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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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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以後 시: 서정주 - 국화옆에서
2015년 12월 14일 03시 51분  조회:4272  추천:0  작성자: 죽림

서정주(徐廷柱, 1915 ~ 2000)
 

 
생애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
출생 전라북도 고창
분야 문학 작가

시인.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未當). 1936년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으로 인간의 원죄 의식을 주로 노래하였으나, 후에 불교 사상과 샤머니즘 등 동양적인 사상을 노래한 작품을 썼다. 시집으로 “화사집”(1941), “신라초”(1960), “질마재 신화”(1975) 등이 있다.

작품

자화상
이 시는 시인이 초기에 쓴 시로 강렬한 생명 의식과 원시적 관능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제목 ‘자화상’이 보여 주듯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자아의 존재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종의 아들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 왔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바람’에 비유한다. 이는 바람처럼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뿌리 뽑힌 삶을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화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삶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화자에게 더욱 굳세게 살아갈 힘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찬란히 틔어 오는 아침에 그의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로 나타난다.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는 ‘시의 이슬’은 삶의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얻은 정신적 · 예술적 결정체로 볼 수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상문/(화작) 지학

견우의 노래
이 시는 일 년에 단 하루, 칠월 칠석에만 재회하는 ‘견우직녀’ 설화를 배경으로 하여, 화자인 견우가 청자인 직녀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 시에서 전제하고 있는 바는 견우와 직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이별이다. 견우는 이러한 운명적 이별을 수용하고 있다. ‘물살’, ‘바람’, ‘은핫물’과 같은 장애물은 단순히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더욱 성숙한 사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또한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이별의 아픔을 수용할 때 사랑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견우는 암소를 먹이고 직녀는 비단을 짜며 만날 날을 기다림으로써 만남의 순간을 위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설화의 견우와 직녀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수록교과서 : (국어) 천재(박영목)

춘향유문(春香遺文) - 춘향의 말 3
고전 소설 ‘춘향전’을 모티프로 삼아 새로운 시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이 시는,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세 작품 중 마지막 작품이다. 제목의 ‘유문(생전에 남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옥에 갇힌 춘향이 죽음을 앞두고 이몽룡에게 남긴 유서의 형식으로 각색되어 있는데, 시적 화자인 춘향은 세속적 차원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1~2연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화자 춘향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 제시되고 있다. 3~4연에서는 화자가 소망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3연의 ‘저승(=죽음)’, 4연의 ‘천 길 땅 밑(=저승)’과 ‘도솔천(兜率天)의 하늘(=극락)’ 조차 결국은 도련님의 곁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은 시간과 공간,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선 화자 춘향의 영원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연에서 화자는 영원한 사랑 속에서 임과의 새로운 만남을 꿈꾼다. 이러한 화자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불교의 윤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검은 물 → 구름 → 소나기’로 연결되는 자연 현상을 통해 이러한 불교적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있다. 화자는 ‘천 길 땅 밑’을 흐르는 ‘(검은) 물’을 거쳐 ‘도솔천의 하늘’을 나는 ‘구름’이 되고, 그 ‘구름’이 다시 ‘소나기’가 되어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에 비를 퍼붓는, 오랜 윤회의 과정을 통과하여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기에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정재찬)/(국어) 교학

국화 옆에서
이 시는 국화가 개화하는 자연 현상과 국화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성숙한 삶의 아름다움과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1, 2, 4연에서는 한송이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아픔과 온갖 어려움을 노래한다. 생명 탄생의 힘든 과정을 상징하는 봄에 처절하게 우는 소쩍새, 여름의 천둥, 가을밤의 무서리는 화자 자신의 잠 못 이룸과 더불어 한 송이 국화꽃과 신비스런 인연을 맺으며, 국화꽃이 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다.
3연은 이렇게 피어난 국화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국화의 아름다움은 젊음의 시절을 다 지나 보내고,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는 누님의 모습과 일치된다. 이 부분에 나타난 누님의 모습은 그리움, 아쉬움 등과 같은 온갖 젊음의 시련을 거쳐 지니게 된 성숙한 삶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국화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곧, 이러한 성숙한 삶의 아름다움인 것이며, ‘국화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화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미래엔/(국어) 신사고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이 시는 외할머니의 집 뒤안에 있던 툇마루를 매개체로 하여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의 추억과 외할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외할머니의 집 뒤안에 있던 먹오딧빛 툇마루의 의의가 제시된다. 일상적 삶을 공유하며 세대 간의 교감이 이어져 오는 공간이라는 툇마루의 상징적 의미는 ‘손때’라는 시어를 통해 형상화된다. 툇마루를 문지르는 행위는 자연스레 툇마루가 번질번질하게 닦여 거울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툇마루를 거울에 비유하여 화자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툇마루는 화자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비추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뒷부분에서는 툇마루에 얽힌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툇마루에서 외할머니가 주신 오디 열매를 먹으며 숨을 바로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한 장의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어린 시절 화자의 얼굴이 나란히 비치는 장면은 세대 간의 교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시의 주제 의식을 구현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국어) 비상(우한용)

신선 재곤이
이 시는 앉은뱅이인 ‘재곤이’를 보살피는 ‘질마재’ 공동체 구성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그린 작품이다. 장애를 가진 ‘재곤이’를 배려하고 끼니와 추위를 견딜 옷과 불을 늘 뒤대어 주는 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재곤이’가 없어진 이후 천벌을 받을까 봐 걱정을 한다. 질마재 마을의 인정이 바닥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도에 지식이 있다는 ‘조 선달’ 영감이 ‘재곤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신선살이’를 하러 하늘에 갔다며 마을 사람들의 긍정적 인식을 이끈다. 이러한 ‘조 선달’ 영감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곤이’의 죽음을 ‘신선살이’를 간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는 바람직한 귀결을 바라는 선인들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정주의 시 속에서는 초월적 존재의 신뿐만 아니라,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신적인 속성을 가지고 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독특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서정주가 세계와 우주를 범신론적, 범재신론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김윤식), 비상(우한용)

화사
이 시는 “시인 부락” 2호에 실린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의 첫 시집 “화사집”(1941)의 제목으로 이름 붙여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작품은 서정주 초기 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서정주 시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서정주의 초기 시풍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시풍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인간의 원죄 의식과 원초적 생명력을 통한 관능적 욕망과 원죄적 세계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사’는 원죄 의식을 느끼게 하고 저주스러우며 징그러운 동물임과 동시에 한편으로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을 지녔고,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을 지닌 아름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심지어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화사’를 화자의 젊은 날 추억인 ‘우리 순네의 고양이 같은 입술’과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유혹적인 뱀의 고운 입술을 통해 ‘우리 순네의 입술’을 연상하고 있을 만큼 다분히 관능적이다.

귀촉도
이 시는 전통적 소재를 빌려 떠나간 임에 대한 화자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귀촉도’란 흔히‘ 소쩍새’, ‘접동새’로 불리는 새로, 이 작품에서는 사랑하는 임의 죽음에 대한 한(恨)을 상징하고 있다. 화자가 사랑하는 임은 다시 오지 못하는 저승길, 즉 ‘서역 삼만 리’, ‘파촉 삼만 리’로 떠나 버렸다. 화자와 사랑하는 임과의 거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 눈물이 아롱아롱 맺힐 뿐이다. 차라리 사랑하는 임이 살아 계실 때 ‘머리털을 엮어 신이나 삼아 줄걸’이라며 지극한 정성을 쏟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의 정서를 내비치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한(恨)으로 승화되어 ‘목이 젖은 새’, ‘제 피에 취한 새’인 ‘귀촉도’로 귀결된다.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이기에 화자의 그리움은 응어리져 피맺힌 눈물을 이루게되는 것이다.

추천사-춘향의 말 1
이 시는 화자인 춘향의 말을 통해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노래한 작품으로, 그네 타는 행위를 지상적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고뇌의 상징적 표현으로 형상화하고있다.
1연에서 춘향은 향단에게 '머언 바다로/배를 내어 밀듯이' 그네를 밀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화자인 춘향이 그네 타는 행위를 땅 위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저 높은 하늘로 오르려는 상징적 행동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연에서는 춘향이 지상 세계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를 밀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을 포함한 현실의 세계가 자신의 소망을 실현할 수 없도록 답답하게 가로막혀 있어서 탈출하고 싶기 때문이다.
3연에서 그녀가 가고자 하는 곳은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하늘'로 표현된다. 이곳은 1연의 '바다'와 의미가 통하는 초월적 이상 세계이다. 춘향은 자유롭게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이 세상을 벗어나 하늘 속의 존재가 되도록 자신을 밀어 올려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 세상의 인연에 얽매여서 땅을 디디고 살아갈 운명이다.
따라서 4연의 독백 '서(西)으로 가는 ~ 갈 수가 없다' 라는 시구는 인간의 이러한 운명적 한계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 준다. 아무리 높이 하늘을 향해 차고 올라도 그네는 다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5연에서 그네의 이러한 움직임은 춘향이 가진 간절한 초월 의지와 그 필연적인 좌절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춘향은 자신을 밀어 올려 달라고 말한다. 파도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떨어져 내려오듯이 자신의 소망도 끝내 달성될 수는 없지만, 이 지상적 인연을 벗어나려는 괴로운 노력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동천
이 시는 완숙한 경지에 이른 화가가 그려 낸,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시 전체가 5행, 3음보 율격의 한 문장으로 된 이 작품은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삶의 본질과 관련된 주제를 간결한 형태 속에 깊이 있게 녹아 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풍경은 한겨울의 춥고 어두운 밤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고, 한 마리 매서운 느낌을 주는 새가 날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풍경에서 시인은 그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초승달은 그의 마음 속에서 아주 오랜동안 그리움으로 맑게 씻어 낸 님의 고운 눈썹이며, 하늘의 새는 그것을 아는 듯 시늉을 하며 비끼어 날아간다는 것이다.
이같이 달과 새가 함께 있는 ‘동천’은 이 시의 공간적 배경으로 정중동(靜中動)의 역설과 고도의 긴장을 보여 준다. 또한, 추운 겨울 밤 하늘에 투명하게 떠 있는 달(절대적 생명의 가치)과 그것을 알고 비껴 날아가는 매서운 새(영원과 무한의 절대적 가치를 동경하는 인간)의 거리는 천상과 지상, 절대성과 유한성 사이의 숙명적 단절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극의 두 요소가 ‘동천’이란 공간적 배경 속에서 함께 배치됨으로써 생명의 초월적 경지를 추구하는 시인의 시적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신부
이 시는 시집 “질마재 신화”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으로, 한국 여인의 매서운 절개를 짧은 이야기체로 형식으로 엮어 놓고 있다.
이 시는 내용상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산문시이다. 전반부는 순간적인 오해로 인해 첫날밤 신부를 버리고 달아난 신랑의 이야기로, 행위의 초점이 신랑에게 맞추어져 있다. 신랑은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하고 달아나 버린다. 신랑의 조급한 성질과 지각 없는 판단이 비극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후반부는 40~50년이 지나, 신랑을 기다리다 매운 재로 변한 신부의 이야기로 신부의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40~50년이 경과한 뒤, 생명이 없음에도 신부가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매운 재'가되어 버렸다는 것은 일부종사하는 열부(烈婦)로서의 매서운 신념을 암시하면서, 유교적 이념의 정신 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초록 재, 다홍 재’는 그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하나의 신화(神話)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이 이야기 속의 신부는 현실적인 열녀(烈女)의 세계를 뛰어넘어 육신의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로 존재하게 된다.

무등을 보며
이 시는 한국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1952년 시인이 광주로 내려가 조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지낼 때, 굶주림에 시달리는 비참한 현실과 창 너머로 보이는 의젓한 무등산의 모습이 너무나 대비가 되어 썼다고 한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우뚝 서 있는 무등산의 꿋꿋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면서, 물질적인 궁핍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사람의 타고난 본성까지 가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여유 있고 넉넉한 태도로 가난을 극복하자는 지혜를 읽어 내고 있다.
1연에서는 가난이 우리들의 타고난 본성까지 가릴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가난이란 한낱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타고난 마음씨'는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하여 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2연에서는 푸른 산이 그 기슭에 기품 있는 향초(香草)를 기르듯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자식들을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를 수밖에 없다는 의연한 긍정의 자세를 취한다. 3연과 4연에서는 서로 기대어 의지하고 있는 산처럼 때때로 힘겹고 괴로운 삶의 시련이 닥치더라도 지애비와 지어미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5연에서는 물질적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자세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형상화하고 있다. 가시덤불 쑥구렁과 같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옥돌처럼 묻혔다고 생각하는 여유 있고 넉넉한 삶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시적 화자의 생각이다.

꽃밭의 독백-사소 단장
이 시는 '사소 설화'를 모티프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질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구도(求道) 정신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시인 자신이 원문에 덧붙여 기록한 바 있듯,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사소'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을 가기 전 그녀의 집 꽃밭에서 한 독백을 가정하고 있다. 화자는 '구름'과 '바닷가'를 통해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경험하고, '산돼지'나 '산새' 같은 인간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개벽하는 꽃'이 화자의 눈에 띄게 된다.
하지만 화자는 헤엄칠 줄 모르는 아이가 수면에 자신의 얼굴이나 비춰 보듯, 그렇게 꽃의 '닫힌 문'을 뚫어져라 바라만 본다.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화자는 결국 '꽃'을 향해 애타게 소리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벼락과 해일' 같은 형벌과 고통을 만난다 할지라도 감내하겠다는 것은, 상처를 입더라도 경계를 넘어서겠다는 뜨거운 열망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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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국화(菊花) 옆에서"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를 단순히 문맥상의 의미를 좇아 읽자면, 제124연을 읽고 그 다음에 제3연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 시는 국화꽃이 핀 어느 순간의 느낌을 집중적으로 노래하기 전에 그것이 피기까지의 과정에 세 개의 연을 배당하고 있다. 제124연이 그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현실적인 발상이고 과장된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하잘것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의 탄생을 위해서는 전우주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3연에서 국화꽃이 독특하게 의인화되어 있음을 본다. 독특하다는 말은 전통적인 시가(詩歌)가 흔히 국화꽃을 지조 있는 선비에 비유하고 있음에 비해, 이 시인의 국화꽃을 '누님'에 비유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애인이나 아내가 아니고 '누님'이라는 것은 국화꽃에 대한 '나'의 혈연적인 친근감을 나타내 준다. 지은이는 그의 자작시 해설에서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미의 영상∼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정일(靜逸)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을 이 시에 담았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제 124연은 단순히 국화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의 시적 표현임이 드러난다. 봄이 20대라면 여름은 30대 그리고 국화꽃이 피는 가을은 인생의 40대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뒤안길'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결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형성되기까지의 비통과 불안과 방황과 온갖 시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방황과 방랑 끝에 비로소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한 여인이 자성(自省)의 '거울'에 비춰 본 자신의 과거이다.
(정희성, 신경림 '한국 현대시의 이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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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는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근대의 동학농민혁명의 발상까지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접할 수 있는 고장으로 굵직굵직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산재해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동양최대의 고인돌 군락지, 구름속에 참선한다는 선운사,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전봉준, 판소리를 정착시킨 신재효, 그리고 미당 서정주(徐廷柱, 1915 - 2000)가 있다. 올해가 미당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미당은 학창시절 누구나 암송했을 ‘국화옆에서’의 시인으로 기억된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쪽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개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국화 옆에서 >전문

 

 

흥덕 교차 지점을 지나 신록에 빨려들다 보니 도립공원선운사다. 먼저 일주문 쪽으로 1974년 고창 라이온스클럽에서 건립한 미당 서정주 시비를 찾아 시비에 표기된 대로 감상해본다.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선운사 동구> 전문

 

 

 

 

 

 

 

옛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막걸리집을 찾았지만 이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뻘쭘 해 했을 미당의 심정을 알만하다.

미당은 1915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호 미당(未)은 ‘덜 된 집’, ‘늘 소년이려는 마음’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안 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을 당한다. 그 후 석전 박한영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무렵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해방 후 순수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파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을 한다. 이후, 서라벌예대와 동국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왕성한 문학 단체 활동을 하게 된다.미당은 약 70년의 창작기간 동안 한국시사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처녀시집 <화사집>부터 83세에 펴낸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총 15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천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쓴 현역 시인이었다. 미당은 우리말을 다루는 천부적인 감각과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시 언어로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일제말기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로 친일 행적을 남기고 군부 독재 치하에서의 행적으로 역사적 현실인식의 부족을 지적받기도 한다.

그의 생가 선운리에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리모델링하여 2001년 가을 개관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당 시 전집 발간 등 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고 있는 가운데 문인들이 뜻을 모아 금년 초 ‘미당문학회’가 결성되었다.

이밖에도 고창에는 1981년 고창문화원에서 건립한 가사는 전하지 않고 제목과 유래만 高麗史樂志, 增補文獻備考 등에 전하는 <선운산가>의 비(碑)가 선운사 입구에 있다.

고창읍 신재효 고택의 <동리가비> 고창무장 사거리와 상하면 송곡리에 <진을주 시비>등이 있다.
(양규창 / 시인. 전라북도문학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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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新婦)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알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집‘질마재 神話’(1975)

 

* 돌쩌귀 : 문짝을 여닫게 하기 위해 문설주에 달아 둔, 쇠붙이로 만든 암수 두 개로 된 한 벌의 물건.

 

■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집 <질마재 神話>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이다. <질마재 신화>는 미당(未堂)의 문학이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에 간행된 시집으로서 초기의 퇴폐적, 상징적 ‘원죄 의식(原罪意識)’에서 벗어나 ‘신라’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취에 몰입한 시기에 간행된 것이다.

 이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는 대체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도 그야말로 보편적인 한국인의 질박한 삶 그 자체를 담고 있어 가장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신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성격 : 낭만적, 토속적, 신화적

▶ 심상 : 초록, 다홍의 색채 심상이 선명히 대비되어 있음.

▶ 어조 : 서사적이며 평이한 어조

▶ 운율 : 산문적 내재율

▶ 구성 :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

▶ 제재 : 신부(新婦)

▶ 주제 : 여인의 정절(貞節)

 

■ 연구 문제

1.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일견 유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가 않다.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미적(美的) 정서를 150자 정도로 서술하라.

<모범답> 주제면에서 분며 이 시는 유교적인 정서인 ‘여인의 절개’를 겉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여인의 정절이 고귀함을 강조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의 현실적 가치관이었던 유교의 열녀 사상을 뛰어넘은 신화적, 토속적 정서를 그 미학(美學)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이 시가 독자에게 특이한 인상을 주는 까닭을 구성상의 특징과 관련하여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특이한 인상을 준다.

 

3. 이 시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존재로서의 신부(新婦)를 표상하고 있는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초록 재와 다홍 재’

 

■ 이해와 감상 1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었다. 여인의 절개란 어김없이 고통과 슬픔, 한(恨)의 여운을 남기는데, 이 작품에서는 강렬한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괴로움과 한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안정감을 준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오해로 말미암아 소박을 당하였지만, 40년인가 50년 -이 시간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한다 하겠다.- 이 지난 뒤까지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우연히 들린 신라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이로써 여인네의 정절의 삶이 완성된 것이다.

 이 시의 강렬한 인상은 이미 생명이 없는 존재이면서도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있는 ‘초록 재와 다홍 재’의 신부에 연유한다. 오히려 철부지이며 지각 없는 신랑에 비해 철저히 유교적인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매서운 신념을 지닌 신부는, 그러나 현실적인 열녀(烈女)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 육(肉)의 세계를 넘은 영(靈)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서정주 문학의 독특한 미학(美學), 즉 현실적 세계관이었던 유교의 정절이 교묘한 토속적 심미 의식(審美意識)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의 경지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가요 '정읍사'와 관련된 망부석 전설, 신라시대 박제상의 아내가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치술령 고개 위에 선 채로 돌이 되었다는 전설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 이해와 감상 2

 이 시는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인해 신부가 40~50년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어야 했고,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비극적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신비주의적인 내용에다 다분히 관능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재가 되어버리는 신부의 비극으로 인해 그저 웃어 버릴 수만 없게 만든다. 또한 40~50년 동안 신방을 기다리고 있던 신부에게서 고전적 절개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대립됨으로써 처절한 비극이 유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한 신랑에게 신부는 40~50년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저항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자기 소멸이라는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다시 말해, 신랑은 자신의 성급하고 지각없는 판단으로 인해 신부를 소박한 채 40~50년을 철저히 잊어버리고 지냈지만, 그 무관심은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비극을 탄생시킨 것이다. 40~50년이란 그 긴 세월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우연히 들른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로 내려앉는 신부의 소리없는 반항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신랑은 ‘안쓰러운’ 뉘우침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록 재’와 ‘다홍 재’는 신부의 영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작품을 한 차원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철저한 속물적 근성의 신랑에 대비되는 신부는 전통적인 윤리관을 대변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현세적․육체적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靈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우하 서정태 시인이 드림줄을 붙들고 서 있다. 자신을 낮추는 집이란 뜻에서 ‘우하정( 又下亭)’이란 현판을 달았다. [고창=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우하(又下) 서정태는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의 동생이다. 우하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미당길 14번지에 산다. 길 건너 미당길 16번지에 미당 생가가 있다. 미당 생가는 우하 생가이기도 하다. 그 집에서 미당이 났고, 8년 뒤 우하가 태어났다.

 우하는 올해 아흔이다. 3년 전 미당 생가 건너편에 자리잡았다. 초가 지붕을 올린 흙집을 지었다. 싱크대 딸린 방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한다. 그날(14일)도 취나물로 한끼를 막 해결한 참이었다.

 “꽃 피었나 보려고 나와 있었지.”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촉촉한 눈망울이었다. 서울서 온다는 기자를 기다렸던 게 분명했지만, 그는 괜히 꽃 핑계를 댔다. 아흔 살 노인인지라 우하는 잘 걷지 못했다. 처마에 달린 드림줄을 잡고서야 겨우 서 있었다. 툇마루에서 바라보면 부모님과 미당 내외의 산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묘살이 하는 셈”이라고 우하는 얼굴을 무너뜨리며 웃었는데, 얼핏 미당의 얼굴이 포개졌다.

 미당과 우하는 어려서 한 방에서 지냈다. 가운데 누이가 있었으나, 미당은 우하를 특히 아꼈다. 미당의 시적 기질은 어려서부터 압도적이었는데, 우하는 그런 형을 따라 시인이 되고 싶었다.

 미당이 열아홉 살 때다. 동생의 동시를 옮겨 적고, 자신의 시를 덧붙여 공책 한 권을 만들었다. ‘무지개’라고 이름 붙인 가족 문집. 그곳에서 『화사집』(1941)이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하는 평생 미당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사람들은 그를 ‘미당 동생 서정태’라 불렀다. 우하는 첫 시집을 준비했으나, 한국 전쟁통에 없던 일이 됐다.

 “내가 시를 쓴 건 전적으로 미당의 영향이야. 그런데 미당은 내 시를 한 번도 칭찬해준 적이 없었지.”

 우하는 시를 접고, 기자가 됐다. 1946년 민주일보로 출발해 전북일보에서만 30년간 일했다. 그런 가운데 미당은 한국의 시성(詩聖)으로 자리잡았으나, 친일 논란도 벌어졌다. 우하가 기억하는 일화가 있다. 1943년 전북 정읍의 어느 여관에서다. 우하가 물었다. “형님, 조선이 일본에 영원히 먹히는 거요?” 미당이 답했다. “한민족이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역사는 먼 훗날 비로소 또렷해지는 거다.” 그 때 우하는 조선 사람이 사라지진 않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분명히 알아주면 좋겠어. 미당은 시인이지 혁명가가 아니여. 젊어서 미당은 내게 벽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미당 문학이 좀 더 의미 있게 남도록 마지막 역할을 하고 싶어.”

 우하는 딱 한 번 시집을 냈다. 86년 동아출판사가 펴낸 『천치의 노래』다. 미당이 그를 불렀다. “네 시 참 좋더구나.”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이었다. 그 시집의 서문을 미당이 썼다. ‘네가 쓴 시들이 부디 명이 길어서 나와 너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있는 것이 되기만을 바랜다. 1986년 1월 29일. 미당 서정주.’

 우하는 요즘도 시를 쓴다. 혹 두 번째 시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우하가 자작시 ‘내 사랑하는 사람(오른쪽 시)’을 읊기 시작했다. 

 12년 전 형의 육신은 저 편 세상으로 건너갔다. 또 그 아래에서(又下), 동생의 육신도 형을 따라 갈 것이다. 집을 나서려는데, 우하가 말했다. “자네, 또 볼 수 있을까?” 그날, 미당길에 꽃은 만발했는데, 미당 생가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내 사랑하는 사람 
                  - 서정태


꼭꼭 숨어라

보이지 않게 숨어라

내 어릴 적 술래잡기

사랑한 사람 찾아 나섰으나

보이지 않네


뻐꾸기 울음에 칡꽃 피는

질마재 너머 첩첩산중

절간에나 계실까

돌문 굳게 닫힌 

수도원에 계실까


내 사랑한 사람

아무 데도 아니 계시니

이제는 서산에 해도 질 무렵

저승에라도 가서

찾아 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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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일

               - 서 정 태

 

걸친 것 다 벗어버리고

다 그만두고

초가삼간 고향집에 돌아오니

알몸이어서 좋다

 

아직은 춘분이 멀어서

바람끝 차가웁지만

방안이 아늑해서 좋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바깥세상에 한바탕

꽃피는 걸 바라다볼 일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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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시인 친동생 서정태 시인(90세)

 

 

 

 
 

 


미당 서정주 탄생 100년
- 미당 동생 서정태 시인, 서정주를 말하다

[스페셜 리포트 | 미당 서정주 탄생 100년]

“톨스토이에 심취 넝마주이로 산 적도… 친일? 왜정 말기를 안 살았으면 말을 말아”



주간조선
[2341호] 2015.01.19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에서 생을 받았다. 올해는 미당 탄생 100주년이다. 

선운리에는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생가와 하나의 담을 사이에 두고 아담한 한옥이 한 채 서 있다. 생가의 별채에는 미당의 동생 시인 서정태가 홀로 기거한다. 젊은 날 전북에서 기자생활을 30년간 한 그는 2013년 두 번째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를 펴냈다. 미당에게 시를 쓰는 아우가 있다는 사실은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거목(巨木)의 그늘에 가려졌던 것일까.

지난 1월 13일 미당이 태와 뼈를 묻은 부안면 선운리를 찾았다. 생가는 미당시문학관에서 50여m 거리에 있다. 생가의 뒤쪽에는 소요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마을 양옆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아늑하다. 마을 저 멀리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간척사업 전에는 마을 바로 아래까지 파도가 밀려오곤 했단다. 미당의 육신은 나지막한 산등성이에서 태어난 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개조해 만든 미당시문학관을 찾았다. 서동진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미당시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찬찬히 둘러보아도 1시간 반이면 미당의 삶과 시 세계가 이해되기 쉽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육필 원고, 파이롯트 잉크, 마라톤 타자기, 원형 책상, 옷장, 모자, 지팡이 등 시인의 혼과 체취를 물씬 풍기는 물건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봄 여름 가을에는 하루 평균 150명 이상의 문학 순례객이 이곳을 찾는다.

그중에서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문학평론가와 시인들이 미당을 평가한 내용이었다. ‘서정주는 시의 정부(政府)다’(고은), ‘우리는 미당 선생의 죽음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바다의 것, 하늘의 것, 우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이어령), ‘서정주의 손에서는 우리 일상생활의 무엇이든지 그대로 시가 되어 버린다’(김우창), ‘독재자조차 훔쳐가고 싶었던 그의 시의 혼’(문정희), ‘인간이 만든 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과 미당의 시이다’(이남호).

서동진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생가 옆의 별채로 찾아갔다. 문패에는 ‘우하(又下) 서정태’라고 되어 있었다. 우하정(又下亭)이다. 서 해설사가 “선생님 저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여닫이 창호문이 열렸다. 손으로 뜬 자주색 스웨터를 입은 백발의 노시인이 “어서 오세요”라며 씩 웃었다.

서정주는 5남매의 장남. 둘째인 서정태는 1923년생이다. 큰형 정주와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93세인데도 혈색이 좋았고 말할 때 발음이 거의 새지 않았다. 황토로 벽이 마감된 방은 13㎡(4평) 정도의 크기였는데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침대, 책상, 좌상, TV, 그리고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주방이 마련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혼자 다 해먹어요”라고 말했다.

미당은 2000년 12월 24일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부인 방옥숙 여사와 사별한 직후 2개월 반 동안 곡기를 끊고 맥주만 마시며 연명하다 부인 곁으로 따라갔다. 서정태 옹은 2000년 12월 24일 그날 미당을 임종했을까.

“삼성의료원 형님 병실에 있다가 오후 6시쯤 거처로 왔어요. 오후 9시쯤 질부가 전화를 해서 오늘 돌아가실 것 같다고 말해요. 그래서 내가 ‘내가 보니까 2~3일은 더 살 것 같던데’ 하고 끊었지요. 그러고 있는데 11시쯤 운명하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그날 눈이 무지하게 많이 내렸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병실에서 형님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형님이 담배를 한 대 피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주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데요. 돌아가시기 전날에 맥주 한 잔을 마셨습니다. 형님이 아프기 전에는 제가 형님을 찾아갈 때마다 맥주 한 박스를 사들고 가곤 했죠.”

여덟 살 위의 형은 어린 동생에게 형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형제만이 간직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나랑 미당이랑 여덟 살 차이요. 형님이 열세 살 때부터 다섯 살 동생인 나를 데리고 잤어요. 나는 형님의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랐지요. 내가 자다가 깨어 귀신이 보인다며 무서워할 때마다 형님은 저를 안아주시곤 했지요.”

미당은 부안에서 줄포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열다섯에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에 다니던 중 광주학생운동 지지 주모자로 연루돼 퇴학을 당한다.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형님이 아버지와 겸상을 하며 식사를 하는데 형님이 퇴학당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땡그랑’ 하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가 밥을 드시다 숟가락을 떨어뜨렸습니다.”

미당은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서회 사건’에 몰려 또다시 퇴학을 당한다. 독서회 사건이란 일부 학생들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던 사회주의 사상 관련 책을 돌려 읽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두 번씩이나 퇴학조치를 당하자 미당은 아버지로부터 미운털이 박힌다.

그러나 동생에게 형은 전혀 달랐다.

“나에게 형은 ‘절대’여. 우리 형님이 절대 최고였어요.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아주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져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형을 미워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그런 형을 왜 미워하실까 생각했어요.(웃음)”

미당을 아는 모든 이들이 미당을 천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생은 형을 어떻게 느꼈을까.

“내게는 천재보다는 절대적인 대상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눈칫밥이 계속되자 미당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집에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아버지 돈 300원을 훔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한 겁니다. 그런데 친구집에서도 하루이틀이지 계속 있을 수 없잖아요. 친구들이 학교 간 시간에는 부립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한 겁니다. 거기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기 시작해 문학에 빠져든 겁니다. 열일곱에서 열아홉 나이에 문학의 세계에 들어간 겁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 미당이 젊은 시절 넝마주이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연이 궁금했다.

“(웃음) 문학에 빠져 살다 바로 톨스토이주의에 심취한 결과지요. 톨스토이주의가 바로 휴머니즘 실천 아니요? 거기에 영향을 받아 넝마주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요. 그때 마포다리 밑에 거지들이 많았는데, 거기 가서 거지들과 어울렸지. 겉멋이 잔뜩 든, 옷도 멀쩡하게 입은 사람이 넝마주이를 하고 종로길, 정동길을 다녔으니 어땠겠어요? 그래서 한때 형님은 장안의 명물로 불렸소.(웃음)”

‘이상한 넝마주이’ 소문은 장안에 퍼졌다. 조선불교 대종사 석전 스님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대종사가 미당을 보자고 했다. 열아홉 살 청년이 당돌하게 톨스토이를 얘기하는 걸 듣고는 석전 스님은 불교 공부를 권한다. 이렇게 되어 머리를 깎고 참선과 함께 불교 공부를 시작한다.

문학 천재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유년기에 가족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있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이 그런 경우다. 미당의 경우는 외할머니 영향이 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여. 생가에서 개울을 따라 70m쯤 가면 외갓집이었어. 형님은 보통학교 때 서당을 다녔는데, 서당도 외갓집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 형님은 틈만 나면 외갓집으로 달려갔고. 그때마다 외할머니께선 ‘우리집 강아지 왔능가’ 하면서 누룽지, 고구마 같은 것을 주셨지. 그런 거 받아먹는 재미에 형님은 외갓집을 들락날락하셨고. 우리 외할머니는 장화홍련전, 사씨남정기, 유충렬전 등을 전부 외우고 있던 분이셨지. 형님이 가실 때마다 이런 구전설화를 얘기해 주셨고, 형님은 전날 다 듣지 못한 것을 또 들으려 외갓집에 가곤 했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머리에 다 박힌 거겠지.”

고창군 흥덕읍에서 부안면 선운리로 가다 보면 고갯길이 나온다. 질마재다. 미당은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어린 시절 각인된 고향의 이야기와 고향의 땅, 바다, 바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질마재 신화’의 해일 편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서정태 옹의 설명이 계속된다.

“선운리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어떤 흐름 같은 게 있지. 일종의 풍류(風流)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유년기부터 소년기·청년기를 거치면서 머릿속에 들어간 이런 풍류가 시로 나오는 것이라고 보면 될 거야.”

알려진 대로 1936년 미당은 동아일보에 시 ‘벽’이 당선되어 일약 시인으로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 미당은 20대 중반에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 김기림의 부탁으로 ‘조선일보 폐간 시’를 쓰기도 했다. 1941년에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을 냈다. ‘자화상’ ‘귀촉도’ 등은 ‘화사집’에 수록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미당은 이른바 친일시 6편을 쓴다. 70년 시작 활동 중 쓴 시 1000편에서 6편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동생은 형의 ‘친일’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지가 궁금했다.

“미당을 보고 친일했다고 하는데, 왜정 말기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그땐 경찰서를 주재소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일본 경찰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아세요? 일부러 주재소 앞을 안 지나고 빙 돌아가곤 했을 때여. 미당이 고창경찰서에 붙잡혀 가 49일 만에 풀려난 적이 있어. 왜 붙잡혀 간 줄 알어? 학생들이 연극을 하다 불온하다고 붙잡혔는데 조사해 보니 서정주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거야. 그래서 잡혀간 거지.” 

서 옹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친일은 일제와 친하게 지내면서 군수, 경찰부장, 경찰서장, 고등계 형사를 지낸 사람들을 친일이라고 해야 맞지. 형님은 목에 칼을 들이대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시를 쓴 것이지. 그런 시를 안 썼으면 오지게 좋았겠어. 하지만 안 쓰곤 못 배기니까. 힘 없는 나약한 시인이니까 쓴 것이지.”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당은 마포구 공덕동 301번지에서 어머니, 아내 방옥숙, 아들, 누이동생, 그리고 서정태와 살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미당은 조지훈, 서정태 등과 함께 육군 소속 정훈국에서 활동하다 가족을 피신시킬 겨를도 없이 동생과 함께 한강을 건너게 된다.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며 정훈 활동을 한다. 그러다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부산으로 후송되었고 동생과 재회한다.

“형님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 건 아마도 서울에 남은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계속 들리니까 죄책감으로 그리 되었겠지요. 그러다 9·28 서울수복 때 서울 공덕동 집으로 가서 가족이 무사한 것을 보고 처음으로 웃으셨어요. 그리고는 정신착란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지요.”

미당의 가족 사랑은 유별나다. 아내 방옥숙을 모델로 쓴 시만도 여러 편이 된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시도 있다. 시인 동생은 형님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특히 좋아할까. 그는 “다 좋아하는데(웃음)”라며 특정하지 않으려 했다. 서정태 옹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거북이에게’ ‘귀촉도’ ‘국화옆에서’….”

서정태 옹은, 기자가 ‘거북이에게’는 처음 들어본다고 말하자 시를 암송했다.

“거북이여 느릿느릿 물살을 저어/ 숨 고르게 조용히 갈고 가거라. / 머언 데서 속삭이는 귀속말처럼/ 물니랑에 네리는 봄의 꽃니풀,/ 발톱으로 헤치며 갔다 오느라….”

그는 미당 생전에 시를 꾸준히 발표했고, 시집도 한 권 냈다. 미당은 동생의 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1948년도 당시에 우리나라 유일한 문예지가 ‘문예’였어요. 매월호에 내 시가 게재돼 솔찬히 인기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형님은 한 번도 칭찬해 준 적이 없어. 내가 66살에 첫 시집 ‘천치의 노래’가 나올 무렵이었지. 형님이 ‘너 시집 낸다고 하던데 서문은 누구한테 써 달라고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김광균씨에게 부탁할 거라고 했더니 형님이 ‘내가 써주마’ 했지요. 제 시를 형님이 다 읽고는 처음으로 ‘야, 니 시 좋더라’고 하셨어요.”

부모가 큰 성취를 했을 경우 때로는 자식에게 부모 명성이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어땠을까.

“어렸을 때는 조금 그랬지요. 누구한테 나를 소개할 때 ‘서정태’라고 하지 않고 ‘서정주 아우’라고 했으니. 사실 그게 못마땅했어요. 그런데 50이 넘고부터는 그걸 다 초월했지. 훌륭한 형님이 있으면 좋은 거지, 안 그래요?”

1시간40분에 걸친 인터뷰 동안 기자는 서 옹의 기억력에 놀랐다. 그는 유년기부터 있었던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시와 등장인물까지. 오히려 너무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답변이 곁가지로 빠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가히 천재적인 기억력이었다.

시인 동생이 보는 미당은 어떤 시인이었을까.

“미당도 명예욕은 있었겠지. 그래서 상을 많이 받았잖아.(웃음) 미당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남는 영원한 시인이 되길 원했을 것이여.”

인터뷰를 끝내고 자리에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서 옹이 말했다.

“4월 13일에서 18일 사이에 한번 꼭 오세요. 그때 여기 오면 선계(仙界)가 따로 없어요. 예전에는 (지금) 논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오죽하면 이 동네를 선운리라 했겠어. 신선 선(仙), 구름 운(雲)을 써서. 내 그때까진 안 죽고 있을 테니까.(웃음)”

선운리와의 첫 만남에서 기자는 천재가 태어나는 땅은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통영이 그랬는데 선운리도 그랬다. 자신의 마지막을 처음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서정태 옹은 생을 시작한 집 옆에서 시를 쓰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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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 2000년 12월 24일 (향년 85세)

학력: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데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수상:2000 금관문화훈장  외 2건

경력:1977 한국문인협회 회장  외 4건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의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마친지식인이었으며,

따라서 미당 서정주도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리라고 보여진다.

 

그의 시  "자화상" 에서 자신을 키운건 8할이 바람이었다  라고 고백 하였고,
이 구절은 그의 삶을 거론 할때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유복한 삶을 보냈다....

 

그의 창씨개명 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이다

이후 친일을 시작함.

 

1942년 7월 13일 매일 신보에 실린"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

1943년 9월1일~13일  의" 인보정신"

1944년 12월 9일 "마쓰이 오장 송가"

1943년 국민문학의 10월의 "항공일"

1943년 조광 10월호의 "스무살된 벗에게"의 수필, 
12월호의 "보도행이라는 르포"

등 거의 친일 행각으로 친일 매국 행위를 하였다.

 

지금 까지 발견된 친일 시는 10개...다른 친일 시인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중요한건 " 강도가 너무 심했다"

 

창씨 개명 후 얼마 안되어 광복...

 미당 서정주의 변론은 기가 차고 말문이 막힌다..

 

"일제 치하에 몇백년은 더 갈줄 알았다" 
그래서 친일 행각을 했다라고 했다...ㅜㅜㅜㅜ

 

서정주의 제자인 조정래는 그의 친일 행각은 당연히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평했다/

 

그런데 서정주는 니가 내 제자인데 그럴수 있냐고 크게 화를 내며 쫏아내기도 했다.

 

그가 죽기전에 언론에서 친일 행각에 질문하자.

 

거  뭐 잘 보아달라고 하고 끝내버렸다.(반성은 없이 작고함)

 

서정주가 다른 친일 행각 시인들보다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는

 

바로 죽을 때 까지 반성하고 사죄를 한적이 없는 이유다.

 

서정주는 백석 시인이 표절시인이라 해서 백석시인이 묻혔다

 

백석시인도 친일 행각 전력?이 있다.(해방후 이북에 남음)

 

서정주의 아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 할까?


그는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수 있다.
자식으로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서정주가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건

저 사람 보다 천재였던 사람이 모두 먼저 돌아간 이유다...)

 

=> 백석( 이북에 남음)

=>윤동주(독립운동)

=>현진건(절필)

 

즉, 이런 사실인데 아직도 솔직히 반성하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후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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