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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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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류행가 가사가 옳다?... 아니다!...
2016년 12월 12일 00시 15분  조회:2334  추천:0  작성자: 죽림
4. 소재가 주제로 가지 않는다
 
시는 소재를 제재로 삼아 주제를 빗대어(전체은유) 말하며 빚어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재와 주제는 휴전선처럼 확실하게 선이 그어져 구분되어야한다. 다시 말해서 주제는 송편의 속처럼 감춰져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눈이 내리고
하얗게 산이 덮히고
 
아기 다람쥐
먹을 것이 없어서
도토리가 없어 배가 고파서
 
쪼루루 쪼루루 산봉우리 내려와
바위너설 내려와
바위 언덕 내려와
 
저만큼 멀리
아파트 마을 보이네
 
찻길 건너 몰래
아파트로 들어서니
우리 먹을 도토리다
여기 와 널려있네
 
도토리 하나 입에 물고
엄마 것 아빠 것
또 하나씩 물고
 
아슬아슬 찻길 건너
바위 언덕 기어 기어올라
바위너설 지나서
산봉우리 올랐네
 
엄마 다람쥐 아빠 다람쥐
너 어데 갔다 이제 오니
눈물이 글썽
 
아기 다람쥐 입에 물린
도토리는 못보고
 
신경림 동시 -『아기 다람쥐의 모험』전문 (창비어린이 2008년 겨울호)
 
이 시는 시인이 빚은 동시다. 시인이 시와 동시는 다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을 어린이의 언어로 늘어놓은 시를 동시라고 빚은 것일 게다. 분명히 말하지만 동시도 시로 먼저 완성되어야 한다.
 
이 시는 시에서 이미 다 말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찾아낼 게 없다. 다시 말해서 소재가 주제로 가버린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 어쩌다 본 이야기를 그냥 글로 써놓았구나! 하는 생각 외에는 찾을 게 없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던 날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는 길
 
엄마 손이
끄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둘이 똑같이
걸었는데도 이상하게
 
엄마 혼자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신천희 동시 -『엄마 그늘』전문
 
둘이 똑같이 걸었는데 왜 나는 괜찮고 엄마만 땀에 흠뻑 젖었을까? 엄마가 앞장서 가며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를 살짝 고쳐보자!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던 날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습니다
 
둘이 똑같이
걸었는데 나는 괜찮고
 
내가
더울까봐 그늘을 만들어 준
 
엄마만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렇게 썼다면 소재가 주제로 가버린 것이다. 어떤 이는 주제가 ‘엄마의 자식 사랑’이라고 우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는 엄마 혼자 땀에 젖은 이유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이유를 다 말해버렸다. 소재가 주제로 가버렸으니 주제가 없는 것이다. 고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한 편 더 예를 들어보자!
 
꾀죄죄한
강아지 한 마리가
 
골목길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자기는
버림을 당했지만
 
차마
주인을 버릴 수 없어
 
살던 집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신천희 동시 -『사람을 찾습니다』전문
 
이 시는 강아지를 소재로 개보다 못한 사람을 주제로 빚어낸 시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졌다고 집에서 안고 키우던 애완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애완견은 자기가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주인과 정을 못 잊어 살던 집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완견을 버린 사람이 애완견만도 못한 것이다.
이 시를 조금만 바꿔보자!
 
꾀죄죄한
강아지 한 마리가
 
골목길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자기가
버림당한 것도 모르고
 
살던 집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이렇게 빚으면 그냥 버림받은 강아지 이야기일 뿐이다. 소재도 강아지이고 주제는 버림받은 강아지다. 그런데 이미 시에서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를 다 해버렸다. 이를테면 소재가 주제로 가버린 것이다.
 
이렇게 빚은 것은 시가 아니다. 시라는 것은 분명히 소재를 제재로 해서 주제를 빚어내는 것이다.
 
단 풍경을 노래하거나 어떤 정물을 그려낼 때는 다르다.
 
깊은 산골
오두막에서 하룻밤
 
꿀같이 달콤한
잠을 자고난 새벽
 
무심코
창문을 열다가
 
눈과
눈이 마주쳐
 
아!
하마터면
턱이 빠질 뻔했습니다
 
신천희 동시 -『도둑 눈』전문
 
풍경을 노래한 시는 그 시를 읽었을 때 그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라야 한다. 그 시의 주제가 바로 그 풍경이기 때문이다. 정물을 그린 시도 그 시를 읽었을 때 그 정물이 선연하게 보여져야한다.
 
‘소재가 주제로 가면 안 된다!’ 이 단순한 한 마디를 모르고 지난날 나는 허깨비 같은 시를 써대며 시인행세만 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소재가 주제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은 내 기억 속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날로 남아 있다. ‘소재가 주제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기쁨은 내게 남북통일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름대로 끙끙대며 시라고 써왔던 글 중에 단 한 편도 시가 없다는 허망함은 나를 지옥, 그것도 화탕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그날 당장 십여 년 동안 써 모았던 수백 편의 시를 몽땅 다 불 싸질러버렸다. 한 마디로 시 다비식을 치르고 그날부터 내 시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학교 다니면서 국어시간에 수도 없이 들었던 시에서 소재와 주제의 관계를 정작 내가 시를 빚으면서는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멍청한 화상인가!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 당시의 나처럼 이 사실을 잊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분명히 기억하라! 시는 소재를 찾아내서 그 소재를 제재로 주제를 빚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소재가 주제로 가면 안 된다는 사실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한다.
 
시에서 이야기를 다 해 버리면 시가 아니라 유행가 가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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