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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시와 보들레르
2016년 01월 02일 01시 43분  조회:4309  추천:0  작성자: 죽림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의 왕자들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가소 가련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이 날개 달린 항해자가 그 어색하고 나약함이여!
한때 그토록 멋지던 그가 얼마나 가소롭고 추악한가!
어떤 이는 담뱃대로 부리를 들볶고, 어떤 이는 절뚝절뚝, 날던 불구자 흉내 낸다!

시인도 폭풍 속을 드나들고 사수를 비웃는 이 구름 위의 왕자 같아라.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에 유배되니 그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방해하네.

 

Souvent, pour s'amuser, les hommes d'équipage
Prennent des albatros, vastes oiseaux des mers,
Qui suivent, indolents compagnons de voyage,
Le navire glissant sur les gouffres amers.

À peine les ont-ils déposés sur les planches,
Que ces rois de l'azur, maladroits et honteux,
Laissent piteusement leurs grandes ailes blanches
Comme des avirons, traîner à côté d'eux.

Ce voyageur ailé, comme il est gauche et veule!
Lui, naguère si beau, qu'il est comique et laid!
L'un agace son bec avec un brûle-gueule,
L'autre mime, en boitant, l'infirme qui volait!

Le Poète est semblable au prince des nuées
Qui hante la tempête et se rit de l'archer;
Exilé sur le sol au milieu des huées,
Ses ailes de géant l'empêchent de marcher.

 

 

 

“어린 시절부터 고독감./ 가족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특히 친구들 속에 끼어서도―/ 영원히 고독하도록 운명지어진 숙명감.” 1821년 출생한 샤를 보들레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많은 글에서 자신의 내면에 동거하는 두 개의 마음, 이중성에 대해 썼는데 그것을 “생명력, 그리고 쾌락에의 매우 격렬한 기호”라고 칭했다. 보들레르의 비교적 행복했던 초년은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생생한 빛”이었다. 적어도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루이 16세의 고가구, 고미술품, 집정 정부, 파스텔화, 18세기의 사교계”라는 어휘들로 꽉 차 있었으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앳된 사랑의 푸른 낙원”의 시간은 종료되었다(보들레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서른다섯 살의 어머니는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자크 오픽과 재혼을 하게 된다.)

 

라틴어 작시(作詩)에 뛰어나 일찌감치 시를 짓는 재능을 발휘했던 보들레르에게 파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다니던 파리의 명문 루이 르 그랑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수업 시간에 급우가 돌린 쪽지를 제시하라는 선생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쪽지를 찢어 삼킨 반항적 언동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보들레르의 기질은 아주 달라진다. 보들레르는 개인 교사의 지도를 받아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파리 법과대학에 등록했지만 자유분방하고 구속 없는 생활이 본격화되었다. 문학청년들과의 교류, 거리의 여인 사라(Sarah)와의 만남과 성적 쾌락에의 탐닉, 그리고 빚에 쪼들린 생활이 이어졌다. 무절제한 생활을 하다 빚에 몰리게 된 보들레르를 지켜보던 형 알퐁스가 그 사실을 의붓아버지에게 알렸고, 이에 가족회의가 열려 보들레르는 1841년 1월 인도의 캘커타를 향해 떠나는 남해호에 실려 강제로 먼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덥고 푸른 나라의 끔찍한 우울”을 경험하게 했던 이 길고 지루한 바다 항해는 보들레르에게 바다 이미지를 생성시켰고, 열대 풍경에의 매료 등 이국적 취향을 안겨 주어 그의 심성과 시심을 일변하게도 했다. “내 아이, 내 누이여/ 생각해 보렴/ 거기 가서 함께 사는 감미로움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고장에서!/ 그곳 흐린 하늘에/ 젖은 태양이/ 내 마음엔 그토록 신비로운/ 매력 지녀/ 눈물 통해 반짝이는/ 변덕스런 그대 눈 같아”라며 다른 나라 땅으로 떠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노래한 시 ‘여행으로의 초대’의 탄생도 이때의 경험이 도왔다.

 

무엇보다 시 ‘알바트로스’는 이 시기 항해 중에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에 승선해 있던 한 군인의 소총에게 잡힌, 몸통 3미터가 넘는 이 거구의 바닷새 알바트로스가 수부들에 의해 질질 끌려다니는가 하면 온갖 방법에 의해 모진 박해에 시달리는 일이 그의 목전에서 벌어졌다. 보들레르는 이 충격적인 일화를 토대로 알바트로스에 “지상에 유배당한”, ‘저주받은 시인’의 모습을 투영했다.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비조(鼻祖)였으며(그의 시 세계는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 등에게로 승계된다), “옛날의 파리는 이제 없네(아! 도시의 형태는/ 인간의 마음보다 더 빨리 변하는군)”라고 노래한 고독한 근대적 만보객이었다. 범박하게 말해 이 지상의 삶을 ‘병원’에 비유하며 현대와 도시의 타락과 부패를 노래한 보들레르의 생애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한 극장 소속 단역배우였던 잔 뒤발(Jeanne Duval)과의 사랑을 들 수 있다. 보들레르가 흑백 혼혈 여성이었던, 질병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고 있던 그녀를 만난 것은 먼 바다로의 항해를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보들레르에게 죽음과 방탕의 인자를 심어 준 잔 뒤발은 보들레르의 시에서 “신성한 요술쟁이의 막대기 끝에서/ 박자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기다란 뱀”에 비유된다.) 그녀는 보들레르에게 “유일한 오락”이요, “유일한 즐거움”이요, “유일한 친구”였으나, 보들레르를 “쇠사슬에 얽매인 노예처럼/ 노름판을 못 떠나는 노름꾼처럼/ 술병을 못 놓는 주정뱅이처럼” 붙들어 매어 놓았다. 보들레르는 많은 돈을 그녀에게 바쳤고, 결국 1844년 법원으로부터 금치산 선고를 받게 된다. (이후 보들레르는 돈을 보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줄기차게 보낸다.) 보들레르 시에 등장하는 육체에 대한 관능적 탐닉, 악마적 어투, 사디즘의 이상성욕 등은 뒤발로부터 상상적으로 창조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57년 출간된 시집 [악의 꽃]은 보들레르에게 엄청난 불행과 시련을 안겨 주었다. “납골당과 도살장의 구역질 나고 냉랭한 시, 사상으로 이루어진 한심스러운 빈곤” 등의 혹평이 쏟아졌으며, 외설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시집이 압류당하기도 했다. 여섯 편의 시 삭제, 300프랑의 벌금 처분도 내려졌다(이에 대해 보들레르는 한 편지글에서 “저는 제가 유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오로지 악에 대한 공포와 혐오만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썼다.) 플로베르가 “아! 당신은 존재의 지겨움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격려를, 위고가 “예술이란 창공과 같은 것이어서 무한한 분야입니다. 귀하께서는 최근에 그 점을 증명해 보였습니다.”라는 지지와 신뢰를 보냈으나 세상의 혹독한 평가는 보들레르를 ‘저주받은 시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물론 보들레르는 초판 텍스트에서 삭제된 여섯 편의 시를 대신해 서른다섯 편의 시를 보강해 1861년 [악의 꽃] 재판을 발간한다. 보들레르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이 책(재판본)은 모든 것에 대한 저의 증오심과 혐오감의 증거로 남게 될 것”이라고 썼다. 에드거 앨런 포와 바그너에 대한 애정도 보들레르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놓이는 대목이다. 보들레르는 포의 작품을 대면한 후 자신이 꿈꾸던 주제와 문장들이 작품에 구현되어 있음에 놀라움과 황홀감을 느껴 포의 전 작품을 완역하기로 결심했고, 1860년 음악회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순간 생의 상승감을 느끼며 그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보들레르의 말로는 참담했다. “아무 곳이라도 좋소! 아무 곳이라도 좋소!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이라고 절규하던 그는 두통, 신경쇠약, 숨가쁨, 구토, 신체 마비, 실어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1867년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숙명의 사닥다리 위에서 아래까지 가득한/ 불멸의 죄악의 지겨운 광경”을, “단조롭고 작은 이 세계”를, “우리 감옥의 권태”를 다 벗고 눈을 감고 말았다. 한 역자의 지적처럼 보들레르는 “고뇌와 이상, 악덕, 죄악, 갈증, 찢겨진 영혼의 울부짖음”을 불후의 역작인 한 권의 시집에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 시집을 이 요동치는 세계, 이 선상(船上)에, 수부들에게 붙잡힌 알바트로스처럼 남겨 놓고서 떠나갔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4.9~1867.8.31)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품행 문제로 학교에서 퇴학당했으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줄곧 작가가 되고자 했다. 성년이 되어 의붓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을 상속받은 뒤에는 센강의 생루이섬에 거처를 두고 댄디즘의 이상을 추구하며 탐미적 생활을 즐겼다. 흑백 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 뒤발을 알게 된 뒤 관능적 시흥을 중요하게 여겼다. 상속받은 유산을 거의 다 낭비한 뒤에는 법정후견인이 딸린 준금치산자가 되었다. 스물네 살에 미술 평론가로 데뷔하였고 문예비평, 시, 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랭보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낭만파, 고답파에서 벗어나 인간 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 정신을 추상적 관능과 음악성 넘치는 시에 결부하였다. 대표작으로 [악의 꽃]이 있다.

 

 

글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산문집 [느림보 마음] 등이 있다.


 

[출처] 보들레르/ 알바트로스|작성자 헌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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