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시의 구조 - 행과 연.4
강의를 이제 두번째 하게 되다보니
오랫동안 이 강의실을 지키셨던 급우들과는
한 가족처럼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관계가 더욱 아름답게 발전하여
서로 서로 좋은 글을 쓸 수있는 격려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시의 구조 행과 연에서
여덟번째 내용입니다
8)그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의 한 부분이나 핵심
이 되는 내용을 시의 첫 행에 내 세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시의 내용을 이루는데 있어 첫 행이
중심이 되기때문에 이어서, 오는 모든 행들이 첫
행을 향하여 집중되게 되어 있습니다.
첫 행이 시상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대학원 주임교수님이셨던 허형만교수님의
<풀꽃은 풀꽃끼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가난이야 하나님이 주신 거
때로는 슬픔의 계곡까지 몰려갔다가
저리 흐르는 게 어디 바람뿐이랴 싶어
다시금 터벅터벅 되돌아오긴 하지만
도회지 화려한 꽃집이 부러우랴
밤안개 아침 이슬 모두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외로움이야 하느님이 주신 거
사람 속에 귀염받는 화사한 꽃들은
사람처럼 대접받고 호강이나 하겠지만
때로는 모진 흙바람 속에
얼마나 시달리며 괴로워하리.
때로는 무심히 짓밟는 발에 뭉개져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리.
시르렁 시르렁 톱질한 박일랑
우리사 연분없어 맺지 못해도
궂은 날 갠 날도 우리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이 시에 대해 조태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행을 이룬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는 이 시의 핵심이 되고 있는 행이며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첫 행을 바탕으로
다음 행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시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시의 중심적 의미나 핵심이 첫 행에
자리 잡으면 이 첫행이 다음 행들을 풀어나가는
데 단서가 되거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9)수식어와 그 수식을 받는 중심 단어로 첫
행을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에서 공부한 평서문이 첫 행으로 나오는 경우는
한 문장이 앞에 옴으로 시작에 좀 부담이 될 수가
있지만 이 경우는 그 보다 훨씬 자유스럽습니다.
마종기님의 겨울 노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눈이 오다 그치다 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래 아직도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 막이 빈 벌판을 헤메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역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하나의 관념인 '나이'를 중심으로 수식어들이
그를 적절하게 꾸며 줌으로써 '나이'라는 언어는
딱딱한 개념적 요소에서 벗어나 구체적이며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시는 개념을 피하고 정서를
증폭할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의미에서 수식어들은 한 단어를 치장하거나 한정
시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수식 받는 언어의 '의미
의 육화'를 만들어 줘야만 한다. 그래야 시의 첫
행이 독자들의 가슴 속으로 스며 들어 올 수가
있다.
10)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제시를 통해 시의
첫 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 다음에 오는 상황이나 풍경,
생각, 느낌 등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게
해주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첫 행에 '~하면'따위의 형태로 어떤 행동이
제시되었을 경우엔 그다음에 펼쳐질 내용들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이정록님의 <황새울>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뒤뜰에 가면
무거운 침묵으로 항아리가 있고
힘이란 것이 저런 거야
뚜껑을 열면 반쯤 젖은 돌 하나
그 젖은 얼굴, 아니면
물끄러미 내려보는 겨울 낮달,
갈수록 돌절구처럼 말씀 없으신 아버지
이성부님의 <판소리 張씨>를 읽어보십시다.
누군가는 그가 죽었을 거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그가 아편쟁이로 묻혔을 거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가 촌부로 늙었을 거라고도 한다.
그래도 그녀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의 죽음까지도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아니 그녀의 흔적 하나하나마저 되밟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아아 그녀는 경주시 성건동 신라아파트 A동 몇 호에
우리네 흔한 할머니로 살고 있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웬수놈의 가난이야
복이라 하는 것을 어찌 허먼 잘 타는고오....
야윈 물 어디에서
그토록 힘찬 소리 터져 나오는가
이미 낯 선 곳 흘러와서 잃어버린 소리.
短歌 한 토막으로도
어떻게 그토록 九泉을 뒤흔드는가.
이 시에서는 '누군가가 그가 죽었을 거라 하고'와
같은 하나의 사건의 제시가 첫 행에 옴으로서 시에
이야기의 요소가 가미 되기 때문에 그 흥미를 높이
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1)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감탄사, 또는 의성어
의태어 등 하나의 낱말로써 시의 첫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낱말을 첫행으로 삼는 것은 그
언어를 강조하거나 시인이 의도하는 운율의 효과
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명사들의 경우엔
호격조사를 붙이거나 그 자체로서 호명이 가능
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청각을 자극하면서 친근
감을 자아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사와 동사에 비하여 형용사나 부사는
첫행을 만드는 경우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형용사
나 부사 등은 동사나 명사보다 첫행이 주는 긴잗감
이 덜 하기 때문입니다.
감탄사 또한 단독으로 시의 첫행을 만드는 경우가
극히 드문 일입니다. 감정의 직접적인 노출이 자칫
감상적으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버상에 보면 감상적인 시들이 난무하는데 이는
시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없이 사이버 독자들의
말초만 자극하는 것으로 그 생명이 결코 길지가
않을 것입니다.
의성어, 의태어 역시 가벼움이나 말장난으로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첫행으로 놓을 때는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더욱 요구되기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지 않
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첫 행을 청유형이나 명령법, 가정
법 등으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껏 설명을
드렸지만 말하자면 시의 첫 행에는 대부분의 언어의
수단이 올 수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다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어떤 방법으로
시의 첫 행을 만들든 간에 첫행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을 내장해야 하고,
다음에 오는 행은 물론 마지막 행까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유기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딱딱한 공부하느라 애쓰셨습니다.
시 창작에 사실 이론이 매우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론을 알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또 여기에 예문으로 올리는 시들은 좋은 시들이
많으므로 좀 어렵기는 하지만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시 읽기의 일환으로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남진우님의 <꿈>입니다.
그 새벽
나는 사과나무 아래 서 있었다
휘어진 가지마다
붉게 익은 심장이 마악 솟아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번
뜩이고
어둠에서 풀려나온 잎사귀 끝에 맺힌 물방울들이 후두
둑 내 이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디에도 과수원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반쯤 무너진 황폐한 돌담 옆으로
저 멀리 소실점을 향해 늘어서 있는 사과나무들
거기 두근두근 열린 태양의 과실들
나는 손을 뻗어 붉게 익은 심장 하나를 땄다
내 손바닥 위에서 팔딱이는
붉고
동그란
심장
한입 가득 그것을 베어 물자
어디선가 맹렬히 타종소리가 울려퍼지고
보이지 않던 새들이 깃을 치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 새벽 내가 서 있는 곳은
우물가였다 나는 마른 우물 바닥 저 밑에서 홀로
붉게 빛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승훈님의 해설을 덧붙입니다.
"그의 꿈 속엔 사과나무가 있고, 그 아래 그가 서 있
고, 붉은 사과는 붉게 익은 심장이 되어 아침 햇살에
번득인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그는 거기서
태양, 사과, 꿈을 따고 그걸 베어 먹고, 그때 종소리
가 들린다. 이 종소리를 매개로 그가 삼키는 태양,
사과, 새 들은 날아간다. 안이 밖이고 삼킴이 비상
이다. 새벽 우물 바닥에도 붉은 사과, 태양이 빛나
고, 사과 하나가 지상 천상 지하를 물들이는 이 유
토피아, 이 화엄(華嚴)의 세계에 누군들 가고 싶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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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십칠야 날씨, 포근함 / 장이지
십칠야 날씨, 포근함
장 이 지
열이렛날 밤 달빛이 야위었다.
자다 깬 텁텁한 입에
보름날 먹다 남은 부럼 털어 넣고,
달빛에 홀려
창가 의자에 엉덩일 내려놓는다.
죽은 나무 위에서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솔로로 「메모리」를 열창하는 밤,
올해는 소원도 빌지 못했구나.
호주머니에 신화를 넣고 다니던 시절,
달님은 동요 속 쟁반,
검은 설탕물 걸쭉하게 흐르는 호떡,
개구쟁이들의 축구공이었다.
신화를 잃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
가족의 건강, 사업의 번창,
사랑의 기원, 집 장만, 복권 당첨.
대학 입시 때인가 처음 정월 보름달에 빌었다.
고향집 앙상한 목련 나무 꼭대기, 대머리 달은
내 인생의 편집자처럼 앉아 있었다.
내 생의 스토리를 다 안다는 듯.
타관 땅 서울에서의 정월 대보름달은
한강 밑으로 잠긴 은항아리로 내게 있다.
짝사랑에게 전화 걸고 돌아오는 길
깊이 가라앉는 달을 보았다.
은항아리 안을 휘도는 물의 발레!
열이렛날 밤 달빛에서 호두 맛이 난다.
늦은 더위라도 팔아볼까, 허물없는 달에게.
나는 아직 꿈을 꾸지만,
달이 무슨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은 아니리.
달은 아버지가 아니겠는가.
고3 때 자율학습 끝나고 늦은 귀갓길
무거운 가방 들어주러 나오시던.
짝사랑에 가슴 조이던 대학 시절
술잔 건네며 격려해주시던.
달은 그렇게 아버지처럼 늘 곁에서 걸었다.
달빛에 기대어 잠시 졸아도 좋으리.
열이렛날 밤 달빛의 품이 벌써 봄 같다.
그리자벨라가 하늘 사다리를 타고
행복한 기억 속으로 마실 나가던
십칠야 날씨, 포근함.
장이지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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