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유영(柳永, 987-1053) |
국가 |
중국 |
분야 |
사(詞) |
해설자 |
박홍준(성신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 |
중국 송대(宋代)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로 흔히 송사(宋詞)를 꼽는다. 송사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의 곡조에 맞춰 지은 노래 가사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유행가 가사와 같은 것이다. 찬란했던 당시(唐詩)의 영광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을 것 같지만, 황제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송대를 살았던 모든 계층에게 두루 사랑을 받았던 문학은 오히려 송사였다. 그리고 송사를 창작한 사인(詞人)들 가운데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작가가 바로 이 책에서 살펴볼 유영(柳永)이다. 그렇다면 과연 송사의 어떤 매력이, 그리고 유영 사의 어떤 특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송대는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다. 즉 이전의 귀족 중심의 문언(文言) 문학에서 이후 민간 중심의 백화(白話) 문학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바로 송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중당 시기 안사의 난에서 출발했겠지만, 여러 사회문화적 배경이 제대로 갖추어진 것은 아무래도 송대에 들어와서였다. 강남 도시 경제의 발달로 인구가 증가했고, 많은 도시민의 오락 생활을 위하여 와사(瓦肆)와 구란(勾欄) 같은 대형 공연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이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많은 이들이 함께 즐기면서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것이었다. 또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복잡한 사회문제들이 많이 발생했고, 이러한 인간상의 이해와 사건의 설명을 위해 자세한 해설식의 서사적 문예가 환영을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이야기꾼들이 들려주던 설화(說話)의 대본인 화본(話本)의 강사(講史)나 소설(小說)이 바로 그러한 예가 될 것이고, 문인들이 창작했던 시나 산문도 서사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민간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인 송사도 점차 편폭이 길어지면서 가사 전개에 용이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추구하게 되었다. 유영의 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했고, 당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환희의 감정을 펼쳐낸 만사(慢詞)라는 형식을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만사라는 새로운 형식의 송사가 가져온 변화는 단순히 작품의 길이가 늘어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에 걸맞은 새로운 내용을 갖추었는데, 그 새로운 내용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일상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즉 유영 사는 모호하고 심각한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별을 서술할 때도 이별의 아픔을 알듯 모를 듯한 언어로 형상화하기보다는 이별의 전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유영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우림령(雨霖鈴)>의 경우 이별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이별하는 순간의 안타까움을 회상하고, 다시 이별 후 고독한 세월을 보내며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 기법을 ‘포서(鋪敍)’라고 하는데, 유영의 만사는 확대된 편폭을 기반으로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각종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독자 스스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 없이 작가가 시시콜콜한 정황들을 친절히 소개하여 궁금하고 가려운 것들을 속 시원히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유영 사가 환영을 받았던 이유는 일상적인 삶을 그려내면서도 거기에 다소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감각을 함께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앞서 유영 사가 현실에 밀착된 일상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했는데, 단순히 일상의 세계만을 그려내었다면 유영 사의 인기가 그렇게 높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국화신(菊花新)> 같은 작품의 경우 사랑하는 두 남녀의 저녁 시간을 그리고 있는데, 사랑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대담한 여인의 언행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유영 사에서는 남성 화자가 등장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심경을 솔직하게 토로한 작품이 상당수 있다. 이것은 예전 작품들이 주로 여인을 작중 화자로 등장시켜 감정을 표현하던 것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유가적인 관념에 익숙한 문인들의 입장에서는 가까이하기엔 부담스러운 낯부끄러움이었지만, 당시 새로운 문예를 추구하던 민간 계층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신선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였지만 정작 유영 자신은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과거 급제를 통한 관료 사회 진출이라는 유일한 길만이 인정되던 당시 사회에서 통속적인 문학 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유영의 인생 역정이 순탄치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여러 차례 과거에 도전했지만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창작 경향이 지나치게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탈락한 적도 있었다. 말년에 다행히 과거에 급제는 했지만 지방의 말단 관직을 전전해야 했고,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이라는 벼슬로 생을 마쳤기에 세상에서는 그를 유 둔전(柳屯田)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해 정확한 생몰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대략적으로 987년 출생하여 1053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사망 시기에 관해서는 대체로 의견 일치를 보고 있지만, 출생한 연도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입증이 되지 않은 상태다. 학자에 따라서 971년에서 99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는데, 본서에서는 탕구이장(唐圭璋)의 설을 따라 987년으로 보았다.
유영의 생년에 관해서 이렇게 의견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송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다. 즉 송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먼저 당오대(唐五代)의 화간파(花間派)를 계승한 소령(小令)의 작가들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만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유영의 생년을 안수(晏殊, 991∼1055)나 구양수(歐陽修, 1007∼1072) 같은 소령 작가의 뒤에 위치시키는 것이고, 그와는 달리 소령과 만사가 동시에 병행하여 발전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유영의 생년을 조금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한다면 유영의 생년은 결코 당시 유명한 소령 작가들보다 늦지 않으며, 따라서 소령과 만사는 당시에 병행하여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당시에 소령과 만사로 대표되는 송사의 작품군이 함께 존재했고, 이들은 각각의 작품을 선호하는 작가와 독자층의 사랑을 받으면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유영과 관련해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사항은 그에 대한 평가의 문제다. 유영이 생존했을 당시는 물론이고 그의 사후에 많은 문인들은 그의 작품이 저속하다고 비판했으며, 아울러 그의 인품을 폄하하는 발언을 쏟아내었다. 거의 인신공격인 그런 비평에 대해서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영 사는 당시 악공(樂工)이나 가기(歌妓)들의 청탁을 받아 창작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여성 화자로 때로는 남성 화자로 창작된 유영의 작품들이 당시 와사와 구란 같은 공연장에서 노래 부르는 가기들의 청탁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즉 작품을 통해 작가 유영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필요로 했던 독자(讀者)나 청자(聽者)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노래를 소비했던 당시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영 사는 송대 사회의 사회문화적 배경하에서 출현한 하나의 새로운 문화적 상품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화 상품인 유영 사를 단순히 유영 개인의 작품으로, 그의 사상과 감정이 담긴 작품으로만 파악했을 때, 유영 개인에 대한 비난과 공격으로 나가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유영 사를 통해서 송대 사회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움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당시에 새롭게 대두된 시민 계층의 변화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영 사의 의미는 그것이 송대 사회를 반영한 문학이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문학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보통 중국문학에서는 원대(元代)의 희곡인 잡극(雜劇)에서부터 민간 계층의 새로운 문학이 출현했다고 보지만, 유영 사의 여러 특징을 고려할 때 그 시기를 더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영 사 가운데 일부 작품의 경우 소설적인 이야기가 삽입되거나(<장상사(長相思)>), 대화체를 활용한 극적 구성(<투백화 3(鬪百花 其三)>) 등 전통적인 시가의 창작법과는 다른 특별한 창작법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유영 사는 당시의 민간 연예인 백화소설이나 희곡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향후 더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유영 사의 판본과 번역
유영의 사는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 이미 일반에 널리 애창되었기 때문에 송대부터 그의 사집이 간행되었다. 그 작품집의 이름은 ≪악장집(樂章集)≫인데, 이 송대 ≪악장집≫은 명ㆍ청대까지는 전해진 것 같으나, 현재는 사라져 원래의 면모를 알 수는 없다. 현재까지 전하는 ≪악장집≫의 판본은 모두 32종인데, 어떤 것은 단지 목록만 있고 전하지 않아 비교적 완정한 것으로는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차례로 명대(明代) 모진(毛晉, 1598∼1659)의 급고각(汲古閣)에서 간행한 ≪송육십명가사(宋六十名家詞)≫에 수록된 ≪악장집≫ 1권, 청대(淸代) 모부계(毛斧季, 1640∼?)가 간행한 ≪악장집≫ 3권, 주샤오짱(朱孝臧)의 ≪강촌총서(彊邨叢書)≫에 수록된 ≪악장집≫ 3권(1901), 그리고 근인 탕구이장의 ≪전송사(全宋詞)≫에 수록된 ≪악장집≫ 3권(중화서국, 1965)이 비교적 믿을 만한 판본이다. 그리고 현재에는 대부분 주샤오짱의 판본이나 탕구이장의 판본을 의지하여 유영 사에 대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탕구이장의 판본은 본래 주샤오짱의 판본을 근본으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모부계를 참고했으므로 주샤오짱의 판본이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 이번 번역에서는 쉐루이성(薛瑞生)이 교주한 ≪악장집교주(樂章集校註)≫(중화서국, 1994)를 저본으로 삼았는데, 이 책 역시 주샤오짱의 판본을 근본으로 하여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영 사의 작품 수는 판본에 따라 206수에서 216수를 오르내리는데, 주샤오짱의 판본에서는 206수를 정리했고, 탕구이장의 판본은 여기에 7수를 보충하여 213수를 수록했다. 쉐루이성 교주본에서는 주샤오짱의 206수에 10수를 보충하여 216수를 실어놓았다. 또한 중국의 주석서로 참고할 만한 책으로는 셰타오팡(謝桃坊)의 ≪유영사상석집(柳永詞賞析集)≫[파촉서사(巴蜀書社), 1987], 량쉐윈(梁雪芸)의 ≪유영 사선(柳永詞選)≫[삼련서점(三聯書店), 1989], 야오쉐셴(姚學賢)과 룽젠궈(龍建國)가 공편한 ≪유영사상주급집평(柳永詞詳注及集評)≫[중주고적출판사(中州古籍出版社), 1991]이 있다. 그 외에도 유영 사에 대한 인기를 반영하듯이 최근 들어 유영 사에 관한 많은 주석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몇 가지 당부할 것이 있는데, 우선 작품을 작품 자체로 보아달라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그동안 유영 사를 너무 전통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아 어떻게 문인이 이런 작품을 썼을까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작품 속의 사랑 이야기를 단지 유영 개인의 이야기로 생각해서 비판한다면, 유영 사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영 사는 송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사회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통해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런 작품들이 탄생했을지 한번 생각해 본다면 전체적인 작품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유영 사의 새로운 내용과 형식에 주목하기 바란다. 유영 사의 내용이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제재였다. 또한 유영 사의 경우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제재의 발굴에도 적극적이어서 송사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일부 작품의 경우에는 단순히 서정적인 가사의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인 이야기나 극적인 대화도 삽입하여 송사의 새로운 전개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작품을 읽을 때 여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이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노래 불렸을지 상상하면서 읽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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