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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애독자, 딸 그리고 100년...
2016년 12월 10일 22시 46분  조회:5619  추천:0  작성자: 죽림


인간적인, 그리고 신적인 아름다움의 첫째 아이는 예술이다.

예술 안에서 신적인 인간 자신은 스스로 젊어지고 반복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느끼기 원하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기에 대립시킨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신들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시원에 인간과 그의 신들은 하나였으며,

자기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한다.

신적인 아름다움의 첫째 아이는 예술이다.

아테네인의 경우가 그랬다.

아름다움의 둘째 딸은 종교이다.

종교는 아름다움의 사랑이다.

현인은 종교 자체, 무한자, 포괄자를 사랑한다.

민족은 자신 안에서 다양한 형태들로 나타나는 종교의 아들들과 신들을 사랑한다.

아테네인의 경우가 또한 그랬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사랑이 없고,

그러한 종교가 없는 모든 국가는 생명과 정신이 없는, 말라빠진 해골이다.

그리고 모든 사유와 행동은 우듬지가 없는 나무이고,

상부 장식이 떨어져버린 기둥이다.
/ (횔덜린  경구)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은 두 살에 아버지를, 아홉 살에 계부를, 여기에다 두 의붓동생까지 잃었다. 일흔세 살까지 장수했지만 서른여섯 살부터는 정신병을 앓는 폐인으로 독일 튀빙겐시 풍광 좋은 네카어 강변의 ‘횔덜린의 탑’에서 37년간 살다가 죽었다. 가끔 경련과 발작을 일으켰지만 평소엔 온순했는데, 어머니마저 외면한 그를 돌봐준 것은 애독자 에른스트 치머와 그 가족이었다. 시인이 입원해 있던 튀빙겐 의료원의 목수였던 그는 소설 <히페리온>을 읽고 감동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떠맡았다. 횔덜린이 3년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을 애석하게 여겨 집으로 데려다 돌보다가 부부가 먼저 죽었지만, 치머의 딸은 결혼도 않은 채 죽을 때까지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네카어 강변으로 치머의 집을 찾으니 횔덜린이 쓰던 2층 반원형 방엔 의자만 덜렁 두 개 놓여 있다.

헤겔과 신학교 같은 방 친구

튀빙겐신학대 학생인 하숙생 빌헬름 바이블링거가 이 고상하게 미친 사나이를 가끔 산책시켰고, 시인의 명성을 좇는 학생들의 방문도 잦았지만, 정작 생모나 형제들은 4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고신과수(孤辰寡宿)살이 낀 걸까.

묘비에는 시 ‘운명’의 한 구절이 새겨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횔덜린> 장영태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감옥의 벽”이란 <빵과 포도주>의 명귀 “궁핍한 시대”의 갇힌 삶으로 읽고 싶다. 물질뿐 아니라 봉건영주 권력이 짓누르는 자유의 압살과 경건주의 신앙이 조성한 영혼의 빈곤까지 아우른 궁핍이다. 이런 감옥의 벽을 허물려면 혁명 말고는 없는데, 그걸 시인은 “가장 성스러운 폭풍”으로 노래하지 않았을까.

 

작가의 묘비에는 자유를 갈망한 그의 시 한 대목이 새겨 있다. 임헌영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횔덜린이 생전에 쓴 시 운명의 일부분인 이 시구는 횔덜린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이 짧은 시구는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횔덜린의 일생을 요약적으로 보여 준다시인이라는 소명을 투철하게 살다 간 시인 횔덜린젊은 시절 횔덜린의 둘레를 둘러싼 것은 고독과 좌절이었고반생(半生)을 산 이후 횔덜린을 포박한 것은 정신 질환이었다. 1770년 네카어 강변의 라우펜(Lauffen)에서 출생한 그는 1806년부터 정신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병세가 악화되는 그를 최후까지 돌본 이는 횔덜린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튀빙겐의 목수 에른스트 치머(Ernst Zimmer)였다횔덜린은1843년 타계할 때까지 반구형의 옥탑방에서 치머 일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유폐 생활을 하면서도의식장애의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시간관념을 잃고 지내면서도 방문객들에게 짧은 시를 지어 헌정하는 등 시인의 직업을 끝까지 천직으로 알고 시의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이야말로 "시인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다횔덜린이 보여 준 시 쓰기에서의 엄밀성(한 평자는 "횔덜린의 시에는 '법칙적 계산'이 깔려 있고그에게 시는 공예와 같았으며매우 정밀한 구성을 자랑한다."라고 말했다.)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지만 시인의 직분과 소명에 대해 횔덜린만큼 절박하게 고민한 시인은 일찍이 없었다는 찬사라 할 것이다가령횔덜린이 "나는 모르겠노라.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빵과 포도주’ 7)라고 썼을 때 이 질문에는 18세기 말 전제정치하에 놓여 있던 독일의 현실 사회를 매섭게 비판하는 시인의 절규그리고 그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인의 사명감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횔덜린은 물신주의와 속물 의식을 내몰고, "축복의 요람그리스의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주의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구현하고자 "종종 울면서 분노"했다그것은 고귀하고 "다정한 정신"이며, "사악한 혼란의 죄를 다시금 씻어 주"는 "사랑스럽고 해맑은 평화"였다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신성(神性)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했다그는 그의 조국을 향해 부르짖듯이 열렬히 노래했다. "어리석은 아이가 목마를 타고 앉아자신을 대단한사람으로 생각한다면결코 아이를 비웃지 말라,/ 오 너희 선한 사람들이여또한 우리들 역시행위는 부족하고사고는 풍부하구나!"('독일 사람들에게')라고.

 

 

 

횔덜린이 스케치로 그려낸 자화상(1842)

 

이 시는 1803년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시를 압도하는 정서는 비감(悲感)이다이 시의 창작 배경에는 횔덜린이 고결하게 사랑했던 여인주제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의 죽음이 놓여 있다횔덜린은 주제테 곤타르트를 '디오티마(Diotima)'라고 불렀다. '디오티마'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대의 노랫가락이나의 감각을 점점 맑게 씻어 주어내 음울한 꿈들은 달아나고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라고 썼다이런 대목은 횔덜린이 주제테 곤타르트에게서 그리스적인 아름다움과 이상을 발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횔덜린에게 "아름다운 태양"이었으며 "찬란한 빛"이었던 이 여인이 이제 지상에 없다. 1연이 사랑의 시간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2연은 실연의 시간사지(死地)에 해당한다사랑의 화신사랑의 여사제의 죽음은 시적 화자에게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연시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이 시에는 생성과 소멸행복과 불행지상적 삶과 천상적 삶이 대비되어 있으며그 양쪽의 차가운 경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따라서 이 시는 일생의 후반부를 살아가야 할 시적 화자가 천상적인 존재 혹은 신성온화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지상적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받으려는 간절한 기도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횔덜린의 작품들은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했다그에게 자연은 신화화된 자연이었으며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대상이었다그는 젊은 시인들을 향해 "만약 대가가 너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면, /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젊은 시인들에게')라고 권장했으며, "친밀한 정경이여복판으로/길이 평평하게 꿰뚫어 가고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곳에저녁 바람이 불어오며/자연은 간결하게 서 있고산들이 숭고하게 서 있는 곳에나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네"('즐거운 삶')라고 노래했다자연의 광휘를 찬탄했으며 자연과 인간이"하나의 무한한 전체"로 결합되는 것을 소원한 이가 바로 "시인의 시인횔덜린이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3.20~1843.6.7)

1770년 슈바벤의 네카어강변 라우펜(Lauffen am Neckar)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덴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 학교마울브론 수도원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신학과에 들어갔으나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철학시작(詩作),헤겔셸링등의 학우들과의 교류에 열중하였다. 1789년 시인 슈토이들린슈바르트등과 사귀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졸업 후 프리드리히 실러의 소개로 가정교사가 되었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가()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그의 부인 주제테와 사랑에 빠진다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및 그 밖의 많은 시편에 등장하였다. 3년 후 이별을 하고 함부르크고향슈투트가르트보르도 등지를 방랑하였는데이 시기 맹렬한 창작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시들이 쓰였다. 1802년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고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으로서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디오티마],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귀향], [라인강], [유일자], [파트모스등의 걸작이 있다.

 

 

삶의 절반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담백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겨울이면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빵과 포도주박설호 옮김민음사, 1997

 

 

글 문태준 시인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서 문단 안팎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97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고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94년 계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미당문학상소월시문학상노작문학상유심작품상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시집[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시 해설집 [포옹]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우리 가슴에 꽃핀 세계의 명시], 산문집[느림보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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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Hölderlin(프리드리히 횔덜린 1770-1843)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의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

 

횔덜린은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를 '가장 독일적인 시인',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했다.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상생하던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삼아

시를 쓴 대표적인 고전주의자로, 단순히 그리스 고전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평생을 정신질환자로 보낸 불우하고 광기에 찬 천재로도 유명하다.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1770년 3월 20일 독일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에 있는 라우펜 암 네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수도원 관리인으로, 그가 2세 때 돌연사했다.

4세 때 어머니가 라우펜의 서기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와 재혼했고,

고크는 그로부터 2년 후 뉘르팅겐의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크마저도 3년 후 피로와 폐렴으로 사망했다.

횔덜린의 형제로는 친여동생 하인리케와 이복동생 카를 크리스토프 고크가 있었다.

 

횔덜린은 6세 때

뉘르팅겐의 라틴어 학교에서 교양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14세 때

덴켄도르프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가 아들이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16세 때에는

마울브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헤르만 헤세가 14세 때 입학하여 7개월 만에 자퇴한 곳으로도,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하는 수도원 학교로도 유명하다.

 

18세 때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훗날 19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는 헤겔, 셸링 등과 교유했다.

또한 시인 동맹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히페리온》을 구상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횔덜린은 혁명이 부르짖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심취하였다.

여기에는 '경건한 자코뱅당원'으로 불리던 헤겔의 영향도 있었다.

두 사람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사건을 논평하는 정치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지만,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 이후 유혈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면서 혁명에 회의를 느꼈다.

또한 이 시기 루소, 칸트, 스피노자 등의 사상을 접하면서 점차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 졸업시험을 보고 나서 약 10년간 가정교사를 전전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횔덜린 자필 방명록
횔덜린 자필 방명록

1794년 6월, 대학 졸업시험을 치른 뒤

횔덜린은 12월부터 1년간 발터스하우젠의 샤를로테 폰 칼프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곤타르트의 아내인 주제테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주제테는 이후 《히페리온》을 비롯해 횔덜린의 많은 작품에 '디오티마'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디오티마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794년에

횔덜린은 실러에게 〈히페리온 단편〉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낸 적이 있는데,

주제테를 만난 뒤 그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797년 《히페리온》 1부가 출간되었다.

 

 '그리스의 은둔자'라는 부제가 붙은 《히페리온》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 철학, 정신을 비롯해

국가와 투쟁 문제, 사랑, 선(善), 미(美), 민중, 신(神)적인 것에 대한

전 방위적인 통찰이 담긴 작품으로,

그리스적인 형식미와 독일적인 사상이 융화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풍부한 리듬감, 운율법으로

소설의 형식미를 뛰어넘은, 장편소설의 관례를 따르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스 독립전쟁 전야에

히페리온이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형식의 글로,

자아와 세계 속에서 여러 모순을 경험하고

신적인 것과의 일체감 속에서 구원을 찾아가는 청년의 내면적 발전이 주요 제제이다.

이 작품에서

디오티마는 히페리온에게서 시인과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의 내적 여정을 이끄는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1799년에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와 《히페리온》 2부를 발표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5세기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로

에트나 산의 화구에 투신자살한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와

시인이 세계에서 경험한 신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여 쓴 단편비극이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다.

이는 군주제 아래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되고,

민중은 지배층에 대한 예속과 그로부터의 탄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대를 말한다.

이에 신성(神聖)보다 권력을, 정신보다는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시인이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자라고 여겼으며,

인간, 자연, 신이 조화를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사고에 의해 쓰인 대표적인 작품이

《히페리온》과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다.

 

1843년 6월 7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튀빙겐 묘지에 안장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 릴케, 첼란 등에 의해 재발견되어 선구적인 시인으로 여겨지면서

독일의 위대한 현대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

 

 

발제자: 박석준 / 담당교수: 이은봉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예언자의 목소리

 

윌리엄 블레이크

 

위대한 시인이 쓴 위대한 시

시 <순수의 전조>는 존재의 신비를 탐색하면서 시작된다. 아름다움과 거룩함, 무한성과 영원성의 세계를 추구하는가 싶더니, 블레이크는 금방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낭만주의자에서 한순간에 사실주의자로 둔갑하는 것이다. 감동의 세계에서 충격의 세계로의 극적 전환이다. 19세기 초 영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시인은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고 하며 예언자의 목소리를 낸다.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처럼 우렁차게, 블레이크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한편 노동의 기치를 찬양한다.

낭만주의의 효시로 일컬어져 온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합동 시집 ≪서정민요집≫이 나온 것이 1798년임을 감안한다면 1789년 작 <순수의 전조>는 그야말로 예언자적인 작품이다. 영국에서 낭만주의가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은 ≪서정민요집≫의 발간에서부터이다. 시기적으로는 분명히, 낭만주의의 선구자는 블레이크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사회사와 개인사

1760년경부터 영국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는데, <순수의 서정>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블레이크가 살았던 시대는 이른바 격동의 시대였다. 한편 자유의 물결이 전 유럽과 북미대륙을 휩쓸게 된다. 자유․평등․박애는 프랑스 인권선언(1789)의 기본 정신인 동시에 프랑스대혁명의 3대 정신이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을 하였고, 영국․프랑스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전쟁을 하여 결국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기류를 블레이크는 결코 간과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예언자적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20대 중반이 되자 요지프 존슨의 집에 모인 진보적인 사상가들 틈에 끼어 혁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순수의 노래≫(1789),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3), ≪앨비언의 딸들이 본 환상≫(1793), ≪순수와 경험의 노래≫(1794) 등을 연이어 내놓는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서사시 ≪밀턴≫과 ≪예루살렘≫을 완성한 후 그의 시적 활동은 마감된다.

 

어린양아, 누가 너를 만들었나?

시 <파리>의 앞부분에서 얼마 동안 파리를 노래하다가 “나도 / 춤추고 마시고 노래 부르리”에 가서는 화자가 파리가 된다. <보모의 노래>에서 ‘어린양’은 성경상의 비유이므로 죄를 짓지 않은 상태, 즉 순결함과 결백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서문>에서도 어린아이의 천진성에 어른이 동화되고 어른이 어린이로부터 감화를 받는다. 학교라는 조직(혹은 제도)은 어린양을 억압하고 사회라는 집단(혹은 체제)은 어린양을 착취한다. 순수의 노래를 부를 수 없게 하는 학교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는, 그가 시기적으로는 낭만주의의 시대를 살았지만 생래적인 리얼리스트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굴뚝 청소를 하는 아이>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에게 학교는 ‘새장’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제도교육의 획일성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굴둑…>은 어린아이의 노동력에 의존했던 영국사회에서의 굴뚝청소를 맹렬히 비난한 작품이다. 블레이크는 당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질정하는 데 앞장선 진정한 참여문학인이었다.

<런던>에서,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을 런던을 블레이크는 암담하게 그렸다. 블레이크가 이 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법제도, 교회, 궁정, 성의 타락 등이다. 시인은 교회의 타락을 다른 시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비판하였다.

블레이크는 인류의 낙원을 회복하려는 꿈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가 신앙했던 기독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믿던 전통적인 종교와는 달랐다. 블레이크는 종래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뒤집어서, 선을 이성이나 억압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악을 인간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보았다. 일종의 성악설을 신봉했던 것이다. 그는 법제화된 종교,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종교인,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교회를 비판했을 따름이었다. 블레이크는 자기 작품의 수많은 모티프를 성경에서 가져왔다.

 

대표작 <병든 장미>와 <호랑이> 감상

장은명 같은 연구자의 논문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상상력을 인간 존재의 영원한 본질, 인간에 내재한 신성으로 본 사람이다. 연구자는 또 블레이크가 예수를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항상 인간의 내면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신으로 보았다고 했다. 연구자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당시의 ‘교단’보다는 ‘진리’에, ‘의식(儀式)’보다는 ‘본질’에, ‘교리’보다는 ‘성경’에 더욱 가까이 가려고 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병든 장미>에서 병든 장미나 어두운 은밀한 사랑이 세속세계에서 다반사로 행해지는 불륜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병든 장미’란 타락한 인간이 죄악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밤에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는 경험 세계에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개념, 예컨대 유물주의, 이기심, 자기 본위 등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유물주의, 이기심 및 자기 본위에서 다시 위선, 기만, 질투, 잔인성 등의 개념이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벌레는 장미를 병들게 했으므로 우리의 인간성을 마멸시키는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물질주의에 대척하는 뜻으로서의 정신주의를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주장했고, 그런 뜻에서도 그는 예언자적 시인이었다. 블레이크 하면 떠오르는 또 한 편의 시는 <호랑이>이다.

시인은 “어린양을 만든 신이 너를 만들었던가?” 하고 묻는다. 이 지상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선린우호라기보다는 약육강식이다. 삼라만상과 뭇 생명체를 창조한 신은 사슴과 양과 함께 호랑이를 만들었다. 포스터 데이먼은 블레이크가 이 시를 통해 거대한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블레이크는 악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으며,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의 분노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어린양’은 이 시에서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천진스러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을 상징한다. 이 시의 우수성은 호랑이의 “파괴적이며 본능적인 충동은 억압의 현실을 타파하는 건강한 에너지를 의미”하는 데 있기도 하지만 불의 이미지로 나타낸 데 있다. 밤의 숲 속에서 활활 불타는 두 눈을 번뜩이며 호랑이는 ‘역사’ 한다. 호랑이의 ”무서운 균형 잡힌 몸“은 바로 이 세상의 균형을 뜻하기도 한다. 호랑이는 신의 질서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 아닐까. 시집 제목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세계를 한 손에 넣고 다루고자 했던 시인의 예언자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불러야 할 노래

 

프리드리히 횔덜린

 

한 여인을 사랑했기에 미쳐버린 시인

횔덜린은 너무나 참담한 사랑을 했고, 그것이 그의 시 세계 형성에 무척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특히 36년 동안을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독일의 서정시인이자 소설가인 횔덜린의 생애는 극적이다. 비극의 제1막은 세 살 때 아버지가, 열 살 때 양아버지가 죽은 데서 시작된다. 제2막은 수도원학교를 거쳐 튀링겐 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뒤 석사학위까지 받았음에도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데서 시작된다.

대학시절에 그리스 신들에게 매료된 그가 어느새 신들을 하늘과 대지, 바다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체로 보게 되었으니, 신화와 신학, 인간과 유일신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긴장감은 횔덜린에게 존재의 조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가 성직을 포기하고, 가정교사로 두 번째로 들어가게 된 곳은 곤타르트의 집이었다. 그의 운명은 이 집에 들어간 첫날 뒤바뀐다. 26세의 횔덜린보다 한 살이 많은 주제테 부인은 그때 결혼 10년째로, 네 아이의 어머니였음에도 젊음과 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횔덜린은 부인의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그의 여러 시편 속에서, 특히 불후의 명작 소설 <히페리온>에 디오티마라는 이름으로 그려진다.

비극의 제3막은 부인이 횔덜린의 사랑을 받아들인 데서 시작된다. 1796년 7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공해 오자 두 사람과 횔덜린의 친구 하인제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카셀을 거쳐 베스트팔렌의 휴양지 드라부르크로 가서 10월까지 체류하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의 사랑은 결정적으로 무르익는다.

그들의 행복은 2년 반을 넘기고는 끝나고 만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은 온 도시에 퍼졌고, 결국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를 타의에 의해 떠난 이후 신경쇠약이 심해진다. 횔덜린은 부인과 헤어진 지 불과 4년 뒤에 친구한테서 온 편지를 통해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 뒤로 광기의 나날이 계속된다.

비극의 절정인 제5막은 장장 36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마흔도 되기 전인 1806년에 정신이상자가 된 횔덜린은 36년을 절필한 채 그 상태로 지낸다.

 

주제테 곤타르트 혹은 디오티마

<디오티마>는 시인이 그리스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로 디오티마란 인물을 설정하여 시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곤타르트 부인에게 바치는 연시를 쓴 것이다. 이 시에서 디오티마는 “고귀한 생명”, “신적인 여인”, “사랑스런 뮤즈”, “그대의 천국의 음성” 등으로 신격화된다. 특히 예술의 신 뮤즈로 부른 이유는 디오티마 혹은 곤타르트 부인이 자신의 예술혼을 자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사랑을 고백할 수 없는 애절한 마음이 이 시를 쓰게 한 동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시인은 “이 미개한 자들”이 아닌, 신들과 영웅들과 인간이 아옹다옹하며 다투던 신화의 시대를 동경하고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사랑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정신의 부활을 꿈꾸다

횔덜린의 위대함은 그가 일생 동안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제대로 익히고, 그리스 정신과 독일 이상주의를 결합시키려 했다는 데에 있다.

횔덜린의 사상을 통칭하여 ‘공동체적 신성’이라고 표현한다. 횔덜린은 그리스 시대를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시대,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어 대립을 일삼지 않았던 시대로 보았다.

<자연에 부쳐>라는 시에서는, 이 시대가 청춘의 꿈과 다정한 자연이 죽고, 사랑이 실현되지 않고, 고향을 상실한 시대임을 말해주고 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고향을 노래한 이런 시에서도 시인은 현실에서의 고뇌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신과 인간이 분리되기 전인 신화의 시대를 꿈꾸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재혁은 횔덜린이 그리스에 어떤 식으로 경도되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와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이 그의 문학적 삶과 ‘역사적 긴장의 장’을 이루게 된다. 이로써 횔덜린은 현재의 시기의 현대성과 정당성을 위한 투쟁에 하나의 새로운 역사철학적, 미학적 관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비가 <빵과 포도주>다. 이 시야말로 서양의 역사가 밝은 그리스 세계로부터 중세 시대인 밤의 세계를 거쳐 두 차례의 혁명 이후 도래할 미래의 아침으로 이어진다고 여긴 자신의 역사관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시인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 신들이 남긴 표시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시 때문에 찬란한 미래가 개벽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횔덜린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한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이렇게 달리 해석한다. 오늘날 ‘빵과 포두주의 기적’을 행할 사람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그리스도를 지상에 찾아온 마지막 신으로 부각시킨 것은 횔덜린의 독창적인 기독교관(혹은 신관)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의 이상을 그리스도의 정신과 동일한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빵과 포도주>에서 ‘궁핍한 시대’란 신성이 약화된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밤은 더욱 어둡다. 하지만 궁핍과 밤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그런데 횔덜린은 자신을 신들의 포고자로 생각하고 신들의 강림을 예견하고 있다. 그 신이란 시인이다. 따라서 시인은 신 없는 시대의 예언자인 것이다.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가 점차 상실되고 있는 이 시대에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시인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들려준 시로는 이것 외에도 <젊은 시인들에게>, <시인의 사명> 등이 있다. <시인의 사명>에서 횔덜린은 스스로 궁핍한 시대의 시인임을 인지하고 외롭게 이 운명을 짐 지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횔덜린은 1798년 9월 곤타르트 가를 떠났는데, 심한 정신적 갈등 속에서 소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쓰기 시작했다. 광기의 세월로 접어들기 직전에 쓴 시들로 <평화의 축제>, <유일자>, <파트모스> 같은 것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제신과 유일신 여호와 하느님 사이에서 방황했던 시인의 일생이 요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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