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소네트와 세익스피어
2016년 12월 14일 22시 50분  조회:3123  추천:0  작성자: 죽림

윌리엄 셰익스피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윌리엄 셰익스피어
 
 
출생 1564년 4월 26일
잉글랜드 워릭셔 주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사망 1616년 4월 23일 (51세)
잉글랜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직업 극작가, 시인, 배우
국적 영국
사조 영국 르네상스 연극
배우자 앤 해서웨이(1582-1616)
자녀 수재나 홀
햄넷 셰익스피어
주디스 퀴니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1616년 4월 23일)는 영국의 극작가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셰익스피어 자신도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힌다.[2] 그는 자주 영국의 "국민 시인"과 "에이번의 시인"으로 불렸다.[3]

유년기[편집]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존 셰익스피어의 집,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로 불리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의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출생하였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부부의 첫 번째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4]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였으며, 읍장까지 지낸 유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고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여겨진다.[5]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와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4] 셰익스피어는 11세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수사학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4] 셰익스피어는 그리스어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그리 뛰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인 벤 존슨은 “라틴어에도 그만이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비꼬아내기도 하였다.[4]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4] 그는 다른이들과 다르게 뛰어난 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그 자체로부터 깊은 생각과 뛰어난 지식을 끌어모은 자로서 그 세대의 최고의 희곡가라고 불리고 있다.[4]

셰익스피어는 18세의 나이에 26세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우스터의 성공회관구(자치적이고 독립적인 지역 성공회 교회를 일컫는 말)의 교회 법정에서는 1582년 11월 27일에 혼인 허가를 내주었다. 해서웨이의 두 이웃은 결혼을 막을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음을 보증하는 보증서를 다음 날 보냈다.[6] 셰익스피어의 생애에서 세례일과 결혼일을 제외하고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4]

셰익스피어와 앤 사이에서 1583년 5월 23일에 수잔나(Susanna)라는 딸이 탄생한다.[4]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황으로 보아 그리 늙은 신부가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연상의 아내를 그리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4] 연상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든 개인적인 성공의 야심에서였든, 아니면 고향에 머무를 수 없을 만한 사고를 저질렀든, 셰익스피어는 1585년에 햄닛(Hamnet)과 주디스(Judith)라는 쌍둥이가 태어난 후 곧장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닌다.[4] 1585년 이후 7∼8년간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녔는데, 이 기간 동안 셰익스피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4] 다만 1590년경에야 런던에 도착해 이때부터 배우극작가, 극장 주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4]

런던과 극작 활동[편집]

런던에 이주한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하고 있던 수도 런던의 모습에 매료되었다.[4]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이 시기의 런던은 많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대단히 북적거리고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4] 런던은 인구의 급격한 팽창으로 도시는 지저분해지고 많은 문제점이 야기된 도시였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다양한 경제 활동, 다양한 문화 활동과 행사, 특히 빈번한 연극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흥을 제공하면서 셰익스피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4]

셰익스피어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의 기록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1592년에는 런던에서 알려진 극작가 중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가 대학도 마치지 못한 학력으로 인해 품격이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7] 1594년부터 셰익스피어는 당시 런던 연극계를 양분하는 극단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극단[8]의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5]

1599년 궁내부장관 극단은 템스 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하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극단은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9] 셰익스피어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1594) 등 두 편의 장시(長詩)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년 ∼ 1613년까지의 대략 24년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기간에 희·비극을 포함한 모두 38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59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는데, 특히 《헨리 6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4] 셰익스피어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인기는 더해 갔다.[4]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4]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극찬한다.[4]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몇 편의 장시와 시집 《소네트》를 집필하였고,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생전의 엘리자베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경우에도 셰익스피어 한명만은 못 넘긴다." 이었다.

말년과 죽음[편집]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번째 전기를 출간한 작가 로우(Rowe)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몇 년전에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10] 그러나 당시에 모든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일은 보기 드문 경우이었고,[11] 말년에도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계속 방문하였다.[10] 1612년 그는 마운트조이의 딸 메리의 혼인 신고와 관련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받았다.[12] 1613년 3월 그는 과거에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소 수도원 이었던 문루(gatehouse)를 사들였고,[13] 1614년 11월에는 내과 의사이자 그의 사위인 존 홀과 함께 몇 주간 런던에 머물러있었다.[14]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장례 기념물

1606년에서 1607년을 지나면서 셰익스피어는 몇 편 안되는 희곡을 썼으나 1613년 이후에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15] 그가 마지막으로 쓴 세 편의 희곡은 아마도 극작가인 존 플레쳐와 함께 창작한 것으로 보이며,[16] 존 플래쳐는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어 왕의 부하들을 위한 실내극을 창작한 인물이었다.[17]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18] 유족으로는 그의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수잔나는 내과의사인 존 홀과 1607년에 결혼하였으며,[19] 쥬디스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두 달 전에 포도주 제조 업자인 토마스 퀸네이와 결혼하였다.[20]

자신의 뜻에 따라 셰익스피어는 갖고 있던 많은 부동산을 큰딸인 수잔나에게 물려주었다.[21] 유언장에 따르면 그녀는 그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여 "그녀의 몸에서 낳은 첫 아들"에게 상속해야 했다.[22] 둘째 사위인 퀸네이는 세 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결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23] 수잔나의 남편이자 첫째 사위인 홀에게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지닌 자녀가 한 명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두 차례 결혼하였지만 1670년에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셰익스피어의 직계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24] 셰익스피어는 유언에서 당시 법에 따라 아마도 자신의 재산 중 3분의 1을 물려받을 상속권이 있었을 아내 앤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 마디를 남겼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나의 두 번째 좋은 침대"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언급한 침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였다.[25] 일부 학자는 언급된 그 침대가 실제 물건이 아니라 앤에게 모욕을 주려고 한 말이라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진짜 그러한 침대가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의미있는 유산이었으리라고 믿는다.[26]

 
셰익스피어의 무덤

셰익스피어는 죽은 뒤에 고향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묻히게 된다.[4]

그의 흉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4]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 대지는 그를 덮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올림푸스는 그를 소유한다.”[4]

-출처/위키백과


 
추천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운명과 세인의 눈에 천시되어
나는 혼자 버림받은 신세를 슬퍼하고
소용없는 울음으로 귀머거리 하늘을 괴롭히고
내 몸을 돌아보고 나의 형편을 저주하도다
희망 많기는 이 사람
용모가 수려하기는 저 사람 친구가 많기는 그 사람 같기를
이 사람의 재주를 저 사람의 권세를 부러워하며
내가 가진 것에는 만족을 못 느낄때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는 나를 거의 경멸하다가도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나는
첫새벽 적막한 대지로부터 날아올라
천국의 문전에서 노래 부르는 종달새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려 아니 하노라

윌리엄 세익스피어 (william shakesoeare 1564_ 1616)

세익스피어는 1564년 잉글랜드 중부의 스트래트포드 어폰 에어본에서 출생 영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극작가로 평가받는 대문호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이고 아버지 존 세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
공업과 중농을 겸하고 있었다 1582년 앤 해서웨이와 결혼 세 아이를 둔 후 런던에서 극작가
로 활동하며 이를을 떨쳤다 다방면에서 열정적인 문학활동을 펼치다가 1616년 52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사망했다 36편의 비극 희극 사극외 시집과 소네트 집을 남겼다


해설과 감상

소네트라 하면 우리 시인들에게는 생소하다 즉 소네트라는 뜻을 국어사전에서는14행의 시 특히 
특수한 운율을 나타내는 작품이라 정의 하고 있다 위대한 시인인 세익스피어는 이 14행의 
운율에 맞는 소네트 시집을 출간 했으니 아마 세계에서 흔히 이룰수 없는 업적일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시조의 형태라 할수있다 우리의 시조가 3 4 4 3등 운율과 시어를 격식에 맞게 
표현한 것이기에 이 소네트 시는 우리나라의 시조 형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위의 작품에서 
누구나 자기의 생존이 회한속에서 살기에 헛된 한숨 이룰수 없는 꿈에 대한 허망함으로 하루 
하루를 영위 한다고 생각케 한다 남이 잘되고 복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시기도 하고
저주도 하며 매도도 하며 살아감을 가슴 아파 한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생존을 보면서 
슬퍼 하기도 하고 괴로워 함을 엿보게 한다 이는 양심이란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성선설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것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면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창공을 훨훨날고 있슴을 연상게
한다 야심도 욕심도 없는 한마리의 새가 되어 멋 지게 창공을 날아가는 새의 기분을 상상해 보자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무 부러움도 없고 시기도 저주도 없는 무심의 마음 백팔번뇌를 다 
잊어버린 무아의 경지는 이 세상 살아감에 무엇하나 부러운것이 있으랴 특히 10행에서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에서 그대는 누구일까 이 그대의 뜻은 많은 음미를 잉태 시킨다 이는 독자의 몫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또 읽고 음미에 음미를 거듭하며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수필을 몇번인가
연상했다 또한 법정스님은 얼마나 행복하고 값어치 있는 생존을 영위하고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 
나의 필을 무디게 했다 끝
===================================

이를테면 정형시죠

 

우리나라의 시조는 글자수로 그 형식을 맞추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영시는 율보격이나 두운 각운 등을 통해서 운을 맞춥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극작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시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s declines,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d;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st,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일단 이 시는 총 14연으로 이루어진 소넷(sonnet)입니다.

소곡(小曲) 또는 14행시(行詩)라고 번역한다. 13세기 이탈리아의 민요에서 파생된 것이며, 단테나 페트라르카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르네상스시대에는 널리 유럽 전역에 유포되었다. 
한 편은 4행·4행의 옥타브와 3행·3행의 세스테트로 된 14행시이며, abba/abba/cde/cde(페트라르카 형식) 등 몇 개의 정해진 법칙에 의한 각운(脚韻)을 따라 구성된다. 내용적으로는 서곡(序曲) → 그 전개 → 새로운 시상(詩想)의 도입 → 종합결말이라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방식이다. 대부분이 연애시로 수십 편의 연작(聯作)으로 된 것이 많다.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는 소네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롱사르 등 플레이아드파(派)의 시인들과, 독일에서는 슐레겔과 괴테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영국에서는 와이엇과 사레백작(伯爵)에 의하여 영국 형식의 소네트가 생겼으며 셰익스피어, 밀턴, 워즈워스, 키츠, 로제티, 브라우닝 부인 등에 의한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영국 형식의 소네트는 4·4·4·2행(abab/cdcd/efef/gg)으로 되며, 이것을 셰익스피어 형식이라고 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발레리, 릴케 등도 그들의 중요한 작품을 소네트 형식으로 썼다.

 

압운 [押韻, rhyme]
행의 첫음에서 반복되는 것이 두운, 끝음에서 반복되는 것이 각운인데, 이것이 좁은 뜻의 압운이다. 이것은 옛날의 영시에서도 기조를 이루는 수사법으로서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day, may와 temperate, date는 모두 행 끝에서 같은 음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시의 정형화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의 행 끝을 살펴보면 abab/cdcd/efef/gg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7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410 오늘의 시는 하나의 시적 세계어의 성립을 지향해야.. 2017-04-18 0 1889
409 시가 려과없이 씌여지면 시가 산만해지고 긴장감을 잃는다... 2017-04-18 0 1829
408 불쌍한 시들을 위하여 시인들은 장인정신을 갖추어야... 2017-04-18 0 2134
407 시는 쉬지않고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여야... 2017-04-18 0 2025
406 시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필치로 속이 꽉차게 써야... 2017-04-18 0 2236
405 시는 삶의 희노애락이 얼룩진 보물상자에서 나온다... 2017-04-18 0 2371
404 시는 상투적인 설명에 그치지 말아야... 2017-04-18 0 2403
403 시인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오늘도 많이 떨어지고... 2017-04-18 0 2092
402 초현실주의는 문학예술운동을 넘어선 삶의 한 방식이다... 2017-04-11 0 3672
40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영화를 본후 시쓰기... 2017-04-10 0 2797
400 단시 모음 2017-04-10 0 3053
399 시는 온몸으로 온몸을 다해 밀고 가는것이다... 2017-04-10 0 2111
398 장 콕토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영화감독이였다... 2017-04-10 0 2927
397 "...뼛가루 한점이라도 원쑤의 땅에 남길수 없다"... 2017-04-09 0 3380
396 "부끄럼 없는 인생"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2017-04-08 0 2346
395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다... 2017-04-08 0 2713
394 시작은 조탁(彫琢)과 사랑이다... 2017-04-08 0 2509
393 윤동주의 무기는 "시"였다... 2017-04-06 0 2334
392 시는 정서의 흐름으로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2017-04-06 0 2445
391 [시문학소사전] - "그로테스크"란?... 2017-04-05 0 2615
390 [시문학소사전] - "아라베스크"란?... 2017-04-05 0 3499
389 현대시를 알려면 현대시의 구조를 알아야... 2017-04-05 0 3217
388 시인은 추한 명예를 베고 눕지 않는다... 2017-04-05 0 2448
387 시를 쓰는 기본자세는 사물에 대한 애정이다... 2017-04-04 0 2575
386 현대시는 전통과 현대 서구적인것의 접목작업을 공감하기 2017-04-04 0 2265
385 시작하기전 철학공부를 하지 안아도 된다?... 꼭 해야 한다!... 2017-04-03 0 2250
384 시작은 섣부른 감정을 억제하고 간접화법으로 노래하라... 2017-04-03 0 2154
383 시는 멀리에 있는것이 아니라 가까운 삶속에 있다... 2017-04-03 0 2647
382 어머니의 말은 풍성한 시의 원천 2017-04-03 0 2051
381 시에 우리 겨레의 숨결을 옮겨 놓아야... 2017-04-03 0 2355
380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도피이며 해방이다... 2017-04-03 0 2605
379 시를 짓기전 들여마셔야 할 공기와 내뱉어야 할 공기가 어떤지 생각해보기... 2017-04-03 0 2237
378 "쉬운 시"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속에 깊은 향기를 풍긴다... 2017-04-03 0 2381
377 시는 정보의 전달 수단이 절대 아니다... 2017-04-03 0 2699
376 시인은 한편의 좋은 시를 위하여 수백편의 시를 쓰고 버릴줄 알아야... 2017-04-03 0 2555
375 혼을 불사르지 못하는 시인은 그 생명력이 짧을수밖에 없다... 2017-04-03 0 2355
374 시인은 구도자로서 억지를 부려 결과물을 얻어서는 안된다... 2017-04-03 0 2307
373 시적 령감은 기다리는 자의것이 아니라 땀흘려 찾는 자의 몫... 2017-04-03 0 2406
372 시를 쓰는 행위는 신과의 씨름이다... 2017-04-03 0 2323
371 시는 시인의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산물이다... 2017-04-03 0 2220
‹처음  이전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