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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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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시란 삶의 그라프를 조각하여 통쾌함을 나타내는 시...
2016년 11월 21일 19시 35분  조회:3645  추천:0  작성자: 죽림
   

11월 21일' 북경에 첫눈이...@@]
 


안휘성 황산풍경유람구(安徽黄山风景区), 11월 22일 저녁, 첫눈이...@@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낙서


오 봉 옥


16

시인은 응당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갈 때 보게 되는 비디오의 삼류영화를 보고도 울 줄 알아야 하고 저 숱한 뽕짝을 듣다가도 평펑 울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에도 웃음을 풍기는 사람이 시인이다. 가족과 주위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즐거움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진짜 시인이다. 결국 시인은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인 것이다.

17

대학을 가보면 가끔씩 벽시가 눈에 띈다.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심이라도 가져줄 것을 호소하는 목적으로, 당면 투쟁의 의미를 정서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벽에 붙이는 것이다. 그런 벽시는 대부분의 경우 문예일꾼들이 조직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꽤나 세련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못쓴 시라 하더라도 일반 학우들이 써서 붙인 것을 보고 싶다. 자신들이 그것을 즐기면서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문학예술의 주체와 향유자는 결국 민중 일반이니까.

18

왜 서정시는 길이가 짧은가, 여운을 주기 위해서이다. 생활의 작은 세부를 통하여 전체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은 사실로 많은 것을 연상시켜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읽어볼수록 새로운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것이랄까. 그래서 그 감동적 충격을 오래오래 기억되게 만드는 것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요즘 시들을 보면 너무나도 길기만 함을 느낀다. 산만함이 감동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19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이야기 시’를 많이 쓰고 있다. ‘이야기 시’란 하나의 사건적인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적 주인공의 정서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빌려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야기 시에 등장한 인물은 시인이 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빌려온 인물일 뿐이다.

20

선동시라는 게 있다.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혀 주면서 사람들을 고무․추동해내는 시 말이다. 그런데 선동시라고 쓰여진 시들을 보면 하나같이 개념이 남발한다는 점이다. 개념이 남발하는 곳에 감동은 없는 법이다. 감동이 없는데 선동이 될 까닭이 없다. 문제는 생활정서를 얼마나 잘 선동적으로 보여주는가에 선동시의 특성이 있다.

21

집회장에서 낭송시를 들으면 흔히 느끼는 일이다. 비교적 형상화가 잘된 시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가 있고 시적 형상화에 서툰 그 어떤 시가 오히려 대중의 심장을 흔들어 놓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은 시적 호흡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정서적으로 다가가는 호흡률을 가져야 대중은 꿈틀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적 소리의 문제이다.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서적 시어를 가져야 호소력을 얻게 된다.
우리의 시단도 낭송시의 영역을 개척해야 될 때가 온 듯싶다.

22

발표된 시들을 보면 객관적 실재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시인 자신의 정서적 토로와 객관적 실재의 묘사를 결합시켜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는 말이다. 이것도 시를 쓰는 한 방법이겠다.

23

분신 현장을 목격했다. 나는 그때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해야 했다. 호흡은 호흡대로 가빠져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손을 심장 위에 올려놓고 길게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때를 생각하며 시를 쓴다면 나는 필시 짧게 끊어치며 넘어가는 반복적 형식으로 시를 쓸 것이다. 그 상황을 옳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될 것 같다.

24

생활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시들이 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그려내는 것도 있고 반대로 두리뭉실하게 굵게 그려낸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시적 대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내는 장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머리를 스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시가 생활의 한 단면을 정서적으로 느껴서 그것을 안으로 삭인 결과로 일반화시켜내며 또 그 결과로 정서적 토로를 하게 되는 것이 서정시의 근본특성이라면 위와 같은 방식은 그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시말해 생활은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내지만 서정시라는 근본특성은 잘 살려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함께 든다. 그림 같은 시 중에서도 감동을 주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서정의 특성을 비교적 잘 살렸기 때문이며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25

시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배우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민중들의 요구와 지향을 내용으로 배우고 민중들의 호흡법․말법을 그 형식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시적인 기교를 연마할 수 있어야 한다. 시적인 기교를 말하고 싶은 바를 가장 적절히 표현해 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만의 시적 재부로 내려오고 있는 바를 습득해내야 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일종의 그런 것들이다.

26

풍자시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형태이다. 포악한 자에게 비웃음을, 간사한 자에게는 야유와 멸시를, 누리는 자에게는 통렬한 조소를 보내기 위한, 그래서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위한 것이다. 최근 어느 한 시인의 풍자시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통쾌함은 느껴지는데, 왜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남는 걸까.”
새로운 실험적 형식으로 쓰여진 그 풍자시는 다름아닌 서정성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7

돌아보면 80년대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래서일까. 80년대 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전투적 서정시가 많이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내용만을 보아도 그렇다.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과학성을 앞세운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이제 90년대이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의 시단은 80년대의 관념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서정시의 본령을 찾아나가자는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서정을 제대로 찾아나가는 것이 아닌 본 뜻도 없는 잘못된 서정으로, 정서적 표현으로 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정서적으로 표현되어야 서정인 것이지 요즘의 풍토처럼 그럴싸한 미사여구식의 시가 남발하는 것은 서정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28

외국에서 교포가 왔다. 그가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우리 문학을 일어로, 영어로 번역해 많이 많이 소개하겠습니다. 밖에 있는 우리가 할 일이 그런 것인 거 같아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몰라도 시는 전문성을 요구할 듯합니다. 우리의 시어를 외국어로 옮기기가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아요.”
정말이다. 우리 말처럼 표현이 풍부한 말도 드물다. 더구나 시란 게 백 마디의 말을 한 마디로 줄이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이고 그 한 마디의 표현일지라도 그 표현에만 맞는 고유한 색깔이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표현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이를테면 운율을 살려내기 위한 ‘줄임말’은 얼마나 많으며 반대로 ‘늘임말’은 얼마나 많은가. 표준어와 사투리의 다른 맛은 어떻게 할 것이며 현재 쓰는 말과 옛말의 다른 맛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9

오늘 나는 결혼식장에서 축시를 읽었다. 그런데 풍자적 요소를 도입한 축시였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축시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신랑․신부에게 미안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축시는 응당 묵직하고 밝은 것이어야 한다. 순결성과 숭엄성이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30

우리는 흔히 시인이 말하고 싶은 바를 정서적으로 토로한 시들을 접하게 된다. 호수가의 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쓴 것도 있고 태풍을 동반한 바닷물처럼 격정적으로 다가오는 식으로 쓴 것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러한 것들을 적절히 결합하여 굴곡을 이루는 방식으로 쓴 시들도 많다. 서정시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려내는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식인 것 같다.

31

내가 좋아하는 한 선생이 말하기를
“평론에 그만 관심 쏟고 창작에 더욱 더 매진하시지요. 창작자가 갖는 고집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내가 그 선생에게 대답하기를
“어디 우리 풍토가 그러나요. 비평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엿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맞는 말이에요. 창작자가 가져야 할 창작적 고집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겠지요. 비평을 엿보다 보면 작품을 관념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나 그런 것 같아요.”
비평을 엿보면 엿볼수록 관념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넌센스이다. 우리 시대의 넌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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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1949∼ )


 
골목에서 아이들 옹기종기 땅따먹기하고 있다
배고픈 것도 잊고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영수야, 부르는 소리에 한 아이 흙 묻은 손 털며 일어난다
애써 따놓은 많은 땅 아쉬워 뒤돌아보며 아이는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 다시 둘러앉아 왁자지껄 논다
땅거미의 푸른 손바닥이 골목을 온통 덮을 즈음 아이들은 하나둘
부르는 소리 따라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 맞대고 놀고
 
부르시면, 어느 날 나도 가야 하리
아쉬워 뒤돌아보리


 
동네 아이들이 모여 땅따먹기를 하고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손에 흙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가 고픈 것도 잊었다. 모두 쪼그리고 앉아 돌로 자기 땅을 넓히는 데 열중해 있다. 참 정겨워 보인다. 정겨울 뿐만 아니라 참 그립기까지 하다면 나이를 먹었다는 이야기이다. 땅따먹기가 보편적인 놀이였던 때는 이미 꽤 과거의 일이다. 동네 아이들이 너나없이 모여서 밥 먹기 직전까지 놀던 것도 꽤 지난 일이다. 이 시의 아이들이 아이들이었던 시절에는 차가 별로 없었고, 흙이 보이는 땅이 많았다. 땅따먹기는 그래야 가능한 놀이다.

그런데, 이 시의 진짜 목적은 추억이 아니다. 과거가 더 좋았다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 더 크고 운명적인 것, 이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들이 모여 땅따먹기 하는 일은 지상에서의 삶을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 제각기가 자기 몫을 가지고자 애를 쓰며 살아간다. 그 모습을 더 멀리에서 바라본다면 열심히 땅따먹기 하는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한창 놀다가도 엄마가 ‘영수야, 밥 먹어라’ 부르면 일어나야 한다. 승자였든 패자였든 돌아가야 한다. 영수만 돌아갈까. 모여 앉은 모든 아이들은 다 돌아가야 한다. 삶을 사는 우리들의 인생도 이와 같다. 그것이 삶의 법칙이다.

권지숙 시인은 1975년에 등단하고도 시집을 내지 않았다. 35년 만에 첫 시집을 냈는데 이 시는 그 시집 안에 들어 있다. 그는 35년을 어떻게 살았을까. 시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짐작하게 된다. 떠날 때가 오면 후회하지 않고, 아쉬운 듯 돌아보며 떠나겠다고 했다. 덤덤한 미소가 가능한 것은 아마 35년, 잘 꾸려온 시간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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