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그 남자의 방
몸에다 무수한 방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햇살방 구름방 바람방 풀꽃방
세상에, 남자의 몸에 무슨 그리도 많은 방을!
그 방 어느 창가에다 망상의 식탁을 차린 적 있다
안개의 식탁보 위에 맹목의 주홍장미 곁에
내 앙가슴살 한 접시 저며내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의 방을 기웃대다 도리어
내 침침한 방을 그에게 들키던 날
주름 깊은 커튼 자락 펄럭, 따스한 불꽃의 방들 다 두고
물소리 자박대는 내 단칸방을 그가 탐냈으므로
내게도 어느 결에
그의 것과 비슷한 빈 방 하나 생겼다
살아 꿈틀대던, 나를 달뜨게 하던
그 많은 방들 실상, 빛이 죄 빠져나간 텅 빈 동공
눈알 하나씩과 맞바꾼
어둠의 가벼운 쭉정이였다니, 그는 대체
그동안 몇 개의 눈을 나누었던 것일까
그 방의 창이 나비의 겹눈을 닮아 있던 이유쯤
더 이상 비밀이 아니구나, 저벅저벅 비의 골목을 짚어가던
먼 잠속의 물발자국 소리도 그의 것이었구나
예감
왜 가슴보다 먼저 등 쪽이 따스해 오는지, 어떤 은근함이 내 팔 잡아당겨 당신 쪽으로 이끄는지,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한단락 흐린 줄글 같은 당신 투정이 어여뻐 오늘 처음으로, 멀리 당신이 날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 했습니다 우주로의 통로라 이른 몇번의 전화는 번번이 그 외연의 광대무변에 놀라 갈피없이 미끄러져내리고, 더러 싸르락싸르락 당신의 소리상자에 숨어 있고 싶던 나는 우물로 가라앉아버린 별, 별이 삼켜버린 우물이었지요 별들은 불안정한 大氣를, 그 떨림의 시공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반짝임을 얻는 생명이라지요 벌써 숨은 별자리라도 찾은 듯한 낯선 두근거림, 어쩌면 당신의 지평선 위로 손 뻗어 밤하늘 뒤지더라도* 부디 놀리지는 마시길, 단호한 확신이 아닌 둥그렇게 나를 감싼 다만 어떤 따스함의 기운으로요
*지평선 위로 손 뻗어 밤하늘 뒤지다 -朴碩在
거울 속의 벽화
대합실 장의자에 걸터앉아 심야버스를 기다린다
왼쪽 벽면에 붙박인 거울을 본다
거울의 얼굴엔 마치 벽 속에서부터 시작된 듯한
뿌리 깊은 가로금이 심어져 있다
푸른 칼자국을 받아 두 쪽으로 나뉘어진 물상들
잘못 이어 붙인 사진처럼
하나같이 접점이 어긋나있다
그녀의 머리와 목은 어깨 위에 서로 비뚜름히 얹혀있다
곁에 앉은 남자의 인중 깊은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멈춰선 톱니바퀴처럼 비끗 맞닿아있다
그 무방비한 표정 한 끝에 아슬하게 매달린 웃음을
훔쳐보던 내 눈빛이, 스윽
균열의 깊은 틈새로 날개꼬리를 감춘다
물병에 꽂힌 작약, 소스라치게 붉다
일그러진 둥근 시계판 위에서
분침과 시침이 포개 잡았던 손을 풀어버린다
이 모든, 아귀가 비틀린 사물들 뒤에서
아카시아 어둔 향기가 녹음의 휘장 속에 어렴풋 속을 보이고
그렇게 조금씩 제 각도를 비껴나고픈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의 초상이 벽 속에 있다
상사화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달팽이는 저녁이슬 하나씩 깨물어 먹는다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숲은 간이 싱싱한 어린 참나무를 찾고 있다
꽃대궁은 이미 뜨겁다
잎은 혼례에 늦는 신부를 데려오느라 아직 피지 않고 있다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멀리 동구 밖 홰나무는 말울음 소리를 낸다
병 (甁)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그들은 늘 그의 오른쪽에 앉는다
아내 투정도 아이의 까르륵 웃음도
여름날 뻐꾸기 울음소리도 빗소리도 모두
그의 오른쪽 귓바퀴에 앉는다, 소리에 관한 한
세상은 그에게
한바퀴로만 가는 수레다
출구 없는 소리의 갱도
어둠의 내벽이, 그의 들리는 귀와 들리지 않는 귀 사이에
그의 비밀은 사실, 들리지 않는 귀 속에 숨어 있다
전기를 가둬두던 축전병처럼, 그의 왼쪽 귀는
몸에 묻어둔 소리저장고
길게 목을 뺀 말 모자를 푹 눌러쓴 말 눈을 뚱그렇게 뜬 말 반짝반짝 사금의 말 진흙의 말 잎과 뿌리의 말, 세상 온갖 소리를 집어삼킨 말들이 말들의 그림자가 그의 병 속에 꼭꼭 쟁여져 있다
그것들의 응집된 에너지를 품고 그의 병은
돌종처럼 단단해져간다
한순간, 고요한 폭발음!
소용돌이치며 팽창하는 소리의 우주가 병 속에, 그의 귓속에 있다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
류인서(1960~ )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2001년 계간 <시와 시학>에 〈꽃 진 자리〉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20대에 등단한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온 셈이다. 40대 후반을 막 넘어서 50대로 들어서는 이즈막에 류인서는 두 번째 시집 《여우》를 냈다. 첫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2005)를 낸 지 네 해만이다. 그의 시는 “백 개의 눈 백 개의 혀를 가진 꽃”(<알리바이>)이다. 기억의 영지에 파릇하게 돋은 이야기들을 품은 이 시들은 낯설고 기이하고 아름답다. 시인은 민담·설화·동화·영화·소설의 젖을 빨고 그 자양분으로 상상세계를 꽃피운다. 거기서 얼음접시, 물배꼽, 유리구두, 접시거미, 그늘하숙, 울음더위, 종이거울, 그늘나비, 고담시, 세상의 동쪽 끝방, 깜빡죽음 저 나라, 구름 난전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삶의 지루함과 비루함을 견디려는 유희 본능이 빚은 것들. 시인은 누추한 기억들, 그 천일 야화에 상상의 도금을 입힌다. 그것은 “추억의 봉합사로 감쪽같이 꿰매 붙여 다시없는 변종품으로 세간”에 내놓는 것, “일종의 도굴 프로젝트”이자 “일종의 연금술”(〈추억 마케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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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구 출생
2001년『시와 시학』등단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학
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등
대구한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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