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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ㅡ 그는 누구인가...
2016년 02월 21일 23시 48분  조회:4740  추천:0  작성자: 죽림
민족 시인 윤동주를 그린 영화 '동주' 관람 후기


윤동주 시인은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냉전 시대에 윤동주만은 서로 화목하게 해주고 그 시대를 극복해나가려는 힘을 준다. 암흑 속에서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죽는 날까지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앞에 부끄럽지 않게 오늘을 살고 있을까?

‘윤동주’ 시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영혼이 아름다운 순수함, 동결된 순수함을 간직한 채 무덤 속에서야 비로소 시인이 된 애처로움, 문학의 암흑 시기에 한글로 쓰인 시를 남기고, 비폭력 평화를 사랑한 시인을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이유다.

윤동주 시인을 그린 영화라기보다 송몽규 열사를 그린 영화다. 송몽규 열사의 독립운동을 ‘평등사상’과 ‘혁명’으로 그렸다. 시대적 배경은 같은 민족의 불평등 투쟁이 아니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내란 ‘혁명’의 좌익 투쟁처럼 비치게 그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진실을 가장한 허구인가?

윤동주 시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가 감옥을 찾았을 때 일본인 간수는 “조국아!”라는 말이 무어냐?”고 물었다. 시인은 매일 창살을 부여잡고 하늘을 보며 ‘조국아!, 조국아!“를 외치며 울었다. 마치 일본을 꾸짖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죽어 갔는데, 그의 처절한 조국의 사랑과 외침은 어디 있는지?

”동주“는 시인을 세 번째 죽인 영화다. 한번은 일본이 생체실험으로 감옥에서 죽였고 두 번째는 일본이 70년째 ”어떻게 죽였다.“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세 번째는 ‘동주의 나라 사랑과 독립운동을 송몽규의 그림자로 남기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죽음에 70년 동안 침묵해 온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여 그리움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동주’(수감번호 475)에 대한 그리움을 ‘몽규’(수감번호 368)의 그림자로 남기려는 그들은 누구인가?

무서운 시간


윤동주 / 시인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사라져 못찾을뻔했던 두분의 묘지를 찾아내다...=============

▲ 영화 <동주> 포스터 <동주>의 송몽규 캐릭터 포스터. 오늘(3월 7일)은 송몽규의 기일이다.
 

 


[기획] 71년 전 오늘, '청년문사' 송몽규가 떠났다

영화 <동주> 개봉 전날이었던 2월 16일은 윤동주 사망 71주년 되는 날이었다. 또 다른 주인공 송몽규의 기일은 오늘(3월 7일)이다. 오늘로서 사망 71주년이 된다.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 사람은 259명. 이런 사망자 수치는 전쟁 막바지로 치닫는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다. 일본인 고오네 에이치(鴻農映二)씨는 1980년 <한국문학> 10월호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통해 윤동주는 '생체실험'의 대상이었으며 주사를 맞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그려졌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한다. 우리 나이 스물아홉 청년이 이국땅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하자 유족들이 일본까지 가서 시신을 확인한다. 여기까지가 영화에서 전해주는 이야기다.

그들의 서럽고도 애절한 이야기와 서로 맞닿은 인연들은 사망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전보 한 장으로 전해진 윤동주·송몽규의 사망통보

▲ 윤동주의 장례식 윤동주가 어린시절 뛰놀던 마당에서 윤동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정 왼쪽 첫 번째 사람이 문재린 목사(문익환의 부친)다. 사진에는 장례식 날짜와 사망 날짜, 2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사망통보는 전보 한 장이 전부였다. 윤동주 장례는 3월 6일 치러진다. 약 20일이 걸렸다. 용정서 대한해협을 건너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찾아가 시신을 인계받고, 현지에서 화장하여 다시 돌아와야 했으니….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의 주관으로 어릴 때 뛰놀던 마당에서 장례식이 열렸음을 흑백사진 한 장이 우리에게 전해준다.

장지에서는 동주의 시 두 편이 낭독되었다고 한다. 연희전문 시절 몽규와 함께 <문우> 지를 편집하는 장면이 영화에 나오는데, 그때 발간된 <문우>에 실린 동주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을 마지막 가는 길의 윤동주에게 들려준 것이다.

낭독된 시를 지은 한 청춘을 떠나보내는 자리. 망자는 장례 참석자들의 자식이고 손자였으며, 조카였고 동생이었다. 친구였으며, 형이고 오빠였다. 그 당시를 떠올리며 '자화상'을 다시 읽어보자.

윤동주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가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시를 듣는 장지의 사람들. 거기 애도하는 그분들 저마다 흐느끼며 우는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하다.

장례가 치러지는 시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는 송몽규가 사경을 헤맨다. 송몽규의 부모는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조카 동주의 장례식에서 자식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조카를 애도하였으리라.

청년 동주를 묻고, 그 이튿날 3월 7일. 송몽규가 그해의 후쿠오카 감옥 사망자 259명의 명단에 오른다. 그 이후 절차는 동주와 똑같다.

당시 조선어 교사였던 송몽규의 부친 송창희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카 희규를 데리고 가서 동주와 같은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들은 화장터에서 유골을 수습하면서 뼛가루 일부가 땅에 떨어지자, 단 한 줌도 일본 땅에 남기지 않겠다며 흙까지 쓸어서 하얀 사기 단지에 담아서 가져 왔다고 한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는 이러한 증언들을 채록하여 책에 기록한다.

청년문사 송몽규지묘와 시인 윤동주지묘

송몽규의 장례도 끝났다. 봄이 되자 송몽규 집안에서 "청년문사 송몽규지묘"를 5월 14일에, 윤동주 집안에서도 6월에 "시인 윤동주지묘"를 각각 세운다. 동주의 비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용하려고 준비해둔 돌이었는데 손자가 먼저 묘비로 사용했다.

'청년문사 송몽규', '시인 윤동주' 모두 당시 관습으로는 흔한 묘비명이 아니다. 직업이나 관직을 가져볼 여유도 없이 사라진 영혼을 달래주려는 가족들의 애도와 사랑이 이 묘비에 묻어있다. 죽은 아들에게, 죽은 손자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줄 게 없었다. 시인! 청년문사! 그 칭호밖에는….

▲ 윤동주의 묘비 '시인' 윤동주의 묘. 윤동주는 죽어서 가족들에게 맨 먼저 '시인'이 되었다. 윤동주의 묘비를 세우고 유가족들이 함께 했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윤동주 묘비 뒷면엔 태어나고 자란 내력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이 스물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울려 퍼질 만했는데, 춘풍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송몽규의 묘비에도 비슷하게 슬퍼하는 문구와 짧은 생을 기록했다. 유족들은 후에 실종될지도 모를 묘지를 지켜달라는 소망까지도 비석에 담았는지 모른다. 윤동주의 묘지는 용정의 교회 묘지 구역이고, 송몽규는 가족 묘역이었다. 그러나 두 분의 묘지는 한때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윤동주의 동생 일주가 이북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홀로 월남했으며, 여동생도 나중에 들어오고, 동생 광주는 죽었다. 그리고 동주에게는 후손이 없잖은가?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 선생은 현지에서 교장직을 마치고 1948년 나머지 가족을 이끌고 고향 함경도로 들어갔다. 묘지 둘은 이제 직접 돌봐줄 유가족이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상당 기간 중국 땅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윤동주 연구가들도 어렵게 입국하여 묘지를 찾아 나섰다.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송우혜도 자료를 찾아 나섰고, 증언을 채록했다. 그러나 위치를 쉽게 찾지 못했다.

연구가들은 윤동주 묘지가 '동산교회 묘지'라는 증언을 듣고서 찾아 나섰는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용정에는 동산교회, 토성교회, 중앙교회가 있었고, 각각의 교회마다 교회 묘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묘지는 찾고 보니 중앙교회의 묘지 구역 중에 '동산'(산 이름)에 있었다. 산 이름과 '동산교회'가 겹친 탓이었다.

간신히 찾은 묘지, 이제 평안히 쉬시기를...

▲ 윤동주 묘지 발견 일본에서 윤동주 연구를 해오던 와세다 대학의 오무라 교수는 1985년 동주의 묘지를 찾아 이를 국내 학계에 알렸다.
ⓒ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한국인들의 중국 입국이 쉽지 않은 1985년도에 일본인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교수가 이런 과정을 거쳐 동주의 묘지 위치를 찾았다. 그리고 1988년도에 송우혜는 윤동주 관련한 기념비적인 저서 <윤동주 평전>을 처음 발간한다. 송우혜는 송몽규의 조카다.

거기다 송몽규의 묘지 역시 찾기가 어려웠다. 함경도로 갔으니 가족증언도 불가능했다. 다만 어디선가 묘비를 본 적이 있다는 현지 어르신들의 얘기가 있을 뿐이었다. 1990년 들어서 윤동주 기념사업회가 용정을 찾아가고, 윤동주의 유족들도 방문했다. 이 시기부터 송몽규의 묘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지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몽규의 묘지를 수소문한다.

어렵게 현지 노인회를 중심으로 쓰러져 나뒹구는 송몽규 묘비를 찾았다. 따로 쓰러져있는 묘비 인근에는 여러 개의 묘지가 그룹으로 있었다. 과연 어떤 묘가 송몽규의 묘지일까? 별수 없이 묘비 근처의 묘를 하나씩 파헤쳐 매장 상태를 확인했다. 믿을 건 <윤동주 평전>의 기록이었다. 다행히 '부친이 뼛가루를 담아온 하얀 사기 단지'가 들어있는 묘를 초반에 찾아냈다. 거기다 후쿠오카에서 화장터 땅바닥에 떨어진 단 한 줌까지도 '쓸어 담아온 흙모래가 섞인 뼛가루' 또한 거기 있었다. 그때가 1990년이다.

▲ 청년문사와 시인 '청년문사 송몽규지묘'와 '시인 윤동주지묘'. 떨어져 있지만 같은 묘역에 안장된 두 분의 묘지. 이제는 용정 현지인들이 들러 참배도 하고 조선족 학생들도 더러 찾아온다. 묘지석도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다. 왼쪽 송몽규의 묘지석에는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적혀있다.
ⓒ 연변윤동주연구회

 


그해 청명절 송몽규의 묘를 수습하여 윤동주의 묘지 구역으로 이전하고 비도 옮겼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당시 용정중학교 교장이 나섰다.

지금은 윤동주 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송몽규의 묘지도 들르게 된다. 영화에서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도 촬영 중에 일부러 이 묘지를 찾아 참배한 적이 있다고 시사회 때 밝혔다.

묘지를 찾아서인가?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광복절에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95년도에는 송몽규에게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한다. 두 훈장 등급은 독립장 다음으로 애국장 순이다.

두 분 돌아가신 지 71년. 우린 영화 <동주>와 함께 71주년을 기린다. 그리고 내년이면 두 분 태어난 지 100주년이다! '청년문사'와 '시인'은 지하에서 그간의 과정과 모습들을 전부 지켜봤고, 또 보리라.

다시금 처음에 묘비를 세운 유가족들의 혜안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묘비가 없었다면, 우린 두 분을 기릴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 한 곳을 격랑의 현대사 소용돌이 안에 매몰시킬 뻔했다.

두 분 부디 평안하시기를….

▲ 영화 <동주> 후쿠오카 형무소 배경의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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