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육기(陸機, 261-303) |
국가 |
중국 |
분야 |
시 |
해설자 |
이규일(영동대학교 중국어중국통상학과 전임강사) |
3세기는 시사(詩史)의 발전 흐름이 민가(民歌)에서 문인시(文人詩)로 전환되는 시기다. 민간의 백성 대신 문인들이 시 창작의 주체가 되다 보니 문인의 기호와 풍격이 담긴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애환이나 남녀 간의 정을 노래하는 민가풍의 작품도 여전히 창작되었지만, 작자의 정치적 포부나 좌절을 형상화하는 작품이 많이 출현한 것이다. 또 이전까지는 글을 쓰고 시를 지으면서도 예술이라는 행위에 대한 의식이 없었지만, 위진(魏晉) 시대에 와서는 문학이 뭔가 특수한 영역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먹고사는 일과는 구분되는, 존재로서의 나를 표현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무엇’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루쉰은 이러한 의미에서 “위진은 문학의 자각 시대”라고 표현했다.
육기(陸機)는 ‘문학의 자각’을 보여준 시인 가운데 하나다. 그가 다른 문인과 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문학의 정체에 대해 이성적인 태도로 사고했다는 점이다. 그는 뛰어난 작가이자 날카로운 이론가다. 그가 쓴 문학 이론서인 ≪문부(文賦)≫는 중국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문학 창작의 이론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글로 평가받는다. 당시의 현학(玄學)으로 인해 유행하던 철학적 개념들을 문학의 영역에 도입해 이론적으로 접근했으며, 자주 발생하는 오류와 대안, 이상적인 심미관, 상상력과 영감, 문체와 풍격 등 창작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했다. ≪문부≫는 “시는 감정을 따라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아름다워야 한다(詩緣情而綺靡)”라고 말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문학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속성으로 제시했다. 이는 중국의 문학 관념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육기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상이나 내용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의 형식적 아름다움이다. 즉 도덕이나 인격과는 무관한, 예술로서의 문학 그 자체의 미감이다. 유가(儒家)에서는 표현의 미감을 경시해 단순하고 투박한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지만, 육기는 유가 문학 사상의 제약을 넘어 심미성을 인정한 것이다. ≪문부≫에서 문학 창작의 가치와 즐거움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일은 너무나 즐거우니 실로 성현들이 흠모했던 바다. 텅 빈 곳을 살펴 형상을 찾고 고요한 곳을 두드려 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스라한 생각을 한 척 비단 위에 담아내고 넘치는 감정을 마음에서 토해낸다. 언어는 그 생각을 넓혀 더욱 광활하게 만들며 생각은 그 감정을 눌러 더욱 깊게 만든다.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고 푸른 가지들을 무성하게 키워낸다. 찬란하도다. 바람이 일어 회오리처럼 우뚝 선다. 풍성하도다. 구름이 문장의 숲에서 뭉게뭉게 일어난다.
육기 이전에도 조비(曹丕)가 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했지만 심미성에 대한 언급은 아니었다. 문학의 미학적 가치를 발견한 것은 육기의 공헌이다. 미에 대한 탐구를 쾌락과 고통을 오가는 과정으로까지 인식한 것은 중국 문학 이론의 새로운 개척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시인으로서 육기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표현한 주제는 생명에 대한 애상이다. 생명에 대한 감상을 노래하는 것은 위진남북조 문학의 보편적인 현상인데 당시 전염병 창궐과 빈번한 전란 때문에 죽음을 일상적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육기와 자주 비교되던 시인 반악(潘岳)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도망시(悼亡詩)>로 유명했고, 육기는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고가 담긴 시를 많이 지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도 상당히 다양했다. 예를 들어 <달무리야(月重輪行)>, <햇무리야(日重光行)>, <짧은 노래(短歌行)> 등의 작품은 인생의 짧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슬퍼하고 한탄하는데 이런 정서는 육기의 작품에서 너무나 보편적인 기조다. 또 <동탁이 도망치다(董桃行)>, <해가 동쪽에서 서문으로 지다(順東西門行)> 등의 시는 생명의 순간성에 대한 슬픔이 급시행락(及時行樂)의 주제로 발전한다. 즉 어차피 살다가 죽을 테니 후회 없이 신나게 삶을 즐기자는 생각이다. 고시에 “왜 등불을 들고 밤새워 놀지 않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인생이 짧아 밤 시간도 아까우니 등불을 켜고 밤새워 놀자는 내용이다. 육기의 시에도 이 구절이 자주 차용된다. 생명에 대한 민간 정서가 반영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 <만가(挽歌詩)>에는 죽음에 대한 육기의 독특한 사고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죽은 자의 입장이 되어 죽음을 바라본다. 이런 발상은 중국 시사에서 육기가 처음 시도한 것으로, 죽음에 대해 그의 생각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준다. 반악의 작품은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슬픔의 감정을 남김 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육기의 <만가>는 죽음을 관찰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묘사 기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생명과 입신양명을 동일시하는 육기의 가치관이다. 어떻게 보면 입신양명에 대한 소망은 생명에 대한 애상과 맞물려 있는 문제다. 육기의 입장에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입신양명이며 인생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공간적 배경인데, 그러한 인생이 짧기에 그는 더욱 초조하고 절박하게 입신양명을 서두르게 된다. 그래서 육기는 많은 작품에서 인생이 짧으니 서둘러 큰 공을 세우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급시행락의 주제가 민간의 생명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면 입신양명의 주제는 문인의 생명 정서를 대변한다. ‘덕을 세우는 일[立德]’, ‘공을 세우는 일[立功]’, ‘말을 세우는 일[立言]’을 ‘삼불후(三不朽)’라고 한다. 공을 세우거나 글을 남기는 일은 사후에도 후세에 이름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적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긴 노래(長歌行)>는 생명에 대한 육기의 가치관이 전형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생명을 노래하는 육기의 많은 작품에는 ‘천도(天道)’, ‘인도(人道)’, ‘길흉화복(吉凶禍福)’ 등 숙명적 정서를 담은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 또 계절이 지나가는 일을 매우 민감하게 생각했는데, 이것은 육기의 학자적 성향과 관계있다. 육기는 보수적인 유학을 계승하던 오(吳)나라의 학문적 배경에서 성장했기에 천상의 징조가 세상의 일을 예시한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신봉했다. 그래서 인생의 애환을 묘사하기 전에 먼저 별과 태양, 달과 바람 등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격식을 애용했다. 한 해가 저물고 만물이 쇠락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예시와 같기 때문에 육기의 시에서 세모 풍경은 생명의 영멸을 상징하는 장치가 된다. 서정의 표현이지만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육기는 오나라 최고 명문가의 적자로 조국과 가문이 멸망한 상황에서 자신의 조국과 가문을 멸망시킨 진(晉)나라 황실을 섬겼다. 육기에게 좌절감, 분노, 복수심 등의 격정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특수한 처지 때문에 육기는 마음속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대의 문인 중에는 육기가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으면서 왜 시 속에 진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표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육기가 관념적인 서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낙양(洛陽)은 육기가 성장한 남방과 자연환경도 다르고 문화적 환경도 달랐다. 그는 스스로를 항상 나그네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시에서도 인생을 나그네로 묘사했다. 육기는 스스로를 “수향(水鄕)의 선비”라고 묘사했는데, 오나라를 대표하는 자연을 물이라고 한다면 낙양을 대표하는 자연은 숲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별시를 보면 물가에서 형제들과 이별하고 숲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물의 고장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의 시에서 숲은 이별과 슬픔과 공포를 상징하는 소재가 된다. 육기는 인생의 나그네가 되어 진지하게 인생과 운명을 고민했고, 그것을 관념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때로는 나그네의 슬픔을 읊기도 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장안의 좁고 굽은 길(長安有狹邪行)> 같은 작품은 나그네의 실존적 고뇌를 묘사했다. 이 시는 자신이 낙양의 갈림길 위에 서 있다고 말하며 시작된다. 낙양은 그에게 낯선 타향이며 전쟁 포로로 압송되었던 두려운 공간이다. 그리고 길은 그가 선택해야 할 인생 항로의 상징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이다. 그는 “원칙대로 살아가면 멀리까지 닿지 못하는 법 / 반듯한 걸음걸이로 어찌 남을 따라가리”라고 말한다. 항상 원칙을 견지하는 근엄한 유학자로 살아왔지만 실존의 순간 앞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스럽다. 누구보다 비극적이고 고독한 인생의 주인공이었기에 맞이해야 했던 고민이다. 또 그의 서정시가 자아의 진솔한 고백을 포기하고 강한 상징성과 관념성을 선택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육기는 문학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인생은 아름답지 않았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웠고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깊은 사색, 감성적 체험과 이성적 표현으로 빚은 그의 서정시는 문인시의 한 전형이 되었고 중국 문학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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