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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여, - 말의 연금사가 되라...
2016년 01월 10일 05시 16분  조회:5729  추천:0  작성자: 죽림

말과 말 사이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 여태천

 

 

말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장 혼란스럽고 저속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종종 시에서 아름답고 매력적인 말은 어느 순간 길을 잃기도 하고, 엉뚱한 길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한다. 가끔 너무나 많은 가상(假像)을 가지고 있는 이 말들을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니 이 말들이 진실한 세계를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말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런데 정말로 말은 우연에서, 그리고 우연으로만 끝나는가. 말의 우연성과 불안정을 극복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물론 시가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무엇(말하자면 이데아, 절대 정신, 혹은 물자체와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의 역사를 온전히 다 기록할 수도 없다. 미미한 우리의 정신(예컨대 시에서 일인칭 화자)이 온전하게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빈약한 우리의 말(시어)이 어떻게 그것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곧 진리라는 헛된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신 그 기록은 수없이 많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일(가령, 순간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발견하는)이 생길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있다. 단언하건대, 시란 수없이 많은 그 기록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시가 형이상학처럼 본질적인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언어(말)를 아직도 그렇게 여기는 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몇몇 음성주의자들의 후예들이 그렇다). 그러나 시란 우리의 말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특별히 의미론적으로 설명해주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그 쪽이라면 오히려 소설이 적당하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부터 그것이 ‘시’라고 고집하는 이들은 대체로 시에서 말의 가치를 잘 모르는 편에 속했다.



말이 곧 진리와 같다는 인식론에서 비롯된 미학적 자기중심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심과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이때, 말의 주체(시에서 일인칭 화자)뿐만 아니라 말이 겨냥하는 한없이 무거운 의미(시의 주제)는 그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중심적 지위를 잃게 된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 그 해답은 역시 말에 있다. 그 말은 역사적인 것 속에서 시적인 것을, 순간적인 것 속에서 영원한 것을 추출한다. 물론 모든 말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게 시인은 세계의 존재를 말로 옮겨서 우리 앞에 환하게 밝힌다. 독일의 비극적 시인 횔덜린(F. Hölderlin, 1770~1843)은 그 말을 모든 자산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자산이며, 시인만이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말로 세계의 존재를 환하게 밝히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다. 시인은 가장 직접적인 현실과 과감하게 맞서서 현실로부터 존재의 영원한 의미를 드러내 보이는 말의 세계를 만든다. 오직 순수하게 말의 세계에 빠졌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S. Mallarmé 1842~1898)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일종의 시각적 ‘휴지(休止)’로 이용하여 말과 이미지의 리듬감 있는 운동감을 창출한 바 있다. 역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휴지의 가치는 시각적인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말과 말 사이의 침묵, 곧 청각적 부정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와 침묵이 이러저러하게 교체될 때 시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천둥이 칠 때 우리가 듣는 것은 순수한 천둥 그 자체가 아니다. 정적을 깨고 그 정적과 대비되는 순간을 천둥으로 듣는 것이다. 말과 말 사이에 있는 침묵이 중요하고, 침묵과 침묵 사이에 있는 말의 움직임이 소중하다.



그러므로 말라르메가 창조한 이 공백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데 있다. 시각적 휴지는 일종의 사유에 뚫려 있는 구멍과 같다. 좀더 확대하자면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에서의 의도적 단절이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발화를 둘러싸고 있는 침묵이다. 이 침묵 저 아래로 늘 말이 움직인다. 실제로 시의 구조는 감추어져 있지만 말과 말이 만드는 공백 속에, 말이 환기하는 어떤 것으로 현존한다. 그것을 읽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짐작하는 의미와 시에 사용된 말 사이에서 어긋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울림이 생긴다. 그 울림이 바로 시의 이미지고 비유다. 시인은 이미지들과 비유의 테크닉에 의해, 또는 말들이 만드는 소리의 조화에 의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말에 대한 이성의 동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령, 




당신이 처음으로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그 아래 어디선가 나는 유리 넥타이를 매고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을 것인데, 당신은 

―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에서, ‘내’가 “유리 넥타이를 매고 / 조용히 앉아” 읽고 있는 바로 그 “책”은 이성의 동의가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 ‘내’가 읽고 있는 “책”과 상관없이 “당신”은 있다. ‘나’는 “당신”을 이성의 질서인 “책”에서, “책”이 안내하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만났다. 하지만 “당신”은 “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세계에 무수히 많은 “당신”으로 산다. 비약하자면 여기서 “당신”은 “책” 속의 “루시”이자, 도널드 요한슨이 1974년 11월 30일 아프리카 하다르의 아와시 강가에서 발견한 인류 최초의 화석이다. “당신”은 320만 년 전에 살았던 25세의 여성으로 키는 약 1백7cm 몸무게는 28kg 정도에 불과한 여자다. 동시에 그녀는 비틀즈가 부른 아름다운 노래며, 그 노랫말이 만드는 슬픈 리듬이다. 노래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사랑하는 여인이며, 노래가 생기기 전에 반짝였던 먼 우주의 어느 별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다. 말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것들이 갖는 의미에 의해 가치를 가지며, 그 다음에 말들의 환기력과 울림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말한 비은폐성(非隱蔽性 alētheia)은 사물과 작품, 진리, 예술이 모두 비은폐성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시란 언어가 환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당신”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낸다. 그 드러남은 그 자체로 우주적인 한 현상(사건 Ereignis)이며 낡은 관념의 피라미드에 비치된 어떤 해설이나 주석보다 투명하고 예리하게 우주의 한 면모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그 드러남 속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하다. 비은폐성과 은폐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비약이란 이와 같은 존재의 본질을 환기하는 말의 특성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성에서 해방될 때, 말은 거칠어지기도 하지만 비로소 매우 강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란 뭔가를 환기하고 충동질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사물이 아닌 그것이 빚어내는 효과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암시와 환기는 독자가 자신의 심상과 연상을 가지고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오직 존재하는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 말과 만나 만드는 세계, 시란 바로 그것이다. 




죽지 않은 꽃들은 쉬지 않고 빨리 자라 

하늘의 별에 닿았지, 책에 그렇게 적혀있어도 

나는 어둡고 검은 눈으로 한 자씩 손을 짚어가며 

새끼를 낳는다는 해변의 나무와 죽은쥐나무와 

날카로운 발톱의 짐승들 

있지도 않은 이름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고 

또 읽고 있을지도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당신”이라는 “루시” 때문에, 노래 때문에, 사랑 때문에, 아름다움 때문에 ‘나’는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다. 역으로 “책”을 읽으면서 “죽지 않은 꽃들”과 “새끼를 낳는다는 해변의 나무와 죽은쥐나무와 / 날카로운 발톱의 짐승들”을 상상한다. 그것은 모두 “있지도 않은 이름”들이다. 우리는 산문의 말로는 이성의 범위와 깊이를 벗어난 느낌을 표현할 수 없다. 말은 그 극한으로 갈 수 없지만 가려고 한다. 말의 구조가 도달할 수 없는 극한에 이르고자 하는 끝없는 방황의 연속이 인간의 삶 그 자체다. 아니 인간의 목적이 태어나면서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말로 극한의 상태를 묘사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말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말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다. 말이란 인간을 떠나면 더 이상 말일 수 없다. 그러나 일상어와 일상어 아닌 것 사이의 간극, 그 간극에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간극이 어쩌면 현대성일 수도 있다. 말의 바깥에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 세계가 있다. 

말과 말 사이를 메우는 것은 신이 사라진 상황에서 은폐된 채로 있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찾는 일이다. 말과 말 사이는 ‘나’가 가고 오는 그 사이다. 이 사이는 시간의 사이이기도 하다. 또 그 사이에 모든 존재가 있으며, 사건이 있다. 




복숭아 향기 나는 오렌지색 이층버스를 타고 

인공의 구릉과 호수를 건너 

당신이 거닐었던 검은 땅으로 

비행기, 버스, 밤하늘, 다이아몬드 

내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이 새로운 단어들의 감촉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루시,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시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이행 지점이다. 이 사이에 때로 역사가 들어앉기도 한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이 새로운 단어들”이 그 사이에 가득하다. 그래서 잠정적이고 흘러가는 영역을 가로질러 영원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들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그 사이에 난 길을 걸어본 이가 아무도 없다. 그 길을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하지만, 우리는 단번에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비약할 수 있다. 시인이 종종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런 일을 한다. 그때 말이 지니는 가장 순수한 의미가 진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인상들을 기록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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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불쌍하도다 / 정현종

          

 

 

 

 

 

 

 

 

 

불쌍하도다

 

                                     정현종

 

 

 

詩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정현종 시집 < 나는 별아저씨 > 중에서

 

 

 

정현종 연보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 3남 1녀 중 셋째로 출생.

          대광고등학교 졸업.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 입학. 박두진으로부터 현대문학에서 초회 추천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3월에 <독무>, 8월에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으로 < 현대문학 > 에 발표

          박두진의 3회 추천으로 등단.

 

 

 

1966년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69~1973년 서울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1972년 첫 시집 < 사물의 꿈 > 출간.

 

 

 

1974~1977년 중앙일보 편집국, 월간부 기자.

 

 

 

1977~1982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78년 시집 < 나는 별아저씨 > 출간. 한국문학작가상.

 

 

 

1982~2005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1982년  시론집 < 숨과 꿈 > 출간.

 

 

 

1983년 시론집 < 시의 이해 >, 시선집 <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출간.

 

 

 

1984년 시집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출간.

 

 

 

1989년 시집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산문집 < 생명의 황홀 > 출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1999년 시집 < 갈증이며 샘물인 > 출간.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

 

 

 

2004년 제12회 공초문학상. 파블로 네 루다의 탄생 100주년 기념 메달 수상.

 

 

 

2005년 근정포장.

 

 

 

2006년 제2회 경암학술상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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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사랑의 꿈 / 정현종

 

     

 

 

 

 

 

 

 

 

 

 

 

  사랑의 꿈 

   ― 사물의 꿈 4

 

                                                   정현종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生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
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정현종 시집 < 고통의 축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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