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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황지우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2015년 12월 24일 22시 56분  조회:4779  추천:0  작성자: 죽림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애국가 경청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이상향을 향한 새들의 비상(飛翔)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시적 화자의 이상과 현실적 좌절   

 

* 주저 앉음의 의미
-영화를 즐기러 온 극장의 어둠 속에 부동 자세로 서서 애국가를 경청하도록 강요받는 현실은 시적 화자에게 '피곤하고 역겨울'뿐이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떼들의 영상을 보며 시적화자는 이 폭압적 현실을 벗어나 멀리 떠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애국가가 끝나고 새떼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이 때 화자는 어쩔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을 인식하고 좌절감에 주저않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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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의 초점
이 시는 황지우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수록된 작품이다. 본 시집에 수록된 모든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작가가 현실적 삶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삶에 대한 회의와 절망, 그리고 피곤하고 역겨운 현실을 탈피하여, 좀더 바람직하고 인간다운 삶을 희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시상 전개의 축은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주저 앉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흰 새때의 비상과 같이 화자는 70~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군사 정권의 현실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은 강한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화자의 삶은 애국가 노래 가사 속의 '삼천리 화려 강산'과 거리가 멀다. 애국가 노래 가사가 끝나기도 무섭게 서둘어 자리에 주저 앉는다는 표현은 현실에 대한 화자의 강한 절망감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성격 : 낭만적, 현실 비판적
▶구성 : ① 애국가 경청(1-2행)
            ② 이상향을 향한 새들의 비상(飛翔)(3-10행)
            ③ 시적 화자의 이상과 현실적 좌절(11-20행)
▶제재 : 새
▶주제 : 암울한 현실적 삶에 대한 좌절감
▶특징: ①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암시 ② 화자의 처지와 심리를 새와 대비시켜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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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 전체의 시상으로 보아, 이 세상은 삶의 안식처가 못된다. 세상에 대한 화자의 냉소적 태도를 엿보게 하는 시어(의태어) 셋을 찾아 쓰라.(단, 같은 시어는 한 번만 쓸 것.)
▶ 끼룩거리면서,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2. 화자는 자신의 좌절감을 우리 모두의 운명론적 좌절로 비약시키고 있다. (1)그것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하는 시어와 (2)연속된 두 시행을 찾아 쓰라.
▶ (1) 우리도
    (2)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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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권의 폭압적인 정치 속에서 숨죽이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정부에서는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 애국가를 부르도록 조처했다. 군사 정권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일깨워 주자는 의도였을 터이다. 영화를 즐기러 간 사람이 차렷 자세를 하고 어둠 속에 서서 마치 엄숙한 의식을 베풀 때처럼 애국가를 경청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삼천리 화려 강산'을 떠나 줄지어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흰 새떼의 영상을 보며 화자는 우리도 대열을 이루어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고통스런 폭압적 정치 현실로부터 멀리 떠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삼천리 화려 강산'은 차라리 역설일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의 끝 구절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서둘러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이 시인은 그것을 '주저앉는다'는 말로 마무리짓는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사람이 '주저앉는다'는 말 속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절망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훌륭한 독자이다.<김태형,정희성 엮음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문원각>


<감상 추가>

80년대의 시가 세칭 민중시와 형태 파괴시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때, 그 두 가지 흐름을 하나로 통합시키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시인이 바로 황지우다. 그가 이질적인 두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던 바탕은 물론 섬세한 서정성이다. 그는 민중시 운동이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던 극단적인 이념 추구 방향뿐 아니라, 순수시의 정서적 안일성까지도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다양한 실험적 기법을 사용, 언어의 힘을 최대로 활용한다.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 쓰고자 했던 그가 바라본 80년대는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찬 곳이자, 차라리 초월해 버리고 싶은 환멸의 공간이었다. 이 시는 바로 그러한 현실 인식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폭압적 현실 상황에 대한 극도의 좌절감을 풍자라는 수법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풍자라는 면에서는 당대의 그 어떤 시도 달성하지 못한 극적인 야유 효과를 갖고 있으며, 그 효과의 실체는 신성 모독에 있다.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 정말로 살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환멸적 인식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는 자괴감은 극장에서의 애국가 상영을 매개로 형상화됨으로써 충격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람석의 불이 모두 꺼진 캄캄한 극장은 바로 암울한 현실 상황을 표상하며, '삼천리 화려 강산'을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하는 관객들은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맹목적인 삶을 따라야 했던 당시의 민중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한 사람인 화자는 '삼천리 화려 강산'을 떠나 줄지어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는 극장 화면의 새떼들을 보며,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우울한 소망을 갖는다. 그 같은 소망도 잠시일 뿐, 애국가가 끝나는 순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화자는 더 큰 좌절감에 빠져든다. 여기서 '삼천리 화려 강산'이란 풍자의 대상인 조국이 더 이상 '화려 강산'일 수 없다는 역설로 쓰이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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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ㅡㅡㅡ단 5분만에 쓰여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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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강은교 시인이 시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직접 고른 시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책이 출판된 적이 있다. 이 책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 관한 내용이다.
그럼 잠시 강은교 시인과 황지우 시인의 문답을 살펴보자.

Q) 이 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착상이 떠올랐는지요? 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요? 구체적으로 답해주십시오.

A) "이 시는 1986년 11월 어느 날 중앙일보 사옥 내 계간 <문예중앙>에 속한 한 빈 책상 위에서 씌어졌습니다. 그 당시 나는 건국대 사태 이후 5공의 탄압 국면이 날로 극성을 부리던 때 어떤 일 때문에 지명수배되어 이른바 ‘도바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낮에는 주로 안전지대인 신문사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잡지사 잡글도 쓰고 하면서 노닥거렸죠. 그런데 하루는 그 신문사에 딸린, 무슨 하이틴 잡지에 근무하는 선배 시인이 <문예중앙> 부서를 지나가다가 문득 나를 발견하고는 “이봐, 황시인! 시 하나 줘. 하이틴이야. 쉽고 간단하게 하나 얼른 긁어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5분 걸렸을까요, 쓰윽 긁어서 줬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독자를 경멸하면서 함부로 써버린, 이 무시받고 망각된 시를 내가 다시 의식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 이듬해 봄이었습니다. 친구 부인이 모 대학가 앞에서 그 당시 불온시 되던 사회과학 서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뭣이냐, 너를 기단린다나 어쩐대나 하는 시가 어느 시집에 있느냐고 물어오는 거겼어요. 그게 성우 출신 김세원 씨가 어느 FM 방송에서 낭송한 뒤로 여러 사람이 와서 찾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핏 수치심 같은 걸 느꼈습니다. 2001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그해 8월 서울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던 날 아침, 차를 몰고 학교로 가다가 나는 한 FM 라디오에서 50년 동안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 역사의 슬픈 객들을 위해 이 시가 음송되는 걸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 매우 객관적인 매체에 의해 들려지는 내 시가 내 귀에 아주 낯설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시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출처 : 시에 전화하기 )

사랑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자, 사랑에 빠져든 자, 사랑에 아파해본 자 등 사랑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은 접해보았을 황지우 시인의 대표작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단 5분만에 지어진 것이라면 누가 믿을까? 이에 대해서 강은교 시인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로 이 현상을 풀이하였다. 그의 수배생활이 순간적으로 독자와 진실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견을 달자면 강은교 시인이 평가했던 진정성에 대해서 실로 동감하는 바이다.
시인들은 대게 두가지 방식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한가지는 제도적 교육을 통해서 갈고 닦은 여러 기교들을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정리하여 시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다소 인위적인 창작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어느 순간 시어가 선택되어지고 그로 인해 시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말그대로 순간적인 영감을 바탕으로 그대로 시를 적어내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방법이 독자들에게는 더욱 와닿는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방법은 어느정도 감정의 정화가 이뤄진 후에 독자와 대면한다고 보면 후자의 방법은 순수한 시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시인들은 후자와 같은 방식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몇몇 이름이 떠오르지만 쓰지 않는게 좋을듯 해서 생략함).
황지우 시인이 그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오지 않은 나같은 독자로서는 감히 그 시절을 상상하기가 힘이 든다.  하지만 그가 이 시를 쓸 당시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는걸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어느 시인이 몇분, 몇시간, 혹은 몇일 만에 어떤 시를 만들어 내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를 접하는 동안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그 말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단 5분동안, 너무나 쉽게 써버린 시라고 할지라도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아직도 수많은 남녀들의 입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게눈 속의 연꽃>(1990)

착어(着語) :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감각적, 고백적, 역설적
   운율 : 내재율
   어조 : 절실하고 안타까운 어조
   제재 : 기다림
   주제 : 기다림의 절실함과 안타까움
   출전 : <게눈 속의 연꽃>(1990)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기다림의 절실한 심정을 평범한 일상어를 통해 절묘하게 형상화하고 있으면서도 쉽지 않은 깨달음에 이른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일방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너에게로 가는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라는 구절에 드러나 있다.
이 시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 부분(1∼12행)에서는 '너'를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끝내 오지 않는 '너'로 인해 절망하는 '나(시적 화자)'의 심리를 표현하였다. '나'는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미리 가서 초조함과 설렘 속에 '너'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너'는 끝내 오지 않고, 매번 '너'인 줄 알았다가 네가 아님을 확인하는 일은 '가슴 애리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너'는 아직도 아주 멀리 있지만 그러한 시공간적 한계는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화자가 절실하게 기다리는 '너'는 누구일까? 그것은 13행에 드러난 대로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으며, 작가가 작품의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소중한 것이지만 현재에는 부재(不在)하는 어떤 것들, 즉 소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너'를 기다리는 행위는 실현되지 않을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절망적이지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나'의 마음은 한없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것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나'를 절망의 현재로부터 희망의 미래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적적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보여 준 역설적인 깨달음처럼, 부재와 상실이라는 절망적 순간에서 오히려 희망을 건져 올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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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몹쓸 동경(憧憬)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시에게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황지우 黃芝雨 (1952. 1. 25 -  )본명 황재우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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