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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동시는 생활 가운데서 받아 안은 남다른 느낌을 동심에 려과시켜 행과 련을 나누어 쓴 운문을 말한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아가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조선에서는 가사(노래말)앞에 문학이라는 규정어를 덧붙여 <<가사문학>>이라고 하면서 가사를 아동시가의 한 형태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가사는 동시의 한 형태라고 인정할수없다고 인정하는바이다.
둘째,문학적인 예술동요는 그 예술적 가치에 근거하여 동시에 망라시켜 연구하기로 한다.
셋째, 문학적인 예술동요에 곡을 붙이면 그것을 <<가사>>라고 일컬을수는 있지만 그 본질적인 속성은 문학의 한 형태라는 특징은 변함이 없게 된다 그러나 가사에서 곡을 떼면 그 가사는 문학적인 예술동요가 아니라 말그대로 가사로 될뿐이다 하기에 문학적인 예술동요와 가사는 차원이 다른 형태의 글임을 먼저 리해할 필요가 제기된다.
아동문학은 원래 대상성이 강한 문학이다 그런데 동시는 그 대상성이 더더욱 강한 문학의 한 형태로 된다.
대상에 따라 동시를 크게 나누면 유년동시,동년동시,소년동시로 나눌수가 있다 그것을 더 세분화하면 회화적 동시,화적인 동시,동화적인 상상동시(의인화동시),환상동시,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사색적인 철리동시,은유적인 상징동시 등 여러 가지로 나눌수가 있다 동시는 원래부터 이렇게 대양화된 문학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한국 동시단에서는 포스터모더니즘 표현기법을 동시창작에 받아들여 동시의 대상성을 도외시하고 난해동시경향으로 나간적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 조선족 동시단에서는 은유적인 상징동시만을 동시라고 주장하는 동시 단일화경향이 나타나 동시창작을 오도한적이 있었다.
한국 동시인들은 동시의 본질을 리해하고 동시를 아이들과 접근시키며 난해시 경향을 극복하고 동시다양화를 주장하면서 풍만한성과를 올리였다.
중국 조선족 동시인들도 동시창작의 단일화경향을 배격하고 동시의 대상성에 토대하여 동시다양화를 주장하면서 풍만한 성과를 올리고있다.
다양화된 동시형태
동시는 당양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1,회화적인 동시
회화적인 동시란 시적대상을 동심적인 시각에서 회화적인 화폭으로 대상화하면서 짙은 시적인 정서를 안받침해주는 동시를 말한다.
원숭이
한국 문삼석
원숭이는
날 때부터
할아버지래
주름살
오골조골
할아버지래
시인은 원숭이의 주름살 하나를 집중 조명하면서 <<날때부터 할아버지>>란 시적발견을 하여 <<오골조골>>한 주름살을 확대조명하면서 회화적 그림을 그려 해학적인 정서를 유발하여냈다.
병아리
중국 김선파
반짝반짝 금모래
콕 찍어먹고
삐악삐악 병아리
샛노란 금병아리
반짝반짝 은모래
톡 찍어먹고
뾰옥뾰옥 병아리
새하얀 은병아리
시인은 노란 병아리와 하얀 병아리를 동심적인 시각에서 어여쁘게 대상화하면서 아이들 눈앞에 깜찍한 그림을 그려 주어 사랑의 정서를 유발하여 주고있다.
이런 회화적인 동시는 유년기 아이들과 동년기 아이들이 즐기는 형태의 동시들이다.
2,화적인 동시
화적인 동시란 동심에 맞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고도로 간추려 정서적으로 표현한 동시를 말한다.
아침밥
한국 정두리
옆집에 사는
내 친구 준이
아침밥
무얼 먹었는지
난 알아
현관 문틈으로
새여 나오는 냄새
너
칼치구이 먹었지!
여기서 시인은 친구 준이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가를 알아 맞히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그리고 도약적으로 펼쳐 보였다.
눈물 한방울
중국 한석윤
으스름
달밤
엄마를
기다리던
아기가
하나
문설주에
기대여
살풋
잠들고
눈귀에
매달린
눈물
한방울
아기를 대신하여
엄마를
기다리고
시인은 아기가 엄마를 기다리다가 문설주에 기대여 잠든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대상화하였다 그러면서 아기를 대신하여 엄마를 기다리는 눈물 한방울을 조명하면서 시적인 이미지를 창출하여냈다.
이런 화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서술 쪽보다는 암시적인 언어를 아끼면서 축약하고 주제를 강조하면서 내재률을 살리고 여운을 남기면서 공감을 얻도록 이야기를 도약적으로 간추려 예술적인 승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한국 신현득선생은 이야기를 하였다.
하기에 화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이야기 전반 과정을 시시콜콜하게 피루면서 쓰면 절대 아니된다 그러면 동시가 지루하게 되고 깜직한 맛이 없어진다 하기에 이야기의 한순간을 집중 조명하면서 도약적인 서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 그 자체에 동심적인 서정이 어리여 있어야 한다.
이런 화적인 동시는 유년기 아이들과 동년기 아이들이 제일 즐기는 동시형태들이다.
3,동화적인 상상동시(의인화동시)
동화적인 상상 동시란 모든 사물과 동식물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하는 물활론적인 사유방식에 토대하여 쓴 동시를 말한다.
해바라기와 채송화
한국 문삼석
담 우에서 해바라기가
올망졸망 놀고있는 채송화 보고
-아유 귀여워라
몇 살이나 먹었을가?
하며
노랗게 웃으니까
담 아래 채송화가
하늘 덮고 있는 해바라기 보고
-와! 크다
백살도 넘었나봐!
하고
눈을 소곳 떴어요.
여기서 시인은 해바라기와 채송화를 인격화하고 그들더러 오묘한 대화를 하게 하였다 그것도 해바라기가 채송화를 보고 업신여기며 <<귀여워>><<몇살이나 되였을가?>>하는 오만스러운 태도와 채송화가 해바라기를 보고 놀라<<와 크다>><<백살도 엄었나봐>>하는 채송화의 천진한 태도를 비교적으로 돋보여주어 아이들더러 그 뜻을 더듬어 보도록 꾀하고 있다.
봉투와 풀
한국 문삼석
-난 순이 마음 다 안다
말해 볼가?
봉투가 입을 벌리고
으스댔어요
-안돼
그건 비밀이야
풀이 봉투 입을
꽁 막아버렸어요
여기서 시인은 봉투와 풀을 인격화하여 서로 대화하면서 편지봉투에 풀을 붙이는 현상을 엉뚱한 이야기로 만들어내여 아이들에게 무척 흥미를 돋구어주었다
이런 동화적인 상상 동시는 유년기와 동년기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시형태로 된다.
4,환상동시
환상동시란 아이들의 천성으로 되고있는 엉뚱한 환상을 노래한 동시를 말한다.
하늘
한국 손관세
옹달샘에
가라앉은
가을 하늘
쪽박으로
퍼마시면
쭉
입속으로
들어가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시인은 현실 생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실을 환상세계에서 다루면서 쪽박으로 마시는 물을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라고 하여 아이들더러 놀랄 정도의 매혹을 자아내고 있다.
양떼와 흰구름
중국 최문섭
푸르른 들판에 흰구름 흐르네
쉼없이 쉼없이 앞으로 흐르네
푸르른 들판이 하늘인줄 알고
흰구름 내려와서 노니는게지
파아란 하늘에 양떼가 떠가네
쉼없이 쉼없이 둥둥 떠가네
파아란 하늘이 풀밭인줄 알고
양들이 풀먹으러 올라간게지
시인은 환상을 도입하여 현실 가운데서의 양떼와 환상 가운데서의 흰구름을 넘나들면서 이른바 혼돈세계에서 양떼의 시적이미지를 발견한 시적주인공의 희열을 노래하고있다.
5,사색적인 철리동시
사색적인 철리동시란 시적대상을 보고 사색을 굴리면서 아이들의 정도에 맞는 그 어떤 철리적인 시적발견을 노래한 동시를 말한다.
먼길
한국 윤석중
아기가 잠드는걸
보고 가자고
아빠는 머리 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걸
보고 가자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자고
시인은 아기와 아빠지간의 애틋한 사랑을 묘사하면서 그 묘사속에 깃들어있는 시적내용을 사색하게 한다 도대체 시인은 무엇을 노래하고 있을가? 도리머리하면서 생각하던 아이들은 아빠와 아기 사이의 따뜻한 정을 노래했구나 하는것을 알아 맞히게 된다.
황소
중국 김수복
암탉은 꼬꼬댁
알 낳았다고 제 자랑
멍멍개도 멍멍멍
집 지킨다고 제 자랑
수레 끄는 황소만은
말없이 뚜벅뚜벅
시인은 제 자랑에 이골이 난 수탉과 멍멍개를 풍자하고 하고 수레 끄는 부지런한 황소의 모습을 독자들 눈앞에 선히 그려놓았다 그러면서 어린 독자들더러 그 뜻을 음미하도록 하고있다 시인은 좋은 일 하면서도 자랑할줄 모르는 황소의 겸손한 성미를 예술적으로 칭찬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동시는 동년기와 소년기 아이들의 구미에 맞는 동시형태로 된다.
6,감각적인 이미지동시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는 시적인 대상에 대하여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적으로 대상화하면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동시를 말한다
시내물
중국 김철호
솔밭을
지날 때면
파랗게
파랗게
진달래산
지날 때면
빨갛게
빨갛게
마을앞
지날 때면
하얗게
하얗게
여기서 시인은 시적대상 시내물을 노래하고있다 그런데 시내물을 직접 노래한것이 아니라 시내물에 비낀 소나무,진달래,마을에 초점을 맞추고 수채화같은 시각적형상을 그려내면서 조선족의 심미특징에 맞게 조선족이 살고있는 생활환경을 미화하여 주고있다.
가을
한국 윤미현
토옥
튕기고 싶은
주욱
그어보고싶은
와와
웨쳐보고싶은
푸웅덩
뛰여보고싶은
머언
먼
가을 하늘
여기서 시인은 맑고 푸른 가을 하늘,투명하고 무형체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감각적인 느낌을 발현한것이 이동시의 성공한 비결로 된다.
형체를 가진 유리알같은 하늘을 토옥 튕겨보고 싶고 종이 같은 하늘에 주욱 금을 그어보고 싶고 끝없는 공간을 향하여 와 소리 쳐보고 싶고 푸른 바다같은 하늘에 풍덩 뛰여들고 싶은 그런 느낌을 하나 하나 정리해 가면서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창출하여냈다.
산새 발자국
한국 방원조
얼마나 발이 시렸는지
눈밭을 콩콩
밟고갔구나
눈덮인
이 세상 어디서
얼음 박힌
그 작은 발을
녹이고 있는지
아픔이 아픔을 밟고
작디작은 발자국
산새
발자국
이 동시에서는 작은 산새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시적화폭으로 그려내면서 맨발로 눈밭을 밟고간 산새의 촉각적인 느낌을 최대한으로 확대조명하고 시적정서를 풍만하게 만들었다다.
감각적인 이미지동시는 시적대상에 대한 직서적인 서술이 아니라 형상적인 간추린 묘사를 통하여 감각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는것이 그 특징으로 된다 하기에 이런 동시는 시적언어에서 시적 뜻을 직접 감지하는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토대로 한 시적형상에서 시적인 뜻을 사색 끝에 감지하게 되는것이다.
이런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는 동년기와 소년기아이들이 다가서는 동시형태로 된다.
7,은유적인 상징동시
은유적인 상징동시는 전통적인 동시의 직서적인 표현방식을 반역하고 원관념 a를 보조관념b 로 표현하는 표현기법으로 쓴 동시를 말한다.
이때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상사성과 류사성이 있어야만 그 은유가 성립된다는 점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런데 그런 상사성과 류사성은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에 의한것이 아니라 사물지간의 표상의 류사성에 의존한다는 점을 명기하여야 한다.
벚꽃
한국 선용
가지마다
날개를
파닥이는
나비
나비
흰나비
놀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는
별
별
하얀 별
여기서 시인은 <<벚꽃>>이라는 원관념을 보조관념 <<나비>>와 <<별>>로 병치은유를 시도하여 시적이미지를 창출하였다 흔히 이런 은유적인 상징동시를 쓸 때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번져가면서 깡깡 마른 수학적공식으로 대입되기에 시의 서정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이를테면 <<가지는 시계추>>라고 은유만 시키고 말면 시의 서정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벚꽃>이 <<나비>>와 <<별>>로 전이하는 과정에 예술적이며 형상적인 처리를 하여 시의 생명으로 되는 서정성을 한껏 살려내고 있다.
현대시는 시적언어를 비틀어 굴절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많이 쓰고 있다.
시골학교
한국 리상교
텅빈 산골 운동장
물소리만 나와 놀고있다
삐걱삐걱 새여나오던
풍금소리는 창틈에 녹쓸고 d
아이들이 닦아놓은 창에
거미줄 친 하늘이 끼워져있다
아이들의 푸르던 지껄임은‘
락엽으로 날려보내고
허전한 바람 한점
빈 그네에 앉아 옛생각에 잠긴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해가
홀로 산골을 서성이고 있다
이 동시는 난해동시에 속하는 동시이다 언어를 비탈고 굴절시켜 놓았기에 음미하지 않고서는 직접 그 뜻을 리해하기 어려웁다 그러나 이런 동시도 동시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게 된다.
이런 은유적인 상징동시는 소년기 아이들이 즐기는 동시형태로 된다.
상술한 다양화된 동시형태들을 유년기 동년기 소년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창작에서 적당히 리용할 수가 있는것이다.
난해동시를 극복하는 방도
동시는 이렇게 다양화 되고 있다 그런 동시는 전통동시와 현대동시로 나누어 고찰할 수가 있다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와 은유적인 상징동시,그리고 사색적인 철리동시는 이른바 현대동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전통동시를 배격하면 아니된다 그것은 그런 전통동시는 아직도 유년기 동년기 아이들이 즐기는 동시들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동시의 깜직하고 재미나고 예쁜 매력은 현대동시로써는 대체할 수가 없는 특징으로 되고 있다.
이런 점도 고려가 없이 동시대상의 특수성을 도외시 하고 무턱대고 소년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은유적인 상징동시만을 동시라 하면서 전통동시를 묵살하는것은 동시창작을 오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사실상 중국 조선족 동시단에서 불어친 동시단일화 경향은 한국 동시단에서 1980년대에 나타났던 난해동시경향의 번안으로 된다 그런 한국의 난해시경향이 2000년대에 들어와서 중국조선족 동시단에 뒤늦게 나타난데 불과한것이다.
한국 동시인들은 난해동시는 동시의 독자대상을 외면하고 현대동시표현기법을 아무렇게나 동시창작에 받아들인 후과였다는것을 벌써 알게 되였다 하여 그들은 그런 현대동시표현기법을 동심에 려과시켜 동시창작에 받아들이고 동시다양화를 주장하면서 동시를 개혁하고있다.
그런데 우리중국 조선족동시단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이른바 동시를 혁신한답시고 한국동시의 지난날의 <<교훈>>을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우리의 동시가 굽은 길을 따라 가지 말고 자기의 독자적인 길로 전진하자면 동시가 난해시로 번져가는것을 막아야 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은 3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표상의 상사성과 류사성에 주의를 돌려야한다 그런 류사성과 상사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나름대로 <<태양은 국수틀>>이라고 하여서는 안된다.
<<태양>>과 <<국수틀>>사이에서 표상의 류상성과 상사성이 전혀 없다 이 동시를 쓴 작자는 국수틀에서 나오는 <<국수오리>>와 태양에서 뿜어나오는 <<해살>>에서 이른바 <<선(线)>>이라는 상사성을 찾고 이런 엉뚱한 은유관계를 설정한것이다 이것은 은유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하여야 하겠다.
사실 <<국수오리>>와 <<해살>>은 은유관계가 성립된다고 할 수는 있어도 <<해살>>을 뿜는 <<태양>>과 <<국수오리>>를 뽑는 <<국수틀>>은 은유관계로 절대 설정할 수가 없는것이다.
이런 엉터리 은유관계를 설정하고도 작자는 <<동시는 내가 보기위 하여 쓴다>>면서 독자대상을 전혀 념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 결과 이런 억지 은유관계설정은 우리의 동시를 난해동시로 전락되게 하고 말았던것이다.
둘째,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관계를 좀만 뜅겨주면 아이들이 련상할수있는 그런 관계로 설정하여야 동시는 난해성을 기피할수 있다는 점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아이들의 인식정도를 떠나 아이들이 아무리 련상하여도 모르는 그런 은유관계는 우리의 동시를 난해시로 만드는 후과를 빚어내게 되는것이다.
셋째, 현대동시표현수법을 동심에 려과시켜 대상의 정도를 가늠하면서 창조적으로 운용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동시가 보다 참신하여지고 우리의 동시가 한차원 높은 질적향상을 가져올수 있는것이다 특히 시적언어를 독자대상에 알맞게 비탈고 굴절시키는것은 새로운 동시로 도약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될 수가 있다
라이라크
중국 림금산
향기에 언제
발이 생겼지
향기가 막 걸어다닌다
향기가 언제
팔이 생겼지
향기가 막 팔을 젓는다
향기가 언제
곡이 붙었지
향기가 노래 포올폴
메아리쳐 간다
시인은 아이들의 환상능력을 고려하면서 후각적인 향기를 시적대상으로 삼고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를 <<발>>,<<팔>>이 있는 가시적인 동적인 형상으로 둔갑시키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향기에 <<곡>>이 붙었다고 하면서 메아리쳐 가는 청각적인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여기서 재래의 우리 동시와 다른 색다른 동시를 써보려고 시적언어를 비탈고 굴절시키면서 시적형상을 창조하고있다 이 동시가 성공한 비결은 바로 아이들의 사유능력을 충분히 고려한 거기에 있다 하여 그같이 어려운 시적형상을 아이들의 사유를 뚱겨주면서 표현하였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아이들은 받아 들일수가 있게 된것이다.
최근에 중국조선족 동시단에 나타난 은유적인 상징동시들은 상술한 세가지 현상을 극복하고 나왔기에 은유적상징동시의 존재가능성을 충분히 과시하여주고 있다.
첫눈
중국 김철호
아기바람에
날려온
서너 송이
팔랑팔랑
춤추며
어깨에 앉는다
옳지,그래!
손에 하나 꼭 잡았다
살짝 펴보니
눈물 한 방울
아차, 몹시 아프게
쥐였나 보다
여기서 작자는 시적대상 <<눈>>을 제시하고 그 <<눈>>을 손에 잡아쥐고 그다음 펴보니 <<눈물 한방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시인은 원관념 <<눈송이>>를 보조관념 <<눈물방울>>로 은유적인 표현을 하였다 이런 은유과정에 시인은 <<눈>>을<<몹시 아프게 쥐였기>>에 그 눈이 <<눈물방울>>로 되었다고 정서적인 처리를 하면서 마무리한 여기에 동심이 깔려있고 여기에 동시의 서정성이 슴배여 있다
이런 동시 출현은 실로 동시다양화의 실천적인 노력으로 창작된 동시들로 마땅히 찬양할바라고 본다.
나가는 말
우리의 동시는 나어린 유년기 동년기 소년기 아이들을 자기의 독자대상으로 하는 문학의 형태이다 독자대상의 다양성은 동시의 다양화를 요구하고 있다.
하기에 그 어떤 하나의 동시형태로 전반 동시를 대체하자는것은 비과학적인 주장이라고 할수 있다 다시말하면 은유적인 상징동시만 동시라고 하는것은 동시창작의 단일화를 초래하며 우리동시창작을 오도하는 그릇된 처사라고하여야 할것이다.
은유적인 상징동시는 동시의 일종일뿐 절대 동시 전반을 대체할 수가 없는것이다 이런 동시의 난해성을 극복하기만 하면 은유적인 상징동시는 동시의 일종으로 존재하면서 자기의 존재가치를 충분히 과시할 수가 있을것이다.
우리는 동시의 다양한 대상을 념두에 두고 그런 대상에 다가들면서 그들의 심미적욕구와 그들의 흥취애호로부터 출발하여 동시의 다양화를 주장하면서 재미나고 깜찍하고 예쁜 전통동시도 쓰고 사색과 음미를 요구하는 현대동시도 함께 쓰면서 우리의 동시단을 백화가 만발하게 만들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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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모방인가?
김만석
문제의 제기
창작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정말 민망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는 상황이여서 렴치 불구하고 이렇게 제기하는 바이다.
지난 2007년 4월 연변주조선족아동문학학회와 연변인민출판사<<아동문학>>편집부에서 련합으로 가진 <<동시탐구>>회의에서 ***은 <<창작은 모방이다. 괴테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놀라운 소리를 하였다.
<<창작은 모방이다>>
이 놀라운 론단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은 괴테까지 곁들어 가지고 자기 론점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일찍 알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은 생활을 모방한다>>고 말한적은 있다 그러나 작품을 모방한다는 말을 한적이 없다
괴테가 과연 이런 말을 하였는지 필자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문학대가가 이런 엉뚱한 말을 하였겠는가가 의심된다 설사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하여도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목적으로 그런 말 하였는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괴테가 그런 말을 하였다 쳐도 우리는 21세기에 사는 사람으로 그런 말은 비판적으로 분석 판단하여 오늘날 사람답게 창작을 대하여야 할것이라고 본다
진리는 언제나 상대적인 시대성을 가지고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어제날의 진리가 오늘 와서 망설로 될수가 있다는 말이다 창작은 결코 ***이 말한것처럼 그런 모방이 아니다 창작은 작가들의 심미적인 새로운 위대한 창조인 것이다
문제의 현실
그런데 이런 창작을 <<모방>>으로 인식하고 동시창작에서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은 력사적으로 우리 중국 조선족아동문학 동시단에 두루 나타났었다
(1) <<편지>>와 <<자꾸 쓸래요>>
일찍 1950년대에 벌써 이런 현상이 나타났었다
편지
(조선) 유충록
전선으로 떠나시는 우리 형님께
편지를랑 자꾸자꾸 쓰겠다고
약속은 굳이 굳이 하였지만
글쎄 어디다 써 보내나요
형님은 자꾸 자꾸 내닫는걸
원쑤를 무찔러 나아가는걸
그래두 자꾸 자꾸 써보내지요
모두다 용감한 우리 형님들
누가 받아보나 좋으니깐요
그리고 회답을랑 그만 두라죠
바쁘신데 어떻게 글을 쓰신담
총사령부의 보도가 회답인데요
1950년 8월
자꾸 쓸래요
최**
오빠가 지원군에 가시던 그 날
나는야 편지를 자꾸 쓰자고
오빠의 손을 잡고 결심했지만
주소도 모르면서 어디다 쓰나
오빠가 계시는 곳 나는 몰라도
편지는 자꾸 써 보낼거야
나에겐 지원군이 모두다 오빠
그 어느 오빠든지 받아 보겠지
1953년 6월
유충록이 1950년에 쓴 <<편지>>와 최**이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53년에 쓴 <<지꾸 쓸래요>>는 너무나 닮은 글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가 같은 시적대상인 <<편지>>를 집중 조명하면서 주소도 모르는 군대형님/군대오빠에게 자꾸 편지 쓰는 아이들의 기특한 마음에서 시적 발견을 한 동시들이다.
유충록이 <<형님이 전선에 나가던 날>>이라고 쓴 것을 최**은 <<오빠가 지원군에 가시던 그날>>>로 썼다
그리고 유충록이<<편지를랑 자꾸 자꾸 쓰겠다고/ 약속은 굳이 굳이 하였지만>>이라고 썼는데 최**은 <<나는야 편지를 자꾸 쓰자고/ 오빠의 손을 잡고 결심했지만>>으로 썼다
다음 주소를 모르는 원인을 유충록은 <<형님이 자꾸 내닫는걸/ 원쑤를 무찔러 나아 가는걸>>로 비교적적 형상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최**은 <<주소도 모른다>>고 간단히 설명하고 말았다
그 다음 편지를 자꾸 쓰는 까닭에 대하여서는 유충록은 <<모두다 용감한 우리형님/누가 받으나 좋으니깐요>>고 하였고 최**은 <<나에겐 지원군이 모두다 오빠/ 그 어느 오빠든지 받아보겠지>>라고 하였다
다른 점은 최**이 유충록의 쓴 <<편지>>의 제 4련을 빼 버린 것이다 유충록은 <<회답을 그만 두라죠/ 바쁘신데 글을 어떻게 쓰신담/ 총사령부의 보도가 회답인걸요>>라고 하였다 작자는 여기에 방점을 찍고 자기의 주제를 심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최**은 <<자꾸 쓸래요>>에서는 유충록이 노린 점에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편지를 자꾸 쓰는 시적주인공의 내심세계에 방점 찍으면서 유충록의 제4련을 군더더기로 보았던 것이다 최**의 노린 주제에 의하면 이것은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로 되는 것이다
이처럼 최**은 시적형상화에서 <<오빠>>를 <<형님>>으로 , <<약속>>을 <<결심>>으로,<<모두다 우리 형님>>을 <<지원군은 모두다 오빠>>라고 하였다
(2) <<아기의 말>>과 <<아기>>
2010년 4월에 연변<<조글로>> 사이트에 누군가가 강순길과 최**의 동시를 비교하면서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아기의 말
강순길
아기는 울음으로
말을 한다
기저귀가 젖어도
-응애 응애
배가 고파도
-응애 응애
몸이 아파도
-응애 응애
아기의 말은
엄마가 알아듣지
(1999)
아기
최**
배고파도
으-앙
오줌 싸도
으-앙
아기 울음소리 듣고
엄마가 달려 온다
아기는 울음으로
말한다
( 2003)
강순길이 1999년에 쓴 동시<<아기의 말>>과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3년에 최**의 쓴 동시 <<아기>> 또한 너무도 닮은 동시이다
두 사람 다 시적대상인 <<아기의 울음>>에서 아기들은 울음으로 말한다는 시적발견을 하고 있다 즉 똑 같은 시적 발견이라는 말이다
시적 형상화에서 보면 강순길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응애응애>>라고 하였고 최**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으-앙 으-앙>>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순길은 아기들이 <<기저귀가 젖어도>>,<<배가 고파도>>,<<몸이 아파도>> 운다고 한것을 최**은 아기가 <<배가 고파도>>,<<오줌 싸도>> 운다고 하였다 강순길은 <<엄마 말은 아기가 알아 듣지>>하고 전반 시를 마무리 하였는데 최**은 <<아기의 울음소리 듣고 /엄마가 달려 온다//아기는 울음으로 말한다>>고 마무리하였다
(3)<<호박넝굴>>과 <<박넝쿨>>
한국 손길봉이 2008년 2월 24일 <<한국동시마을>>에 <<호박넝굴>>이라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호박넝쿨
손길봉
호박넝굴 끝에는
눈이 있지요
울바자를 보고서
찾아 가지요
호박넝굴 끝에는
손이 있지요
울타리를 붙잡고
올라 가지요
그런데 최*이 2010년 겨울호<<아동문학>>잡지 <<민철의 어항>>에 <<박넝쿨>>이라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박넝쿨
최*
박넝쿨엔
눈이 있어요
울바자를 보면
살금살금 찾아 가지요
박넝쿨엔
손이 있지요
울바자를 찾아서
정답게 감겨 올라요
상기 2수의 동시를 보면 시적대상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손길봉은 <<호박넝굴>>로 하고 최*은 <<박넝쿨>>로 하였다
그러나 형식상에서 시적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시적발견은 둘 다 <<호박넝굴>>과 <<박넝쿨>>에 <<눈>>이 있고 <<손>>이 있다고 하였다 즉 시적발견이 완전히 같다는 말이다
시적형상화에서 보면 손길봉이 <<호박넝굴>>이라고 한 것을 최*은 <<박넝쿨>>로 하였다 그리고 손길봉이 눈이 있는 호박넝굴이 울바자를 보고서 <<찾아가지요>>한 것을 최*은 박넝쿨이 <<살금살금 찾아가지요>>라고 하였다 나중에 손길봉이 손이 있는 호박넝굴이 <<울타리를 붙잡고/올라가지요>>한 것을 최*은 손이 있는 박넝쿨이 <<울바자를 찾아서 /정답게 감겨 올라요>>라고 하였다
(4) <<나비>>와 <<초불>>
김철호는 2002년 자기의 동시집<<연필 숨쉬는 소리>>에 동시<<나비>>를 발표하였다
나비
김철호
가지 없어도
노랗게 핀다
뿌리없어도
하얗게 핀다
황**는 2010년 아동문학학회에서 편집출판한 <<아동문학샘터>>에 <<초불>>을 발표하였다
초불
황**
가지
잎
없어도
빨갛게
피는
꽃
여기서 김철호는 나비를 꽃으로 은유하여 오묘한 시적형상을 창조하였다 즉 가지 없어도 노랗게 핀 꽃이 노란 나비요 뿌리 없어도 하얗게 핀 꽃이 하얀 나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황**는 바로 김철호의 이런 작시법을 그대로 <<초불>>에 대입하여 이른바의 동시<<초불>>을 써서 발표하였다. 창작에는 그 어떤 공식이 따로 없다 창작에 공식이 있으면 그 누구나 그런 공식에 대입하여 동시를 쓸수가 있지 않을가?
문제에 대한 분석
상술한 고찰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종합하여 낼수가 있다
첫째, <<완전모방작품>>인 경우이다 완전모방작품이란 시적 발견이 같고 시적형상화가 같은 작품을 말한다 지어 제목도 같을 수가 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조선족 아동문학문단에 아직 이런 완전모방작품이 나타나지 않은 그것이다 이런 완전모방은 너무나도 우둔한 짓이기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그런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는 것 같다
이런 완전모방작품은 완전히 남의 작품을 자기작품으로 발표하기 때문에 이란 작자는 <<글도적>>이라고 방점 찍고 만천하에 공개하고 질타하여 마땅할줄로 알고 있다
둘째, <<준모방작품>>인 경우이다 준모방작품이란 시적발견이 같고 시적형상화에서 약간한 개조를 진행한 작품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남의 작품에서 단어 몇 개, 토 몇개를 바꾸어 놓고서는 눈감고 <<야옹>>하는 식으로 자기의 작품이라고 넌지시 발표한 그런 작품을 말한다
우선 이런 작자들은 남의 시적발견을 자기가 발견한것처럼 들고 나온다 시적발견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이런 작자들은 남의 성과를 파렴치하게 슬쩍 후무려 가지고는 시뚝해서 으시대고 있다
다음 시적형상화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형상을 약간씩 뜯어 고치는 상투적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남의 작품을 고치기 때문에 원 작품보다 질적으로 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나 토 몇 개, 단어 몇 개를 고치고 어떻게 자기 작품이라고 떠버릴수 있단 말인가!
그 다음 인식론적 견지에서 보면 이런 작자들은 정보화시대라는것을 까맣게 잊고 무지막지한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여 남의 잘된 작품을 자기 홀로만 보았으리라고 오판하고 이런 우둔하고 비렬한 장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작자들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발표욕에 미쳐 날뛰면서 자기를 얼리고 독자를 기편하려고 든다 결과 형식적으로는 남의 작품을 모방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남의 작품을 훔친 철두철미 <<글도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완전모방보다는 더 교활한 작법이라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셋째,<<류사성>>경우이다 .우리는 동시를 학습하면서 수백수의 동시를 머리 속에 저장하고 있다 그런 저장된 동시들이 어떤 시적충동을 받는 경우 새롭게 조합되여 이른바 동시로 둔갑될 수가 있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서 탓할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렇게 쓴 동시가 남이 이미 발표한것이라면 작가적 량심으로 자기를 자제하고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넷째, <<우연일치>>인 경우이다 이미 성숙된 작가들이 동일한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비슷하거나 서로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가 있다 일찍 프랑스의 모파상과 로시아의 체호브는 같은 시간에 애완견을 둘러싼 비슷한 소설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이런 경우 누가 누구를 모방하였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결론
상기 분석과 종합에 근거하면 우리 동시창작에서 나타난 엄중한 페단은 반드시 엄격히 검토하고 철저히 시정하여야 한다고 본다
우선 상기 거론된 관계 작가들은 자기의 작품이 우에 렬거한 어느 경우에 속하는가를 실사구시적으로 해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창작실제를 존중하여야 할것이며 또한 가슴 아픈 분석과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된다고 본다
다음 우리 독자들은 무턱대고 상기 관계작가를 비방하거나 모욕할것이 아니라 그들의 해명을 리해하고 존중해 주면서 그들의 창작태도를 바로 잡는데 따뜻한 충고를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 창작이 모방이라고 하면 상기정황은 모두다 아무런 문제로 될 수가 없을것이다 그러나 창작은 절대 모방이 아니라 개성적이고 량심적인 작가들의 심미적인 새로운 위대한 창조이기 때문에 상기문제는 엄중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창작을 <<모방>>이라면서 그런 <<모방>>을 그 어떤 새로운 <<발전>>이요, 그 어떤 새로운 <<창조>>라고 하는 것은 창작을 모독하는 절대 용납할수가 없는 망설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창작은 절대 모방이 아니라는 것을 명기하고 피타는 노력을 다 하여 남이 창작하지 않은 그런 나만의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떨쳐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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