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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독일의 시인들 10인 (9)
잃어버린 ‘숲’의 빛을 찾아서
송용구(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한국 시인: 이윤택, 정대구, 오태환, 최창균, 이솔
*독일 시인: 카를 리하, 아른프리트 아스텔, 랄프 테니오르, 한넬리스 타샤우, 하인츠 쉬네바이스
잃어버린 ‘숲’의 빛을 찾아서
- 이윤택의 「숲으로 간다」
1952년 부산에서 출생한 시인 이윤택. 그는 197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그는 특히 한국 연극계의 대부이자 산파로서 ‘연극’을 통하여 문화의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해왔다. 그에게 ‘문화 게릴라’라는 별칭이 안성맞춤인 까닭은 자명하다. 극작(劇作), 희곡론, 연출, 시, 시극(詩劇), 평론 등의 서로 다른 영역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장르 간의 통섭과 상호의존의 길을 열어나가는 능력이 천부적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상호부조론을 제시하였지만 그 상호부조의 원리를 이윤택의 예술세계로 옮겨서 말해보자. 그에게 있어서 예술 장르 간의 ‘차이’는 하나의 장르와 다른 장르 간의 ‘상호부조’를 강화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윤택의 시는 희곡을‘언어예술의 집’으로 건축하는 벽돌이었다. 이윤택의 평론은 시(詩)를 ‘사회적 테마의 의복(衣服)’으로 직조하는 옷감이었다. 이윤택의 희곡론은 연극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유기적으로 융합시키는 문화 미디어였다. 이윤택의 시극(詩劇)은 현실의 혈액이 흘러가는 언어의 뼈대 위에 사상의 살을 입힌 ‘예술의 몸’이었다.
그런데 이윤택의 예술세계에서 발견되는 장르 간의 ‘상호부조’ 현상은 그의‘시’를 움직이는 심장과 같은 원리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생명선(生命線)으로 이어져서 역할의 연대를 이루며 협력하는 ‘유기체적 네트워크’이다. 그러나 이 ‘유기체적 그물망’을 구성하는 생명의 그물코가 끊어지고 ‘상호부조’의 원리가 교란되는 현실을 비평의 메스로 차갑게 해부하는 외과의사가 시인 이윤택이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밥의 사랑』등이 있다.
조씨부부(趙氏夫婦)는 첫 애를 낳은 지 한 해도 채 지나기 전
젊은 아내의 왼쪽 가슴을 잘라내고
숲으로 간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빛을 받고 살아서
습지(濕地)를 확보하지 못한 젖이 마르고
그래서 더욱 각박한 느낌으로 도드라진 가슴 안쪽부터 쪼그라들면서
암세포는 자랐다
그래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태어난 아이들은 어디로 가지를 뻗어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던져져서 국적불명으로 자란다
그래서 세상은 길을 잃고
현대는 잃어버린 아비 찾기다
이것이 실존이다!
외치던 철학자는 결국 멀리 존재하는 숲을 보지 못한 채
자동차에 치여 죽었고
도시를 비켜 선 외곽에서 닭을 키우던 시인은
난생(卵生)의 시를 남겼다
2.
숲은 어디에 있나?
숲은 그냥 우리가 숲이라고 불러주는 그곳에
아파트 근처 야산 키 작은 나무 몇 그루로 둘러싸인 구렁에
아니라면, 베란다에 화분 몇 개 놓든지
사진작가 육명심(陸明心)이 찍은 소나무 사진을 걸어두고
실내조명을 조금 어둡게 조절하면
자신의 숲을 확보할 수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스로 숲이 되는 일
어떻게 사람이 숲이 될 수 있는가
......책 속의 길을 찾아 떠날 일
책 속에서 숲을 찾는 매력은
책을 읽다 문득 이마박이
화끈!
밤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숲의 광채를 목격하는 일이다.
동방박사들이 그 빛을 좇아 따르고
석가가 빈 하늘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고
시인 폴 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노래할 때
숲은 밤하늘에 광채를 쏘아 올린다
그 빛은 사실
스스로 숲이 된 자의 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 이윤택의 시 「숲으로 간다」전문
*「숲으로 간다」: 2007년 『동서문학』에 발표된 후 2014년 ‘도요’에서 간행한『도요문학무크』제6호에 수록되었다. ‘시’는 생명의식과 사회비평의 변주곡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첫 애를 낳은 지 한 해도 채 지나기 전 젊은 아내의 왼쪽 가슴을 잘라냈다.” 이 발언은 유방암과 ‘유방절개수술’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진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사건이 ‘생태위기’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를 포착함으로써 이 시는 진부한 의미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인간의 암(癌)을 유발하는 병인(病因)들이 자연의 병에서 자라난다는 생태적 인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있는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시인의 눈은 시행이 전개될수록 날선 검(劍)처럼 변해간다. “우리가 받고 사는 너무 많은 빛”은 자연의 싱싱한 햇살이 아닌 인공의 빛이다. 그것은 물질만능주의의 메커니즘이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계화의 빛이요, 상품화의 빛이다. ‘소유’라는 목적을 위해 인간의 정신을 도구로 이용하고 인간의 몸을 수단으로 남용하는 맘몬의 빛이다. 우리는 그 “빛”을 일용할 양식처럼 먹고 살다보니 “더욱 각박한 느낌으로 도드라진 가슴 안쪽부터 쪼그라들면서 암세포는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64년‘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 이론을 제시한 철학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지배”에 원인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맘몬’을 위해 인간을 상품이나 도구로 오용(誤用)하는 행위는 자연마저도 상품과 도구로써 남용할 수밖에 없다. 이승하 시인이 탄식한 것처럼 “생명을 물건”으로 타락시키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적 ‘도구화’ 현상은 “숲”을 병들게 하는 생태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다. “숲”은 녹색의 숨결을 생산하는 허파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병인(病因)들을 제조하는 회색의 공장으로 변해간다. 시인 이상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숲”은 “회탁”의 현장으로 타락해간다.
연초록 가지끝에서 흘러나오던 맑은 숨결들은 어디 갔는가? 그 대신에 사람의 폐부 속으로 스며드는, 녹슨 쇠토막의 피부를 닮은 탄소의 물결들을 보라. “숲”은 머레이 북친이 지적했던 “생태위기”의 온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고 했던 평론가 도정일의 말처럼 “아비”의 따스하고 넉넉한 가슴을 닮은“숲”은 사라져간다. 이제는 탄소의 담장으로 인공의 울타리를 두른 “숲”이 우리를 부른다. 그러기에 시인 이윤택은 “세상은 길을 잃었다”라고 탄식하지 않는가?우리는 “아비”의 조건 없는 사랑을 닮은 순수한 “숲”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처럼 우리는 고향 같은 “아비”의 흙가슴이 살아 숨쉬는 “숲”으로부터 멀어져서 회탁의 거리에 “내던져진” 존재들인가 보다.우리는 “아비”의 집과 다름 없는 “숲”을 잃어버린 채 “국적불명”의 미아로“던져져서” 문명의 탁류(濁流) 속을 떠돌고 있나 보다. 우리 모두는 지금 “멀리 존재하는” 숲으로부터 “내던져진” 현대인들이다. 우리는 물신(物神)을 섬기는 배금교(拜金敎)의 광신도가 되어 ‘소유’에 집착하는 근심이 “암세포”처럼 자라나고 있다. 우리의 몸은 오염된 물과 공기의 보복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다양한 병명(病名)을 지닌 환경호르몬의 화살들을 가슴에 맞고 “가슴 안쪽부터 쪼그라들면서” 생명의 세포들을 갉아 먹는 질병의 “암세포”를 키우고 있다. 지금 이곳에“던져진” 우리들이 직면하는 ‘한계’는 바로 이것이다. “멀리 존재하는 숲을 보지 못한 채” 건강한 정자(精子)들을 흙의 자궁 속에 뿌리지 못하는 “숲”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맞부딪치는 ‘한계상황’의 격랑(激浪)이다. 시인은 이 한계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독일 시인 루드비히 펠스(Ludwig Fels)는 그의 시 「설비」에서 “당신은 분무기로 전나무 향기를 뿌려대고/ 나는 이끼 덮인 보료에 바람을 불어넣지요./ 당신은 녹음기로 새소리를 불러내고/ 나는 플라스틱 꽃에 물을 줍니다.”라고 슬픈 유희를 읊었다. “숲”의 실상과는 단절된 채, 숲의 가상(假像)만으로 정서적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의 허탈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사진작가 육명심(陸明心)이 찍은 소나무 사진을 걸어두고/ 실내조명을 조금 어둡게 조절하면/ 자신의 숲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윤택 시인의 말 속에도 자연과 인간의 괴리로 인한 슬픔을 자위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원초적 생명력을 간직한 “숲”을 만나려면 “책 속의 길을 찾아 떠나라”는 시인의 말이 시사하듯이 숲은 갈수록 인공(人工)의 길을 치닫는다. 가상과 모상(模像)의 기괴한 앙상블로 변해가는 “숲”의 현실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깨져버린 인간의 ‘한계상황’을 말해준다. 그러나 근원의 생명이 살아 꿈틀대는 “숲”을 잃어버린 현실적 한계의 격랑에 부딪쳐서 정신적 고난의 거친 바람(風)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 시인의 ‘실존’ 아닌가? 그의 ‘실존’은 인내의 인동초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이것이 실존이다!”라는 고백은 진정한 “숲”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시적 자아의 인내를 강화시키는 내면적 결단이다. “이것이 실존이다!”라는 외침은 철학자로 변용(變容)된 시인의 길찾기 선언이요, 잃어버린 근원의 숲을 회복하려는 시인의 “아비 찾기”선언이다.
시인은 ‘단절’이라는 한계상황을 직시한다. 야스퍼스(Karl Jaspers)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시인은 ‘한계상황’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절망의 ‘난파’를 딛고 일어선다. ‘한계’의 파고(波高)를 ‘초월’하기 위하여 그는 ‘이성’의 닻을 끌어 올리고 ‘의지’의 돛을 펼쳐 올린다. 그는 고향의 흙가슴이 살아있는 “숲”의 해안으로 귀항(歸航)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책 속에서 동방방사들이” 좇아가던 숲의 “빛”이 아닌, “석가”의 해탈을 도와주었지만 지금은 “책 속에서”만 죽은 문자(文字)로 누워 있는 숲의 “빛”이 아닌, 생명의 “빛”이 충만하게 출렁이는 숲의 해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시인에게 발견된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실존’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는 항해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한계’의 격랑을 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속으로 시인은 자신의 온 생명을 ‘내던진다(己投)’. 가능성의 산정을 향해 시지프스처럼 생명의 돌을 굴려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숲을 잃어버린 현실의 황무지 한 복판에 ‘내던져진(彼投)’ 시인 이윤택. 그는 원초적“빛”의 물결이 속살거리는 근원의 바닷가에서 “아비”처럼 넉넉한 가슴을 열고 그를 맞이해줄 “숲“을 향하여 그의 존재 전부를 내던진다(己投).
횔덜린(F. Hoederlin)은 「빵과 포도주」에서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동시대의 시인들에게 질문하며 “밤에도 깨어 있기”를 갈망하였다. 릴케(R. M. Rilke)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드넓은 모태에서 비좁은 세상으로 나온 것”을 슬퍼하며 모태와 같은 근원적 세계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꺽지 않았다. 시인 이윤택도 모든 인간에게 막힘 없는 자유와 충만한 생명력을 베풀어주었던 숲의 “드넓은 모태” 속으로 귀의하려는 언어의 항해를 돌이키지 않는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이윤택의 시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의 언어는‘궁핍한 시대’의 장벽을 넘어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과 인간의 본원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밤에도 깨어 있는’ 실존의 집이다.
3중 생태계의 마이크로코스모스, ‘시’여!
- 카를 리하의 「금언」
1935년 ‘보헤미아’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에서 출생한 시인 카를 리하(Karl Riha). 1976년 이후 지겐(Siegen) 대학교’에서 독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시인, 문예비평가, 문예지 편집인으로서 활동해왔다. 가히 '전방위적 문학인'이라고 부를만한 시인이다. 카를 리하는 지금까지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하였지만 시인으로서 보다는 독문학자로서 더욱 알려져 있다. 한국의 ‘각설이 타령’에 견줄만한 독일 전래의‘장타령’과 독일 ‘저항시’에 대해 연구하여 학문적 성과를 얻었다. 1984년 이후 학술잡지 『매체연구와 서평』의 공동 편집인으로서 활동해온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문학연구’의 영역을 ‘미디어 연구’ 및 ‘문화연구’의 영역으로 확대하였다. 그만큼 학문 연구의 범주가 넓고 다양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카를 리하에 대한 평가는 독일어권 문단에서도 인색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가장 현대적인 시’를 쓰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을 둔 ‘상대주의’적 세계관, ‘해체주의’적 세계관, ‘생태주의’적 세계관을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의도적으로 문자(文字)를 키우는가 하면, 문자를 뒤집어 거꾸로 배치하기도 하며, 도형,그림, 만화, 벽보, 악보, 사진, 몽타주, 콜라주, 패러디, 패스티쉬 등을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카를 리하의 시는 언제나 새로운 실험방법들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그의 시를 일종의 ‘전위시’로 볼 수도 있다. 1992년 여름 베를린으로 한국 작가들을 초대하여 ‘한국문학의 주간’ 행사를 주도하는 등‘한국과 독일의 문화 교류’에도 기여하였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1991년 김광규 시인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된 바 있는 『지금 이 순간』(1984)과 첫 시집 『모든 물고기가 다 새(鳥)는 아니다』(1981)가 있다
자음과 모음이 없으면 음절이 없고
어절이 없고
어절이 없으면 문장도 없다
그러나
길게 이야기하면
입이 마른다
- 카를 리하의「금언」전문
*「금언」: 1984년에 출간된 카를 리하의 시집 『지금 이 순간』에 수록되었다. 예술성과 미학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직설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카를 리하의 시가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 ‘해체주의’에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끄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 ‘생태주의’, ‘생태언어학’의 관점을 ‘통섭’시켜서 위의 시를 분석하는 것도 시인의 세계관을 위배하지 않는 해석이 될 것이다.
이 시에서 “자음”과 “모음”은 각각 독립적 개체이다. 자음은 모음을 지배하지 않고, 모음은 자음에게 예속되지 않는다. 시를 집이라고 한다면 이 ‘언어의 집’ 안에서 자음과 모음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상대방과 동등한 수평관계를 맺고 있다. 모음과 자음은 ‘상호의존’의 작용을 통하여 “음절”이라는 ‘몸’을 세운다. 모음과 자음은 “어절”이라는 공생의 방(房)을 만들어 동거한다. 자음과 모음은“문장”이라는 거실을 완성하여 마침내 ‘시’라는 ‘집’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자음과 모음은 각각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는 가운데 타자(他者)와의 언어적 상호의존을 통하여 ‘시’라는 집을 구성하는 가족이 되고, 전체의 일부분이 된다. 이 때,모음은 동등한 자음의 ‘타자’이고, 자음은 동등한 모음의 타자이다. 양자는 언어의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차이’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시’라는 집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각자의 역할은 다르지만 자기의 역할과 타자의 역할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까닭에 소통의 상호관계를 긴밀히 이어나갈 수 있다. 마침내‘시’라는 언어적 관계의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를 리하의 시는 음절들의 생태계, 낱말들의 생태계, 어절들의 생태계, 문장들의 생태계로서 ‘집’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음절”들의 상호의존을 통하여 낱말들의 생태계가 형성되며, 낱말들의 상호의존을 통하여 “어절”들의 생태계가 형성되고, 어절들의 상호의존을 통해서는 “문장”들의 생태계가 움직이고, 문장들의 상호의존을 통해서는 ‘시’라는 ‘언어의 생태계’가 열매처럼 열린다. 카를 리하의 시 「금언」은 독일의 언어학자 알빈 필(Alwin Fill)이 제시한 ‘생태언어학’의 관점으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음절 간의, 낱말 간의, 어절 간의, 문장 간의 공생(共生)이 ‘시’라는 ‘언어의 생태계’를 움직이는 순환질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거시적으로 확대하여 바라본다면 각 ‘지역 언어’들 간의 공생이 각‘지역 문화’들 간의 소통과 상호의존을 원활케 하여 세계의 ‘언어 생태계’와‘문화 생태계’의 평형을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을 낳지 않는가? 카를 리하의 시는‘사물 생태계’, ‘언어 생태계’, ‘문화 생태계’를 압축시킨 ‘3중(重) 생태계의 마이크로코스모스’이다.
‘돌’은 ‘물’의 손길이 빚은 생명
- 정대구의 「물의 조각품」
1936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한 시인 정대구. 그는 197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자연과 인간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인간의 몸 속에 살아 꿈틀대는 자연성을 예찬한다. 자연 속에 파묻혀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육체성을 만져볼 수 있는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땅 속에 잠들어 있던 만물을 일으켜 세우는 ‘봄바람’은 시인의 몸 안에서 불어가는 ‘바람’이요, 시인의 몸을 낳아준 모태의 숨결이다. 자연의 생명력을 받고 태어나서 자연 속에 안기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바로 시인일 것이다. 시인은 자연의 아들이자 근친(近親)인 까닭에 자연의 몸짓과 움직임을 노래로 대변할 자격을 갖는다. 시인은 시에게 자연의 옷을 입혀주고 자연 속에 시의 멜로디를 불어넣는 현대의 오르페우스이다. 시인의 마술피리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을 따라 나무들이 독자의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 온다. 시인의 칠현금이 빚어내는 리듬을 따라 꽃잎들이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이와 같이 정대구 시인은 자연과 ‘나’의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시각적 ‘울림 소리’와 청각적 ‘향기로움’과 촉각적(觸覺的) ‘물결 무늬’로 표현하는 ‘공감각적 언어의 변주곡’을 연주해왔다. 그의 대표적 시집은『겨울 기도』, 『무지리 사람들』, 『양산 시편』, 『너가 바로 나로구나』등이 있다.
돌인지 물인지/ 돌은 물의 밥인지/ 물이 돌의 밥인지/ 꿈틀꿈틀 돌의/ 부드러운 물결/ 돌을 말아 올린/ 물의 눈썹/ 무슨 그릇인지/ 우묵우묵 박혀있는/ 물의 눈동자/단단한 돌 표면에/ 새겨진 물소리/ 찰삭찰삭 찰랑찰랑/ 경남 언양읍 등억리 온천 입구/ 작괘천 강바닥에 가서 만져 보면/ 들린다 보인다/ // 마른 돌 속에 물소리/ 단단한 돌이 부드러운 물의 밥/ 돌밥 먹고 물은 돌이 되어/ 물밥 먹고 돌은 물살 되어/기어가는 물소리/ 물의 뜻대로 돌은 깎이어/ 파르르 어깨를 걸고/ 이랑이랑 일어서서/ 굴러가는 단단한 돌의 파랑/ 어디로 날아가나/ 돌의 나비 나풀나풀 물날개/ 파도치며/ 흘러가는 돌의 물결무늬/ 잔잔한 바람물살/ 어지러워/
- 정대구의 시 「물의 조각품․1」중에서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든가/ 너와 내가 살을 맞대고 살아온 지/ 지금이 몇 십 년째인가/ 강산이 서너 번 변하고도 남는 세월/ 물에 물탄 듯 표 나지 않는 내 성격 탓이겠지만/ 너보다 약한 나보다 강한 너의 말결에/ 살결에 자주 베이고 터지고 멍들어온 깊은 상처/ 머리로 배로 손으로 발로 온몸으로/ 피를 흘리며 너를 길들인/ 네 속의 나의 흔적/ 못 믿겠거든 작괘천에 가서/ 단단한 강바닥에 하늘 보고 누워 있는/ 물의 뼈/ 돌 속에 손을 넣어 보라/ 간질간질 간질이는/ 돌 속에 물결치는/ 오, 나의 숨소리/ 부드러운 나의 손길/ 순수한 물의 조각품/ 나를 읽을 수 있으리
- 정대구의 시 「물의 조각품․2」중에서
*「물의 조각품」: 2005년 ‘시선’에서 간행한 시집 『양산시편』에 수록된 작품이다. “물”은 “돌의 밥”이 되어 “돌” 속에서 흐르고 돌을 썩지 않게 한다. 돌은“물의 밥”이 되어 “물살”을 단단하게 하더니 물의 살결 속에 스며들어 “나비”처럼 “나풀나풀 물결무늬”의 “날개”를 친다. “돌”을 생명체로 바라보는 불교적 우주관을 엿볼 수 있거니와 모든 생물이 생명의 핏줄로 이어져 있다는 생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인 자신이 “물결”이 되어 돌 속으로 스며들어 돌의 심장이 되었다. 그는 나비처럼 물결의 날개를 타고 물의 마음 속에 안기어 물의 형상을 닮은 순수의 결정체, 즉 “돌”이 되고 있다. 시인은 스스로 말한 것처럼“물의 조각품”이 된 것이다.
돌은 “물의 뼈”이고 돌 속에서 시인의 “숨소리”가 물결친다. 돌은 물의 손길이 빚어놓은 “조각품”이지만, 바로 그 돌 속에서 생명의 숨결이 물살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돌은 대자연이 빚어낸 살아있는 조각품이다. 돌과 사람은 자연이 낳은 근친이자 형제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는 물건으로 취급하는“돌”이 시인의 분신이 되고 있다. 시인의 생태의식과 불교적 연기론이 물소리의 화음을 합주(合奏)한다.
아스피린의 아이러니
- 한스 아른프리트 아스텔의 「환경오염」
1933년 뮌헨에서 출생한 시인 한스 아른프리트 아스텔(Hans Arnfrid Astel). 독일 남서부의 자를란트(Saarland)에서 거주하며 문학활동을 지속해왔다. 필명은 한스 라무스(Hanns Ramus)이다. 1959년 문예지 『서정시 노트』를 창간하여 1971년까지 주관하였다. 아스텔은 이 문예지에 ‘한스 라무스’라는 필명으로 시를 연이어 발표하였다. ‘자연’의 속성을 관찰하고 ‘자연’과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연속되었다.시대, 사회,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자연시(自然詩)의 리얼리즘으로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8년 서독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고 정치적 성향을 띈 첫 시집 『위기』를 출간하였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비판적 성향이 강한 시집이었다. 아스텔의 비판적 정치의식은 ‘자연’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났다. ‘자연’을 사회의 네크워크 안에 포함시키고 정치와 ‘자연’ 간의 관계를 성찰하는 폭넓은 자연관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스텔의 시에 대하여 ‘생태시’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위기』(1968), 『정화 장치』(1970), 인터넷 시집 『바닷가 모래』(1994년 이후), 『성좌(星座)』(1999) 등이 있다.
레버쿠젠 市의 바이에르 회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약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지요.
그 회사는 아스피린만이 아니라
두통까지도 생산해내니까요.
변기에서 헹구어진
똥은
강물로 흘러들어가지만
똥은 탈진해버린 듯
이미 하얗게 탈색되었습니다.
이런! 오줌에도 피가 고이는군요.
- 시 「환경오염」전문
*「환경오염 Umweltverschmutzung」: 1974년에 발표된 시. 1981년 뮌헨의 ‘체 하 베크(C. H. Beck) 출판사에서 간행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1950-1980』 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재수록 되었다.
‘아스피린’의 내부에 포함된 화학물질의 독성(毒性)은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의 몸까지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1960년 독일의 대표적 작가 귄터 그라스가 다음과 같이 폭로하지 않았는가?
아스피린 기운은 갓 낳은 달걀들 속에 이미 스며들었건만
어찌하여 수탉들은 아직도 두통을 앓고 있는가
그럼에도 보란 듯이 걸어다니긴 하는데
새 해에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들은 어찌 이토록 신경질적인가!
- 귄터 그라스의 「타락」 전문
아스텔의 시 「환경오염」은 그라스의 시와 함께 현대인들이 “아스피린”의 위험 증후군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시적(詩的) 각성제 역할을 하고 있다. “바이에르(Bayer)”는 의약품을 제조하는 독일 최대의 합자회사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의 병원과 약국에 공급되는 양약(洋藥)의 주요 공급원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바이에르는 “아스피린 생산”에 성공하여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아스피린은 가장 가벼운 통증까지도 가라앉혀 주는 약효 때문에 전세계인들에게 애용되고 있는 생필품이다.
그러나 “두통”을 잠재워야 할 아스피린이 오히려 “두통을 생산하는” 약으로 둔갑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독일 시인 한스 아른프리트 아스텔은 아스피린의 남용에 따른 부작용을 경고하고 있다. 사람의 “똥”이 “하얗게 탈색”되고 사람의 “오줌에 피가 고일” 정도로 아스피린의 과용(過用)은 인체에 치명적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사람의 두통을 생산하는 것도 모자라서 “수탉”의 두통과 “병아리들”의 두통까지도 대량으로 생산하는 “환경오염”의 도미노 현상을 어떻게 멈출 수 있는가? 사람의 오만을 버리는 것이 환경오염을 완화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 아닐까? 사람의 의학 기술이 발전을 거듭한다면 모든 불치병을 치유할 날이 도래하리라는 낙관적 오만이 오히려 사람의 몸을 의약품에 일방적으로 의존케 하여 몸을 오염시키지 않는가? 과학기술이 첨단을 향해 고속 행진을 계속한다면 ‘지구의 온난화’까지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인간중심적 오만이 ‘자연’을 테크놀로지에게 전적으로 의존케 하여 지구의 난개발을 가중시키지 않는가? 독일 시인 리젤로테 촌스는 그의 시 「고발」에서 환경오염의 제1원인으로 사람의 “탐욕”을 고발한 바 있다. 그러나‘탐욕’이라는 암덩어리를 키운 바이러스는 ‘오만’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인생 내력의 증인 헛개나무
- 오태환의 「헛개나무야」(백담시편 3)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 오태환. 한국어의 풀뭇간에서 철학, 사상, 지식을 한(恨)의 가락과 풍류의 리듬으로 벼려내는 ‘언어의 대장장이’라고 그를 부를만하다. 오태환 시인의 시집으로는 『북한산』, 『手話』, 『별빛들을 쓰다』 등이 있다.
헛개나무야 헛개나무야 헛개나무야 가을계곡물에 발목까지 빠져 우는 헛개나무야 애오라지 물소리 되어 우는 헛개나무야 가생이가 놋그릇처럼 쨍하게 반짝이며 우는 곰배팔이 헛개나무야
헛개나무야 조랑조랑 이슬 내린 띳집 처마지붕 같고 달구지 같고 달구지 바퀴가 금세 밟고 지나간 진흙구렁 같은 헛개나무야 잘 누른 머릿고기 삐뚜른 수육 같은 헛개나무야 앞말뒷말 뭇 가을개들이 오줌이나 지리고 가는, 고드름장아찌 마늘쫑 냄새 같은 헛개나무야
하늘이 식겁하게 파래서 화엄경의 가을설악도 막새기와며 두리기둥 서까래서껀 죄다 내려놓았다 설거지 그릇 부시듯 가을하늘빛으로 맨얼굴을 부시며 혼자서 우는 헛개나무야 헛개나무야
- 오태환의 「헛개나무야」전문
*「헛개나무야」: 2012년 『시산맥』겨울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시인이 산에서 만난“헛개나무”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존재이다. “가을계곡물에 발목이 빠져” 엉엉 울고 있는 네 살바기 아이 같은 헛개나무. 그의 울음은 어린 시절 시인의 얼굴처럼 맑다. 맑은 까닭에 울음소리는 “물소리” 같다. “가생이가 놋그릇처럼 쨍하게 반짝이며 우는 곰배팔이”의 모습에서는 어느 가난한 청년의 얼굴이 드리워진다. 모순이 가득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고뇌의 신열을 앓았던, 1980년대 시인의 청춘이 …
유년부터 청년기에 이르도록 시인이 즐겨 먹은 양식은 눈물인가보다. 순수한 수정빛의 눈물은 시인의 시력(視力)을 높여주는 천연 콘텍트 렌즈가 되었다. 성인이 된 시인의 눈에는 산(山)에서 사는 모든 생명들이 헛개나무의 혈육이자 근친으로 다가온다. “이슬내린 띳집 처마지붕”을 닮은 헛개나무의 나이테는 그 “처마지붕” 아래 살고 있는 산골 식구들의 내력을 대변한다. 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날마다 “달구지”를 끌고 산 아랫마을로 고된 인생의 짐을 실어 나르던 이웃 아저씨의 이마에 깊게 패인 “진흙구렁”을 닮은 헛개나무. 그의 나이테는 산골 토박이 가장(家長)들의 주름살을 대변한다.
어제는 가장들을 도와서 “달구지”의 짐꾼 역할을 했던 소(牛). 오늘은 멍에를 쓰고 산비탈의 묵정밭을 가는 소. 내일은 “잘 누른 머릿고기 삐뚜른 수육”이 되어 아랫마을 사람들의 식탁에 자신의 몸을 보시(布施)하게 될 소를 닮은 “헛개나무”. 그의 울음은 자연의 보살(菩薩)인 소의 일생을 대변한다. 새들의 배설물이 탑(塔)을 이룰 때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석가모니처럼 “앞말 뒷말 뭇 가을개들이 오줌이나 지리고 가도” 가부좌를 풀지 않는 자연의 선승(禪僧) 헛개나무. 그의 몸에서 찾을 수 있는 몸짓은 “맨얼굴”의 울음밖에는 없다. “화엄경의 가을설악”과 “막새기와며 두리기둥 서까래”를 파랗게 씻어주는 “가을하늘빛”을 닮은 헛개나무의 눈물. 그의 눈물은 산에서 사는 모든 존재들의 생명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눈물이 되었다. 오태환의 시 「헛개나무」는 “나무”라는 생명체의 존재양식을 심층적으로 투시하는 인식능력의 날선 검(劍)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러한 미시적 접근방식에 갇혀 있지는 않다. 헛개나무를 녹색의 미디어로 삼아 자연과 사람 간의 생명적 상호작용이 끊이지 않는 중생(衆生)의 생명공동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의 시를 주저 없이 생태시로 읽는 이유이다.
가정은 가장 중요한 환경안전망(環境安全網)
- 랄프 테니오르의 「엄마와 아이」
1945년 독일 쉴레지엔 지방의 바트 쿠도바(Bad Kudowa)에서 출생한 소설가이자 시인 랄프 테니오르(Ralf Thenior). 그는 함부르크 시(市)에서 성장하였다. 1970년대부터 이른바 ‘일상시(日常詩)’의 영역에서 시창작을 시작했던 랄프 테니오르는 지금까지도 ‘일상시’의 영역을 떠난 적이 없다. 그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일상적 언어들은 삶의 진실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인간의 언어사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언어비평’의 힘을 발휘하였다. 그가 발표했던 초기의 소설은 ‘환상적’이야기와 ‘실험적’ 기법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까닭에 그의 ‘일상시’와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랄프 테니오르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학작품들을 풍성하게 발표함으로써 ‘일상시’의 내용을 산문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생태주의’적 테마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사건을 모티브로 삼는다. ‘작고 사소한’ 일상적 사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병리현상을 이성(理性)의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바라보는 가운데 ‘크고 중요한’ 생태주의적 옐로우 카드를 뽑아드는 시인의 언어행위를 주목해보자. 랄프 테니오르의 대표적 작품집으로는 『서글픈 만세 소리』(1977), 『별들의 웃음』(1992), 『사소한 것들』(1995), 『부서진 꿈』(2003)이 있다.
아이를 태(胎) 중에 가진 저 엄마가
불에 구운 소시지를
매운 양념에 버무려 먹는 풍경을 보세요
저런! 기름 범벅의 종이 봉지에 싸서
마요네즈와 케찹까지 곁들였군요
포만감에 겨운 저 엄마는 담배를 흠뻑 빨아들입니다
연기를 깊숙히 태(胎) 속 깊숙히 들여 마십니다
텔레비젼에서 섬광을 터뜨리며
범람하는 푸른 전자파(電磁波) 군단이
엄마의 눈 속으로 침략해 들어오더니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몸을 점령합니다
- 랄프 테니오르의 「엄마와 아이」전문
*「엄마와 아이 Mutter und Kind」: 1971년에 발표된 시. 1981년 뮌헨의 베크 출판사에서 간행한 생태 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수록되었다. 랄프 테니오르가 추구해왔던 일상시(日常詩)의 경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환경 호르몬’의 생산지는 가장 가까운 생활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작품이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라는 최승호 시인의 「공장지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기형아’를 출산하는 현상은 공장지대와 산업시설의 주변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요즘은 ‘환경 호르몬’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 되어야 할 우리의 가정이 오히려 가족의 생명을 손상시키는 환경 호르몬을 길러내고 있다. 도시인들의 ‘가정’은 환경 호르몬을 생산하는 기형적 공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이”의 새 살(肉)에서 새 순(筍)처럼 돋아나는 새 세포를 녹슬게 만드는 방부제와 “기름”으로 “범벅”된 “소시지”여! “엄마”와 “아이”의 가슴을 혼탁하게 만들고 아이와 엄마의 혈관에 불순물의 제방을 쌓는 “담배연기”여! “엄마의 눈 속으로 침략해 들어와서” 면역성 없는 “아이의 몸”을 납덩어리처럼 “점령”하는“텔레비젼”과 컴퓨터의 “전자파 군단”이여!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출생 이후에 건강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지는 엄마도 장담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막을 수 있었던 ‘환경 호르몬’ 병사들의 공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태(胎) 속의 아이를 연결하는 탯줄은 최승호 시인이 고발했던 것처럼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으로 변할 수 있는 개연성을 갖는다. 랄프 테니오르의 시 「엄마와 아이」에서도 생명선(生命線)의 중요성은 선명히 부각된다.테니오르는 엄마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을 이어주는 탯줄의 중요성을 일깨움으로써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현재의 생명선이 건강한 녹색의 탯줄인지를 돌아보게 해준다. ‘환경안전망’은 가장 중요한 사회안전망이다.
비좁은 세상을 떠나 드넓은 모태로
- 최창균의 「그 집」
198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시인 최창균. 그는 파주시 교하읍에서 소(牛)목장을 경영하며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 시인이다. 200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 그의 시집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의 ‘시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읽는다. “밭에서 돌을 골라내어도 뒤돌아보면 돌의 알을 낳는 밭을 봅니다. 풀을 뽑아내어도 내 꽁무니 바짝 따라붙는 풀들 봅니다. 삶이 고단하지요. 소의 하루처럼 사는 일이 고단하지요. 하지만 나는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 내 시업(詩業)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먼지 나는 이 땅에 내 마음의 녹색이나 초록을 심는다는 생각으로요.”시인의 말에서 그의 인생이 흙, 밭, 풀, 소, 나무, 돌과 생명의 유기적 연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 ‘유기적 연대’가 최창균 시인의 시업을 낳은 것이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가 있다.
숲으로 곧장 가면 그 집에 닿는다
닿을 때마다 집은 한 발짝씩 숲 속으로 옮겨갔다
그 집은 아주 오랜 동안 숲의 나이를 먹고 늙어갔다
참새들이 깃들어 별을 듣는 집,
대문은 서쪽으로 길을 내었다
오래 전 그 길로 한 사람이 빠져나갔다
숲 속으로 집은 구부정하게 더욱 깊어졌다
솔바람이 향긋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집,
먼지로 아늑하게 뭉쳐지는 집, 거기
또 한 사람 대문에 기대서서 숲을 본다
홀로 늙어가는 어머니의 집,
숲 속으로 대문이 활짝 열려있다
- 최창균, 「그 집」 전문
*「그 집」: 2000년 『현대시』10월호에 발표된 후 2004년 시집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에 수록되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세계는 기술문명의 철각(鐵脚)에 짓밟히지 않은 원초적 자연성이 살아있는 세계이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한 몸을 이루었던 순수서정의 세계가 시인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그의 고향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한 몸을 이루었던 서정(抒情)의 세계이다. 산자락에 누워 산들바람을 마시며 나무들과 형제처럼 어울려 살았던 어린 시절. 아이의 핏줄 속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아이의 숨결 속에 포근한 바람이 불었다. 새들의 노랫소리를 따라 숲 속을 달려갈 때 아이의 발끝에서 피어오르던 초록의 풀잎향기는 생명의 희열이요, 아름다움의 황홀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교감에서 울려나오는 영혼의 코러스.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사랑하는 시인들이 어린 시절에 체험한 낙원의 비밀이며, 다시금 되찾아야 할 생명의 열매인 것이다.
시인은 “숲”을 향해 귀향의 길을 떠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숲”은 보이지 않는 神처럼 시인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모태였다. 그러나 이 “숲”은 시인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되고 말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환상이 된 것이다. 시인은 낙원이었던 “숲 속의 집”으로부터 멀리 유배되었음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다. 생명의 집을 떠나 죽음의 도시공간 속에 갇혀버렸다는 폐쇄감이 시인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폐쇄와 격리로 인하여 갖게 된 위기의식은 시인의 그리움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설의 힘을 발휘한다. 감옥에서 어둠이 짙어갈수록 창문을 열고 별빛 한 줄기를 더듬게 되듯이, 도시공간 속에서 쇠붙이로 변해가던 시인의 정신은 “솔바람 향긋한” 유년의 자연을 그리워함으로써 해방의 “문”을 열고자 한다. 그리움의 빛이 시인에게 “숲 속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시인들의 작품에서 그리움이 절절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순수무구한 자연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단절시키는 기계문명의 톱니바퀴가 완강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도시의 그늘에서 시인들의 가슴은 콘크리트 바닥처럼 굳어간다. 그러기에 쇠창살 너머 푸른 하늘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 꿈틀대는 생명의 햇살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것은 점점 쇠붙이로 변해가는 영혼의 퇴화 현상을 거부하는 시인들의 본능적 몸부림이 아닐까? 시인 이윤택의 말처럼 “이것이 실존” 아닐까?
‘공기’는 숨결의 근원
- 한넬리스 타샤우의 「마실 수 있는 공기」
193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한 시인 한넬리스 타샤우(Hannelis Taschau). 여류 시인 한넬리스 타샤우의 창작세계는 문학의 모든 장르를 포괄하고 있다. 대부분의 독일 작가들이 하나의 장르에 매몰되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한넬리스 타샤우의 경우에는 시, 소설, 에세이, 희곡, 방송극본 등 다루지 않은 장르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타샤우의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테마 또한 다양하다. 자아성찰, 여성의 정체성과 발전과정, 사회적 상황들에 대한 비판적 대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의 자의식으로부터 사회의식으로 나아가는 테마의 변화과정이 뚜렷하다. 특히 타샤우의 시에서 나타나는 생태의식은 사회의 병리현상들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과 함수관계를 이루고 있다. 한넬리스 타샤우의 대표적 작품집으로는 『지붕 위의 비둘기』(1967) 『시집』(1969), 『마실 수 있는 공기』(1978), 『세 번째 미혹(迷惑)』(1992) 등이 있다.
스웨덴의 델라리 지역엔
셀룰로오스의 독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유한회사와 합자회사가
새들을 몰아내버렸습니다
나무들이 죽어갑니다
호수는 목숨을 잃고 까맣게 타버렸습니다
정원의 알록달록한 의자 위엔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모두들 잘 꾸며놓은 개인주택 안에서
창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고용한 장본인은 유한회사와 합자회사였습니다
델라리에 사는 아들 딸들은
자녀보호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먹여주고 입혀주며
추위와 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여
안전히 학교에 보내는 것만이 부모의 의무가 아니라
마시는 공기(空氣)를 염려하고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부모의 의무가 아니냐는 자녀들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유한회사와 합자회사에서 일하는 부모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같은 시비에 대해
곧 판결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 한넬리스 타샤우의 「마실 수 있는 공기」전문
*「마실 수 있는 공기 Luft zum Atmen」: 1978년 한넬리스 타샤우의 생태시집 『마실 수 있는 공기』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1981년 뮌헨의 ‘체. 하. 베크 C. H. Beck’ 출판사에서 간행한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1950-1980』 제2장 ‘세 가지 원소 혹은 물, 공기 그리고 흙’ 편에 재수록되었다.
논픽션의 언술방식이 ‘생태위기’의 현실상황을 직설적으로 폭로한다. 이 시의 화자는 방송국이나 신문사의 취재기자처럼 스웨덴 지역에서 발생한 대기오염의 사건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언술방식은 ‘르포’이다. 시를 읽는 독자들은 환경오염의 현장에서 ‘보도’되는 생생한 중계 멘트를 듣는 듯하다. 비유, 상징, 리듬, 운율 등 예술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은 ‘논픽션’의 언어가 오히려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증폭시킨다. ‘현실인식’의 효과를 드높인다.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대략 네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셀룰로오스”의 독성(毒性)이 깨끗한 “공기”를 오염시킨다는 사실. 둘째, 그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병들어간다는 사실. 셋째, 공기와 함께 모든 생물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소(元素)인 “물”이 오염된다는 사실. 넷째, 그토록 잿빛으로 변해가는 공기와“까맣게 타버린” 물을 마시며 “새들”을 비롯한 동물들이 마을을 떠나간다는 사실. 다섯 째, 맑은 공기를 공급하는 초록빛 “나무들”이 “죽어감”으로써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에게 다섯 가지 사실을 인식시키는 매체는 ‘르포’이다. 르포는 논픽션의 대표적 유형이므로 비문학적(非文學的) 언술방식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생태시의 언술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명쾌하다. 르포는 독자의 생태의식과 환경의식을 각성시키는 ‘교육 매체’로써 차용(借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을 사람의 도구로 취급하는 인간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를 생명중심주의로 전환하려는 교육적 의도가 르포 속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은 교육적 성격을 갖는 까닭에 생태시는 정치시(政治詩)의 한 갈래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바위’의 캔버스에 그려진 생명들의 동거(同居)
- 이솔의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
194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한 여류 시인 이솔. 그는 2001년『시문학』으로 등단했다. 그의 시에서는 전통적 서정성,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성, 만물의 상생(相生)의식이 공존하고 있다. 시 「신갈氏는 느린 동작으로 외투를 벗어낸다」에서 이솔 시인은 자연의 순환질서에 순응하는 유기체의 연약한 이미지와 ‘생명’의 강인함을 생생하게 재생하는 가운데 ‘신갈나무’라는 종(種)이 갖고 있는 고유한 생태적 몸짓을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시 「비둘기는 계속 출(出)자를 찍어나간다」에서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문명의 발전과정을 뚜렷이 인식하는 가운데 자연과 문명 간의 공생을 전망하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주었다. 이솔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신갈氏의 외투』와 『수묵화 속 새는 날아오르네』가 있다.
균근(菌根) 곰팡이는
암벽 위 소나무를 특히 좋아하여
그 뿌리를 붙안고 산다
균근 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 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곰팡이는 틈새의 물기를 먹고
실뿌리의 왕성한 힘을 양분으로 큰다
실뿌리는 암석을 부수며
곰팡이와 하나 된다
은밀한 이야기 나누며
가느랗고 끊기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암석이 갈라지고 드러난 솔뿌리의 자태
꿈같이 뽀얀 실뿌리덩이로 피어난
한줌 흙 없이도 버텨낸
거센 바람에도 암석을 붙안고 서게 한, 나는
내밀한 암각화를 그리는 곰팡이다
- 이솔의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전문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 2003년 ‘시문학사’에서 간행한 이솔 시인의 시집『신갈氏의 외투』에 수록된 작품이다. “바위”의 어두운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곰팡이”와 “소나무” 뿌리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시적(詩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생태주의적 영상미학’을 창조하였다. 생태의식의 예술적 형상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균근 곰팡이”는 소나무의 “뿌리”로부터 “왕성한 힘을 양분”으로 흡수하며 자라난다. “가는(細) 실뿌리”들이 “파고들어” 그어놓은 “틈새”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균근 곰팡이는 그 빗물을 마시며 자라난다. 소나무의 가는 실뿌리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뚫어놓은, 가는 생명의 길이 균근 곰팡이를 키우는 탯줄이 될 줄이야!또한, 그 빗물은 뿌리의 물탱크 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가 소나무의 푸른 혈관을 따라 흐르는 푸른 혈액이 되어 가지 끝에 이르기까지 소나무의 온 몸을 팽팽하게 지탱시킨다. 하늘은 비를 내리고, 비는 소나무를 키우며, 혈액 같은 비를 공급 받은 뿌리는 균근 곰팡이를 키우는 모태가 된다. 물론 그 뿌리는 균근 곰팡이에게 빗물을 양수(羊水)처럼 공급할 수 있는 “가는” 탯줄의 길을 열어 놓는다.
소나무와 균근 곰팡이 사이의 상호의존 시스템을 튼실하게 지탱시키는 자연의 미디어는 “암석”이다. 그는 단단한 흙의 몸집이다. 이 흙의 몸이 소나무와 균근 곰팡이를“하나”의 가족으로 동거하게 만드는 ‘생명의 집’이 될 줄이야! 암석은 생명의 집 역할을 맡은 생태계의 축소 모델로서 견고히 서 있다. 어느새 암석은 자연의 캔버스로, 곰팡이는 화가로 변용(變容)된다. “곰팡이”라는 이름의 화가는 “소나무 뿌리”라는 녹색의 붓으로 “내밀한 암각화” 속에 무엇을 그려놓았을까? 크로포트킨이 말했던 ‘상호부조’의 법칙, 생물들 간의 유기적 상호작용, 자연의 유구한 순환질서가 아니겠는가? 시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는 내면의 “내밀한 암석” 위에 언어의 붓으로 생태의식을 형상화한 시적(詩的) “암각화”다.
세포 조직의 연쇄적 파괴
- 하인츠 쉬네바이스의 「그녀는」
1930년 오스트리아 브레겐츠(Bregenz)에서 출생한 시인 하인츠 쉬네바이스(Heinz Schneeweiß). 그는 196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으로 이주한 이후 현재까지 네덜란드 시민으로서 살고 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독일어권 문학과 네덜란드 문학의 연구를 병행하였고 평생 동안 오스트리아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시를 써왔다. 1974년에 출간된 그의 시집 『오직 그렇게만』은 자연과 생태계가 병들어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생태시집이다. ‘뮌헨 대학교’의 교수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는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에 하인츠 쉬네바이스의 시 3편을 수록하였다. 이 3편의 작품은 쉬네바이스의 생태시집 『오직 그렇게만』에 담겨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생태파괴의 현실을 생생히 재생하여 ‘생태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현대인들에게 각성시키려고 하였다.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지구 반대편 사람의 비망록』, 『오직 그렇게만』, 『고요의 건축학 속으로』 등이 있다.
그 여자는
아직 씻지 않은
배
한 개를 먹었다
그 여자의
아랫배가
팽팽히 부풀었다
그 여자의
두 팔이
팽팽히 부풀었다
그 여자의
두 다리도
팽팽히 부풀었다
그리고
세포들이
떨어져 나갔다
뿔뿔이 흩어지는
솜털 조각
같았다
- 하인츠 쉬네바이스의 시 「그 여자는」전문
*「그 여자는 sie」: 제목이 없는 작품이다. 편의상 첫 행의 ‘그 여자는’을 제목으로 설정하였다. 이 시는 1974년 하인츠 쉬네바이스의 시집 『오직 그렇게만』에 처음 수록된 후,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재수록 되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공상과학 소설’이나 ‘재난 영화’에서처럼 가상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세포들”이 “솜털 조각”처럼 부스러져서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현실을 재생하는 표현이다. 시인 하인츠 쉬네바이스는 농약에 오염된 흙을 통하여 “배”의 몸 속에 스며드는 화학물질이 고스란히 사람의 몸 속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변용(變容)하였다. 오염된 흙은 과일의 세포조직뿐만 아니라 사람의 세포조직까지도 파괴한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시인의 교육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이 경고하는 치명적 위험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해왔던 자연을 병들게 한다면 사람의 삶조차도 안전할 수 없는 것이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처럼 변해가고 있는 ‘자연’에게서 날아오는 보복의 부메랑은 ‘생태사회’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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