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상은 고유한 전통의 시 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며 시조의 한 유형을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대부분의 작품이 작곡되어 가곡으로 불려질 만큼 전래의 시조형식을 현대적 운율로 소화해냈다. 대체로 다작인 점과 가곡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들어 문학적 평가에서 소홀한 듯한 경향도 있으나, <봄처녀>, <가고파>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전적 서정의 계승, <고지가 바로 저긴데>, <동해송> 등에서 이룩한 시조의 현대적 감각에 의한 재현 등으로 현대시조 부흥의 1인자로 지목받고 있다. 1932년에 나온 첫 개인시조집 <노산시조집>은 향수, 감상, 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 예찬, 조국분단의 아픔,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푸른 하늘의 뜻은>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한때 주요한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를 실험해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자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는 문학보다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했다.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이은상은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서 수업하다가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시조 <아버님을 여의고>, <꿈을 깬 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 기자, <신가정>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약력
1903년 경남 마산 출생
1914년 마산 창신학교 보통과 졸업
1918년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졸업 · 동교 보통과 교원
1920년 서울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23년 연희전문 수료 /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원
1926년 일본동경 와세다대학 사학부 청강
1927년 일본동경 동양문고에서 국문학 연구
1931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
1945년 호남신문사 사장
1950년 청구대학교(지금의 영남대학교) ·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9년 충무공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 안중근의사숭모회장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 한글학회 이사
1969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81년 국정자문위원
상훈
1964년 대한민국예술원문화공로상
1969년 대통령상
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무궁화장
1973년 5·16민족상 예술부문 본상
나는 유달리 산수(山水)를 즐겨하는 사람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외로운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고향 가까운 산과 물을 찾아다니며 거기 하소연하고 또 거기서 위로를 받았었다.
더구나 일제의 사나운 정치 아래서 가슴에 피가 맺히고 눈물이 고일 적이면 바랑 메고 막대 짚고 바람과 달을 벗하고 나서서 북으로 압록강 상류에서부터 남으로 한라산까지 역내의 명산대천을 두루 밟아 어느 때는 산머리에서 소리쳐 울어도 보고 또 어느 때는 강기슭에서 쓴웃음을 웃어도 보았다.
보고 볼수록 아름다운 조국의 강산! 여기가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기름진 낙원이던가 하고 생각할 적에 고맙고 느꺼워 소맷자락 훌쩍 들고 춤추고 싶다가도 이러한 복지를 남의 손에 빼앗긴 일을 헤아려 보고서는 부끄럽고 분한 생각에 펄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간 곳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노래’이었다. 반만년의 긴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고 다시 그대로 우리 민족의 현실생활이 벌어져 있는 조국강산이라 저절로 나오는 온갖 노래를 어찌 눌러 둘 수가 있었을 것이랴. (……)
우리는 노래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진실로 조국을 사랑할진대 조국의 강산을 노래하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애국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제 국토를 사랑하고 제 동포를 사랑하는 그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
- ‘머리말’, 이은상, <조국강산>, 민족문화사, 1954
평론
시인이나 소설가임을 불문하고, 그 시인이나 그 작가의 전모를 빠짐없이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그 작가가 시인의 그릇이 크고 넓으며 유현한 조화를 부리고 있을 때엔 더욱 그렇다. 노산의 세계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만큼 한학자이면서도 사학가요, 동시에 뛰어난 문장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의 시조를 중심으로 해서 논하는 것까지도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의 시조만을 주로 논한다 하더라도, 불가피한 경우 말고도 광복 이후의 것은 언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리고 광복 이전의 것이라도 노산의 모든 시조 하나하나 다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재언할 필요조차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노산 시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조를 읽어보아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라 하겠다. 그 어떠한 것을 제재로 택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쓰인 낱말 하나하나가 모두 부드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중시한다면 기교파라고 명명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글재주 그것 하나만으로 쓰는 기교파는 물론 아니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
그동안에 노산 시인이 써놓은 시조 740여 수 가운데에서 우선 300수쯤만 추린 것이 <노산 시조집>이라 하면서, 그러나 생각하면 서러운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니, 어느 노래가 마음을 따를 수 있겠는가, 너무도 큰 것은 마음이요, 너무도 작은 것은 노래라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아무리 기교가 승하다 하더라도 그 상(想)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과 뜻이 똑같다.
노산은 고향을 방문할때 마다 노비산(제비산)과 어릴적 놀던 바닷가를 찾았다
마산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은상 시 김동진 곡 가곡 "가고파" 를 떠올린다. "가고파 문학축제 ", "가고파 국화축제" 등 '가고파'란 이름을 내건 행사나 각종 간판들을 마산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비단 마산뿐이 아니다. 전국적으로도 "가고파" 란 단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마산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문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1903.10.22~1982.1.1)의 시조 "가고파"의 영향이다. 서울의 재경동창회 회보도 "가고파" 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잔잔히 표현한 이 시조는 국민가곡으로 애창되면서 한국인들의 뇌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현대시조의 개척자로서 가고파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노산 이은상 선생. 그러나, 1960년 그의 3. 15 의거 관련 발언과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협력 논란으로 정작 그가 태어난 고향 마산에서는 제 자리를 못찾은 비운의 문인이다. 하지만, 대다수 지역 문인들은 "과거 문제를 들어 일방적으로 그의 존재 자체와 문학적 위업을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면서 "문학적 공과와 개인적 과거사를 바르게 정립하여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산 선생은 생전에 2,000여 수의 작품을 남긴 현대 시조의 대표적 시인이다. 국문학자 양주동 선생은 “육당(六堂ㆍ최남선)은 박달나무, 위당(爲堂ㆍ정인보)은 인절미 떡, 가람(嘉藍ㆍ이병기)은 난초에 비견될 정도로 그들이 하나씩 체(體)와 풍(風)을 익혀온 데 반하여 노산은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 고 말했다.
마산 여러곳에 노산의 시비가 있다. 월영동, 산호공원,
돝섬등에 모두 다른 형태의 시비가 있다.
노산의 발자취
# 노산 생가, 은상이 샘, 노비산(제비산)
노산 선생이 생전에 마산에 내려오면 가포해변, 노비산공원, 추산공원, 산호공원(가고파시비) 등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에서 자라면서 삶의 일부분이 되었던 곳들이다.
노산 선생의 생가는 구 태양극장터 부근이다. 지금은 태양극장도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의 6호 광장 (구 마산역 자리) 에서 북마산 쪽으로 난 도로 끝 부근 왼쪽의 북마산파출소 자리는 노산 선생 생가 사랑방이 있던 곳으로 3·1운동 당시 이극로·최봉선 선생 등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노산 선생은 상남동 생가에서 1903년 태어나 부친이 작고한 이듬해인 1923년 서울 연희전문학교로 가기 전인 20살 때까지 살았다. 이 시절 그는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회산다리 옆에 있었던 창신 학교를 다녔는데, 현재는 한효아파트가 들어서 당시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창신학교 자리 인근에 있었던 나직한 노비산은 현재는 능선까지 집들이 올라와 옛모습을 떠올리기 힘들지만 노산의 꿈과 포부를 키우는 정신적 터전이 되었던 곳이었다. 노산은 노비산 숲속에서 홀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시절부터 문학소년의 기질을 타고났던지 그는 노비산을 떠올리면서 훗날 시조 '옛동산에 올라'(1928년)와 '그네'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노산 선생의 후손(아들)은 오래전에 미국에 정착한 교포인지라 거의 국내에는 들어오지않는 것으로 알고있으며, 노산의 부모 묘소가 있는 일대 부지는 예전 창신학교에서 관리하다가 제 3자에게 매각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노비산 (제비산) 제일 윗부분에 있는 마산문학관 은 노산을 기리기 위해 "노산문학관" 으로 추진됐다가 논란 끝에 명칭이 바뀌는 곡절이 있었다. 그의 호 노산은 춘원 이광수의 권유에 의해 "노비산" 에서 땄다고 한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 서니/산천의구란 말 옛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베어)지고 없구려'라고 노래한 그의 시조 <옛동산에 올라> 처럼 문학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큰 자취가 그의 고향에 남아있지 않은 쓸쓸한 노산의 모습을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평가되어 그의 업적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지팡이 도루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려
#노산과 가고파, 김동진
노산이 생전에 남긴 수많은 작품 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가고파다. 10수 연작으로 된 이 작품은 시로서보다는 국민가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노산은 이 시를 1932년 1월5일 서울 행하촌에서 완성했다. 어릴적 집 부근에 있던 노비산과 산호공원을 오르내리고 바닷가를 거닐면서 보았던 고향 마산 앞바다를 떠올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를 시에 담았다. 이 시는 타향의 이향민을 위시하여 분단상태의 실향민, 그리고 먼 이국으로 이민간 사람에 이르기까지 어린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공통인자에 눈물이 섞여진 예술품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가곡으로서의 가고파는 작곡가 김동진이 19살이던 1932년에 작곡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당시 평양숭실전문학교의 교원이었던 양주동이 가고파를 소개하자 학생이던 김동진이 너무 감격해서 노래를 부르는데 편리하도록 10수 중 4수만 작곡하였다고 한다.
김동진은 이후 나머지 6수도 작곡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아 70년대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고 10수 모두의 초연은 지난 73년 12월10일 숙명여대 강당에서 숭의여고 합창단에 의해 이뤄졌다.
가곡파의 주된 주제는 고향바다와 고향동무이며 1수는 고향바다와 물새, 2수 고향동무에 대한 그리움, 3수 고향을 떠나 사는 회한, 4수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 싶은 심경, 5수 고향바다에서 추억 등 10수 모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베어 있다.
# 노산과 박태준 : 동무생각 (사우)
*박태준(朴泰俊1901~1986)은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났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뒤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박태준은 창신학교에서 노산 이은상을 만난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어느날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한 여학생을 사랑하였던 자신의 고민을 이은상에게 털어놓는다. 노산은 대구에서 있었던 박태준의 첫사랑이야기를 듣고 “ 박 선생이 잊지 못할 그 소녀를 노래로 승화시켜 그 곡에 담아 두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노래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소?” 하고 시를 써서 박태준에게 건네준다. 이것이 가곡 ‘동무생각’ (사우)이다. 일설에 의하면 박태준이 먼저 곡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노산 선생이 시를 붙였다는 설도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전국시조백일장 심사위원들과 함께한 노산 (앞줄 중앙)
#노산 이은상
1903년 마산시 상남동에서 태어나 1922년 시조 '아버님을 여의고', '꿈깬 뒤'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동양적 호흡으로 노래하였다. 특히 시조의 부흥을 기울여 독특한 이론으로 양장 시조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쓰기도 했다. 1918년 마산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수료한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귀국한 뒤로는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기관에서 근무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광양지역에서 피신생활을 했었고, 8·15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해방되던 해 전남 광주에서 호남신문사 사장에 취임했고, 1950년 이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고,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이 되었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 1974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82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6년부터 노산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노산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타계하기까지 60여년간의 창작활동을 통해 시조 외에도 수필, 기행문집, 평전, 평론, 국학연구 관련서 등 4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 노산의 재평가 요원한가?
현재 마산에는 가고파를 기리기 위해 노산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마산 앞바다를 내려다 보던 산호공원과 무학산 자락(월영대 부근), 돝섬 등 3곳에 가고파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가고파가 마산에 시심이 흐르는 도시, 문학과 낭만, 서정의 도시로 이미지화 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 수십년 객지에 살았던 나 뿐만 아니라 고향 떠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 노래를 들을때 마다 옛 추억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언론과 단체는 노산 선생의 친독재정권 행적을 부각시키며 마산사람들 정서엔 "가고파" 라는 것은 이미 없어졌다 라고 주장하며, 그런 정신은 이미 사라진것이라고 말한다. 자기들 논리대로, 경마장의 경주말처럼 앞만 쳐다보는 획일적 시각만으로는 더불어 사는 이들과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기가 쉽지않다. 우리 주위에 벤치마킹할 상생의 사회통합 주제가 너무도 많은데, 그들의 행보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노산은 가고파 외에도 수많은 노래말을 남겼다, 당신의 가슴을 울리는 우리 가곡이 있다면 그 가곡 노랫말의 상당 수는 노산이 썼을 것이라고 단언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봄처녀, 고향생각, 그리움, 그집앞, 성불사의 밤, 장안사, 동무생각, 옛동산에 올라, 금강에 살으리랏다,,, 등등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모두 노산 선생의 작시다.
노산의 몇 싯귀를 보자,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장하던 금전벽우 잔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신는고 백천길 바다라도 닿이는 곳 있으리라 님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수록 깊으이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어느누가 우리말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있어서 우리 민족의 가슴에 흐르는 정서를 저렇게 쉽고 간결한 시귀로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말이 죽고 우리민족이 소멸하던 일제시대에 노산은 민족정서가 담긴 운률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우리말로 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노산은 가곡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및 기관의 교가도 작사했다. 경남지역에서는 경남대,창원대, 창원전문대,해군사관학교,창신고,마산중앙고,마산용마고(마산상고),마산여고,마산제일여중고, 무학여고(마산여상), 거창대성고 등 경남지역의 수많은 학교를 비롯,전남대, 영남대, 충북대, 한국외국어대, 홍익대, 경성고, 국립부산해사고는 물론 광주일고, 목포고, 수피아여고, 순천금당고, 신진공고, 인성고, 군산중, 동양중, 광주중앙초등,해군 군가, 대한의 노래, 경남도민의 노래, 창원시민의 노래, 강원도의 노래, 진천군민의 노래, 철도의 노래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한의 우연오 교수는 「반일·애국·광복 이념을 노래한 계몽기 서정가요」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속에서 노산의 「사우」, 「그리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을 높이 평가했다.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은유적인 수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그는 북한에서도 주목받는 민족시인이다.
몇해전 나는 전북 고창 선운사를 찾으면서 미당 서정주 시비, 서정주 시문학관등을 둘러보며 당시 마산지역사회에서 논쟁이 되었던 노산 선생의 평가와 연관시켜 생각했던적이 있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 역시 친일, 친독재 행적으로 인해 문학단체들로부터 언론기관에서 제정한 "미당문학상" 수상 거부운동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문학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은 더 이상 작가만의 작품이 아니라고 여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보고, 듣고, 읽으며 가슴으로 예술적 감흥을 느끼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 자산이다. 화합과 상생의 미래지향적 공동사회를 이야기 하면서 퇴로없는 이념에만 사로잡혀 작가의 작품에 대한 순수한 문학성마저 부인한다는 것은 글로벌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서는 편협한 시각이다.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 지금 살고있는 지역사회에 대한 어떠한 규범적 사명감을 부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말 없는 다수의 고향지킴이들도 너무 많다는 것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 고창에서는 미당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노산의 과거행적을 들추어 여론화했던 분들이 마음을 열고 더불어 함께사는 우리 사회 모든 이들의 화합과 창조적인 내일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재고했으면 한다. 노산은 이미 1982년 세상을 떠났다. 사라진 한 문인이 그 시대에 살며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포용의 반석위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한 쪽으로만 치우친 잣대로 그의 업적을 폄훼하며 설왕설래 하고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가 균열의 시대에 있다는 증거다. 뜨거운 마음으로 치열한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던, 조용히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왔던, 우리 모두 지나온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점 부끄럼 없이, 자신들에게 과연 얼마나 떳떳하였고 이웃과 사회와 나라에 정의로웠는지 성찰해봤으면 한다.
일부 단체에서 주장했던 노산 이은상의 친일은 노산이 만주국의 무슨 신문사에 잠시 몸을 담았다는게 죄목이었다. 그러나, 노산이 그 신문사에 재직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의 친일을 주장했던 곳에서는 이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노산 선생의 평생의 업적과 나라사랑을 깊이있게 제대로 살펴본다면, 일방적이고 편협된 이념의 잣대로 함부로 논할 인물이 결코 아니다.
중국땅에 이백과 두보가 있었다면 한반도 땅에는 소월과 노산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민시인의 위치에 있는 거목이 제대로 평가받아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셨으면 한다.
이은상 시 모음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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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인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젖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던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 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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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서
이은상
체온도 지탱하기 어려운
이 음산한 고난의 땅
역사의 실패한 땅에서
일어서야 할 민족이기에
한 가닥
희망의 길을 찾아
우리 갈 길을 가야 한다
인류의 역사 위에
수많은 의인들이 걸어간
거룩한 피와 눈물이 밴
진리와 아름다움의 길
그 길이
너무도 또렷이
우리 앞에 놓여 있구나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 재산
기원과 봉사와 희생
거기 영생의 길이 있네
험하고
가파로와도
오직 그 길만이 사는 길!
너와 나, 식어져버린
가슴 속의 사랑의 피
그 피 다시 끓이면
거기 화사한 장미꽃 피고
눈부신
부활과 영광의 길
우리 앞에 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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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둑에 주저앉아
이은상
문득 보니 미국 병정
총 들고 길 앞을 막네
미군의 담당구역이라
통행증을 보이라 하네
남한 쪽
분계선 안에서마저
자유 없는 이 지역!
산도 내 산이요
강도 내 강인데
날더러 그 누구 앞에
무슨 증표 뵈란 말요
강둑에
주저앉아서
목을 놓고 울어버린다
지지리도 못난 주인아
네 강산 보기가 부끄러우냐
정녕 부끄럽거든
고개 숙이고 지나가렴
말 없이
돌장승처럼
눈 내려감고 서 있는 사람
언덕에서 내려다 뵈는
악마의 골짜기 군사분계선
옛날엔 남북으로
기차 다니던 정거장 자리
레일은
우거진 잡초 속에
가로누운 채 잠들었고
녹슨 레일 위에
괴물 같은 저 기관차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울어
이 적막한 하늘 못 흔드느냐
지금 곧
북으로 북으로
냅다 한 번 달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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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이은상
이름조차 험한 산 고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구름이 장막처럼 몸을 휩싸고
비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세기의
종말을 고하는
선지자의 선언과도 같이
진실! 진실을 잃어버리면
거기는 캄캄한 지옥
허위의 얼굴을 대하면
악마보다 더 무서워
지구가
온통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는 오늘이다
여기 불타고 말라 죽어
잎사귀 하나 없이 헐벗은 나무
인간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고 서 있는 것 같아
경건히
그 십자가 아래 서서
속죄의 기도를 올린다
방향을 잃은 인간들
허위적거리는 발등에
차라리 이 순간
뇌성벽력이라도 쳤으면 싶다
주춤 서
검은 구름 토하는 고개
올려다 보는 심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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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孤石亭)
이은상
아름다 와라 절경 한 구역
예부터 이름난 고석정
물은 깊어 검푸르고
골은 돌아 몇 굽인데
3백 척
큰 바위 하나
강 복판에 우뚝 솟았네
위태론 절벽을
다람쥐? 기어올라
갈길도 잊어버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뜻은
여기서
전쟁을 끝내고
총 닦고 칼 씻던 곳이라기
소석정 외로운 돌아
오늘은 아직 너 쓸쓸하여도
저 뒷날 많은 사람들
여기 와 평화의 잔치 차리는 날
낯 익은
시인은 다시 와서
즐거운 시 한 장 또 쓰고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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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은상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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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부활
이은상
이 고통 아프다 말라
차라리 값진 고통이다
발로 짓밟고 눈 얼음 쌓여도
새 싹 움트는 밀알과 같이
믿어라
의심치 말고 믿어라
우리에겐 분명히 부활이 있다
길이 끝났다 말라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길
철조망 장벽 앞에서
우리 갈 길을 보았다
열어라
살육의 광야에서
부활의 길을 뚫어라
통일과 사랑 이뤄지는 날
자유와 평화 도로 찾는 날
탁류에 휩쓸려 가는
인간의 양심 회복하는 날
거기에
민족과 인류가 되살아나는
영광의 부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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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이은상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읍니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외로이 이집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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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마음
이은상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쉬고 뜻이 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꺾으면 눈물 흘리죠
꽃 피고 잎 퍼져 향기 풍기고
가지 줄기 뻗어서 그늘 지우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은 찾아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쳐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고 자라나
집집이 기둥 들보 되어주지요
나무는 사람 마음 알아주는데
사람은 나무 마음 왜 몰라주오
나무와 사람은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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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는 개선장군처럼
이은상
사랑의 큰 진리를
배반한 죄의 값으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조국과 아시아의 세계
멸망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멈추고
새 역사를 기다리자
우리들의 새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순풍에 돛 달고 오는
유람선같이 오진 않으리
얼굴과
몸뚱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오리라
우리들의 새 역사는
상처투성이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역전의 개선장군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리니
그 날에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 그와 함께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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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이은상
또 한 고개 높은 재 넘어
낭떠러지 길가에 앉아
고달픈 다리를 쉬노랄 제
뒤에서 돌격대처럼 달려와
'선생님'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껴안는 병정 한 사람
반가와라 이게 누군고
군인이 된 나의 제자
길목 지키는 파수병으로
이 깊은 산협에서 만나보다니
두 손목
서로 붙들고
어루만지다 이야기하다
산협길 멀고 험하고
해조차 뉘엿이 기울건마는
차마 서로 못 나뉘어
손목을 놓았다 잡았다
헤어져
산모퉁이 돌 때까지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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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속에 서서
이은상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 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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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五六島)
이은상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五六島라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먼바다라
오늘은 비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그엣 날 어느 분도 저 섬을 헤다 못해
헤던 손 내리고서 五六島라 이르던가
돌아가 나도 그대로 어렴풋이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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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송
이은상
보라, 저 울멍줄멍 높고 낮은 산줄기들
저마다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렸다.
산과 물 어느 것 한 가지도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황금 방울같이 노오란 저녁 해가
홍비단 무늬 수를 놓고 있다.
저기 저 구름 한 장도 함부로 건 것 아니로구나.
지금 저 들 밖에 깔려 오는 고요한 황혼!
오늘밤도 온 하늘에 보석 별들이 반짝이리
그렇다! 천지 자연이 함부로 된 것 아니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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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꽃마을 이야기
이은상
시인은 막대 끌고
또 한 고지에 올랐더니
파수 서 있는 병정 한 사람
산 밑 마을 가리키며
겪어 온
기구한 사연
들려주는 이야기--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칡꽃마을이 내 고향이죠
저기 약수터가 있어
거기 가 빌면 소원성취 한다기
약속한
처녀랑 하냥
아침저녁 같이 다녔죠'
'그러다 전쟁이 터져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모두들 죽고 흩어지고
나는 뽑혀서 군인이 되고
처녀는
마을을 못 벗어나
비참하게도 숨져버리고'
'나는 전투부대 따라
이곳 저곳 옮아 다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이 고지 감시대 파수병이 되어
날마다
칡꽃마을 내 고향
내려다보며 섰지요'
'저기 있는 약수터도
영험이 없나봐요
그렇게도 빌었었는데
소원성취 못하고서
옛 처녀
그려 보면서
명복을 빌며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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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詩碑)냐
시비(是非)냐...
순천만정원 내 한국정원 앞에 설치된 노산 이은상의 시비(詩碑)가 뒤늦게 논란이 되고 있다. 친일․친독재 활동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이은상은 그의 고향 마산에서도 문학관과 시비 설치에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거세게 반발했던 경험이 있는데, 순천에서도 철거 요구 움직임이 일고 있다.
순천시가 이은상의 시비를 설치한 것은 지난해 정원박람회 개장을 앞두고였다. 순천만정원 내 한국정원 입구 수목원 부지에 폭 3m, 높이 5m의 큰 돌에 이은상의 시 ‘나무의 마음’을 새겨 놓았다.
이를 두고 문인협회 문두근 전 회장은 “정원박람회를 개장한 후 이은상 시비가 설치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그의 고향 마산에서도 마산역 앞에 시비 설치한 것을 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데, 순천에서, 그것도 한국정원 앞에 설치해 놓은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문인협회에서 일정 예산을 부담해서 박람회장 곳곳의 쉼터에 시비를 설치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예산도 없고, 어떠한 시설도 설치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은상 시비만 설치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 때 시장 후보들에게 이에 대한 처리 계획을 묻고 싶다”고 말했다.
순천예총 이승정 회장도 “지난해 정원박람회 할 때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 말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예술계 전체 의견이 아닌 사견임을 전제로 “철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순천시 관계자는 “시비가 설치된 장소가 수목원인데, 나무와 관련한 시를 찾다 보니 이은상의 ‘나무의 마음’을 시비로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설치를 요구했던 게 아니라 직원 토론회를 통해 결정했는데, 나무의 중요성을 일반인에게 알리면 좋겠다는 취지로 설치했다는 설명이다.
이은상의 친일․친독재 논란과 지역 예술계의 철거 요구에 대해서는 “99%의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고, 나도 몰랐다”며 “논란을 제기하는 것은 하는 수 없는 것이지만 시장 후보들에게 철거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근본주의 개념보다는 세상의 변화를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한편 이은상의 고향인 경남 마산에서는 마산시가 31억 원을 들여 노산(이은상)문학관 건립을 추진하다 시민사회단체의 적극적인 반대활동으로 6년 동안의 논란 끝에 무산되었다. 결국 노산(이은상)문학관은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을 바꿔 수십 명의 문학인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산역장의 제안으로 마산의 한 로타리클럽이 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마산역에 이은상 시비를 설치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설치되자마자 누군가 페인트로 세 차례나 훼손하여 미관을 해치고 있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강제 철거를 시도하는 등 논란을 빚었다. 결국 지금은 이은상 시비 옆에 시민사회단체가 ‘민주성지 수호비’를 함께 설치하였다.
마산에서 이은상 기념사업을 반대해 온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영만 대표는 “친일을 했던, 친독재를 했던 사람을 시하나 잘 썼다고 기념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순천만정원 내 이은상 시비와 관련해서는 “나무나 숲에 대해 시 쓴 사람이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은상 시냐?”며 “이은상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이은상 시비는 혐오감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페인트를 뿌리고 계란을 투척하는 시민들.
밀가루를 투척하자 주위가 온통 뿌옇게 보입니다. 마치 최루탄이 터진듯....
페인트와 계란, 밀가루를 뒤집어 쓴 이은상 시비의 모습.
마산역 광장 가고파 시비
2013년 2월 건립되면서 페인트로 훼손되었던 가고파 시비가 말끔이 복원되었다.
마산역 앞 ‘가고파 시비’ 곁에 세워진
이은상 선생 폄훼 철판 碑는 없어져야 한다
-고향의 위대한 선조를 왜 억지로 지우려 하는가
오하룡 시인, 마산문협 고문
1.들어가기,
-노산 선생의 허물을 억지로 만드는 사람들
마산역 광장에는 마산의 상징 문인 이은상 시인의 작품 <가고파>가 웅장한 돌에 새겨져 서 있다. 이 비는 저 지난해(2013년) 2월 ‘가고파’를 사랑하는 시민 단체인 마산 로타리클럽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어색하게도 이 ‘가고파’ 시비 옆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라는 이름의 철판 비가 낯설게 서 있다. 이 비는 노산 이은상 선생에 대한 해당되지 않는 허물을 들추어 마산에서의 노산 선생 지우기에 앞장선 일부 시민단체가 세운 것이다.
이들은 얼토당토않게도 노산 선생의 친 독재 협조, 3.15폄하 등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이유를 들어 '가고파 시비' 설치 반대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그 시비를 제막하려하는 전날 밤, 시비 전면에다 페인트를 들이붓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시비제막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그 자리에서 반대시위를 벌이던 그들도 마산로타리클럽 회원과 마산 문인들을 비롯하여, 노산을 사랑하는 시민들의 완강한 대응에 의해 자신들의 주장은 무색해졌다. 그러자 그들은 상습화된 왜곡된 논리로서 이 비를 세우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이 땅의 관리인 마산역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불법으로 세운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 허구성을 낱낱이 지적한 마산문인들의 입장발표가 있었고, 그 밖에도 본인을 비롯하여 여러분이 칼럼 등을 통해 그들이 문제 삼는 불합리한 부분을 해명하여 왔다. 이런 사정에 밝은 분들에게는 중언부언의 군소리가 될 것으로 여겨지나,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분들은 자칫 이들의 주장에 대해 이해가 쉽지 않을 우려가 있어서 다시 둔필을 들어 이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용기를 가져본다.
여기서 용기를 들먹거리는 것은, 이 문제의 비를 세운 사람들이 또 거친 대응을 해오리라 여겨져서이다. 그렇다고 진실을 왜곡한 현실을 어찌 그냥 방관할 수 있으랴.
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비의 ‘상단 평면’에는, 그들의 눈에는 노산 선생의 행적에서 허물로 덧씌운 내용을 열거하고, ‘비의 정면’에는 시 노래 형식을 빌어 ‘가고파’를 패러디한 노래 글을 만들어 읊어 놓았다. 그 아래에는 이 비를 세운 취지문, 참여한 단체를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노산 선생을 흠집 내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들은 처음에는 이은상 선생에게 친일혐의를 씌워 가장 큰 문제인 것처럼 앞세웠다. 친일 혐의가 없자 이번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의 친 독재와 3.15의거에 대한 폄하를 문제 삼아 왔다. 이 비문의 핵심도 이것에 집중되고 있다.
그동안 마산문인들은 이들의 부당성을 끊임없이 지적하여 왔다. 그러나 이들은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왜곡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친일 흔적이 없으면 그 부분만이라도 솔직히 사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명색이나마 사회 정의를 표방하는 시민단체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없는 친일로 하여 그동안 노산 선생은 얼마나 명예를 훼손당해 왔는가를 생각하면 이 사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한번 문제 삼으면 비록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반성은커녕 다른 문제 꺼리를 들고 나와 우겨대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는 기왕에 이런 비가 섰으므로 이에 대해 아무런 반론이 없으면 이 자체가 진실인양 인정될 우려가 있으므로, 새삼 중언부언 되는 일이지만 다시 해명성 설명을 곁들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침묵이 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는 것이 철칙이므로 지금 서둘 것이 없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마냥 침묵한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 양식 있는 자세가 아니라고 보며, ‘언젠가’라는 불확실한 미래를 무한정 기다리는 것은 책임회피로 보여 둔필을 들기로 한 것이다. 이제 노산선생은 마산 출신의 대 시인으로서의 위치에 당당히 복원되어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보는 것이다.
2.철판비의 내용
그러면 구체적으로 문제의 철판비 속의 내용을 진실 측면에서 분석하여 보기로 한다. 철판비를 구성한 기둥에 ‘불합리 불합법’이란 글씨가 낙서처럼 흐리게 쓰여 있는 게 보인다. 이 글씨가 이 비의 핵심임을 드러내고 있다.
‘불합리 불합법’은 노산 선생이 3.15 의거를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몰아가는 저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노산 선생이 언급한 ‘불합리 불합법’은 당시 3월15일 일어난 ‘마산사태’ 또는 ‘마산사건’을 일어나게 한 원인이 당시 집권 자유당 정부라는 점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노산 선생이 ‘3.15의거를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라 한양 몰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다시 자세히 풀어가겠지만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가 아니라 ‘불합리 불합법이 빚은 불상사’로 언급한 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진실의 접근인 것이다.
1) 철판비 상단 평면의 비문모두 선으로 8개 단락으로 구획 짓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좌측부터 시작
첫째 단락
이승만 정권하에서
3.15가 일어나기 얼마 전 이은상은 문예유세단을 조직하여
자유당 대구 유세에서 시국을 임진왜란과 비교하면서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대통령이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둘째단락
‘28일 인천 유세에 이어 실시된 동당의 전국유세 계책은 다음과 같다.
오일 하오 2시(대전) 이은상’
-1960년 2월 28일자 <서울신문>
셋째 단락
“대통령 선거 유세 중에 시인 이은상 씨는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60년 3월 5일자<서울신문>
넷째 단락
“(이은상 선생에게 나온 문교부 지원금을) 군사혁명을 하는데 좀 써야겠다,
이해해 달라고 하니까 (이은상 선생이) 동의해 주셨어요.
516 군사혁명 공약을 이은상 선생에게 맡기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거사시기가 노출 될까 포기했습니다.”
-2002년 4월호 <월간조선>(‘두목 김용태, 혼신의 5시간 증언’)에서
*김용태는 군사정권의 무임소 장관을 지내기도 함.
다섯째 단락
“...조상의 얼과 전통을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을 내디뎠기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의자외다”라고 찬양
-박..묘비 헌시비문 中
여섯째 단락
소위 마산사태에 대한 질문에
‘불합리 불 합법이 빚어낸 불상사’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비정상적인 사태’
‘무모한 흥분’이며 ‘시위가 확대되면
‘과오와 과오의 연속으로 이적의 결과‘가 되고 말 것이므로
마산시민들에게는
‘내가 마산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자중하기를 바란다.’
-1960년 4월 15일자 <조선일보> ‘마산사태를 이렇게 본다’ 라는 인터뷰 기사 中
일곱째 단락
이 겨레 위하시어 한평생 바치시니
오늘의 백수홍안 늙다젊다 하오리까
팔순은 짧으오이다 오래도록 삽소서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1955년 <희망> 4월호에 ‘송가(頌歌)’라는 제목으로 이은상이 지은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을 기념하는 축시
여덟째 단락
당신 원로 중 원로인 이은상이
체육관 선거로 대..이 된 전..에게 바친 경하글에는
“전..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여론“
“아울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새 대..에게 바라는 국민의 간절한 뜻을
이 자리를 빌어 말씀 드리고자 한다.”며 글 아래 자필 서명을 남겨 놓았다.
-<정경문화> 1980년 9월호 <새 대..에게 바란다>
2) 앞 정면의 글
(위 평면 비면의 내용을 ‘시인의 친독재가’라는 제목을 붙여 가고파 시풍으로 패러디 하고 있다. 필자 주)
시인의 친독재가
이.. 자유당 영구집권 음모 동조
독재자와 그 후계자 정부통령 당선 위해
전국을 유세하며 부정 선거 힘보탰네
3.15와 4.11 마산 사건은 도대체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
지성잃은 데모요 비정상적 사태로다
고향걱정 한다면서 은근슬쩍 겁주기를
무모한 흥분으로 과오를 범치 마라
과오와 과오 연쇄는 필경은 이적행위
4월 학생혁명 탑문 516위해 써 줬을 뿐
쿠테타 협력 유신지지 학살자에 아첨 떨며
독재 권력 품속으로 가고파라 가고파라
(사이에 ‘큰 글자로 한국민주주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라고 제목을 달고 그 아래 취지문을 넣음, 필자 주)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으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진실을 덮을 수는 없고 거짓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역사의 정수, 3.15 마산 정신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은상의 반민주 친 독재 행적을 널리 시민에게 알리고
3.15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기 위하여
뜻있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이 비를 여기에 세운다.
2013.10.
315정신계승 시민단체연대회의
전국철도노동조합 부산지방본부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3. 진실 접근을 위한 내용 분석
1) 비면의 평면에 나열된 8개 단락의 글에 대하여
첫째단락;
*‘이은상은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라고 된 부분; 이은상 선생이 직접 유세단을 조직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있을 때 그렇게 몰아갈 수 있다. 그런 제시 없이 두루뭉수리 그가 선거유세단을 조직한양 즉, 주체인양 표현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고 말하였다고 한다.’라고 한 어미 부분; 직접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애매하게, ‘말하였다고’ 하고 있다. 누가 어디서 그렇게 말했는지, 아니면 어떤 매체가 보도했는지 밝히지 않으면서 이처럼 얼버무린 것은 진실이라 할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의 상징인물이 된 것도 그가 퇴진(하야)하고 난 이후다. 그 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거나 희박하였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 표현은 이은상의 개인적인 신념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둘째 단락;
*서울신문 1960년 2월 28일 날짜, 그날 오후 2시 자유당의 인천 유세에 이어 다음달 5일 2시 대전 유세에 이은상 선생이 나선다고 밝힌 기사로, 첫째 단락에서 의문시 되는 선생의 유세 참여 근거 제시로, 그 연장선상에서 문제를 인식하라는 것으로 억지 나열에 불과하다.
셋째 단락;
*서울신문 3월 5일자에 난 기사로 유세에서 ‘이은상 시인이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런 표현을 썼는지 밝혀야 하고, 강연 전문의 전체 문맥에서 파악해야 할 문제이지 부분만으로 그를 부정선거의 앞잡이인양 모는 것은 진실이 아니지 않는가.
*이 부분도 첫째 단락에서처럼 애매한 의문제시로 문제 삼자는 나열에 불과한 것이다.
넷째단락;
* 5.16혁명 세력과 친밀함을 허물삼아 노산 선생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한 증거제시로 보인다. 5.16주체세력인 김용태 씨의 2002년 4월호 월간 조선의 증언으로 노산 선생에게 개인적으로 지원된 금액을 혁명에 쓰겠다니까 동의했다는 것이다. 혁명이후 40년이나 지난 일로 김용태 씨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도 의문이고, 그들로서는 노산의 협력이 그들이 한 짓을 합리화 하는 수단으로 중요하므로 이런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증언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식의 흠을 잡자면 누군들 흠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부분은 노산 선생의 행동이 그간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분위기로 봐 혁명세력은 노산을 어떻게든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권력에 노산 선생이 직접 가담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다섯째 단락;
* 박..추모 헌시 쓴 것을 잘못인양 문제 삼고 있다. 박...에 대해서는 사후 4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에 와서도 국가산업화 발전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 민주화측면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노산 선생은 박.. 통치 18년을 지켜봐 왔다. 그런 그가 확고한 신념으로 그 인물을 평가하여 추모시를 썼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의 소산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여섯째 단락;
조선일보 1960년 4월 15일자 <마산사태를 이렇게 본다>라는 6개 항목 설문에 대한 노산 선생의 답변에 대한 것이다. 노산 선생의 3.15폄하운운은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작은문학 49호(2013년 봄 여름호, 29페이지)를 비롯하여 인터넷 불로그 등에 <노산 선생은 3.15를 폄하하지 않았다>는 제목으로 분석 기고한바 있다. 이 단락에서 저들은 필자를 비롯한 문인들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꽉 막힌 왜곡된 고집을 풀려 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지면 사정으로 그 6개 항목을 다시 중복 소개하지 않지만, 그 전문을 제대로 읽어보았다면 이런 억지는 계속 부리지 않을 것이다. 한번 읽어서 이해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더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노산 선생이 좀 쉽게 답변을 했으면 이해가 빠를 텐데, 한문 투로 써서 일반인들이 어렵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같은 지면의 답변에 소설가 김팔봉은 ‘마산사건이 촉발된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에 대해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고 선거를 부정하게 치른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쉽게 답변했다면 노산 선생처럼 곡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쉽게 쓰면 이해되고, 한문 투로 신중한 어휘를 구사한 그것만으로 오해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뜻이 어디 가겠는가.
*‘불합리 불합법(不合理 不合法)이 빚어낸 불상사(不祥事)’에 대하여; ‘마산 사건이 촉발된 근본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데 대한 노산 선생의 답변은 이랬던 것이다. 한문 투의 이 말이 어려워서인가. 이들은 당시의 3.15사건을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한 것을 ‘3.15를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라고 한양 왜곡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합리 불합법’은 ‘3.15의거’를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3.15 사태’ 즉, 폭력과 인명살상이 동반된 ‘마산사건’이 터지게끔 원인제공을 한 자유당 정부가 정치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기(빚어낸) 때문에 ‘마산사태’라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저들은 ‘3.15의거’를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 젊은이들은 그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모르고 있다. 3.15는 ‘의거’인데 왜 ‘마산사태’ 또는 ‘마산사건’이라고 하느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의거를 ‘불상사’로 표현한 것에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노산 선생이 설문에 대한 답변을 쓸 때의 신문보도는 ‘마산사태’ 또는 ‘마산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사건’, 그 ‘사태’가 ‘의거’로 규정되기 까지는 그랬던 것이다.
비록 ‘의거’의 성격으로 마산 ‘사건’은 일어났으나 처음에는 난동으로 볼 수 있게끔 격렬한 시민운동으로 일어났다. 부정선거에 대한 자연스런 울분은 점차 국가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이어져 시위가 격화되자, 파출소 같은 공공건물이 불타고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불상사’ 즉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므로 ‘불상사’라고 부르게 된 사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치안을 책임진 경찰과의 필연적인 대립은 선량한 시민의 희생을 불러오게 된다. 이때는 동족상잔의 6.25 전쟁의 참화에서 휴전을 맞고 겨우 7년여가 지난 시점으로 지리산 등의 일부 지역에는 공비의 출몰로 인한 불안감이 채 가시지도 않고 있었다. 나라의 미래를 의식하는 국민이라면 진정으로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당시의 시대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걱정 없는 평화시대에 부정선거가 저질어지고 그에 따라 저항운동이 일어난 한가한 나라 사정이 아니었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지성(知性)을 잃어버린 데모’, ‘비정상적인 사태’, ‘무모한 흥분’이며 시위가 확대되면 ‘과오와 과오의 연속으로 이적의 결과’가 되고 말 것이므로 마산 시민들에게는 ‘내가 마산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자중하기를 바란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작은문학49호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나 지면이 다르므로 여기서도 약간의 설명을 곁들인다. 이 부분 노산 선생의 우려 섞인 답변은, 어느 한 가지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다. 격렬한 데모에 어찌 이성이나 지성이 통할 것인가. 그러나 노산 선생은 이성적인 ‘지성’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한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위협되는 격렬한 시위라면 ‘비정상’이지 ‘정상’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공산세력과 전쟁을 겪은 상황이고,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잠시 쉬는 휴전 상황이니, 우리나라가 혼란으로 난관에 봉착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런 사태까지 걱정하여 ‘이적’을 들먹인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따라서 이들이 이런 노산 선생의 답변을 문제 삼는 것은, 황당하게도 노산 선생이 그런 사태를 잘한다고 부추기지 않고 왜 만류하는 태도를 취했느냐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것이다. 부정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시위이니 노산 선생까지 나서서, 도시야 망가지든 말든 시민들이야 더 희생되든 말든 사태를 확대시켜 끝장을 보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이는 것이다.
한 도시의 운명이 좌우되고, 사태에 따라서는 더 많은 인명 손실은 물론이고 애써 모은 재산까지 한 순간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찌 그런 일을 노산 선생이 앞장서 나서지 않고, 수습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문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노산 선생은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다운 답변을 하고 있다. “내가 마산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자중하기 바란다.” (저들은 ‘자중하기 바란다.’는 표현까지 문제 삼고 있다. 그렇다면 더 ‘폭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해야 된다는 말인가.)
이보다 더한 절실한 당부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애향, 애족, 애국자를 3.15를 폄하한 사람으로 몰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협소한 의식의 사람들의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일곱째 단락
*1955년 잡지 <희망>에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축시 쓴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노산 선생이 앞장서 이..의 장기 집권을 만류하는 태도를 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그가 앞장섰다고 실현 되는 일도 아니었겠지만, 한편으론 평생을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모습을 지켜본 그로서는, 진정으로 그가 나라의 기틀을 잡기위해, 독립운동 할 때의 기백으로 더 집권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더욱 이때는 휴전을 2년 정도 지난 시점이어서, 그가 정치를 잘못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축시를 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노산의 축시가 무엇이 문제된단 말인가.
여덟째 단락
* 정경문화 1980년 9월호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의 노산의 글에 대한 것이다. 여기 비문에 소개한 글과 김봉천(소설가) 지음 <노산 탄신 100주년 기념 노산 이은상 선생)(2002.12.5. 창신고등학교)에 소개된 원문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단순 비교해 보더라고 여기 글은 노산 선생이 전두환 정권에 아부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왜 이렇게 사사건건 노산 선생을 폄훼 왜곡과장하려 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새 대..에 바란다
1. 창조적 진화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2. 자주 민주 노선의 정책 수행자가 되라.
3. 국제적 통찰력의 소유자가 되라.
4, 강력한 지도자로서 국민의 동반자가 되라.
5. 인재를 사랑하고 널리 물어야 한다.
6. 법치와 덕치를 겸행하라.
7. 국민의 스승으로서의 지도자가 되라.
전기 김봉천의 설명에 따르면, 노산 선생이 여기에 응할 무렵은 지병인 방광암으로 고통을 겪을 때여서 전두환 정권과 사적인 관계나 교류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나라만 의식한 진정어린 충언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억지로 이 정권에 까지 얽어매어 군사 독재에 협력한양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허물 씌우기가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2) 앞 정면의 글에 대하여
*‘친독재가’ 내용 분석
첫 연; 노산 선생의 이.. 사랑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자로서의 이..을 보는 그 연장선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그가 부정까지 해가며 독재하도록 음모하고 동조하였다고 몰아가는 것은 지나치다 할 것이며, 한두 군데 유세한 것을 전국을 돌았다고 하는 것도 지나친 과장이지 진실이 아니라고 본다.
둘째 연; 당시는 마산사건, 마산사태라고 부른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3.15의거라고 왜 부르지 않느냐고 오늘의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不合理 不合法이 저질은 不祥事’라는 표현을 ‘3.15의거를 불합리 불합법한 불상사‘로 부른 것처럼 억지 써서는 안 된다. ’불합리 불합법‘은 당시 부정을 저질은 자유당 정부를 말한 것이며, 그로 하여 마산사태, 마산사건 즉 ’불상사‘가 일어난 것으로 바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명료하게 의미가 드러나는데도 두루 뭉실 3.15를 ’불상사‘로 말한 양 몰아가서는 안 된다. 3.15의거가 왜 ’불상사‘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잘 살펴야 한다, 당시는 3.15 의거가 ’마산사태‘, ’마산사건‘으로 불리고, 파출소 등 공공건물이 불타고 파괴되고, 선량한 시민이 피를 흘리는 위중한 사건임을 바로 받아들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정부의 잘못(不合理 不合法)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不祥事)‘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잘못 표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지성 잃은 데모’요 ‘비정상적인 사태’는 사실 그대로다. 앞뒤 문맥을 자르지 않고 보면 바로 이해된다. 그것을 진실이 아니고 문제가 있는 양 호도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면 이 글은 억지그대로이므로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정상이다.
셋째 연; 당시 혁명세력인 김용태의 대담 속에 나오는 내용은, 시간적으로 40년의 간극이 있었던 일로 그의 말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4월 학생비문을 노산이 지은 것을 문제 삼는 것은, 그때가 어느 땐가. 노산 선생이 그 글을 쓰는데 흠결이 있었다면 맡겼겠는가. 상식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신지지 학살자에 아첨 떨다’ 등은,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 대한 바라는 바를 응답한 내용에 불과한데 그것이 어찌 아첨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 ‘친 독재가’는 공허한 거짓의 ‘친 독재가’이므로 이 비를 세운 사람들의 스스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증거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비를 세운 단체의 글에 대하여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으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진실을 덮을 수 없고 거짓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큰 따옴표로 이렇게 쓰고 있는 부분을 보면, 지금까지 분석에서 드러났듯 이 글은 이 비를 세운사람들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저들이 ‘이은상의 반민주, 친 독재 흔적을 널리 시민에게 알리고’라고 한 부분을 가장 먼저 살펴보자. 이은상의 반민주라고 한부분이나 친 독재라고 한 부문도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노산 선생의 정치적인 신념에 불과한 부분이다, 그것을 문제 삼아 자꾸 제기하여 억지 쓰는 편협한 행동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게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15의거 정신이란 무엇인가. 부정과 불의를 못 참고 행동으로 나서는 정의감이다. 사실이 아닌 데도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의 자존만을 앞세우는 잘못된 자세를 바로 잡는 것이 3.15정신에 부합되는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평생을 애국애족과 애국문학으로 일관한 고향의 대 선배 시인을 욕되게 한 지금까지의 행동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이제부터 선생의 문학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업적을 기리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마치면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들의 철판비 옆에는 굴뚝처럼 생긴 철봉으로 된 기둥 조형물이 서 있다. 거기에는 의도적으로 낙서처럼 크게 처리한 한글 글씨가 보인다. ‘마산사태’는 글씨는 또렷하게 쓰고 ‘불합리 불 합법’ 글씨는 약간 흐리게 처리해 놓고 있다.
다시 밝히지만, 우리 문인들은, ‘불합리 불 합법’은 3.15의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무능하고 부정선거를 저질러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간 자유당 집권 정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해명한바 있다. 그런데도 저들은 마이동풍 격으로 ‘무슨 소리냐, 노산 선생을 매장 시키기 위해서는 3.15의거를 그렇게 말했다고 몰아가야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은 행태를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억지를 잘 하는 짓인 양 자랑스레 밝히면서 ‘뜻있는 시민들이 이 철판비 건립에 성금’을 냈다고, 그러므로 이 비를 세운 것이 합당한양 과시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분들 중에는 저들에게 동조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데도 진실을 잘 모르고 저들을 후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도 처음에는 노산 선생을 끈질기게 문제 삼는 단체가 그동안 이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바로잡고 건전사회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을 지켜보고 존경해 왔다. 모르긴 해도 이들은 처음에는 떠도는 소문에 의해 노산 선생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관심을 가졌으리라 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한동안 노산 선생에게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하여 이처럼 해명에 나서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지면에서나 앞서의 여러 지면에서 해명해 왔듯이, 지금까지 문제로 인식해 온 것이 상당 부분 허구였음이 드러나는데도 계속 침묵한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흔쾌히 진실을 수긍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문제 삼았으니 ‘한 점이라도 오점이 있는 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계속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도 노산 선생의 평생이 완벽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드러난 행적이나 문학적인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므로 거기에 합당한 공정한 평가를 하자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의미도 없다.
잘못된 편견으로 하여 그동안 마산은 노산 선생을 너무나 그늘 속에 파묻어놓았다. 이제 그 그늘을 흔쾌히 걷어낼 시점에 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행동의 일환으로 먼저 마산역 앞의 ‘한국 민주주의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라는 구호로 서 있는 ‘철판비’가 철거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비는 노산 선생의 행적을 오해한데서 온 잘못된 실체이기 때문이다.
시비(是非)는
시비(是非)대로...
역사(歷史)는
역사(歷史)대로...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
노산 선생은 다양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는 사학가요 수필가요 시조작가였다. 처음에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던 노산이 본격적으로 시조작가로서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후반에 일어났던 시조부흥 운동 이후였다.
그의 시조는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인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향수와 감상과 무상과 자연예찬을 노래하였다. 이러한 그의 서정성이 우리 가곡에 걸맞아 인구에 회자하는 주옥 같은 노래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이 지금까지 국민 가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국 분단의 아품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가들에 대한 찬양 등 개인서정보다 사회적인 면에 치우쳐있어 국토 어디에 가나 서도가 김충현과 함께 그의 노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있어 노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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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작품: 고지가 바로 저긴데/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오륙도/가고파/
이 마음/봄처녀
2. 노산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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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작품
*고지가 바로 저긴데
苦難의 운명을 지고 歷史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高地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心臟만 남거들랑
부등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성불사 1수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너라고 불러보는 祖國아 너는 지금 어드메 있나
누더기 한 폭 걸치고 土幕 속에 누워 있나
네 소원 이룰 길 없어 네 거리를 헤매나
오늘 아침도 수없이 떠나가는 봇짐들
어디론지 살길을 찾아 헤매는 무리들일랑
그 속에 너도 섞여서 앞 山 마루를 넘어왔나
너라고 불러보는 祖國아 落照보다 더 쓸쓸한 祖國아
긴긴 밤 가얏고 소리 마냥 가슴을 파고드는 네 이름아
새 봄날 桃李花같이 활짝 한 번 피어주렴
*오륙도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오륙도라
흐리락 맑으락 함에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빈 바단데
오늘은 비 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갓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나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 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 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 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녀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人生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 없고
단 잠 들어 죄 없은 몸이
그 바다 물 소리를
밤 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 바다 물을 따라
나명 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 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봄처녀
봄처녀 제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하얀구름 너울 쓰고 眞珠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길에 내 집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냥 나가 물어 볼까나
2. 노산의 생애
경상남도 마산에서 이승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 일본 사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이화여자전문대학 교수, 동아일보사 기자, 조선일보사 출판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하고, 사상범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 광복으로 풀려났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이었다.
1932년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 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 분단의 아픔,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주요한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를 시험하여, 시조의 단형화를 시조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 순례 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데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그가 죽자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고향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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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친독재'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 기념사업이다. 창원(옛 마산 포함)에서는 시시때때 이은상 기념사업을 두고 논쟁이 벌어져왔는데, 최근(2015 . 01. 14)에 다시 불거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은상은 '민족시인'이고 애국지사이기에 추앙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마산의 자랑인 '3·15의거'를 폄훼하고 독재정권에 빌붙은 인물이기에 기념사업을 절대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은상 기념사업을 거론하는 게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만든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 3.15의거를 폄훼했던 이은상이 쓴 <가고파> 시비가 마산역광장에 세워져 있는데, 14일 누군가 시비 앞면에 페인트로 훼손해 놓았다. 페인트는 계란에 넣어 던져져으며, 바닥과 시비 앞면에 계란이 붙어 있었다.
ⓒ 윤성효
이은상은 누구?
이은상은 누구인가.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내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근무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그는 동국대 교수, 충무공이순신장군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을 거쳐 총력안보국민협의회 의장 등을 지냈고, 1981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전.. 정부는 그가 작고했을 때 문화훈장 1등급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국가가 지원하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러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했다.
그러나 그는 '친독재 행적'이 뚜렷하다. 마산 출신인 그는 마산의 자랑인 3·15의거와 4·11마산사건(1960년, 김주열열사 시신인양 날짜)을 폄훼했다. 그는 당시 <조선일보> 등의 인터뷰를 통해 3·15의거에 대해 '불합리·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고 발언했다.
문학관, '가고파' 시비, '은상이샘' 등 논란 계속
▲ 마산문학관 전경.
ⓒ 윤성효
이은상 기념사업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던 때가 있었다. 1999년 옛 마산시(2010년 창원시로 통합)는 제비산 공원 부지에 '이은상문학관' 건립과 생가복원, 테마공원 조성 계획을 세웠다.
논쟁 끝에, 옛 마산시의회는 2005년 5월 20일 '마산문학관 운영 조례안'을 채택했다. 옛 마산시와 마산시의회가 '이은상(노산)문학관'을 버리고 '마산문학관'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재 마산문학관에는 시 "옛 동산에 올라"가 새겨진 '노산시비'만 있다. 문학관 명칭을 '노산'이 아닌 '마산'으로 하기로 결정 난 뒤부터 이은상 기념사업 논쟁은 잠잠했는데, 2013년 마산역 광장에 시비가 세워지면서 다시 시끄러웠다.
코레일 부산경남본부 마산관리역과 국제로타리클럽이 마산역 광장에 시 "가고파"를 새겨, 그해 2월 6일 제막식을 열기로 했다. 당시 마산관리역은 보도자료를 통해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의 가고파 노래비를 세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제막식을 앞두고 시비에 페인트 테러가 가해진 것이다. 누군가 시비 앞뒷면에 페인트를 칠해 놓았고, 제막식을 앞두고 페인트를 지우는 작업을 벌였지만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남마산로타리클럽과 경남상인연합회, 마산포럼,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 등 문인․봉사단체들은 '마산역 광장 이은상 시비 보존회'를 결성해, 페인트를 닦아내는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 시비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5개 단체로 구성된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는 마산역 광장에서 "역사왜곡, 유신부활 저지를 위한 3·15정신계승 실천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은 시비 철거를 시도하다 마찰을 빚기도 했다.
▲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 전국철도노조 부산지방본부, 민주노총 경남본부가 14일 오전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이은상의 '가고파 시비' 옆에 "시인의 친독재가"라는 안내판을 세웠다.
ⓒ 윤성효
하는 수 없이 3·15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는 '가고파' 시비 옆에 "시인의 친독재가"와 "한국민주주의 요람, 민주성지 마산 수호비"라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마산역이 시비를 철거할 수 없다고 하자 시민단체가 이은상의 친독재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 안내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자유당 영구집권 음모 동조 / 독재자와 그 후계자 정부통령 당선 위해 / 전국을 유세하며 부정선거 힘 보탰네 / 3·15와 4·11 마산사건은 도대체 / 불합리 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라 / 지성잃은 데모요 비정신적 사태로다 / 고향 걱정 한다면서 은근슬쩍 겁주기를 / 무모한 흥분으로 과오를 범치마라 / 과오와 과오 연쇄는 필경은 이적행위 / 4월학생혁명탑문 5·16 위해 써줬을 뿐 / 쿠데타 협력 유신지지 학살자에 아첨 떨며 / 독재권력 품속으로 가고파라 가고파"(시인의 친독재가).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으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민주주의 역사의 정수, 3·15마산정신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은상의 반민주 친독재 행적을 널리 시민에게 알리고, 3·15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기 위하여 뜻있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이 비를 여기에 세운다"(수호비).
오래 전부터 '은상이샘' 철거도 요구하기도
▲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06년부터 마산 육호광장 옆에 있는 '은상이샘'의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
이은상과 관련한 기념물은 또 있다. 마산 육호광장 옆에 있는 '은상이 샘'이다. 이 샘은 지금의 자리에서 20m 떨어진 곳에 있다가 도시개발로 1999년 6월 옮겨 놓았던 것이다.
옛 마산시가 세운 표지석에는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을 기리고 시민의 얼과 정서를 해맑게 하기 위하여 생명의 젖줄 은상이샘을 이 자리에 옮겨 복원합니다"고 되어 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06년부터 은상이샘의 철거를 촉구했다. 이 단체는 한때 3·15의거 기념일 때마다 이곳에서 '은상이샘 철거 촉구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김영만 전 열린사회희망연대 대표는 "이은상 추종자들은 주민들이 이 우물을 '은상이샘'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지만 '은상이'를 '이은상'으로 단정할 수 없다"며 "지역에서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샘을 통칭 '은새미'라 하고, 경상도 발음으로 샘을 '새미'라고 말하는데, 이 샘은 '은상이샘'이 아니라 '은새미'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창원시는 옛 마산 상남동(현 노산동)의 도시재생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은상의 작품을 주제로 한 골목길 테마조성사업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창원시는 이 사업 계획을 아직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창원시의원 등을 통해 확인이 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마산), 6월항쟁정신계승사업회,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등 관계자들은 13일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더 이상 이은상을 두고 문화관광자원이니 문화콘텐츠니 하는 말은 하지 마라"며 "그는 관광상품으로서의 매력도 가치도 이미 상실했다"고 밝혔다.
현재 창원시는 '마산문학관' 명칭을 '노산문학관'으로 변경할 계획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골목길 테마조성사업의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 이은상과 관련한 내용이 들어갈 경우 논란이 될 수도 있다.
김영만 전 대표는 "'은상이샘'처럼 조작·왜곡해서 전설을 만들 수도 있고, 친독재 인물을 미화할 수도 있는데, 창원시의 골목길 테마조성사업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
(논쟁은 지금도 진행中...2015 . 01 . 14자임을 밝힘. - 옮긴자로부터)
조선어학회 선열 추모탑 세울 10가지 이유
“한글 마루지에 추모탑이 없으면 빛좋으면 개살구가 된다”
송현 한글문화원장
1.세종로 일대 한글마루지 조성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사
한글마루지 조성은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역사이다. 서울시는 세종대로 일대 통의·통인·내수·세종로동 등 47만㎡에 ‘한글 마루지(랜드마크)’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1월 12일(수) 밝혔다.
“세종로 일대 47만평방미터 한글 마루지로 조성 서울시가 정치·문화·역사 중심가로인 세종대로 일대를 ‘한글 문화관광 중심지’로 조성, 세계적 문화유산이자 우리고유 문자인 한글을 문화상품화 하는데 본격적으로 나선다. 마루지는 랜드마크를 의미하는 우리말 조어(국립국어원 선정, ‘09년)로 세종대로 일대는 세종대왕 생가터, 주시경 집터, 한글학회 등 한글 관련 기존 시설들이 풍부해 한글을 주제로 하는 문화관광 중심지 조성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 서울시의 설명이다. 특히 서울시는 민간협조를 받아 이 일대 지역 내 간판, 표지판 등 모든 문자들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안을 점진적으로 추진한다. 서울시는 민간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설명회 등을 통해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한글 마루지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대상지가 경복궁서측과 세종로 지구단위계획구역, 도시환경정비구역 등으로 도시관리계획에 한글 마루지 사업의 내용을 반영해 제도적으로 관리해나갈 계획이다.
서울시는 그동안 한글이 음운표기의 과학성, 디자인적 가치 등이 세계에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면,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표 문화상품으로 세계에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한글은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 시상, 한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세계 학자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문화상품화 등 통합적 노력이 부족했다. 공공기관의 경우 한국어 보급에 주력해 성과를 얻고 있으나, 한글 자체에 대한 문화상품 개발은 다소 미흡한 실정이며, 조각, 픽토그램, 디자인,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간의 예술 및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종합화 체계화 되지 못한 채 영세규모로 추진되고 있다.
서울시는 ‘한글 마루지’에 공원·시범가로 등 한글 관련 시설 조성 한글 사랑방 운영·생가 재현 등 한글 문화상품화 한글교실·붓글씨 체험 등 한글체험관광 활성화 한글 문화콘텐츠 지원 한글 관련 국제행사 개최 등을 통해 한글 마루지를 세계인이 주목하는 대한민국 한글의 상징로로 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먼저 서울시는 세종문화회관 옆에 위치한 세종로공원에 8,868㎡규모 ‘한글 11,172마당’을 올 상반기 중 조성한다. ‘한글 11,172마당’이란 한글자모 24자로 만들 수 있는 총11,172 글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로, 세로 10cmx10cm 돌포장석에 11,172명의 국민이 한자씩 써서 공원 바닥에 설치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한글11,172마당’ 조성에 참여할 시민을 오는 2월 중 공모를 통해 선정할 계획이며, 구체적인 방안은 추후 발표할 예정이다. 한글과 별도로 각국 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해당 국가의 돌에 각국의 고유문자로 새긴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담은 평화의 메시지를 전시할 예정이다. 위치와 규모, 형태 등은 디자인위원회 자문을 거쳐 마련한다고 시는 밝혔다.서울시는 ‘한글학회~주시경집터~사직로’를 잇는 연장 900m엔 주시경길 시범가로 조성사업을 올해 추진한다. 국어학자인 주시경은 일제 강점기 탄압에도 불구, 한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을 끊임없이 진행해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크게 기여했다. 시범가로에는 픽토그램을 활용한 도로 표지판, 안내표지판과 한글 벤치, 한글관련 야외 전시와 각종 퍼포먼스 공간을 마련한다.
서울시는 시범사업 추진시 인근 주택, 상가 등 건물 전면공간의 개선이 함께 이루어질 때 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 주변 상인, 공공기관 등과 협의체를 구성해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종로구 내수동 75번지 일대에는 주시경 선생을 기리는 기념공원도 조성한다. 주시경 집터는 현재 주상복합건물(용비어천家)내에 주시경집터를 알리는 기념조형물만 설치되어 있다. 이에 주시경집터의 복원은 현실적으로 곤란해 인근 공원 내에 주시경기념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주시경기념공원 조성은 여론수렴 등을 통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 후 ‘12년부터 추진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서울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한글 마루지’ 대상지에서 최소 1박 이상 체류하면서 한글을 배우고 체험하며, 한국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한글 사랑방(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우선 시범사업으로 올해 전통한옥 육성지역인 서촌지역의 적정시설 대상지를 선정, 매입해 ‘12년 마당과 뒤뜰이 있는 한옥 건물로 리모델링해 운영할 계획이다. 숙박방은 온돌·창호 등 한옥구조를 유지하면서 독립공간은 보장하되, 세면, 식사 등은 한국전통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시설은 약10인 규모의 숙박방, 공용식당(마루), 정보마당(pc,독서실), 사랑채(휴식, 대화), 관리실 등으로 구성된다.
서울시는 장기적으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태어난 생가 재현을 추진할 계획이다. 현재 세종대왕 생가터를 알려주는 것은 통인동 자하문로 보도 상에 설치된 표석뿐이다. ‘10. 1월 서울시에서 연구한 ‘세종시대 도성 공간구조에 관한 학술연구’에 따르면 세종대왕 생가는 준수방 잠저(세종실록)로 통인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엔 현재 저층의 양옥과 한옥이 밀집되어 있다. 조선시대 대군의 가사(家舍) 및 가대(家垈)의 규모로 볼 때 약 3,861㎡로 추정되는 세종대왕 생가 재현을 위해 시는, 재현 위치, 규모, 방법 등에 대한 타당성을 우선 검토하고, 대규모 예산이 소요됨을 감안해 생가재현에 대한 시민공감대 형성 후 추진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약 1시간 교육과정을 통해 한글을 읽을 수 있는 한글독음(讀音) 프로그램을 올 7월까지 개발해 보급할 계획이다. 독음프로그램은 국제선 항공기 기내방송을 통해 송출하고 외국에 설치된 한국어 보급기관인 세종학당에 보급할 계획이다. 또, 광화문광장 세종이야기 등 적정장소에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1일 한글 교실을 운영해 한글의 우수성을 외국 관광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또, 독음 프로그램을 활용한 한글 교육으로 다문화 가정의 한글에 대한 언어 장벽을 극복하고, 우리사회에 조기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서울시는 이미 광화문광장에서 운영하고 있는 가훈써주기, 한글이름써주기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한다. 외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이름을 한글 휘호로 써주고, 희망자에 한해 즉석에서 표구 제작해 실비로 판매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올해 6월 공모전과 전시회를 개최해 한글 자모를 활용한 벤치, 도로시설, 표지판 등 공공디자인과 픽토그램을 개발-보급할 계획이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펜시, 문구, 악세서리, 인테리어 등의 상품을 개발, 홍보해 한글 상품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한글 자모 형태의 조각과 한글 서예 작품 등을 전시해 한글과 관련한 문화-예술 저변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서울시는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문화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해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 한글 국제학술대회 등을 개최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세종대로 일대 공간적, 제도적 기반 마련과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각계 전문가 자문을 통해 ‘세종대로 일대 한글마루지 종합계획’을 마련할 계획이다.‘한글 마루지 자문단’은 종합계획 수립과정에서 한글, 한글한류, 외국인, 디자인, 한글상품, 역사문화 분야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다. 김병하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국가고유문자를 소재로 마루지를 조성한 도시는 서울이 전 세계를 통틀어 처음”이라며 “세종대로 일대를 한글을 주제로 한 다양한 이야기가 흐르는 곳으로 조성해 한글 대표 문화상품으로 개발 할 것”이라고 말했다.“(동아일보. 2011. 1. 12)
2.조선어학회 사건과 순국선열추모탑
1)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이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한글연구를 한 학자들을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는 죄목으로 탄압·투옥한 사건을 말한다. 일본이 침략전쟁에 깊이 빠져들고 있던 1940년대에 조선 식민 통치를 강화하면서 민족을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한국인의 정신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하였고, 우리의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국인이 한국말을 못하게 하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도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로 강의하고 일본어를 기본과목으로 가르치고, 학생들의 학교생활에서도 일본어만을 쓰게 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을 일본인화 하려는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가운데, 한국의 지식인층의 저항을 탄압하지 않으면 그 뿌리를 뽑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시경(周時經)을 중심으로 한글연구가 확대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민족의 혼을 지켜야한다는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면서, 1921년 12월에는 조선어학회가 창립되어 국어와 한글연구를 꾸준히 해나갔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고, 사전편찬을 위한 연구로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어사정>·<외래어표기> 등 국어의 제반 규칙을 연구 정리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정신이 강한 사람을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拘禁令)’을 공표하여 민족운동이나 민족계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1941).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 학생 박영옥(朴英玉)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을 하다가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조선이름 安正黙)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서울의 정태진(丁泰鎭)으로부터 민족정신을 지키도록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정태진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서울에서 조선어사전을 편찬을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당시 조선어사전은 대동출판사에서 인쇄를 하고 있었다(1942. 4). 나아가 정태진의 배후를 강력 조사하면서, 그와 관련된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을 하는 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한글교육 폐지와 조선의 지식인을 모두 검거해야한다는 단서를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들이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고, 그리고 증인으로 붙잡혀간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검거과정과 취조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본 검사에 의하여 처벌 수준에 따라 분류되었는데,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정태진·김양수(金良洙)김도연(金度演)·이우식(李祐植)·이중화 (李重華)·김법린(金法麟)·이인(李仁)·한징(韓澄)·정열모(鄭烈模)·장지영(張志중화暎)·장현식(張鉉植) 등 16명은 기소 처분되었고, 12명은 기소유예 되었다. 기소 처분된 16명은 <치안유지법>을 어긴 내란죄로 몰아 예심재판에 회부됨과 동시에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어 옥살이가 시작되었다(1943. 7. 1). 그리고 기소 유예된 사람과 나머지 등 17명은 석방되었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 중일 때, 이윤재가 1943년 12월 8일에, 한징이 이듬해 2월22일에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정열모와 장지영은 공소 소멸로 석방되었다. 그리하여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함흥지방재판소에서 9회에 걸쳐 진행되어 1945년 1월에 최종 선고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범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유죄가 선고된 자에게는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결정문이 내려졌다. 집행유예와 무죄가 선고된 7명은 석방되었고, 5명만이 긴 수감생활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은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8월 13일자로 기각되었다. 정태진은 상고보다는 복역을 마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복역을 마치고 1945년 7월 1일에 출옥하였다(미결수의 수감기간도 징역기간에 합산됨). 나머지 4명은 바로 광복을 맞아 8월17일에 출소하였다. (네이버백과사전/ 류 재택)
2)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이란?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은 한글학회 김 종택 회장이 지난 2010년 11월 25일 오 세훈 서울 시장께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 건립의 일”이란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최초로 공론화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순국하거니 옥고를 치른 순국선열 33인을 추모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탑을 말한다.
조선어학회 순국 선열 33인은 애산 이 인, 법상 김 법린, 민세 안 재홍, 성산 김 도연 ,열운 장 지연, 한메 이 윤제, 야자 이 만규, 창남 윤 병호, 고루 이 극로,연아 서 승효, 해관 신 윤극, 외솔 최 현배도,약영 김 양수, 건재 정 인승, 한뫼 안 호상, 석인 정 태진, 월파 서 민호,노산 이 은상, 동운 이 중화, 효창 한 징,애류 권 덕규, 추정 이 강래, 남저 이 우식,가람 이 병기, 한결 김 윤경, 백수 정 열모, 일석 이 희승도, 일농 장 현식,눈솔 정 인섭, 무돌 김 선기, 또나 이 석린, 권 승욱 등이다.
3.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을 세워야하는 10가지 이유
1)한글 마루지에는 교육적이고 감동적 이야기(주제)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 초입에 “노인과 여자”라는 그림이 있다.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장면을 그린 춘화 같은 그림이이다. 이 그림의 숨은 뜻을 모르는 이들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 행각을 그린 춘화가 어떻게 국립미술관에 걸려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자의 아버지다. 커다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는 노인의 딸이다. 누가 보아도 이 그림은 싸구려 춘화로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알면 춘화로 여긴 사람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하고 도리어 숙연하게 한다.
이 그림 속에 나오는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이다. 식민지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는 가장 잔인한 “음식물 투입 금지”란 형벌을 내렸다. 여러 날 째 물 한모금도 먹지 못한 노인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노인의 가족들은 노인이 죽기 일보 직전에 이 비통한 소식을 듣는다. 노인의 딸은 해산한지 며칠 지나서 이 소식을 듣고, 무거운 몸으로 감옥으로 달려갔다.
노인은 눈이 다 풀어져 허연 눈만 껌벅이고 있었고 죽어가고 있었다. 양손과 양발은 뒤로 묶여진 채로 감방 바닥에 내동이쳐 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는 위정자에 대한 적개심으로 핏발이 섰다. 꿈에 그리던 아버지가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딸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를 보고 마침내 딸은 가슴을 풀고 팅팅 불은 자신의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딸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허연 눈만 껌벅이던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딸의 품에 안겨 젖을 빨던 아버지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이 그림은 천박한 포르노가 아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다.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그림에 담긴 뜻을 아는 푸에토리코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 위대한 그림을 감상한다 . 오늘도 푸에토리코 사람들은 이 그림 앞에 서서 고개 숙여 묵도를 한다. 그리고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2)조선어학회 선열추모탑이 한글마루지의 핵심 조형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순국선열들의 이야기는 위의 푸에토리코 국립 미술관에 걸려 있는 “노인과 여자” 보다 더한 깊은 감동과 숭고한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세종로에 조성하는 한글 마루지에는 조선어학회 순국선열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은 추모탑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만약 한글마루지에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야 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 되고 말 것이다.
3)애국선열의 빛나는 유업을 후손들이 은혜로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 건립을 최초로 공론화한 한글학회 김 종택 회장은 “조선어학회 순굴 선열 추모탑 건립의 일”이란 글에서 “세계 역사상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하여 이렇게 피나는 투쟁을 한 사례도 없거니와 그 빛나는 유업을 계승하고도 한 조각 은혜로 기억하지 못하는 못난 겨레도 없습니다.”라고 통탄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 독립 운동 사상 가장 처절하고 가장 빛나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거룩한 희생이 아직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으니 어찌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라고 지적하였다.
이제 못난 후손들은 더 이상 애국 선열의 빛나는 유업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번 기회에 세종로 한글 마루지에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을 세워서 애국 선열들의 위업을 받들고 기려야 한다.
4)이 승복 동상, 육탄 10용사 기념탑 등 온갖 탑이 다 있는데 조선어학회 순국설열추모탑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수많은 탑들이 있다. 오래 전 삼척 무장 공비 사건 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죽은 이 승복 반공 어린이를 기념하는 탑에서부터 육탄 10용사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탑들이 당대의 위정자와 관이 주도하여 곳곳에 세웠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보면 조선어학회 순국 선열추모탑을 세우면 이곳에 서 있는 그 어떤 탑보다 가치 있는 탑이 될 것이다.
5)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기념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자기 나라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서 33인의 순국선열들을 가진 나라 없다. 어떤 이는 옥사하고 어떤 이는 해방이 되었을 때 들것에 실려서 나온 장엄한 드라마는 없다. 그래서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은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기념탑이 될 것이다.
6)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동상 곁에 한글을 지킨 순국선열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글을 창제한 집현전이 광화문 뒤에 있고, 세종대왕 동상이 세종로 한 가운데 서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동상 근처에 목숨 걸고 한글을 갈고 닦으며 지킨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이 쌍으로 서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지고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닌가!
7)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이상적인 교육장이 되기 때문이다.
세종로는 서울의 심장부이고 얼굴이다. 매일 수많은 시민들이 오고 간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전쟁 영웅만 영웅이 아니고,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데모한 사람만 영웅이 아니라 우리나라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도 영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상적인 교육의 도장이 될 것이다.
8)전 세계에 과학적인 한글과 위대한 애국선열을 알려서 국위선양을 할 것이다.
외국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한글 창제와 이를 지킨 위대한 순국선열들의 애국심을 자연스레 알릴 수 있어서 세계 만방에 우리나라의 위상을 자랑하고 높이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9)감동적인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마루지에 조선어학회 순군선열 추모탑을 세우면 추모탑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관관객들의 심금을 울려서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을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10)치졸하고 조악한 조형물로 한글마루지 품위를 떨어트리고 혈세 예산 낭비를 막아야 한다.
세종로 한글 마루지에 치졸하고 조악한 한글 조형물을 설치하여 한글 마루지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것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 지금 논의 되고 있는 일부 조형물 중에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있다. 공명심에 들뜬 일부 관계자들과 2-3류 조각가 및 함량미달의 설치미술가들이 치졸하고 조악한 한글 조형물을 설치한다면 이는 혈세 예산 낭비는 말할 것도 없고, 한글마루지의 위상을 떨어트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고, 혈세 낭비를 묻어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생길 것이다.
교육의 어버지 페스탈로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마침내 동상이 완성되어 제막식 날이 다가왔다. 조각가의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의 동상은 생전의 고인을 쏙 빼닮아 있었다. 페스탈로치가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이를 굽어보고, 아이는 위대한 스승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세였다. 동상은 매우 훌륭했지만 고인의 절친한 친구들과 전문가들은 교육자의 소망을 제대로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즉 보다 높은 곳, 아직 달성하지 못한 목표인 그 어떤 진리에 대한 소망이 표현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할 수 없이 동상을 다시 만들었다. 새로 만든 동상은 무릎을 꿇은 어린이가 스승의 얼굴 너머 먼 곳을 바라보는 형상이었다.
처음 만든 동상과 다시 만든 동상은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시선의 차이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작은 차이 때문에 동상을 다시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공명심에 들뜬 일부 공무원들과 함량미달 조각가 및 관련자들이 치졸하고 조악한 조형물을 만들어서 한글마루지에 세우려고 한다면 나는 한글 운동 동지들과 한글 단체와 손잡고 반대 투쟁을 할 것이다.
4. 문화의 거리는 외형으로 꾸미지 말고 역사로 채워야 한다
서울시가 세종로 일대에 조성하는 한글 마루지에는 조선어학회 순굴 선열 추모탑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
조선어학회 순국 설열 추모탑 건립을 최초로 공론한 한글학회 김 종택 회장은 “세종대왕이 굽어보시는 세종 문화회관 옆자리에 ”조선 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을 크게 세워 온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혼을 널리 알리고, 후손들에게 선열들의 거룩한 뜻을 길이 전하는 역사의 표상이 되게 해야 한다”면서 “문화의 거리는 외형으로 꾸미는 것보다 역사로 채우는 것이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한글 마루지에 조선어학회 순국선열 추모탑을 세우지 않고 치졸하고 조악한 조형물들을 설치하여 예산 낭비를 하면 이는 두고두고 지탄을 받을 것이며, 관계자들은 예산 낭비에 대한 책임은 물론 한글 마루지의 위상을 떨어트린 책임까지 져야 할 것이다. 이번에 서울시가 추진하는 한글마루지 사업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대 역사이다. 얼치기 전문가들 말만 듣고 대사를 그르쳐 역사의 죄인이 되는 일이 결코 생기기 않기 바란다.
*필자/시인. 한글문화원장.
이 글은 한글학회가 서울 ymca에서 주최한 한글마루지 시민공청회 때 주제 발표 논문.
남하를 아시나요?
노산의 부친 남하 이승규(1860~1922)는 개화기 마산을 대표하는 선구적 명사였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여섯 살에 가족 따라 동래로 이사와 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의생번호 5597)가 됐다.
1903년 그는 마산으로 이주하여, 손안로 선교사와 함께 1906년 성호리에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했다.
이것이 마산 최초 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또 1910년 부인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듬해 노비산 밑에 예배당(현재 마산문창교회)을 신축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갑성은 마산으로 내려와 남하를 민족대표 33인에 포함시키려고 시도했다.
이에 관해 경남신문은 “마산에서 남하선생을 비롯하여 기독교계의 유력 인사들과
창신학교 교원 朴順天ㆍ김필애와 학생 대표 한태익ㆍ이정기 등이 독립의거를 주도했다.
이들은 노산이나 의신여학생 최봉선의 집에서 모의를 거듭하며,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해서. 3월 21일 장날에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라고 보도했다. (최봉선의 증언《경남신문》1982. 10. 15.)
기독교 포교와 현대식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마산의 개화기 선각자, 남하는 1922년에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시에 자신의 전 재산을 마산시에 기부했다. 이를 추모하여 17개 사회단체가 4월 4일 사회장으로
고인을 무학산 기슭에 안장했다.
노산露山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마산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중퇴했다.
그는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사학부를 다녔고, 도쿄 동양문고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그는 조선어사전 편집위원을 맡았고, 이화여전 교수를 1년 했다.
1932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맡았다.
1938년 일제 탄압으로 언론사를 사직하고, 전남 백운산에 은거했다.
1942년 노산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함경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와 전라도 광양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일제하에 모국어와 민족얼을 지키려고 투쟁한 독립운동가였다. 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나
그는 호남신문사장ㆍ광복회고문ㆍ이충무공기념사업회장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ㆍ한글학회재단이사ㆍ학술원종신회원 등을 역임했다. 1982년 9월 22일에
그는 사회장으로 현충원에서 영결식을 거쳐 국립묘지 제1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노산은 진정 민족정기를 높이기 위하여, 조국 강산에 동화된 시인이었다.
피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진 비극사의 질곡에서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그는 민족혼과 정기를 예술로 부활시키려고 평생 글을 쓴 민족 시인이요,
우리 겨레의 밑바닥에 흐르는 민족애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 국민 문학가이다.
사회장으로 이승을 떠난 남하ㆍ은상 부자父子의 보금자리는 상남동 102번지이다.
지금 노산동 태양극장과 옛 북마산파출소와 ‘은상이 샘(은생이샘 또는 은샘)’이 있는 지역이다.
전 재산을 마산시에 헌납한 남하의 기부정신과 ‘가고파’와 ‘옛 동산에 올라’ 등으로
마산을 노래하여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노산의 고결한 시정신詩精神을, 마산 시민들 모두 기려야 할 필요가 있다.
창원시가 추진하는 구마산 도심지 재생사업은 대단히 적절하다.
전국 7대 도시였던 마산이 경남 7대 도시로 전락된다는 우려 속에 마ㆍ창ㆍ진이 통합됐다.
쇠락하는 마산의 중흥을 위해, 노산동 일대의 재개발 사업인 노산프로젝트는 꼭 실현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대를 이은 국가유공자에 대해, 우리 후세대가 꼭 해야 할 보은의 길이다.
시인이며 또한 산악인이였던 노산
노산(鷺山) 이은상, 그가 12년 동안 최장수 한국산악회장을 역임하며 '노산시대'를 이끌어 온 일은,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산악운동을 펼쳐온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도 여러 산악인들에게 회자되는 '산악인의 선서'와 '산악인의 노래'를 작사한 장본인이 노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흔치않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100자로 제정된 이 선서는 1967년 노산이 한국산악회장 취임 첫해에 제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조시인이자 사학자로서의 노산을 기억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전통이 오래된 한국산악회의 수장으로서의 노산을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노산하면 연상되는 것은 온 국민이 애창하는 '가고파' '성불사의 밤' '바위고개' '사우' '봄 처녀' '고향생각' '옛 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으로, 대부분의 국민들도 이것만을 기억 할 뿐이다. 그의 시가 한국민의 애창가곡으로 작사된 것은 이밖에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노산은 시조시인으로 생전에 약 2000여 수의 작품을 쏟아냈으며, 고유한 전통의 시형식인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 시조의 한 유형을 완성한 현대시조 부흥의 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대부분 그의 시가 가곡의 가사로 쓰여 우리문화사에 남다른 위치를 가진다.
'산악인의 선서'와 '산악인의 노래' 남긴 노산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분단의 아픔, 통일염원, 우국지사추모 등 사회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있다. 사학자요 수필가인 그는 해박한 역사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설악행각' '묘향산기행' '한라산등척기' '해외 산악계 순방기'와 같은 기행문학의 압권이라 할 만한 글들을 남겼다. 이렇듯 국토순례기행문과 이충무공 일대기와 같은 선열의 전기를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노산의 일부작품들은 노산의 산시(山詩)에 매료된 스위스 문필가 쎄화가 불어로 번역을 하고 영국인 뺀느가 '천왕봉 찬가(the song of Chun Wang)외 여러 편의 시를 영역하여 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문인으로서의 노산이 남긴 업적은 필자의 졸견으로 평가하기엔 그 세계가 너무나 깊고 넓다. 그는 일제수난기에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한글사랑 때문에 조선어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죄 아닌 죄 값을 치루며 옥고를 겪었다. 그가 옥중생활 중에 들려준 구수한 음담패설은 동료들의 지루한 옥중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한다.
그는 암울한 일제치하와 격변하는 해방정국. 6.25전란. 5.16혁명 등 격동의 시대를 문인으로 살았지만 군사독재정권 협력이 흠이 되기도 했다. 그의 고향 경남마산에서 과거사의 시비가 일어 '노산문학관'이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어찌 한 점 그늘이 없겠는가.
그의 말년은 한국등산계의 발전을 위해 산악단체의 수장으로 방점을 찍는다. 지난해 필자는 노산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한국산악회의 '노산 산악문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필자는 그분 재임 중 회지편집위원을 맡아 일한 것이 인연의 끈이 되었다.
그분의 등산관은 요산요수에 바탕을 둔 자연애호가 중심이었다. 시인 묵객들의 자연관을 지닌 그는 산을 사랑하는 자연탐사적인 성격의 등산관을 지니고 있었다. 서구 근대등산의 바탕이 된 알피니즘의 행동양식인 눈과 얼음이 덮인 고봉의 곤란성에 도전하는 서구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 한국근대등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김정태는 그의 자서전<등산50년(登山50年)>에서, 민세 안재홍의<백두산 등척기(白頭山 登陟記)>.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와<조선의 산수(朝鮮의 山水)>. 노산의<묘향산 유기(妙香山 遊記)>와 <설악행각(雪嶽行脚)>. <한라산 등척기(漢拏山 登陟記)> 등은 조선시대의 유산기와 달리 우리의 명산을 구석구석 탐사하는 학술적 구명의 탐사등산기라고 평했다. 산과 관련된 답사기는 등산의 대중보급에 기여를 했으니, 이런 형태의 등산을 한국근대등산을 발아시킨 등산의 선구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알프스 고봉에서 본격적인 등산 활동이 시작되기 전 알피니즘의 여명기에 자연과학자인 아가시, 포브스, 틴들과 같은 학자들이 빙하와 지질연구를 위해 탐사활동을 하며 산에 올랐고, 과학자뿐만 아니라 괴테, 바이런, 워즈워스, 러스킨, 쉘리, 레슬리 스티븐과 같은 문인들이 알프스의 산들을 답사하며 산을 찬미하는 저술을 펴낸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한다.
몽블랑등정을 제안 근대등산의 계기를 마련했던 소쉬르와 같은 학자도<알프스여행기>를 펴내 사람들의 관심을 산으로 끌어드린다. 특히 당대 최고의 지성인 영국의 스티븐은 <유럽의 놀이터(The playground of Europe)>와 같은 명저를 저술하여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고봉으로 몰려오게 한다.
한국근대등산의 발아가 된 노산의 산행기들
노산은 산악단체의 수장으로 척박한 산악문화의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산악도서출간에 힘을 기울였다. 1968년 월보 <산>을 창간하여 현재 지령 44년 통권225호를 기록하고 있다. 1975년부터 <한국산악문고> 6권을 문고판으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발간했다. 이 책은 읽을 만한 산악도서가 없던 시절 국내 산악인들의 지적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한국산악문고>는 <노산 산행기(鷺山 山行記)>(이은상·1975년). <별빛과 폭풍설>(가스통 레뷔파·김경호역·1975년). <산악소사전(山岳小事典)>(김원모·1975년>의 발간에 이어, <등산50년(登山 50年)>(김정태·1976년). <8000m의 위와 아래>(헬만 불·이종호역·1976년). <암벽등반기술>(백영웅·1976년). <산정수정(山情水情)>(이영희·1977년) 등이 나왔다.
그는 1969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등산전문지<등산>(현 월간 산)이 재정난으로 폐간위기를 맞자 그와 친교가 돈독한 사회명사들의 모임인 '신우회(信友會)'가 인수하여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후 이 잡지는 조선일보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가교역할을 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69년 2월에 있었다. 해외원정 등반훈련대의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발생한 국내최초의 눈사태 사고다. 이 사고로 10명의 젊은 대원이 눈 속에 매몰된 채 최후를 맞는다. 현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도 훈련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사람이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고 구조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일었으며, 산악회는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열정적으로 회무를 집행해온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고, 조직의 책임자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를 했지만 2년 후 그는 회장직에 재추대된다.
같은 해 노산은 한국산악회의 국제적인 위상과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국제산악연맹(UIAA)의 일원으로 정식 가입하여 회원국이 된다. 국제산악연맹 가입은 눈사태사고로 10명의 대원을 잃은 후 더욱 분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국내활동에 한정되었던 산악회의 시각을 국제무대로 확대해 희생자의 유지를 기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는 구미(歐美) 선진국가의 대표적인 산악회를 탐방하여 국제적인 견문을 넓힌다. 회의 운영과 활동상황, 도서출간 현황 등을 살펴보고 정보를 교류한다. 1973년부터 시작된 각국 산악단체 탐방 행보는 프랑스 산악회(1874년 창립)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프랑스 국립스키 등산학교, 등산의 국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스웨덴산악회(1923년). 정통성과 폐쇄성을 함께 지닌 채 운영되고 있는 영국 알파인클럽(AC. 1857년 세계 최초로 창립)과 영국등반협회(BMC.1946년), 등산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아메리칸 알파인클럽(AAC. 1902년)과 '미국의 자연은 미국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외치며 환경보존운동을 펼치는 환경단체 시에라 클럽 등을 탐방하여 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견문을 넓힌다. 당시 그가 각국에서 교환해온 귀중한 자료와 도서들은 한국산악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선진등산강국의 등반기술을 습득하기위하여 경제여건상 해외진출이 어렵던 시기 등산선진국 프랑스의 국립 스키 등산학교(ENSA)에 회원을 파견하여 체계화된 설빙벽 등반기술을 전수받아 국내에 보급한다. 당초 이 계획은 노산이 회장재임시 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일이 무산되자 이민재 회장에게로 이어져 결실을 본 것이다. 오늘날 각급 등산교육기관에서 기초기술로 활용하고 있는 '프렌치 테크닉'이 그 당시 도입된 기술이다.
그는 히말라야 고산등반에도 열정을 가지고 추진하여 1977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에 이어, 1978년 안나푸르나 4봉(7525m) 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등반은 한국의 히말라야등반 개척기에 있었던 두 번째의 성과로 기록된다. 당시 이 등반대의 대장을 맡아 등정을 성공시킨 장본인이 현 산악회장 전병구다.
죽는 날까지 산악문화 위해 노력했던 이은상
한국산악회는 1945년 조국이 광복되던 해에 사회단체로는 진단학회에 이어 두 번째로 정부에 등록된 단체로 엄연한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35년 동안 임의단체 취급을 받아왔다. 조직의 틀을 다지고 좀 더 활성화하기 위해 1980년 사단법인화한다. 당시 단체의 법인화등록이 어려운 시기에 노산 회장의 끈질긴 집념이 이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그는 체계적인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등산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여 수년간 지도자급 산악인들을 양성하는데 진력한다.
1982년에는 그가 와병 중에 국고지원금을 받아 파견한 마칼루(8463m)학술원정대의 등정 낭보를 병상에서 전해 듣고 기뻐하다가 4개월 후 영면한다. 노산은 회장재임 12년 동안 등산인구 저변확대와 산악지도자 배출을 위한 등산교육, 해외 선진등반기술 도입, 산악문화 활성화를 위한 산악도서 발간, 산악회의 국제기구 가입, 히말라야 고산원정, 산악회의 법인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산은 평생 문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지만 생애의 후반부는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가 회장 자리에 앉아 학문의 높이만큼 산의 높이를 쌓아나간 세월은 12년(1967~70, 1973~82년)이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서 산악회 수장으로 만년설에 쌓아올린 성과는 8463m의 마칼루다. 노산은 30년 전에 갔으나, 그가 심은 씨앗은 지금 성목(成木)으로 자라고 있다.
鷺山 李殷相(1903-1982)은 한국산악회(4대, 7,8,9,10,11대 회장)의 최장수 회장이자 한국 최고의 시조작가로서 100여권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노산의 팔순 생신 헌정집으로 기획되었다가 작업 중 작고함에 따라 유고집이 되었다. 鷺山 文學論, 鷺山과 나, 鷺山 作品, 追慕의 章 등 4부로 구성되어있다. 여기 한국산악회 金鼎泰(1916-1988) 부회장의 글을 2회에 걸쳐 나누어 소개한다.
김정태 선생은 조선인들만의 산악단체인 백령회에서 활동하며 초기 북한산, 도봉산, 금강산 등지의 수많은 봉우리를 초 등반했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산악회와 대한스키협회를 창설하고 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한국산악회 서립규 자문위원은 “김정태 선생이 산악계에 남긴 공적은 어마어마하다. 세상이 그를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했다.
노산 선생의 산과 글
金 鼎 泰
1.회상 〔묘향유기(妙香遊記)〕
1931년, 노산 선생의 「묘향산유기(妙香山遊記)」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 해 봄, 나는 도봉산(道峰山)에서 암벽 등반 중에 동행한 같은 또래의 종제(從弟,中2)가 실족 부상하는 바람에 집안에서 금족령이 내려 산에 나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가고픈 산에 못 나가는 대신 도서관에 가서 산악도서를 모조리 섭렵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때 노산 선생의 「묘향산유기」는 주린 창자에 양식 같아서 탐독하고 스크랩하고 또 읽고는 하였다.
험한 바위벼랑을 아슬아슬하게 순간적인 감각만으로 오르던 암벽등반의 메마른 정서와 말초신경적인 좁은 산악관에 대하여 「묘향산유기」는 이 산의 수많은 기봉(奇峰), 벽계(碧溪), 담폭(潭瀑)마다 수놓은 그 분 특유의 해학과 이곳을 거처 간 옛 선인묵객(先人墨客). 고승대사(高僧大師)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주옥같은 시문(詩文)으로 하여 보다 크게 살찌고 아름다우며 높은 산의 참 모습에 눈을 뜨게 하였다.
노산은 묘향의 이름난 명소 섭렵에 그치지 않고 이 산의 으뜸인 비로봉(毘盧峰,1,909m), 원만봉(圓滿峰,1,894m) 등 7개 연봉으로 주 산군(主山郡)을 이룬 묘향(妙香)의 가장 멀고 험한 「안산」지역을 탐험적으로 등정하여 실의에 빠진 어린 클라이머에게 여러 가지를 힘차게 일깨워 주었다.
이 산의 큰 절 보현사(普賢寺) 주지스님이 50년래 입산자를 보지 못했다는 「안산」지역의 탐험과 같은 7일간의 난행은 그야말로 노산의 개척 정신의 발로였다.
이 개척자 정신을 노산은 묘향이 백두산(白頭山)과 마찬가지로 태백(太白)이라는 고칭(古稱)이 있고 산 중턱에 있는 「단군대」(檀君臺), 「단군굴」(檀君崛)의 유서에서 비롯되는 선사(先史) 신화시대의 민족 발상과 국조 강림(國祖降臨), 고조선 개국을 이룩한 우리 조상들과 통하는 개척정신이라 하였다.
그리고 묘향 [안산]의 신비로운 은백색의 거대한 화강암의 7연봉은 옛 개척자들이 거처 간 성역(聖域)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본받아야 할 조상들의 영혼과의 만남의 고장이며 후대에 이어져야 할 우리의 민족정신이요, 신념이요, 배움의 터전이라 설파하여 후일 이곳을 찾은 나도 3탄 4탄을 금치 못 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때마침 서구(西歐)에서 옮겨온 알피니즘에 물들기 시작해서 들떠 다니다가 추락사고로 벽에 부딪치듯 허전했던 어린 클라이머의 머리에도 재정립해서 나아가야 할 길이 개척정신의 길임을 힘차게 이끌어 준 듯하였다.
2. 백령회(白嶺會) 시대와 노산의 글
근대적인 알피니즘 자체가 자연에 대한 사랑의 찬미와 학문적인 탐구가 밑바탕이 되고 민족적인 자아의식에서 자립하고 발전해 나아가듯 노산의 「묘향산유기」는 이 고장에 들어 온 서구 알피니즘이 토착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한국적인 밑바탕이 되어주고 자립해 나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북돋아준 듯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산의 글과 심상치 않게 접촉을 가진 나는 이 분의 글을 계속 가까이 하였다.
금강산, 속리산 등 명산마다 순례하듯 등척한 노산의 산행기는 거창하고 많아서 노산과 산을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우리나라 산악 문학의 가장 크고 넓은 독보적인 집성을 본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산 동지들은 서로 권해서 노산의 산행기를 보도록 했는데 37년에 이러한 동지들과 백령회(白嶺會)라는 조직체를 갖게 되었다.
일경(日警)의 눈을 피한 민족적인 자립과 자결을 뜻하는 젊은 클라이머들의 모임인데 우리들은 그때 노산의 글을 의무적으로 읽게 하였다. 그때 선정되어 구해 본 것이 33년의 「설악 행각」 37년의 「한라산 등척기」(조선일보 연재) 38년의 「지리산 순례기」(조선일보 연재) 등인데 이 외에도 26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씨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觀參記), 31년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씨의 백두산 등척기(白頭山登陟記) 등도 구해서 보았다.
그런데 백령회 동지들이 이 분들의 등산 기행을 읽으면서 이 분들과 마찬가지로 보행 등산으로 명산을 찾아올라 다닌 것은 아니었다. 1년에 한두 번 그러한 등산의 기회를 갖기도 했으나 그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등산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다른 서구적인 알피니즘의 암벽등산이나 빙설면 등반의 동계 등반에 열중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록적인 외국의 등반기나 기술 연구의 산악 도서들도 함께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노산이나 육당, 민세 같은 분의 등산 기행을 가까이 한 것은 전기한 바와 같이 근대적인 등반을 하면서도 그것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스스로의 근원적인 것을 그리워했고 정신적이고 원전(原典)적인 줄기를 역사적인 사실에서 찾아 이어가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한국적인 등산의 뿌리와 줄기
이러한 소망이 더욱 절실했던 것은 36년간 일본의 압정이 우리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 단절시키려 할 때 육당. 노산. 민세 같은 분들이 이에 항거하듯 민족정신의 뿌리와 국토 강산의 참 모습을 산에서 찾고 울부짖으며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백령회의 젊은 동지들은 이 분들의 글을 통해서 산 많은 우리나라는 국조 단군(國祖檀君)의 개척적인 신화시대부터 3국 통일을 성취한 신라 화랑들의 산수(山水) 수련의 범절과 고승대사들의 입산수도에 전국 명산 답사, 산상(山上) 사찰 건립 등 뿌리 깊은 등산의 사실(史實)을 더듬기도 했다.
또 이 분들의 한국적인 등산 기원의 직접적인 맥락을 세종(世宗)대의 문화에서 우러난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1432년)의 신장, 윤회 등의 행적을 비롯해서 택리지(擇里志)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735년)를 펴낸 이중환(李重煥),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1735년)의 박종(朴琮), 백두산 탐사(白頭山探査,1860년)의 김정호(金正浩)등의 행각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공감하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육당, 노산, 민세의 필봉은 34년에 조선일보사의 민족적인 백두산 탐험대 파견을 보게 하고 그것은 35년 한라산 탐험(노산 기행문 연재), 36년 지리산 탐험(노산 기행문 연재)으로 3년간을 힘차게 전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 우러나고 줄기를 이어온 민족적이고 탐험탐사적인 등산 풍조는 1945년 8.15광복 때 백령회 동지를 중심으로 발족한 「한국 산악회」가 우리나라 산악 운동을 선도적으로 개발해 나가는 데도 하나의 근원적인 맥락이 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4. 8.15 광복 후의 산악 운동
초창기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국토 구명」(國土究明)이란 명제를 가지고 46~55년의 10년간 11차에 걸쳐 줄기차게 전개된 학술조사대 파견 사업을 들 수 있다. 일제(日帝)에 빼앗겼던 국토를 되찾아 우리 손으로 밝히고 알아보자고 한 명제는 8.15 당시의 민족적으로 감동에 찬 활동으로 우리 사회 각계의 호응을 크게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학술. 문화. 언론. 산악 각계의 권위 있는 지도층 인사의 열렬한 참가를 보았고 태백(太白). 소백(小白). 차령(車嶺) 등 여러 산맥을 통한 명산들과 제주도. 덕적 군도. 다도해. 총도. 울릉도. 독도에 이르기까지의 남한의 전국적인 산악. 도서지역에 대하여 사상 최초로 근대적이고 학술적이며 문화적인 대 조명을 실현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 감동을 느끼는 일은 1955년 마지막 제 11차 국토 규명 사업인 수복지구 [설악산 학술 등반대]의 30여명 일행 대장(隊長) 홍종인(洪鍾仁). 부대장(部隊長) 이숭녕(李崇寧)이 행동한 코스가 24년 전인 33년 노산의 「설악 행각」 코스를 조금도 빼놓지 않고 답습한 일이다.
이 때의 코스가 남교리~12탕골~치마바위봉~장수대(당시 자양전)~대승령~백담사~쌍룡폭~봉정암~대청봉~오세암~마등령~신흥사인데 6.25 격전지로 지뢰 매몰 등 매우 위험하고 험준한 코스였으나 이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답습한 까닭은 그때까지 학술대를 리드해 온 산악회의 지도층들이 노산의 글을 뿌리 깊게 받아들였던 젊은 백령회 동지들이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학술대 활동의 한국적인 등산 풍조는 언제나 시대적인 사회 환경에 적응해서 변형하기도 하여 최근까지도 특수 지역이나 자연 환경 등의 학술적인 탐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그런가 하면 명산 순례나 새로운 산경(山境), 루트의 탐방, 행사 등이 백만 등산 인구의 전국적인 국민운동과 같이 등산 행각으로 산악 운동으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을 보아 1930년대 이래 노산의 산과 글의 영향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 이은상(李殷相)
• 호 노산(鷺山)(1903 ~ 1982)
• 작가, 사학자
• 본관 전주(全州)
•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1903∼1982. 시조작가·사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강산유인(江山遊人)·두우성(斗牛星). 경상남도 마산 출신. 승규(承奎)의 둘째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1925∼192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에서 청강하였다.
1931년·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두우성이라는 필명으로 ≪아성 我聲≫(4호)에 <혈조 血潮>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으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부터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하여 평론·수필·시 들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국학이나 시조는 거의 등한시하고, 서구의 자유시 쪽에 기울어 있었다. 이 무렵에 발표한 자유시는 30편을 헤아리고 있는 데 비하여 시조는 단 한편에 불과하였다.
또, 평론부문에서도 1925년 ≪조선문단≫에 게재된 <시인 휘트만론>·<테니슨의 사세시>·<영시사강좌 英詩史講座>·<예술적 이념의 본연성>(1926.6.)이나 ≪동아일보≫에 발표한 <아관남구문학 我觀南歐文學>(1925.1.30.∼2.23.) 등의 제목들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1926년 후반에 이르러 시조부흥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시조를 비롯한 전통문학과 국학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시가 분야에서는 1929∼1930년에 민요조의 리듬을 살린 <새타령>·<매화동 賣花童>·<조선의 꽃>·<말몰이>·<님 향한 생각이야>·<남산에 올라>·<말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평론분야에서도 같은 시기에 <청상(靑孀)민요 소고>·<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특수 이언과 공통 이언>·<풍수(風水)를 믿던 이들>·<문학상으로 본 조선의 어희(語戱)>·<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였다가 시조 논의가 일어나자 비로소 시조를 문학시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으나, 한동안 자유시와 시조의 창작을 병행하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조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시조를 쓰는 한편, 당시(唐詩)를 시조형식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시조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조 문제>(1927.4.30.∼5.4.)·<시조 단형추의(短型芻議)>(1928.4.18.∼25.)·<시조 창작문제>(1932.3.30.∼4.9.) 등의 논고를 통하여 자수로써가 아니라 음수율로써 시조의 정형성을 구명하려 시도하였다. 1932년에 나온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 鷺山時調集≫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가고파>·<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분단의 아픔, 통일에 대한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조집 ≪노산시조선집≫(1958)을 비롯하여, 특히 ≪푸른 하늘의 뜻은≫(1970)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 祈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시조는 대체로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그는 한때 주요한(朱耀翰)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兩章時調)를 시험하여,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 밖에 저서로는 시문집으로 ≪노산문선 鷺山文選≫·≪노산시문선≫ 등과 수필집으로 ≪무상 無常≫, 사화집으로 ≪조선사화집 朝鮮史話集≫과 기행문집 등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기행한라산 耽羅紀行漢拏山≫·≪피어린 육백리≫·≪이충무공일대기 李忠武公一代記≫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마산역 대합실에서 나오고 있는 이은상 작시인 “내 고향 남쪽바다” 노래와 관련하여 마산역을 통해 소중한 의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레일에서는 문화와 음악이 흐르는 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대합실 및 승강장에서 기다리시는 고객들을 위해 음악 방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객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한 가지 노래만이 계속 반복해서 나온다는 말씀에 마산역에 통보하여 조치하였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찾아주시는 역사에 특정 음악을 지속적으로 방송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여, 찾아주시는 모든 고객들을 위해 노래 선곡에 대해 수정 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산역을 이용하시면서 관심과 애정 어린 의견 보내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마산역은 오로지 문학적 측면에서 고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시작하였을 뿐 마산지역 시민들의 민주화 정신 왜곡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봄 날씨에 옷차림이 얇아졌는데 기온차이가 심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회신부서 지역본부 > 부산경남본부 > 영업처 회신담당 조진옥’
며칠 전 마산에 갔다가 역사(驛舍) 대합실에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가고파’노래 방송 시정 건의에 대한 답신이다.
마산은 지금 한창 이은상의 시비건립문제로 마산시가 홍역을 치르고 있는데 공공기관이 마산역이 특정단체의 입장을 시위조로 음악을 내보내는 것은 편파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역장을 찾아 시정건의를 했던 것이다.
‘가고파 노래 방송 중지 요청 건의서’
‘지난 달에 마산에 왔을 때도 그랬고 오늘 또 마산역에 도착하자말자 가고파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마산은 지금 이은상시비 건립문제로 심각한 갈등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인 마산역은 왜 시비건립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이은상의 가고파 노래만 반복해서 보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다른 노래와 함께 보내는 게 아니라 가고파 한곡만 계속해서 보내는게 옳은 일인지요?
앞으로 논쟁이 끝날 때까지 가고파 노래 방송을 중단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2013년 5월 2일 민원인 김 용 택
마산역 부역장 서 정 길(인)
건의서를 제출한지 3일만인 5월 5일 이-메일로 답신이 왔다.
‘김용택 님이 평가하여 주신 만족도는 철도발전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며
일부 고객님을 선정하여 소정의 사은품을 드리고 있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마산은 지금도 이은상의 시비(詩碑)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지난 2월, 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역앞에 가고파시비를 세우면서부터다.
시민단체에서는 역전에 세운 이은상의 시비는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기회주의자인 이은상은 마산의 3.15정신에 역행하는 부끄러운 일'이라면 철거를 요구했고 시비를 세운 '가고파를 사랑하는 문인단체 회원'들은 '이은상은 ‘마산과 조국을 사랑한 이은상은 친일을 하지 않았다’며 시비건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정착하는가?
마산역의 '가고파 노래 방송'
어떻게 생각하면 자잘하고 보잘 것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이 노래가 역대합실에 방송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수천, 수만명의 승객들이 지나가면서 들었을텐데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한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노래를 들은 사람 중에는 가고파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노래는 좋지만 이은상이라는 인물 때문에 거부반응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잠간 시간을 내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귀찮아서 너도 나도 지나치는 바람에 마산역의 횡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삶의 현장에서 가꾸고 다듬어야 성장하고 정착할 수 있다.
물론 시비건립에 반대해 현수막을 걸거나 시위에 참여해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수도 있지만, 잘못된 현실을 시정하겠다는 작은 실천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 아닐까? 고객의 시정건의에 잘못을 인정하고 재빨리 시정 약속을 한 코레일측의 처사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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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역 이은상 <가고파> 시비 건립을 두고 시작된 논란이 노산의 행적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이 탓에 묵었던 지역 내 갈등이 재연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은상 선생을 사랑하는 지역 문인단체'는 2013년 3월 4일 오후 창원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마산문인협회를 비롯한 25개 문인단체 회원 40여 명은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애국 민족시인 노산 선생의 <가고파> 시비에 대한 일부 시민단체의 행동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마산역 시비는 마산 문화와 자긍심의 상징으로 <가고파>를 사랑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특히 이들이 강조한 부분은 노산의 행적이었다. 애초 <가고파> 시비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예상했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이은상 선생을 '애국지사이며, 위대한 민족 시인'이라고 못박았다. 갈등과 논란이 심화할 것으로 예상하는 대목이다.
가고파를 사랑하는 문인단체 회원이 4일 오후 창원시청 브리핑룸에서 마산역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가고파 이은상 시비 철거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문인단체는 "노산 선생은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고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됐다"며 "국가가 이런 예우를 할 때는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 상례다. 노산은 국가의 검증을 받은 애국지사이자 민족시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친일독재 부역 관련 행적과 3·15의거를 폄훼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전면 부정했다.
문인단체는 "노산은 일제강점기와 6·25, 분단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나라 없는 백성의 고통을 절감했던 확고한 국가관은 강한 나라를 지향하면서 이.., 박.., 전.. 정부에 부분적으로 협조하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며 "3·15를 마산 데모로 걱정하면서 불법으로 언급한 것은 긴박한 상황에서 학생 등 양민의 희생을 줄이고자 원로로서의 염려 이상의 언급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은 "우리는 모든 업적을 제쳐두고 문학만으로 그가 얼마나 탁월한 애국자이고 훌륭한 문학가인가를 절감한다"며 "이제라도 선생에 대한 평가가 바르게 이뤄져야 한다. 선생의 작품이 재조명되고 기리는 사업이 지속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마산역 이은상 시비 철거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마산지역 문인의 역사관·국가관이 걱정되며 이를 바탕으로 무슨 글을 쓴다는 것인지 크게 우려된다고 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가고파라는 문학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 자유다. 그런 면에서 문인의 입장은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이승만 초대정부를 지지하고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협조한 상황을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한 것은 정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이은상이 부역을 했다는 정권은 당대에 국민에게 심판을 받았다. 독재라고 심판을 받았고, 쿠데타라고 심판받았다. 이는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런데 부역을 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묻는 문인들의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며 "이러한 역사관으로 글을 쓴다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해악을 미치겠느냐.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운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고 비판했다.
대책위는 또 "마산역에 세워진 시비는 가고파가 아니라 노산 이은상 시비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마산역이라는 공공의 장소에 세운 것은 의도가 있다고 본다. 옳지 않은 역사관을 옳은 것처럼 포장한 시비는 당장 철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책위는 오는 15일 3·15의거 기념식이 열리기 전까지 집회 등을 진행해 노산 이은상 가고파 시비 철거를 요구할 계획이다.
지난 2월 6일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애국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의 <가고파> 시비에 대한 일부 시민단체의 행동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문인들의 입장을 밝힌다.
1. 노산 선생은 국가이 검증을 받은 애국지사이며, 위대한 민족 시인이다.
살피건데, 노산 선생의 인물됨은 단순하게 보더라도 그의 약력이 말해주듯이 국가유고아로서 대한민국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건국포장을 수상했으며, 작고했을 때는 문화훈장 1등금 금관문화훈장 추서와 함께 국가가 지원하는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국가가 이런 예우를 할 때는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 상례다. 국가가 인정한 인물을 기리는 일이 무슨 문제가 되며, 그가 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더욱이 올해는 노산 선생의 탄생 11주년이 되는 해다. 선행의 작품이 재조명되고, 기리는 사업이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2. 문학작품으로서 <가고파>의 위상
살피건대, 노산 선행의 연치 20세인 1932년 <가고파>가 발표되었다. 이 작품을 선생의 친구인 양주동 선생이 평양 숭실대에 근무할 당시 그의 제자인 김동진 작곡가에게 소개하여 같은 해 가곡으로 탄생하였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서 성악가 이용주, 이인범 등에 의해 일본은 물론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불러져 사랑을 받았으며, 해방 후에는 교과서에 실려 범국민적 애창 가공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가곡파>가 일찍부터 우리 국민정서의 근간이 되고 고전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노산 선생의 고향 마산으로서 어찌 <가고파>를 사랑하고 기리지 않겠는가.
3. 친 독재(?)라니 무슨 말인가.
살피건대, 1903년생인 노산 선생이 살던 시대를 어떤 필설로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견뎠고, 독립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분파주의자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마침내 동족끼리의 전쟁참화의 분단 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나라 없는 백정으로서의 고통을 절감했던 그의 확고한 국가관은 여기서 확립된 것으로 강한 나라를 지향하면서 이승만의 초대 정부를 지지하고, 비록 혁명으로 집권했으나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에 부분적으로 협조하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나 그의 정치적인 소신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그가 저 중국고사의 백이 숙제나 고려말기 고려동 사람들처럼 초연하지 않았다고 하여 양지를 지향한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운다면 오늘날 4∼5년마다 바뀌는 정치적인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운명을 지켜보며 살아온 통한의 일생을, 광복 이후 세대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우리는 아프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는 3·15 정신을 폄훼하지 않았다.
살피건대, 3·15의거는 4·19혁명으로 이어지고, 정권이 바뀌면서 ‘의거’로 그 성격이 규정지어졌다. 당시 노산이 마산데모를 걱정하면서 불법을 언급한 것은 고향 마산의 양민과 경찰과의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고, 합법적으로 문제가 수습되기를 바라는 원로로서의 염려 이상의 언급은 아닌 것이다.
이제라도 노산 선생이 언급은 폄훼가 아닌 걱정과 염려 이상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시는 그를 3·15의거를 부정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일부의 불만은 노산 선생이 분기한 시민의 편에서 데모를 부추기는 언행을 하지 않은 것을 탓하고 있는 듯한데, 보통 사람들의 몸싸움도 우선은 말린 후,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우리의 정서로 보면 노산 선생의 언행은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한 가지 예로 서울 수유리의 4·19 학생 비문은 노산 선생이 썼다. 당시 분위기에서 노산 선생이 3·15를 부정하는 언행을 하였다면 그에게 이 비문을 맡겼겠는가.
5. 2006년 마산문학관 결정으로 노산의 평가가 끝났다는 시각
살피건대, 일부에서는 2006년 노산문학관을 마산문학관으로 결정할 당시 마산시의회가 13대 14로 결의한 것을 완전무결한 결정인 양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회분위기에 편승한 일부 시민운동가들에 의해 없는 친일까지 문제 삼아 정상적인 논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진 정황이 짙다.
따라서 당시의 판단은 결코 바르게 결론지어진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선생에 대한 평가가 바르게 이뤄어져야 한다.
6. 우리는 <가고파>를 사랑한다.
노산 선생도 신이 아닌 이상 실수한 언행이나 행동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작은 흠결이 있다고 하여 그의 삶과 사유방식 전체를 문제 삼은 것은 민주시민이 취할 수 있는 논리적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업적은 젖혀두고, 문학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애국자이고 민족주의자이며, 훌륭한 문학가인가를 절실하게 공감한다. 따라서 최근 마산역 광장에 세워진 가고파 시비는 마산 문화의 자긍심의 상징으로, <가고파>를 사랑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자리를 빌려 시비를 세운 마산역 당국과 마산의 15개 로타리클럽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노산을 기리는 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운 뜻을 표한다.
제막식은 약식으로 끝이났습니다. 제막식 행사장엔 항의 하는 손피켓과 시위대가 말없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산역에서 걸어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 함께 보여지는것은 '시비'와 철거 촉구 현수막.
볼썽 사나운 모습의 마산역광장입니다.
그리고 2월20일 시비철거 대책위는 다시 기자회견을 열고 시비는 '민주성지 마산'을 죽인 행위라며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이후 마산역장실을 항의 방문 하였으나, 역장은 시종일관 '철거불가' '가고파 사랑' 만을 되뇌었습니다.
다시 3월7일 해결의지가 없는 역장을 해임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갖고, 시비는 검은 천으로 꽁꽁 사매 버렸습니다.
천위의 가고파 개사가 이은상의 처량한 신세를 대변하는 듯 합니다.
//////////////////////////////////////////////////////////////////////////////////////////////////////////////// 친독재' 전력이 뚜렷한 이은상(1903~1982)이 쓴 시 '가고파'가 새겨진 시비가 마산역광장에 세워져 논란을 빚고 있는 속에, 종교계․학계 인사와 변호사들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허성학 신부(천주교)와 이암 스님(문수암), 김용환 목사, 안승욱 경남대 교수는 7일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중재안 작성에는 자운 스님(관해사)과 김민오 변호사, 강인순․김남석․김학수․배대화․이승현․유장근․최유진(이상 경남대)․남재우(창원대) 교수 등이 함께했다.
▲ 마산역 광장 '이은상 시비' 철거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속에, 지역 종교계와 학계 인사들은 7일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시비를 기증한 로타리클럽에 설치비 3000만원을 보상하고 시비의 소유권을 넘겨받고자 한다"는 내용의 중재안을 제안했다. 사진 왼쪽부터 안승욱 교수, 허성학 신부, 김용환 목사, 이암 스님.
ⓒ 윤성효
이들은 "철거를 전제로 한다"면서 "중재안은 이 시비를 기증한 측에 설치비 3000만 원을 보상하고 시비의 소유권을 넘겨받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시비는 국제로타리클럽(3720지구)이 세워 마산역에 기증했다. 시비 앞면에는 시 '가고파'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김복근씨가 쓴 이은상 약력이 새겨져 있다. 2월 6일 제막식이 열렸다.
이은상은 3․15의거를 폄훼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등 단체들은 '마산역광장이은상시비철거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누군가가 시비에 페인트로 훼손해 놓았고, 철거대책위는 계란 투척을 하기도 했다.
또 철거대책위는 지난 4월 19일 중장비를 동원해 시비를 강제 철거하려 했지만, 마산역 측이 경찰에 시설보호를 요청해 무산되었다. 당시 현장에 경찰이 배치됐다.
허성학 신부 등 인사들은 "마산역광장에 이은상 시비가 느닷없이 세워진 뒤 계속되는 시비 철거 논란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태의 추이를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며 "마산역광장은 이 도시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시민이 철도이용 등으로 자주 들르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금까지 진행되는 상황으로 볼 때 이 시비가 역광장에 존재하는 한 관련 단체나 시민들의 갈등과 대립은 점점 더 확대되고 격화되는 양상을 띠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시비 철거 논쟁에 일부 문인들이 개입하여 과거에 이미 끝난 노산 이은상 문학관 논쟁으로 치환시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중재안을 제시한 것은 시비를 세운 남마산로타리클럽 김봉호 회장의 발언이 단초가 되었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29일 마산역장실에서 열린 창원시의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차라리 시비 설치비 3000만원을 주는 곳이 있으면 철거를 하든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 돈으로 다른 봉사활동을 추진하면 된다"고 했다.
허성학 신부 등 인사들은 "당시 참 좋은 제안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이 방법만이 시비를 기증한 쪽이나 먼저 시비의 기증을 요구하여 기증을 받은 쪽이나, 이를 철거하라고 요구하는 쪽 모두 앞으로 계속해서 입어야 하는 정신적, 물질적 상처나 손실을 최소화 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 마산역 광장 '이은상 시비' 철거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속에, 지역 종교계와 학계 인사들은 7일 창원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시비를 기증한 로타리클럽에 설치비 3000만원을 보상하고 시비의 소유권을 넘겨받고자 한다"는 내용의 중재안을 제안했다. 사진 왼쪽부터 안승욱 교수, 허성학 신부, 김용환 목사, 이암 스님.
ⓒ 윤성효
그러면서 이들은 "3000만 원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시비 철거 논란이 날로 악화되니 이런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라며 "3000만 원은 시민모금 형식으로 마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 사건의 근본 책임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마산역 즉, 한국철도공사에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논란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지금이라도 공기업답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밝혔다.
인사들은 "저희들의 제안이 관련 당사자 모두 만족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며 "그러나 현재로서는 모두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시비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안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마산역광장 이은상 가고파 시비 철거를 주장하는 측과 존치를 주장하는 측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지난 7일 학계와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중재단이 타협점을 찾으려 시도했으나 양측의 대립은 오히려 전면전 조짐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찬반 양측은 접점 없이 뚜렷이 갈라졌고, 양측 모두 세가 부풀려지고 있으며,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논쟁으로까지 번질 기미도 보여 '마산' 지역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은상 시비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단(대표 허성학 신부)이 "기증자 측(로타리클럽)에 설치비 3000만 원을 보상해 시비 소유권을 넘겨받고, 모금에 참여한 시민들의 뜻을 물어 시비를 처분하자"고 제안한 데 대해 김봉호 남마산로타리클럽 회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 회장은 "그렇게 되면 또 새로운 갈등이 생긴다. 앞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 오히려 반민주적이고 독재적 발상 아니냐. 위법적인 시비 훼손행위로 순수한 국제 봉사단체인 우리 위상과 자긍심이 훼손됐다. 시비 철거는 노산 선생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문인, 문화단체, 학자들의 큰 반대가 예상돼 (중재단의 제안을) 동의할 수 없다"는 강경한 의사를 내비쳤다.
8일 오전 '가고파 시비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창원시 마산역 광장에서 시비 페인트 제거 작업 후 가고파 시비 존치를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임채민 기자
이와 관련해 로타리클럽을 중심으로 '이은상 시비 존치를 위한 대책위' 구성 움직임까지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천 명의 회원을 거느린 지역 로타리클럽이 이은상 논란에 뛰어들 경우 지역 사회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은상 시비 존치를 원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가고파 시비를 사랑하는 시민'이라는 이름표를 단 일군의 시민들은 8일 오전 이은상 시비에 묻어 있는 페인트를 벗기는 작업을 벌였다.
김복근 경남문협 고문, 오하룡 도서출판 경남 대표, 김교한 한국문인협회 고문, 정계환 태풍매미 희생자 유족회 대표, 김갑상 전 하나방송 이사, 이승일 마산상인연합회 사무처장, 김경환 마산합포구 산호동 주민, 명형대 경남대 교수 등이 페인트 제거 작업에 동참한 이들이다.
이들은 "마산은 3·15 정신과 가고파의 서정성을 융합해 잘사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뉴욕 시장이 지하철 낙서를 지우는 일에서 출발해 깨끗한 도시를 만든 것처럼 마산의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가고파 시비 페인트 제거 작업을 벌이게 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가고파 시비 존치를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중재단 대표 허성학 신부는 "새로운 중재안을 내놓든지 해야 하는데,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로타리클럽도 지역사회 갈등을 증폭시킨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허 신부는 "안 그래도 청사 문제 때문에 마산이 들끓고 있는데 이 갈등이 지속되면 엎친데 덮친격으로 더 큰 혼란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31일 경남 창원시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회 주관으로 '창원시민대동제'가 열리고 있다.
‘예향도시 창원’의 해묵은 이념논란과 문화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창원시민대동제’가 처음으로 창원에서 마련돼 성황을 이뤘다.
31일 오후 1시30분부터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 지역원로 문화예술인, 관내 종교단체를 비롯해 축제장을 찾은 시민과 관람객 등 수 천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민대동제’가 열렸다.
10여 년 전 이은상, 조두남 선생을 기념하는 문화시설 건립문제로 지역사회가 찬∙반 양측으로 갈린 이래 처음 가지는 ‘시민화합의 장’이다.
행사 주최는 서울∙경기지역에 거주하는 옛 마산출신 모임인 재경마산향우회(회장 윤대식)가 맡았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었음에도 과거행적 논란으로 전면에서 밀려나있던 이은상, 조두남, 이원수 선생에 대한 문화적 차원의 재평가는 여러 곳에서 요구돼 왔다.
이날 윤대식 재경마산향우회장을 비롯한 재경향우와 안상수 시장, 이주영 국회의원, 유원석 창원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시∙도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핸드프린팅(손자국 남기기)을 하는 등 화합행사로 진행됐다.
대미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시민과 내빈 전체의 합창으로 장식해 가슴 뭉클하게 했다.
참석자들은 모두가 창원을 대표하는 작품인 ‘가고파’, ‘선구자’, ‘고향의 봄’을 함께 부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를 향한 108만 시민의 화합을 기원했다.
31일 경남 창원시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회 주관으로 '창원시민대동제'가 열리고 있다.
안상수 창원시장은 “이은상의 ‘가고파’, 조두남의 ‘선구자’, 이원수의 ‘고향의 봄’은 전 국민뿐만 아니라 재외동포들도 애창하는 국민가곡들이다. 이제는 작가의 이념이나 공과(功過)를 떠나서 문화적 측면에서 이들을 포용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우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분열된 정서를 하나로 묶기 위해 객지에서도 창원의 화합과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 향우들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관에서 주도하는 행사가 아니라 민간에서 주도함으로써 진정한 지역화합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창원시 입장에서도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의 발자취가 해묵은 이념 논란으로 희석되는 것을 방치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시민대동제로 말미암아 화합의 접점을 찾는다면 민주화 정신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예향의 도시’로 새로운 미래를 열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1일 경남 창원시 ‘제15회 마산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마산항 제1부두에서 재경마산향우회 주관으로 '창원시민대동제'가 열리고 있다.
이은상 기념사업이 시발점이 된 논쟁은 수년간 이어졌다.
옛 마산시는 지난 1996년 총 30억원을 들여 ‘이은상 문학관’을 건립하고, 생가복원과 테마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워 사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친일논란이 있던 조두남 기념사업과 맞물리면서 거센 논쟁을 불러왔다.
오랜 논쟁 끝에 2005년 ‘이은상문학관’이 ‘마산문학관’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조두남음악관’도 ‘마산음악관’이 됐다.
지난 2013년에는 마산역 광장에 ‘가고파 노산 이은상 시비’가 건립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논쟁이 재점화 되기도 했다.
안상수 시장은 “더 큰 창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리 지역의 강점인 문화를 잘 이끌어내야 하는데 해묵은 이념투쟁에 묵혀둘 수는 없다”며 “작가의 공(功)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過)는 과대로 비판하면서 이를 초월해 창원을 통합시키는 문화의 큰 가슴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용문산 시비공원입니다. 이곳에는 용문산의 빼어난 풍광을 노래했던 옛 선인들의 시비(詩碑)를 세웠습니다. 백사 이항복을 비롯하여 열 분의 작품이 원문과 함께 한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용문산은 빼어난 명산이었습니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는 13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간 것이 자란 것이라는 설이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 들렀다가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두 천년을 훌쩍 넘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늙고 추해지지만 나무는 더 신비롭고, 경건해집니다.
용문산에는 용문사, 사나사, 상원사를 비롯하여 윤필암, 죽장암 등 여러 사찰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명현, 명사들 찾아 왔고, 용문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문을 많이 남겼습니다.
양평 출신 선각자이신 영의정 백사 이항복, 용문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심하였던 용문선생 조욱, 위정척사운동의 선구자이셨던 화서 이항로 선생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시문을 시비와 함께 건립하였습니다. 시선(詩選)은 양평 인물을 우선으로 하였고 용문산을 감흥한 시를 선정하였습니다.
용문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우리 선현들이 자연에서 느낀 감흥을 함께 느끼고 감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함입니다. 천천히 걸으시면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시비공원에 있는 용문팔경(龍門八景)은 겸재(謙齋) 양창석(梁昌錫)이 쓴 시비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용문팔경은 ▲용문사 새벽종소리 ▲조계골 열 두 여울 ▲윤필암의 돌아가는 구름 ▲봉황대의 맑은 바람 ▲칠보산의 아지랑이 ▲중원산 폭포 ▲흑천의 어부피리소리 ▲백운봉의 저녁노을 등입니다.
양창석(1909~1983)은 바로 용문면 광탄리에서 사셨습니다. 광탄리에 남원 양씨 문중이 터를 잡고 있었고, 봉황대는 이 문중에서 지은 봉황정(鳳凰亭)의 별명(別名)이라고 합니다.
칠보산(七寶山)은 양평군 개군면, 용문면, 지제면에 걸쳐 우뚝 솟은 산으로 지도상에는 칠읍산(七邑山) 또는 추읍산(椎邑山)이라 적혀 있는데 용문산과 흑천을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는 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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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선생은 다양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는 사학가요 수필가요 시조작가였다. 처음에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던 노산이 본격적으로 시조작가로서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 후반에 일어났던 시조부흥 운동 이후였다.
그의 시조는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인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향수와 감상과 무상과 자연예찬을 노래하였다. 이러한 그의 서정성이 우리 가곡에 걸맞아 인구에 회자하는 주옥 같은 노래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이 지금까지 국민 가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국 분단의 아품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가들에 대한 찬양 등 개인서정보다 사회적인 면에 치우쳐있어 국토 어디에 가나 서도가 김충현과 함께 그의 노래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있어 노산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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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작품: 고지가 바로 저긴데/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오륙도/가고파/
이 마음/봄처녀
2. 노산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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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작품
*고지가 바로 저긴데
苦難의 운명을 지고 歷史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高地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心臟만 남거들랑
부등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성불사 1수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너라고 불러보는 祖國아 너는 지금 어드메 있나
누더기 한 폭 걸치고 土幕 속에 누워 있나
네 소원 이룰 길 없어 네 거리를 헤매나
오늘 아침도 수없이 떠나가는 봇짐들
어디론지 살길을 찾아 헤매는 무리들일랑
그 속에 너도 섞여서 앞 山 마루를 넘어왔나
너라고 불러보는 祖國아 落照보다 더 쓸쓸한 祖國아
긴긴 밤 가얏고 소리 마냥 가슴을 파고드는 네 이름아
새 봄날 桃李花같이 활짝 한 번 피어주렴
*오륙도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오륙도라
흐리락 맑으락 함에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빈 바단데
오늘은 비 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가고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갓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나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 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 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 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녀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人生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 없고
단 잠 들어 죄 없은 몸이
그 바다 물 소리를
밤 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 바다 물을 따라
나명 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 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이 마음
거닐다 깨달으니
몸이 송림에 들었구나
고요히 흐른 달빛
밟기 아니 황송한가
그늘져
어둔 곳만을
골라 딛는 이 마음
*봄처녀
봄처녀 제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하얀구름 너울 쓰고 眞珠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길에 내 집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냥 나가 물어 볼까나
2. 노산의 생애
경상남도 마산에서 이승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 일본 사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이화여자전문대학 교수, 동아일보사 기자, 조선일보사 출판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하고, 사상범으로 광양경찰서에 유치 중 광복으로 풀려났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이었다.
1932년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 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 분단의 아픔,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주요한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를 시험하여, 시조의 단형화를 시조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 순례 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데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그가 죽자 사회장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고향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있다.
[출처]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 |작성자 푸른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