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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도반으로 수행
인위적 장치 없이 촬영
30여년간 작품 20여만점
기록문화유산 가치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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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스님. 1988년부터 교유해온 사진작가 준초이(한국명 최명준)의 작품이다. |
모든 피사체를 부처님으로 인식하고 앵글에 담아 20여만 점의 작품을 남긴 관조성국(觀照性國, 1943~2006) 스님. 사진을 방편으로 삼아 자연이 곧 대장경(大藏經)이며 화엄세계(華嚴世界)임을 대중에게 알렸다. 열반 10주기(10월29일)에 즈음해 관조스님의 수행 일화와 가르침을 상좌 승원스님(가평 백련사 주지)을 비롯한 문도의 회고와 20여권에 이르는 작품집을 참고해 정리했다.
○… 관조스님이 사진에 뜻을 둔 까닭은 1980년에 선보인 첫 작품집 <승가1>에 잘 나타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스님은 “만분의 일이라도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까 생각하여 경전도 여러 차례 간행 유포하여 보았으나. 너무 광활(廣闊)하고 어려운 탓으로 일반 불자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생각하던 중, 어려운 언어문자를 떠나 시각적(視覺的)으로 불법(佛法)을 전달하는 방법이 없을까 연구한 것이 사진을 착상(着想)하게 된 이유”라고 밝혔다. 이 글에서 관조스님은 “산문에 귀의한지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면서 “나름대로 자기수행에 진력코자 노력했지만, 오랜 누습(累習)의 타성(惰性)으로, 자의(自意)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난 점도 너무나 많다”고 20년간의 수행을 겸손하게 전했다.
“염주 대신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닐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음과 경시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볼 때는, 스스로 주저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 스님은 “만일 나에게 한번 더 여건과 기회가 주어지고 생명이 연장된다면 보다 충실하고 내면적인 것을 나타내고 싶다”고 발원했다.
○… “저는 은사 스님의 사진을 사리(舍利)라고 생각합니다. 뼈를 깎는 고행 끝의 산물로 이루어진 결과물인 스님의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수행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승원스님은 스승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행자생활을 마치고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관조스님의 제자가 된 승원스님은 “은사 스님은 ‘사진은 수행과 포교’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후학들에게 관조스님은 “있는 그대로 살아라”면서 “꾸미지 말고 속이지 말라”고 당부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관조스님 작품에도 고스란히 배여 있다. 사진을 촬영할 때 필터나 조명 등 인위적인 장치를 가미하지 않은 것이다. 인공이 아닌 자연스러운 빛은 스님 사진의 독특한 매력이다. 승원스님은 “(은사 스님은)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시려고 애를 쓰셨다”면서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생명이 있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 “스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진을 촬영하는 관조스님을 따라 나선 승원스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미처 닦지도 못한채 정성을 다해 연신 셔터를 누르던 관조스님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답했다. “있는 그대로가 화엄의 세계가 아니냐.” 승원스님은 “그 때의 스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은사 스님 말씀대로, 사진은 성스러운 자연대장경(自然大藏經)을 조성하는 대작불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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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74년 1월 해인사 강주 시절 능엄경을 수료한 학인들과 함께 한 관조스님(앞줄 가운데). |
○… 금산사 조실 월주스님(지구촌공생회 이사장)은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에서 관조스님과의 인연을 담담하게 밝혔다. 종단에서 개최한 불교미술전람회 사진분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인연으로 관조스님과 월주스님은 오랜 교분을 유지했다. 월주스님은 “카메라를 주장자처럼 지니고 산천을 주유하며 자연과 고찰의 아름다운 풍광을 앵글에 담던 (관조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한국불교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세상에 알렸다”고 회고했다. 또한 “관조라는 법명은 평생 카메라를 사랑했던 마음과 일치하는 것 같다”면서 “마지막까지 보살행을 실천하고 떠난 그가 보고 싶다”고 소회를 전했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암 발병 소식을 접했지만 관조스님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말기 암의 고통을 쉽게 짐작할 수 없지만, 출가 수행자의 위의를 끝내 잃지 않았다. 상좌들 앞에서 조차 아프다는 기색을 숨겼다. 삶과 죽음의 경지를 넘어선 수행자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문병객이 오면 누워 있다가도 일어나 반듯이 앉아 맞이했다. 속옷도 직접 세탁해 입었다고 한다. 또한 사바세계의 인연을 마감하면서 당신의 모든 것을 회향했다. 생전에 약속한 대로 동국대 병원에 안구와 법구를 기증해 ‘생명나눔’의 자비정신을 실천했던 관조스님이다.
○… 관조스님이 열반에 들었지만 가평 백련사 주지 승원스님을 비롯한 문도들이 스승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실상과 자연풍광을 솔직담백하게 담은 20여만 컷은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치가 더욱 크게 드러날 스님의 사진을 후대에 온전하게 전하기 위해 조계종 총무원과 금정총림 범어사에 기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또한 관조스님 원적 후에도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몽골초원과 유목민의 삶’이란 주제로 유작사진전을 열었다. 2011년 8월에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특별전 ‘부처님의 손’을 개최해 교계 안팎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국립춘천박물관 특별전은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입적에 들기 전에 참석한 마지막 대외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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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에 집중하고 있는 관조스님. |
■ 행장
1943년 3월 19일 경북 청도에서 출생했다. 1960년 1월15일 부산 범어사에서 지효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동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1년 4월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시작하여 9안거를 성만했다. 1966년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제7대 해인사 강주로 후학을 양성했다. 1976년 범어사 총무국장 소임을 역임한 후 일체 공직을 맡지 않았다.
불교 가르침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카메라를 든 스님은 범어사 안심료에 주석하며 전국 산사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았다. 30여 년간 사진예술을 통해 “모든 사물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부처님 진리를 전했다. 1980년 <승가1>을 처음 선보인데 이어 <열반> <자연> <생,멸, 그리고 윤회> 등 20여권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특히 <사찰 꽃살문>은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의 아름다운 책 100권’에 선정되었다. 또한 아시안게임 경축사진전(1986년), 한국일보 올림픽 문화행사 초청전시(1988년)는 물론 청주·광주·제주·춘천·부산·서울 국립박물관을 순회하며 연 사찰 꽃살문 사진전(2003년)으로 사진의 정수를 전했다. 미국 LA(1982년)와 시카고(1994년), 캐나다 토론토(1991년) 등 해외전시도 열어 한국 불교와 사진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동아미전 미술상(1979년), 현대사진 문화상(1988년)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스님의 작품은 일본 <니코르(NIKKOR) 연감>과 영국 <사진연감>에도 실렸다. 사진을 도반으로 여기며 수행자의 위의를 보여준 스님은 2006년 11월20일 범어사에서 원적했다. 세수 64세, 법납 47세.
■ 어록
“있는 그대로를, 산 그대로를 보여주되 형상(形像)을 떠난 심상(心像)을 표현해 주어 미래의 불자는 물론 그 누구라도 억지 추정을 말고 마음에 닿는 감동을 전해줌으로써 불법과 인연을 맺게 하고 싶었다.” - 1981년 4월 <승가2>
“불교의 진수(眞髓)를 글로 써서 대중에게 알려도 보았지만, 노력에 비해 성과에는 큰 소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입니다. 불교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것은 사진보다 불교의 참모습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지요.”
- 1981년 5월16일 <동아일보> 인터뷰
“무상한 허상에 애착을 두지 않고 실상(實相) 규명을 위해 온갖 고행과 끊임없는 정진으로 터득한 깨달은 자의 생사관(生死觀)은 부활이니 내생이니 윤회니 하는 것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인연따라 오고 인연따라 갈뿐 항시 실상(實相)에 입각하여 스스로 수용하고 흰 구름 같이 유유자적한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으로서 만물(萬物)에 끄달림이 없다.
- 1984년 6월 <열반>
“님이여! 님은 나를 있게 한 님이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있게 한 님입니다. … 나는 다만 내안에 머문 님의 자취를 찾아 헤맬 따름입니다. 나는 다만 세상에 머문 님의 자취를 찾아 헤맬 따름입니다.” - <님의 침묵, 님의 풍경>
“나뭇잎 하나, 돌멩이 하나에도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광대한 우주공간의 그 어느 것이나 다 부처의 법신(法身)입니다. 산승은 그러한 부처님의 말씀과 숨결을 사진에 담으려 했습니다. … 좋은 사진 한 장은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잡아채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말입니다. 봄이 되니 꽃이 좋습니다. 꽃은 보아달라고 하지 않는데 산승(山僧)은 자꾸만 봅니다.”
- 2005년 <풀잎마다 부처님의 모습 - 깨우침의 빛>
“森羅萬象天眞同(삼라만상천진동) 念念菩提影寫中(염념보리영사중) 莫問自我何處去(막문자아하처거) 水北山南旣靡風(수북산남기미풍). 삼라만상이 본래 천진불이요, 한 줄기 빛으로 담아 보이려 했다네,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마라, 동서남북에 언제 바람이라도 일었더냐…” - 관조스님 임종게
[불교신문3259호/2016년12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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