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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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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인 - 빌리 콜린스
2016년 11월 28일 20시 31분  조회:4503  추천:0  작성자: 죽림
 Introduction to Poetry  / Billy Collins
 
I ask them to take a poem
and hold it up to the light
like a color slide
or press an ear against its hive.
I say drop a mouse into a poem
and watch him probe his way out,
or walk inside the poem’s room
and feel the walls for a light switch.
I want them to water-ski
across the surface of a poem
waving at the author’s name on the shore.
But all they want to do
is tie the poem to a chair with rope
and torture a confession out of it.
They begin beating it with a hose
to find out what it really means.
 시문학 입문  / 빌리 콜린스 작   
 
나는 그들에게 시 한 편을 집어 
컬러 슬라이드처럼 
빛을 향해 들고 있든지 
아니면 시의 벌통에 귀를 밀착시키라고 한다. 
나는 생쥐 한 마리를 시 속에 떨어뜨려 
놈이 길을 헤쳐 나오는 것을 관찰하든지, 
아니면 시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 
벽을 더듬어 전등스위치를 찾으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수상스키를 타고 
시의 수면을 가로지르며 
해변에 있는 작가의 이름에 손을 흔들기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밧줄로 시를 의자에 동여매고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호스로 시를 후려치기 시작한다. 
진짜 뜻이 무엇인지 캐내기 위해.

 
 
[작품읽기]
 
  빌리 콜린스의 「시문학입문」은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시의 세계에 입문시키지 못한 문학교수가 결국 시를 쓰게 되는 이야기다. 이 시의 매력은 강의실에서 실패한 듯한 화자가 실은 시에 대해 매우 독특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비범한 선생님이라는 데 있다.
  대학의 어떤 입문 과목이든 가르치는 이가 배우는 이들에게 반드시 제공해야 할 공통적인 서비스가 있다. 그것은 "입문"이란 말 앞에 붙는 단어에 대해 명쾌한 정의(定義)를 내려주는 일이다. "철학입문"이면 철학이 무엇인지, "경제학입문"이면 경제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능한 한 똑 부러지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학문이란 궁극적으로 정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콜린스 시의 화자는 시문학입문을 강의하면서 시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학생들에게 일련의 해괴한 주문만을 할 뿐이다.
 
  우선 다짜고짜 시를 슬라이드인양 집어 들어 빛에 비추어 보라고 한다. 황당한 주문이다. 세상에 시를 집어 들라니? 시는 읽는 것이라는 통념을 전복시키는 불량한 명령이다. 그러나 시를 읽으려면 시집을 집어 들어야 하니 수긍이 전혀 가지 않는 명령은 아니다. 정작 난해한 것은 시를 컬러 슬라이드처럼 취급하라는 부분이다. 잘 인화된 벨비아 포지티브 필름을 프레임에 넣어 그 이미지를, 빛상자와 루페없이, 자연광을 통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할 것 같다. 인화된 슬라이드 필름은—특히 풍경 사진일 경우—앞면과 뒷면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손에 잘못 들리면 뒤집힌 사진을 보기 십상이다. 또한 최상의 화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슬라이드 표면에 지문이 묻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슬라이드를 막무가내로 아무 빛에나 들이대서도 안 된다. 빛의 종류와 강도에 따라 슬라이드의 색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눈이 시릴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필름에 맺힌 상을 빛이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시란 그렇게 조심스럽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 요구가 번거롭다 싶으면 시의 벌통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억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소리를 정밀하게 수용하라는 소리다. 내가 조용해야 들리는 소리다. 그 소리는 단일한 윙윙거림이 아니라 윙윙거림 속의 다양함이다. 시란 그렇게 듣는 것이다.
 
  화자는 생쥐를 시 속에 떨어뜨리고 녀석의 탈출을 관찰해 보라고도 한다. 시가 어떻게 생겼길래 거기에 생쥐를 떨어뜨릴 수 있단 말인가? 화자에게 시는 크레타섬의 미궁(迷宮)처럼 이카로스의 날개가 있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물이 아니다. 문자로 짜여진 시의 미로는 생쥐 같은 집요한 성실함이 있으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탐험의 대상인 것이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생쥐기사 리피칩의 모험이 펼쳐지는 곳과 같은, 거칠기는 하지만 용기있는 영혼이 압도되지 않는 곳이 시의 세계다.
 
  생쥐한테 영감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면 시의 방으로 몸소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을 켜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는 일은 학생들의 몫이다. 화자는 이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암흑 속에서 하나의 벽이 아니라 여러 벽을 더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가장 절묘한 부분은 전등스위치가 이 방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귀중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시의 가치란 탐욕스런 자에겐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또 다른 바램은 학생들이 수상스키를 타듯 시의 표면을 날렵하게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얼마나 빠르게 잡아끄는 스키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시인들이 끌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이름은 해변에서 학생들의 손짓을 기다릴 뿐이다. 괴로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 심각한 시가 있는 것은 심각한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읽어서 재미있어야 한다. 왜 재미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아무리 위대한 시와 시인도 내가 읽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시 읽기는 주체적인 영혼의 즐거움을 향한 스릴 넘치는 공간이동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기발한 요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안타깝다. 그들에게 시란 변장과 변신에 능한 흉악범에 불과하다. 그들은 시란 놈이 또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꿔 일을 힘들게 만들기 전에, 놈을 체포하여 고문을 해서라도, 그 진짜 정체를 밝혀내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 시란 흠씩 얻어터져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 질긴 놈이다. 그러나 시가 좀처럼 자백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자기의 정체를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호스를 집어 들어 시를 후려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한때는 착했지만 이젠 사악한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무고한 시민에게 몹쓸 짓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시험 문제로 둔갑할 시를 위해 시어와 시행에 밑줄을 그어가며 그 뜻을 외우라고 강요하는 사악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제넘은 일일까? 누군가 대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 1941~) 
 
  뉴욕 태생의 미국시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계관시인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뉴욕시립대학교(CUNY) 레먼 칼리지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9/11사태 희생자들을 추모하여 "이름들"(The Names)이라는 자작시를 계관시인의 자격으로 국회에서 낭송했다. 콜린스는 다양한 여러 인쇄 매체에 자신의 시를 발표해 오고 있으며, 자신의 시집을 낭송한 녹음 CD를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 스티븐 던은 콜린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빌린 콜린스의 시는 우리가 현재 어디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가는 방향을 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도착하는 곳에 나도 도착하고 싶다. 열등한 시인은 그럴지 몰라도, 콜린스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우리가 명료하게 엿듣도록 허락한다."

 
출처 :우리시회(URISI)    ///@@@@

몇 년 전, 시 낭송회를 위해 영국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내가 특별히 전형적인 미국 시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손수 구성한 낭송회 일정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고등학교 교실, 브라이튼에 있는 재즈 클럽, 쉐필드 대학 단과 대, 그리고 요크셔에 있는 조그마한 동네 마을회관에 이르기까지 배경의 폭을 넓혀 보았다. 마지막 장소였던 마을회관에서 낭송을 마치고 질의응답에 들어갔을 때, 농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 시는 ‘전부’ 산문으로 쓰여졌나요?” 사실 청중이나 장소와는 상관없이 매번 낭송을 할 때마다 내 시는 영어가 아니라 미국어로 쓰여졌다는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낭송회마다 “eggs over easy(한 번 뒤집어 노른자만 빼고 양쪽을 익힌 계란)” 또는 “sweat the final(땀이 날 정도로 걱정하다)”처럼 미국에서만 쓰는 표현이 언급될 때면 여지없이 청중이 고개를 갸우뚱 하는 듯 했다. 그리고, 시 내용에 “a state flower(주를 상징하는 꽃)”라는 표현이 나왔을 때 내 발음 때문에 영국인들 귀에는 틀림없이 “estate flower(저택의 꽃)”로 들렸을 것이다. 미국의 관용표현은 독일어나 불어 뿐 아니라 영국 영어로 번역하기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을 떠나보지 않으면 미국인이라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듯, 영국 청중을 몇 번 대면하고 나서야 나의 미국적 목소리, 소위 나의 문어체 억양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유행어 사용이나 동시대 문화 언급을 피하려 애써왔기에 내 시에 얼마나 많은 미국 관용표현이 사용되었는지 알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frequent flyer(항공사 상용고객)”이나 “hatch-back(해치백)”, 또는 “Jello shot(젤로 샷)”같은 표현을 사용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내 시도 금새 구식이 되어버려 소위 유통기한이 짧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유통기한(shelf life)’이라는 표현도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보편적인 어휘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렇다고 “rock(바위)”, “cloud(구름)”, “sky(하늘)”, “tree(나무)”같은 완전 기초 단어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며, 기본 어휘를 사용하는 방향에 무게를 두고 웬만하면 오늘날 언어 소식은 반영하지 않으려 했다. 시는 “언제나 새로운 소식”이라는 에즈라 파운드의 정의가 내가 말하려는 바를 간결하게 대변해준다. 그리고, 시인이 독자나 청중을 고려해 글을 쓸 때는 “지금부터 수 백년 후 머나 먼 나라에 태어난 이방인을 위해 써야 한다”는 메리 올리버의 조언도 깊이 받아들였다. 나는 미래의 이 이방인을 내 독자에 포함하고 싶었고, 이 사람이 “Wonder Bread(원더브레드)”나 “Big Mac(빅맥)”이 무엇인지 몰라 주석을 참고하는 일이 없게 하고싶었다.

물론 미국은 단순한 관용표현의 집합체보다 큰 개념이다. 하지만 국제 무대에서 시인 몇 명을 선정해 이들에게 ‘당신의 시와 당신 국가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모국어를 중심으로 대답 할 것이다. 시인 체스와 미워시(Czeslaw Milosz)는 폴란드어의 폭 넓은 표현 가능성을, 야니스 리초스(Yannis Ritsos)는 현대 그리스어로 시를 쓸 때의 느낌을 논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 시인은 현재 가장 빨리 확장되고 있는 다른 영어 공동체와 언어를 공유하기 때문에 영어를 ‘독점’ 모국어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모국어가 아니라면 작가는 어디서 자신의 국가성을 찾을 수 있을까? D.H.로렌스는 이 질문을 다소 도전적 어조로 던지며 ≪미국 고전문학 연구,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를 시작하고 있다. “진정한 미국성이라. 이 새로운 새는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이 새 시대의 난쟁이를 보여달라. 제발, 보여달라. 유럽의 꾸밈없는 눈으로 바라볼 때 미국에는 일종의 유럽 이단아 밖에 보이지 않으니.” 나는 로렌스가 유럽의 눈을 “꾸밈없는(naked)”이라 묘사한 것이 의아하다. 유럽의 눈을 가리고 있는 현학적 렌즈, 현학적 꾸밈에 비교할 때 미국의 눈이 오히려 꾸밈없는 눈이 아닐까? 그리고, 처음으로 그 꾸밈없는 눈으로 미국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 우리 앞에 꾸밈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시인은 월트 휘트먼이었다.

로렌스는 휘트먼을 새로운 미국문학의 선구자로 인정했다. 같은 정도로 휘트먼의 전우주적 몸짓을 조롱하고 연민을 꾸며내고 있다는 비난을 쏟아내지만, 로렌스는 휘트먼이 “가장 위대한, 최초이자 유일한 미국의 교사... 최초의 백인 토착인”이라 쓰고있다. 휘트먼은 벌목꾼, 장관, 에스키모인 모두를 사랑으로 가득찬 소우주에 포용하기 위해, 미국 시인 최초로 자신의 두 팔로 북미대륙 전체를 감싸 안은 시인이 분명하다. 일부 시인과 점점 더 많은 소설가들이 스스로를 지역 작가로 규정하고 있지만, 뉴욕 롱아일랜드 출신인 휘트먼은 이를 거부했다. 무엇보다 휘트먼의 진정한 토착정신은 정통 영시의 운율인 약강격(弱强格)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 ≪풀잎, Leaves of Grass≫은 영국의 약강격이 아니라 성경 운율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장시가 전통 운율과 형식에서 어찌나 급진적으로 탈피했던지 이 작품을 진정 시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의까지 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 논의는 “이 작품이 시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분명 시보다 더 위대한 무엇이다”는 어느 교수의 말과 함께 일찍이 끝났어야 했다.

이상하게도 자유를 표방하는 휘트먼의 선창을 따르는 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로렌스의 말을 인용하면, “휘트먼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시인 이전에는 선구자가 되어 아직 개척되지 않은 삶의 광야로 걸어간 휘트먼이 있다.” 결국 미국 시가 휘트먼을 쫓아오긴 했지만 이미 그의 세기가 다 지난 후의 일이었다. 1920년대 초, 로렌스가 미국 시를 평가할 무렵 오늘날 현대 시로 인정 받는 다수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聯, stanza)이라는 답답한 통에서 뛰어나와 약강격이라는 마구(馬具)를 떨쳐버린 것이 당시 시인들의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물론, 요즘은 “자유시”가 예전처럼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어수선하고 서툰 시에 대한 변명으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많다. 비단 미국 시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다. 휘트먼이 남긴 교훈 중 이보다 강력하고 까다로운, 하지만 사라질 줄 모르는 가르침은 그의 ‘괴이함(outrageousness)’에 있다. “이제 내 자신을 설명해야 할 시간, 우리 모두 일어섭시다”나 “세계의 지붕 위로 내 거친 고함을 던지노라” 같은 휘트먼의 대담한 시구(詩句)가 있었기에 긴즈버그가 “아메리카, 내 괴상한 어깨를 수레바퀴에 넣으리”라 노래하고 프랭크 오하라가 “아 점심! 내가 미쳐가고 있는 듯 하군”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없었던 휘트먼의 대담한 새 목소리가 유럽의 ‘고결함’이라는 유리를 깨트렸고 마침내 후대 미국 시인들이 좀 더 야성적인 어조로 고함칠 수 있는 힘을 실어주었다.

만일 작가가 자신이 받은 영향의 총체라면 내 시는 분명 영국과 미국 시, 그 음과 형식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때로 반어적 효과를 위해 나는 두 어조를 서로 싸움 붙이기도 한다. 내 자신을 ‘미국 시인’이라 생각하고 위험하지만 내 문학을 스스로 비평 해 본다면 내 시 중 상당수가 유럽의 영향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미국 특성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미국 소네트(American Sonnet)”라는 시는 이탈리아와 영국의 소네트 모형을 버리고, 소네트처럼 제한된 공간에 표현해야 하지만 한쪽에는 언어 한쪽에는 사진이 있는 미국의 우편엽서를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미국 시인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우리”라는 독특한 시작을 보이고 있다.


미국 소네트

우리는 페트라르카처럼 말하지 않고 스펜서처럼 모자를 쓰지도 않네
조심스레 일군 밭뙈기 고랑처럼
열 네 줄로 되어있지도 않네.

우리 그림엽서는 휴가에 대한 시
조그마한 방에서 우리 노래를 부르라 하고
계량컵에 우리 감성을 쏟아 부으라 하네.

우리는 폭포나 호수의 등에 글을 쓴다네
엘리자베스 시대 여인네의 태양중심 시야 만큼만 전통적인
짧은 글을 더한다네

우리는 날씨를 표현 할 형용사를 찾고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네
그대가 여기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표현한다네

그리고 우체통에서 돌아오며
그대가 있는 곳에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숨긴다네,
그대는 고개 숙인 채 손에 잡은 얇은 글을 읽겠지

멀리 떨어진 이곳의 한 조각, 백사장 해안의 한 폭
성당 광장이나 뾰족탑은
그대가 있는 친숙한 곳으로 갈 것이라네

그리고 그대는 이 양면의 표현을 테이블 위에 던져 둘 것이네
우리가 배회한 몇 제곱 센티미터를
응축된 우리 감정을



첫 부분에 나오는 문학에 대한 아이러니한 표현은 시가 이어지면서 떨어져 있음, 거리, 갈망의 아기자기한 드라마로 이어진다. 이 시는 아이러니와 감정을 균등하게 혼합하여 완벽하게 모호한 어조를 창출하려 애쓰지만, 물론 실패다.

“위안(Consolation)”이라는 시는 전통적인 유럽식 휴일을 보내기보다 미국에 있는 자기 집에서 여름을 보내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탈리아로 여행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로 시작한 시는 “친숙한 이곳 거리 / 모든 도로 표지판과 내 동포의 갑작스러운 손동작 / 모두 내가 아는 것이라네”로 이어진다. 화자는 “얼음이라는 단어를 몰라 카페에 구부리고 앉아있기 보다” “친근하게 돗(Dot)이라 부르는 여종업원이 있는 커피숍”을 선호한다. 이곳에서는 주인의 요청 때문에 굳이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되고 돈을 낼 때 환율을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화자에게는 “마치 영어라는 위대한 / 자신의 차에 다시 올라 / 시끄러운 모국어 경적을 울려대며 / 로마도 볼로냐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을 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시는 월리스 숀이 영화 ≪앙드레와의 저녁식사, My Dinner with Andre≫에서 맡은 인물의 감상적 지역주의를 상기시키는 화자의 취향을 통해, 문학의 유럽 중심주의를 조롱하는 반항이라 할 수 있다.

“틴턴사원 삼천 마일 위에서 쓴 시”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워즈워드의 유명한 자전적 시를 화자의 미국 삶, 집에서의 삶에 도입하여 이 “미국화” 과정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나 여기 왔었고
지금 나 여기를 다시 찾았노라는 말은
우리 삶에 비가 오듯
시에 자주 언급되는 말이다.

양이 흰 점을 이루며 서 있는 언덕,
민둥산 꼭대기 키가 큰 한 줄의 나무,
시인은 영국의 경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배낭에 치즈 조각과
동화책을 챙겨 넣고
짙은 바바리아 숲 그림자를 밟으며
우울하게 걸어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느낌은 항상 똑같다.
처음이 더 나았다
예전 같지 않다
그 때만큼 상쾌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백조, 호수 표면의 반짝임,
작지만 중요한 느낌,
언제나 무엇인가 빠져있다
아니면 훌륭한 특색이 퇴색해 버렸다.

전에는 하늘이 더 깊은,
더 고차원적 파랑이었고 구름은 성당 같았다.
물은 더 큰 희망을 품고
바위 위로 부서졌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조끼를 입은 가여운 작가가
현기증이 날 듯한 유년기의 빙산을 회상하고
정처 없이 잡초의 들판을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오래 전 죽은 시인들이
바다를 향한 절벽에서, 강둑에서,
건초더미 옆에서, 그림자 진 관목 숲에서
스러져가는 자신들 삶을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호스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성냥이 언제나 불에 대한 짧은 연설을 하듯
시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환멸을 들었다.

마침내 우리가 책을 내려 놓고
뒤로 기댄 채
활자 때문에 따끔거리는 눈을 감고
잠의 책갈피를 끼워 넣는다.

저녁 먹기 바로 전
잠에서 깨어나면
주변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그 정도는 배웠으리.

관처럼 생긴, 이 긴 방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으리,
벽과 창은 이제
서로 다른 잿빛 그림자일 뿐.

이가 빠진 테라코타 화병에는
한껏 꾸민 치자꽃이 고개 숙이며 서 있고
마루 바닥에는 신발, 양말,
갈색으로 변한 사과 조각.

몇 시간 전,
낮잠 자기 전의 찬란한 과거,
점심 먹은 직후쯤 막을 내린 그 황금시대,
예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으리.



불평을 늘어놓는 19세기 영국과 독일 시인을 한 덩어리로 처리한 점에서 볼 수 있듯, 수정주의자인 화자는 상실감이라는 낭만주의 시대 주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이 상실감을 처음 집에 접목시킨 부분은 정원의 호스와 성냥 이미지를 사용한 곳이다. 평생을 담은 자전적 시간은 압축되어 점심과 저녁 사이 몇 시간으로 바뀌고, “바다를 향한 절벽”, “건초더미”, “관목 숲” 같은 풍경은 시들어가는 꽃, 신발과 양말이 흩어져 있는 평범한 방으로 압축된다. 낭만주의 시대 고뇌는 독자의 피곤함으로 변형되고, 이른 오후에 이미 황금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

무엇이 시를 미국적으로 만들어주는가? 학교 교과서에서 흔히 말하듯, “구세계” 시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이 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의 시는 그 관용표현, 풍경, 유럽 과거에 대한 불경, 대담한 자만, 반어적 태도, 고정된 운율에 얽매이지 않음,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다양성 때문에 미국의 시가 되는 것이다. 거대한 다양성, 그 민주주의적 확장과 포용성은 루이스 심슨이 쓴 짧은 시에 잘 나타나있다. 그의 시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 해 본다.


미국의 시

그것이 무엇이든,
고무, 석탄, 우라늄, 달과 시를
소화할 수 있는 위가 있어야 하리.

상어처럼 지느러미를 지닌 채
인간의 소리인 듯한 울음을 울며
사막을 가로질러 먼 길을 헤엄쳐 가야 하리




참고: “미국 소네트”와 “위안”은 2001년 랜덤하우스에서 출판한 빌리 콜린스 시집 ≪방에서 홀로 항해하며, Sailing Alone Around the Room≫에 수록되어 있다. “미국의 시”는 ≪트인 길 끝단에서, At The End of The Open Road≫에 수록 되었으며, 저작권자인 루이스 심슨의 승인을 구해 수록했다.

[작가소개]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는 2001년 랜덤하우스의 ≪방에서 홀로 항해하며, Sailing Alone Around the Room≫, 1998년 피츠버그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어 패터슨상을 수상한 ≪소풍과 번개, Picnic, Lightning≫, 1988년 아칸사대학 출판부에서 펴 낸 ≪파리를 놀라게 한 사과, The Apple That Astonished Paris≫를 포함해 지금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1991년 윌리엄 모로우가 출판한 ≪천사에 대한 질문, Questions About Angels≫은 에드워드 허쉬가 전국 시 시리즈 경연대회 출품작으로 선정한 작품이다.
시 모음집 ≪아홉 필의 말, Nine Horses≫은 금년 말에 출간 될 예정이다. 콜린스의 시는 명작모음집과 교재 뿐 아니라 포이트리, 아메리칸 포이트리 리뷰, 하퍼, 아틀란틱 먼슬리, 아메리칸 스칼라, 파리 리뷰, 뉴요커 등 다양한 간행물에 수록되었다.

뉴욕예술재단, 국립문예기금,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재단의 지원을 받았으며, 포이트리 잡지가 수여하는 베스호킨상, 프레데릭 도서상, 오스카 블루멘탈상, 우드상, 레빈슨상을 수상했다.

홀리크로스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대학(리버사이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시립대인 리먼대학에서 영문과 명예석학교수, 사라로렌스 대학 방문작가, 콜롬비아대학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2001-2003년 미국 계관시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현재 건축가인 부인 다이앤과 함께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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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꿈  / 빌리 콜린스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불어오는 밤
잠의 문전에 기대어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꿈을 꾸었던 사람을,
첫 꿈에서 깨어난 날 아침 그는 얼마나 고요해 보였을까,


자음이 생겨나기도 오래 전
짐승의 표피를 몸에 두른 사람들이
모닥붙 곁에 모여 서서
모음으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아마도 슬며서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깊은 곳을 내려다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가지 않고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단 말인가, 홀로 생각에 잠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돌로 쳐 죽인 뒤에만 만질 수 있었던
짐승의 목에 어떻게 팔을 두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살아 있는 짐승의 숨결을 어찌하여 그리 생생하게 목덜미에 느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 한 여인에게도
첫 꿈은 찾아왔으리라.
그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홀로 있고 싶어
자리를 떠나 호숫가로 갔겠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젊은 어깨의 부드러운 곡선과
가만히 고개를 숙인 모습이 몹시도
외로워 보였을 것이라는 것 뿐, 만일 당신이
거기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녀를 보았더라면


당신도 그 사람처럼 호숫가로 내려갔으리라. 그리하여
타인의 슬픔과 사랑에 빠진 이 세상 첫 남자가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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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시원의 인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고고학적 발견에 의존하여 과학적 추리를 한 것을 받아들이기도 하겠지만,
이는 극히 일부의 면만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인간,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빌리 콜린즈라는 이 미국 시인은 우리의 진부한 상상이나 흔한 추측과는 상당히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인류 최초로 꿈을 꾼 남자라는 다소 동화같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의 원시인류관을 피력하는 것이다.
최초로 꿈을 꾸었던 남자와 여자는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사색하며 꿈을 반추하고 있고,
꿈 속에서 짐승의 숨결을 느꼈던 아름다운 순간, 즉 자연과 교감했던 순간에 감탄하며,
또한 집단에서 잠시 물러나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사색하며 외로움을 느끼며 또 서로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인간답고 자연스러운 생활을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의 견해가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얼마나 근거가 있는가에 대해선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마찬가지로 역시나 근거 없는 오늘의 우리의 인류 진보사관에 역시 우리 또한 너무 빠져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작가는 시원의 인류에 대한 작은 추측을 통해 우리의 오만과 진보에 대한 지나친 믿음, 그리고 인류의 과오를 은근히 비판하면서도
또한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를 펼치는 놀라운 글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은 이룩한 것 못지 않게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성, 대자연, 삶의 가치들과 의미들......
아마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짚어냄으로써 인류 진보의 믿음이라는 허상을 고발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특히 도시의 삶은 정말 가치와 의미를 찾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간직하거나 회복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훌륭한 시인 듯 하다.


스콜라 지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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