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속성은 금기를 푸는 데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애초에 과학적 용법을 정서적 용법으로 말을 바꾸어 쓰는 것 자체가 금기 풀기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굳어있는 사물이나 세계를 정서나 상상으로 변형. 굴절시키다 보면 종래의 문화나 틀이 깨어져 나가게 마련이다
-- 김용택의 <초가집>
제 그림자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
시꺼멓게 그을려 있다
풀꽃들이 저물어
낮은 처마 밑으로
찾아들고 있다
집으로 드는 맛이 난다. 이 시는 초가를 여자로 둘러 말하면서 해가 지면서 만들어지는 긴 그림자를 "제 그림자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로 말하고 있다. 사물을 의인화하고 또 그 뒤에다 어떤 상태를 행동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말의 맛이 살아나고 있다. '풀꽃들'도 그 자체로 보는 경우와 아이들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어떤 경우든 현실의 비틀기에 관계된다. 현실을 비튼다는 말은 어떤 금기를 풀어 버린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김용택의 시처럼 이런 수준의 말하기에 시가 깃들어 있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실험적인데 마음을 품기 시작하면 정상적인 시가 비틀리게 되는데 시를 산문으로 쓴다든가 띄어쓰기를 무시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 이성복 <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기막히게 쓴 맛이다. 사람들은 다 병이 들었는데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화자가 말을 하는 그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왜 운문의 금기를 풀어 버린 것일까. 내리닫이로 산문으로 풀어나간 이유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이 시가 운문으로 토막을 내고 호흡을 가지런히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 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전방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여기까지만 줄갈이를 해 놓고 바라보자. 아무리 따라 읽어 내려와도 국물밖에 없지 건더기가 건져지지 않는다. 암시나 속뜻, 감각이나 비약중에서 그 어느 것 하나도 만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줄갈이를 해 놓고도 줄갈이가 갖는 기능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줄갈이 자체를 원인 무효로 깨어 버리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긴장이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
지극한 일상사를 말해야 할 처지라면 일상사의 모습을 닮은 산문을 원용하면 내용과 현실의 일치라는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는 전략이다
또 산문형은 어느쯤에서 무엇이 나타날지 예측 불허의 복마전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읽어 내려가는 것 자체가 진땀이 나게 한다
산문으로 시를 써내려 가는 것이 이런데 의미가 있음을 훨씬 앞에서부터 눈치 챈 사람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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