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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서 같은 그림이 수백억원?..."=락서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
2017년 01월 15일 21시 56분  조회:7063  추천:0  작성자: 죽림
 
제작시기 1982년
가격 $48,843,750(512억 4000만 원)1)
작가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장-미셸 바스키아, 〈더스트헤즈〉,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오일스틱, 스프레이 에나멜, 메탈릭 페인트 / 182.8×213.3cm
장-미셸 바스키아, 〈더스트헤즈〉,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오일스틱, 스프레이 에나멜, 메탈릭 페인트 / 182.8×213.3cm
“나는 평생 길거리 부랑아로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장-미셸 바스키아

국제 미술 시장 분석 기관인 아트프라이스닷컴(artprice.com)은 매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낙찰 총액이 가장 높았던 작가’ 리스트를 발표한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2012년 발표한 리스트에서 11위에 올랐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에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작품 활동을 했고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피카소, 모네, 워홀 같은 역사적 대가들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아트프라이스닷컴 발표 다음 해인 2013년 5월에 열린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급기야 회화 한 점이 4884만 달러(512억 4000만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우며 바스키아 작품 가운데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작품을 팔 때는 시기가 중요하다. 2013년 5월은 바스키아의 주가가 한창 올라가던 때였다. 마침 세계 최고 갤러리라 할 수 있는 개고시언 갤러리가 그해 초 뉴욕에서 바스키아 회고전을 열어 수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경매 직전 바스키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올라갔다. 경매 직후에는 개고시언 갤러리 홍콩 지사에서 바스키아 개인전이 열릴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개고시언 같은 세계적 갤러리가 이렇게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만들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 작가에게 쏠리고, 미술 시장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작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낙서 같은 이 그림이 수백억 원이라고?’

바스키아의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황당해서 잠시 말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그림을 남긴 바스키아는 놀랍게도 현대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가 시대정신을 잘 표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좋은 작가가 되는 여러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시대성’을 꼽겠다. 자신이 속한 그 시대를 잘 읽어 내고 반영하는 작가는 길이 남는다. 인상파 화가들, 피카소, 워홀도 결국 그런 작가였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작가다. 그래서 이토록 중요한 작가가 된 것이다.

1980년대 뉴욕은 화이트칼라 중산층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겉으로는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시 이 도시에 살고 있던 이민족과 저소득층은 변두리 슬럼가나 싸구려 거주 지역, 길거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젊은이들의 정신적 공황이 심해져 마약과 범죄가 판치는 도시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재즈와 힙합 문화로 도시의 열기가 터질 듯했다.

바스키아는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뉴욕의 전형적인 저소득층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시대에 반항하는 젊은이였다.

열다섯 살에 가출해 길거리를 나돌며 친구와 함께 ‘세이모(SAMO)’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벽에 스프레이로 그림과 메시지를 그렸다. SAMO는 ‘Same Old Shit’, 즉 늘 똑같은 것, 반복되는 것이라는 뜻의 줄임말로, 그들이 늘 피우던 마리화나를 의미한다. 그러나 SAMO 프로젝트는 함께하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1979년에 그만두었다.

이어 바스키아는 스물한 살이던 1981년부터 캔버스와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어 붙여 콜라주도 했다.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인종 문제, 범죄, 마약 등 당시 뉴욕이 겪었을 사회적 불안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시대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시기에 어떤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중요하다. 바스키아가 폭발하는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 1980년대 초는 마침 미술계에서 표현주의적인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던 때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유행한 미니멀리즘 미술은 표현 방법과 재료를 최소한으로 줄여 ‘작가의 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니 198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다시 ‘작가의 손’이 많이 들어가고 표현이 풍부한 미술을 원할 만도 했다. 바스키아는 주제 면에서는 불안한 시대의 정신을 담으면서 작품의 외형은 사람들이 원하는 짙은 표현주의적인 형태를 띠었으니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될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특히 바스키아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뉴욕 동남부의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는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예술로 폭발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이에 이스트 빌리지에서만 갤러리가 백 군데 이상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이런 조건들이 뒷받침되면서 바스키아는 1980년 화가로 정식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팔리는 작가’가 되었다. 1985년에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에 국제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새로운 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1980년에 워홀을 만나 자신의 작품 몇 점을 보여 주었다. 이때 워홀은 그의 천재성에 탄복했고 이후 공동 작업을 하는 등 죽을 때까지 약 7년간 바스키아와 아주 가까이 지냈다.

1987년 자신의 적극적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여기던 워홀이 담낭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이듬해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1980년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인생은 오히려 신화로 남았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꾸준히 열리고, 미술 시장에서 수요가 많아 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거침없는 표현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 준다.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전형적 특징인 해골 같은 얼굴 두 개가 등장하고, 온갖 원초적 색깔과 흑백색이 아낌없이 발현되었으며, 두꺼운 질감의 표현도 넘쳐 난다. 이 그림은 1996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서 열린 바스키아 회고전에 나왔는데, 당시 미국의 권위 있는 미술 월간지인 《아트 뉴스》에서 이 전시를 리뷰 하며 이 작품을 직접 예로 들어, 바스키아의 원초적 표현력이 한껏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어떤 작품이 판매될 때는 이런 기록이 작품 가격에 큰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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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 그의 천재적인 낙서

 

우리가 미술관에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평면의 네모가 어떤 입체적인 감정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미술관에서 본 어머니의 눈물이 그를 미술가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바스키아의 그림은 꼭 아이와 함께 보길 권합니다. 그것은 아이에게 대가의 감동을 느끼게 하겠다는 교육적인 바람 이전에 엄마와 아이가 그림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어보세요. “저 그림은 뭐야?”라고. 아이의 입에서 얼마나 깜찍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동전괴물’부터 ‘화난 코끼리’까지 아이의 해석으로 보는 미술은 더욱 흥미진진합니다. 솔직하고 경이로운 아이의 눈을 발견해 보세요.
바스키아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려서부터 브루클린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을 다녔고, 세 살부터 어머니와 함께 그림을 그렸다. 반항적인 천재였던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맨해튼에서 생활하며 본격적인 거리화가의 길을 걷는다. 10대 후반의 바스키아는 세이모(SAMO: Same Old Shit의 약자)라는 이름으로 도심의 벽과 지하철에 스프레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때론 철학적이고 기지 넘치는 경구와 선언을 썼다. 그의 그림의 출발인 그래피티(Graffitif art)는 스프레이로 그린 낙서 같은 문자나 그림을 말한다. 그곳에는 하위문화 특유의 반항적인 자유로움과 문제의식, 그리고 답답한 현대인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시원함이 존재했다. 그 정신이 바로 바스키아 그림의 철학이다. 바스키아는 돈을 벌기 위해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서 팔기 시작했는데, 앤디 워홀과 당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헨리 겔트잘러가 소호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들어가서 워홀에게 엽서를 팔기도 했다(겔트잘러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내쫓았지만). 당시 바스키아의 작업은 그래피티와 추상 표현주의를 복합적으로 표현했는데, 농구선수, 케네디 암살사건, 그리고 페즈 사탕 같은 대중문화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왜 우리가 그의 낙서 같은 그림에 감동해야 하지 
그의 그림은 ‘이게 뭐야’라고 말할 정도로 찍찍 그어놓은 낙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런 낙서가 주는 감동 때문이다. 감동은 어린아이가 가지는 생명력의 폭발적인 에너지에서 느껴지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난해한 기호와 낙서로 자신 안의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천재라는 칭호를 내려준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단순하거나 변형되어 있고 거리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복잡하고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넘쳐난다. 대중문화적 정보를 이미지와 기호, 그리고 단어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그를 현대미술의 선구자라는 칭을 듣게 만들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는 그의 그림은 해독하기 힘든 암호문 같다. 암호들은 현대미술의 모든 성격을 앞서 나간다. 그것이 그가 천재라고 인정받는 두 번째 이유이다. 
그의 암호문은 현대미술에게 지령을 내린다. 철저하게 대중적일 것. 표현방식에 구애받지 말 것. 그림을 생활 속에 집어넣을 것. 장난 치거나 욕하거나 그림 속에서 철저하게 놀 것. 그리고 스스로 아이콘이 될 것. 

바스키아, 스타 아티스트의 삶 
1985년 ‘뉴욕타임스매거진’ 표지에는 25세 괴짜 미술가의 사진이 실렸다. 검은 아르마니 슈트에 맨발, 한 손엔 붓을 든 채 정면을 응시하는 이는 이미 평론가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스타가 되어버린 거리화가였다. 래퍼이기도 하고 영화배우이기도 하며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바스키아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최연소로 세계적인 현대미술제인 독일 카셀 도큐멘타(1982)와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1983)에 초청받기도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되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대중적인 시선과 내면의 자유의 결핍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도 마약 중독자가 되어 세상을 뜬다.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싶다면 바스키아의 동료이자 세계적인 미술가인 줄리앙 슈나벨이 직접 연출한 영화 <바스키아>를 추천한다. 그곳에서 바스키아는 레게 머리를 삐죽하게 세우고 헐렁한 바지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헐렁거리는 걸음을 걷는다. 그 걸음에서 젊은 예술가의 치열한 삶에 대한 고민을 집어낼 수 있다면 당신은 바스키아를 이해한 것이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현대미술 시장에서도 큰 인기다. 팝아트가 미술시장의 주류를 차지하는 동안 바스키아의 그림도 10억원에서 30억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그의 낙서에서 스타성을 발견한 많은 화상들처럼 당신도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주의를 기울여보자. 천진난만함인지 정치성인지 암호인지 현대성인지, 혹은 천재성이나 광기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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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셸 바스키아

낙서화(Graffitti)란 가장 소외된 곳에서 파괴적인 그리고 사회제도의 규제에 대한 영웅적인 도전행위로서 단순히 문화 파괴행위(Vandalism)으로만 간주 되었었다. 즉, 낙서를 통한 자가존재를 밖으로 드러내는 절박한 자기표현과 자아증명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71년 처음 등장한 'Taki 183'이 지하철 내부에 수없이 쓰여지자 시민들은 그 낙서에 익숙해지고 '뉴욕'지에서 조롱하듯한 취지에서이었지만 어쨌든 'Spin'이란 낙서를 최고 디자인으로 선정 발표하고 이어 낙서 그룹들간의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75년도 거리의 낙서화를 모은 최초의 전시회가 '아티스트 스페이스'에서 열렸다. 그후 81년 '뉴욕/뉴 웨이브' 전시부터 확고한 위치를 갖게되며 언더그라운드 영화배우들이 이스트 빌리지에 'Fun'갤러리를 열어 마침내, 83년 뉴욕 시드니 제니스 갤러리에서 후기 낙서화라는 전시회로써 고급예술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Writer’, ‘Burner’로 칭하고 사이 톰블리, 프랭크 스텔라, 장 뒤뷔페, 잭슨폴록, 그리고 멀리 피카소와 뒤샹에 이어 그들이 실험하지 못한 '대 사회적인 시도'를 성공하게 된 것이다.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iat, 1960∼1988)는 브루클린 태생의 아이티섬의 스페인계 화가이다. 그는17세기에 학교를 중퇴하고 독학을 하였지만, 현재 낙서화가로 같이 활동하는 모든 인재들 중에 가장 혜성같은 스타이다. 1980년 여름에 '타임즈 광장 전람회'의 전시 참가로 비평가의 호의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 전시 직후에 바스키아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방법을 개척해 나갔다. 그래서 곧 그의 드로잉은 거리의 산뜻한 그래픽 이상의 어떤 것-실제로 그것은 '게르니카'를 그린 피카소에게 한정된 것 같아 보였다-을 드러내 보였다. 색채를 먹인 바스키아의 미술은 거대하고 평면화된 아프리카의 가면같은 얼굴을 가진 도식적인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그러한 인물들은 단어와 문구, 화살표와 눈금, 왕관과 활기차게 살아 숨쉬고 있는 배경과 대비된다. 폴케와 살르의 해체주의적인 미술과 마찬가지로 통일성이 다양한 기호, 상징들간의 어떤 논리적인 관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러한 통일성이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매우 많은 상충된 요소들이 방출되는 보편화되어 있는 떨림속에, 그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가진 설득력 있는 거칠음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드로잉과 색채, 구도를 운용하는 그의 개성적인 양식을 차치하고라도 바스키아의 뛰어난 재능은 원시주의와 세련됨, 즉흥성과 제어력, 기지와 야만성 같은 상충된 힘들의 균형을 잡아내는 어떤 선천적이며 배워서 터득할 수 없는 그런 감각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바스키아는 기존의 회화개념을 초월한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표현성을 확장하고 화가의 관심을 내면적인 측면에서 더욱더 자서전적이며 나아가 자신의 부분인 환경과 사회, 정치로까지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의 업적은 회화의 권위와 그로 인한 무거운 짐을 벗겨주었다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순수하고 고귀한 순결함의 솔직한 아름다움은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움에서 나오고 자신의 환경에 대해 받아들이고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희망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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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는 미술전시회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어머니로부터 예술적 감성을 물려받은 바스키아는 예술가의 꿈을 품고 가출. 뉴욕의 거리를 전전하며 벽에 그림을 그리는 낙서화가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선다.

친구 베니의 소개로 화랑의 전기공사를 돕게 된 바스키아는 인기 예술가 밀로를 만나게 되고 이 자리에서 밀로와 같은 인기 예술가가 되리라고 마음 먹는다. 또한 그날 밤 바스키아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미술계의 거물 앤디 워홀과 미술계의 대표적 화랑상인인 브루노 비숍 벨거를 우연히 만나 자신이 그린 포스트 카드를 파는데 성공함으로써 공식화단으로 진입하기 위한 발판을 놓는다.

한 파티에서 바스키아의 그림을 본 미술평론가 르네는 그의 그림에서 천재적 자질을 발견하고 그를 유명한 아티스트로 키워줄 것을 약속하고, 그의 약속대로 바스키아는 뉴욕 뉴 웨이브 전시회에 참가하게 된다. 때마침 바스키아의 그림을 본 화랑업자 브루노 비숍벨거는 바스키아에게 전속계약을 제의하고 바스키아는 자기를 키워준 르네와의 관계로 인해 고민하나 결국은 부르노의 제안을 받아들여 워홀과도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바스키아의 독특하고도 예술성있는 작품세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고 첫 개인전을 갖는 등 바스키아는 유명화가로 성장한다. 그러나 유명세를 타고, 인기가 높아질수록 바스키아의 마음은 쓸쓸하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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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 ( Jean Michel Basquiat - 1960~1988 )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는ㅎㅎ

바스키아입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젊은 현대미술작가입니다.

팝 아트 미술 계열의 천재로 검은 피카소라고 찬사 받으며

낙서와 같은 하위 문화를 예술로 끌어 올린 점은

키스 해링과도 비슷한 부분입니다.

약물 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로 유명하죠~흑..

 

 

 

 

 

천재, 특히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들은 후대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뭔가 신비하고 또 멋지게도 느껴지죠,,

그 죽음의 이면이 비극적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스키아의 작품도 은근 인기가 많습니다.

 

 

 

 

 

낙서같기도 하고 단순한 바스키아의 작품들 역시

타투 소재로도 매력있는데요~

바스키아의 왕관은 바스키아를 모르는 사람들도 한번씩

본 적이 있을만큼 익숙하고 친숙한 대상입니다.

바스키아가 서명 대신 썼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심플하지만 강한 이미지의 바스키아의 왕관은

블랙워크로, 컬러워크 가리지 않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매력적인 타투 소재입니다~

 

 

 

 

어찌보면 단순한 낙서타투같지만

사실은 미술에 대한 이해와 바스키아라는 작가에 대한

동경 등이 담긴 간지 타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음...그냥 다 필요 없고

 디자인이 멋져서 타투로 한다 해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ㅎㅎ

 

 

 

 

검색해보면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바스키아의 왕관으로

타투한 모습들인데요~

이 공룡녀석도 일부 거드는 작품입니다 ㅎ

 

 

 

 

역시 왕관은 빠지지 않네요~

바스키아의 공룡은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감으로

패션타투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입니다.

미니미니하게 작게도 가능한 소재입니다.

 

 

 

 

 

무제( skull )

얼굴같기도 하고 해골같기도 한 바스키아의 작품입니다.

 

 

 

 

 

이렇게 복잡다난한 작품을 타투로 새긴 모습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분들이 선호 할 것 같지는 않은 타투작품인데요~

타투와 미술의 경계가 거의 다 허물어진 요즈음엔

정말 타투로 표현하지 못할 미술 작품은

없다고 보입니다.

 

 

 

 

지극한 팬이라서 아예 바스키아의 포트레이트를

타투로 새긴 모습도 보이네요 ㅎㅎㅎ

 

 

 

 

 

그래도 바스키아의 작품으로 타투를 한다면

역시 역시

왕관만한 소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뭐 사실 타투가 아니라도 팝아트 장르의 작품들은

하다 못해 팬시 제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말이죠~

아무래도 회화적인 느낌보다는 디자인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충 그린 왕관 미니타투로 보이지만

사실은 천재의 작품을 새겼다고나 할까요ㅎㅎ

 

 

 

 

 

생각해보면 낙서랑 미술 작품이랑 종이 한장 차이인걸까

싶기도 합니다.

시대를 잘만나거나? 이끌어줄 귀인을 만난다거나?

운이 좋아서 당대에 천재로 평가 받든

혹은 사후에 천재로 평가 받든?

생각해 보면 어렵습니다 ㅎㅎㅎ

 

 


 

 

요즈음은 이지워크라고 불리는 간결한 타투들도

엄청 인기가 많은 걸 보면

(그 안엔 깊은 감각이 내재된 경우도 많습니다)

시대도 중요하고 그 시대의 수요도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타투의 장르가 다양해지고

미술과 경계가 없어지는 점은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이번 포스팅도 무척이나 겉핥기 식의

내용이었지만 바스키아의 작품으로

타투를 생각해 보는 분들에겐 조금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간단하게나마 미술작품이

타투로 새겨지는 예를 몇가지 올려보고 있는데요~

다음엔 에곤 쉴레가 어떨까 생각만인 생각을 해보며

이번 포스팅을 마칩니다 ㅎㅎㅎ

 

/홍대타투[잉크앤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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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Michel Basquiat

(1960 ~ 1988)​

 

 

낙서 화가! 장 미쉘 바스키아~


"열일곱살 때부터 나는 내가 스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나는 내 모든 영웅들 찰리파커, 지미핸드릭스 등을 생각하곤 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해서 유명해졌는가를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를 검은 피카소라고 불렀다.

 

파블로 피카소의 추구하는 어린 아이의 순수성이

바스키아의 작품 속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만큼..그의 그림은 영향력이 어마어마 했다는 것!

 

앤디워홀과 함께 손을 잡고!

 

1970년 대 후반 미술계를 쥐어잡고 흔들어 놓은! 장 미쉘 바스키아!

 

그를 미술계의 스타로 만들어준 사람은!

 

앤디워홀이었다!

 

그의 재능을 먼저 알아본 앤디워홀..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다는 말 처럼..

 

바스키아는 앤디워홀의 발돋음을 통해 미술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그의 그림들의 특징은 어린아이가 막 낙서를 한 것 같은 드로잉과 색채기법이다.

 

기법이라고 말하기도 그런 낙서로 칠해진 그림이다.

 

그의 작품에는 상징적인 것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한 상징적인 소재는 흑인 혈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자신이 전통 흑인 혈통이기에~

 

또한~

 

그의 작품에서 '왕관'이 등장한다.

그의 왕관은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수여하는 존경과 찬미의 상징인 동시에~

 

권위! 소유권! 진품!

자신의 인장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긴 하지만

바스키아의 그림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담겨있다.

그 순수함은 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선 그 무엇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더 나아가 타인을 아름다워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자신의 순수함을 소중하게 아름답게 가꾸고 유지시켜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의 느낌있는 작품들을 잠시 감상해보세요~

 

 

전 그의 낙서 처럼 그려진 작품을 좋아한답니다.

 

우선 어둡고 난장판이고 복잡미묘하기도하고 어떨 땐 무섭기도한 그의 그림 속에

'한 어린 아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느낌있는 낙서 같은 패인팅~

 

 

여러분들은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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