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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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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신경림 - 농무
2015년 12월 22일 01시 08분  조회:6246  추천:0  작성자: 죽림


 

<농무>(1971)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메어 닫힌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쓴느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헤헤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만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이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1. 화자

누구?

농무를 추는 사람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에 대해 원통 해 하는 사람

처지?

사는 것이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하다.

대상?

 

관심사?

답답하고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시적상황

부정적이고 암울한 힘든 현실에 대한 울분이 농무를 통해 승화되고 있다. 농무가 점점 흥이나고.. 감정이 고조되고 있다.

정서

부정적, 슬픔, 벗어나고 싶음, 외로움(농촌에 젊은 남성들이 없음)

어조

부정적

2. 운율

녀석은, ~처럼 반복

3. 심상

시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

4. 표현

설의법(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 직유법 대구법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역설(농무를 통해 암울하고 비참한 현실과 농민들의 한을 전달)

5. 제목

농무를 통해 농촌의 암울한 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6. 시의 언어

(1) 시어

 

1.조무래기:자질구레한 물건, 어린아이들을 낮잡아 이르는 말

2.꺽정이:조선 명종 때에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동한 백정 출신 의적,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온몸으로 저항한 인물

3.서림이:임꺽정의 모사였으나, 관군의 토벌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임꺽정을 배신한 인물. 자기 잇속만 차리고 위험에 처하면 의리를 저버리는 성격을 지님

4.비료값:표준어는‘비룟값’

5.쇠전:쇠장, 소를 사고파는 장

6.도수장:도살장, 고기를 얻기 위하여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을 잡아 죽이는 곳

 

 

 

(2) 구절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메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징이 울리고 막이 내렸다. 공연이 끝이 났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에 구경꾼이 다 돌아가고 텅 빈 운동장에서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답답하고 사는 것이 고달프기에 원통하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사는 우리는 왜 답답하고 사는 것이 고달프고 원통한 것 일까?... 흥이 나야하는 농무인데 왜... 흥이 나지 않아 보일까? 얼마나 답답하고 고달프면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실까?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헤헤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하랴

: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아이들만 따라붙어 악을 쓰고, 처녀 애들을 철없이 킬킬댄다. 보름달은 밝아서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부조리한 농촌 현실에 대해 울부짖고 도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잇속만 차리며 헤헤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서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친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농촌에 쪼무래기들과 처녀 애들 뿐... 다들 어디로????? 1971경제 개발 상황 속 도시로 gogo... 농촌 피폐해 진 현실 속에 사람들도 점점 사라짐.. 더욱 암울... 소외당함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이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이거나

: 비룟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는 여편네에게 맡겨두고 소를 사고 파는 장을 거쳐 도수장 앞에 올 때 우리는 점점 더 신명이 난다. (이 상황에 신명? 역설적 표현인듯)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우리는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며 어깨를 흔들며 부정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힘든 삶의 울분을 토할 것이다.

 

 

※신경림의 <농무>는 1971년에 지어졌다. 한국 사회는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경제 개발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으면서 경제 수치를 높일 수 있는 중공업 위주의 산업 정책을 택하게 된다. 도시의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농촌에서 힘들게 일해 봐야 농사꾼 소리만 듣게 되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농촌 젊은이들은 도시로 올라와 노동자로 취직하게 된다. 그 결과 도시는 더욱 비대해지고 노동력을 잃은 농촌은 공동화되면서 도시화 농촌의 격차는 더욱 커진다. 이것이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까지 일어난 한국 사

회의 변화였다. <작품을 보는 눈 >

 

 

이런 상황 속에서 신경림은 농촌 현실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농촌 사람들의 아픔을 드러내고자 한 거 같다. 평소에 소외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진 신경림 시인은 농무로 인해 신명감을 갖게 된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농민들의 한과 슬픔을 잘 드러낸 거 같다. 오래 전, 이 시를 공부할 땐 의존적으로 신경림의 <농무>를 민중시라고 인식했었는데.. 직접 분석해보고 시대 상황과 연결지어 보니 이 시가 정말 민중시의 대표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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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후포항에 세워진 신경림 詩碑
   
(아시아뉴스통신=)
  "비단처럼 빛나는 바다"라는 의미로 '휘라포(輝羅浦)'라 불리는 후포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북 울진군 후포면 후포 등기산 공원에 세워진 국민시인 신경림 작가의 시비(詩碑)./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신경림 시 ‘동해바다 -후포에서’ 전문)

 "비단처럼 빛나는 바다"라는 의미의 '휘라포(輝羅浦)'로 불리는 후포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북 울진군 후포면 후포 등기산 공원에 국민시인 신경림 작가의 시비가 세워졌다.

 이번 후포 등기산공원에 세워진 신경림 선생의 시비는 신 시인이 지난 1987년 울진지방을 여행하면서 후포바다를 배경으로 쓴 시로 "속살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후포바다의 청정무구한 자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사람살이의 화해와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로 국민들이 널리 애송하는 시이다.

 이번 시비는 "생태문화관광도시" 울진을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임광원 울진군수의 발의로 세워졌다.

 시비 건립 소식을 들은 신경림 시인은 지난 해 11월 울진군을 방문하고 임광원 울진군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방형섭 울진군 기획팀장과 함께  "아름답고 후덕한 고장"으로 각인돼 있는 울진을 찾아 후포항을 비롯 죽변항과 대가실해안의 대숲길, 근남면 주천대, 서면 소광리 황장봉계와 울진금강소나무숲을 다니며 울진의 아름다움을 재음미하는 생태기행을 가졌다.

 신 시인은 지난 1987년 작가 세분과 울진을 찾아 사흘을 유숙했다며 특히 울진바다의 아름다움과 울진사람들의 후덕한 정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시인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름다운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며 이는 울진사람들의 자연자원을 보존하려는 탁월한 "생태관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시비는 자연석 바위에 앞면에 시편을, 뒷면에 신 시인의 약력을 담고 있다.

 

 

목계 장터/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해설> 1976년 여성지 [엘레강스]에 발표된 작품이다. 원래 1974년 발표되었던 작품에 민요조의 전통가락을 반영시켜 개작해 다시 발표한 것으로, 신경림의 제2시집 [새재](1979)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신경림의 떠돌이 장사꾼들의 삶의 공간인 '목계장터'를 중심 제재로 하여 민중들(떠돌이 장사꾼들)의 삶과 애환을 토속적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이 시는 장돌뱅이의 삶을 형상화한 것으로, 장돌뱅이의 삶은 한 군데 정착해서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삶과는 대조적으로, 자유, 구속으로부터의 탈피, 애환, 방랑, 민중적 삶의 표상 등으로 인식된다. 이 장돌뱅이의 삶을 통해 민중의 애환이나 생명력을 그렸다고 볼 수 있는데, 시적자아의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초연의 삶의 자세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3년에 한 번쯤은 천치의 삶으로, 순수무구하고 탈세속적인 인간 본연의 돌아와도 좋지 않겠는가. 그 달관되고 초연한 자세를 시인은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계산적이고 실리를 정확히 따지는 이 번잡한 삶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하늘, 땅, 산으로 표상되는 자연이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내용상 작게는 네 단락 크게는 세 단락으로 나뉘어지며 그 내용도 비교적 단순하다. 첫째 부분(1∼7행)은 방랑의 삶을 보여주는 곳으로 '구름이나 바람', '방물장수'를 통해 이러한 정서를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8∼14)은 정착의 삶을 보여주는 곳으로 '들꽃과 잔돌'로써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방랑과 정착의 삶이 셋째 부분에 와서는 집약적으로 재차 반복되고 있다. 시적 자아는 자신에게 '목계장터'에서 '짐부리고 앉아 쉬는 천치', 즉 '방물 장수'가 되어 그 모든 변화와 그 모든 삶의 애환을 보고 듣는 존재가 되라고 하는 운명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시인 자신의 삶의 행로, 그리고 민중들의 삶과 밀착되려고 애써 온 그의 시와 일치하고 있다. 그의 마음은 '산 서리 맵차'고 '물여울 모진' 이 세상에서 차라리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고 싶지만, 몸은 끝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김상욱/현대시 목록)

 

* ‘목계’는 1910년대까지 충북 중원군 목계리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에 하나로중부 지방의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가장 번창하기도 했지만, 1921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충북선이 부설되자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 '목계 장터​'는 남한강 중류의 충주 부근의 나루터에 있던 장터로 위치상 매우 번화했던 곳이다. 이 시는 목계 나루라는 구체적 공간을 배경으로, 떠도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민중의 애환을 토속적 시어와 상징적인 수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1인칭​ 화자의 독백형식으로 진술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화자 개인의 삶의 애환이라기보다는 떠돌이로 살 수 밖에 없는 민중의 고뇌라는 일반화된 삶의 현실을 보여 준다. '구름', '바람', '방물장수' 등으로 표상되는 정착의 이미지를 교차시켜, 농촌 공동체의 해체하는시대적 상황 속에서 떠남과 정착의 갈림길에 섰던 농민들의 갈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신경림(申庚林): 1936 - >

 

1936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 1955년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73년 1965년에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해서 첫 시집 [농무]를 간행했고, 평론집 [한국 현대시의 이해] 등을 간행했다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 1979년 봄, 신경림은 두 번째 시집 『새재』를 출간하면서,  제8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받는다.

*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 조태일, 구중서 등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있다가 두 달 만에 공소기각으로 풀려난다.

*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84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등 재야의 중요한 직책을 기꺼이 맡는다.

* 1989년 『민요 기행 2』를 펴낸 그는

* 1990년에 들어  기행 시집 『길』을 내놓는다. 이 시집으로 제2회 ‘이산문학상’을 차지한다.

* 1993년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내놓고,

*1995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고,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고,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되었다.

* 1998년 중국·베트남·일본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펴내면서 제6회 ‘공초 문학상’을 받는다.

*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달 넘세](1985), [민요기행 1](1985), [새벽을 기다리며](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민요기행 2](1989), [우리들의 복](1989), [저 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목계장터](1999),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 [뿔](2002), [낙타](2008) 등이 있고, 평론집에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이 있다.

 

 

<충북 중원군 목계리 목계나루터 신경림 시비, 시제는 '목계장터'>

 

<서울 동국대학교 교정 신경림 시비, 시제는 '목계장터'>

 

* ​사라져가는 농촌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 ​(발췌)(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1955년 신경림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유종호와 함께 하숙한 그는 독서회에 나가면서 『공산당 선언』 등의 좌익 책자를 구해 읽는다. 그 사이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 그는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며 어렵게 서울 생활을 유지한다. 1956년 신경림은 이한직의 추천으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1965년 신경림은 충주의 한 사설학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며 영어로 된 『공산당 선언』의 문장을 가르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데, 어느 날 시내에서 거지 몰골로 쏘다니던 김관식과 만난다. 술을 걸친 김관식은 막무가내로 “네가 안 쓰면 나도 안 쓰겠다.”며 그의 꺼져가는 시심에 불씨를 지피고, 시골 생활에 적당히 지쳐 있던 그를 서울로 불러 올린다. 김관식의 강권으로 충주에서 짐을 싸들고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시인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한다. 마침내 『농무』의 시편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1970년 신경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에 시편들을 발표하는데, 「농무」는 이 가운데 한 작품이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빼어난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은 당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진다. 이때만 해도 문단 일각에서는 그의 시를 ‘이상한’ 시로 치부하며 애써 무시하려는 기류가 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1973년 3백 부 한정판으로 자비 출판한 시집 『농무』가 서점에 깔리자마자 싹 팔려나가면서 신경림이라는 존재는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크게 주목받게 된다. 『농무』는 1960년대 이래의 공업화 우선 정책에 밀려 결딴나버린 살림에서 비롯된 농민들의 암울한 심정과 절망, “남의 땅이 돼 버린 논뚝,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노여움으로 빚어진 시집이다. 그의 시는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 “민중시의 개막이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찬사와 함께 당시 《창작과비평》이 걷고 있던 민족 문학론의 창작 성과로 거론된다. 이에 따라 신경림은 단숨에 현실 비판적인 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오른다.

시집 『농무』에 실린 대표적인 시로는 「겨울밤」, 「시골 큰집」, 「파장」, 「농무」, 「눈길」, 「그날」, 「폐광」, 「갈대」 등이 있다. 백낙청은 스스럼없이 『농무』에 “이제 우리는, 보아라 이런 시집도 있지 않은가라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평을 덧붙인다. 신경림은 『농무』 한 권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고, 제1회 ‘만해 문학상’을 거머쥔다. 나중에는 『농무』의 영역판 『Farmer’s Dance』가 출간되어 미국 코넬대학교의 한국학 강의 교재로 쓰이기도 한다.

1979년 봄, 신경림은 민요와 『농무』의 민중적 서정이 어우러진 두 번째 시집 『새재』를 내놓는데, 여기에 실린 「목계장터」는 특히 절창이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목계장터」는 민요의 기본 율조인 4음보의 가락을 바탕에 깔면서 3음보 가락을 적절히 배치해 지루함을 조절하는, 이 시대 민중문학이 거둔 또 하나의 뜻 깊은 성과다. 단형 소품 서정시 32편에 장시 「새재」가 실려 33편으로 구성된 『새재』에서는 시인의 신념과 민중적 가락이 이전보다 더욱 구체성을 띤 채 펼쳐진다. 신경림은 두 번째 시집 『새재』를 펴낸 지 이태 만에 제8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받는다.

1980년 7월, 신경림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고은, 송기원, 조태일, 구중서 등과 함께 서대문구치소에 갇혀 있다가 두 달 만에 공소기각으로 풀려난다. 침묵을 강요당한 그 시절에 시인은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강연을 한다. 그뿐 아니라 1984년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1985년에서 1987년까지는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등 재야의 중요한 직책을 기꺼이 맡는다.

1984년 신경림은 ‘민요연구회’를 꾸려 그동안 혼자 해오던 민요 채집을 여럿이 함께 하며 문화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가 민요를 찾아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기록을 갈무리해 펴낸 『민요 기행 1』(1985)은 큰 호응을 받는다. 민요연구회의 활동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낳아 나라 안의 여러 대학에 민요 연구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지역 문화 단체에도 민요 모임이 잇달아 생긴다. 1985년 그는 통일을 노래한 본격 민요 시집 『달 넘세』를 내놓는다. 이어 1987년에는 장시집 『남한강』, 1988년에는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펴낸다. 『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신경림은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으로 눈길을 돌려, 농민 시인에서 민중시인, 노동 시인으로 발돋움한다.

1989년 『민요 기행 2』를 펴낸 그는 1990년에 들어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길과 그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을 노래한 기행 시집 『길』을 내놓는다. 『길』에서 시인은 그동안 저도 모르게 얽매인 나머지 민요의 형식을 도식적으로 시에 적용하려고 들던 강박증에서 풀려나 비로소 “민요의 알맹이가 고스란히 녹아든 새로운 언어와 문법”에 바탕을 둔 민요시들을 선보인다. 그는 이 시집으로 제2회 ‘이산문학상’을 차지한다.

신경림은 1993년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내놓고, 1998년 중국·베트남·일본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펴내면서 제6회 ‘공초 문학상’을 받는다. 이마적에 나온 두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개개의 욕망이 어우러지고 부딪치고 서로 밀어내며 만들어내는 사람살이에 대한 그윽한 관찰에서 나오는 성찰의 언어들이며, 강조되는 메시지는 “공생의 윤리”다. 1995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선집이 <갈리마르>에서 나와, 신경림 시의 문학성은 이제 국제적으로 공증되는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요즈음 관심의 중심에 놓은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살이이며, 그의 눈길은 여기서 비켜나지 않는다. 신경림이 시만 쓰는 게 아니라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내고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는가 하면 동국대학교 석좌교수가 된 것도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런 관심 때문이다.

 

생명력이 있는 시를 쓰려면(신경림의 시창작론)(요약)

시라는 것은 남에게 하는 대화이되, 그것이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역시 언어라는것은 남하고 함께 사는 데서 생긴 만큼, 시는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중요시되지 않으면 시는 난쟁이처럼 작아진다. 세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소재로 하는 만큼 말이 주는 즐거움을 소홀히 해서는 좋은 시를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그 시는 생명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런 것들이 시를 쓰는 저의 몇 가지 중요한 태도입니다.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의 시는 우선 읽고 이해하기 쉽다. 첫 시집 『농무』에 붙인 백낙청의 발문대로 시 또는 문학에 대한 특별한 교양이나 공부가 없는 사람이라도 부담감 없이 접근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른바 밑바닥 인생과 이름 없는 자들이 펼쳐 내는 삶의 파노라마가 때로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가 하면, 어느새 눈물 나는 웃음과 해학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한결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고향 사람들과 산동네 주민들과 허름한 목로주점이나 장터와 같은 노상에서 마시는 텁텁한 막걸리 한 잔과 정담 속에 오갔을 삶의 애환과 고통이 그의 시 전면에 녹아들어 있다.
신경림 시인은 그렇듯 민중의 삶에 깊이 뿌리박은 채 거기서 우러나온 시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시를 배격했다. 철저히 민중의 눈높이에 맞춰진 시 세계를 지향했으며, 나아가 민중 또는 서민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현대가 고립되고 소외된 이웃을 양산하는 개인주의 사회라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또한 매스미디어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사람들 간의 인간적 교류나 교감이 멀어져 간다는 생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그의 쉬운 시가 결국 시의 하향 평준화 또는 대중 추수주의라는 일부의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민중이 이해할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일관되게 써 나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당대의 문학이 일부 선택된 소수의 독점물이 되고 있으며, 특히 자족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당대의 현실적인 불평등과 정치적인 핍박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감과 대결 의지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민중의 생활 언어와 그들의 희로애락을 주된 소재 또는 주제로 삼은 것은, 서구 지향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당대의 시인 또는 작가들 작품 속에 민중 또는 대중에 대한 지적 오만 또는 경멸이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임동확/한신대 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 ​파장(罷場)/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해설> ​이 시는 산업화로 점점 초라해지는 시골의 현실을 장터의 모습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시인은 시골장의 개장과 파장이라는 시간적 흐름 속에 향토적인 언어와 비속어 등 일상적인 언어를 적절하게 녹여 농민들의 삶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였다이 시는 농촌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농촌의 궁핍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시골장터의 개장과 파장이라는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서로 안부를 물으며 인정을 나누는 흥겨운 시골 장터의 분위기에서 농촌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분위기로 시상이 전환되며이러한 심리적 이행이 사실적 어휘에 의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현대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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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특징

 

공광규

 

 

1. 들어가며

 

신경림(1935~ )은 1955~6년 <<문학예술>>지에 시 <갈대> 등 여러 시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후 10여 년간 공백 기간을 가지다가 1970년 <<창작과비평>>에 <파장> 등의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화 했다. 지금까지 10권의 시집과 이를 모은 전집 2권, 여러 권의 시선집, 민요기행 및 수필집 등 산문집과 평론집을 냈다.

신경림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서정시의 창작을 방법적으로 혁신하고, 서사시의 창작 실천을 통하여 방법적으로 확장하였으며, 현실 문제를 시에 반영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적 확대를 시도한 중요한 시인이다. 등단기부터 현재까지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에 관한 변화의 흐름을 간단하게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가. 등단기의 전통적 서정시 방법

나. 70년대를 전후한 민중의 삶을 제재로 한 이야기 요소를 시에 도입하는 방법

다. 70년대 중반 이후 시에서 민요의 율격과 정서를 수용하는 방법

라. 90년대 이후에 서정성을 강화하는 방법

마. 서사시의 창작을 통한 양식적 실험

바. 최근 산문시의 경향

 

이러한 변화를 보인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상 특징을 요약하면 서정시의 방법적 혁신,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 현실반영시의 방법적 확대이다. 이러한 특징을 시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서정시의 방법적 혁신

 

신경림은 당시 전통적 서정시나 난해시 위주의 문단 흐름이 당대 민중현실을 형상화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서정시의 양식적 혁신을 실험한다. 신경림이 기존 서정시의 전형을 혁신하는 방법은 시에 민중 이야기를 삽화적으로 구성하며, 전통적인 민중시가 양식인 민요와 무가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우선, 신경림 시에 도입된 이야기가 인물의 행위 표출과 사건의 연결을 통해서 어떻게 한편의 시로 구성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뱃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색시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 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 <겨울밤> 전문

 

단연 26행의 이 시는 전통적 서정시법인 비유나 상징에 의지하기보다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연결하면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자조적이고 자괴적인 어조가 두드러지는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을 몇 명일까? 화자를 포함하여 7명이나 된다. 또 장꾼들, 면장 딸, 분이, 술집 색시, 이발소집 신랑 등 등장인물의 면면을 봤을 때 소외되고 피폐한 1960~70년대 농촌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시에 나오는 화자를 비롯한 인물들은 묵내기 화투를 하거나 쌀값 비료값 얘기, 면장 딸 얘기, 분이에 대한 걱정, 묵 먹기, 술 마시고 물세 시비하기, 젓갈 장단에 유행가 부르기, 신랑 다루러 보리밭 건너가기 등의 행위를 연결하여 시를 구성하고 있다.

신경림은 시에 전통적인 민중시가 양식인 민요와 무가를 수용하고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목계장터> 부분)라고 민요의 율조를 수용하거나,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꺾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씻김굿-떠도는 원혼의 노래> 부분)처럼 무가의 사설 형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3.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

 

신경림은 1,032행의 <새재>(1978년)와 1,341행의 <남한강>(1981년), 그리고 1,661행의 <쇠무지벌>(1985년) 등 세 편의 서사시를 모아서 연작 장편서사시집 <<남한강>>을 낸다. 이 시집에 수록된 각 시편의 역사적 배경은 1920년 한일합방, 1919년 삼일운동, 1945년 해방이라는 직선적 흐름으로 구성된다. 이 세편의 시들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투쟁이라는 일관되고 공통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남한강>>은 일제 강점기 민중의 참담한 현실을 형상화한 <국경의 밤>(1925년)과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형상화한 <금강>(1967)을 전통으로 하는 강한 역사의식이 발현된 동일 계열의 서사시이다. 그러나 신경림은 이들 앞선 서사시들이 갖는 서술방법을 새롭게 하고 있다. 시에 이야기와 노래, 놀이를 결합하거나 집단적 인물배치와 대립을 통해 기존의 서사시 서술 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신경림 역시 서문을 통해서 <<남한강>>을 서구적 의미의 서사시라기보다는 새로운 형식으로서 연작장시로 파악하고 있으며, 세 편 모두 시간과 장소, 기술 방법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했음을 밝히고 있다.

민중의 수난과 저항을 서술한 <<남한강>>을 읽어가다 보면 서경, 서사, 서정이 유기적으로 배합되는 가운데 민요나 무가 등 전통 민중시가와 공동체 놀이 등이 시의 진행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수용됨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시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립하며 갈등과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이 발견된다.

 

저기 저게 무슨 소리

줄바위 열두 굽이

다람쥐가 뛰는 소리

저기저게 무슨 소리

정참판네 중대문에

왜놈 청놈 나드는 소리

 

위에 인용한 부분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전승사설이 앞에 나오고 창작자가 직접 만드는 창조사설이 나중에 나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또 사설은 대화형식으로 구성된다. 문답형식의 대창으로 짜인 민요의 서술원리를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민요형식이 수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래 인용한 부분과 같이 한 연 안에 노래와 이야기가 섞이는 경우도 잇다.

 

비야 비야 오지마라

우리 연이 홑적삼

노랑저고리 다 젖겠다

팔배는 흥얼대는데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마을은

그냥 시끄러워

저 곳간 속에 썩은 쌀은

우리 것이다

 

정참판의 집을 습격한 주인공인 돌배와 모질이, 근팽이, 팔배가 헌병보조원과 정참판네 하인들에게 쫓겨서 도망을 가는 부분이다. 창작자는 인물들이 도망을 가면서 전래 동요인 <비야 비야>를 부르는 것으로 민요와 서사, 즉 노래와 이야기를 결합시킨다. 이렇게 신경림은 서사시에 이야기와 노래, 그리고 놀이를 혼합하면서 집단 인물의 대립과 사건을 연쇄시키면서 시를 구성해 간다.   

 

            

4. 현실반영 시의 방법적 확대

 

신경림은 시를 현실 삶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있으며, 현실적 삶의 내용을 다양한 창작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특히 그의 많은 시편들은 정치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시와 이데올로기>(1979)라는 글에서 1950년대 이후 우리 시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내용으로 수용하거나 주제로 취하는 예가 극히 드물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가진 시들이 이데올로기의 심부름꾼이나 녹음기 같이 전달에 그친다면 시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경림은 이데올로기의 시적 수용은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정치적 상상과 현실을 서정적으로 형상하여 정서화 하기 위한 방식으로 간결한 암시적 묘사와 인유를 활용하고 있다.

 

나는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른다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라는 제삿날 밤

할 일 없는 집안 젊은이들은

초저녁부터 군불 지핀 건넌방에 모여

갑오를 떼고 장기를 두고,

남폿불을 단 툇마루에서는

녹두를 가는 맷돌소리.

두루마기 자락에 풀 비린내 묻힌

먼 마을에서 아저씨들이 오면

우리는 칸델라를 들고 나가

지붕을 뒤져 참새를 잡는다.

이 답답한 가슴에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리는 당숙의 제삿날 밤.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그 당숙의 이름을 나는 모르고.

- <제삿날 밤> 전문

 

단연 15행인 위 시에서 시적 시간은 당숙의 제삿날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과, 당숙이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냈다는 것이다.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르니 화자가 어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름을 말하기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라는 것이다.

또 젊어서 죽은 당숙인데도 마을에서 아저씨들이 오는 것을 보면, 죽을 당시에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어떤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거기다가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냈다는 부분에서 당숙이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사회개혁을 위해 활동을 하다가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5. 나오며

 

이상 논의한 신경림의 시 창작방법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가 서정시의 방법적 혁신이다. 신경림은 시에 이야기의 도입과 민요 및 무가의 차용을 통해 기존의 서정시를 방법적으로 혁신하고 있다. 신경림 시에 이야기가 있는 경우에는 민물의 행위와 사건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고 시간 및 공간의 질서 역시 뚜렷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체인 민중의 짤막한 이야기나 사건을 연결하는 삽화적 구성을 하고 있다. 또 민요와 무가 등 전통 민중시가 양식을 시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민요 율격을 계승하고 민중 정서를 재생하며, 무가 운율의 차용과 어법을 활용하는 창작방법상 특징을 보여준다.

둘째는 서사시의 방법적 확장이다. 신경림은 장편서사시 <<남한강>>의 창작과정에서 민요와 무가를 이야기 속에 적극적으로 결합시키거나 농무 등 집단놀이를 대거 수용하는 실험을 통해 기존의 서사시를 방법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또 인물을 집단적으로 대립시키고 집단 행위의 갈등과 사건의 전개라는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새재>, <남한강>, <쇠무지벌> 세 편의 장시는 연작형식이기는 하지만 화자의 변화와 함께 아야기와 노래 및 놀이의 결합 분포를 다르게 하는 창작방법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현실반영 시의 방법적 확대이다. 신경림은 시에 개인의 체험이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반영할 때 다양한 비유방식으로 정서화, 감각화를 시도한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정치적 사건의 암시적 묘사, 역사적 인물과 시사적 사건의 인유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풍유와 우화의 방법도 활용한다. 또한 시에 울음, 통곡, 흐느낌 등 울음과 관련된 어휘의 반복을 통하여 자아 표출의 변화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문학아)


 
 



 

 

 

 


신경림의 시론

                                                                                    ///이승훈
(1) 나는 왜 시를 쓰는가 
申庚林은 1955년 《문학예술》지에 〈낮달〉이, 다음 해 〈갈대〉석상〉이 추천되면서 시단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초기시는 자연을 소재로 삶의 슬픔을 간결하게 노래하지만, 1973년 시집 《농무》를 계기로 이런 숙명적인 슬픔의 정서는 극복된다.

이 시집이 던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당시 의견이 분분했지만, 윤영천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5 ) 첫째는 시와 독자간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사회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비슷한 시적 태도를 지녔지만, 난해성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60년대의 김수영·신동엽 등과 변별되는 신경림의 특성으로 부연된다.

둘째는 서정시의 기존 통념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 그 개념을 혁신코자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삶의 구체성이 배제되고, 일체의 상황적 의미가 사상된 초역사적 ‘순수서정’이 아니라 ‘생활서정’에 주목하는 현실주의시를 지향한다. 세째로 시적 소재를 민중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로 농민의 궁핍상, 피폐한 광산촌 이야기, 떠돌이 노동자와 도시로 유입된 이농민의 실상 등을 겨냥한다.
윤영천 교수의 이런 지적은 신경림의 시적 특성을 비교적 정확하게 요약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경림에게는 이 시집 외에 《새재》(1979), 《달넘세》(1985), 장시 《남한강》(1987)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산문집으로는 《우리 시의 이해》(1986), 문학선집으로는 《씻김굿》(1987) 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는 〈문학과 민중〉(1973), 〈농촌현실과 농민문학〉(1972) 등이, 시론으로는 〈나는 왜 시를 쓰는가〉(1979) 등이 있는 바, 이 자리에서는 후자를 중심으로 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피기로 한다.

이 시론은 70년대 우리시의 한 경향으로 지적되는 이른바 민중시를 실천한 그의 생각이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글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시적 대상과 독자의 수용문제, 쉬운 표현과 한자문제, 민요적 가락 및 대중가요와 시의 관계 등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로 그는 시적 대상, 그러니까 시의 소재를 민중적 삶에 두어야 하며, 시의 수용 역시 민중에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그의 고백에 의하면, 자신의 초기시에 대한 비판과 관계된다. 이 시론에서 그가 인용하고 있는 초기시 〈갈대〉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시는, 그의 말에 따르면, 아무런 의식 없이 쓴 시에 속한다. 아무 의식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나는 그의 초기시가 삶의 숙명론적 우수나 슬픔을 노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시세계가 의식없이 씌여진 것이라면, 그가 말하는 의식이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할 수 있다. 그의 경우 의식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말은 위의 시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자각을 뜻한다.

그 자각은 위와 같은 시를 쓰다가 거의 10년을 쉬면서 그가 깨달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이 계기가 된다. 그것은 50년대 말 60년대 초의 우리나라 시골 농촌의 황폐한 실상으로 부연된다.

따라서 그가 새로운 시세계로 넘어가면서, 흔히 민중시의 길을 튼 것으로 평가되는 시집 《농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형상화한다.
이때의 민중의식을 그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끈질기고 꿋꿋한 생명력’이라는 두 차원에서 이해한다. 전자가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부정적 요소라면, 후자는 그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고 꿋꿋하게 삶을 영위하는 민중적 삶을 뜻한다.

말하자면 그의 경우 민중의식은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를 내포한다. 그의 시가 우리시의 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두 요소의 변증법적 울림 때문이었으리라. 왜냐하면 우리시의 경우 시골이나 농촌은 신경림만이 노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시인들은 농촌의 삶이 보여주는 위의 두 요소 가운데 어느 한 요소만을 거의 감상적인 태도로 노래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노리는 시의 소재로서의 민중의식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느낌을 준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의식이 이른바 민중들에게 쉽게 읽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 역시 타당하다.

그러나 한편 나는 우리시가 모두 그래야 된다는, 그의 주장 배후에 깔린 강압적인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반드시 무엇을 노래해야 하고, 또한 반드시 어떤 계층에게 읽혀야 한다는 것은 시의 공리성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가 민중에게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쉬운 표현의 문제로 발전한다. 시를 쉽게 표현하자는 그의 주장은 당대의 우리시가 보여주던 이른바 난해시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난해시의 문제는 아직도 많은 시비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 난해시는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결과 나타났으며, 따라서 남, 이웃, 독자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오직 자기고백에 만족한다.

 이런 사정을 그는 민중적 바탕의 상실과 관련시킨다. 말하자면 난해시는 ‘민중에 대한 지적 오만 내지 경멸’이 그 밑바탕에서 작용한다고 부연된다.

따라서 난해시는 반역사적·반민중적 엘리트주의의 소산으로 평가절하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난해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엘리트주의나 민중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환기하는 예술의 소외, 나아가 인간의 소외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시가 어렵게 된데에는 물론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근대시와의 대조 속에서 읽게 되는 이른바 현대시의 어려움은 먼저 이 시대가 예술을 예술로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동기를 이룬다.

참된 예술적 가치가 산업적 가치로 둔갑할 때 예술가들이 그런 가치에 저항하는 길은 이른바 아방가르드 예술을 통해서이다. 이 아방가르드 예술은, 시의 경우, 그 매재가 되는 언어의 일상적 기능을 불신하고, 그런 불신은 사회에 대한 저항의 미적 형식이 된다.

언어의 일상적 현실적 기능을 부정할 때 시는 어려워지게 마련이며, 또한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그러나 이런 소외가, 아도르노도 지적했듯이, 사회를 부정하는 잠재력이 된다.

예술의 이런 부정성은 따라서 엘리트주의로 치부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나, 민중주의로 간주되는 반부르주아 이데올로기도 동시에 거부한다. 그것은 이 시대에 오면서 자유, 휴머니티, 정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된 예술가들이 간파했기 때문이며, 또한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강조되는 이데올로기가 지나치게 거칠다는 사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참된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은 이데올로기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零化 혹은 허위화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6 )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을 전제로 할 때, 현대시의 난해성 문제는 무조건 매도되기보다는 좀더 성숙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쉬운 시를 쓰자는 말 자체는 시비거리가 안된다. 그리고 신경림도 지적하듯이 표현이 쉽다는 것은 시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쉬운 표현의 문제가 한글 전용의 문제로 발전하는 데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가 한자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문화의 독점현상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식인들일수록 어려운 한자나 외래어를 사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엘리트주의를 지향한다.

이런 견해에는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성찬경의 시론을 살피면서도 말했듯이, 우리시가 보여주는 관념이나 철학의 빈곤이라는 측면을 염두에 둘 때 순수한 우리말만으로 시를 쓰자는 주장은 자칫하면 국수주의적 폐쇄성으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자를 사용하자는 게 아니라 같은 한자라 하더라도 우리말로 순화시키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한글로 표현하면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관념어 투성어인 한자를 무조건 쓰자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면 관념어 역시 한글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우리시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신경림 역시 

"제 경험을 또 내세우는 것이 되겠는데, 저는 제목 이외에는 모두 시에서 한글 전용을 했습니다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씀드려 둡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 자신 한문에 익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 아직 제목만은 한글 전용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고백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세째로 그는 시가 민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고유의 민요적 가락을 되살리자고 주장한다. 그것은 민요 속에는 ‘이 민족의 한자 설움, 견딤과 참음, 끈질긴 생명력’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되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 것 혹은 죽어가는 것에 새롭게 생명을 부여하자는 뜻이리라. 민요적 가락을 우리시에 도입한다는 문제는 오늘의 우리시가 음악적 요소를 상실하고, 시각적 요소 아니면 내용전달에만 치우치기 때문이리라. 시가 아니라 산문에 가까운 것들을 시랍시고 발표하는 최근의 우리시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시의 기본요소로서의 음악성을 강조하는 그의 견해는 타당하다.

그러나 민요적 가락의 도입문제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먼저 우리의 근대시가 형성되면서 비록 아직도 그런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최초로 자각한 것이 이른바 詩歌의 단계에서 詩의 단계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이조시가니 고려가요니 부르던 것이 갑오경장 이후 시라는 용어로 분화된다.

따라서 謠와 詩의 분리, 말하자면 노래와 시의 분리는 근대시의 특성을 형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낳는다. 다음 민요적 가락을 현대시에 되살린다고 할 때, 그 변형과정이 문제된다는 점이다.

시인의 호흡과, 전통적 율격 가운데 하나인 민요적 가락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이런 갈등이나 긴장관계가 상실된다면, 그가 말하듯이 대중가요와 시의 관계는, 형식의 차원에서는 변별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그에 의하면 대중가요는, 내용의 차원에서는, 병든 노래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런 병적 현상은 병든 우리의 사회를 반영한다. 시인은 이런 병적 현상을 치유할 의무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병든 노래는 개인의 골수에 병균을 옮겨 놓기 때문이다. 병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교환가치에 지배되는 삶을 뜻한다면, 시인이 할 일은 대중가요와의 싸움보다는 그런 가요의 배후에 있는 상업주의에 대한 미적 저항이 아닐까.

결국 신경림의 시론에서 읽을 수 있는,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들은, 그가 민중시의 개념을 실천하고, 특히 그의 민중의식이 반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한다는 진보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적 형식의 차원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내용의 진보성과 형식의 보수성은, 그런 점에서, 70년대 민중시의 한 특성으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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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생가

[아시아경제 ]
부여에 있는 고 신동엽 시인의 옛집에서
신동엽 시인(1930~1969년)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신경림 시인(79)이 출연해 '한 정신의 탄생지'를 증언하는 뜻 깊은 자리기도 하다. 


신동엽문학관은 행사의 제목을 신경림 시의 제목을 따서 '신동엽 시인의 옛집에서'로 정했다.  ‘신동엽문학제’에는 많은 시인, 예술가들이 출연해 창조적 영감을 선사. 여기엔 신동엽 시인과 함께 문단활동을 전개했던 신경림 시인이 들려주는 ‘신동엽 이야기’를 소개...
신경림 시인

주민잔치 '전경인 이야기 마당'이 준비. 전경인(全耕人)이란 신동엽 시인이 1960년대에 예지한 융합적 인간형을 뜻한다. 

신동엽문학관은 '신동엽 시인' 영문판 도록 출판기념회와 '신동엽의 금강 이야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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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인이 고 서정주 시인을 비판했다.

"젊었을 때는 좋은 시를 썼는지 몰라도, 늙어서는 나쁜 시를 쓰고 나쁜 짓을 했다"면서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신경림 시인은 25일 저녁 경남 진주시 진주문고(대표 여태훈) "북카페"에서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초청강연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신경림 시인은 "시와 친해 놓으면 좋다"면서,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 피해 보는 것도 없고, 친해 놓으면 남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라며, 좋은 시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신경림 시인은 "시와 대화를 하면서 읽어라"고 말했다.

"흔히 학교에서 시를 가르칠 때 "은유"가 어떻고, 상징과 비유가 어떻고 하는 것으로 시를 이해하지 말라. 시인과 대화를 한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재미있다."그는 "막연하게 어딘가 가고 싶을 때,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한밤 중 친구한테 전화하고 싶을 때, 낯이 익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은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때 시를 읽으면 재미가 있다"고 설명.그러면서 어릴 때 읽었던 몇 편의 시를 들추었다. 김영랑 시인의 "언덕에 바로 누워"는 청소년 때 읽었는데, 당시 김영랑 시인과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 김영랑 시인과 함께 "젊음"과 "그리움"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시인한테 내 마음을 들려준다고 생각했다는 것.진주 출신의 이형기 시인이 생각난다며 "추상정사"를 소개했다. 풀밭에 누워 어릴 때 먼 것에 대한 막연함을 노래했던 시인데, 이 시를 읽으면서 이형기 시인과 함께 그리움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신경림 시인은 "시를 분석하고 따지려 하지 말라"면서, 좋은 시는 "시를 읽으면 머리에 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를 읽을 때 머리 속에 그림을 하나 그려지면 좋은 시다"며, 김종삼의 시 "묵화"를 소개했다.

또 신경림 시인은 "좋은 시"는 "시를 읽으면 시를 읽는데 끝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직후 월북한 이병철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북한에 가서 쓴 "김일성 찬가" 등의 시를 보니 "아니더라"면서, 그가 월북하기 전에 쓴 "나막신"을 소개했다.

@!@신경림 시인은 영국의 "워즈워드"라는 시인을 이야기하면서 "시인도 좋은 시를 쓸 때가 있고 나쁜 시를 쓸 때가 있다"면서, "그러나 나쁜 짓을 할 때 쓴 시는 다 버리고 그 일에 대해 비판할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두환 앞에 가서 축시 써준 서정주와 비슷한 사람"이라며, 워즈워드를 비판했다. 워즈워드는 "여성교육을 반대하고, 귀족만 교육을 해야 한다 했던 사람"이라며, "철저하게 기득권 보수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당시 살았던 "로버트 브라운"이란 시인은 39살까지 살면서 워즈워드를 비판했다고 소개. "브라운은 워즈워드는 80살까지 살았는데, 얼마나 오죽 했으면, "그가 모든 시인을 망신시켰다"고 하고 "시인은 빨리 죽어야 한다"고 했겠느냐"라고 소개.신경림 시인은 그러면서 "우리나라에도 시인 중에 젊었을 때 좋은 시를 쓰다가 늙어서 나쁜 시를 쓰고, 나쁜 짓을 많이 한 시인들이 있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는 서정주 시인, 북한에서는 이병철 시인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서정주 시인의 "동천"이란 시도 감흥이 없는 시라고 비판했다. "행적이 나쁘기에 좋은 시로 읽혀지지 않는다"는 것.그는 서정주와 이병철 시인은 "나쁜 시"를 쓰고서, 권력자로부터 대가성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서정주 시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 앞에서 "축시"를 써주고는 세계일주여행이란 대가"를, 이병철 시인은 ""김일성 찬가"라는 시를 써주고는 북한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장받았던 것"이 대가성이라 설명.올해 67살인 신경림 시인은 충주에서 태어나 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로 등단했고, 73년 첫 시집 <농무>를 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을 받았고, <새재> <달넘새> <남한강>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등의 시집이 있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1, 2권. 우리교육 간)는 "정지용에서 천상병까지" 다루었다. 조지훈 신석정 김종삼 신동엽 박용래 박봉우 임화 권태웅 이육사 오장환 김영랑 이한적 윤동주 박익환 한용운 백석 신동문 유치환 박목월 김수영 등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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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라도 수능선 20% 밖에 못 맞춰”

신경림 시인의 ‘시 재미있게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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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시를 읽는 재미’란 주제로 대중 앞에 섰다. 문화예술위원회가 예술가의 집에서 여는 ‘우리시대 예술가의 명강의’에서 그는 찢어발기기 교육으로 넌더리나는 시와 친해지는 법을 들려줬다. 좋은 시는 독자와 소통을 해야 하고, 남다른 표현, 내재된 이미지, 시대의 모습, 리듬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시 이야기를 소개한다. 

“언젠가 대학입시에 내 시가 나왔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학원 선생 하는 후배가 전화를 걸어 왔다. 내 시에 대해 그가 묻는 대로 얘기해줬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다시 전화해선 “형님은 형님 시의 20% 밖에 못 맞췄어”라고 하더라.” 

신경림 시인은 “시가 어려울 필요가 없는데 너무 어려워졌다”면서 “이런 입시 시험이 시 읽는 재미, 시의 참맛을 그르치고 있다”며 시를 재미있게 읽는 법을 풀어 나갔다. 

1. 시는 소통이다 

신경림 시인은 먼저 “시는 소통이다”라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 것이라며 강의를 시작했다.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란 18세기 시인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 전까지 시는 문어(文語)로 썼는데 워즈워드는 시문학 사상 처음으로 구어(口語)로 시를 썼다. 그런 그도 처음에는 구어로 시를 쓰는 게 자신이 없었다. 1791년쯤인가 ‘서정시집’이란 시집을 냈는데 두려운 나머지 가명으로 냈다. 그 시집이 잘 나가자 재판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밝혔다. ‘나 워즈워드가 S.T.콜리지와 함께 쓴 것이다’라고…. 그래도 자신감이 부족했는지 거기에 시가 무엇인지 서문을 붙였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으나 시라면 그래도 무엇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풀어나갔는데 결론은 ‘시는 소통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소통하는 글을 쓰면 다 시인이냐? 그것은 아니다. 워즈워드는 ‘시인은 그 소통을 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시는 ‘소통을 힘 있게 하는 것’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시는 심오한 것,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것이라고 신경림 시인은 강조했다. 

“독자와 대화가 안 되는 시는 문제가 있다. 대화가 안 되는 게 덮어놓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원칙적으로 소통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김영랑의 시는 이런 정의에 잘 맞는 좋은 시라고 했다. 

“김영랑은 ‘시는 의미가 아니라 느낌을 전하는 것’이라며 제목도 붙이지 않고, 1, 2, 3, 4… 숫자를 달아 썼다. 나중에 직계제자인 서정주가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달았는데 그것도 생각을 많이 하고 단 게 아니라 각 시의 첫줄을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김영랑의 ‘언덕에 바로 누워’를 예로 들었다.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이 시를 읽으면 아득한 소년 시절의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썼음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시든 그것을 읽고 느낌을 받으면 소통이 된다. 그게 시다.” 신경림의 설명이다. 

2. 자기만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 

신경림 시인은 “아무 것이나 시가 아니다. 남들이 표현하지 못한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시가 된다”고 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의 ‘풀’에서) 

“‘풀이 눕는다’고 했는데 이런 표현은 김수영 시인 밖에는 할 사람이 없다. 이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만지지 못하는 것을 만지고 그것을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게 시인이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고 썼다고 하자. 그것은 시가 아니다.” 

김춘수의 ‘꽃’도 들려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이 시는 명확하게 꽃의 개념을 색다르게 표현했다. 남이 느끼지 못한 것, 남이 만지지 못한 것을 다뤄야 시가 된다.” 

그런 면에서 시는 가요와 구분된다고 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만 다뤄서는 좋은 가요가 되기 어려운데 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 

“언젠가 외부 강의를 하는데 어느 나이 많은 분이 앞에서 열심히 듣고 있었다. 궁금해 하면서 강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그분이 함께 왔다. 저녁 먹고 누군가 노래방에 가자고 해서 갔더니 그분도 함께 갔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나니 그 분이 그 노래를 자기가 작사했다고 했다. 다음 순번이 돌아와 노래를 불렀더니 그 노래도 자기가 작사했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세 곡을 불렀는데 모두 그가 작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친해져서 자주 만나게 됐는데 어느 날 그가 시 한 편 쓰면 고료로 얼마나 되냐고 물어왔다. 5만원 받을 땐데 내 딴엔 자존심도 있고 해서 부풀린다고 10만원이라고 했는데 그가 깜짝 놀라더라. 

자기는 노래 한 곡 작사하면 1000만원 받고 많이 받을 때는 3000만원까지 받는다고 했다. 기가 죽었다. 

그런데 그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원래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작사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틈틈이 시를 쓴다며 보여줬다. 그에게 남들이 다 보는 것을 잘 정리하면 좋은 가요는 되지만 시는 아니라고 했다.” 

3.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시는 보여주기만 한다.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하다. 시는 읽는 사람이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시가 설명을 하면 그것은 좋은 시가 아니다.” 

예로 김종삼의 ‘묵화’를 들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시를 읽고 이중섭의 ‘소’를 연상했다. 50년대 중반 전쟁 이후 혼자 쓸쓸이 사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시란 그런 것이다. 그만큼 이미지가 중요하다. 시를 읽을 때 (이미지가) 머리에 강렬히 떠오르는 게 좋은 시다.” 

곁들여 서정주의 ‘문둥이’ 구절을 읊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시는 사람의 원죄를 그렸다. 그런데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그런 게 좋은 시다.” 

신경림 시인은 아시아의 시에는 원래 이미지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고 한다. 

왕유는 이백의 시 속에는 산뜻한 그림이 있어서 좋다고 했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여기서 소설은 작은 논문을 의미한다. 거기에 시 얘기가 나오는데 ‘시는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개념이 많이 나온다.” 

설명하는 것은 좋은 시가 아니란 설명이다. 

4. 시는 시대를 그려야 한다. 

“시를 읽으면 시인이 어떤 시대에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동시대 시인이라면 어떻게 사는가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처럼 시는 그 시대 삶에 깊은 뿌리를 박아야 한다.” 

그러면서 이용학의 ‘북쪽’을 예로 들었다. 월북시인인 이용학은 서정주 오장한 임화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신경림 시인은 “모두 월북하고 서정주만 남다보니 우리 문학을 왜곡한 면이 있다”고 곁다리로 설명했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이 바람에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르다// 

“이 시는 1931년에 썼다. 당시 함경북도는 딸을 팔아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잡곡 몇 섬 받으려 파는 게 아니라 적어도 팔려 가면 배는 곯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랬다. 중국이나 러시아로 딸들이 팔려갔다. 그것을 노래한 시다. 그 시대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러한 재미가 있는 게 좋은 시다.” 

시가 꼭 현실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좋은 시가 아니란다. 

5. 리듬이 있어야 시다. 

‘농무’를 낼 때만 해도 돈 주고 시집 내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돈 받고 시집 내는 시인은 서정주 박목월 등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농무’를 내 돈으로 500부 찍었다. 지나가던 친구가 “자네 시집 냈다며…”라면 뛰어 들어가 한 권씩 꺼내다 줄 때다. 누가 두 권 필요하다면 더 가져가라며 다섯 권씩 안겨 보냈다. 남의 회사 다닐 땐데 500부 쌓아 놓으니 자리를 많이 차지해 빨리 치우려고 선생님들께 한 부 보내드린다며 주소를 여쭈면 “오는 게 너무 많아 뜯어보지도 않고 버려”라며 주소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때에 비하면 요즘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가)정말 재미있게 읽히지 않는 것은 ‘리듬’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시에는 리듬이 없다.” 

신경림 시인은 “유치환 시의 첫 번째 미덕은 리듬”이라며 ‘그리움’을 보자고 했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이 시의 리듬이 얼마나 좋으냐. 리듬을 다시 찾는 것, 이것이 우리 시가 가야할 길이다. 리듬이라니 글자 수 맞추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게 리듬은 아니다. 우리말의 리듬은 서구의 리듬과는 다르다. 높낮이가 없고 액센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아주 발달해 액센트나 인토네이션이 없어도 (의미) 전달이 잘 된다. 시에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 그것이 리듬이다.’ 자유시도 자연스레 읽히는 게 많다.” 

시인은 서정주의 시가 맛깔스럽다며 ‘동천(冬天)’을 예로 들었다.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아주 맛깔스럽다. 특히 호남 말의 맛깔스러움은 착착 감긴다. 아무리 사상이 좋아도 (시라면)착착 달라붙을 정도로 감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를 기가 막히게 쓰고 박목월은 경상도 사투리를 기가 막히게 써서 말의 맛을 살렸다. 시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말의 맛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화려한 것만 좋은 것은 아니라면서 조지훈의 玩花衫(완화삼)과 박목월의 ‘나그네’를 비교했다. 완화삼은 지훈이 목월에게 준 시다.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지훈의 시에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로 화답했다. 목월은 “해방될 때까지 그는 내가 사귄 유일한 시우였다(박목월, 지훈 회상)”고 할 정도로 지훈과 가까웠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시를 주고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멋진데 그 시구 또한 재미있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는 완화삼의 한 구절을 목월은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로 바꿨다. 

“많은 사람들이 박목월의 ‘나그네’를 더 좋아하는데 말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멋진 말은 재미가 없다.” 신경림의 설명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맛을 살려야 할까. 신경림은 두보의 춘망(春望)을 가장 뛰어난 시라고 격찬한 청나라 때 문인 기윤의 설명을 빌려 이를 풀어 나갔다. “기윤은 춘망에 대해 하나도 꾸미지 않은 듯한데 실제로는 말의 아름다움이 더하다. 좋은 시는 말의 꾸밈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신경림 시에 얽힌 에피스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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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로 시작되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1988)’란 시는 입시에도 나올 만큼 알려져 있다. 시인은 이 시에 대한 사연을 소개했다. 

“86년 무렵인가, 길음동에 살 때인데 술을 좋아해서 매일 막걸리 몇 잔씩 마시고 가는 집이 있었다. 아주머니와 딸이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집 딸이 상의할 게 있다고 했다. 뭔 일인가 조마조마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지명수배를 당해 희망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했다. 그래서 “빨리 결혼하라”고 했다. “지명수배 당해 잘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하냐”기에, “그러면 내가 주례도 서 주고, 축시도 써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됐는데 몰래 올리는 식이라 손님도 몇 명 없고 해서 주례사는 1분 만에 끝내고 ‘그의 사랑’이란 축시를 읽어줬다. 그러고서 나오니 너무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그 흥에 쓴 시가 ‘가난한 사랑 노래’다. 물론 그들 부부는 지금 잘 살고 있고.” 

■ 신경림 시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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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에 의해서만 씌어지고, 또 소수에 의해서만 읽히더라도 시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을 믿을 만큼 그는 끔찍이 시를 사랑한다. 시 읽는 사람 늘리려 홍보대사마냥 시 읽기 강좌에 자주 서는 것도 그래서다. 

충주 출신으로 1935년생이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을 추천받아 등단했다. 한때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충주 일원을 배경으로 한 시를 많이 썼다. 

1973년에 출간한 첫 시집 ‘농무’나 최근 출간한 ‘낙타(2008)’를 비롯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 노래’ ‘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등 다수의 시집을 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자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상, 스웨덴 시카다상, 예술부문 호암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동국대 석좌교수로 집과 가까운 북한산에 자주 간다고 했다. 

신경림의 시와 친해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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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은 사람들이 시와 멀어진 이유를 잘못된 시 교육과 독자와 소통하지 않는 시인들의 자세에서 찾고 있다. 독자들에게 시 읽기를 권하는 차원에서 두 권의 ‘시인을 찾아서’란 책까지 낸 그는 시와 친해지는 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커피 한 잔 값이면 시집 한 권 살 수 있지 않나. 많이 읽어라. 어쨌든 자주 읽어야 시를 알게 된다. 시와 친해져야 시를 맛볼 수 있고, 또 시를 알게 된다.” “시를 읽으면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말을 맛깔스럽게 하는 능력이 커진다”는 그는 “시집 사는 사람이 100명 중 한 명 꼴이니 시를 읽는다면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셈”이라고 했다. “그게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물론 가난한 시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글·사진 = 정진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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