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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시인.
Mawlānā라고도 함.
서정시와 이슬람 신비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훈서사시〈영적인 2행 연구 Masnavῑ-ye Ma⁽navῑ〉가 유명하다(수피즘). 잘랄 앗 딘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서방에서는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들'로 불리는 마울라위야 교단을 조직했다.
잘랄 앗 딘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작가이며 선생이었다.
몽골인들의 위협이 주요원인이 되어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1218년경 고향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서사시인 파리드 앗 딘 아타르를 만났으며 그가 어린 잘랄 앗 딘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메카 순례와 중동지역을 여행한 다음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룸, 여기에서 루미라는 별칭이 나왔음)에 도착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 통치하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라란나(카라만)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잘랄 앗 딘의 어머니가 죽고 첫아들이 태어났으며 1228년 그들은 수도인 코니아로 초청되었다.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이곳에 있는 많은 마드라사(madrasah : 종교학교) 중 한 곳에서 강의했으며, 123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1년 후 바하 앗 딘의 제자로 있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잘랄 앗 딘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었다.
잘랄 앗 딘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부르한 앗 딘은 1240년경 코니아를 떠났다. 그가 시리아 수피 교단들과 접촉한 것이 그의 가족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시리아로 1, 2차례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에서 지도적인 이슬람 신지론자(神智論者)인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났던 것 같다.
잘랄 앗 딘은 코니아에서 이븐 알 아라비의 통역자이자 의붓아들인 사르드 앗 딘 알 쿠나위와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1244년 11월 30일은 잘랄 앗 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했던 성인인 떠돌이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이라는 뜻)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만났다.
샴스 앗 딘은 어떠한 전통적 신비주의 형제단과 결부시켜 생각될 수 없지만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잘랄 앗 딘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주었다. 수개월 간 이 두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지냈는데, 잘랄 앗 딘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하는 것에 분개한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추방했다. 잘랄 앗 딘이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가 결국 샴스를 시리아에서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잘랄 앗 딘의 친분관계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었으며,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된 것이었고 잘랄 앗 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 그를 급히 매장했음이 최근에야 입증되었다.
잘랄 앗 딘은 이와 같은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신비한 시들, 약 3만 행의 시구와 상당수의 로바이야트(robā⁽ῑyāt : 4행 연구)는 그의 아들이 "그는 샴스가 자신에게서 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것같이 그의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동일시를 보여주었다. 〈샴스의 명시선집 Dῑvān-e Shams〉은 그의 경험들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는 언어가 고답적인 정신세계나 모호한 사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강한 리듬으로 나아가는 신선한 언어는 때로 대중적인 시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이 이 시의 대부분이 피리나 북소리, 대장간의 망치소리 또는 자연을 즐기려고 제자들과 늘 찾아가기도 했던 메람에 있는 물레방아 소리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는 무아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자연 안에서 종교의 태양이 발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꽃과 새들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눈다고 느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
샴스 앗 딘이 죽은 지 몇 년 후 잘랄 앗 딘은 문맹자인 대장장이 살라흐 앗 딘 자르쿠브와 친분을 나누면서 비슷한 황홀감을 경험했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가게 앞에서 망치소리를 듣고 있던 잘랄 앗 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잘랄 앗 딘과 가장 친숙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의 딸은 후에 잘랄 앗 딘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이때의 사랑이 다시 잘랄 앗 딘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죽은뒤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 잘랄 앗 딘의 주요작품 〈영적인 2행 연구〉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다. 후삼 앗 딘은 일화·우화·이야기·격언·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자와 잘랄 앗 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잘랄 앗 딘은 후삼 앗 딘의 충고에 따라서 수년 동안 〈영적인 2행 연구〉의 거의 2만 6,000행에 달하는 2행 연구를 지었다. 그는 후삼 앗 딘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수피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마스나위는 독자를 자유로운 영상으로 도취시켜 작가의 생애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랑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잘랄 앗 딘에게는 살라흐 앗 딘과 후삼 앗 딘이 모두 모든 것을 포옹하는 빛인 샴스 앗 딘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삼 앗 딘을 디야 알 하크('진리의 빛')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디야(ḍiyā⁾)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잘랄 앗 딘은 〈영적인 2행 연구〉를 완성한 뒤 죽었고 그후 코니아 사회에서 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사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그의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었고, 후삼 앗 딘의 뒤를 이어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으며, 그는 잘랄 앗 딘의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야 교단으로 통합·조직했다. 이 교단은 그들의 주요의식을 구성하는 신비적인 춤 때문에 서양에서 '빙글빙글 데르비시들'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술탄 왈라드의 시 작품은 잘랄 앗 딘의 영적인 성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시 이외에도 잘랄 앗 딘은 동료들이 기록한 작은 일상 담화집을 남겼다. 모음집 〈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Fῑhi mā fῑhi〉에는 그가 쓴 시의 주된 사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또한 여러 층의 인물들 앞으로 보낸 서간문도 있다.
때때로 서로 모순되고 상징물들을 바꾸어 곧잘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는 신비적인 경험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계로의 열광적인 비행으로부터 일상생활의 사실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투르크 문화 생활에 끼친 잘랄 앗 딘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오늘날 코니아의 박물관과 푸르고 둥근 천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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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랄 앗 딘 알 루미 (페르시아 수피·시인)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시인.
서정시와 이슬람 신비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훈서사시〈영적인 2행 연구 Masnavῑ-ye Ma⁽navῑ〉가 유명하다(→ 수피즘). 잘랄 앗 딘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서방에서는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들'로 불리는 마울라위야 교단을 조직했다.
잘랄 앗 딘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작가이며 선생이었다. 몽골인들의 위협이 주요원인이 되어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1218년경 고향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서사시인 파리드 앗 딘 아타르를 만났으며 그가 어린 잘랄 앗 딘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메카 순례와 중동지역을 여행한 다음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룸, 여기에서 루미라는 별칭이 나왔음)에 도착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 통치하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라란나(카라만)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잘랄 앗 딘의 어머니가 죽고 첫아들이 태어났으며 1228년 그들은 수도인 코니아로 초청되었다.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이곳에 있는 많은 마드라사(madrasah : 종교학교) 중 한 곳에서 강의했으며, 123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1년 후 바하 앗 딘의 제자로 있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잘랄 앗 딘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었다. 잘랄 앗 딘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부르한 앗 딘은 1240년경 코니아를 떠났다. 그가 시리아 수피 교단들과 접촉한 것이 그의 가족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시리아로 1, 2차례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에서 지도적인 이슬람 신지론자(神智論者)인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났던 것 같다. 잘랄 앗 딘은 코니아에서 이븐 알 아라비의 통역자이자 의붓아들인 사르드 앗 딘 알 쿠나위와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1244년 11월 30일은 잘랄 앗 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했던 성인인 떠돌이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이라는 뜻)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만났다. 샴스 앗 딘은 어떠한 전통적 신비주의 형제단과 결부시켜 생각될 수 없지만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잘랄 앗 딘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주었다. 수개월 간 이 두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지냈는데, 잘랄 앗 딘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하는 것에 분개한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추방했다. 잘랄 앗 딘이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가 결국 샴스를 시리아에서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잘랄 앗 딘의 친분관계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었으며,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된 것이었고 잘랄 앗 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 그를 급히 매장했음이 최근에야 입증되었다.
잘랄 앗 딘은 이와 같은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신비한 시들, 약 3만 행의 시구와 상당수의 로바이야트(robā⁽ῑyāt : 4행 연구)는 그의 아들이 "그는 샴스가 자신에게서 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것같이 그의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동일시를 보여주었다. 〈샴스의 명시선집 Dῑvān-e Shams〉은 그의 경험들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는 언어가 고답적인 정신세계나 모호한 사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강한 리듬으로 나아가는 신선한 언어는 때로 대중적인 시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이 이 시의 대부분이 피리나 북소리, 대장간의 망치소리 또는 자연을 즐기려고 제자들과 늘 찾아가기도 했던 메람에 있는 물레방아 소리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는 무아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자연 안에서 종교의 태양이 발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꽃과 새들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눈다고 느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
샴스 앗 딘이 죽은 지 몇 년 후 잘랄 앗 딘은 문맹자인 대장장이 살라흐 앗 딘 자르쿠브와 친분을 나누면서 비슷한 황홀감을 경험했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가게 앞에서 망치소리를 듣고 있던 잘랄 앗 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잘랄 앗 딘과 가장 친숙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의 딸은 후에 잘랄 앗 딘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이때의 사랑이 다시 잘랄 앗 딘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죽은뒤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 잘랄 앗 딘의 주요작품 〈영적인 2행 연구〉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다. 후삼 앗 딘은 일화·우화·이야기·격언·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자와 잘랄 앗 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잘랄 앗 딘은 후삼 앗 딘의 충고에 따라서 수년 동안 〈영적인 2행 연구〉의 거의 2만 6,000행에 달하는 2행 연구를 지었다. 그는 후삼 앗 딘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수피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마스나위는 독자를 자유로운 영상으로 도취시켜 작가의 생애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랑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잘랄 앗 딘에게는 살라흐 앗 딘과 후삼 앗 딘이 모두 모든 것을 포옹하는 빛인 샴스 앗 딘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삼 앗 딘을 디야 알 하크('진리의 빛')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디야(ḍiyā⁾)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잘랄 앗 딘은 〈영적인 2행 연구〉를 완성한 뒤 죽었고 그후 코니아 사회에서 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사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그의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었고, 후삼 앗 딘의 뒤를 이어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으며, 그는 잘랄 앗 딘의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야 교단으로 통합·조직했다. 이 교단은 그들의 주요의식을 구성하는 신비적인 춤 때문에 서양에서 '빙글빙글 데르비시들'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술탄 왈라드의 시 작품은 잘랄 앗 딘의 영적인 성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시 이외에도 잘랄 앗 딘은 동료들이 기록한 작은 일상 담화집을 남겼다. 모음집 〈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Fῑhi mā fῑhi〉에는 그가 쓴 시의 주된 사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또한 여러 층의 인물들 앞으로 보낸 서간문도 있다. 때때로 서로 모순되고 상징물들을 바꾸어 곧잘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는 신비적인 경험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계로의 열광적인 비행으로부터 일상생활의 사실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투르크 문화 생활에 끼친 잘랄 앗 딘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오늘날 코니아의 박물관과 푸르고 둥근 천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A. Schimmel 글
잘랄 앗 딘 알 루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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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 잘랄 앗딘 알 루미
하루 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입을 뗍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영혼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생의 끝을 맞고 싶습니다.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나는 온전히 취할 것입니다.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그런데 이 새장에 앉아…… 다시 날아오를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내 귓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입을 통해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눈을 통해 밖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요? 영혼은 무엇인가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해답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취기로 이 감옥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건 그가 나를 다시 집에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이런 말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득문득 이어지는 생각들…… 이 질문들 너머로, 깊은 고요와 침묵에 들어섭니다.
* 루미 시에는 제목이 따로 없다. 번역된 그의 시 제목들은 대체로 역자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그안에 있는 것이 그안에 있다] 최준서 옮김, 하늘아래, 2003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후배 시인이 보내는 메일 하단에 늘 따라오는 문장이다. 읽을 때마다 ‘그 당신이 바로 당신이예요!’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훈훈해지곤 한다. 이 문장이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 앗딘 알 루미(Jalāl ad-Dīn ar-Rūmi)의 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루미’라는 이름은 내게 늘 ‘루미나리에(Luminarie, 빛의 예술, 빛의 조각)’나 ‘루비’(보석)라는 단어와 겹쳐진다.루미가 이슬람 마울라위 수피 교단의 창시자이자 신과 시와 사랑의 광채 속에서 살다간 몇 안 되는 신비주의 철학자이며, 나아가 영적인 메시지를 시의 형태로 전했던 우주적 시인이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사랑을 사랑함으로써 신 혹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루미 시의 도달점이다.
터키 메블라나 박물관의 고서에 있는 루미 이미지.
루미는 아프카니스탄의 발흐에서 태어나 아시아와 아라비아를 떠돌다 열두 살 이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가 공존하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터키의 중부) 코니아에 정착한다. 37세때 방랑자이자 춤추는 수피 신비주의자 샴스를 만난다. “내가 전에 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 오늘 나는 한 사람 속에서 만나네”라는 시구절은, 샴스와 눈이 마주치자 기절해 버렸다는 루미의 영적인 파탈의 순간을 담고 있다. 샴스가 죽고 난 후 대장장이 자르쿠브가 샴스의 자리를 대신한다. 대장간 앞에서 자르쿠브의 망치질 소리를 듣던 루미가 갑자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방랑 춤꾼과 대장장이, 이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신비와 환희와 사랑의 경험이 루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전통의 혹은 정통의 신학자, 학자, 법률가로서의 삶을 뒤로한 채 “그는 시인이 되었고,음악을 듣기 시작했으며, 노래를 불렀고, 땅을 빙빙 돌았다, 시간에 시간을 거듭하여”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섭고 놀랍다. 나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 다른 때가 아닌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갖다 놓았는가?”. 17세기 파스칼의 물음이다. 그보다 일찍, 루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다른 곳’, ‘다른 대륙’, ‘다른 주막’에서 와서 그곳으로 간다고. 그곳은 지금-여기를 넘어선 세계라고. 루미는 늘 이 ‘넘어선 세계’를 노래했다. 지금-여기의 상대적인 몸과 느낌을 가지고 저기-너머의 초월적 삶을 살라고.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고, 나는 모든 것의 밖에 있다고. 내 조그마한 몸 안에 일곱 개의 태양이 있고 오대양 육대주가 있으며, 한없는 창공이 있고 금은보화가 있다고.
누가 우리를 여기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라는 파스칼의 물음에 일찍이 루미는 또이렇게 설의적으로 답했다. 바로 ‘당신’이라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당신이 거하는 곳으로부터 왔기 때문이고,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의 의지대로 행한다. 나는 내 안에 깃든 당신의 귀로 나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입으로 나의 말을 하고, 당신의 눈으로 나의 밖을 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의 귀이고 눈이고 혀이고 손이다. 나는 당신 안에 존재하며 당신에 의해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무한하고 영원한 시공간을 넘어선 그것, 절대 존재의 신 안에 존재한다. 존재의 이 같은 무한 의식, 우주 의식이야말로 존재의 사랑 혹은 존재의 엑스터시가 아닐까.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고,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온전히 취할 것”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다. 우리가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지금-여기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다른 곳’의 저기-너머의 나를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여기라는 이 새장에서 만났던 것처럼 저기-너머라는 다른 대륙에서도 만날 수 있다면, 이 새장에서의 삶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이곳의 주막에서 취했던 것처럼 다른 주막의 발아래 하늘을 열어 놓을 수 있다면, 이 삶은 한 차례의 술자리에 불과할 것이다. 오직 당신을 ‘못 만난’ 사람만이, 오직 이 주막에서 ‘취하지 않은’ 새만이 이 주막과 이 새장을 실재의 전부라고 생각할 뿐!
실크로드의 서쪽 끝 터키에 가면 어쩐지 ‘나 아닌 나’, ‘내가 아니어도 되는 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르한 파무크라는 다른 작가가 있고 이슬람이라는 다른 종교가 있고, 루미라는 다른 시인이 있고 수피댄스라는 다른 춤이 있기 때문이다. 오른팔은 하늘을 향하고 왼팔은 땅을 향해 뻗은 채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다 보면, 문득 다른 대륙에서 온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일어선다/ 내 속에 있는 하나의 ‘나’가 수백 명의‘나’가 된다/ 그들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말한다/ 말도 안 돼…… 내가 나를 빙글빙글 돈다”에서처럼 ‘다른 대륙’과 ‘당신’을 향한 whirling dance를! 죽음과 영원을 향한 내 영혼의 춤을!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 (1207.9.30~1273.12.17) 이란의 신비주의 시인으로 페르시아 문학의 신비파를 대표한다. 아프가니스탄 발흐에서 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바그다드, 메카 등지를 떠돌며 순례하다 지금의 터키인 코니아에 정착하여, 종교인이자 학자로서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을 펼치는 한편 신과의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를 지어 오늘날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주요 저서로 [타브리즈의 태양 시집], [정신적인 마트나비]가 있다. 특히 [정신적인 마트나비]는 전 6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대서사시로 700여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피즘(Súfism:금욕,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는 회교 일파의 교의)의 교의, 역사, 전통을 노래한 것으로 ‘페르시아어의 코란’ 혹은 ‘신비주의의 바이블’로 불린다.
정끝별 | 시인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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