전을 연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노신의 문학관에서 홀시할 수 없는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이륙사는 정래동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래동은 소설작품에 대한 연구에 치우면서 잡문연구를 멀리하였기에 노신 문학관에 대해 일부 편차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노신은 철두철미 문예는 혁명에 인연이 가장 먼 것임으로 암만 문학자가 혁명, 혁명하고 떠들어도 제3선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왔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이륙사는 노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노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이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 작품이 산출하는데서 문호 노신의 위치는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5) 뿐더러 이륙사는 노신의 잡문집 <<이이집(而已集)>>에 수록된 잡문들을 인용하면서 노신이 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 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였다.

  이 대목은 이륙사가 노신이 중국좌익문단에 합세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이륙사가 한 아래의 말에서 진일보 입증할 수 있다. 국민당의 쿠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온 ‘원기 왕성한’ ‘젊은 프로학자’들이 극좌적인 태도로 노신을 공격할 때 노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6) 당시에 ‘카프’계통의 작가, 비평가들이 노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이륙사의 이런 견해는 특별히 주목되는 점이다.

  이륙사는 북양군벌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노신을 박해한데 대해서도 통분해마지 않았다. 그는 노신의 창작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애석해하면서 노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원인은 국민당정권의 박해로 하여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한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관점은 이경손처럼 노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노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었다고 폄하하는 의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이륙사의 생평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이것을 구명하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러 면에서 자술과 가설을 고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심중히 고증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제기하고 논의하려 하는데 우려심도 없지 않아 있다. 광복 전 많은 한국문인들이 친일경향을 나타낸데 반하여 이륙사는 독립투사, 저항시인으로 추대되어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존재로 나서고 있다. 이런 이륙사에게서 흠집을 찾아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쩐지 위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라고 자처해 온 이상 아는 대로 연구 선색을 제공하고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정설로 된 듯싶고 무릇 이륙사의 생평을 거론하면 반드시 그와 노신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예컨대 김학동(金㶅東) 편저로 된 <이륙사전집>에서는 이륙사와 노신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신추도문>은 그 표제와는 달리, 노신문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노신론>이라 할 수 있다. 육사는 중국에 있을 당시 노신을 직접 만났을 뿐만 아니라, 노신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때 육사는 호적, 서지마, 노신 등을 포함한 중국근대문학에 경도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완전히 이륙사의 자술에 근거한 것이다.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노신과 만난 경과에 대해 이륙사는 <노신 추도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 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괘아’를 입은 중년 늙은이가, 생화에 쌓인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란 것을 말하고 난 10분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였다.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이륙사가 노신을 더없이 존경했다는 것, 노신도 생면부지의 조선청년을 아주 따뜻이 대해주고 초면에도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아래에 이 기술을 권위인사와 학자들의 서술과 대조해 보자. 

  양행불의 장례식 상황에 대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권위인사인 정사원(程思遠) 주필로 된 <<중국국민당 백년풍운>>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 20일 오후 2시, 폭우가 쏟아졌다. 양행불 장례식은 만국 빈의관 영당(靈堂)에서 거행되었다. 국민당 특무들은 또 동맹의 기타 지도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었다. 송경령, 채원배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만국 빈의관에 가서 의연히 조문을 하였다. 노신도 조문하러갈 때 집을 나서면서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노신은 비를 무릅쓰고 귀로에 올랐는데 그 비속에 충만된 피비린내를 감수한 것 같았다.7)

 

 중국의 노신연구 학계에서 권위학자들인 임비(林非), 유재복(劉再復)이 쓴 <노신전>에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월 20일, 양전(楊銓,양행불-필자 주)의 장례식이 만국 빈의관에서 거행되였다. 국민당특무들은 채원배와 노신을 암살하련다는 요언을 사처에 퍼뜨리었다. 이 날 오후 노신은 이미 희생될 사상적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주 침착하게 옷을 갈아입고 대문 열쇠를 조용히 허광평에게 넘겨주었다. ... 그리고는 정오에 온 허수상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심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몇 십 명의 조객들은 문어귀에 서서 감시하는 특무들을 멸시하면서 가슴을 뻗치고 회장에 들어섰다. 송경령과 채원배는 이미 양전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8)

       

 이 몇 가지 서술을 대조해 보면 일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륙사는 노신이 송경령과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 백년풍운>>의 기술에 의하면 양행불의 장례식에 송경령(宋慶齡)과 채원배(蔡元培)가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고 노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노신의 이 날 일기에도 “점심에 계시(季市, 許壽裳--필자 주)가 왔는데 오후에 둘이 함께 만국 빈의관에 가서 양행불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라고 적혀있다.9) 임비, 유재복의 기술에는 송경령과 채원배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빈의관의 양행불 영구 앞에 서있었고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허수상이라고 하였다. 보다싶이 <중국국민당 백년풍운>과 임비, 유재복의 <노신전>의 기술은 이륙사가 <노신추도문>에서 한 기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신과 동행하여 만국 빈의관에 들어온 사람은 송경령이 아니라 허수상이며 송경령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채원배와 함께 양행불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노신의 반만 사상에 대해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의 상호 단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고려한 모양인지 별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노신은 당시 시대적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분명히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노신이 1933년에 만족(滿洲族)의 대표적 의상인‘마괘아’를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그냥 입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마괘아’는 중국어로 ‘馬褂’, ‘馬褂兒’라고 하는데 기마민족인 만주족들이 말 타고 싸우는데 편리하도록 허리까지 짧게 만든 웃옷이다. 명 왕조 이전에 중국의 한족들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리 드리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만족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마괘아’와 같은 만족의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청조말기에 조정이 부패해 지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한족들에게는 반만 사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구국, 애국을  ‘만청(滿淸)’정부를 반대하는 것과 직결시키기도 하였다. 손중산이 조직한 동맹회의 誓約盟書에도 <만주 오랑캐(韃虜)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라고 쓰여 있고10) 노신이 일본에 있을 때 가담한 광복회의 서약서에도 <漢族을 광복하고 우리의 강산을 되찾자>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11)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의 노신도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 간 후 제일 먼저 청 왕조가 한족들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머리태를 베여버리고 “나는 나의 피를 조국에 바치련다(我以我血薦軒轅)”고 선언하였고 또 한족들의 강산을 광복하려는 <광복회>에 가담하였다. 이런 경향은 그의 문학작품에서도 간간이 노출되고 있는데 <아Q정전>에서 丁擧人의 금은보화를 실어간 신해혁명시기의 ‘혁명당’도 바로 명왕조의 말대황제인 숭정(崇禎)황제를 기리고 명 왕조를 ‘광복’하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노신의 수필 <범애농(範愛農)>에서도 노신은 한 고향사람인 범애농이 일본에서 무턱대고 자신을 반대할 때의 감수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미운 것이 만주족이라고 생각했댔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버금이고 제일 미운 것은 범애농이였다.” 여기에서 노신은 젊은 시절부터 청조의 만족통치에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였고 한족으로서의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간혹 ‘마괘아’를 입기는 하였으나 1927년 1월 후부터는 ‘마괘아’와 ‘서양 마괘아’라고 칭하는 양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고 서거할 때까지 줄곧 한족들의 대표적의상인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필자가 노신이 1902년부터 1936년까지 남긴 사진 114점을 조사해 보았는데 1926년까지의 사진 40점 중에 ‘마괘아’를 입은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것도 대체로 敎師직과 교육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마괘아’를 입은 장소였다. 1927년 1월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74점 사진 중에는 ‘마괘아’를 입은 사진이 한 점도 없다.12) 아마 청조 시기 근 300년 입고 있던 ‘마괘아’를 관습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점차 반만 사상이 의상에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 아닌가고 추정된다. 혹자는 이륙사가 중국 의상문화를 잘 알지 못해 두루마기를 ‘마괘아’로 잘못 인식하지 않았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륙사가 노신이 두루마기 위에 ‘마괘아’를 입었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이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1991년 7월에 북경 노신박물관에서 일보던 張연구원한테도 이 일을 자문해보았는데 그도 단마디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노신추도문>에 따르면 R씨는 상해 불란서 조계지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 편집원이다. 그는 노신과 사전에 아무런 약속이 없는 상황 하에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한 무명의 조선청년을 노신에게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는 미스터리 식 인물이다. 사실 이날 노신은 국민당 특무들에게 피살될 각오를 하고 집 열쇠마저 두고 나왔으며 추도식은 특무들의 삼엄한 감시 밑에 있었고 일기도 좋지 않아 폭우가 억수로 퍼부었다. 이처럼 열악한 천기와 수시로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노신이 이륙사와 같은 무명의 조선청년을 만나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있었겠느냐가 의문스럽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노신은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공적인 장소에서는 냉혹할 정도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중국문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있는 자료에는 노신이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서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륙사의 기술과  임비, 유재복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후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 처량한 애도곡이 울리는 가운데, 비애에 찬 흐느낌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선서하는 듯하였다. 영별이외다! 하지만 당신이 채 걷지 못한 길을 우리 모두가 걸어갈 것입니다.

                              

                                                       -- 임비, 유재복 <노신전>

 

  이와 달리 이륙사의 기술처럼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것은 노신의 종래의 성격, 이미지 그리고 장소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서 역시 중국인들에게 잘 접수되지 않는 점이다. 낭만주의 시인인 곽말약(郭沫若)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일런지 모르지만 노신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륙사의 <노신추도문>에 왜 이런 묘사가 나왔겠는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노신은 양행불 추도식이 있은 이틑날에 일본 벗(樋口良平)에게 시 한수를 써서 증송하였는데 이 시는 후에 <양전을 추모하여(悼楊銓)>라는 제목으로 많은 저서에서 수록되고 있다. 시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豈有豪情似舊時,

       花開花落兩由之,

       何期淚灑江南雨,

       又爲斯民哭健兒。13)

(대의: 그 옛날 호기와 격정 어디로 갔나

       꽃이 피고 지여도 할 말이 없구나

       어느새 눈물이 강남의 비 되어 쏟아지는데

       여기 백성들 또 건아를 위해 통곡하누나 ) 

 

  이 시에서 ‘눈물이 강남의 비’로 되었다거나 ‘건아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단지 문학적 표현으로서 이 시를 근거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고는 할수 없다. 아마도 이 시가 항간에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는 것으로 와전되지 않았는가고 추정된다.

 

5) 고쳐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이륙사 관련저서에는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이 모두 ‘1932년 6월 초’로 되어있다. 김학동 편저로 된 <이륙사전집>(새문사, 1986)에서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을 1932년 6월 초라고 쓰고 있고 심원섭 편주로 된 <원보 이륙사전집>(집문당, 1986)의 작가연보에도 “1932년 (29세) 6월 초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다.”라고 쓰여 있다. 이동영 편으로 된 <광야에서 부르리라-이륙사전집>(문학세계사,1981)의 <이륙사의 항일운동과 생애>에는 “1932년 6월 초 어느 날 중국과학원의 부주석이요 국민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의 호상소인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났으며...”라고 적혀있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의 진실성 여하를 잠시 제쳐놓더라도 이 연보는 틀린 것이다. 양행불의 장례식은 1933년 6월 20일이다. 여기에서 우선 연도가 틀리며 일자도 틀리게 적혀있다. 양행불이 암살된 날은 6월 18일 (일요일)이고 장례식은 6월 20일 (화요일)인데 이륙사는 ‘6월 초’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조간신문에서 양행불 피살 기사를 읽었고 그 뒤 3일후에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기억의 오차라고 추정할 수도 있는데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왕의 연보에서 이륙사의 1932년 행적이 잘못 되였으면 1933년의 행적도 따라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것을 자그마한 기억오차로만 간주하지 말고 보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심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노신추도문>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집필되었기에 오차가 나타난 것은 피면할 수 없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지금 <이륙사전집>을 출판할 때마다 이런 오차에 대해 주해를 달지 않고 그대로 답습한다면 독자들에게 그냥 ‘오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여러 개 판본으로 된 <이륙사전집>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모두 똑 같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문장의 순서에 따라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노신이 1917년에 귀국하여 절강성의 사범학교와 소흥 중학교 등에서 리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문제 - 노신은 1902년에 일본 유학을 갔고 1909년에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고 1912년에 교육부에 취직하였다. 그가 작가적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8년에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2) 노신이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된 적도 없다. 다만 문학연구회의 결성을 지지, 성원하였을 따름이다.

 

3) 1928년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萌芽日刊>>지를 주재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1927년 4월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동년 9월에 광주를 떠나 10월에 상해에 이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맹아일간>>지가 간행되지 않았고 그 후 1930년 1월에 <<萌芽月刊>>지가 창간되었는데 노신이 이 간행물의 주필로 되었다.   

 

4) 노신이 1931년에 상해에서 체포되었다는 문제 - 1931년에 ‘좌련 5烈士’중의 유석(柔石)이 체포될 때 노신의 도서출판 계약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특무들은 노신의 집 주소를 대라고 핍박하였으나 유석은 시종 불복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노신은 친우들의 서신들을 불살라버리고 일본인 우치야마(內山完造)씨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이 황륙로 화원의 한 일본 여관에 피신하였다. 사람을 질식케하는 작은 방에서 노신 일가는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면서 한 달 동안이나 피신생활에 시달리었다. 아마 이 일이 외부에는 노신이 체포되었다고 와전된 듯싶고 이륙사도 그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5)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에 서거하였다는 문제 - 현존 자료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국민당 어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라는 조직이 없었다. 노신은 임종 전에 트로츠키 파 진중산(陳仲山)과 논쟁을 벌린 일은 있다.

 

6) “유명한 오사(五四)운동이나 오주(五州)운동”- ‘오주’운동은 ‘오삼십’(五卅)운동의 오기(誤記)이다. ‘5.30’운동은 1925년 상해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북양군벌정부가 파업에 나선 상해의 방직노동자들을 참살하여 발생한 혁명적운동이다.

 

7) 1926년 4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 장개석의 쿠데타는 ‘1927년’의 오기이다.

                

5. 맺음말

 

  이륙사의 <노신추도문>은 학술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를 평론하려한 정래동이나 신문기자 신분으로 노신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 신언준과는 달리  노신 숭배자이며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륙사의 숭배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에 접근하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갖고 있다. 때문에 일부 <이륙사전집>에서 <노신추도문>을 <노신론>으로 고친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 문장은 노신서거 후 4일 만에 발표된 장편추도문이기에 일부 문제점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필자는 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이고 저항시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이륙사의 자술에서 흠집을 찾아내고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는데 동료들의 권고로 포기하였었다. 필자는 종래로 이륙사를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이륙사의 독립투사로서의 공적과 저항시인으로서의 위상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진실을 구명하여야한다는 학자의 사명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 학자 와타나베 죠우(渡邊 襄)씨는 노신을 숭배하는 입장이면서도 노신의 자술에서 ‘환등(幻燈)사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많은 정력을 투입하여 조사, 연구하였다. 그리고 논문 <노신의 ‘러시아 정탐’ 환등사건-사건의 진실성과 허구성에 대한 탐구>를 발표하였다.14) 이처럼 자신이 숭배하는 문인일지라도 진실은 구명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아마 모든 학자들의 공동한 인식일 것이다. 거기에 또 돋보이는 것은 중국학자들이 이 논문을 중요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어준 것이다.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외의 한 俗人이 거론한다는 것이 실로 외람되고 죄송스러운 줄은 알고 있는 바이지만 순전히 학술적 입장에서 출발한 본문의 취지를 넓은 아량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김학동 편저: <이륙사전집>, 새문사, 1986

심원섭 편주: <원본 이욱사전집>, 집문당, 1986

이동영 편: <“광야에서 부르리라” 이륙사전집>, 문학세계사, 1981

《魯迅日記》:《魯迅全集》15捲, 人民文學齣版社,1981

林非、劉在復:《魯迅傳》, 中國社會科學齣版社,1981

程思遠 主編:《中國國民黨百秊風雲》,延邊大學齣版社,1998

《魯迅》(影集):北京魯迅博物館 編輯,文物齣版社,1976 

 

주:

1) <<한국현대문학사 탐방>>, 제290페이지 

2) <<이륙사전집>>, 정음사, 1980, 제76페이지 

 

3) <<조선일보>>, 1936년 1월 6일

4) <<이륙사전집>>, 정음사, 1980, 제77페이지 

5) 동상서, 제83페이지 

6) 동상서, 제88-89페이지 

7)  《中国国民党百年风云》, 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 1998, 第424-425页 

8) 《魯迅傳》: 林非、劉再復,中國社會科學出版社,1981年,第312-313頁 

9) 《魯迅日記》:《魯迅全集》第十五卷,第85頁,人民文學出版社,1981 

10) 《中国国民党百年风云》,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1998, 第44页 

11) 동상서,第37页 

12) 《魯迅》:北京魯迅博物館編輯,文物出版社,1976 

13) 《魯迅全集》15卷, <日記>,第85頁, 人民文學出版社, 1981 

14) 《日本學者中國文學硏究譯叢》(第三輯),吉林敎育出版社, 1990, 第154頁

 

 

《朝鲜-韩国学语言文学研究(3)》(民族出版社‘北京’2006.2)

 

 

 
 




 

이육사시인의 따님 이옥비여사님 /

 

 

이육사선생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여사님(70)과 함께

 

 

  

 

벚꽃 아래서 

 

 

해 지는 모습이 너무 신비해서... 

 

 

 

 

명자나무꽃 옆에서 

 

 

 

 

안동댐에 있는 이육사시비 '광야' 앞에서

 

 

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옥비여사님은 아버님의 유업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8년부터 서울에서 안동에 내려와서 살고 계십니다.

육사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 만 3살이었기 때문에 아버님에 대한 것은 글과 어머님을 통해 들었지만

살아있는 동안 아버님의 유업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자그마한 체구로 오늘은 윷판대(광야 시 무대)를 오르시고

내일은 왕모산 칼선대(절정 시 무대)를 오르시며 하루해가 짧은 듯이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여사님은 궁중요리를 비롯하여 각종 음식도 잘 하시고 꽃꽂이 또한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을 갖고 계셔서

지금은 안동에서 꽃꽂이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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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시비 이건 후
안동댐으로 이건 후의 육사 시비(광야) 앞에서.
아랫줄 좌로 부터 신동집 시인, 신석초 시인, 이효상 국회의장, 육사의 장조카 이동영 교수, ?, 김대진 국회의원 뒷줄 좌로 부터 이승희 안동군수, 서기원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장, ?, 양태식 경북도지사,맨 뒤 육사의 양자 이동박.


|2011.04.02. |

중국 연변작가協 올해 만주서 '이육사 문학제' 개최 
자정순국 안동 선비 渡滿 100주년 기념

 

 

 

 

 나라 빼앗긴 경술국치의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었던 안동지역 선비들이 ‘왜(倭)의 땅에서 하루라도 살 수 없다’며 엄동설한 칼바람 추위 속에 만주로 향했던 ‘도만(渡滿) 100주년’을 맞아 중국 연변 조선족 작가들이 안동을 찾았다.

 

 도만 100주년을 맞아 올해 만주지역에서 ‘제1회 이육사 문학제’를 마련할 계획으로 안동 이육사문학관과의 업무 협의와 매일신문사 및 의성군이 함께 마련하는 ‘의성 산수유 꽃바람 국제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안동간고등어생산자협회 측의 안내로 안동을 찾은 중국 길림성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회장 등 조선족 문인들은 31일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향토출신 이육사 시인의 도산면 생가와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이날 연변 조선족 작가들은 이육사문학관에서 육사의 딸 옥비 여사와 이영일 관장, 이위발 사무국장 등 문학관 관계자들과 만나 도만 100주년 기념행사로 만주지역에서 마련할 계획인 ‘제1회 이육사 문학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이육사 선생의 나라사랑과 항일 저항운동이 스며있는 문학세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으며 만주지역 문학제에 서로 긴밀한 협의를 가지기로 했다. 이들은 한국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장과 지역 특산품인 안동간고등어 공장을 차례로 방문하고 하회별신굿탈놀이 관람과 1일 안동문화원, 2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100년 전 만주 항일투쟁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산 이만도 선생을 비롯해 숱한 선비들이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면서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듬해인 1911년 석주 이상룡, 백산 김대락 등 지역 선비들이 문중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향해 한국독립운동사 50년사에 길이 남는 해외 항일운동이 시작된 해였다.

 

 조선족 시인 김승종(48) 씨는 “만주지역 항일투쟁이 시작된 지 100년째인 올해 이육사 문학제를 만주에서 열 수 있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며 “안동지역의 많은 문인들도 이육사 문학제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매일신문)

 

2011-04-01  AM  09:00:00
【안동】만주항일투쟁 개시, '도만 100주년'기념 조선족 문인 내한
 

 

 중국 길림성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회장 등 조선족 문인들이 만주 항일투쟁이 시작된 지 100주년째(도만 백주년)인 올해를 맞아 독립운동의 성지인 안동을 찾아 왔다.

시인과 소설가인 이들은 31일 오전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향토출신 이육사 시인의 도산면 생가와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았고, 1일 안동문화원과 4월 2일 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100년 전 만주 항일투쟁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들은 이어 한국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장과 지역 특산품인 안동간고등어 공장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며 하회마을 전수관에 들러 하회별신굿탈놀이도 관람한다.

 

이들은 도만 100주년 기념행사로 올해 중에 만주지역에서 제1회 이육사문학제를 열기로 하고,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조영일 관장, 이옥비 여사를 비롯한 관계자를 만나 행사개최에 대한 논의를 했다.

 

1910년은 향산 이만도 선생 등 많은 지역 애국지사들이 나라 잃음을 애통해 하며 목숨을 버리고 순국한 했다.

 

바로 그 이듬해인 1911년은 안동지역에서 많은 독립지사들이 고향을 버리고 떨쳐 일어나 일제히 만주로 나가서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해로, 올해가 바로 그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1910년이 정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듬해인 1911년은 역동적인 투쟁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직접 초청한 조선족 시인 김승종(48)씨는 "항일투쟁이 시작된지 100년째인 올해 이육사문학제를 만주에서 열 수 있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면서 "안동지역의 많은 문인들도 이육사문학제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9-23 10:43:49 ] 

학술세미나에서 우상렬교수가 론문을 발표했다.

9월 22일,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량심을 지키고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 안동이 낳은 저명한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중국조선족대학생들의 반일 력사의식을 고양하는것을 취지로 한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이육사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녀사가 참석한 가운데 연변대학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는 범사회적인 문학외면에 직면하여 문학후보군체들의 참여를 주도하고저 진행하는 문학제로서 대학캠퍼스로부터 문학인재를 양성하자는 취지로 진행되는 유일한 대학생문학축제로 연변작가협회와 한국안동시이육사문학관 주최, (주)안동간고등어 협찬으로 이루어졌다. 《청포도》, 《광야》, 《절정》 등 시작품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육사시인의 문학제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항일운동을 하고 북경감옥에서 옥사한 등 시인의 활동범위와 중국조선족대학생들이 참여한다는것이 계기가 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서기 안국현이 대상 수상자 리영 학생에게 시상했다.

금상 수상자들

은상 수상자들

동상 수상자들

이번 문학제 학술세미나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 교수가 《저항시인의 독립정신과 문학적 성과》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고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김호웅 교수가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어 진행된 문학상시상식에서 최경위, 민봉화 등 6명 학생이 동상을, 한지영, 유린식, 조소연 등 5명 학생이 은상을, 허미령, 리위 등 4명 학생이 금상을 수상하고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08급 리영학생이 《필름사진기》(외 3편)로 대상을 수상했다.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연변작가협회 리사인 김승종시인이 연변작가협회의 앞으로 유치한, 중국내 유일한 조선족(한글문장을 쓰고 응모에 참가하는 기타 민족 대학생도 포함.)대학생문학제이다. 연변대학을 출발점으로 조선어(한국어)학과가 설치된 중국의 대학들에서 륜번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제2회 문학제는 2012년에 북경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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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 연변과기대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09-10 16:52:38 ] 

9월 10일 오후, 연변작가협회와 한국 안동 이육사문학관 공동 주최,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의 후원으로 제2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가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이하 과기대)에서 개최되였다.

지난해 한국안동간고등어회사와 연변작가협회가 손잡고 제1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었다.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량심을 지키고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 안동이 낳은 저명한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조선족대학생들의 반일 력사의식을 고양하는것을 취지로 한 이 문학제는 항일투사이며 시인인 이육사선생의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기리고 중국에 이육사선생을 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도 있다. 문학제는 조선족대학생을 상대로 펼쳐지는 문학제로서 대학생들의 작품을 선정하여 문학상을 시상하는 동시에 우리의 말과 글을 사랑하고 배우는 재학중인 기타 민족학생들의 한국어(조선어)작품을 선정하여 한국어문학상을 시상한다.

이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이 한국어문학상 금상 수상자 유혜영에게 시상했다.

과기대 김진경총장이 이육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량옥화에게 시상했다.

이육사문학상 금상 수상자들.

문학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한국어과 09급 유혜영, 장연 등 4명 학생(한족)이 동상을, 과기대 한국어과 09급 범길평(만족), 장총(한족) 등 3명 학생이 은상을, 과기대 한국어과 09급 양결(한족)학생이 금상을 수상했다.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에서는 연변대학 사범분원 10급 최역문, 과기대 상경학부 11급 양기원 등 4명 학생이 동상을, 과기대 상경학부 09급 박예령, 연변대학 사범분원 11급 림해연 등 3명 학생이 은상을, 과기대 컴전통 08급 리상우, 연변대학 사범분원 11급 김향매 등 3명 학생이 금상을, 과기대 국제무역 10급 량옥화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시상식에 이어 이육사시인의 《청포도》, 《광야》, 《절정》, 《꽃》 등 시작품들이 중·한 시인들에 의하여 랑송되였다.

학술세미나에서 론문을 발표하는 연변대학 김경훈(오른쪽)교수.

문학제 학술세미나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인 김경훈박사가 《이육사 시의 구조 연구》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고 한국의성문인협회 회장 장효식시인이 토론을 진행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최국철이 개회사를 하고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김진경총장과 안동문인협회 장은주회장이 축사를, 이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이 페회사를 했다.

주최측과 수상자 일동이 합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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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12 17:14:12 ] 

연변대학사범분원 정철(가운데)학생이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경상북도와 안동시청이 주최하고 안동이육사문학관과 연변작가협회가 주관하는 제3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간고등어회사와 안동병원, 연변대학의 후원으로 9월 12일 오후 연변대학 예술학원 극장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이 개회사를 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은 개회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이육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의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제1부로 진행된 이육사문학세미나에서는 북경제2외국어대학 김영옥교수가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에서 나타난 랑만성 고찰》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고 중앙민족대학 어문학부 오상순교수가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육사문학세미나에서의 오상순(왼쪽)교수와 김영옥교수.

제2부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우상렬교수의 수상작선정보고에 이어 시상식이 진행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절강월수외국어대학의 능적, 려양과 산동공상학원의 오소진 등 3명 학생이 동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번역석사연구생 왕연, 산동공상학원의 수취홍 등 2명 학생이 은상을, 산동공상학원의 원시가학생이 금상을 수상했다.

 

산동공상학원의 원시가학생이 한국어문학상 금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2년급 박복금, 연변대학사범분원 2009년급 리미란 등 10명 학생이 우수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0년급 조문학부 민해인, 연변대학사범분원 2011년급 유홍 등 8명 학생이 동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0년급 신문학부 리나, 연변대학사범분원 2009년급 최려나 등 5명 학생이 은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1년급 석사연구생 김단, 심양리공과대학 유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1년급 조문학부 류서연 등 3명 학생이 금상을, 연변대학사범분원 2012년급 정철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금상수상자들인 김단(왼쪽 두번째), 류서연 학생

시상식에서 연변대학당위 부서기 량인철, 안동이육사추모사업회 권부옥리사장,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문학연구소 오상순부소장이 축사를 하였다.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여환숙, 강수완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회장이 이육사의 《광야》, 《청포도》, 《꽃》, 《황혼》 등 시를 랑송하였다.

 

이날 문학제에는 연변대학, 산동공상학원, 절강월수외국어대학, 심양리공대학 등 10여개 대학에서 온 학생들과 연변대학,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한국안동시청, 안동이육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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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

 

 

 

 

 

 

 

 

 

 

 

 

 

 

 

 

 

 

 

 

 

2015년 제5회 연변이육사문학제(9월 18일~21일)

제5회 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9-18 17:55:21 ] 

9월 18일 오후,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가 주최하고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이육사문학관이 주관한 《제5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병원과 안동간고등어회사의 후원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성원 정봉숙은 개막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중국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하면서 이같은 의의있는 행사를 조직하고 후원해준 경상북도 안동시와 이륙사문학관 그리고 후원단체들에 감사를 드렸다.

문학제 제1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세미나에서는 한국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유성호교수가 《저항으로서의 이륙사시와 그 서지적 사항》,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교수가 《이륙사와 중국 현대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였다.

웃줄 좌로부터 정봉숙, 리봉우, 군부옥, 이옥비, 유성호, 우상렬, 김경훈, 조영일.

제2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이며 연변작가협회 겸직부주석인 김경훈이 수상작선정보고와 수상자명단을 발표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타민족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길림화교대학 장성양, 치치할대학 왕정정 등 5명이 우수상을, 대련민족대학 리로, 정주경공업대학 초근근 등 8명이 동상을, 남경대학 리연, 산동대학 온애륜 등 7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양문연, 손효 등 4명이 금상을, 산동대학 록미교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북경화공대학 김지이, 중앙민족대학 최의단 등 15명이 우수상을, 회해공학원 류연정, 연변대학 정희정 등 13명이 동상을, 천진외국어대학 최려영, 화동사범대학 차경나 등 10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김소연, 김은령 등 5명이 금상을, 연변대학 강미홍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연변대학 강미홍(가운데).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김희선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 박송천 등 랑송인들이 이륙사의 《광야》, 《청포도》, 《노정기》, 《절정》 등 시들을 랑송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대학조선-한국학학원 당위서기 리봉우와 이륙사추모사업위원회 리사장 권부옥이 축사를 하고 이륙사선생의 딸 이옥비녀사가 답사를 하였으며 한국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관장 조영일이 페막사를 하였다.

부분적인 수상자들과 함께.

이번 문학제에는 연변대학과 타지역 20여개 대학들에서 온 수상자 및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과 후원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문학제가 진행되는 동안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중한시인들의 시화전이 있었다.

 

 

 


















 

 

 

 

 

 

 

▲이육사 선생 따님 이옥비 여사가 꽃을 올리며...

 


상해 로신공원 內 윤봉길의사 기념비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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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문화원 원장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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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에서(2015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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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두 달 동안 기거했다는 초가집 

 무너져 내리는 역사의 현장...안타까웠다...

 

 이육사문학관측에서 처음으로 찾아 가는 이육사 순국감옥

 감옥이었던 건물 입구에서 제를 올리는 따님 이옥비여사

손병희 교수, 이옥비여사, 권부옥이사장, 조영일관장

 이육사 순국감옥- 영세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잡초와 쓰레기로 폐허처럼 어지러웠다.

 그날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인이 이곳에 갇혀있었다는 예기를 들었다는 거주 주민

 고문을 당했다는 지하감옥

이육사 순국한 일본령사관 북경감옥을 가르키는 여행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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