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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名詩 공화국
(1) 주제 :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사랑. 순수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계승의 참뜻 (2) 시간적 추이 과정에 따라 전개, 공간의 이동 1∼ 5연의 유년 시절의 체험 (시골, 고향) 6∼10연의 어른이 된 화자의 체험 (도시, 타향) (3) 과거와 현재 모두 시간적 배경은 성탄제 가까운 밤 (4) 색채 대비 : 흰 눈 <---> 붉은 산수유, 바알간 숯불, 상기한 볼, 내 혈액 (5) 성탄제- 예수탄생축제로서의 의미가 아닌, 한국의 전통적·복고적 정서로 전이되어 인간의 보편적인 사랑(성탄제의 본질적 의미)의 정점을 보여 주는 한편, 그 분위기에 싸여 가족간의 사랑을 한 차원 상승시켜 주는 매개 (6) 붉은 산수유 열매 - 아버지의 사랑.
(1) 주제 :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 (2) 김종길(1926~ )경북 안동 출생. 영미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영향을 받아 감상이나 감정을 억제하고 사물의 선명한 이미지의 조형에 주력한다. 절제와 극기의 태도는 그의 시적 감수성 속에 한시(漢詩)적이고 유가(儒家)적인 전통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집<성탄제> <하회에서> <황사현상> 등. 육사 기념 사업회운영
(3) 성격-주지적, 희망적 (4) 평범한 시어와 간결하고 압축된 표현으로 건강한 삶의 자세를 표출 (5) ㉠ - 새해를 맞는 자세를 총괄적으로 보여줌 ㉡ - 화자의 인생관 (삶에 대해 긍정적, 희망적) ㉢ - 성장의 기쁨과 반가움 잇몸을 뚫고 나오는 어려움과 같은 삶의 고통을 착함과 슬기로써 이겨내고 기쁨과 반가움을 맛보자는 것. 건강하고 바른 인생관에서 표출함을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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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金宗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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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개
김 종 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김종길 시인의 고향, 지례를 찾아서 (글/한경희-안동대 국문과 강사) |
1.
임동면 일대가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물에 잠겼고 김종길 시인의 고향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동방향으로 달려가다가 수곡교를 건너 전주류씨 마을을 지나 한참을 달려서 만날 수 있는 곳에 지례마을이 있다. 수곡마을의 도로 이정표에는 지례예술촌 14Km라고 굵게 적혀 있었는데 이 예술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김종길 시인이 태어난 고향이다. 생가라는 팻말이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아있을 어떤 흔적도 없는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는 일을 두고 긴장이 일어난다. 그래도 호기심과 함께 그 곳이 궁금해지는 까닭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미 오래전에 담수하고 임하호의 이름을 얻은 그 공간을 바라보는 일을 두고 생기는 이 호기심이란 뭘까. 여름에 접어든 한낮 온도는 충분히 덥다 못해 익을 정도로 따갑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로 들판 곡식이 자라나고 영글어가는 줄 모르지 않으나 땀범벅이 된다. 도로에는 칡넝쿨이 쏟아져 내리듯 길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너울너울 햇살을 받고 있다. 계절의 시간이 연초록에서 이미 짙은 초록으로 자리를 옮겨가 앉는 중이다. 새순은 온몸이 한결같이 도로를 향해 쭉 손을 내밀고 있었다. 특별히 땅이 척박한 곳에 칡넝쿨이 자라는지, 계곡이 깊은 곳이어서 칡이 가득한건지, 아니면 특별한 토질영향인지 알 길이 없으나 유독 칡이 산을 가득 덮고 있었다.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지례마을 쪽으로 내려다보니 골골이 길이 이어지면서 첩첩이 몇 겹의 산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우거진 산과 숲을 내려다보는 아찔함, 숲의 깊이가 한달음에 달려오는 느낌이 위협적일 정도이다가 순간 아찔해진다. 숲에 사는 무수한 생명들이 건강하다는 증거쯤으로 이해하면 되려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흙을 밟을 수도 없고 구경조차 힘든 일상공간에서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계곡과 만나는 일은 위협적인 일이 되고 있었다. 경외, 두렵지만 공포의 대상이 아니고 낯설지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숲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간절하다는 건 몹시 부족한 결핍의 반증이라는 정도를 헤아리며 숲을 두루두루 눈여겨본다. 나무와 나무들, 그들이 어울린 공간, 그 빽빽한 밀도와 생명성이 신비하게 보이기도 하고 두렵게도 보인다. 녹색 숲이 짙어지고 짙어지면 검은 숲이 되는 일을 안동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두렵지만 아름다운 체험임에 분명하다. 고불고불, 땀을 씻으며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가니 아주 아늑하고 좁은 길이 나타나고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좁은 길에서 드는 이 한갓진 생각이 내리막길을 따라 줄줄 이어지다가 문득 만나는 숲속 고가. 지례예술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이어진 길이 없다. 예술촌이 마주하고 선 곳은 바로 직진하듯이 임하댐이다. 오늘 길나선 목적은 예술촌이 아니었므로 곧장 임하호 물이 보이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예술촌은 마침 의성김씨 문중행사로 자동차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예술촌 담장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임하호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산딸기 몇 알이 달랑달랑 힘겹게 붙어 있는 산길을 조금 내려가니 잔잔한 물가로 바로 이어진다. 그런데 임하호를 향해 노신사 한 분이 그윽하게 서 계셨다. 무척 더운 한낮에 예의를 갖춘 자리를 찾아 드는 손님처럼 깨끗하게 정장을 하신 분이었다. 순간 임하호가 고향이 된 수몰민일 거란 생각이 스쳤다. 그분은 정적을 깨고 등장한 불청객이 아주 못마땅하셨을 것이다. 한참 물가를 물끄러미 보고 계시더니 등을 돌려 길을 떠나시는 분께 지례 마을 이야기를 여쭤볼까를 망설였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대신 지례를 덮은 물과 죽은 나무와 우는 것처럼 들리는 까마귀 소리를 고향흔적으로 받아들이고 한참 그 풍경에 귀 기울이는 걸로 가름했다. 담담하게 햇빛을 받은 임하호의 수면은 차분하다. 한참 가문 때라 물바닥이 더러 몸을 드러내 갯가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서는 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누런 진흙들이 서로 엉켜 흙이 말라있는 곳도 더러 있었다. 저 물들, 잠잠한 수면 아래 지례라는 마을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가운데 김종길 시인의 고향집도 있었던 것인데. 물결은 너무도 차분하게 옛 기억을 삼켜서 그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만 죽은 나무 몇 그루, 가지조차 제대로 남겨놓지 않은 죽은 나무의 가녀린 몸통을 몇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갯가를 이어 비어 있는 공간에서 마구 자란 풀들은 바람 따라 허리를 휘며 땅으로 눕고 있었다. 아마도 여름 장마철이나 태풍이 오면 물이 차오를 공간이거나 또 댐을 위해 필요한 여유 공간이거나. 하여간 물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풍경도 옛집의 기억을 보태주는 일은 없었다. 임하댐 어느 쪽에서부터 날아온 건지 까마귀의 굵고 깊은 소리에 슬픔이 진하게 들렸고 별 소리 없이 날아드는 물새들의 날개도 한층 힘겹게 다가왔다. |
2.
「원주근방」이라는 시는 안동과 서울 사이에 고속도로가 나기 전,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앙선 기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잘 확인시키는 이야기이다. 원주는 안동-서울의 중간지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청량리에서 기차가 출발해서 원주까지 도착하면 안동사람들은 행선지의 절반이 지났다는 것을 누구나 파악했을 것이다. 또 안동에서 출발해서 제천을 지나면 승객들의 말씨가 달라지면서 완전히 고향을 떠났음을 실감하게 되는데 원주에 이르면 확실히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또 알 수 있었다. 진주빛 흐르는 보릿짚을/낱낱이 엮은 방석을 깔고/달 밝은 뜰에 앉아 삼을 베낀다 밤 여울 물소리 울리는 언덕길을 돌아/물에 잠겼던 무거운 삼단을 지고/아희야 열 일곱 살 곧은 종아리/고이 고이 옮겨 오너라. 이웃 마을에 시집간 딸/산 넘어 돌아오고/봄에 맞은 어린 며느리- 어른은 삼가히 섬길 것이라/철들어 이제 알면서도/때로는 귀여운 희롱을 잊지 않음은/늙어가는 어버이 앞에 베푸는 고운 정성이려니 -삼 줄기 줄기 베끼면 하얀 겨릅대/겨릅대처럼 희고 곧은 마음들,/달 쳐다보며 삼을 베낀다. 달 쳐다보며 삼을 베낀다. (「달」 전문) 안동의 특산물 가운데 삼베가 있는데 삼베를 짜기 위해 삼단을 벗기던 일을 기억하는 작품이 있다. 삼단을 벗기는 일은 시집간 딸까지 친정으로 와서 거들 정도로 큰 행사가 되었던 것 같다. 달이 훤한 밤에 동네 딸, 며느리들이 모여 삼을 벗기는 일을 한다. 물에 잠겨 있어 더욱 무거운 삼단을 지고 오는 일도 동네 여자아이들이 하고, 시집간 딸까지 호출하여 동네 두레로 일을 한다. 달빛이 유난히 눈부셔 보릿짚 방석도 진주를 뿌려놓은 듯한 밤에 또 삼을 벗긴 겨릅대의 흰 몸도 더불어 빛난다. 올해 나온 남효선 시인의 시집 <둘게삼>에도 보면 해거름에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삼을 양푼이에 담아서 비비는 일을 했던 것을 쓰고 있다. 삼을 삼은 두레의 우리말인 ‘둘게삼’은 삼을 가늘게 째서 올올이 자신의 다리에 비벼서 길게 연결시키던 이야기이다. 무릎을 걷어 세워서 그 위에다 삼을 가늘게 말고 연결시키는 일이 삼삼기의 기본이었다. 김종길 시의 미덕은 최소의 수사로 최대의 긴장을 끌어내는 것에 있고, 매우 진술적인 형태의 기술이 보이나 그것이 지리한 이야기로 마무리 되지 않는다. 절대 이야기를 삼가면서 가벼운 수사로 이어지는 것은 거리두면서 그 가운데 ‘정중동’ 지점에서 시를 꺼내기 시작한다. 2005년에 내놓은 <해가 많이 짧아졌다>는 시집의 황혼 무렵,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시점이 올해 시집에도 같이 놓여있다. 영미시인과 중국시인이 함께 황혼에 들어와 더욱 노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인이 동양과 서양을 관통했거나 경계에서 주로 머물렀다면 이제 황혼에서 노을의 붉은 기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간의 한계를 유념하거나 죽음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한 사유의 세계가 잘 드러나는 시집이다. 유교를 두고 논의를 할 때, 이것의 사유와 현실의 억압체계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특히 가부장제 질서의 공고함 속에서 유교는 제 빛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기도 하므로. 그래서 감히 유교가 지닌 감성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못했다. 아니 감성이라는 말을 유교와 나란히 쓰겠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질서 속에서도 감성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의 힘이 끌어내는 끈으로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시에 대한 견해는 시와 노래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일인데, 시인은 노래를 거리두면서 시의 뜻을 찾아간다. |
올해 들어 김종길 시인은 <해거름 이삭줍기>라는 시집을 냈다. 시인은 세월의 흐름, 그 속도와 무게 앞에서 겸허함을 넘어 순응, 그 자연회귀를 준비하는 목소리를 낸다. 시인의 말 그대로 이것도 시랍시고 쓴다는 듯, 일상의 긴장,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의도하지 않으면서 풀어낸 글, 말의 흐름을 멋스럽게 보여주는 시인의 시 몇 편을 살펴본다. 「이것도 시랍시고」라고 쓰면서 “늘그막의 미망/던지러운 미련” 우리들의 미련은 목숨을 어쩌지 못하는 무게만큼 강력하고 끈질기다고 자성어린 토로를 한다. 사실, 해거름 앞에서 이삭을 줍는 일은 미련과는 거리 멀고 그냥 바쁜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몹시 황망하다는 건,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이며 자신을 매우 냉정하게 회초리 치는 격정의 자세이다. 그렇게 여전히 자신에게 냉정한 스스로를 미망과 미련이라는 주름살에 감추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시간의 흔적으로 갖는 주름살 같은 미련, 검버섯 같은 미망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 그 속으로 여전히 팽팽한 활시위 같은 마음을 덮어두려는 것이다.
「자연은 실로」 봄날에 피는 꽃색이 거의 흰색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쓴 시인 거 같다. 사실, 곤충들은 붉은색을 못본다니, 나비를 부르거나, 벌을 모으고자 한다면 꽃들은 붉은색을 피해야한다는 것인데, 결국 자연의 선택과 결정은 생명의 지속성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벚꽃 역시 흰 바탕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은은한 분홍기운을 띄울 따름이니 봄날, 열매를 맺기 위해 피어나는 꽃들의 생명력은 흰색 꽃 몸과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인의 시간, 너무 많이 흐른 시간을 유독 절절이 기억하며 떠나갈 시간, 흙으로 돌아갈 시간을 매우 염려하며 마치 대기자가 되어 기다리는 시들이 제법 많다. 「가랑잎 한 잎」 추운 겨울 이른 산책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빈 의자에서 내린 가랑잎 한 잎에 앉아서 가을낙엽처럼 곧 땅으로 하강할 시간을 짐작한다. 「낙화」 목련의 우아하고 아름다움도 땅을 향해 떨어지면 낙엽처럼 짙은 고동색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사람 역시 목련의 무게 못지않게 지나친 욕심을 제대로 내려놓지 못하고 무거운 몸이 낙화할 것임을 시인은 이미 묵묵하게 짚어보고 있는 것이다. 안동과 관련한 작품들은 행사시에 필요해서 적은 글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에게」와 굳이 고향을 떠올려 쓰고자 했을 「안동」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이 사랑하는 고향은 역사가 긍정하는 분명 소중한 사실들이지만 왠지 행사시라는 성격 탓인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시 역시 어느 자리 행사를 위한 시임이 충분히 짐작이 되는 그런 작품이다. |
3. 지례를 더듬는 마음은 안타까움 그 자체인데 실향을 한 당사자들의 심사는 오죽하랴. 지례예술창작촌에서 강 쪽으로 3-400미터 전방 산기슭으로 생가가 있었으나 수몰로 실향했다. 또, 두 살 반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불운하게도 시인은 어머니도 고향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일찍 홀로된 청상 조모의 사랑을 유난히 많이 받고 자라면서 철없던 시절에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제대로 몰랐고 점차 성장해가면서 알게 되었다. 그 시절엔 증조부, 증조모도 살아계셔서 귀한 장손을 위해 늙은 증조부모님들은 정성을 다했고 그것이 「성탄제」라는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이 실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시 「성탄제」는 어린 시절 몹시 아프던 때 이들 조모, 증조부모님들의 극진한 살핌과 사랑으로 소생하게 된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 집안이 청송 진보로 이사를 하면서 태어난 지례를 떠난 것이 우리나이 아홉 살 때였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진보초등을 다니던 시절에 이미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는데 특별히 둘째 외삼촌이 시인을 귀여워해 외가가 있는 영양 석보까지 함께 걸은 적도 더러 있다고 한다. 그 외삼촌이 당시 신문기자로도 활동했던 이병각 시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인은 증조부 무릎 아래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정식 입학이기 보다는 마을 청년들이 아침이면 식전에 증조부에게 글을 배우러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한문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러다 우리나이 여섯 살 무렵에 배운다는 천자문을 이미 반 정도 익힌 상태였고 한시 짓는 법도 제법 터득해 있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뛰어난 학자들의 유년을 돌아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이 유아시절에 사별해야 했던 어머니, 이 존재는 시인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을까. 차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여쭤보지 못했다.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피해 말을 하면 쓸데없는 말만 많아지고 허접하게 되는데 딱 그랬다. 전화로 질문 몇 가지 던지는 일 가운데 사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인 셈인데. 결국 질문으로 던지지 못했다. 그 이유를 돌아보니 사람의 고향인 어머니와 지리적인 고향 지례, 이 둘은 이미 구체 대상으로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던 내 생각 탓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어머니를 좀 찾아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숙제처럼 해본다. <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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