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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습해보는 詩공부]- 시속의 은유
2016년 03월 22일 01시 31분  조회:3974  추천:0  작성자: 죽림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

1. 은유의 개념


은유를 지칭하는 메타포(metaphor)는 일반적으로 희랍어 ‘metapherein’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을 살펴볼 때, 은유란 ‘meta’의 ‘초월해서’(over․beyond)란 뜻과, ‘pherein’의 ‘옮김’(carrying)의 합성어로서 ‘의미론적 전환’을 뜻한다. 표현의 측면에서 직유가 외적 유사성에 바탕을 둔 직접적 비교라면, 은유는 내적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 비교라는 점에서 차별된다. 은유는 합리적이고 산문적인 비교를 벗어나 질적인 도약을 통해 두 가지 대상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화하는 기법이다. 나아가 그 두 가지 특성의 교집합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관계망을 구축한다. 따라서 다수의 비평가들은 은유가 논리를 넘어서는, 혹은 우회하는 사고체계라고 정의한다.
야콥슨(R. Jakobson)은 회화를 예로 들어 아주 명쾌한 주장을 펼친다. 그에 따르면,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3차원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이기에 인위적 방법을 채택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림의 박진감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관습적 방식이 반복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자어와 같은 ‘표의문자’로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일그러뜨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국 은유에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지각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논지로 요약된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에 대한 정의는 러시아 비평가 쉬클로프스키(Shklovsky)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의 주장은 시가 ‘자동화’를 깨뜨려 버리면서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논리다. 이 두 학자의 변별점이 있다면, 쉬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관계를 궁구한다. 즉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고 부정하며 무시하고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자동화․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참신한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어느 한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선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비교조사의 유무에 따른 ‘직유’와 ‘은유’의 구별은 오늘날 크게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극복 방법을 내세운 이는 필립 휠라이트(P. Wheelwright)이다.
그는 자신의 역저인 『은유와 실재』에서 비유가 이미 알려진 것과 체험한 것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제시하는 방편으로 서술의 형식을 지향한다고 단언한다. 즉 A를 이용하여 B를 제시하는 형식은 결국 ‘A는 B다’라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단순한 서술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논리적 제약에 집착하다 보면 시가 지닌 비논리적 특성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논리적 관계에 치중하는 비유를 치환(置換, epiphor)이라고 하고, 비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비논리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을 병치(竝置, diaphor)라 하여 구별한다. 은유는 본의(tenor)와 매재(vehicle)의 관계가 외면적으로는 결합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유사성 내지 이화성의 형식으로 드러나며 시의 가장 주된 요소를 차지하는 시적 화법 중의 하나이다.



1) 1:1 치환의 방식


은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하다. 차라리 은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 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가 발견된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은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은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로 치환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하나의 본의에 두 개 이상의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관념이나 대상(본의)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댈 대상(매재)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명백히 가시화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하여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의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태상으로 보면, 치환이란 용어에서도 드러나듯 ‘A는 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치환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본의, 내 마음)을 이미 잘 알려진 정황이나 사물(매재, 호수)로 대체하여 의미론적 전이를 일으키는 은유의 대표적인 전범이다. 야콥슨의 논리에 의하면 ‘옮겨 놓기’란 등가성의 원리에 입각한 계열의 축으로 구성된다. 또한 직유에서와 같이 비교조사가 직접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인 표현에서도 꿰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표현의 문리가 트이면 트일수록 널리 활용하는 표현 기교에 속한다.




(1) 유사은유


앞 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은유는 본의와 매재를 결합하는 구조적 특질을 지닌다. 그런데 습작생들의 시에서는 본의 따로 매재 따로 노는 경우와 종종 부딪칠 때가 있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이라는 용어에서 ‘결합’이란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결합이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적 관점에서는 어떤 사물에 적합한 이름이 다른 사물로 전이된 형식이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와 어떤 유사성도 없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이며, 또 ‘내 마음’이 ‘호수’로 변환되면서 의미론적 전이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문학 비평가는 물론 전문적인 철학자들에게도 관심의 초점을 모아온 수사적 기법 중의 하나이다. 두 가지 대상을 하나로 버무려 새로운 영역을 유추적으로 재현해 내는 독특한 세계 인식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은유는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돌려 말하기’인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효율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유사은유’(類似隱喩)란 본의(T)와 매재(V)가 1:1 유사성을 축으로 결합하면서 공분모를 드러내는 양식으로서 기존의 ‘치환은유’를 좀더 세분화하기 위해 새롭게 명명한 용어이다.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구토(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 유종인, 「팝콘」 전문


상기 인용시에서 유사성의 축은 “팝콘―꽃/내 마음 진창―속/창문 깨고 투신―밖/내 속을 까뒤집은 것―꽃, 구토” 등으로 추출해볼 수 있다. 화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T, 본의)이다. 이것은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마음의 상태이지만, “팝콘”(V, 매재)의 특성을 통해 명쾌하게 구상화된다. 화자는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화자는 자신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그러한 고통으로 인해 새로운 내적 도약을 예비한다.
화자는 “창문 깨고 투신하”듯이 현재 화자는 힘든 상황을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 같은 표현을 통해 하얀 속살을 내밀며 팝콘으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화자가 말한 ‘꽃’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이 시에서 ‘꽃’은 표면적으로 ‘팝콘’을 나타낸다. 팝콘은 옥수수 씨앗이 뜨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변혁을 이룩해낸 무의식의 표지이다.
나아가 ‘팝콘’은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진 화자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꽃’을 “견딜 수 없는 구토”라고 표현한다. 즉 밖이/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안은/밖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화자도 내적인 고통의 분화구가 터져 제 속을 밖으로 꺼내 몸을 뒤집어 쓴 형국이다. 뜨거워 견딜 수 없는 마음은 밖으로 나오고 단단한 몸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고통의 몸부림과 뒤틀림이 꽃이란 몸의 형상으로 동일화되어 새롭게 탄생하는 도약의 순간이다.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털이 있다. 궁창이 열리고
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
가장 나중에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털이다. 당신이 떠나고
세상에서 가장 싼값으로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낡은 침대나
주전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털.
윤기가 잘잘 흐르는 털. 궁창이 열리고
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풀이다. 땅의 털인
풀.
욕망이 없다면
땅이 풀을
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겠지.
아, 시원해
물 먹고
주전자 옆에 야구르트 먹고
아, 개운해.
날이 저물고
바람이 불면
빼빼마른 창녀들이
잠자리처럼 날아다니겠지.
궁창이 열리고
땅의 혼돈이 시작되겠지.
― 원구식, 「털」 전문


앞서의 시와는 다르게 이 시는 ‘털’(본의)이 ‘풀’(매재)이라는 전이적 은유 구조로 변용되어 있는 수작이다. 털과 풀은 외형상의 조건은 유사하지만, 내용상의 의미는 이질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질성을 축으로 하는 확실한 두 대상의 결합은 ‘욕망=생명’이라는 모호한 주제를 구체화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털은 화자에 의하면 “궁창이 열리고/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가장 나중에 완성”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털은 “쾌락으로 가는 길목”이나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꼼지락거리”는 욕망의 이름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반해 ‘풀’은 “궁창이 열리고/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존재로 긍정화된다. 만약 “욕망이 없다면/땅이 풀을/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전자 옆”에 있는 ‘털’과 ‘야구르트’는 “개운해”로 동일화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결합된다. 창녀로 야기된 털(음모, 욕망)과 천지 창조(사랑, 탄생)라는 쾌락과 생명이라는 이중성을 동시에 환기하는 특성으로 재조합된다. 동양적 사유와 맞물려 있는 성(聖)과 속(俗)의 세계를 일여적 관점으로 정관한다는 것은 시인의 확장된 의식이 있었을 때만이 가능한 사유 방식이다.
이와 같이 ‘유사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본의가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매재로 전이하거나, 구체적인 대상이 다른 이질적인 대상과 결합하기도 한다. 전자에 속하는 유종인의 시가 불확실한 관념을 새롭게 재생하는 효과를 거둔다면, 후자에 속하는 원구식의 시는 두 대상의 차이를 동일화하여 아이러니한 삶의 국면을 보여준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은 동일성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며,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측면이 중시된다. 이처럼 치환의 방식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유사성의 축이 시적 인식과 의미망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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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밭시 34 / 김준태










향기
- 밭詩․34

김 준 태

난(蘭)의 향기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다
7백 년 청자 그릇, 5백 년을 훌쩍
뛰어넘은 백자 그릇으로도 담을 수 없다

살아서 울고 웃는 사람들의 질기고 질긴 목숨만이
꽃 항아리인 양 그 향기를 담아 넣을 수 있으렸다

아흐, 금이 갈까 봐 하느님께서도 여간해서는
손끝 하나 스치지 않는 사람의 따스한 몸뚱이!


김준태 육필시집 <형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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