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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역설하였다
백거이白居易(772~846)의 본관은 원래 태원太原이었는데, 그의 6대 조부 건建이 태원에서 한성韓城으로 이주하였으며, 증조부 온溫이 한성에서 하규下邽(지금의 섬서陝西 위남渭南)로 이주하였다.
백거이의 집안은 비록 명문귀족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학문을 하며 관리를 지내온 학자집안이었다.
그의 조부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와 산조酸棗, 공현鞏縣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그의 부친은 소산현위蕭山縣尉, 송주사호참군宋州司戶參軍, 팽성彭城 현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술에서 “가련하였다. 소년시절에 가세가 빈천하였으니!(<백씨문집白氏文集> 권2 <비재행悲哉行>: 可憐哉 少年時家境適在貧賤中!)”라고 탄식한 것을 보면, 그가 출생할 당시에 집안 상황은 상당히 곤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출생한지 6~7개월 만에 비록 말은 못하였지만 무無자와 지之자를 구별할 수 있었으며, 5~6세 때에 시 짓는 법을 배우고, 9세에 성운을 알았으며, 15~16세에 진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정원貞元 3년(16세)에 그는 장안長安에 가서 대시인 고황顧況의 현실주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지도를 받고,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이라는 시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정원 10년(23세)에 그의 부친이 양주襄州에서 세상을 떠난 후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원 16년(29세)에 비로소 고영高郢이 주관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하였다.
그는 32세에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을 거쳐, 원화元和 원년(35세)에 원진元稹과 함께 제책制策시험에 응시, 4등으로 합격하여(원진은 3등) 주질현위盩厔縣尉에 임명되었다.
원진은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12월에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백거이가 태어난 때는 이백李白(701~762)이 죽은 지 10년, 원결元結이 죽은 바로 그해였다.
문학혁신의 기풍과 곤궁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한 백거이는 관계에 진출하여 정치의 문란과 관리들의 부패,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 등 불평스러운 사회현상을 목도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이 그다지 높지도 않았고 실권도 없었으므로 시가詩歌로서 민생의 고통을 대변하고 정치의 부당함을 풍자하여 탐관오리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았다.
백거이는 시가의 이러한 사회적 효용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 채시관採詩官 제도의 시행을 황제에게 건의하여 시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역설하였다.
신이 듣건대 성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참작하여 자신의 허물을 보완하여 이로써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고 교화의 근원을 이끈다고 합니다.
장차 풍속을 살피는 관리를 뽑고 채시관을 설립하여 노래 부르는 소리와 풍자하는 시를 매일 아래에서 채집하고 해마다 위에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일러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스스로 경계하기에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策林> 第69 '採詩': 臣聞, 聖王酌人之言, 補己之過, 所以立理本, 導化源也. 將在乎選觀風之使, 建採詩之官, 俾乎歌詠之聲, 諷刺之興, 日採於下, 歲獻於上者也. 所謂言之者無罪, 聞之者是以自誡
그는 “임금, 신하, 백성, 사물을 위하여 시를 지은 것이지 문체를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며(<新樂府序>: 爲君, 爲臣, 爲民, 爲物, 爲事而昨, 不爲文而作)”, “윗사람은 풍風으로써 아랫사람을 교화하고,아랫사람은 풍으로써 윗사람을 풍자해야 한다(<毛詩大序>: 上以風化下, 下以風刺上)”는 정신에 입각하여 시의 사회적 효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 <풍유시> 172수를 짓고 그것에 최고의 평가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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