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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 100명 = 100수
2016년 03월 15일 21시 46분  조회:4093  추천:0  작성자: 죽림
한국 현대시 100주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100 (목록과 시)


제1편 박두진 - 해
제2편 김수영 - 풀
제3편 이성복 - 남해 금산
제4편 황동규 - 즐거운 편지
제5편 김춘수 - 꽃
제6편 서정주 - 동천
제7편 곽재구 - 사평역에서
제8편 김종삼 - 묵화
제9편 오규원 - 한 잎의 여자
제10편 노천명 - 사슴
제11편 최승호 - 대설주의보
제12편 박용래 - 저녁눈
제13편 기형도 - 빈집
제14편 문정희 - 한계령을 위한 연가
제15편 박인환 - 목마와 숙녀
제16편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제17편 정호승 - 별들은 따뜻하다
제18편 한용운 - 님의 침묵
제19편 김남조 - 겨울 바다
제20편 정진규 - 삽
제21편 천상병 - 귀천
제22편 이문재 - 푸른 곰팡이-산책시1
제23편 백 석 - 남신의주 유동박시봉방
제24편 송수권 - 산문에 기대어
제25편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제26편 조정권 - 산정묘지1
제27편 이육사 - 광야
제28편 오탁번 -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제29편 김종길 - 성탄제
제30편 나희덕 - 사라진 손바닥
제31편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제32편 김기택 - 소
제33편 김경주 - 저녁의 염전
제34편 정현종 - 어떤 적막
제35편 오세영 - 그릇
제36편 임 화 - 우리 오빠와 화로
제37편 고 은 -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제38편 함민복 - 긍정적인 밥
제39편 이용악 - 전라도 가시내
제40편 신대철 -박꽃
제41편 박상순 -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제42편 황지우 - 겨울 ―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제43편 문인수 - 쉬
제44편 김명인 - 너와집 한 채
제45편 정지용 - 향수
제46편 최하림 - 어디로?
제47편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제48편 윤동주 - 서시
제49편 마종기 - 바람의 말
제50편 이성부 - 봄
제51편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제52편 김선우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제53편 김기림 - 바다와 나비
제54편 박목월 - 나그네
제55편 김사인 - 봄바다
제56편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제57편 송찬호 -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제58편 장석남 -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제59편 장정일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제60편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제61편 박노해 - 노동의 새벽
제62편 김현승 - 눈물
제63편 구 상 -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제64편 김용택 - 섬진강1
제65편 유치환 - 생명의 서
제66편 이정록 - 의자
제67편 황인숙 - 칼로 사과를 먹다
제68편 김중식 - 이탈한 자가 문득
제69편 신경림 - 농무
제70편 손택수 - 방심
제71편 김소월 - 진달래꽃
제72편 천양희 - 마음의 수수밭
제73편 김영승 - 반성704
제74편 이 상 - 절벽
제75편 김광섭 - 성북동비둘기
제76편 정완영 - 조국
제77편 조태일 - 국토서시
제78편 최승자 - 일찌기 나는
제79편 이하석 - 투명한 속
제80편 신용목 - 갈대등본
제81편 한하운 - 보리피리
제82편 함형수 - 해바라기의 비명
제83편 김승희 - 솟구쳐 오르기
제84편 김광규 - 희미한 예사랑의 그림자
제85편 조지훈 - 낙화
제86편 이시영 - 서시
제87편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제88편 이형기 - 낙화
제89편 김정환 - 철길
제90편 김광균 - 추일서정
제91편 안현미 - 거짓말을 타전하다
제92편 김준태 - 참깨를 털면서
제93편 이재무 - 감나무
제94편 정끝별 -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제95편 이장욱 - 인파이터-코끼리군의 옆서
제96편 김경미 - 비망록
제97편 문태준 - 맨발
제98편 조병화 - 오산 인터체인지
제99편 정희성 - 저문강에 쌉을 씻고
제100편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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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뉘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
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
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2008. 01. 01, 조선일보)
(『해』. 청만사. 1949 :『박두진 전집 1』. 범조사. 198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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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모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008. 01. 02, 조선일보)


-------------------------
3
남해 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시집『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1986)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7』(국립공원, 2007)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2008. 01. 03, 조선일보)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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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0』(조선일보 연재, 2008)
(『어떤 개인 날』. 창우사. 1961 :『황동규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199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5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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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마지막 행이 다르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의미' 보다, '눈짓' 이 개인적으로 더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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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천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6』(조선일보 연재, 2008)
(『동천』.민중서관. 1968:『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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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사평역에서』(문학과지성사, 1983)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7』(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6』(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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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묵화(墨畵)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8』(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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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풀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룰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978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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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픔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1938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0]
(「산호림」. 1938: 「사슴 --노천명 시전집」. 솔.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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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이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다,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다,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983년>
―(현대시 100년 -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 중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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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2]
(『먼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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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나,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나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3]
―시집『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시선집 박영근의 시 읽기『오는,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예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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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1996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4]
― 시집『남자를 위하여』(민음사, 1996)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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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나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마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거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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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6]
―시집『풀입』(민음사, 1995)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4』(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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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7』(조선일보 연재, 2008)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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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8』(조선일보 연재, 2008)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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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겨울 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데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9]
(『겨울 바다』. 상아출판사. 1967 : 『김남조 전집』. 국학자료원. 200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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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즘은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 루 ,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0』(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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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1』(조선일보 연재, 2008)
(『귀천』. 살림. 1989 : 『천상병 시집』. 평민사.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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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푸른 곰팡이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구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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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불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아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사슴)』. 1956. 『백석전집)』.실천문학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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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산문에 기대어)』. 문학과지성사. 198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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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굴게 둥굴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숫시네요



<2005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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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괸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입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 제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비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봄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에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려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희망했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한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산정묘지(山頂墓地)』. 민음사. 199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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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39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문장』. 1939. 8: 『육사 시집』. 열린책들.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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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후략)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의 생각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 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의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침의 예언』조광출판사. 1973. : 『오탁번 시전집』. 태학사.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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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이슈포커스 > ‘애송詩’ 10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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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신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삼애사. 196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조선일보에 연재한 것과 연이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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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2004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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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
신……, 그대라는 자연과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1992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6』(조선일보 연재, 2008)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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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식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2』(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소』(문학과지성사, 2005)
-―『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10』(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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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저녁의 염전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2007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3』(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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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어떤 적막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들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들 손과 더불어.



<2000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4』(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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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릇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1992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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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히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사랑의 서쪽)』. 미학사. 199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조선일보애 연재된 시에는 제목이 <그릇1>로 되어 있고 한국문학선집에는 제목이 <그릇>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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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1929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6』(조선일보 연재, 2008)
(『현해탄』.동광당 서점. 1938 :『임화전집』풀빛. 198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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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을 Qje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이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주(註) : 문의(文義)-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1974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7』(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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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1996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8』(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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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1947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9』(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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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두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쉬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오랭캐꽃』. 아문각. 1947 : 『이용악 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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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은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1977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0』(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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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첫번째는 나
2은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1993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1』(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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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목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끈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2』(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 <겨울-나무로 부터 봄-나무에로> (198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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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3』(조선일보 연재, 2008)


쉬/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
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
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
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
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쉬」, 문학동네, 2006년
―반경환 명시1,2 제1권 102쪽
―제49회 現代文學賞수상시집. 2004. 현대문학
―도종환, 안도현 시인이 추천한 <국립공원 시인의 집>에 비치 돼 있는 시집(자연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제2편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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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
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
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
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나희덕 시인이 엮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에 실린 시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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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3』(조선일보 연재, 2008)
-출처 : 조선일보 입력 : 2008.02.26 00:12 / 수정 : 2008.02.28 11:12



*시집마다 행과 연이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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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질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은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4』(조선일보 연재, 2008)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5/17]
―시집『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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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927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5』(조선일보 연재, 2008)
(『조선지광(朝鮮之光)』.65호. 1927. 3:『정지용 전집)』. 민음사. 1988[개정판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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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어디로?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서랍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6』(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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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을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닿은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7』(조선일보 연재, 2008)


*마지막 행이 한 연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시집에는 다르게 나와 있다(아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을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닿은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開闢)』. 70호. 1926 : 『이상화 전집』. 새문사. 198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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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시/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8』(조선일보 연재, 200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 『정본 윤동주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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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9』(조선일보 연재, 2008)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전집』.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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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누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50』(조선일보 연재, 2008)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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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는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 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1』(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타는 목마름으로』(창작과비평사, 1982)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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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2』(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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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행과 연이 달라 다른 시집에 있는 것도 함께 올린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3』(조선일보 연재, 2008)


[애송시 100편 - 제 53편]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조선일보 홈페이지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1/2008031100386.html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선문화연구소. 194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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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나그네

박목월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4』(조선일보 연재, 2008)

조지훈의 <완화삼(莞花衫)>에 화답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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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봄바다

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결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5』(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제51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목화밭지나서 소년은 가고』(현대문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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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을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6』(조선일보 연재, 2008)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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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7』(조선일보 연재, 2008)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시집『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지상사, 1994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57]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에는 연 구분이 없습니다.
> 이슈포커스 > navi.print(CatID);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6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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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수묵(水墨) 정원 9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8』(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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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시집과 다르다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을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9』(조선일보 연재, 2008)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에는 연 구분이 다르다.
> 이슈포커스 > navi.print(CatID);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8/2008031800458.html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을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시집『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2002)
<다음 카페 : 푸른 시의 방>
http://cafe344.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EZII&fldid=H5qF&datanum=755&contentval=&&search=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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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江)을 처음 보것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0』(조선일보 연재, 2008)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에는 연 구분이 다르다.
홈 > 이슈포커스 > navi.print(CatID);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9/20080319005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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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타는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 녘 울음이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봐, 저것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 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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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오래 못가지

설을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신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스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1』(조선일보 연재, 2008)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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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2』(조선일보 연재, 2008)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운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시초》(1957)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작가가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승화시킨 작품.
주제는 생명의 영원성과 그 근원.
작자는 "외향적인 웃음보다는 내향적인 눈물에서 인생의 미와 가치를 찾으려 한다" 고 말하고 있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를 차례로 보고 있는데
이 시 뿐 아니라 행과 연이 조금씩 다른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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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구상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이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3』(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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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섬진강 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하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걸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4』(조선일보 연재, 2008)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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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생명의 서(書)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렬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5』(조선일보 연재, 2008)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에는 연 구분이 다르다.
홈 > 이슈포커스 > navi.print(CatID);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25/2008032500366.html



생명의 서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렬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생명의 서(1장)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렬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행문사. 1939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시 속에 단어>
(虛寂하다 - 텅 비어 적적하다.



*같은 '시' 이지만 출처 따라 행과 연이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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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2006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6』(조선일보 연재, 2008)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26/2008032600384.html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것이여



(『의자』. 문학과지성사. 2006)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나희덕엮음. 삼인. 2008)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3』(국립공원, 2007)



*출처에 따라 연이 없고 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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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칼로 사과를 먹다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7』(조선일보 연재, 2008)
2011-01-016 / 일요일, 20시 53분

홈 > 이슈포커스 >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27/2008032700453.html



칼로 사과를 먹다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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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8』(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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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69』(조선일보 연재, 2008)




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3 :『신경림 시전집』. 창비.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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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방심(放心)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 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0』(조선일보 연재, 2008)



방심放心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
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뺑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랍문을 빠져 나
가는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러
젖히고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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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1』(조선일보 연재, 2008)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진달래꽃』. 매문사. 1925 : 『김소월 전집』. 문장. 198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우리다 와 오리다의 차이>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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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1994 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2』(조선일보 연재, 2008)


조선일보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2/2008040200348.html


아래 시와 첫부분 행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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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수수밭』.창작과비평사.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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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반성 704

김영승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기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깅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1987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3』(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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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절벽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4』(조선일보 연재, 2008)


이슈포커스 > ‘애송詩’ 100편 제 74편] 절벽



절벽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거기묘혈을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묘혈은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눕는다.아아.꽃이또향기롭다.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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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도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968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5』(조선일보 연재, 2008)



<조선일보 : 애송詩’ 100편>--행과 연이 틀린 시가 많다.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7/2008040700360.html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도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이산 김광섭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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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조국(祖國)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어 학처럼만 여위느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6』(조선일보 연재, 2008)



조국(祖國)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어
학처럼만 여위느냐.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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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국토서시(國土序詩)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1975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7』(조선일보 연재, 2008)
2011-02-08 / 화요일, 오전 08시 27분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08/2008040800265.html




국토서시(國土序詩)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맹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닮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일이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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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일찍이 나는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8』(조선일보 연재, 2008)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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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투명한 속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캥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1980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9』(조선일보 연재, 2008)
-『투명한 속』(문학과지성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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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갈대 등본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0』(조선일보 연재, 2008)
<조선일보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11/20080411003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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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등본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시집『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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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보리피리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발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ㄹ 닐니리.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1』(조선일보 연재, 200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보리 피리』.인간사. 1955 :『한하운 시전집』. 인간사. 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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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2』(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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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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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솟구쳐 오르기 2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3』(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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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리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4』(조선일보 연재, 200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지성사. 1979 )
- 現代試選集『70年代젊은詩人들』(文學世界史,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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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5』(조선일보 연재, 2008)
-김희보 편저『韓國의 名詩』(종로서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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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서시

이시영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6』(조선일보 연재, 2008)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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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7』(조선일보 연재, 2008)
(『52인 시집』. 신구문화사. 1967 :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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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8』(조선일보 연재, 2008)

애송詩’ 100편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4/21/20080421003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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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적막강산』. 모음출판사. 196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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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철길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9』(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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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길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0』(조선일보 연재, 2008)
(『기항지』. 정음사. 1947 :『김광균 전집』. 국학자료원. 200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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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도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까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1』(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곰곰』(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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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갱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2』(조선일보 연재, 2008)
(『참깨를 털면서』.창작과비평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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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감나무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어보는 것이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3』(조선일보 연재, 2008)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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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더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4』(조선일보 연재, 2008)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제2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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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병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템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기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5』(조선일보 연재, 2008)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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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6』(조선일보 연재, 2008)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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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
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
고 슬픔을 견디었을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7』(조선일보 연재, 2008)
(『맨발』.창비.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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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오산 인터체인지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식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8』(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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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9』(조선일보 연재, 2008)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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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100』(조선일보 연재, 2008)
(『영랑시집』.시문학사. 1935 :『김영랑 전집』.문학세계사. 198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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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100명의 추천시 애송시 100편과 사랑시 50편, 합 150편 중 같은 제목의
같은 시인의 시가 (2편) 이 실렸습니다.



<같은 시인의 같은 시 2편 제목>
1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4번째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0번째

2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3번째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6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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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100명의 추천시 애송시 100편과 사랑시 50편, 합 150편 중 다른 제목의
같은 시인의 시가 (32편) 이 실렸습니다.


<제목이 다르고 같은 시인의 같은 시 32편 제목>

<황지우 시인 2편>
1
겨울-나무로 부터 봄 -나무에로 / 황지우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2』(조선일보 연재, 2008)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1985>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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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 2편>

2
김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2』(조선일보 연재, 2008)


낙화, 첫사랑 / 김선우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9』(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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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형도 시인 2편>
빈집 / 기형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13』(조선일보 연재, 2008)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3』(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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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75』(조선일보 연재, 2008)


저녁에 / 김광섭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편 1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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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겨울 바다 / 김남조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19』(조선일보 연재, 2008)


그대 있음에 / 김남조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9』(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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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달래꽃 / 김소월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71 (조선일보 연재, 2008)


후일(後日) / 김소월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3』(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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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풀 / 김수영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2 (조선일보 연재, 2008)


거미 / 김수영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32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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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솟구쳐 오르기 2 / 김승희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3 (조선일보 연재, 2008)


새벽밥 / 김승희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2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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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섬진강 1 / 김용택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64 (조선일보 연재, 2008)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33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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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30 (조선일보 연재, 2008)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37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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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14 (조선일보 연재, 2008)


남편 / 문정희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1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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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맨발/ 문태준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7 (조선일보 연재, 2008)


백년(百年) / 문태준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4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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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울음이 타는 강 / 박재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60 (조선일보 연재, 2008)


한(恨) / 박재삼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1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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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23 (조선일보 연재, 2008)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 백석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0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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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동천 / 서정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6 (조선일보 연재, 2008)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7』(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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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57 (조선일보 연재, 2008)

찔레꽃 / 송찬호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8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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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농무 / 신경림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69 (조선일보 연재, 2008)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6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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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갈대 등본 / 신용목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0 (조선일보 연재, 2008)


민들레 / 신용목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2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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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 (조선일보 연재, 2008)


사랑의 기교 2 / 오규원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9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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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릇1 / 오세영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35 (조선일보 연재, 2008)


원시((遠視) / 오세영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4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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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28 (조선일보 연재, 2008)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탁번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9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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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생명의 서(書) / 유치환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65 (조선일보 연재, 2008)





행복 / 행복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50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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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푸른 곰팡이 / 이문재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22 (조선일보 연재, 2008)


농담 / 이문재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1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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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감나무 / 이재무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3 (조선일보 연재, 2008)


제부도 / 이재무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8 (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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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4 (조선일보 연재, 2008)


세상의 등뼈 / 정끝별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7 (조선일보 연재, 2008)


-------------------
26

어떤 적막 / 정현종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34 (조선일보 연재, 2008)


갈증이며 샘물인 정현종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3 (조선일보 연재, 2008)


------------------------
27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16 (조선일보 연재, 2008)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0 (조선일보 연재, 2008)


----------------------------
28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9 (조선일보 연재, 200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5 (조선일보 연재, 2008)


------------------------
29

일찌기 나는 / 최승자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78 (조선일보 연재, 2008)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 (조선일보 연재, 2008)


----------------------
30

님의 침묵 / 한용운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17 (조선일보 연재, 2008)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2 (조선일보 연재, 2008)


-------------------
31

긍정적인 밥 / 함민복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38 (조선일보 연재, 2008)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8 (조선일보 연재, 2008)


-------------------
32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 황지우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42 (조선일보 연재, 2008)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5 (조선일보 연재, 2008)


========================================================================
같은 시인의 같은 시

1
즐거운 편지 / 황동규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조선일보 연재, 2008)

즐거운 편지 / 황동규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0』(조선일보 연재, 2008)


----------------------------------
2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1』(조선일보 연재, 2008)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6』(조선일보 연재, 2008)


================================

현대시 100주년 기념 조선일보가 연재한 시인 100명의 추천시 100편과 사랑시 50편,
150편 중 같은 시인의 시가 (32편) -제목이 다름- 과 같은 시인의 같은 시 (2편) -제
목이 같음- 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시를 잘 쓰는 시인이 사랑 시도 잘 쓰는 것일까요.
150편의 시 중에 같은 시인의 시가 모두 34편이면 20% 조금 넘습니다.
사랑 시만 보면은 50편 중에 같은 시인이 무려 34명이 들어 있으니 거의 70%로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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