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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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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문정희 - 겨울 일기
2015년 12월 26일 22시 46분  조회:6801  추천:0  작성자: 죽림
겨울 일기

-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 
[작품 해설]
ㅁ주제 : 임을 읽어버린 슬픔 
ㅁ시적화자의 정서 : 슬픔, 고통, 괴로움 
ㅁ시적화자의 태도 : 절망적이며, 극복할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고 체념적 
ㅁ표현 특징 : 1연과 3연의 반어법과 2연의 자연물과의 대조
[감상] 
ㅁ1연 : 나는 이겨울을 누워지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시적화자는 임과의 이별로 인해 절망적이며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지냈다는걸 알 수 있다. 
           이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는데 편히 지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반어법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ㅁ2연 : 저 들에서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 자연물과 시적화자의 대조적인 모습. 자연물인 나무는 추운겨울에도 서로 기대면서.. 위로하면서 더불어 지내는데..시적화자는 혼자이기 때문에.. 그게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ㅁ3연 :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 현실세계와의 통로인 문을 열지 않고, 고립된 방안에서 슬픔으로 인해 반추동물처럼 죽은 것같이 움직이지 않고 지낸다는걸 알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보아, 이 시에 나타난 겨울은 추운 시련의 계절인데다가, 임과의 이별까지 겹쳐 좀더 부정적인 시어라고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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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앞둔 시인 / 문정희

 

 

 

 

이혼 앞둔 여시인은 말하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고통? 네 덕에라니....눈물나게 화려한 수사를 따라가다

다시 아침 신문을 자세히 보니

아흔 앞둔 여시인은 말하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아슬한 벼랑 끝자락에서 펼쳐 본 그녀의 식민지

시로 새긴 혼란과 전쟁, 궁핍과 수탈의 소용돌이

아흔 앞둔 여시인의 시집은

이것이 연단과 장화와 성숙이었다고 말하네

아직은 아흔보다 이혼이 더 절박한 아침

유효 기간이 끝난 찰떡 같은 결혼을 노래하고 싶네

이불 꿰매는 독바늘을 꺼내어 결혼의 정수리에 꽂고

길게 뻗어 가는 철로와 레일을

푸른 불꽃 망치로 찍어 보고 싶네

물귀신 같은 시집을 펼치어

위선과 성모욕 없이는 유지 안 되는 녹슨 쇠사슬을

이혼 앞둔 아니, 아흔 앞둔 여시인은 노래하고 싶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조선일보』2012. 6. 8일자,
홍윤숙 시집 소개「그 소식」.

 

 

 

-《시작》(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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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쁜 시인>                   문정희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는데 

고백컨대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사랑의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지.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곤돌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의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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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남편 / 문정희

 

 

 

문정희 시인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중임

 


 

칠순 바라보는 '소녀 시인'

                   야성으로 詩 토해내다

 

 

시집 '응' 펴낸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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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문정희(67)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 '응'(민음사)을 냈다. 2010년 '다산의 처녀'를 내놓은 지 4년 만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꿈틀대는 생명력을 뿜어낸다.

 

 "시가 차오를 때면 응! 야성의 호흡으로 대답했다. 어느 땅, 어느 년대에도 없는 뜨겁고 새로운 생명이기를."

 

이 시집에는 그렇게 깊은 곳에서 시가 차오를 때마다 '응!'하고 야성의 호흡으로 내지른 78편의 시가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 "목숨을 걸었다"는 시인은  연합뉴스에 "시집을 낼 때마다 그 시집만이 가지는 '등뼈'를 세우는데 이번 시집의 등뼈는 야성의 호흡"이라면서 "다른 말로 하면 늑대의 호흡 같은 생생한 생명의 소리"라고 말했다.

 

또 "그동안 피지배자로서 억압받은 여성의 삶을 많이 노래했는데 여성성이라는 문제에 너무 오래 집착하는 것도 굴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번 시집에서는 여성이라는 대지가 갖고 있는 생명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야성의 목소리로 생명을 품고 키우는 대지로서의 여성성을 노래했다"고 했다.

 

 '자유'와 '고독'을 화두 삼아 시를 지어온 지 벌써 45년째. 시인의 열정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늑대를 숲 속의 빈터라고 생각해 보자/사랑 때문에 심장을 도려낸 여자라고 생각해 보자/가보(家寶)로 내려오는 북을 찢고/적국의 밀림 속에 신방을 차린/번개나 태풍!/울부짖는 달그림자라고 생각해 보자"('늑대 여자' 중 )

 

 "여자가 시를 쓰는 것은/불을 만지고 노는 것과 같다/몸속에 키운 천둥을 홀로 캐내는 일과 같다/소리 없이 비명처럼 내리는 비로/땅 위에 푸른 계절을 만드는/여자가 시를 쓰는 것은/비상벨을 눌러/감히 신과 키스를 하려는 것과 같다/이것은 죄는 아니지만 위험한 일이므로/문학사는 오랫동안/여자의 시를 역사 밖으로 던져 버렸다"('불을 만지고 노는 여자' 중)

 

문학평론가 이숭원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는 "문정희 시인은 독자적 개성으로 무장한 시의 화신"이라면서 "늑대 여인의 열정과 가을 폭설의 정밀을 두루 화해시킬 수 있는 동력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데서 온다"고 풀이했다.

 

여성의 삶을 보듬는 시인의 시선은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하다.

 

 "일찍이 농촌을 떠나와/그때 막 시작된 산업화 시대의 여직공이 되어/밤낮으로 수출 공장에서 일을 했던/우리 순임이(중략)/초로의 할머니가 되어 마을 회관에서/동네 노인들과 복분자 술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동남아 며느리가 낳은/눈이 약간 검은 손자를 자애로이 품에 안고"('우리 순임이' 중)

 

시인은 "순임이는 찬밥댕이처럼 가장 그늘에 서 있지만 식구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몸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을 내뿜으면서 세상을 고쳐나가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한국 여성시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 시인은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힘 있는 '여성적 생명주의'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동국대 석좌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시인 포럼 '올해의 시인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받으며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인 미셸 메나셰는 "문정희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녀는 세계적인 반항아"라면서 "그녀의 시는 범속한 묘사, 즉각적인 감각으로 우주적 메타포와 결합한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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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연애 못해봐 열등감
이젠 치사해에이 관둬라’"

 

 

 

 

“이번에 플라멩코를 보니 목이 꺽꺽 메었어요. 어린 시절 듣던 남도의 판소리와 육자배기, 미친 여자들의 춤, 장돌뱅이의 몸부림이 다 들어있더라고.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 오만불손한 아름다움에 매료됐지요.”

 

...스페인 ‘책의 밤’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문정희(68) 시인은 마드리드에서 본 플라멩코를 이렇게 말했다. 그가 몇 년 전 멕시코에서 본 플라멩코는 관능적이었다.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응”’(‘응’ 일부)이라는 시가 그때 나왔었다. 여전히 ‘문학의 도끼’를 들고 자신의 삶을 깨우고 있는 문 시인에게 어떤 깊이가 더해진 걸까. 여성의 대지적 생명력을 꿈틀대는 관능의 언어로, 활달한 사유로 망설임 없이 노래해 온 문 시인은 한국시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열어왔다. 그의 시들이 국내·외에서 계속 애송되는 건 시들지 않는 이런 싱싱함 때문이다.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선 시로 그를 평단 일각에선 페미니즘 문학의 선두로 꼽기도 한다.

한국시인협회장을 맡은 그는 이전부터 외국문학계의 초청으로 해외 나들이가 잦았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부근 호텔의 커피숍에서 문 시인을 만났다. 세르반테스 기일에 맞춰 열리는 스페인 ‘책의 밤’ 행사에 그는 소설가 공지영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했었다.

―스페인어권에서 한국 시에 대한 반응이 궁금한데.

“내 시집 ‘나는 문이다’(2007)가 스페인어 ‘요 소이 문’(Yo soy moon)으로 지난해 가을 번역됐어요. 그 덕분에 지난 2월 쿠바 아바나도서전에 한국 최초로 참가했고 이번에도 초청을 받았죠. ‘나는 문이다’의 전체적인 주제는 생명, 여성, 사랑이거든요. 우리로 치면 홍대 앞 같은 문화의 거리에 설치된 부스에서 그것을 주제로 한 짧은 강연과 스페인 여성작가 3명하고 대담을 했어요. 열띤 분위기였고, 생각지도 못한 호응이었어요. 세르반테스를 낳은 ‘문학 종주국’에서 시가 살아있구나, 존중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문 시인의 시는 10여 개 언어권에서 출간됐고, 2010년엔 스웨덴의 ‘시카다상’을 받았다. 그의 시는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오차가 아주 적다는 평을 듣는다. 주제의 보편성도 있지만, 비비 꼬지 않고 탁 터지는 직선적 시어가 언어 장벽을 넘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 시가 정열적인 스페인어권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스페인이 주는 열기는 제국주의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자부가 있으면서도 플라멩코나 투우로 표현되는 어떤 천부의 광기, 피, 햇살…, 그런 거죠. 스페인 청중들도 내 시에 쉽게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당신은 굉장히 스페인권에 어울린다는 청중도 있었고. 내가 그쪽 문화권인 파블로 네루다 등의 시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내 피 속에는 아마 스페인의 햇살과 피가 DNA처럼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그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본 플라멩코는 달랐나요.

“저는 여성시인이지만 감상을 혐오해요. 하지만 이번에 본 플라멩코는 내가 호남의, 남도의 딸로서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들었던 판소리, 육자배기, 미친 여자들의 춤, 장돌뱅이의 몸부림이 다 있더라고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어요. 내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모어(母語)가 굉장히 영향을 미쳤죠. 호남의 판소리적 과장 어법이랄까, 그런 것이 내 뇌파 속에 심어졌고. 열한 살 때 혼자 광주로 유학을 가, 엄청난 외로움이 밀려왔던 것도 좋은 문학의 모태를 이루지 않았나 싶어요. 6·25전쟁 후 열한 살까지 뛰놀던 황폐한 남도의 자연도 있을 테고.”

그에 따르면 자신을 시인으로 키운 두어 가지 중 어머니와 남도의 소리와 들판이 그 첫 번째다. 이번에 플라멩코는 그것을 건드려 공명시킨 것 같다.

“마드리드 명품거리엘 갔더니 서점이 있고 가장 좋은 테이블에 시집이 있었어요. 스페인의 국력은 쇠락했다지만, 문학의 일등국으로서 충분히 고개가 숙어지더군요. 돌아와 우리 주변에 횡행하는 최하류의 언어들…, 그것들이 흙탕물처럼 느껴졌어요. 정치적 언어들도 좀 세련되고 멋있을 수 있잖아요. 어떻게 입에 그런 언어를 품고 다니는지.”

‘광기와 예술’의 나라에서 돌아와 문 시인은 곧바로 “답답하다”고 했다. 보궐선거와 연금개혁 등으로 정치판의 주판알을 굴리는 뉴스가 온통 시끌시끌하던 때였다. 

―우리 사회가 나이 든 사람이든, 젊은이든 기댈 곳 없이 어렵습니다. 시가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

까요.

“저도 너무 절실하고 평생 해온 질문인데…. 그런데 사회에 이익이 돼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런 시도 있겠으나 저는 실제로 그걸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는 존재함으로써 그 자체가 위로를 줄 때가 있고, 자극을 줄 때도 있는 거지. 꽃이 피었다 해서 그것이 위로를 주려 한 건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고. 시인이 헤쳐오고 가꾸어온 삶과 언어가 그냥 위로가 된다면 그것이 다라고 봐야죠.”

―시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인지.

“사람들이 시를 갈증 하는 데 그걸 덜어주지 못한다면, 시인들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봐요. 시가 어렵고 제대로 닦이지 않은 엉성한 채로 발표되는 게 많아요. 과잉이 더 나빠요. 쉬운 시가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암실에서 혼자 지껄이던 암호문 같은, 무당의 주문 같은, 제대로 발효되지 않은 미성숙 작품을 쏟아내면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키겠냐는 거죠. 나에게 어떻게 쑥쑥 시를 쓰느냐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정말 수천 번 고쳐요. 최근에 내 시를 좋아하는 분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때, 그것은 어렵고 복잡한 시에 대한 실망의 상대적인 효과라고 봅니다.”

그는 지난해 말 발표한 시에서 ‘속도와 물신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시간의 검푸른 이끼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요/이윽고 내 안의 늙은 독재자가 나를 덮쳤어요’(‘독재자에 대하여’ 중)라고 시인으로서의 쉽지 않은 삶을 고백했다.

“제가 성인으로 살아온 50년이 한국사회로서는 속도와 경제가치가 극대화된 시기예요. 이런 사회는 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죠. 이 말도 안 되는 시를 가지고, 이 미약한 향기로 생을 유지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이고, 무모한 모험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을 견디고, 견디고, 거기까지 언어로 투시하는 힘을 가져간다면 흔들리지 않는 자기 것을 성취하겠지요. 제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려고 노력하기는 합니다.”

―어려서부터 ‘문학 천재’로 이름을 날렸는데, 문학적 재능은 어떤 건가요. 문학의 경락(經絡)이 뚫린 분들이 시인이 되는가요.

“중등학교 시절 전국 백일장을 제패하고 막상 대학에 가 전공을 할 때 ‘과연 내게 재능이 있나’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백일장엔 자신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문학과 부딪히니 재능이란 하찮은 거더군요. 결국 삶과생활에서 시가 나오는 거죠. 타고난 재능은 어머니와 남도의 자연과 소리, 어려서의 고독에서 나왔다면, 서울로 와서 공부하고 결혼해 뉴욕 유학까지 공간이 확장되면서 사고도 같이 넓어지며 변모했던 것 같아요. 내 시가 나이가 들수록 힘이 세진다는 것도, 지난한 삶 속에서 단련된 때문이죠.”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결혼이 들어온다/추위와 무더위 속에서도 굳건한 고려와 조선과/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가/든든한 서방님이 들어오신다/신사임당이 어우동에게/시(詩)를 숨기고 나가 있으라 눈짓한다’(‘퇴근시간’ 중 일부) 그는 여성들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시들을 여럿 발표했다. 이로 인해 페미니즘 시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에 대해서는 불편한 기색이다.

“내 시를 페미니즘 시로 묶으려는 건 음모예요. 여성시로, 페미니즘 시로 묶어 문학사에 정식 인양을 안 하려는 것이에요. 내 시가 궁극적으로 노래하려고 하는 게 생명이요 사랑이지, 단순히 남녀의 문제가 아니에요. 페미니즘 시라는 하나의 굴레를 씌워 나를 배제하려는 문학의 기술방식을 단호히 거부해요. 자궁이라는 것이 여성의 몸에 있지만, 인류의 몸에 있는 것이듯 말이죠.”

문 시인의 ‘남편’이란 시는 중년 이상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 사이에서도 자주 읊어진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돌아누워 버리는/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남편’ 중 일부)

“내 시에서 늘 남편은 악역의 모델이죠. 미안하고 고맙죠. 그 사람도 재미있어하고. 그 사람한테 시 ‘남편’에 대해 질문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러면 ‘아내’라는 제목으로 이름만 바꾸면 자기 심정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문 시인의 작품에서 사랑과 욕망은 빼놓을 수 없다.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싱싱하게 몸부림치는/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오는/거대한 파도를…’(‘다시 남자를 위하여’ 일부)도 인기 목록에 오른 시다.

―사랑과 욕망이 여전히 성성하신가요.

“그야말로 치명적인 연애를 못 해본 것, 이것이 늘 시인으로서 열등감이었어요. 몰락, 파멸, 벼랑, 이렇게 치명적인 연애를 한 번 못해 본 시인이 창피하고 그랬었어요. 너무 뻔뻔하게 가정을 유지하는 것 같고, 애들 잘 키우고, 제사도 지내고, 학교 교수도 하고, 그러면서 시 속에서는 온갖 엄살을 떨고. 그런데 최근에는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연애, 이미 한 것 같아요. 충분히 탐미나 관능시를 쓰기에 어렵지 않으니, 구체적 사건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요. 욕망도 여전하지만, 요새 내가 나를 연애하는 여자로 설득하기가 어려워요. 가장 화가 나는 칭찬이 뭐냐면 ‘아직도 너무 고우세요’하는 거예요. 곱다는 것은 노인을 묘사하는 단어니까. 너무 매력 있어요. 이게 좋아요. 치사해서 에이, 관둬라. 연애 따위 차버리기로 했어요. 그런데 지뢰를 사방에 깔아 놓았으니 누가 밟으면 막지는 않겠어요, 하하하.”

그는 이미 시로 답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되고 말았다//(…)사랑하는 사람아/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비망록’ 중)  

 

 

<문화일보(엄주엽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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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文貞姬, 1947 ~ )

생애 1947년 5월 25일 ~
출생 전라남도 보성
분야 문학 작가

시인.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 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삶의 생명력과 의미에 대한 관찰 및 통찰을 시로 나타냈으며, 최근에는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을 담은 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1973),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 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 주세요”(1990), “찔레”(2008) 등이 있다.

작품

작은 부엌 노래
이 시는 여성이 불평등한 결혼 제도와 가부장적 억압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여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함을 시사해 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부엌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엌은 여성들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고, 집안일 역시 여성들의 몫이라는 불평등한 고정 관념이 이어져 왔다. 화자는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과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을 후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 촉각적 심상 등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해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단순히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나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여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천형의 덜미를 푸는’과 ‘허물 벗는 소리’ 등을 통해 여성이 불평등한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의 주체로서 당당히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국어) 천재(정재찬), 상문

비망록
이 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남보다 나를 더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된 화자의 고백과 자기반성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심지어 화자는 '별'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에 그로 인한 후회가 '돌'처럼 가슴에 아프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화자가 그러한 삶을 살아왔기에 '허둥거리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비망록'인 것도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기록하며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화자의 다짐을 반영한 것이라 볼수 있다.

찬밥
이 시의 화자는 아픈 몸을 일으켜 '찬밥'을 먹고 있다. '찬밥'은 어머니의 사랑을 일깨워 주는 소재이면서, 항상 가족들에게 따스한 밥을 먹이고 정작 자신은 '찬밥'을 드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화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부러 '찬밥'을 먹으면서 몸에서 제일 따스한 사랑을 품던, 신(神)을 대신하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러한 '어머니'라는 위치는 현재 화자의 위치와 같다. 자신의 처지가 곧 한 가정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라는 시어를 한번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사람', '그녀'로 대신 한다. 그것은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대상이 화자의 어머니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시를 읽는모든 이의 어머니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 또한 '찬밥'을 먹으면서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스스로 어머니로서의 삶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화자가 '세상의 찬밥'이 되었다는 의미는 세상에서 '어머니'에 대한 평가가 '찬밥'과 같지만 그 안에는 '희생과 사랑'이 가득하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 시의 화자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흙의 이름이라고 드러내며 흙에 대한 예찬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흙 흙 흙'하고 흙을 부르면 '심장 저 깊은 곳으로 부터 /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 부터 /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오며,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하며 흙에 대한 감흥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화자는 도공이 흙으로 달덩이를 낳고 농부가 흙에 씨앗을 뿌려 한 가마의 곡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바탕으로 '생명의 태반'이며 '귀의처'인 흙의 속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모성성' 역시 시인이 여성의 삶에 대한 통찰을 주로 작품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하여 해석할 수 있다.

퇴근 시간
이 시는 남편이 퇴근하는 것과 동시에 어우동과 같은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로 바뀌어야 하는 가부장제 속의 여성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표면에 그려진 가정의 모습은 '종요로운 가화만사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곳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는 억압적인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반어일 뿐이다.
'굳건한 고려와 조선', '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은 면면히 이어온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가부장제의 현실 속에서 여성은 시를 쓰고자 하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이 퇴근한 이후로는 그러한 욕망을 감출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러한 욕망이 완전히 숨겨지질 않아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풋고추는 '난도질'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찌개는 끓어 넘치기까지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겨울 일기
이 시는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이별의 계절은 하필이면 차갑고 추운 겨울이다. 임과 이별하게 된 시적 화자는 그저누워서 죽을 것 같은 고통만 반추 동물처럼 반복해서 씹으면서 무기력하게 겨울을 보내고 있다. '누워서 편히 지냈다.'라는 것은 반어법으로, 실제로 편하게 지내서가 아니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로 겨울을 보냈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고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도 아무 소용없이 지나가고, 이젠 마음 속에 어떤 분노나 열정도 남아 있지 않은 채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죽음만을 생각하며 누워 있는 것 뿐이다. 모든 것에 관심을 끊고 체념한 화자의 모습은 이별을 겪어 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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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가족·꿈·사랑 가족 여러분! 프론티어 기자단 6기 임윤경입니다. ^^ 광화문글판 25년을 맞아 지난 시간에는 광화문글판을 빛낸 시인, 정호승 시인과의 만남을 가졌는데요, 이번에는 문정희 시인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여러분께 소개해드리려 해요.

 

교과서에서나 만나 뵙던 분들을 직접 만나 무척 설레고 긴장한 나머지 프론티어 기자단이 던진 우문에 문정희 시인께서는 너무도 멋진 현답을 해주셨는데요, 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광화문글판, 그리고 시인의 문학관, 문정희 시인이 우리 청춘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지금부터 그 모든 것을 펼쳐보도록 할게요!

 

 

 

 

 

문정희 시인은 진명여고 재학 중 첫 시집 『꽃숨』(1965)을 발간했고,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답니다. 이후 『문정희 시집』(1973),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어 주세요』(1990) 등 수많은 시집을 냈으며 1975년 시극집 『새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답니다.

문정희 시인은 국내의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2012년 프랑스 퀼트르(France Culture)의 인기 프로그램에 번역 시선집 『찬밥을 먹던 사람』이 소개되었고, 최근에는 프랑스의 예술전문방송 아르테 텔레비전이 <기적을 이룬 한국>이라는 5부작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문정희 시인을 취재하기도 했다고 해요. 문정희 시인은 자유와 고독을 화두로 삼아 시를 지어온 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데요, 여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여성의 존재를 고찰해오면서 '여성적 생명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도 손꼽히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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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곳을 여행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올 때면, 그만큼 나의 영혼도 더 넓어졌기를, 그리고 책은 언제나 나와 가장 내밀한 혈연을 유지하기를 기도했다. 가을은, 빛나는 시어, 알알이 여문 지혜로 내 안에 숨은 아름다움을 깨우는 계절이다. 한 권의 책으로,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책 없는 행복은 없다.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첫 시집『꽃숨』을 발간했다.
미당 서정주의 문하에서 시를 배웠으며, 동국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일찍이 <현대문학상>을 수상했고 <소월시문학상>과 <정지용문학상>,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문학 포럼에서 작품「분수」로 <올해의 시인상>을 받았다. 2010년 스웨덴의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헨리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다산의 처녀』 외에 시선십『지금 장미를 따라』 등이 있다. 영어 번역시집『Woman on the terrace』외 다수의 시집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세계 10여 개 언어권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춘에 대한 당부를 끝으로, 지금까지 광화문글판을 빛내주신 문정희 시인과의 만남을 가져보았는데 어떠셨나요? 프론티어 기자가 실제로 만나본 문정희 시인은 변함 없는 삶의 열정으로 가득 찬 매우 멋진 분이셨답니다. 가꿈사 가족 여러분도 문정의 시인의 열정을 가득 느껴보셨기를 바라요. 마지막으로 2009년 광화문글판 겨울편을 빛내주었던 문정희 시인의 <겨울사랑>을 소개해드리며 마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0^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 <겨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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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인협회(회장 문정희)가 반년간(半年刊) 시 전문 웹진 『시인불멸』을 창간, 공개.
시인협회가 창설된 이래로 58년만에 오프(Off Line) 문예지가 아닌 웹진으로 공개해서 시단

에서 크게 주목하고 있다. 사실 『시인불멸』의 창간은 지난해 타계한 故 김종철 전 한국시인협

회장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김 전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시인협회의 새로운 도약과

한국 시단의 발전을 을 위해 협회에서 주관하는 시전문지가 절실하다고 판단해서 실무팀을 꾸

리고 전폭적인 헌신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지금의 문정희 회장이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시전문 웹진(Webzine)을 한국시인협회 홈

페이지와 연계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김 전 회장은 생전에 쓴 창간사에서 "외부의 불필요한 말들이 섞이지 않은, 오직 시와 시인만을

위한 잡지가 창간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라며 "의미 있는 혁신을 담는 시 전문지로 이어지

기를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웹진 『시인불멸』 편집위원:  
김요일 시인, 박정대 시인, 박상순 시인, 박후기

시인, 김이듬 시인, 황병승 시인, 김도언 시인, 이해존 시인

  김요일, 박정대, 박상순, 박후기, 김이듬, 황병승, 김도언, 이해존 시인 등이 편집위원으로 위촉

되어 1년 가까운 준비기간을 거쳐 공개된 '시인불멸'이라는 제호는 시인은 언제든지 소멸할 수

도 있지만, 소멸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각오의 표현이다.

 

  이번 창간호에는 강은교, 김영승, 함성호, 허연, 함기석, 김중식, 조말선, 조동범, 이준규, 김산,

최창균, 류근, 고영민, 김지율, 이제니, 신동옥, 박장호, 리산 등의 18명의 의 다양한 신작시를 비

롯하여 기획특집으로 한국시인협회 58년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성찰과 ‘시대 정신과

시’라는 주제의 대담이 실렸으며 평론을 겸하고 있는 이재훈 시인의 ‘우리 시사의 대표 시론-허

만하 편’, 시단의 어른 정진규 선생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으며 또한 박은정 시인

이 장석주 시인과 대화를 나눈 '시인 선배를 만나다', 편집위원인 황병승이 싱어송라이터 요조

를 만나 대화를 나눈 '예술가의 초상', 김경주 시인의 24시간을 밀착 취재해 선보이는 '시인의 2

4시' 등이 담겨 있다.

한국시인협회에 의해 새로이 창간된 웹진 『시인불멸』은
한국시인협회 홈페이지
(htt
p://www.koreapoet.org)에 접속하면
무료로 연중 24시간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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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의 꽃으로서의 자유와 고독을 노래하던 제가 한국시인협회의 깃발 아래 섰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시인협회라는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속도와 물질 가치로 혼탁한 이 시대, 시인은 심해 잠수부와 같이 침몰한 세상을 인양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시인들이 모인 한국시인협회는 여러 의미에서 지금 더욱 특별하고 절박한 의미를 갖습니다.

 

좋은 시는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며,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불확

 

실한 것들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합니다.

 

좋은 시인은 삶과 세계를 통찰하고 그것을 선험과 직관의 언어로 세상에 돌려주는 비둘기들입니다.

 

그런 시인들이 있음으로 세상은 보다 밝아지고, 우리 삶의 안과 밖은 풍요해집니다.

 

시인협회는 진정 살아 있는 문학을 지향해야 합니다.

 

문학은 늘 젊습니다.

 

새로운 숲을 탐험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문명과 네트워크가 시대를 점령한다 해도 세계를 언어로 호명하여 정화시키는 시의 감동은 영원합니다.

 

세련되고 격조 있는 한국의 시에 세계의 눈들이 쏠릴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임기 동안 고 김종철 회장이 꿈꾸었던 열정적인 계획들을 잇고 가다듬어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시의 달 제정, 시 잡지 <시인불멸> 발간들에 더 보태 한국 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 시낭송,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수의 대학과 문화원 등을 통한 번역 소개 및 시낭송 등을 추진하여 세계를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있을 때만이 시인입니다.

 

회원 여러분의 진정한 시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2014년 9월

 

한국시인협회 제40대 회장 문 정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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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제39대 故 김종철 회장의 별세에 따라 2014년 8월 26일(화) 평의원회의(김남조 시인 외 11인)를 열고 협회 現심의위원장이면서 동국대 석좌교수인 문정희 시인을 제40대 회장으로 추천, 9월 4일(목) 등기이사회의 인준을 마침.
신임 문정희 회장은 전임자의 잔여 임기 2016년 3월까지 임기를 수행.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시인과 함께


     목숨의 노래 문정희 

 

당신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습니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두고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습니다

 

맨발로 당신과 함께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타오르다 죽고 싶었습니다

 

 

 

물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 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손톱                                                     

 

지는 저녁해를 마주하고 앉아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벌써 하얀 반달이 떠오르는

어머니의 손톱을 자르면

세상의 바람 소리도

모두 잘리어나간다

어쩌면 이쯤에서

한쪽 반달은 이승으로 떨어지고

또 한쪽은 어머니 따라

하늘로 가리

시시각각으로 강물은 깊어가는데

이제 작은 짐승처럼

외로운 어머니의 등

은비늘처럼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톱이 피울

저 먼나라의 꽃은

무슨 색일까?

무슨 꽃이 어머니의 꽃밭에 피어나

날마다 그녀가 주는 물에

나처럼 가슴이 젖을까.

흔들리며 흔들리며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시간 2                                                   

 

갈수록 갈수록

멀기만 하다. 

 

너는 내게 있어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다. 

 

위로 치솟을 땐

어지러웠고 

 

부서져내릴 때는

신이 났다. 

 

그 몰락조차도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빠져

부드러이

죽어갔다. 

 

 

 

알몸노래                                               

 - 나의 육체의 꿈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였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우리들 마음속에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 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치른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유리창을 닦으며                                      

 

누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유쾌한 사랑의 노래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때문이었다

뻘 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 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별 이후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넣는 일이다.

옛날 옛날에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전보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창백한 달이 떠 있는

신새벽이어도 좋으리라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의 놀이처럼

싱거운 화면, 그 위에 꽂히는

한 장의 햇살이고 싶다

 

사랑이라든가

심지어 깊은 슬픔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젊은 날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젊은 날에도

내 어깨 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손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 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이름이 덧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 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였다

온 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 장의 플래카드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젊은 사랑                                            

- 아들에게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 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나는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탕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제비를 기다리며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조등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횐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 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 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찬밥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럭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축복의 노래 - 문 정 희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첼로처럼 살고싶다   - 문정희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싶다

매캐한 담배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싶다

 

기껏해야 줄 몇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사랑 신고    -문정희

 

사랑은 자주 불법 위에 터를 닦고

행복은 무허가 주택이기 쉽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철거반이 오기 전에

마치 유목민의 천막처럼

이내 빈 터만 남으니까

 

가끔 불법 유턴을 하여

위반과 비밀 위에 터를 닦지만

사랑을 신고할 서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를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진실로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문득 이 도시의 모든 평화가 위조 같다

어떤 사랑으로 한번

장렬하게 추락할 수 있을까

맹목의 힘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볼까

사람들이 가끔

목젖을 떨며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사랑, 진정한 고통, 진정한 희망은

어떤 서류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오늘 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수목사이로   - 문정희 시인

 

왜 나는

저 쭉 쭉 뻗은

수목들을

서방삼을 생각을 못 했을까

 

손가락을 쫙 펴고

뜻도 없이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아이들 그림만 쳐다보았을까

 

시간은 레먼 같은 것

처음엔 향긋한 냄새도 풍기지만

찔금찔금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러나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느니,

 

하늘을 찌를 듯한

검초록을 두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수목이나 서방삼아

크낙새 같은 새끼들이나

주르르 낳았어도 좋았을 것을

크낙새 같이 귀한 자식들

퍼덕퍼덕 길러 봐도 좋았을 것을

 

사람의 가을-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물새   - 문정희

 

저물녘 석모도 앞바다에 떠 있는

저 물새는 한채의 암자 같다

깊고 푸른 멍 같은 바다를 깔고 앉아

가파른 물살을 잠재우는 것을 보라

 

쉴새없이 기우뚱거리는 마음

차가운 심연에 담그고

부르튼 발로 자맥질하여

물 위에 암자를 세운 저 새는 누구일까

 

나인지도 모른다

산허리를 돌아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

날개로 허공을 밀며 천리를 달려온 저 새는

 

지금 움직이지 않고

홀로 또 천리를 가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생이란 물 위에 뜬 하루라

바람의 발목을 잡고 출렁이는

생이란 끝없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고달픈 아랫도리 물에 담그고

문득 좌선에 든 저물녘

물 위에 뜬 암자를 향해

나는 조바심처럼 돌을 들어

힘껏 화두 하나를 던진다

바다의 살점이 불끈 고통처럼 치솟는다

날개를 펼치고 암자는

불현듯 먼 하늘로 사라진다

 

연인에게 --문정희

 

연인아, 여름이 오면

손잡이가 빨간 가위 하나 들고 와

함부로 뻗친 가지 척척 잘라다오

부질없는 내 열망을 잘라다오

수북이 땅 위에 나뭇가지 쌓이면

그 가지로 허공에다 새집 한 채를 지어다오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며

노래를 알처럼 까는

새 한 마리 키우리라

 

한밤중에 ―문정희 

한밤중에 번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단숨에 내 심장에서 
붉은 루비 같은 죄들을 꺼내 
검은 하늘에 대고 펄럭이었다 

낮 시간 동안 그토록 맑은 햇살을 풀어 
푸른 숲과 새들을 키우던 
저 산이 보낸 거라고는 믿기 어려운 
번개가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부들부들 떨고 잇는 내 심장에서 
붉고 선명한 루비들을 꺼내 
검은 하늘에 뿌렸다 

내일 아침 나의 침대에는 
한 사람의 죄수가 밤새 
깊고 슬픈 자술서를 쓰다 
쓰러져 있으리라 

문정희 시인의 시는 술술 잘 읽혀 내려간다. 관념적인 상징이나 작위적인 기교 없이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게 씌어진 솔직하고 건강한 시를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인용시 「한밤중에」서도 ‘한밤중에 번개가 나를 찾아왔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번개와 천둥의 원인을 밝히는 과학적인 설명에 상관없이 번개 치는 밤이면 누구나 죄의식에 한 번쯤 사로잡혀 보았을 것이다. 번갯불이 번쩍하고 공포의 순간인 몇 초가 지나면 벼락 떨어지는 소리, 천둥소리가 한바탕 나고 누군가 나대신 죄값을 치르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몸을 낮추거나 눈을 감고서라도 공포의 순간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문정희 시인은 한밤중 찾아온 번개를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한다. 번개의 칼로 심장에서 죄들을 끄집어내도 피하지 않는다. 두렵고 끔찍한 장면이 ‘붉은 루비 같은 죄들’이라는 환상적인 표현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의 죄의 모습은 투명하고 빛이 아름다운 일급 보석인 루비인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짓는 죄가 무슨 죄가 될 수 있느냐는 신에 대한 항변의 대가물이기 때문이다. 신이나 초인(超人)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숱한 죄의 덩어리로 보이겠지만,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만들어 낸 조물주에게 따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낮에는 맑은 햇살을 풀어내고 푸른 숲과 새들을 키우며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랑하던 신(산으로 상징된)이 한밤중에 어떻게 그 죄값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인지, 시인은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신이 각인시킨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인의 심장에서 신은 죄를 끄집어내 검은 하늘에 뿌린다. 검은 하늘에 던져진 붉은 루비는, 즉 죄의 실체는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 사람의 ‘죄수’가 되어 밤새도록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깊고 슬픈 자술서를 쓰’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번개나 천둥이 요란하게 치는 밤이면 누구나 원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너의 죄를 고백하라고 하늘에서 호통을 치는 것 같은 소리로 들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문정희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원죄의식을 자연현상을 통해 명료하게 그려내, 벗어날 수 없는 원죄의식에 대한 절망감과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사랑만을 위해 꿈꾸는 완전한 고립 
―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이 시는 5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노래, 사랑을 위한 노래이다. 흔히 사춘기(思春期)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부르는, 사랑을 위한 '소망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쉽고 평이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화자는 줄거리를 어렵게 이끌어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일기장 한켠에 적어두고 싶은 비망록(備忘錄)처럼 화자는 숨김없이 솔직한 감정들을 쏟아놓고 있다. 

화자는 시라는 구조나 틀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대신에 감정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맡긴다. 화자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얗게 눈이 덮인 겨울, 사람들의 감탄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변해갈 때에도 화자는 자신이 설정한 고립의 자리, 즉 '동화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도 않은 상태이고, 화자가 눈부신 고립을 꿈꾸며 한겨울 한계령을 넘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미완성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못 잊을 사랑을 생각하며 미완성이나마 한바탕 사랑의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이제 다섯 개의 연을 따라 화자가 부르는 연가(戀歌)를 살펴보기로 하자. 화자가 그리고 있는 동화의 나라에서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아도 좋으리라. 

먼저, 첫째 연에서 화자는 하나의 꿈을 꾼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꿈은 장난삼아 꾸어보는 꿈일 수도 있고, 현실의 외로움을 타개할 운명의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볼 때, 진지하고 절박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 절박함은 화자의 톡톡 튀는 '끼'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화자는 대뜸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어한다. 화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삶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을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뜻밖의 폭설이다. 화자는 구차하게 계획된 삶보다는 운명처럼 묶여 돌아가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뜻밖의 폭설이라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묶여들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뜻밖의 폭설을 기대하고 있지만, 화자가 설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볼 때, 화자에게 있어서 폭설은 결코 '뜻밖의' 것이 될 수가 없다. 화자가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한계령을 넘는 시간적인 배경이 한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으로 설정된 한계령은 겨울철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리는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화자에게 못 잊을 사람이 있어서 함께 고개를 넘는다면, '뜻밖의 폭설'이 아닌, 처음부터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일상적인 폭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화자는 능청스럽게도 '뜻밖의 폭설'을 운운하며 자신이 꿈꾸는 사랑을 색다르고 운명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4행 이하에서 화자는 폭설을 만나 벌어질 제반 상황들을 소개한다. 가장 객관적인 보도 역할을 하는 뉴스들은 앞다투어 기록적인 폭설을 알리고, 쌓인 눈 때문에 자동차들은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야단법석을 피운다. 그러나, 7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자는 그 무질서한 현장 속에서도 은근히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 그 상황이 좀더 악화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 인간의 힘으로는 얼마간 극복할 수 없는 그 자연이 주는 한계를 못 이긴 척 받아들이며 묶이고 싶어 안달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화자는 다른 사람들의 불편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을 위한 짜릿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2연은 화자의 작은 소망이 좀더 구체화되고 있다. 그(혹은 '그녀', 이하 '그'로만 표기)에게 고립은 오히려 눈부신 것이다. 그가 꿈꾸던 대로, 모든 것들이 눈 속에서 단절되어 오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나라는 동화의 나라이다. 그가 꿈꾸었던 대로 모든 일들이 척척 풀려나가는 행복한 나라이다. 이제 화자가 꿈꾸는 것은 물리적으로 그의 발이 묶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운명이 묶이는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소망은 못 잊을 사람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황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악한 상황을 빗대어 창조적으로 사랑을 만들어나가려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을 꿈꾸고 사랑만을 생각하는 화자의 지고한 사랑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3연에 들어서 화자는 날이 어두워지자 하얗게 쌓인 눈에 취해 감탄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공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이제 저마다 두려움의 모습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지만, 그럴수록 화자는 그 시간이 신나기만 하다. 그가 꿈꾸던 완전한 고립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도 도리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헬리콥터가 출동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하늘을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향해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눈 속에 꼭꼭 숨어 그 고립의 순간을 즐기겠다는 것이다. 헬리콥터가 인명 구조를 마치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야생의 새들과 짐승들을 위해 먹이를 뿌릴 때에도 구조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4연은 3연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고립의 상황 속에 남아 있을 것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 산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나무들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 역시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고 생명의 힘이다. 

전쟁터에서 젊은 군인들의 심장을 향해 포탄을 퍼부어 대던, 무섭고 무자비하던 헬리콥터들이 이제는 역할을 바꾸어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사람만이 아닌 야생의 동물들에게까지 자비롭게 일용할 양식을 뿌려줄 때에도 화자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주는 인위적인 혜택을 거부하고, 화자는 자연이 가져다 준 운명, 즉 폭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자신에게 닥쳐온 폭설이 결코 시련이나 아픔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축복의 순간을 즐기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몸둘 바를 몰라하는 화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진정 그 사람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사람은 흔치 않으니, 우리의 삶 속에서 뜻밖에 찾아오는 아픔과 시련은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시험하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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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 이육사 시 중문(中文)으로 읽다... 2016-11-15 0 2976
438 타고르 詩를 보다... 2016-11-14 0 3340
437 남미주 아르헨티나 문학 거장 - 보르헤스 2016-11-07 0 2743
436 미국 녀류시인 - 에밀리 디킨슨 2016-11-07 0 3970
435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사랑할 날 얼마나 남았을가... 2016-11-06 0 4400
434 해외 시산책 2016-11-06 0 2822
433 미라보 다리 아래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2016-11-06 0 3005
432 아름다운 세계 명시속에 흠뻑 빠져나볼가... 2016-11-06 0 3920
431 프랑스 상징파 시인 랭보 시 다시 새기다... 2016-11-05 0 3496
430 "세계는 소리와 맹위와 불로 가득 차고"... 2016-11-01 0 2730
429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2016-11-01 0 3110
428 장편 서사시 <<백두산>> / 조기천 2016-11-01 0 4268
427 미국 "생태주의" 방랑시인 - 게리 스나이더 2016-10-28 0 4310
426 아랍 "망명시인", 령혼의 나팔수 - 니자르 카바니 2016-10-28 0 2748
425 타이타닉호는 침몰되지 않았다... 2016-10-20 0 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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