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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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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시인 - 잘랄 앗 딘 루미
2016년 12월 10일 00시 32분  조회:6300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일 1207경. 9. 30, 구르 발흐
사망일 1273. 12. 17
국적 페르시아

요약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시인.
Mawlānā라고도 함.

 

서정시와 이슬람 신비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훈서사시〈영적인 2행 연구 Masnavῑ-ye Ma⁽navῑ〉가 유명하다(수피즘). 잘랄 앗 딘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서방에서는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들'로 불리는 마울라위야 교단을 조직했다.

잘랄 앗 딘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작가이며 선생이었다.

몽골인들의 위협이 주요원인이 되어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1218년경 고향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서사시인 파리드 앗 딘 아타르를 만났으며 그가 어린 잘랄 앗 딘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메카 순례와 중동지역을 여행한 다음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룸, 여기에서 루미라는 별칭이 나왔음)에 도착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 통치하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라란나(카라만)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잘랄 앗 딘의 어머니가 죽고 첫아들이 태어났으며 1228년 그들은 수도인 코니아로 초청되었다.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이곳에 있는 많은 마드라사(madrasah : 종교학교) 중 한 곳에서 강의했으며, 123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1년 후 바하 앗 딘의 제자로 있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잘랄 앗 딘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었다.

잘랄 앗 딘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부르한 앗 딘은 1240년경 코니아를 떠났다. 그가 시리아 수피 교단들과 접촉한 것이 그의 가족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시리아로 1, 2차례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에서 지도적인 이슬람 신지론자(神智論者)인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났던 것 같다.

잘랄 앗 딘은 코니아에서 이븐 알 아라비의 통역자이자 의붓아들인 사르드 앗 딘 알 쿠나위와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1244년 11월 30일은 잘랄 앗 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했던 성인인 떠돌이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이라는 뜻)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만났다.

샴스 앗 딘은 어떠한 전통적 신비주의 형제단과 결부시켜 생각될 수 없지만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잘랄 앗 딘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주었다. 수개월 간 이 두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지냈는데, 잘랄 앗 딘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하는 것에 분개한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추방했다. 잘랄 앗 딘이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가 결국 샴스를 시리아에서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잘랄 앗 딘의 친분관계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었으며,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된 것이었고 잘랄 앗 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 그를 급히 매장했음이 최근에야 입증되었다.

잘랄 앗 딘은 이와 같은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신비한 시들, 약 3만 행의 시구와 상당수의 로바이야트(robā⁽ῑyāt : 4행 연구)는 그의 아들이 "그는 샴스가 자신에게서 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것같이 그의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동일시를 보여주었다. 〈샴스의 명시선집 Dῑvān-e Shams〉은 그의 경험들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는 언어가 고답적인 정신세계나 모호한 사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강한 리듬으로 나아가는 신선한 언어는 때로 대중적인 시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이 이 시의 대부분이 피리나 북소리, 대장간의 망치소리 또는 자연을 즐기려고 제자들과 늘 찾아가기도 했던 메람에 있는 물레방아 소리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는 무아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자연 안에서 종교의 태양이 발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꽃과 새들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눈다고 느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

샴스 앗 딘이 죽은 지 몇 년 후 잘랄 앗 딘은 문맹자인 대장장이 살라흐 앗 딘 자르쿠브와 친분을 나누면서 비슷한 황홀감을 경험했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가게 앞에서 망치소리를 듣고 있던 잘랄 앗 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잘랄 앗 딘과 가장 친숙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의 딸은 후에 잘랄 앗 딘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이때의 사랑이 다시 잘랄 앗 딘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죽은뒤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 잘랄 앗 딘의 주요작품 〈영적인 2행 연구〉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다. 후삼 앗 딘은 일화·우화·이야기·격언·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자와 잘랄 앗 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잘랄 앗 딘은 후삼 앗 딘의 충고에 따라서 수년 동안 〈영적인 2행 연구〉의 거의 2만 6,000행에 달하는 2행 연구를 지었다. 그는 후삼 앗 딘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수피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마스나위는 독자를 자유로운 영상으로 도취시켜 작가의 생애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랑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잘랄 앗 딘에게는 살라흐 앗 딘과 후삼 앗 딘이 모두 모든 것을 포옹하는 빛인 샴스 앗 딘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삼 앗 딘을 디야 알 하크('진리의 빛')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디야(ḍiyā⁾)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잘랄 앗 딘은 〈영적인 2행 연구〉를 완성한 뒤 죽었고 그후 코니아 사회에서 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사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그의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었고, 후삼 앗 딘의 뒤를 이어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으며, 그는 잘랄 앗 딘의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야 교단으로 통합·조직했다. 이 교단은 그들의 주요의식을 구성하는 신비적인 춤 때문에 서양에서 '빙글빙글 데르비시들'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술탄 왈라드의 시 작품은 잘랄 앗 딘의 영적인 성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시 이외에도 잘랄 앗 딘은 동료들이 기록한 작은 일상 담화집을 남겼다. 모음집 〈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Fῑhi mā fῑhi〉에는 그가 쓴 시의 주된 사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또한 여러 층의 인물들 앞으로 보낸 서간문도 있다.

때때로 서로 모순되고 상징물들을 바꾸어 곧잘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는 신비적인 경험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계로의 열광적인 비행으로부터 일상생활의 사실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투르크 문화 생활에 끼친 잘랄 앗 딘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오늘날 코니아의 박물관과 푸르고 둥근 천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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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랄 앗 딘 알 루미 (페르시아 수피·시인)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시인.
 
 
 
 
서정시와 이슬람 신비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훈서사시〈영적인 2행 연구 Masnavῑ-ye Ma⁽navῑ〉가 유명하다(→ 수피즘). 잘랄 앗 딘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서방에서는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들'로 불리는 마울라위야 교단을 조직했다.
 
잘랄 앗 딘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작가이며 선생이었다. 몽골인들의 위협이 주요원인이 되어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1218년경 고향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서사시인 파리드 앗 딘 아타르를 만났으며 그가 어린 잘랄 앗 딘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메카 순례와 중동지역을 여행한 다음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룸, 여기에서 루미라는 별칭이 나왔음)에 도착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 통치하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라란나(카라만)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잘랄 앗 딘의 어머니가 죽고 첫아들이 태어났으며 1228년 그들은 수도인 코니아로 초청되었다.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이곳에 있는 많은 마드라사(madrasah : 종교학교) 중 한 곳에서 강의했으며, 123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1년 후 바하 앗 딘의 제자로 있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잘랄 앗 딘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었다. 잘랄 앗 딘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부르한 앗 딘은 1240년경 코니아를 떠났다. 그가 시리아 수피 교단들과 접촉한 것이 그의 가족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시리아로 1, 2차례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에서 지도적인 이슬람 신지론자(神智論者)인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났던 것 같다. 잘랄 앗 딘은 코니아에서 이븐 알 아라비의 통역자이자 의붓아들인 사르드 앗 딘 알 쿠나위와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1244년 11월 30일은 잘랄 앗 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했던 성인인 떠돌이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이라는 뜻)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만났다. 샴스 앗 딘은 어떠한 전통적 신비주의 형제단과 결부시켜 생각될 수 없지만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잘랄 앗 딘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주었다. 수개월 간 이 두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지냈는데, 잘랄 앗 딘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하는 것에 분개한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추방했다. 잘랄 앗 딘이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가 결국 샴스를 시리아에서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잘랄 앗 딘의 친분관계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었으며,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된 것이었고 잘랄 앗 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 그를 급히 매장했음이 최근에야 입증되었다.
 
잘랄 앗 딘은 이와 같은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신비한 시들, 약 3만 행의 시구와 상당수의 로바이야트(robā⁽ῑyāt : 4행 연구)는 그의 아들이 "그는 샴스가 자신에게서 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것같이 그의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동일시를 보여주었다. 〈샴스의 명시선집 Dῑvān-e Shams〉은 그의 경험들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는 언어가 고답적인 정신세계나 모호한 사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강한 리듬으로 나아가는 신선한 언어는 때로 대중적인 시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이 이 시의 대부분이 피리나 북소리, 대장간의 망치소리 또는 자연을 즐기려고 제자들과 늘 찾아가기도 했던 메람에 있는 물레방아 소리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는 무아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자연 안에서 종교의 태양이 발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꽃과 새들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눈다고 느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
 
샴스 앗 딘이 죽은 지 몇 년 후 잘랄 앗 딘은 문맹자인 대장장이 살라흐 앗 딘 자르쿠브와 친분을 나누면서 비슷한 황홀감을 경험했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가게 앞에서 망치소리를 듣고 있던 잘랄 앗 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잘랄 앗 딘과 가장 친숙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의 딸은 후에 잘랄 앗 딘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이때의 사랑이 다시 잘랄 앗 딘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죽은뒤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 잘랄 앗 딘의 주요작품 〈영적인 2행 연구〉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다. 후삼 앗 딘은 일화·우화·이야기·격언·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자와 잘랄 앗 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잘랄 앗 딘은 후삼 앗 딘의 충고에 따라서 수년 동안 〈영적인 2행 연구〉의 거의 2만 6,000행에 달하는 2행 연구를 지었다. 그는 후삼 앗 딘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수피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마스나위는 독자를 자유로운 영상으로 도취시켜 작가의 생애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랑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잘랄 앗 딘에게는 살라흐 앗 딘과 후삼 앗 딘이 모두 모든 것을 포옹하는 빛인 샴스 앗 딘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삼 앗 딘을 디야 알 하크('진리의 빛')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디야(ḍiyā⁾)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잘랄 앗 딘은 〈영적인 2행 연구〉를 완성한 뒤 죽었고 그후 코니아 사회에서 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사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그의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었고, 후삼 앗 딘의 뒤를 이어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으며, 그는 잘랄 앗 딘의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야 교단으로 통합·조직했다. 이 교단은 그들의 주요의식을 구성하는 신비적인 춤 때문에 서양에서 '빙글빙글 데르비시들'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술탄 왈라드의 시 작품은 잘랄 앗 딘의 영적인 성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시 이외에도 잘랄 앗 딘은 동료들이 기록한 작은 일상 담화집을 남겼다. 모음집 〈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Fῑhi mā fῑhi〉에는 그가 쓴 시의 주된 사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또한 여러 층의 인물들 앞으로 보낸 서간문도 있다. 때때로 서로 모순되고 상징물들을 바꾸어 곧잘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는 신비적인 경험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계로의 열광적인 비행으로부터 일상생활의 사실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투르크 문화 생활에 끼친 잘랄 앗 딘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오늘날 코니아의 박물관과 푸르고 둥근 천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A. Schimmel 글

 

 잘랄 앗 딘 알 루미에 대하여


루미는 1207년 9월 30일, 아프카니스탄의 발흐에서 법관과 종교학자로 이름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디는 "학자들의 술탄" 이라 칭송받는 저명한 신학자이자 수피였다. 그는 철학과 도그마를 넘어 신을 향해 깊이 들어가 곧은 열정과 용기, 장엄한 가슴으로 아들에게 깊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루미가 태어난 때는 역사적으로 극도의 혼란기였다. 오스만 제국은 안으로는 종교적 방종과 정치적 쇠락, 밖으로는 기독교 침략자들과 칭키즈칸의 몽골 군대와 맞서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공포는 루미의 어린 시절에 찾아왔다. 

루미가 열 두살이되던 1219년, 그는 일찍이 종교적 박해와 몽골의 침략을 예견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일 년 뒤인 1220년 압바스 왕조와 사만 왕조의 수도이자 학문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던 발흐는 칭키즈칸의 몽골 군대에 의헤 폐허가 된다. 

그 뒤 루미의 가족은 10년 동안 아시아의작은 왕국들과 아라비아를 떠돌며 지낸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루미는 잊지 못할 만남을 갖는다. 메카를 향한 순례 도중에 루미는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페르시아의 위대한 수피시인 아타르를 만난다. 그를 본 아타르는 "이 소년이 장차 위대한 사랑의 문을 열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루미는 아타르와의 만남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루미는 "내가 이 좁은 골목 모퉁이에 사는 동안 그는 아름다운 일곱 도시를 여행했다" 며 아타르를 회상하곤 했다. 또 아버지와 다마스쿠스를 여행하던 중에 루미는 당대 최고의 수피 철학자였던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난다. 이븐 알 아라비는 아버지의 뒤를 좇아가는 루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신에게 영광이 있기를... 바다가 호수를 뒤따르는구나." 

열일곱 살의 루미는 사마르칸드의 귀족 집안 출신인 고어 카톤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아들, 술탄 왈라드와 알라 앗 딘 텔레비를 낳는다. 아르메니아에서 머물던 루미의 아버지는 코니아의 술탄, 케이코바드의 초청을 받아 코니아로 간다. 1229년의 일이다. 루미라는 그의 이름도 그가 소아시아에 정착해 살게된 데 에서 유래했다. 코니아의 술탄은 루미의 아버지를 위해 마드라사라는 종교 학교를 지었고 그곳에서 루미의 아버지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그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2년 뒤, 루미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가 죽자, 24세의 루미가 아버지의 후계자로 대ㅣ를 잇는다. 

물론 루미의 영적, 지적 교육은 그 뒤로도 지속되었다. 루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루미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는 등 잘랄 앗 딘의 정신 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했주었다. 이미 수학, 물리학, 법학, 천문학과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꾸란에 능통해진 루미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30세에 코니아로 돌아온 루미는 아버지의 영적 은총을 지닌 명석하고, 신실하고, 섬세한 젊은 학자가 되어 있었다. 루미의 명성은 곧 널리 퍼졌다. 그의 아들 술탄 왈라드의 기록에 의하면 1224년에 이미 루미의 제자는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244년 11월 30일, 37세의 루미에게위대한 분해와 파괴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사랑의 영광이 그를 구해낸다. 타브리즈의 샴스를 만난 것이다. 이 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을 했던 떠돌이 상인인 타부리즈 출신의 수도승 샘스 앗 딘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다시 만난다. 샴스가 어떤 전통의 신비주의 교단 출신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루미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 주었다. 샘스를 처음 본 순간을 훗날 루미는 이렇게 묘사했다. 

수많은 거리의 사람들 중, 오직 그만이 내 눈을 채웠다. 나는 모든 경전을 알고 있었고, 그 경전 속의 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신이 한 사람을 통해 나에게 현현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샴스의 스승인 루큰 앗 딘 산야비가 샴스에게 루미를 알려주었고 코니아로 가서 가르침을 베풀도록 했다고도 한다. 샴스와 루미는 그날 이후 40일 동안을 둘이서만 지낸다. 루미는 모든 것을 배웠고, 샴스는 루미와의 만남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을 주었다. 그 뒤 수개월 동안 이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붙어지냈다. 그러나 이미 거대한 집단의 지도자인 루미에게 이런 특별한 시간들이 측근들에게는 많은 오해와 불만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 추방 한다. 루미가 그로 인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루미가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는 결국 샴스를 다마쿠스에서 다시 데리고 온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루미의 특별한 관계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되었고, 루미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서 그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샴스가 죽은지 몇 년 후, 루미는 오래동안 친구이자 제자로 지낸 대장장이 자르쿠브의 가게에서 황홀감을 경험한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자르쿠브의 가게 앞에서 망치질 소리를 듣고 있던 루미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의 환희의 경험이 루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고 한다. 자르쿠브가 죽은 뒤 그의 딸은 루미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새로운 징신적 연인의 자리를 
대신한다. 

루미의 대표 작품인 (영적인 마스나위)는 바로 이 후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후삼은 일화. 우화. 이야기. 격언. 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루미에게 권했다. 루미는 후삼의 충고에 따라 수년 동안 거의 2만 6천행에 달하는 마스나위(2행 연구로 된 페르시아 문학의 독특한 형식)을 지었다. 

그는 후삼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목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샴스를 통한 진정한 수피가 되고,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한 루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30년 동안 수많은 시와 우화를 통해 이슬람 문학의 정수를 꽃피웠다. 루미의 마스나위는 700여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피즘의 교의, 역사, 전통을 노래하여 오늘날 신비주의의 바이블, 페르시아의 코란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신비한 시들은 루미의 신성을 향한 사랑의 여러가지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신비주의적 교의와 페르시아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일상 생활의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가벼운 익살과 풍자를 동시에 아우름으로써 성, 속을 넘나들며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상황에 따라 거침없이 드러냈다. 따라서 때로는 서로 모순되거나 상징물들이 뒤바뀌어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바탕에는 늘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신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얻음으로써 인간은 자아를 잊고 신과 하나가 되는 "파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 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 넣음으로써 그 스스로 샴스의 새로운 현현이자 사랑하는 사람과의 완전한 하나됨을 꿈꾸었다. 

이런 루미의 법열의 삶은(영적인 마스나위)를 완성함으로써 끝났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 되었고, 후삼의 뒤를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다. 그리스도교 수사들과 고위 관료들조차 루미의 제자들을 찾아다니자, 왈라드는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 교단으로 통합, 조직했다. 마울라위야란 명칭은 루미를 가르켜 부르던 마울라나(아랍어로 우리의 지도자 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며. 터키어로는 메블레비야 라고 부른다. 이 교단은 아나톨리아 전지역으로 확산되어 15세기에는 코니아와 그 주변 전역을 지배했고, 17세기에는 이스탄불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 교단은 의례적 기도인 지크르의 음악 반주에 맞추어 오른발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어 서양에서는 이들을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 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5년 9월, 새로 들어선 터키의 공화정 정부는 법령에 따라 터키의 모든 수피 교단을 해체시켰다. 이에 따라 마울라위야 교단은 시리아 ㅇ알레포에 있는 몇몇 수도원으로 옮기거나 중동의 소도시에 흩어져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954년, 터키 정부는 코니아의 마울라위야 교단의 데르비시들이 해마다 2주 동안 관광객을 위해 의례적인 춤을 출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렸다. 

코니아에 있는 루미의 무덤과 유물은 공식적으로는 코니아 박물관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순례자들에게 코니아의 박물관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지금까지 살아 있는 정신의 요람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30년 동안 루미의 작품들은 이슬람 세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되살아나 연구되고 번역되는 등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1990년 후반, 콜맨 바크의 번역물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라가 되면서 루미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허상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는 예술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언어와 종교를 초월한 수 많은 음악가들이 루미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대중들은 그 음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화답하고 있다. 루미가 오늘 날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고 있는 인류 문명을 신비의 르레상슬르 펼쳐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새로운 뿌리이자, 친절한 스승, 영혼의 치료자로 다시 살아나, 더 늦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성을 파괴하는 행탤를 멈추고 새로운 깨달음의 비전으로 옮아가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다. 


이슬람에서 이단시하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교의 잘랄 앗 딘 루미. 출처: 사막을 여행하는 물고기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잘랄 앗딘 알 루미

 

 

 

 

 

하루 종일 생각했습니다그리고 밤이 되어 입을 뗍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영혼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생의 끝을 맞고 싶습니다.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나는 온전히 취할 것입니다.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그런데 이 새장에 앉아……

다시 날아오를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내 귓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입을 통해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눈을 통해 밖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요?

영혼은 무엇인가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해답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나는 그 취기로 이 감옥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건 그가 나를 다시 집에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이런 말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득문득 이어지는 생각들……

이 질문들 너머로깊은 고요와 침묵에 들어섭니다.

 

루미 시에는 제목이 따로 없다번역된 그의 시 제목들은 대체로 역자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그안에 있는 것이 그안에 있다최준서 옮김하늘아래, 2003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후배 시인이 보내는 메일 하단에 늘 따라오는 문장이다읽을 때마다 그 당신이 바로 당신이예요!’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훈훈해지곤 한다이 문장이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 앗딘 알 루미(Jalāl ad-Dīn ar-Rūmi)의 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루미라는 이름은 내게 늘 루미나리에(Luminarie, 빛의 예술빛의 조각)’나 루비’(보석)라는 단어와 겹쳐진다.루미가 이슬람 마울라위 수피 교단의 창시자이자 신과 시와 사랑의 광채 속에서 살다간 몇 안 되는 신비주의 철학자이며나아가 영적인 메시지를 시의 형태로 전했던 우주적 시인이기 때문이다끝이 없는 사랑을 사랑함으로써 신 혹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그것이 루미 시의 도달점이다.

 

 

 

터키 메블라나 박물관의 고서에 있는 루미 이미지.

 

루미는 아프카니스탄의 발흐에서 태어나 아시아와 아라비아를 떠돌다 열두 살 이후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힌두교불교가 공존하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터키의 중부코니아에 정착한다. 37세때 방랑자이자 춤추는 수피 신비주의자 샴스를 만난다. “내가 전에 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오늘 나는 한 사람 속에서 만나네라는 시구절은샴스와 눈이 마주치자 기절해 버렸다는 루미의 영적인 파탈의 순간을 담고 있다샴스가 죽고 난 후 대장장이 자르쿠브가 샴스의 자리를 대신한다대장간 앞에서 자르쿠브의 망치질 소리를 듣던 루미가 갑자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전한다방랑 춤꾼과 대장장이이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신비와 환희와 사랑의 경험이 루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전통의 혹은 정통의 신학자학자법률가로서의 삶을 뒤로한 채 그는 시인이 되었고,음악을 듣기 시작했으며노래를 불렀고땅을 빙빙 돌았다시간에 시간을 거듭하여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섭고 놀랍다나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다른 때가 아닌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누가 나를 여기에 갖다 놓았는가?”. 17세기 파스칼의 물음이다그보다 일찍루미는 이렇게 답했다우리는 다른 곳’, ‘다른 대륙’, ‘다른 주막에서 와서 그곳으로 간다고그곳은 지금-여기를 넘어선 세계라고루미는 늘 이 넘어선 세계를 노래했다지금-여기의 상대적인 몸과 느낌을 가지고 저기-너머의 초월적 삶을 살라고모든 것은 내 안에 있고나는 모든 것의 밖에 있다고내 조그마한 몸 안에 일곱 개의 태양이 있고 오대양 육대주가 있으며한없는 창공이 있고 금은보화가 있다고.

 

누가 우리를 여기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라는 파스칼의 물음에 일찍이 루미는 또이렇게 설의적으로 답했다바로 당신이라고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당신이 거하는 곳으로부터 왔기 때문이고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의 의지대로 행한다나는 내 안에 깃든 당신의 귀로 나의 목소리를 듣고당신의 입으로 나의 말을 하고당신의 눈으로 나의 밖을 본다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의 귀이고 눈이고 혀이고 손이다나는 당신 안에 존재하며 당신에 의해살아간다그러므로 나는 무한하고 영원한 시공간을 넘어선 그것절대 존재의 신 안에 존재한다존재의 이 같은 무한 의식우주 의식이야말로 존재의 사랑 혹은 존재의 엑스터시가 아닐까.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온전히 취할 것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다우리가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지금-여기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다른 곳의 저기-너머의 나를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우리가 지금-여기라는 이 새장에서 만났던 것처럼 저기-너머라는 다른 대륙에서도 만날 수 있다면이 새장에서의 삶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우리가 이곳의 주막에서 취했던 것처럼 다른 주막의 발아래 하늘을 열어 놓을 수 있다면이 삶은 한 차례의 술자리에 불과할 것이다오직 당신을 못 만난’ 사람만이오직 이 주막에서 취하지 않은’ 새만이 이 주막과 이 새장을 실재의 전부라고 생각할 뿐!

 

실크로드의 서쪽 끝 터키에 가면 어쩐지 나 아닌 나’, ‘내가 아니어도 되는 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오르한 파무크라는 다른 작가가 있고 이슬람이라는 다른 종교가 있고루미라는 다른 시인이 있고 수피댄스라는 다른 춤이 있기 때문이다오른팔은 하늘을 향하고 왼팔은 땅을 향해 뻗은 채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다 보면문득 다른 대륙에서 온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일어선다내 속에 있는 하나의 가 수백 명의가 된다그들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말한다말도 안 돼…… 내가 나를 빙글빙글 돈다에서처럼 다른 대륙과 당신을 향한 whirling dance죽음과 영원을 향한 내 영혼의 춤을!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 (1207.9.30~1273.12.17)

이란의 신비주의 시인으로 페르시아 문학의 신비파를 대표한다아프가니스탄 발흐에서 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신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바그다드메카 등지를 떠돌며 순례하다 지금의 터키인 코니아에 정착하여종교인이자 학자로서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을 펼치는 한편 신과의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를 지어 오늘날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주요 저서로 [타브리즈의 태양 시집], [정신적인 마트나비]가 있다특히 [정신적인 마트나비]는 전 6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대서사시로 700여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피즘(Súfism:금욕신비주의적 경향이 있는 회교 일파의 교의)의 교의역사전통을 노래한 것으로 페르시아어의 코란’ 혹은 신비주의의 바이블로 불린다.

 

 

정끝별 시인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신춘 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등이 있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시

(손님=여인숙)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라,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한 번은 기쁨, 한 번은 좌절, 한 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들을 맞아 즐거이 모시라
그것이 그대의 집안을
장롱 하나 남김없이 휩쓸어가버리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 내면을 비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들이라.

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리니.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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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ana.jpg
 

마울라나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페르시아어: مَولانَا جَلال الدِین مُحَمَّد رُومِی, 1207년 ~ 1273년)는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이다.

발흐에서 출생하여 소아시아(룸)에서 생애의 태반을 보냈기 때문에 루미라는 호(號)로 불렸다. 유년기에 몽고족의 내습을 우려한 부친에게 이끌려 서남아시아를 편력한 후 룸 셀주크의 도읍 코니아에 정주하였다. 부친이 사망한 후에 신비주의의 수업에 진력하여 한 파(派)를 창설하였다. 37세경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불후의 명작 《정신적 마스나비》를 완성하였다. 이 전 6권으로 된 방대한 신비주의 시집은 '페르시아어의 코란'이라고도 평가되며 그의 사상적 성전(聖典)이라 하겠다. 몇 가지의 비유·우화·전설의 형식으로 읊은 시로 외면상은 이야기시와 같으나 그 배후에는 절대적인 신의 사랑과 그것을 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 감미로운 서정시 〈샴세 타브리즈 시집〉, 산문작품 〈강화집〉(講話集) 〈서간집〉이 있다. 그는 중세의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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