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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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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鄭浩承 - 슬픔이 기쁨에게 // 鄭昊昇 - 모밀꽃
2015년 12월 24일 01시 40분  조회:5765  추천:0  작성자: 죽림
  • 정호승(鄭昊昇) (원명; 정영택)
    시인. 1916년 충청북도 충주(忠州) 출생. 1935년 소설가 지봉문과 함께 <조선문학사>를 열어 30년대 대표적 문예지인 《조선문학》을 발간하였다. 농민문학의 선구자인 소설가 이무영(李無影)과 교분이 두터웠고 그의 시 여러 곳에서 농민문학적 성향이 엿보인다. 대표적 시집 《모밀꽃》은 식민지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무기력한 모습과 농촌풍경을 배경으로 일제강점 아래 한국민족의 좌절을 형상화하여 서정성과 민족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46년 남로당 가입과 좌익운동, 동인지 《아우성》을 발간한 일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고 남북협상 때 김구(金九)와 함께 북한을 다녀와서 1년간 다시 복역하였다.

     
  • 답변
    정호승
     
     프로필
     
       
    1950년 대구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첨성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1989년 제3회 소월문학상 수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작가 이야기
     
    순결한 동심의 정서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
    평론가 하응백의 간명한 표현처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다.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도 높은 서정 세계는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서부터 다채롭게 펼쳐진다. 시인 특유의 순결한 동심의 정서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을 일관되게 유지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는 값싼 감성을 자극하는 싸구려 산파극이나 요즘 베스트셀러 순위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시와는 자못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의 순정한 사랑과 동화적 시심의 뒤란에는 가난과 소외, 불행과 고통에 대한 동정과 타자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 생채기를 치료하는 어머니 젖가슴과 같은 '따뜻한 슬픔'!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에서도 사랑을 위한 기다림의 끈기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아직도 사랑할 자유밖에 없는/너희는 날마다 해 뜨는 곳에/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서울 복음 2'). 세 번째 시집 <새벽 편지>에서 시인의 사랑은 사회 전체로 확대 ·변주 ·일반화된다. 그는 전태일의 고귀한 희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허연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홀로 울고 있는 꽃다발 하나"('꽃다발')을 영전에 바친다. 네 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시인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좌절과 절망에서 촉발된 통렬한 자기 반성을 시작한다. 엇갈리는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어떤 사랑').

    이후 7년만에 상자한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서 시인은 사랑의 본성과 존재 원리에 대한 체득이 외로움과 숙명적으로 결합하여 우주적인 교감의 세계로 확산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외로움이 내재된 슬픔 사랑을 그의 시적 영토로 이주시켜 다음 같은 절창을 낳는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수선화에게').

    최근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간행했다. 사랑의 본질은 비움과 채움, 감춤과 드러냄의 끝임 없는 길항(拮抗)임을 간결한 시행에 담아 낸, 그야말로 이 시집에 진주처럼 박혀 있는 빛나는 소품 하나.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반달') 어쨌든, 그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조화를 누리는 시인이다. (류신/문학평론가)

     
     
     
    @@ 정호승 <<동명시인>>임을 밝힘...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송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1979)

 

■ 시구 및 구절 풀이

․ 나 : 슬픔

․ 너 : 이 시의 청자인 기쁨으로 사랑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우리 모두'를 일컬음.

․ 소중한 슬픔 : 역설적인 표현으로 슬픔은 남의 아픔을 보듬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를 말한다.

․ 겨울 밤 거리에서~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 : 소외받은 그리고 약자인 사람들을 상징

․ 귤값을 깎으면서 : 아주 작은 이익을 탐하고, 약자들의 아픔을 모르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이기적인 태도로 이웃의 삶을 통찰하는 따뜻함 마음이 없음.

․ 어둠 : 고통스럽고 소외된 삶을 총칭

․ 내가 어둠 속에서~웃어 주질 않았다 :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며 산다.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 :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와 같은 의미로 추위에 떠는 사람과도 통함,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 : 남의 아픔을 성찰할지 모르는 애타적인 사랑을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

․ 슬픔, 기다림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더불어 사는 것, 이웃과 불행을 나누면서 그것이 극복될 때까지 지켜보는 마음

․ 함박눈 : 온갖 슬픔과 고통스러운 것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너를 설득해 이 길을 같이 가고 싶다.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통해 고통을 이해하게 하고, 사랑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게 하겠다.

 

■ 맥락 읽기

1. 말하는 이는? ☞ 나(슬픔)

 

2. 누구에게 말하고 있지? ☞ 너(기쁨)

 

3. 나는 너에게 무엇을 주고 싶어 하는가? ☞ 슬픔, 기다림

 

4. 너는 어떤 사람이길래 그것을 주고 싶어 하는가?

①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했다.

        ☞ 이웃의 삶을 통찰하는 따뜻함 마음이 없다.

②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았다.            ☞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며 산다.

③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얼어 죽을 때 / 무관심했다.

        ☞ 이웃의 죽음에 냉담하다.

 

5. 그러면 ‘슬픔,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더불어 사는 것

☞ 이웃과 불행을 나누면서 그것이 극복될 때까지지켜보는 마음

 

6. 나는 너에게 ‘슬픔, 기디림’을 준 다음에 또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함박눈(?)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 가겠다.

  ## 수 많은 너를 설득해 이 길을 같이 가고 싶다.

 

7.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 자기만의 기쁨이 아닌 이웃과 함께 하는 마음

☞ 이웃을 아끼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 이웃을 위해 슬퍼할 줄 아는 것.

 

8. 독자의 삶은 ‘슬픔’ 쪽인지, ‘기쁨’쪽이었는지 생각해 보자.

 

■ 핵심정리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성격 : 의지적, 박애(博愛)적, 설득적

 3. 제재 : 슬픔

 4. 주제 : 이기적인 삶에 대한 반성 촉구,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추구

 

■ 이해와 감상 1

  이 시는 슬픔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이기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기쁨'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존재이고, '슬픔'은 남의 아픔을 보듬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자신의 행복에 취해서 자신만의 안일을 위해 남의 아픔에 무관심하거나 그 아픔을 돌볼 줄 모르는 이기적인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청자인 '너'는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 수 있다. '모든 진정한 사랑에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슬픔을 어머니로 하고 눈물을 아버지로 한다.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고통 때문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 이해와 감상2

   '슬픔'의 시인 정호승은 인간을 옹호하고 민중을 신뢰하는 낙관주의적 태도와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따스한' 작품 세계를 펼쳐 준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슬픔의 내용을 확장시키거나 깊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인으로, '슬픔'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시적 사색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전통적인 정서인 한이나 비애의 세계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그는 이 '슬픔'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 전쟁이나 분단, 독재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상처까지도 끌어안고 따뜻이 위무해 준다. 이처럼 그는 현실의 모순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 삶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미래 지향적 자세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망설임이 없게 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려 있는 대표작으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운명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나'로 대치된 시인은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서 있다. 그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세상 속으로 고단한 길을 떠난다.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에서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다시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통해 그가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슬픈 것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때이다. 이처럼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시인의 밝은 눈은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다 '슬픔', '기다림', '아름다움'이 저녁 들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고즈넉하고 쓸쓸함의 정서는 이 시를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 생각해 봅시다

1. 그러면 ‘슬픔,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마음, 더불어 사는 것

    이웃과 불행을 나누면서 그것이 극복될 때까지 지켜보는 마음

 

2.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제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 자기만의 기쁨이 아닌 이웃과 함께 하는 마음, 이웃을 아끼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이웃을 위해 슬퍼할 줄 아는 것.

 

■ 수능형 기출 문제

[1~5]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설일(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나)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1.  (가)~(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가), (나)에는 대상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이 드러나 있다.

② (가), (다)에는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가 드러나 있다.

③ (나), (다)의 화자는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

④ (가), (나), (다)의 화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단호한 의지로 대응하고 있다.

⑤ (가), (나), (다) 모두 화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드러나 있다.

 

2.  다음의 신문 기사 중, (다)의 화자가 비판할 만한 사회적 현실은?

① 사망한 지 3일 만에 발견된 70대 노인

      ○○동에 사는 김 아무개 씨(71세)가 죽은 지 3일 만에 외판 영업 사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홀로 살던 김 씨가 노환으로 숨을 거뒀으나 평소 김 씨를 찾던 사람이 아무도 없어 김 씨는 죽은 후 3일 동안 방치되었던 것······.

② 마약이 부른 비극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박모 씨(23세)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목숨을 잃었다. 법관이 꿈이던 박 씨는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해 오다 1년 전부터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퍼진 마약의 위험성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라고들······. 

③ 과속 운전이 부른 참사

     26일 오후 3시 경부고속도로에서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교통 사고가 발생했다. 김모 씨(48세)가 승합차를 과속으로 몰던 중 앞서 가던 승용차를 추돌, 전복되면서 뒤따라오던 승용차와 다시 부딪혀 11명의 사상자가 발생······.

④ 무면허 성형 수술로 인한 피해자 증가

    최근 무면허자에 의한 성형 수술의 부작용으로 인해 병원을 찾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성형 전문의 장모 씨(43세)에 따르면 그 동안 한 달에 2~3명씩 찾아오던 수술 부작용 환자들이 겨울 방학 기간이 되면서 평균 7~8명으로 늘었다는 것······.

⑤ 폭설로 인한 피해 속출

     12일 현재 강원도 영동 지방에는 예상량을 훨씬 넘는 폭설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속초시는 적설량이 80cm에 달해 교통이 두절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선이 끊어져 정전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이는 천재지변에 대한 대비가 충분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들······.

 

3 ㉮에서 영감을 얻어 <보기>와 같은 시를 썼다고 가정할 때, 고려했을 사항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보 기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① ‘삶’과 ‘사랑’을 자연 현상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은 어떨까?

 ② 동일한 시어를 반복하여 힘든 현실의 모습을 표현하면 어떨까?

 ③ 지나온 삶을 반성하는 내용을 추가로 삽입하는 것도 좋을 거야.

 ④ 원시(原詩)에 나타난 화자의 삶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살려야겠어.

 ⑤ 의문형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는 것은 어떨까? 

 

4. ㉠의 표현상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비유적 묘사를 통해 원근감을 보여주고 있다.

 ② 의인화된 대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③ 반어적 표현을 통해 삶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④ 색채의 대비를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⑤ 구체적 사물을 관념적 대상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5.  ⓐ~ⓔ 중, 시적 이미지가 이질적인 것은?

 ① ⓐ       ② ⓑ       ③ ⓒ       ④ ⓓ      ⑤ ⓔ



[정답] 1.③   2.①   3.③   4.②   5.②


[해설]

(가) 김남조, <설일>

  이 작품은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의 풍경을 보면서 삶의 자세를 짚어 보고 있는 작품이다.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평소 종교적 신앙심을 생활에 연결짓고 있다. 쉽고 평이한 시어 속에 인생에 관한 관조적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나)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바람 불고, 춥고, 어두운 상황 속에서 함박눈이 되고, 남에게 반가운 소식을 알리는 편지가 되고, 남의 상처를 보듬는 새 살이 되기를 소망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남의 상처를 덮어 주고 남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고 싶은 화자의 긍정적 삶의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반어적 발상을 바탕으로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에 관심과 사랑을 보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길 바라는 시적 화자의 소망이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1. [출제의도] 작품의 공통점 찾기

(나)는 세상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자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는 반어적 발상을 토대로 이웃의 불행에 무관심한 대상이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2. [출제의도] 구체적 상황에의 적용

(다)의 화자는 따스한 인간성의 회복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삶을 살자고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타인에게 무관심한 현대 사회의 냉정함을 비판한 ①이 가장 가까운 답이다.

[오답피하기]

②는 절제하지 못하는 개인의 부덕함을, ③ 잘못된 운전 습관에 대한 비판을, ④ 무면허 의료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를, ⑤는 재해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안일함을 비판하고 있다.

 

3. [출제의도] 다른 상황에의 적용

<보기>의 시에는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오답피하기]

①은 ‘꽃이 흔들리며 핀다’는 대목에서, ②는 ‘흔들리다’, ‘젖다’의 시어를 반복하여 시련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으며, ④는 원시(原詩)에 드러난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⑤ ‘있으랴’의 설의적 표현을 통해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4. [출제의도] 표현상의 특징 파악

‘머리채 긴’은 바람을 의인화한 것이고, ‘투명한 빨래’는 바람을 시각화한 표현이다. 따라서, ㉠의 표현상 특징은 ②가 된다.

 

5. [출제의도] 시어의 의미 파악

ⓐ는 힘들고 지친 사람을 더욱 어렵게 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는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 ⓔ는 현실의 부정적인 고난을 의미한다. 따라서, ⓑ는 긍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고 나머지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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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다리는 편지" 는 부재(不在)하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내용연구

지는 저녁 해[소멸의 이미지]를 바라보며[시적 화자의 위치와,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나타냅니다.]

 

오늘도[지속되는 사랑]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이미 어떤 것이 포함되고 그 위에 더함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도'를 붙여 예전부터 쭉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곁에 없는 그대를 사랑하였다는 말입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시적 화자는 날이 저물었는데 별조차 뜨지 않는 상황에서, 임을 만나지 못하는 절망감을 자연 현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별'은 '그대'를, 홀로 사랑해야 하는 힘겨운 상황은 '저문 하늘'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호응하고 있습니다. '날 저문 하늘'이 임이 부재(不在)하는 상황을 상징한다면, '별'은 화자가 그리워 하는 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그대'가 없는 외로움의 공간]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사랑과 절망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에 나가

 

저무는 섬(외롭고 쓸쓸하며 구원받지 못하는 운명의 이미지 / 화자의 외로움과 단절감을 극대화하는 객관적 상관물)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잠든 세상 밖으로~떠올리며 울었습니다 : 외로움과 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전전반측(輾轉反側)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든 세상 밖으로 나가 새벽 달 빈 길에 뜰' 때까지 방황했다는 것은 기다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감정입니다. '어둠의 바닷가'는 '그대'를 만나지 못하는 절망의 공간을, '저무는 섬'은 그로 인해 외롭고 쓸쓸하며 구원받지 못하는 운명의 이미지를 지닌 화자를 상징하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울었습니다'로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기다림의 내면화를 '사라져서'라는 말로 표현]

 

해마다 첫눈['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에 나타난 정서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시어]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세계와 단절된 절대 고독의 공간]에 앉아[외로운 사람들은~기슭에 앉아 : 화자와 마찬가지로 '외로운 사람들'은 첫눈 내리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화자는 '섬 기슭에 앉아' 더욱 심한 고독과 그리움을 느끼게 됩니다. '새벽보다 깊은 새벽'은 새벽달이 떴을 때보다 시간이 더 흘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화자의 심리적 변화와 맞물리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오늘도(계속 반복되는 시간을 의미)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오늘도 그대를~더 행복하였습니다. : '그대'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돌아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는 처지를 '행복'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화자의 태도가 담겨 있으며, 재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습니다.]

 

 


정호승

鄭昊昇
 
시대 근대
유형 인물
관련 사건 한국전쟁
출생 1916년
사망 미상
직업 시인
작품/저서 모밀꽃
성별
분야 문학/현대문학

요약 1916∼? 시인.

[개설]

본명은 영택(英澤). 충청북도 충주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29년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좌경서적을 읽다가 발각되어 정학처분을 몇 차례 당하고는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1935년서울로 다시 올라와 조선문학사를 열어 문예지 『조선문학』을 지봉문(池奉文)·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간행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 기울어져 8·15광복 직후, 남로당에 입당하였고, 남북협상차 북행하는 김구(金九)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청주교도소에 1년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출감 이후, 줄곧 도피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때 그는 고향인 충주에서 예술동맹위원장을 맡아 좌경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39년 조선문학사에서 간행된 시집 『모밀꽃』 이전까지 3∼4년으로 국한되며, 시집 수록분을 포함하여 40편 가까운 시작품을 지상에 발표하였다. 그의 시 대부분이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고향에서 보낸 성장기의 체험과 연관된다.

그의 이런 체험이 좌익성향과 결부되어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작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향토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념성의 원리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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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승(鄭昊昇) 되찾기의 겉과 속

 

 

 

1. 실종문인, 민족적 비극의 표상

 

 

  문학은 ‘개인’으로부터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회’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함의(含意)를 띠고 있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그런대 개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단위 사회가 민족(국가)사회이다. 그래서 문학은 민족사회를 단위로 구별되어 존재한다. 민족사회는 언어, 혈통, 풍습, 정서 등이 같아서 변별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문학과 충청문학은 변별력이 없거나 극미하지만, 한국문학과 영국문학은 선명한 변별적 자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이나 나라마다 그 문학의 특수성이 검출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처한 고유한 사회·역사적 환경 때문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민족성을 토대로 피어나는 꽃이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만드는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서구문화의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수난사’이다. 전자는 주로 근·현대문학의 촉발요인으로 작용했고, 후자는 그것의 특수성을 조성하는 무거운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과 ‘민족분단’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만하다. ‘일제강점’은 민족 주체성의 보존과 관련된 민족문학의 검증요소로서 작동될 뿐만 아니라, 민족 언어의 훼손 및 장애 문제나 검열 문제 등을 내포하면서 한국문학의 민족의식이나 고유성을 확인하는 전제가 된다. 한편 ‘민족분단’은 분단 이후와 그 이전까지도 한구 문학사를 반쪽 문학사를 만들어 놓았으며,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민족문학의 정체성(Identity)을 묻고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한국현대문학의 깊이와 높이를 규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 마디로 ‘민족분단’은 한국문학의 비극적 특수성의 외연과 내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 수난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분단’이라는 강물은 비극적 특수성이라는 홍수를 이루면서 민족의 보물인 작품이나 작가가 ‘실종’ 또는 ‘매몰’되는 재해를 불러와 그 비극성을 고조시켰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실종문인’은 그러니까 그 자체가 우리 민족문학사의 비극적 특수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존재인 것이다. 수많은 문인이 실종되다니,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일뿐만 아니라 ‘실종문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거나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실종문인’은 한국문학사에서 빼내지 못한 가시처럼 미해결의 문제로 아직 아프게 걸려 있는 것을.

  한국문학사에서 실종문인은 월북문인을 비롯해서 납북문인, 재북문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월북문인이다. 월북문인은 월북시기에 따라 3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차 월북문인은 조선문학건설본부(1945.8.16 설립)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1945.9.17 설립)이 조선문학가동맹(1946.2.)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카프 맹원들(이기영, 한설야, 송영, 윤기정, 안막, 박세영 등)이 월북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제2차 월북문인은 1947년부터 1948년 8월 사이에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미군정당국이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발표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심인물들(이태준, 임화, 김남천, 이원조, 홍명희, 안회남, 허준, 박찬모, 현덕, 김소엽, 김동석,김영건, 조영출, 조남령, 조벽암, 조허림 등)이 월북한 것을 가리킨다. 제3차 월북문인은 1950년 6.25 한국전쟁 중에 발생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조선문학가동맹 문인들은 이를 해체하고 사상전향을 선언한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의지를 실천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 전쟁의 와중에서 자의 또는 타의로 북으로 향했던 것인데, 이용악, 이병철, 이선을, 조운, 김상민, 유종대, 박산운, 김광현, 박태원, 정지용, 설정식, 이흡, 김상훈, 임학수, 여상현, 임호권, 양운한, 지봉문, 엄흥섭 등 실로 다수의 문인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해방과 전쟁이 세상을 뒤흔드는 격동의 시기에 이중 삼중의 사상적 혼란을 겪다가 전화에서 잠시 비껴 있고자 하다가 끝내 분단의 긴 세월 속에서 역사의 고초를 한 몸으로 겪으면서 망각되고 매몰된 비운의 문인들로서 민족사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들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인 정호승(鄭昊昇, 1916 ∼ ?)도 제3차 월북문인의 한 사람으로 고난의 문학적 생애가 매몰되었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묻혀 있던 정호승 시인을 처음으로 발굴한 사람으로 그 경위와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고향, 그 뽑히지 않는 마목(馬木)

 

 

  시조시인 정완영은 「버꾸기 소리 떠내려 오는 시냇물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란 그 사람의 가슴엔 사랑의 원류이기도 하고 눈물의 원천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기도 하고 병이기도 하며, 버리려야 버려지지도 않는 모토(母土)인 것이며, 뽑으려야 뽑아지지도 않는 마목(馬木) 같은 것이라고. 실로 고향은 어머니와 의미 자장을 함께하는 사랑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마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력에 이끌리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매여 있는 마음의 고삐를 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매몰되었던 정호승 시인을 필자가 찾아내게 된 것도 이 마목의 덕분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 마목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겼고, 그의 가족들은 그 마목으로 돌아와 그것을 지키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 또한 그 마목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충주 지방 사람이면 금방 알 수 있는 ‘鷄足山’, ‘모시레들’, ‘彈琴臺’, ‘虎岩堤’, ‘合水머리 같은 지명들을 작품 속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풀무고개에서’라고 작품을 쓴 장소를 부기한 것이 여러 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蜘蛛峰밑 넓은들에 너울치는/ 가난한 모밀꽃 香氣를 마시고/ 아담스런 木花송이에 쌓여/ 풀무고개 기슭 오막사리 초가집 굴앙선에서도/ 북도더 키워지든 이몸이였다우(「잡스러운이몸」)’라는 구절이 있어, 그가 풀무고개 출신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情겨워 뛰놀든 풀무고개(「노래를 잊은 이몸」)’나 ‘풀무고개 성황나무 가지에/ 내넋은 파랑새되여 앉는다(「故鄕을 떠나며」)’ 등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간접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이 정호승 시인의 마목일 것이라고 추단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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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승 정영택 시비

 

정호승 시인의 장남인 정태준 시인의 가족들

 

 

 

시비 뒷면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시인의 종가 자리에 세워진 절

 

정경원(종조부)의 집터

 

가운데가 장남 정태준 시인 내외

 

 

 

장남 정태준 시인의 감사말씀(뒤는 사회를 맡은 시인 이석)

 

 

 

 

모밀꽃·1 -정호승

 

어느 女人의

슬픈 넋이 실린 양

해쪽이 웃고 쓸쓸한

모밀 꽃

 

모밀꽃은

하이얀 꽃

그女人의 마음인양

깨끗이 피는 꽃

 

모밀 꽃은

가난한 꽃

그女人의 마음인양

외로이 피는 꽃

 

해마다 가을이와

하이얀이 피여나도

그마음 달랠길 없어

햇쪽이 웃고 시드는 꽃

 

세모진 주머니를 지어

까-만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

아모 말없이 시드는 꽃

 

1937년도에 발간된 <조선문학>.

그런데 이 책에서 이상한 점이 있는데 목차가 없으며, 맨 뒤에 페이지도 없다.

누군가가 일부러 오려 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책속에 있는 작가들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빨갱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당시 이 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조차 상당히 위험이 따랐을 것이다. 

이 책 속에는 <정호승>이라는 사람의 시 <고독과 불안>이 있다.

 

 

정호승.

정호승 시인하면 대부분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의 시인을 생각한다.

서정적이면서도 가슴을 에는 시어로 팬을 확보한 시인의 명성 때문이다.

그 시인은 아니지만 같은 이름으로 시단에서 활동하던 시인이다.

 

 

충주에서 태어나 월북한 모밀꽃 시인 정호승. 

월북작가라는 딱지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정호승 시인은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문학사에서도 철저하게 잊혀진 작가로 남아 있다.

민족의 아픔과 농민의 고난을 시로 담아낸 그의 문학정신도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묻혔던 것이다.

 

 

하지만 월북하기 전까지 시인의 발자취를 보면 결코 짧은 문단 생활이라 할 수 없다.

그는 1950년 월북 전까지 1930년대 대표적인 문예지 '조선문학'의 발행인이자,

주간을 맡아 문학 활동을 벌일 정도로 유능한 문학인이었다.

 

 

1916년 충주에서 태어난 그는 송강 정철의 13대손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1923년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에 입학하였고,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중앙고보 시절 시인은 좌경서적을 읽다 학교로부터 정학과

무기정학을 네 차례나 받는 등 향후 험난한 앞날이 예고된다.

 

 

이후 1935년 서울로 올라온 정호승은 왕십리에서 운수사업체를 열었고,

건물 2층에 조선문학사를 옮겨 1930년대의 대표적인 문예지인 '조선문학'발간에

참여한다.

1933년 당시 유일한 문학지인 '조선문학'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순수문학 작품을 게재해 우리나라 문단사에 영향력을 미쳤다.

또 시인은 이무영과 이흡, 지봉문 등 충북 출신 작가들을 조선문학에 끌어들여

문학교류를 갖는 등 지역 작가들에게도 문단의 길을 열어 주었다.

 

 

정호승 시인은 1939년 첫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모밀꽃'을 발표한다.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생생한 시어로 녹여낸 시어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말로

펴낸 시집이란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시집 발간 이후 일본의 감찰과 원고가 불태워지는 등 고초를 겪었다.

 

 

시인의 삶은 그러나 1945년 광복을 맞으며 극명해진다.

시인에서 사회주의 사상가로 변모한 그는

 '아우성'을 발간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이러한 사건들로 1946년 청주교도소에 6개월간 수감됐으며,

1948년에는 김구 선생의 입북을 따라 북행한 뒤 2차 옥고를 치렀다.

광복 공간에서 좌익 문인으로 활동했던 정호승은 1950년 6·25전쟁 중 충주지역

예술동맹위원장을 지내다 결국 월북 문인에 합류한다.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이상을 꿈꿨던 월북 시인들은 그러나 북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역사의 비운으로 남겨졌다.

정호승 역시 월북작가로 매몰됐다가 1980년 납·월북작가 작품 해금조치로 민족적 삶을

총체적으로 다룬 모밀꽃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 오른쪽이 그의 시 <고독과 불안>이다-

 

그의 시 <고독과 불안>을 보자.

 

 

어제가 3분전인 이 방안에

.............................

잊혀지지 못하는 아롱진 그날

汽笛소리에 넋을잃고

머-ㄹ리 아물아물 사러저가든 네손수건만이

--잡힐뜻--잡힐뜻--

오--玉아!

(중략)

부르릉 이를 갈며 떠는 문풍지

마음대로 안되든 내마음 같은게지

나만이 부르든 玉아!

화로불 피우든 玉아!

향기 그윽히 나붓기든 때묻은 저 이부자리우로

네 幻影만이 어른 어른

화로불이 시들어도

이부자리속이 그리 탐탁치가 않고나 

 

 

위 시속에서 화자는 ‘汽笛소리와 함께 떠나간 玉’ 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때 ‘玉’이가 ‘나만이 부르던 玉아’라는 호칭형을 통해 화자의 애인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살어갈 길 없어 용솟음치는

불안’을 통해서 바로 玉이가 가난 때문에 집을 떠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시속에서 ‘때묻은 이부자리’로 표상 되는데, 이렇게 막연히 집을 떠난

여성들은 당시 대부분 일본 사람들의 집에서 파출부를 하거나 접대부로 팔려갔다.

이처럼 여성의 희생과 수난은 현실극복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였으나, 이로 인해 한

존재로서의 여성들의 삶은 이중적 수난으로 매우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위 시속에는

 ‘저’-老婆의 젊은時節이 몇分前이었든고 머지않어 내얼골도 주름질게다’와 ‘

전력을 드린 내 소망 재가될까 두려워 몸부림친다’를 통해 현실에 대한 시인의

무력감과 이로 인한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이때에 화자의 두려움과 고독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자책과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일종의 불안심리’라 할 수 있다.

즉 처참한 민족 현실 앞에서 방황하는 지식인 곧 정호승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의 다른 시를 보자.

 

 

 

 

 

 

뉘를 위해 아껴왔는지  

싹싹 긁어뫃아야 석섬을  

두섬을 짊어지고 가니  

凶年이라고 두말을 감해주더라  

(중략)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돌리니  

옆에 있는 도야지 울엔  

누룩 도야지가 길게 누워 낮잠만 자는구나  

그- 욕심많은 놈이  

배ㅅ대지가 여간 불러서야  

죽을 저-만큼 남겼을게냐  

그 놈의 배ㅅ대지  

지주님의 배ㅅ대지와 흡사하다  

가-마니 있자 이도야지가?  

그렇지! 우리것과 한날 사왔었지-  

우리새끼가 원악 적기야했지만  

짐성두 먹어야 크지!  

내꼴좀보지 살한점붙었나  

(중략)  

집에 남은 베한섬을 마저  

질머지고 나오는 나의 꼴을  

바라볼 식구들의 표정이  

지금부터  

눈에 발피구 발피구 

 

 

위의 작품은 소작인과 지주를 마르고 작은 도야지와 욕심 많고 살찐 누룩도야지로

대비시키는 방식을 통해 풍자하고 있다. 시어의 선택에서도 흉년, 장리벼, 베한섬은

소작인을, 누룩 도야지는 지주로 비유하면서 식민지 현실의 모순성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예컨대 지주와 일제에 의한 착취를 동질로 인식하고<누룩도야지>

라는 구체적인 대상물을 설정 풍자하고 있어 정호승 프로시세계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소작인과 지주의 대립적인 관계는 식민지 현실의 피폐상을 드러내는 한

방식으로써, 당시 프로 작가들이 자주 활용한 기법이다. 달리 말하자면 일제 식민

치하에서 지주는 일본인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계급모순은 늘 상 민족 모순과 연계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속에는 흉년들어 추수한 것 석 섬 중, 두 섬을 지주에게 바치러 가는

소작인의 비애가 ‘벼한섬 마저 짊머지고 나오는 가장을 바라보는 식구들의 얼굴

표정’에서, 그리고<눈에 발피구 발피구>라는 반복어를 통해 극대화되고 있다. 

 

 

오늘은!  

독사뱀 아가리로 들어간 개고리는 몇 마리  

독수리가 채간 병아리는 몇마리  

쏟아저나온 내피땀은 몇섬이나 될것인고?  

집에서는 지금쯤  

죽먹기 싫다거니  

보리밥을 달래거니  

칭얼대는 자식놈이 발버둥을 칠때다  

(중략)  

아침에 죽한그릇  

점심에 간신히 막걸리 한사발  

(그것도 권승지네 김밭에서 春奉아범 덕택으로 얻어 마신 술이다)  

새이도 못 먹고 단마지기 김을 매다니  

참! 내힘두 어지간하다.  

폭이폭이 밴 내精力 내피땀  

무럭 무럭 자라도  

그리 신통치 않을 것을 번연히알면서  

來日은 또 서낭당이 서속밭을 매야만하나?  

 

 

위 작품도 앞에서 논한 시와 형상화 방식에서 많이 닮아있다.

독사뱀․개고리․독수리․병아리․죽․보리밥․하나 남은 박아지․죽 한 그릇․막걸리 한사발

등의 시어는 당시 피폐한 민중의 생활상과 착취계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독사뱀과 독수리는 악랄한 지주와 일제를 상징하고 있으며, 개고리와 병아리는

민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병아리나 개고리가 독사뱀과 독수리에게

무력하게 당하고 마는 상황 역시 일제치하에서 우리민족이 당하는 수모와 피탈을

의미한다.

 

 

이 시인의 작품은 거의 다 위와 같다.

 

 

그런데 이 시인의 시를 보면 마치 1960-1970년대를 보는 것 같다.

어쩌면 한결같이 똑같은지 모른다.

 

 

일제시대와 박정희정권.

말만 바꾸어 놓은 듯하다.

그래서 이 시인의 시를 보면 <김지하 나 ,양성우,박노해,신경림 ...>등을  

보는 것 같다.

 

 

들키면 영락없이 감옥으로 가기 때문에 표지를 띁어내고 다른 종이로 싸서

다닌 것도 똑같다.

 

 

지금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그들 역시 어짼가는 잊혀져 지는가?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역사 소용돌이에 묻힌 정호승시인.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반드시 재조명 되어야 하리라.

통일이 되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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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모밀꽃>

 

 

모밀꽃 1

 

            정호승鄭昊昇

 

어느 女人의

슬픈 넋이 실린양

햇쪽이 웃고 쓸쓸한

모밀꽃

 

모밀꽃은

하이얀꽃

그 女人의 마음인양

깨끗이 피는꽃

 

모밀꽃은

가난한꽃

그 女人의 마음인양

외로이 피는꽃

 

해마다 가을이와

하이얀이 피여나도

그마음 달랠길없어

햇쪽이 웃고 시드는꽃

 

세모진 주머니를 지어

까 - 만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

아모말없이 시드는꽃

 

 

  위의 詩는 1939년 <조선문학>社에서 출간한 아버지의 시집 <모밀꽃>에 실린 작품이다. 모밀꽃1, 모밀꽃2 연작시로 되어있다. 1992년 이른 봄, 아버지의 시집을 처음 대하고 몇 날을 울다가 모밀꽃1, 모밀꽃2에 曲을 붙였다.

  모밀꽃1은 전 어머니 江陵崔氏에 대한 아버지의 애절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밀꽃2는 나라를 빼앗긴 백의민족의 보편적 통한이 가득 배어있는 詩다. 다음 기회에 詩와 曲을 올리려고 한다.

 

 

  전 어머니 江陵崔氏가 그렇게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왕십리에 차렸던 경충무역사와 <조선문학>社를 정리하고 낙향을 하였다. 1937년 8월부터 1939년 지봉문池奉文이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어 속간할 때까지 <조선문학>을 휴간하게 된 연유다.

  열아홉 살에 결혼을 하여 병치레로 합방도 못하다가 겨우 서울살림 몇 달 만에 그리 사별을 하였으니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리다. 소생이 있을 리 없다.

 

 

                  무지개

 

                           정호승鄭昊昇

산삼꽃 향기로운 / 저 - 산말냉이에 / 무지개 박었다 하기로 / 내 그곳을 찾어갔소 /

아아 ! / 꼬리를물은 산봉오리만 / 숨막킨 눈알을 볶어댈뿐 / 무지개는 나를 피해 /

저 바다복판으로 옮겼구나 /

산삼마저 뽑어가지고 갓기에 / 기 - ㄴ 한숨 박어놓고 / 타박 타박 / 내 흐느껴울며 도루왔소

 

  그 당시의 아버지 심사가 잘 나타나는 詩다. 시집 <모밀꽃>에 실려 있다. 통곡을 하고 싶은 현실을 詩 창작으로 겨우겨우 달래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지나던 어느 봄날, 아버지는 엄마를 만난다. 경성사범을 갓 졸업하고 (現) 충주교현학교로 첫 발령을 받고 온 엄마였다. 1938년 봄날이었다.

 

 

<아버지 : 본명 정영택 鄭英澤
           필명 정호승 鄭昊昇> - 송강 정철 13대손임

 

가끔 현재 시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는
정호승의 아들이냐고 반갑다고 인사하는 전화가 온다.
정호승 시인은 나보다 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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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이 짧은 시간 동안>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새벽편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등 주옥같은 시와 동화를 쓰고 있는 1950년생의 시인 정호승(鄭浩承) 선생이 있다.

 

하지만 같은 1950년 우리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춘 충주 출신의 월북시인 정호승(鄭昊昇-본명: 정영택(鄭英澤)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6년 충주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가 중앙고보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중 좌경 서적을 읽다 정학, 무기정학을 연이어 당하고 퇴학한다. 이후 약관의 나이인 1935년 '조선문학사' 발행 및 편집인으로 2년 간 활동하기도 했던 정호승 선생은 24살이 되던 1939년 시집 <모밀꽃>을 조선문학사를 통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이후 동아일보, 조선문학, 시건설, 자오선, 풍림 등에 시를 꾸준히 발표하였고, 해방 직후 좌익 활동으로 복역을 하기도 했다. 1948년(33세)에는 남북협상을 위해 노력하던 김구 선생과 동행하여 북에 갔다가 돌아와 2차 복역을 하기도 했다. 전쟁 중이던 1950년에 충주지역 예술동맹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한 인물이다.

 

현재 그의 가족은 충주와 청주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1968년 북한의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확인된 바 없다.

 

그의 시집 <모밀꽃>은 출간 56년이 흘러 도서출판 온누리에서 1995년 재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진대 국문학과 서범석 교수의 연구결과와 시인 도종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재출간되었다.

 

시인 정호승인 1930년대 한민족의 현실을 특유의 서정성과 사회적 현실성으로 묶어 꽃피워 낸 시인, 약관의 나이에 '조선문학'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사에서 이름이 사라진 이유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 않았고, 월북을 한 관계로 신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1974년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국어국문학사전>에도 '조선문학'은 창간초기 중국인 정호승이 발간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대한 정보는 잘못된 것이 많다. 또한 일제의 탄압과 해방 직후에도 좌익 활동을 꾸준히 한 관계로 소실된 원고가 많다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모밀꽃>(도서출판 온누리)에서 압권은 제목도 없는 4줄짜리 서시이다.

 

나는/들 가온데 외로이 선 허수아비/소슬바람에 풍겨오는/메밀꽃 향기를 사랑한다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지식인의 모습.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자조하고 자탄하며 스스로를 허수아비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심약하고 고독한 시인은 소박하고 순결한 꽃향기를 품고 살고 싶어 하는 희망의 모습을 품고 있기도 하다.

 

까닭모를 슬픔이/따스한 봄위에 차다//숨끼만하는 수집은 이乳房이/진달내 꽃까지 받어들고/바르르 떨기만 하노니//연못가에 수양버들/매디 매디 호들기여/행여나 어린꿈을 바숴놓지 마옵소.               호들기여(전문)

 

꽃다운 처녀에게 봄은 아직도 슬프다. 처녀의 가슴엔 진달래가 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숫처녀 가슴 울리는 버들피리는 불지마라. 

                              

어느넋의 슬픔이기에/이리도 구슬피 흐느끼느뇨//방안에 가득 초ㅅ불이 차듯/빗소리 가득 뜰에 차고/내마음에 차고//무슨傳說의 토막인양/머-ㄹ리 캉캄한 어둠속으로/반디불 깜박 호들기소리 잇겨/-太古속으로/뱅고름이 피여나는 동백꽃-//초마끝 낙수물 똑. 똑./잃어진 수집음이 문득 그리워/눈망울이 매끈히 젖고//아지랑이의 슬픔 촉촉이/햇쪽이 웃고 돌아서는 머리채로/서글피 도사리는 밤이다.            봄비나리는밤(전문)

 

시인의 봄비 내리는 소리를 구슬피 우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다. 잔잔히 들려오는 낙수물 소리가 내 마음에 차고 가슴에서 넘치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나는 빗소리에 눈물 흘리며, 밤잠을 설친다. 

                           

요  죄많은 꽃아/고  해맑은 눈초리로/왜  햅필 이가슴에다/빩안 생채기를 내여놓는단 말이냐//내  속사랑을 아서가겠거든/조꼼도 남기지말고/나  몰내 싹싹 핧어가든지//요  서투른 도적아/고  볼우물에 고힌 웃음으로/선불만 질너놓고 어찌하겠느냐?//왜  대답이없느냐?/어찌하겠느냐?/요  서투른 도적아........               서투른도적아(전문)

                  

예쁘지만 3~4일 밖에 가지 않는 꽃을 두고 서투른 도적이라고 표현하는 시인의 글 솜씨가 대단하다. 첫사랑처럼 마음 설레게 하는 꽃들이 피고지면서 나의 마음에 선불만 지피고 떠난다.                                                             

 

해마다 봄이오면/나는/한가지 꽃을 피우기위하야/만가지 잡초를 솎어왔소.//그러나/아!/꿈심은 터전엔/회오리바람도 잦었소.//뜯맞는 벗들은/生活이 아서가고/사랑은/生活아닌 生活이 짓밟었소.//이해도 벌서/봄이 왔나보오/저 들창문을 닫어주오/호들기소리 듣기싫소.//알알의 슬픔을 색인/슬픈 마음의 墓誌銘은/푸른술로 달내주어야하오.//女人의 때묻은 속옷/한떨기꽃인양/내 나비되면 고만아니겠소.//나는 외로운 蕩兒/나는 마음弱한 蕩兒/술과 게집과 그리고/한가닥 담배연기를 사랑하오.      나는蕩兒(전문)

 

식민지 지식인의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작품이다.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과 한 가지 꽃을 피우기 위해 만 가지 잡초를 솎아내었던 자신의 무능력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 속에서 술과 담배, 여자로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질타하고 있는 듯하다.

             

山蔘꽃 香기로운/저 - 山말냉이에/무지개 박었다 하기로/내 그곳을 찾어갔소//아아 !/꼬리를물은 山봉오리만/숨막킨 눈알을 볶어댈뿐/무지개는 나를 피해/저 바다복판으로 옮겼구나//山蔘마저 뽑어가지고 갓기에/기 - ㄴ 한숨 박어놓고/타박 타박/내 흐느껴울며 도루왔소                무지개(전문)

 

희망과 무지개를 찾아 떠났지만, 눈앞에 잡힐 것 같은 무지개는 다가설수록 멀어지고 한숨은 두고 돌아오면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내일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어느 女人의/슬픈 넋이 실린양/햇쪽이 웃고 쓸쓸한/모밀꽃//모밀꽃은/하이얀꽃/그女人의 마음인양/깨끗이 피는꽃//모밀꽃은/가난한꽃/그女人의 마음인양/외로이 피는꽃//해마다 가을이와/하이얀이 피여나도/그마음 달랠길없어/햇쪽이 웃고 시드는꽃//세모진 주머니를 지어/까 - 만 주머니 가득/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아모말없이 시드는꽃          모밀꽃,1(전문)

 

슬픈 여인의 모습을 한 모밀꽃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시인 정호승의 서정성과 목가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다.

 

올해 같이/가무는 해는/들에 가 - 득/모밀꽃이 피여나//모밀꽃이/많이 피는해는/마음이 가난하고/나라가 가난하고//올해 같이/목마른 해는/젊은이 가슴가득/모밀꽃이 피여나//모밀꽃이/많이피는해는/마음이 가난하고/나라가 가난하고//하이얀 메밀꽃을/위로해 주지못하고/주머니 가득/하이얀 비밀을/어루만저 주지않어//몇해만큼 한번씩/들에가득/마음에 가득/모밀꽃이 피여나기 위하야//날은 가물고/목은 마른다.            모밀꽃.2(전문)

 

전편과는 달리 가난한 농촌의 현실과 힘없는 나라의 모습을 모밀꽃을 통하여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날이 가물고 목이 마른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뉘를위해 아껴왔는지/싹싹 긁어뫃아야 석섬을/두섬을 짊어지고가니/凶年이라고 두말을 減해주더라//今年같은해/農事 참 잘되었다구/연방 치하도 하고/장예벼나 속히가주오라구/命令詞를 붙이는 地主님/눈초리도 음침하다//視線을 피해서 고개를돌리니/옆에있는 도야지울엔/누룩도야지가 길게누워 낮잠만자는구나/그-욕심많은 놈이/배ㅅ대지가 여간 불러서야/죽을 저-만큼 남겼을게냐/그놈의 배ㅅ대지/地主님의 배ㅅ대지와 흡사하다//가-마니있자 이도야지가?/그렇지! 우리것과 한날 사왔었지-/우리새끼가 원악 적기야했지만/짐성두 먹어야크지!/내꼴좀보지 살한점붙었나//말해야 所用없을줄 짐작은하면서/延期해달란게 나의불찰일가?/안된다면 그만이지/눈을 그렇게 흘겨뜨고/소리소리 지를게 뭬-람//집에남은 베한섬을 마저/질머지고 나오는 나의꼴을/바라볼 식구들의 表情이/지금부터/눈에 발피구 발피구//         - 풀무고개에서                 소작인(전문)                     

 

앞에서 선보인 시인의 시와는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주와 소작인 그리고 소작인이 키우는 돼지를 통하여 나라 잃은 백성 가운데 특히 소작인의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소작인 보다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소작인의 돼지가 부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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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조선문학>

 

 

  아버지(鄭英澤)는 1916년 1월 5일 충주군 충주읍 교현동 420 번지에서 3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序一은 前 忠南知事 성락서成樂緖에게 시집 간 고모 정기택鄭基澤이고 序二가 아버지 정영택鄭英澤이다. 序三은 남동생으로 정구택鄭龜澤, 序四도 남동생으로 정규택鄭奎澤이다. 아버지와 고모는 여덟 살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둘을 잃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1924년 아홉 살에 (現)충주교현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서당과 유치원을 다녔다고 학적부 입학전경력入學前經歷 난에 기록되어 있다. 가장 잘 하였던 과목이 가창歌唱(음악)이다.

<우리 사남매가 모두 노래를 잘 하였다. 엄마가 중학교 때 가사 선생이면서 1학년 음악을 가르쳐 우리는 엄마 닮아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 했었는데 나중에 나중에 내 나이 오십이 넘어 아버지의 학적부를 보고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를 닮아 노래를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엄마는 내가 듣기에는 조금 음정이 불안했다. 그때(1950年代)가 충남 태안중학교 다닐 때인데 시골 학교라 음악선생이 드물어서 경성사범을 나온 엄마가 오르간을 칠 줄 아니까 1학년 음악을 맡겼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교현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고보에 들어갔다(1930년). 열다섯 살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외에서 일본에 조직적으로 항거를 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전 해(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여파가 전국 각지에 퍼지고 공산주의로 이론 무장을 하여 항거가 심화되던 시점이었다. 교현학교 입학 전에 서당과 유치원을 다녀 동학년생 보다도 한두 살 위였던 아버지는 조숙하였던 모양이다. 학업보다는 사회의 흐름에 촉이 쏠려 좌익 서적을 탐독하였다. 2학년이 되면서 정학을 반복하다가 기어이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일본에 항거하는 이론 무장이 공산주의였기 때문에 좌경화 되어가는 아버지를 그냥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충주로 내려왔다. 서울로 올라갈 때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이였지만 퇴학을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올 때는 좌경화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고향에 내려와서는 음성의 이무영李無影과 충주 신니의 이흡李洽, 충주읍내의 지봉문池奉文 등의 문인과 어울리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아버지가 열일곱 살 때였다.

 

<이무영李無影과 이흡李洽은 1908年生 동갑내기로 아버지와는 여덟 살 손 위 文友였다. 지봉문池奉文은 忠州池氏人으로 본명을 알지 못해 누구인가가 확실치 않다. 아마도 이무영이나 이흡과 비슷한 연배가 아닐까 유추할 뿐이다. 이후 이무영李無影은 친일파가 되어 해방 후에 정훈장교로 활약을 하다가 1960년에 죽었다. 이흡李洽은 일제 강점기에 좌익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빨갱이로 몰려 전주 감옥소에서 복역 중 6.25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 아마 총살되지 않았나 싶다. 지봉문池奉文은 충주 사람인 줄만 알 뿐 기록이 전혀 없다. 아버지 정호승鄭昊昇(昊昇은 필명이고 본명은 정영택鄭英澤이다)도 文友 이흡李洽과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에 좌익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역시 빨갱이로 몰려 청주감옥소에 두 번이나 수감되었다. 출옥 후 6.25 전후에 충주에서 예술동맹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월북을 하였다.>

 

  1933년 10월에 이무영李無影, 이흡李洽, 지봉문池奉文과 아버지 정영택鄭英澤은 편집인에 지봉문池奉文 발행인에 이무영李無影으로 일제강점기 유일한 종합문예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창간 한다. 칠백석지기 재산이 진외가 쪽으로 많이 흘러 들어가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재산마저 바닥이 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조선문학朝鮮文學을 창간하는데 아버지가 재정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1934년에 江陵崔氏와 결혼을 하였다. 내게 전 어머니다. 열아홉 살 때였다. 江陵崔氏 전 어머니는 함월涵月 최응성崔應聖의 후손으로 충주 살미가 친정이다. 지금은 충주댐에 수몰되어 살던 곳을 찾을 수 없고 다만 살미에 있었던 함월涵月의 옛집이 수안보 가는 길가로 옮겨져 그 자취만 느낄 뿐이다.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서 폐결핵을 앓았다. 아버지는 체구가 가냘펐다. 교현학교 학적부에 의거하면 1학년 때는 영양상태가 甲이었는데 6학년 졸업 할 때는 乙이었고 척추도 5학년 때까지는 정상이었는데 6학년 졸업 때는 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열두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는 어린 나이에 감당키 어려운 부친과의 사별이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서울 중앙고보에 들어가서도 학업에 열중하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어 문학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그 당시 文人들의 염세적 자학적 생활을 아버지도 뒤따르지 않았을까 싶다.

​  할머니는 아버지와 전 어머니 江陵崔氏를 떼어 놓았다. 같은 방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할머니의 지극정성(?) 덕분에 아버지의 폐병이 완치되었다. 거의 1년만이었다.

 

  1936년 이무영李無影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떠났다. 좌경화된 文友 이흡李洽, 지봉문池奉文, 아버지 등과 조선문학朝鮮文學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더 이상 문학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친일파가 되어 있었다.

  이무영李無影이 조선문학朝鮮文學을 떠나자 아버지가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었다. 할머니를 설득시켜 전 어머니 江陵崔氏와 서울로 이사를 갔다. 왕십리에 2층집을 얻어 위층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아래층은 경충무역사京忠貿易社를 차려 운수업을 하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아버지가 운수업을 제대로 꾸려나갈 리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조선문학朝鮮文學을 편집, 발행하면서 밑빠진독에 물붓기로 들어가는 돈을 감당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이제 충주에는 팔아서 현금화시킬 땅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 전 어머니 江陵崔氏는 시집올 때 지니고 온 금비녀며 금반지며 값나가는 노리개 등을 있는대로 다 내다 팔았으나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12월 한 겨울 어느 날 전 어머니 江陵崔氏가 생목숨을 하였다. 우리집에 대를 이어 내려오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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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좌익 思想과 活動

 

  아버지의 좌경화 사상은 중앙고보를 다니면서 부터였다. 중앙고보에 입학하던 해인 1930년은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에 이어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만세 시위, 한용운의 항일비밀결사 卍黨이 결성 되는 등 항일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간도의 공산당사건에서는 40명이 처형되기도 하는 시국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아버지는 일찍이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게 되었고 점차 사상도 좌경화되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금하는 서적을 읽으면서 정학과 무기정학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퇴학을 당하면서 아버지의 좌익사상은 차츰 굳어져갔다.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충주로 내려와 고향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사유思惟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특히 함께 문학활동을 하였던 이흡李洽은 아버지에게 문학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흡李洽도 좌경화된 문인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당시의 많은 지식인이 그랬듯이 아버지도 反日의 수단으로 좌익사상이 선택되어졌고 이는 친일파가 된 이무영李無影과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어 함께 창간하였던 <조선문학>에서 이무영이 손을 떼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아버지와 이무영李無影과의 관계는 거기까지였다.

  중앙고보 학생시절에 이어 왕십리에서 경충무역사와 조선문학사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두 번째 서울 생활도 전 어머니 강릉 최씨가 그렇게 돌아가시자 낙향으로 이어졌다. 엄마와 결혼을 할 무렵에는 아버지의 좌익 사상은 이미 확고해졌을 때다. 수시로 고등계 형사들이 들락거리자 엄마는 좌익 서적과 아버지의 詩 원고들을 이리저리 숨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급기야는 詩 원고 보따리를 몽땅 태우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한창 무르익었을 思惟의 詩가 한순간에 한줌의 재로 변하였다. 아버지의 시집이 <모밀꽃> 한 권뿐인 연유다.

 

  아버지는 달래강 건너의 고향 창골에 자주 들렸다. 참판공의 집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창골에 야학방을 차려 글을 가르쳤다. 시집 <모밀꽃>에 실린 -내누이-라는 제목의 詩에 언뜻 내비치기도 했다.

 

- 전략 -

이제 앞으로 석달

夜學방 先生님 쇠돌이가 나오면

또 夜學방을 차리겠지

나도 너도 粉이도

가갸 거겨 고교 구규

나냐 너녀 노뇨 누뉴

- 후략 -

 

  아버지가 야학방을 차려 동네 청년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아서 그랬는지 엄마도 야간학교를 차렸다. 먼 훗날 이야기다. 지금은 세종시가 된, 그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에 살 때다. 내가 금남초등학교 육학년 때 엄마는 가정과 선생으로 금호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엄마는 대평리 국도 변에 있는 교회를 빌려 학업을 계속하지 못 한 그곳 청년들에게 중학교 과정의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강사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선생님들에게 부탁을 하여 봉사하였다. 그러나 그 야학당은 일 년도 못 채우고 엄마가 좌익운동을 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저 멀리 태안중학교로 쫓겨 가면서 문을 닫았다.

 

  해방이 되고서 좌와 우가 남과 북에서 신탁信託 반탁反託으로 격렬하게 대립하던 1946년 아버지는 좌익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을 선고 받고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6개월만에 풀려나는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고등계 형사들이 해방이 되면서도 대부분 그대로 경찰의 대공 분야를 맡고 있어 강점기 때부터 쫓아다녔던 그들이 아버지를 그냥 놓아둘 리는 없었다. 결국에는 1948년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 차 월북하는 대열에 합류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2차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아버지는 엄마가 복직하여 근무하고 있던 김천의 직지국민학교(옛 경북 금릉군 대항면)가 있는 마을로 오셨다. - 엄마의 친정이 경북 금릉군 구례실이라 경북에서 복직을 신청하여 직지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

  1948년 가을, 하루는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 사이에 끼어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아버지와 그 손님은 참으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의 그 손님이 50여년이 흐른 어느날 내가 살고 있는 충주 창골로 문득 찾아왔다.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고서 아버지 이야기가 신문과 방송을 타면서 수소문 하여 찾아온 것이다. 이정기李廷基 국민대 영문학과 교수였다.

  그때 그 손님이었다.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던..... 문학과 사상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말로만 연좌제 폐지지 완전히 연좌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 언행을 조심하라고 했다. 일제의 잔재가 아직 도처에 남아있다고 했다. 지금도 당신은 사찰 대상이라고도 했다. 아버지와 만난 다음 해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고 했다.

  내가 아버지를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처음인 것은 해방이 되면서 좌우 대립이 극에 달하자 아버지는 충주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피신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서른세 살 나는 다섯 살이었다.

 

  1950년 6.25가 발발되면서 남한이 아래로 밀려 내려가자 아버지는 충주로 들어가 충주지역의 예술동맹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하였다. 다시 남한이 북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아버지도 충주를 떠났다. 월북을 하였다고 했다. 끝에 삼촌(鄭奎澤)도 형님 따라 간다고 떠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1980年代 중반이었던지 싶다. 일가 중의 어느 한 분이 6.25때 월북하였다가 간첩으로 남파된 후 전향한 충주의 어느 사람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함께 월북을 하던 도중 아버지가 각혈을 하였다고...... 아마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고.... 전에 앓았던 폐병이 재발 되었던 모양이다.

 

  중앙고보에 진학하면서 접한 좌경서적을 탐독하면서 反日의 수단으로 좌경화가 되기 시작하였고 문학을 접하는 과정에서 연배의 이흡李洽의 영향으로 문학과 좌익사상이 깊어졌다. 일제강점기 내내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 대상자로 이리저리 피신을 하면서 단순 이론의 좌익사상은 점점 행동화가 되었다.

  해방을 전후해 좌우 대립이 극대화 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아버지의 좌익사상은 점점 빨갱이(?)로 몰려가기 시작하여 끝내는 6.25를 전후해 월북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옥고를 치루었고 좌익사상적 색채가 짙은 ‘아우성’我友聲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월북하는 도중 전에 앓았던 폐병이 재발되면서 각혈을 하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 삶을 마치셨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

 

 

 

모밀꽃으로 다시 핀 아버지의 思想

 

모밀꽃 2

 

올해 같이

가무는 해는

들에 가 - 득

모밀꽃이 피여나

 

모밀꽃이

많이 피는해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올해 같이

목마른 해는

젊은이 가슴가득

모밀꽃이 피여나

 

모밀꽃이

많이 피는해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하이얀 모밀꽃을

위로해 주지못하고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어루만저 주지않어

 

몇해만큼 한번씩

들에가득

마음에 가득

모밀꽃이 피여나기 위하야

 

날은 가물고

목은 마른다.

 

  일제 강점기 아버지의 좌경화 되었던 사상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잘 나타난 詩다. 아버지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모밀꽃1과 모밀꽃2는 모밀꽃이라는 동일한 사물을 표현의 소재로 삼으면서도 그 지향하는 사유의 길은 전혀 다르다. 모밀꽃1은 사연을 품고 먼저 간 전 어머니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한 폭의 수채화였다면 모밀꽃2는 일제 강점기 막막한 현실 앞에 홀로 서있는 창백한 詩人의 절규라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 시집 <모밀꽃>의 序言的 詩에 그 외로움이 짙게 풍긴다.

 

나는

들 가온데 외로이 선 허수아비

소슬바람에 풍겨오는

모밀꽃 향기를 사랑한다

 

 

  따스한 봄날 자는 듯 그렇게 떠나고 싶다던 엄마는 엄동설한에 설을 며칠 앞두고 가셨다. 버적! 문지방 앞에 놓아진 바가지를 깨고 꽃상여에 실려 가시던 날 눈발이 풀풀 날리는 하늘에 오색 해무리가 둥그렇게 꽃상여 위에 떴다. 아버지 지석도 엄마와 함께 꽃상여에 모셨다.

 

 

 

무 덤

 

언 땅 파고 어머니

묻었습니다

풀풀 날리는 눈발 섞어

꼭꼭 묻었습니다

아무도 보아줄 이 없는

고운 옷

처음으로 입혀드리고

고이고이 묻었습니다

 

사람이 그립다고 하시던 어머니

홀로 남겨 놓고

떠나왔습니다

행여 북풍에 웅크리실까

이엉 엮어 덮어드리고

떠나왔습니다

 

가던 길 되짚으며

허이허이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나를 낳으시고

양식 떨어져 쌀 서 말 구해 이고 오시다

삐꺽한 허리

지금은 땅에 더욱 가깝고

멀쩡하시다가도 들어가면

끙끙 앓는 소리 내시는

나의 어머니

-그게 싫어 못 들은 척 방으로 내빼고-

 

아버지

詩想 찾아 理念 따라 北으로 가신 후

우리 사 남매

치마폭이 너무 좁아 다 감싸 키우지 못하시어

작년엔 큰 누나

올핸 작은 누나

외갓집 떼어 놓으시고

호롱불 불빛에 눈물 언뜻 비치시던

우리 어머니

 

동생 업고 내 손 잡아끌고

달래강 철교 쫓기듯 건너

忠州를 떠나시던 밤도 오늘처럼 이렇게

달이 밝았단다

 

인민군

학교 싸이렌 떼어가는 걸

추풍령 철로까지 쫓아가시어 다시 빼앗은

겁도 없으시던 直指국민학교 女선생

우리 어머니

 

어느 한날

밤 설쳐 뒤척이시다가

金泉 시내 나가신 후

커다란 보따리

구멍가게 벌여 놓으시고는

한 달도 못가서 문 닫으신

경상도 말투와 충청도 말투를

어울러 쓰시던 어머니

늘 ‘가고파’ 노래를 부르시고

 

“남편복 없는 내 팔자 무슨놈의 자식복......”

한탄 소리에

가슴 답답하던 어린 기억 남겨 놓으신

나의 어머니

 

젖가슴 만지려고

동생과 서로 밀어내기하던 기억조차 없으면

女人일 것 같지 않은

지금은 젖무덤 흔적도 없어져

귀 밑으로 곱게 흘러내리던 까만 머리

엉클어진 백발

콧등이 시큰 눈물이 솟다가도

 

생트집 소리 꽥 지르실 땐

정내미 뚝 떨어지는

 

“내가 이눔의 집구석에 와서......”

내뱉으시던 恨도

이젠

들어볼 수 없고

 

봉당마루 양지쪽

쪼그리고 앉아

詩想 따라 理念 따라 北으로

훌쩍 떠난 아버지

뒤를 쫓고 계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보이소

누굴 찾능교

 

누구예

그런 사람 없는데예

 

아 -

뭐 -

詩 쓴다고 가슴앓이하던

 

그 사람

떠난 지 오래 됐심더

 

뭐라카더라

자기는 없어진 사람이라 카면서

떠났다는데예

 

어디예

빈손으로 갔다캅니더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 들지 않고

맨손으로예

 

아마

다신 안 올 겁니더 못 올 겁니더

 

모르겠심더

어디로 갔는지

 

그냥

그렇게 떠났심더

 

 

 

  이제 나의 家門, 家族史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조선 개국부터 구한 말,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달려왔다.
오늘이 3.1절 날인데 아직 바람은 차다.

 

- 終 -

비(紙碑)와 석비(石碑)
 


 

 

지비(紙碑)와 석비(石碑)

 

 

리 헌 석

(문학평론가)

 

 

우리 겨레의 암흑기였던 일제시대에 우리 언어를 지키며 문학활동을 한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을 독립운동이다. 언어가 겨레의 얼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상기할 때, 우리 언어를 예술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문학 창작은 그야말로 경탄할 일이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이 어디 한두 분이시겠는가? 그러나 아직도 기억 속에 묻혀 현창(顯彰)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는 것은 후예들의 부끄러움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하여, 2013년 5월 25일에 호승 정영택(鄭英澤) 선생의 시비를 사단법인 문학사랑협의회에서 건립하였다. 선생의 향리인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에 건립한 시비는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우리들의 작은 사랑과 존경과 정성의 표징이다.

선생의 장남 정태준 시인과 상의하여 시비 전면에는 「모밀꽃 2」를 새겼다. 정태준 시인은 저명한 작곡가로,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추심’이 수록되었으며, 충주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분이다. 고향 야산의 능선에 부친의 시비를 세우며, 그는 얼마나 가슴이 먹먹하였을까? 가슴 속에 남았던 회한이 어느 정도 씻겨졌을까?

그의 눈빛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고 그 사업을 접는 것보다는, 실천하여 우리의 존경을 현창하는 것이 소중하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작은 일이라도 현실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와주신 분들의 정성에 고마운 인사를 드리며, 시비 후면에 새긴 ‘건립기’를 밝힌다.

 

정호승(鄭昊昇) 시인의 본명은 영택(英澤)이시다. 조선조 공신이며 문인이셨던 영일인(迎日人)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公)의 후손이시다.

1916년 충주 교현동 420번지에서 부(父) 정운익(鄭雲益), 모(母) 전의이씨(全義李氏) 슬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성장하셨다.

향리(鄕里)에서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졸업, 서울에 유학하여 중앙고보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고, 이무영 이흡 지봉문 선생 등과 문학 운동을 하셨다.

1935년 《조선문학(朝鮮文學)》의 주간(主幹)과 발행인(發行人)으로 일제시대(日帝時代) 민족예술의 암흑기에 문학의 촛불을 밝히셨다.

1939년 시집 『모밀꽃』을 발간하신 후, 신문학 여명기에 헌신적으로 창작 및 활동을 하시다가, 6.25 민족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되셨다.

선생의 문학사적(文學史的) 공로를 선양(宣揚)하고 계승(繼承)하며, 순정(純正)한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비(碑)를 세운다.

2013년 5월 25일

사단법인 문학사랑협의회 이사장 리헌석

 

신록이 찬란한 5월의 하늘은 맑았다. 호승 정영택 시인을 존경하는 사람들, 문학사랑협의회 가족들, 충주의 문인들과 지인들, 그리고 시인의 후손들이 모여 시비를 제막하였다. 식전행사로 가야금 독주. 산기슭에 청아한 가야금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충조호의 물결처럼 참석자들의 가슴에도 울림을 지었다.

이어 시비를 제막. 양쪽 끈 중에서, 한끝은 정태준 선생을 비롯한 가족 친지들이 잡고, 한끝은 우리 문인들이 마음을 모아 잡았다. 합심하여 조심스럽게 끈을 당겼고, 드디어 시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호승 정영택 선생의 순정한 문학정신을 기리는 우리의 마음이 오롯하게 담겨 보였다.

...

우리의 작은 정성이 모여 단출한 석비(石碑)를 탄생시켰지만, 우리 겨레의 암흑기에 호승 선생께서 세우신 지비(紙碑)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이 있을 역사이다.

 

=================================================


 

정호승(鄭昊昇) 되찾기의 겉과 속

 

 

 

1. 실종문인, 민족적 비극의 표상

 

 

  문학은 ‘개인’으로부터 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회’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사회적 함의(含意)를 띠고 있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그런대 개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단위 사회가 민족(국가)사회이다. 그래서 문학은 민족사회를 단위로 구별되어 존재한다. 민족사회는 언어, 혈통, 풍습, 정서 등이 같아서 변별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문학과 충청문학은 변별력이 없거나 극미하지만, 한국문학과 영국문학은 선명한 변별적 자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이나 나라마다 그 문학의 특수성이 검출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처한 고유한 사회·역사적 환경 때문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민족성을 토대로 피어나는 꽃이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만드는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서구문화의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수난사’이다. 전자는 주로 근·현대문학의 촉발요인으로 작용했고, 후자는 그것의 특수성을 조성하는 무거운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과 ‘민족분단’은 한국 근·현대문학의 특수성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만하다. ‘일제강점’은 민족 주체성의 보존과 관련된 민족문학의 검증요소로서 작동될 뿐만 아니라, 민족 언어의 훼손 및 장애 문제나 검열 문제 등을 내포하면서 한국문학의 민족의식이나 고유성을 확인하는 전제가 된다. 한편 ‘민족분단’은 분단 이후와 그 이전까지도 한구 문학사를 반쪽 문학사를 만들어 놓았으며,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민족문학의 정체성(Identity)을 묻고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한국현대문학의 깊이와 높이를 규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 마디로 ‘민족분단’은 한국문학의 비극적 특수성의 외연과 내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 수난사’의 흐름 속에서 ‘민족분단’이라는 강물은 비극적 특수성이라는 홍수를 이루면서 민족의 보물인 작품이나 작가가 ‘실종’ 또는 ‘매몰’되는 재해를 불러와 그 비극성을 고조시켰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실종문인’은 그러니까 그 자체가 우리 민족문학사의 비극적 특수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존재인 것이다. 수많은 문인이 실종되다니,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일뿐만 아니라 ‘실종문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거나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실종문인’은 한국문학사에서 빼내지 못한 가시처럼 미해결의 문제로 아직 아프게 걸려 있는 것을.

  한국문학사에서 실종문인은 월북문인을 비롯해서 납북문인, 재북문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월북문인이다. 월북문인은 월북시기에 따라 3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차 월북문인은 조선문학건설본부(1945.8.16 설립)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1945.9.17 설립)이 조선문학가동맹(1946.2.)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카프 맹원들(이기영, 한설야, 송영, 윤기정, 안막, 박세영 등)이 월북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제2차 월북문인은 1947년부터 1948년 8월 사이에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미군정당국이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발표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심인물들(이태준, 임화, 김남천, 이원조, 홍명희, 안회남, 허준, 박찬모, 현덕, 김소엽, 김동석,김영건, 조영출, 조남령, 조벽암, 조허림 등)이 월북한 것을 가리킨다. 제3차 월북문인은 1950년 6.25 한국전쟁 중에 발생하였다. 서울에 남아 있던 조선문학가동맹 문인들은 이를 해체하고 사상전향을 선언한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의지를 실천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그 전쟁의 와중에서 자의 또는 타의로 북으로 향했던 것인데, 이용악, 이병철, 이선을, 조운, 김상민, 유종대, 박산운, 김광현, 박태원, 정지용, 설정식, 이흡, 김상훈, 임학수, 여상현, 임호권, 양운한, 지봉문, 엄흥섭 등 실로 다수의 문인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해방과 전쟁이 세상을 뒤흔드는 격동의 시기에 이중 삼중의 사상적 혼란을 겪다가 전화에서 잠시 비껴 있고자 하다가 끝내 분단의 긴 세월 속에서 역사의 고초를 한 몸으로 겪으면서 망각되고 매몰된 비운의 문인들로서 민족사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인공들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인 정호승(鄭昊昇, 1916 ∼ ?)도 제3차 월북문인의 한 사람으로 고난의 문학적 생애가 매몰되었던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묻혀 있던 정호승 시인을 처음으로 발굴한 사람으로 그 경위와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고향, 그 뽑히지 않는 마목(馬木)

 

 

  시조시인 정완영은 「버꾸기 소리 떠내려 오는 시냇물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란 그 사람의 가슴엔 사랑의 원류이기도 하고 눈물의 원천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기도 하고 병이기도 하며, 버리려야 버려지지도 않는 모토(母土)인 것이며, 뽑으려야 뽑아지지도 않는 마목(馬木) 같은 것이라고. 실로 고향은 어머니와 의미 자장을 함께하는 사랑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 마목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력에 이끌리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매여 있는 마음의 고삐를 풀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매몰되었던 정호승 시인을 필자가 찾아내게 된 것도 이 마목의 덕분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 마목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겼고, 그의 가족들은 그 마목으로 돌아와 그것을 지키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 또한 그 마목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던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충주 지방 사람이면 금방 알 수 있는 ‘鷄足山’, ‘모시레들’, ‘彈琴臺’, ‘虎岩堤’, ‘合水머리 같은 지명들을 작품 속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풀무고개에서’라고 작품을 쓴 장소를 부기한 것이 여러 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蜘蛛峰밑 넓은들에 너울치는/ 가난한 모밀꽃 香氣를 마시고/ 아담스런 木花송이에 쌓여/ 풀무고개 기슭 오막사리 초가집 굴앙선에서도/ 북도더 키워지든 이몸이였다우(「잡스러운이몸」)’라는 구절이 있어, 그가 풀무고개 출신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情겨워 뛰놀든 풀무고개(「노래를 잊은 이몸」)’나 ‘풀무고개 성황나무 가지에/ 내넋은 파랑새되여 앉는다(「故鄕을 떠나며」)’ 등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간접적으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이 정호승 시인의 마목일 것이라고 추단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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